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언제부턴가 무라카미 하루키 작품들이 하나둘씩 전자책으로나오기 시작하네요. 하루키 작품은 저의 어렸을적 삶의 향수를 불러일으켜줍니다. 그자체 내용도 좋지만 그 소설을 보는것만으로도 많은것들을 생각나게 해줍니다. 아무리 보아도 미워할수없는 소중한 작품입니다. 예전작품들 댄스댄스댄스 등 많은 하루키 작품들도 전자책으로 계속 나오길 기대합니다. |
|
하루키 서사의 입문이라고 할 수 있는 책이다. 김난주 번역가는 만약 한국인이 하루키 소설을 읽는데 있어서 없어서는 앋될 존재이다. 그녀의 번역을 통해 하루키월드의 스산함과 공허함, 다시는 되돌어갈수 없는 잃어버린 시간들에 대한 잔잔한 아픔이 그녀의ㅜ번역을 통해서 느껴지기때문이더 |
| 처음 이시리즈를다읽고나서 바로 했던 행동은 작품출간연도검색이었다. 이런 참신한설정이 수십년전에 나왔을 줄이야. 닫힌작품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유일하게 아쉬운점은 완결성이다. 그것빼고는 읽었던 이틀이 행복했던 작품 인생의 책중 열손가락안에든다. |
| 하루키의 글들을 읽을 때 현실세계에서 판타지적인 부분들이 나올때 약간의 위화감? 을 느꼈다가 세계관에 푹 빠지고는 했는데 이 소설은 처음부터 현실적이지 않은 부분들이 나와서 오히려 더 몰입해서 읽었어요. 이런 생각들을 하고 그걸 하나의 세계로 엮어 나오는 모습들이 놀라워요 |
|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는 1980년대에 쓰인 무라카미 하루키의 4번째 장편소설로 제21회 다니자키 준이치로 상을 수상했다고한다.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와 "세계의 끝"의 2개의 이야기를 따로 풀어나가는 구성으로 되어있으며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파트는 챕터명이 세 단어로 되어있고, 세계의 끝 파트는 챕터명이 한 단어로 되어 있다고한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 중에서도 비일상, 특히 오컬트 요소가 매우 강한 작품으로, 일상에서 비일상의 세계를 넘나드는 묘사가 아주 뛰어나다고한다 대단한 작품이 35주년을 기념하여 새롭게 출간되었다는데 정말 좋아보인다.
|
|
무라카미 하루키의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는 작가가 30대이던 1980년대에 쓰인 작품입니다.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라는 두 개의 이야기가 서로 교차하면서 진행되는 형식으로 제 21회 다니자키 준이치로 상을 수상하고 작가의 작품 중에서도 특별한 작픔입니다. 이 책은 출간 35주년을 기념하여 새로 출간된 책이며, 작가의 개고를 거친 새 판본을 번역한 완전판이라고 합니다. 이번 출간을 기념 특별 서문이 있다는 것도 이전의 책과는 조금 다른 점일 것 같습니다. |
| 하루키의 책에 나오는 책들의 주인공은 아무래도 하루키를 닮아있다. 내가 추측하기에는 그 주인공들의 취향이나 행동 요소 하나 하나에 작가의 것들이 조금씩 녹아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 중인공들 중에서도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에 나오는 주인공은 작가 하루키와 가장 닮은 캐릭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 더욱 재미있게 책을 읽었다. 그리고 작가가 궁극적인 바람이 이 책에 들어있는 것 같아 매우 흥미롭게 읽었다. |
|
2권에서는 본격적으로 두 세계—‘하드보일드 원더랜드’와 ‘세계의 끝’—의 연결 고리가 드러나며, 이야기의 철학적 깊이가 더해진다. 주인공은 자신이 속한 시스템과 기억, 그리고 자아의 정체성에 대한 질문을 마주하게 되며, 현실과 환상, 이성과 무의식이 복잡하게 얽힌 구조 속에서 끝을 향해 나아간다. |
|
