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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긴 글이지만 차분하게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책을 쉼 없이 읽어 내려갔다. 책을 놓는 순간 느껴지는 쪽팔림, 불쾌감과 아울러 분노 같은 것이 치밀어 오르는 것을 참느라 마음을 한참동안 다스려야 했다. 이 책은 국가상징 바로잡기의 일환으로 국화(國花)인 무궁화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그러나 무궁화에 대한 문제제기는 사실상 무궁화를 소재로 하고 있는 국가(國歌)에 대한 문제제기로 바로 가게 되어 있다는 점에서 매우 무겁고 신중한 주제일 수밖에 없다. 이러한 점에서 근대 이후의 국가체계를 갖추어나가는 여러 나라들이 국화(國花)와 국가(國歌)를 정하는 행위가 무엇을 위함이고, 어떠한 절차와 무엇에 기초해서 진행되었는지를 먼저 생각해보았다. 그리고 우리가 국가와 국화를 정하는 과정들이 상식적인 절차를 거친 것이었나를 다시 생각해봤다. 다른 것은 몰라도 국가와 국화가 그 나라의 역사성과 대표성을 반영하고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바로 이러한 것에 문제제기를 강력하게 해주는 주제들을 이 책에서 제공하고 있다. 어렸을 때의 일이다. 집 앞의 친척집 텃밭의 울타리에 몇 그루의 무궁화가 심어져 있었다. 꽃잎은 하얗고 꽃중심은 붉은 빛이 진하여 집에서는 그것을 “눈에 피”라고 부르며 쳐다보지 말라고 하였다. 보면 그와 같은 눈병이 난다는 것이다. 나라꽃인데 왜 천덕꾸러기 신세가 되었을까 하는 안타까움을 가진 기억이 있다. 아마도 나라꽃인 무궁화를 성장기까지도 화면으로 말고 직접 접하지 못한 사람들이 꽤 있을 것이다. 흔하게 있던 꽃은 결코 아니었으니까. 그리고 2000년대가 넘어서 지자체를 중심으로 보급이 좀 되어나갔던 것 같다. 나라꽃이 왜 이렇게 보기 힘든 꽃이고 일부러 보급을 통해야만 접할 수 있는 꽃이 되었을까? 이런 작은 의문에서 글의 진도를 나아가보고자 한다. 1. 먼저 저자는 한반도에서 무궁화에 대하여 몇 단계로 구분하여 생각할 수 있다고 제안한다. 일단, 한반도의 자생식물은 아니라 해외에서 도입되었다는 점. 임진왜란(1592)에서 청일전쟁(1894) 사이에 도입이 되기 시작했으며, 본격적으로 도입된 시기는 갑오경장(1895)에서 한일합방(1910)사이이며, 최고 전성기는 일제강점기(1910~1945)라고 주장을 한다. 무궁화의 군락지는 중국의 중남부의 12개성이며, 일본의 중부인 와카야미현과 야마구치현이며, 우리나라에는 군락지가 없다. 그리고 재배가능지역은 중국은 중남부 18개성, 일본은 전역, 우리나라는 남한 땅에서만 재배가 가능한 식물이다. 이러한 식물의 꽃이 “무궁화 삼천리”라는 노랫말과 함께 우리의 뇌 속에 깊이 박히게 된 과정은 과연 무엇 때문일까? 2. 일본엔 3종의 수직적 비공식의 나라꽃이 있다고 한다. 법률적 근거는 없지만, 백제의 후손이라고 전해지는 왕실에서 사용하는 국화(菊花), 정부가 사용하는 오동, 민간에서 인식하고 있는 벚꽃이 비공식적으로 나라꽃으로 여겨지고 문양 등으로 사용되고 있다. 그렇다면, 일본에서 무속과 결합하고 널리 길러지고 산업적으로도 많이 응용되고 있는 무궁화는 과연 무엇인가? 일본의 이세신궁, 오오미와신사, 야스쿠니신사, 근화천신궁에 만발한 무궁화는 무엇인가? 일본최대의 종교이자 토착신앙인 신토의 부적으로 사용되는 무궁화는 무엇인가? 가정집에 심어진 수많은 무궁화, 웨딩드레스에 사용된 무궁화, 각종 잡화에 사용되는 무궁화, 무궁화지장보살 등 일반에게 널리 사용화 되는 무궁화는 무엇을 말하는가? 무속의 영역과 일반의 영역에 자리 잡은 무궁화 히노마루는 1592년 임진왜란 때 배에 걸려 선을 보인 뒤에 메이지유신(1868)에서 군국주의의 길과 함께 화려하고 위력 있게 변신한다, 메이지는 1870년 히노마루(흰색바탕에 동그란 붉은 원이 들어간 무궁화)를 형상화한 일장기를 국기로, 소우탄(흰색바탕에 가운데 붉은 색이 별이 폭파되어 빛이 번지듯 한 모양의 무궁화)를 형상화한 욱일기를 군기로 제정했다. 1889년 메이지는 ‘대일본제국헌법’을 공포했다. 