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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간만에 레마르크의 '개선문'을 펼쳤다. 에리히 M. 레마르크를 떠올리면 아버지가 생각난다. 아버지께서 좋아하셨던 작품은 '서부전선 이상없다'였다. 아마도 아버지의 개인사와 맞물린 면이 없지 않아 있기 때문이리라. 어머니께서는 아버지께서 책을 싫어하신다고 말씀하시지만 가만 생각해보면 그래도 책을 좀 읽으신 편이 아닐까 싶어질 때가 있다.
'개선문'은 펼칠 때마다 삭막함이 느껴지는 책이다. 버석버석 마른 것들이 부딪치는 소리가 들릴 것만 같은 메마름과 삭막함이다. 아니 어쩌면 잘 마른 낙엽이 부서지기 바로 전의 상태를 보는 것 같기도 하다. 시청각적으로 나를 휘감고 도는 이 메마름과 삭막함은 매우 매력적이기도 하다.
그래서 나는 가끔 이 느낌에 대해 생각하곤 한다. 어떻게 보면 무모할 정도의 사랑이 묘사되기도 하지만, 흐린 하늘색과도 같은 이 책의 분위기는 위기감을 느끼게도 하고 때로는 각박함을 느끼게도 한다. 이 모든 것들이 연쇄작용이 되어 나를 휘어 감는다.
라비크가 비틀거리는 조앙 마두를 붙잡아 주면서 시작되는 이 소설은 세계 제 2차 대전을 앞에 둔 파리를 음울하면서도 현실적으로 그리고 있다. 정치적 이데올로기로 인해 조국을 버린 자들, 혹은 국적을 박탈당하고 정처없이 떠돌아야 하는 사람들의 군상이 이 파리를 배경으로 펼쳐진다.
망명객이라는 신분, 솔직히 말하면 불법체류자인 라비크는 뛰어난 의술을 가지고 있지만 그 실력으로 파리에 안착할 수 없다. 그의 신분이 불법체류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력이 있어 그런대로 파리에서의 삶을 영위할 수 있다. 그런 그를 조금 양심적으로 이용하는 베베르와 착취하는 듀랑이 존재하고 피난민들을 받아들인 호텔 앙떼르나쇼날이 있고 그 호텔에서 함께 거하는 주변인들이 있다. 바와 유곽을 겸한 오시리스도 존재하고 라비크는 그곳에서 접대부들을 검진하기도 한다. 어찌 보면 조심스러운 생활이지만 이 생활에 조앙 마두가 끼어들면서 조금 더 생기를 얻고 조금 더 답답해지고 조금 더 위태해지고 조금 더 어두워진다.
갑자기 그것은 가슴을 설레게 하는 절망적인 아름다움으로 느껴졌다. 그는 언젠가 한 번 지금과 똑같은 아름다운 표정을 그것도 순간적이지만 본 일이 있었다는 것이 생각났다. 그 여자의 방에서 자던 날 밤의 일이었다. 하지만 그때 그는 취기때문에 생긴 부드러운 착각이라고만 믿었던 것이다. 그것은 그후 이내 흐려져서 없어지고 말았다. 이제 그것이 그대로 완전히 되살아나서 나타나있다. 그때보다도 훨씬 또렷하게 -p117
케이트와 함게 들른 카페 세헤라자드에서 라비크가 조앙을 보고 느낀 감정을 읽다보면 이 '절망적인 아름다움'이라는 구절에서 미래를 장담할 수 없는 한 남자의 위태로움이 느껴진다. 마치 언제나 바로 자신의 앞에 낭떠러지가 존재한다고 느끼는 듯. 이 '절망'은 어쩌면 그를 내내 감싸고 있었을 것이다. 그가 꾸는 악몽속에서 절망이 느껴지고 그는 능란하게 세파를 헤쳐나가지만 그것이 생에 대한 집착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마치 억눌린 불꽃이 겨우 겨우 자신의 생을 이어가듯이, 그저 타오르고 있기에 꺼질 수 없다는 듯이.
마지막 불빛을 둘러싸고 나방과 모기 떼들이 춤추는 일순간의 무도-그것은 모든 모기들의 춤이 그러하듯 보잘것없는 것이며, 카페에서 흘러나오는 경음악과 같이 어리석다- 자그마한 여름의 심장이 벌써 서리맞은 10월의 나비처럼 세계는 아무 짝에도 쓸 수 없는 무용지물이 되어 버린 것이다. 그래서 세계는 사신의 큰 낫과 큰 바람이 닥쳐오기 전에 얼마 안되는 시간을 춤추고, 지껄이고, 희롱하고, 사랑하고, 속이고, 어지럽히고 있는 것이다. -p251
가슴이 시리게 허무감이 몰려오는 문장들이 이렇듯 튀어 나온다. 대체 삶이란 어떤 것인가? 라비크가 추방당했다가 다시 파리로 돌아왔을 때, 그리고 다시 자신의 환자였던 케이트를 만났을 때 둘의 대화는 의미심장하다. 피렌체에서 돌아온 케이트에게 이탈리아의 파시즘은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지만 라비크는 오히려 담담히 말할 따름이다.
"그렇게 이야기할 수도 있소. 그러나 곧 달라질 거요. 어쩌면 붉은 빛으로 통일이 될 지도 모르오."
하지만 나는 이 책을 읽을 때면 라비크의 저 허무함과 절망과 삭막함 속에서 삶에 대한 욕구가 가끔은 꺼질 것 같은 불꽃이 아닌 다른 형태로 피어날 때가 있다고 느낀다. 그것이 인간의 본능인 것처럼. 그래서 아래의 문장을 읽을 때면 가끔 눈물이 흐를 때가 있다.
그는 단지 자기가 살아 있다는 사실만을 알고 있을 뿐이었다. 그렇다. 살아있다! 그는 여기에 있다. 생명이 다시 그를 소유하고 그를 흔들고 있다. 그는 이미 방관자도 국외자도 아니다. 억제할 수 없는 감정의 위대한 광휘가 마치 불길이 용광로의 파이프를 통해 치닫듯 그의 혈관을 쏜살같이 내닫고 있다. 자기가 불행하든 해복하든 그것은 아무래도 좋을 것 같았다. 그는 살고 있으며 또 살고 있다는 사실을 몸 전체로 느끼고 있다. 그리고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은가! -p374
어떻게 저와 같은 삶의 찬가에 감정이 움직이지 않을 수 있을까? 조앙과의 사랑도 하아케에 대한 복수도 책의 전개 따윈 상관없이 나는 라비크의 심리적 변화에 울컥했다. 인생의 풍파를 다 겪은 라비크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쐐기처럼 박히기 때문이다. 조앙 마두의 죽음 이후 프랑스의 선전포고 끝에 스스로 자신의 이름 '루드비히 프레젠브르크'란 이름을 밝히고 수용소로 끌려가는 라비크의 말처럼 이제 프랑스는 그들을 추방하지 않을 것이다. 담담히 떠나는 라비크의 시선은 적당히 냉정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자신을 찾아 헤매는 여정의 막바지에서 자신을 찾고 자신을 규정하는 한 인간의 새로운 출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지막의 담담함이 오히려 더욱 생동감있게 느껴진다. 비록 라비크가 파리를 떠날 때 광장은 어둠 뿐이고, 너무나 어두워 개선문조차 보이지 않았을지라도 그것이 그저 의미없는 어둠이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