만약 세계의 끝이 있다면 그곳은 막혀 있을까 열려 있을까. 끝이라는 말을 떠올리면 막혀 있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꼭 그렇지도 않다. 열려 있다고 해서 연결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만약 그곳이 오직 물밖에 없는 영원한 바다라면, 어떤 생물도 육지도 없이 오로지 물로만 채워진 곳이라면 시간의 차이는 있어도 결국에는 가라앉게 될 것이다. 더 이상 나아갈 수 없다는 점에서만 보면 닫혀 있거나 열려 있거나 똑같다. 단지 한계에 대한 인식만 다를 뿐이다. 끝이라는 것은 완강한 것인가 아득한 것인가. 단단한 벽으로 말미암아 더 나아갈 곳이 없다고 알려주는 것인가 아니면 끝이 없음을 보여주어 스스로 절망에 빠지게 하는 것인가. 이 책에서 세계의 끝은 입구만 있고 출구는 없는 마을로 나왔다. 한 번 들어가면 두 번 다시 나올 수 없는 곳. 설령 마음이 바뀌어 나가려고 해도 입구를 지키는 문지기가 내보내 주지 않는다. 그는 들어오는 자에게는 관대하지만 나가는 자에게는 냉정하다. 그렇다면 이 마을을 나갈 수 있는 방법은 문지기와 싸우거나 혹은 속이는 방법뿐인가. 그렇지는 않다. 이 마을의 입구는 분명 하나뿐이지만 입구 외에 바깥으로 이어진 통로가 하나 더 있다. 그건 바로 남쪽의 물웅덩이다. 이곳이 어디로 연결되어 있는지, 어디론가 연결되어 있기는 한 것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알 수 있는 것은 마을 바깥으로 물이 흐르고 있다는 사실뿐이다. 주인공의 그림자는 이곳을 통해 마을을 나간다. 출구라고 할 수는 없지만 마을 안에 있으면서 마을이 아닌 곳도 있다. 바로 숲이다. 숲은 그림자가 죽지 않은 사람들이 모여서 사는 곳이다. 그곳은 마을의 바깥에 있으면서 마을과 완전히 차단되어 있다. 그곳에 들어간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림자는 사람의 마음을 의미하고, 이 마을은 마음이 없는 자들이 사는 곳이다. 숲에서 사는 사람들은 공동체를 포기하는 대신 마음을 지켰다. 누가 옳은지는 알 수 없다. 다만 마을 바깥에 숲이 있다면 이 마을을 세계의 끝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끝은 끝이다. 너머에 무엇이 있어서는 안 된다. 그런데 마을은 그 너머에 정체가 밝혀지지 않은 숲과 물이 있다. 그렇다면 세계의 끝은 숲 너머이거나 물 너머가 아닐까. 여기서 중요한 것은 대답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질문이다. 세계의 끝이 숲 너머이거나 물 너머일지도 모른다는 질문은 지금 이곳이 끝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숲과 물은 모든 것이 끝났다고 여겨지는 순간에도 여기가 정말 끝인가, 라고 스스로에게 묻게 하는 무엇이다. 숲은 마음을 지킨 자들이 도피한 곳이고 물은 그림자가 자유를 찾아 떠난 곳이다. 말하자면 숲은 사라지지 않는 마음이고 물은 자유를 향한 열망이다. 주인공은 그림자, 즉 마음으로 말미암아 이 세계의 완전성이 불완전한 것임을 알아낸다. 요컨대 마음이란 깨어 있는 정신이다. 그것은 완전을 추구하는 대신 살아있음을 추구한다. 말하자면 숲으로 간 자들은 깨어있기 위해 부자연스러운 연대를 거부하고 유폐를 선택한 자들이며, 물로 뛰어든 그림자는 자유를 위해 공포를 이겨낸 자이다. 이 두 가지가 모든 것이 끝이라고 여겨지는 순간에도 그것을 끝이 아니게 만든다. 아이러니하지만 세계의 끝은 세계에 끝이 없음을 알려주기 위해 존재한다. 마지막 순간에 주인공과 그림자는 헤어지는데 흥미로운 것은 그림자가 떠났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그로 인해 주인공의 마음이 유지된다는 점이다. 이것이 가리키는 바는 명확하다. 마음, 즉 깨어 있는 정신이란 자유를 위해 죽음의 공포를 이겨낼 때 비로소 유지되는 것이다. 그림자는 자유를 위해 출구가 있는지조차 모르는 물 속으로 뛰어 들었다. 요컨대 자유란 그 너머에 있을 유토피아가 아니라 그 너머를 상상하고 뛰어드는 행위 그 자체이다. 세계는 아무것도 보장해 주지 않는다. 확신을 갖는 건 개인의 몫이다. 어떤 보장도 없는 목적지를 향해 생명을 건 모험을 시작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인간은 자유로워지는 셈이다. 주인공은 이 자유로 말미암아 숲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자유는 행복을 가져다주지 않는다. 단지 마음을 지켜줄뿐이다. 