그리고 제국헌법 서문 첫머리에 ‘천양무궁(天壤無窮, 하늘과땅처럼 무궁함. 일왕의 지위는 天壤無窮의 신칙(神勅)에 의하여 영원하다. 일왕 영토의 무한한 확장을 표현) ’을 명기했다.1890년 교육칙어 315자를 발표하여 우리의 국민교육헌장처럼 각급 학교에서 외우게 했다. 내용은 “ 천황 짐이 생각하건데,... 신민은 항상 국헌을 존중하고 국법에 따라 일단 유사시에는 의용으로 봉공함으로써 천양무궁한 황운을 보필해야한다.”라고 되어 있다. 결국 1868년 메이지 유신부터 1945년 패망까지 일본은 천양무궁으로 무장되고 움직여지는 시기였다. 바로 그러한 일본의 제국주의적 천양무궁의 상징으로 무쿠게(ムクゲ, むくげ)가 법률적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3. 그렇다면 무궁화(無窮花)에 대해서 일본의 영향이 확대되기 전엔 과연 우리에게 무엇이었을까? 우리나라는 무궁화나무를 槿(근), 목근(木槿)으로, 무궁화꽃을 근화(槿花)로 표기하였다. 저자는 무궁화가 고전문학, 고전미술, 고전음악에도 전혀 사용되지 않았다고 한다. 무궁화의 존재를 어떤 이들은 산해경(山海經)에서 찾고 군자국을 우리나라로 해석하며 근화가 우리나라에 고대에서부터 있었음을 주장하는 이들이 있는데, 군자국, 군자지국이 반드시 우리나라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 이유는 산해경 18권 해내경편에 조선(朝鮮)이 별도로 구체적으로 언급이 되고 있어서 군자국이 우리나라라는 설명을 증명해주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조사결과 고금주, 구당서, 삼국사기, 삼국유사, 제왕운기 등에도 전혀 무궁화에 대한 언급은 없으며, 유숙(1827-1873)의 그림 장원홍은 무궁화가 아니고 목단이라고 주장을 한다. 남궁억 선생이 무궁화를 보급운동을 하다가 일경에 의해 체포되었다는 이야기도 가짜임을 밝혀낸다. 남궁억 선생의 십자가당 사건의 심문내용을 인용하면서, 일경이 남궁억 선생을 공산당원으로 분류하여 감시하고 처리하였음을 증명하고 무궁화 보급운동은 체포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것임을 증명하고 있다. 그리고 무궁화에 대해 나중에 꿰어 맞추듯 한 여러 주장들에 대하여 실증적인 자료를 들어가면서 허구를 증명하고 있다. 메이지 시대 이전의 조선에서 무궁화(槿花)를 읊은 시는 정약용과 송웅 간에 주고받은 시에 무궁화(槿花)가 그려져 있을 뿐이라고 주장한다. 여기에서 정약용은 천박한 자질에 활기도 없고 빈 골짜기에 버려질 꽃이라고 악평을 하고, 송웅은 비열한 자질로 울타리에나 들어서는 것이 제격이며 고명한 집에는 어울리지 않고 서투른 화가가 그린 볼품없고 살만 찐 뚱보 같은 여인 같다고 악평을 추가했다. 이렇듯 무궁화는 우리와는 별로 관련이 없는 꽃이었다. 그런데 백과사전을 검색해보면 근원도 없이 ‘무궁화’라는 말을 등장시키고, 이 단어가 마치 일본의 무쿠게(ムクゲ, むくげ)라는 말로 역으로 전파된 것이 아니냐는 추론으로 확장을 하고 있다. 이렇게 소설을 써도 되는 것인지. 4. 동아일보,1925.10.21.일자에는 “윤치호가 애국가의 후렴인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이라는 구절이 끼일 때에 비로소 근화(槿花) 즉 무궁화를 [無窮花]라고 쓰기 시작했다.”라고 하고 있다. 결국 무궁화는 윤치호에 의해서 사용되기 시작했다는 말이다. 그러면 무궁화는 어디에서 어원을 찾아야 한단 말일까? 저자는 무쿠게(むくげ)라는 말이 원래 팽창의 뜻을 가지고 있는데 윤치호가 무쿠게(むくげ)에서 차용을 하는 과정에서 오역을 통하여 팽창화가 아닌 무궁화로 작명을 하게 되었을 것으로 추측을 하고 있다. 