세계의 끝이 세계에는 끝이 없다는 사실을 알려준다는 역설은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일단 이 두 개의 단어는 서로 맞지 않는다. 하드보일드는 피가 튀고 사람이 다치는 끔찍한 일이 벌어져도 놀라거나 흥분하지 않는 건조한 태도다. 반대로 원더랜드는 놀라움과 경이로 가득 찬 세계를 말한다. 두 단어를 합치면 건조한 경이 혹은 냉정한 놀라움이 되는데 나는 이 말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지 못한다. 다만 이렇게는 생각할 수 있다. 우리는 어떻게 해서 놀라움과 경이로움 앞에 태연해지는가. 그것이 나와 무관한 것이라고 여길 때 그렇게 되지 않을까. 그렇다면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란 한 애니메이션의 제목을 빌리면 ‘나만이 없는 세계’인 것일까. 그럴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적어도 우리의 주인공에게 이 세계는 너무도 적대적이기 때문이다. 지상에서는 ‘조직’과 ‘공장’의 사람들이 그를 위협하고 지하에서는 야미쿠로라는 괴물이 덮칠 틈을 호시탐탐 엿본다. 지상의 인물들은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을 하고 지하의 야미쿠로는 알아들을 수 없는 울음소리를 내지만 그것은 납득할 수도 이해할 수 없다는 점에서 결국은 같은 언어이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주인공에게 이 세계란 낯선 외국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곳은 흥미를 자극하고 호기심을 건드리는 관광지가 아니라 오늘 내가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위험한 타국이다. 이곳은 지상에는 비밀 조직이 있고 지하에는 괴물이 사는 그야말로 신비로운 세계지만 그 신비는 기대와 경이가 아닌 두려움과 위협으로만 다가온다. 그 두려움에 맞서기 위해서는 이곳이 나와 무관한 곳이라는 냉정하고 건조한 태도가 필요한 것인지도 모른다. 사춘기 때 나는 내가 속한 세계가 현실이 아니며 실제로 내가 있을 곳은 어딘가 따로 있을 거라는 생각을 자주 했다. 판타지나 무협에 몰두했던 건 그래서였을 것이다. 그것은 비현실에 대한 열망과 현실에 대한 냉소로 나타났는데 어쩌면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란 사춘기의 소년에 눈에 비친 현실인지도 모른다. 그곳에는 분명 놀라운 일도 있고 특별한 일도 있다. 현실이라고 해서 원더랜드가 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단지 그런 일들이 나와 무관할 뿐이다. 나는 나만이 없는 세계를 견디기 위해 반대로 나만 있는 세계를 만들어야 했다.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의 주인공 역시 마지막에는 세계의 끝이라 불리는 자기만의 완결된 의식으로 들어간다. 사춘기의 비현실은 시간이 지나면 현실에 자리를 내준다. 만약 그렇지 않으면, 빠져나올 시기를 놓치게 되면 자폐가 된다. 그렇다면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의 주인공은 자폐가 된 것일까. 그럴지도 모르지만 이상하게 그런 기분은 전혀 들지 않는다.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의 주인공은 뭐랄까, 할 일을 모두 마친 후에 담담하게 생을 닫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현실로부터 도망치는 게 아니라 주어진 운명을 받아들이는 태도에 가깝다. 조직과 공장으로부터 도망치고 무엇보다도 필사적으로 야미쿠로에게서 벗어나려고 했던 과거의 행적을 떠올리면 이러한 태도는 고개를 갸우뚱하게 한다. 그는 삶에 대한 열망이 없는 자가 아니었다. 그런 그가 왜 주어진 운명을 받아들이듯 차 안에서 세계의 끝으로 가는 것일까. 그리고 만약 운명에 순응하기로 결정했다면 세계의 끝에서 그림자를 죽이지 않고 왜 숲에서 사는 삶을 택한 것일까. 나는 그 이유를 나의 사춘기에서 찾는다. 현실을 외면하고 비현실에 몰두한 것은 그 현실이 나만이 없는 현실이었기 때문이었다. 비현실이 나를 제외하고는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것과는 반대로. 말하자면 나는 세계 속에서 소멸할 것 같은 나를 지키기 위해 비현실로 몸을 피했던 것이다. 이를 두고 마음을 지키기 위해서 했던 일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까.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의 주인공이 조직과 공장 양쪽에 쫓기게 된 것은 그가 저지른 어떤 과오 때문이 아니라 바로 그 자체가 실험의 중요한 샘플이었기 때문이다. 붙잡히면 나는 인간이 아니라 재료가 될 것이다. 박사의 말에 따르면 주인공에게는 두 가지 선택이 남아 있었다. 하나는 지금 죽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세계의 끝으로 들어가는 것. 이 두 가지 방법은 모두 마음을 지키는 일이다. 그러나 죽고 나면 아무것도 느낄 수가 없다.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죽음을 선택하는 경우도 얼마든지 있지만 죽음은 그야말로 끝이다. 어떤 경우에도 돌아오지 못한다. 그러니 주인공이 죽음 대신 세계의 끝을 선택한 것은 세계의 끝 너머에 있을 귀환을 위해서다. 그는 마음을 지켜내서 언젠가 박사의 손녀딸과 도서관 사서에게로 돌아오려고 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주인공은 운명을 받아들인 게 아니라 삶을 계속 살아갈 수 있는 가장 높은 가능성을 택했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그는 왜 그림자와 함께 마을을 탈출하지 않았을까. 만약 물웅덩이를 통해 마을을 나온다면 다시 현실 세계로 복귀해서 박사의 손녀딸도 도서관 사서도 만날 수 있었을 텐데.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그는 세계의 끝에서 도서관의 여자를 만났고 그녀를 사랑하게 되었다. 이 마음을 버려두고 물웅덩이를 통해 돌아가는 것은 역설적이지만 그가 그토록 지켜내려고 했던 것을 버리고 귀환하는 것과 같다. 그때 다시 만난 박사의 손녀딸과 도서관 사서는 더 이상 그가 돌아올 곳이 아닐 것이고 세계는 다시 위협으로만 가득 찬 곳이 될 것이다. 요컨대 마음을 지키기 위해 그는 마을에 남는다. 세계의 끝은 끝이 아니고 원더랜드는 원더하지 않다. 우리가 마음을 지키고 있을 때 끝이라고 생각했던 모든 곳은 끝이 아니게 될 것이고 마음을 잃어버린 곳에서 원더랜드는 하드보일드해질 것이다. 마음은 언제나 현재에 있다. 원래 세계에서 기다리는 박사의 손녀딸과 도서관 사서는 주인공이 돌아갈 곳이었으나 세계의 끝에서 만난 도서관 여자로 인해 그의 귀환지는 바뀌었다. 이것은 이렇게 읽을 수도 있을 것이다. 박사의 손녀딸과 도서관 사서로 인해 주인공은 마음을 현실에 잘 보관한 채 몸만 세계의 끝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그러나 도서관에서 만난 여자로 인해 바깥에 두었던 마음은 세계의 끝으로 들어온다. 그리하여 세계의 끝은 끝이 아니게 되고 주인공은 돌아갈 곳은 없어진 대신 살아가야 할 곳이 생겼노라고. 우리가 마음을 잃어버리지 않으려고 하는 이유는 마음이 앉았던 자리가 언제든 내가 돌아갈 수 있는 자리라고 생각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마음은 언제나 현재에 존재한다. 우리에게는 물론 돌아갈 곳이 필요하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필요한 것은 살아갈 곳이다. 2024년 3월 11일부터 2024년 3월 20일까지 읽고 생각하고 쓰다 |
|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는 예전에 종이책으로 읽었고 계속 소장하고 있지만 전자책으로 읽는 느낌은 또 어떻게 다를지 궁금해서 따로 구매하게 되었습니다. 전자책으로 읽으니 기분상 좀더 현재와 가까운 이야기인 것처럼 느껴졌고 예전 작품 같은 느낌이 많이 들지 않아서 흥미로웠습니다. 읽다보면 자연스럽게 그 세계에 빠져들게 되고 어느새 뒷내용을 궁금해하게 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