아무튼, 윤치호에 의하여 무궁화라는 신조어가 탄생이 되고 그 이후에 현재까지도 그 단어는 우리 사회에서 중심단어로 사용되고 있다. 1880년-1899년 일본유학시절에 이토 히로부미를 멘토로 삼고 그와 내밀한 관계에 있던 윤치호는 무궁화를 애국가의 가사에 넣고 우리나라꽃으로 신분 세탁하는 작업을 수행했는데, 무궁화가 한반도에 처음 등장한 것은 1896년 11월21일 독립문 정초식 때에 배제학당 학도들이 부른 ‘무궁화 삼천리’ 후렴구에서부터 등장하였다고 한다. 1900년 윤치호 등 종일매국노들과 일제의 압력으로 무궁화가 수식된 관복을 정하는 칙령을 공표했는데, 1906년에 오얏꽃으로 다시 환원하였다고 한다. 대한제국의 황실의 휘장과 공문서에 사용하는 문장은 무궁화를 시종일관 거부하고 오얏꽃으로 사용하였다고 한다. 1906년 조선통감부로 취임한 이토히로부미는 1907년 서울의 백운동과 평양의 모란대에 모범림을 설치하고, 수원, 대구, 평양에 묘포를 설치하여 파종하는 한편, 무궁화묘목을 이식하였다고 한다. 마침내 1909년 후임통감 소네 아스라케는 “부상(扶桑, 무궁화의 나라 일본)과 근역(槿域, 무궁화지역 조선)을 어찌 다르다 논하리오.”를 읊었다고 한다. 메이지 유신에서 시작하여 부상(扶桑)의 나라가 근역(槿域)의 영토를 야금야금 먹어가는 과정에서 무궁화는 근역의 나라꽃으로 자리매김을 하고, 드디어 1910년 8월29일에 국권피탈의 과정을 겪게 된다. “무궁화의 역사는 바로 여기에 포커스가 있는 것이다“고 저자는 주장을 하고 있다. 5. 한일관계에서 무궁화의 현재성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유태인의 비밀 결사조직이 ‘이루미나트’라는 것이 있다면, 일본의 군국주의자들의 핵심은 ‘일본회의’라는 조직으로 뭉쳐져 있다. 일본회의는 1997년5월30일 ‘일본을 지키는 모임’과 ‘일본을 지키는 국민회의’ 두 단체가 통합해 발족되었다. 2020년 회원은 약 4만 명이고 현재 중의원 참의원 270명이 일본회의 회원이며 아베총리 4차 내각의 20명 각료 중 핵심 15명이 일본회의 회원이라고 한다. 일본회의의 뱃지는 외곽은 국화문양이고 가운데 중심은 무궁화문양을 하고 있다고 한다. 이러한 일본회의가 제1목표로 내세우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 ‘역사와 전통을 기반으로 새로운 시대에 맞는 새로운 헌법을 제정하는 것이다.’ 일본헌법 제9조 통칭 ‘평화헌법’ 폐기 및 자위대 존재를 헌법에 명기함으로써 확실하게 전쟁이 가능한 국가로 전환할 법적 근거를 확보하는 것이다. 자, 되돌아가보자. 1868년에 메이지유신을 일으키고, 1870년 히노마루(흰색바탕에 동그란 붉은 원이 들어간 무궁화)를 형상화한 일장기를 국기로, 소우탄(흰색바탕에 가운데 붉은 색이 별이 폭파되어 빛이 번지듯 한 모양의 무궁화)를 형상화한 욱일기를 군기로 제정하고, 1889년 ‘대일본제국헌법’을 공포하고, 제국헌법 서문 첫머리에 ‘천양무궁(天壤無窮, 하늘과 땅처럼 무궁함. 일왕의 지위는 天壤無窮의 신칙(神勅)에 의하여 영원하다. 일왕 영토의 무한한 확장을 표현) ’을 명기하고, 1890년 교육칙어 315자를 발표하여 외우고 신민으로서 충복이 되게 하는 과정을 일본회의의 목표에서 발견할 수 있지 아니한가? 그들의 입장에서 볼 때에 무궁화삼천리와 일편단심을 가슴속 깊이 되 내이고 있는 우리 민족이 아직도 부상(扶桑)의 근역(槿域)으로서 그들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겠는가? 이책이 어떠한 결론을 만들지 못하더라도 최소한 우리가 왜 무궁화를 나라꽃으로 인식을 해야 하고 종일매국노들인 윤치호작사(공식적으로는 미상으로 남겨놓고 있음) 안익태작곡의 애국가를 국가로 불러야 하는 지를 역사성과 대표성이라는 기준에 의하여 공론의 과정이라고 거쳐야 하는 것이 아닐까? “일본회의는 군국주의 범죄를 부정하는 수정주의 파시스트 집단이다”(프랑스 르몽드, 2017.8.12.) “일본회의는 역사를 퇴행하는 일본 국수주의 파시즘 조직이다”(미국 내셔널 리뷰,2016.7.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