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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이화 (대구, 1937~2020, 84세) 역사문제연구소 소장과 서원대학교 역사교육과 석좌교수를 역임했다.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이사장이기도 했다. 2015년 경향신문과의 인터뷰 내용을 보면 노교수의 삶에 대한 철학을 엿볼 수 있다. 동학혁명을 단순히 질서에 반하는 무력시위로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역사를 바로 이해하고 현재를 살아가는 실천의 동력으로 사용하라는 것이다.
조선은 고려의 뒤를 이어 1392년부터 1897년까지 505년간 한반도를 지배했던 성리학을 기반으로 한 전제군주정 국가이다. 고려 말기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을 기점으로 정권을 장악한다. 새로운 혁명이 왕조를 멸하는 것과 달리, 이성계의 역성혁명은 국가승계의 왕조이기에 세계에서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무혈혁명이라고도 볼 수 있다. 그 설계와 기반을 닦은 이가 민본을 근간으로 한 정도전이었다. 병든 부모라 하여 버릴 수 없다는 충신 정몽주의 시체 위에 세워진 국가이다. 유고를 숭상하고 고려말 타락한 불교를 억제하고, 오늘날의 입헌군주제 격인 재상정치를 실현하고자 하나, 태종 이방원에게 도륙된다. 그때부터였을까 조선의 민본은 사라지고, 역사상 최악의 한반도 국가로 이름을 남게 된다.
‘“새 궁궐을 경복궁이라고 이름짓기를 청하오니, 전하와 자손께서 만년 태평의 업을 누리시옵고, 사방의 신민이 길이 보고 느끼게 하옵니다.” <정도전, 조선왕조실록 태조실록 8권 中 > 경복궁의 이름을 지은이는 정도전이다. 조선왕조 500년의 궁궐이자 왕이 업무를 보는 제1의 법궁이다. 임진왜란 때 소실된 후 흥선대원군이 재건했다.
1868년 메이지유신 이후 일본의 막부정치는 막이 내리고, 왕정복고를 이룩하고 재상에 의한 정권이 들어서게 된다. 유신 이후 서양기술의 빠르게 받아들이고, 외교와 함께 근대적 국가의 틀을 갖추며 강대국의 모습으로 변모한다. 임진왜란의 패배를 한번 겪은 일본이지만, 다시 한번 대륙을 도모할 야망을 키우고 실행에 이른다.
“일본군은 대본영의 명령에 따라 혼성여단 육전대를 인천에 상륙시켜 서울에 진주하게 했다. 1894년 6월 21일, 일본군은 경복궁을 강점해 고종을 유폐하고 흥선대원군을 섭정으로 추대해 개화 정권을 출범시켰다. 남의 나라에서 이른바 불법적인 쿠데타를 단행한 것이다.” 한반도의 역사는 999번의 외침을 당했으나, 한 번도 주권을 상실한 적은 없었다고 한다. 조선은 실리가 아닌 명나라에 대한 유학의 사대를 하며 ’친명배금‘의 노선을 택한다. 강대국으로 부상하고 명과 주변국을 정리하는 청에 대해서 외교조차 시도하지 않았다. 인조 14년 병자호란이 일어나고 남한산성에 포위당해 항복하고, 평복의 차림으로 끌려 나와 조선왕은 항복의 절을 하게 된다. 지금 또다시 쇄국정책으로 나라를 고립시킨 조선왕실은 일본에 의해 주권을 상실하게 된다.
청일전쟁 도중 경복궁을 점령하고 갑오개혁을 시행하자, 전봉준은 ’척왜근왕‘을 외치며 동학 농민군을 모았다. 한양을 탈환하기 위해 북진을 시작하였으나, 기관총을 비롯한 근대 무기와 월등한 조직력을 갖춘 관군과 일 분 군에게 대패한다. 일본 침략자를 몰아내고 주권을 되찾고자 친 것은 양반이 아닌 민초였다. 러나 동학농민혁명은 1894년에 끝이 나게 되고, 전국에 걸쳐 대량 학살이 자행되어 그야말로 지옥도가 펼쳐지게 된다. 그 하수인들은 일본군의 힘을 가지고 민초에 복수전을 펼친 양반들이었다. 전봉준은 1895년 3월 29일(음력) 사형을 선고받고 교수형으로 생을 마친 후 참수되어 효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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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 농민군은 군사적으로 일본군과 맞수가 되지 않았지만 나약한 조선 조정은 그런 농민군조차 감당할 수 없었다." (p.21)
<이이화의 동학농민혁명사>를 읽어가면서 내가 알고 있는 동학은 단지 시험에 대비하기 위한 것이었다. 읽어가는 동안 많은 실망과 안타까움 그리고 수도 없는 생각들이 오갔다. 한 나라의 국력이 이렇게 약할 수 있을까? 약해지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점령당한 경복궁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 이후로 많은 사건들이 일어나게 되고, 그런 과정들을 바라보면서 조선이라는 나라를 다스리고 지키는 그들은 무엇을 했을까? 그들이 아무것도 안 할 때, 농민들은 그 상황을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그렇게 1894년 9월 동학 농민군의 2차 봉기가 시작된다. 이미 기울어진 대세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과연 어떤 선택을 할까?
"전봉준이 그렇게 넘고 싶었던 고개에는 지금 차들이 쌩쌩 달리고 있다." (p.133)
어쩌면 정해진 결과였는지도 모른다. 연합의 지연과 너무나도 차이가 나는 전력은 동학농민혁명은 막을 내리는 듯하다. 낯익은 지명들이 보인다. 삼례 봉기 기념비와 삼례 봉기 역사 광장이란 곳이 있는 줄은 몰랐다. 그렇게 가까운 곳에 있는 동학농민군들이 모였던 그곳을 빠른 시일 내에 한번 찾아가 봐야겠다.
"나라와 조정이 제 백성을 돌보기를 포기했던 것이다." (p.138)
역사가의 관점과 우리의 관점이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을 한다. 물론 역사가의 이야기를 들으며 우리는 우리의 생각을 정리해가지만 '동학농민혁명사'를 바라보면서 비슷한 생각들을 할 것이다. 한 가지 바라는 것이 있다면 지나간 역사 중에서도 되풀이되지 않았으면 하는 역사들을 잊지 않으면서 좀 더 나은 역사를 만들어가기를 바란다.
"한국 역사에서 가장 많은 민중이 참여한 동학농민혁명이 진행된 1년쯤 되는 기간에 조선은 사회 갈등과 분열 현상을 빚은 끝에 변혁 지향의 대전환기를 맞는다." (p.256)
동아시아의 패권에 영향을 끼친 동학농민혁명은 안타깝게도 실패로 돌아가게 된다. 그렇지만, 혁명에 의한 정신은 이어지고 이어져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하지만, 혁명의 반대에 있던 자들도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듯하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우리가 바라는 대로 될 수 없듯이 그들과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생각해 보고 풀어야 할 것이 있다면 풀어야 할 것이다.
"나를 어찌 죄인이라 하는가?" -전봉준-
우리가 동학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아마도 수업 시간에 배웠던 전봉준에 대한 공초 기록들과 압송되는 전봉준에 대한 사진이다. 그리고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또는 그렇다고 생각되는 사실들과 동학이 추구하고자 했던 이념들이다.
<이이화의 동학농민혁명사>를 읽어가면서 우리가 알던 동학에 대해 몰랐던 것들이 많음을 인정한다. 새롭게 알아가는 역사들을 통해 우리는 아마도 동학뿐만 아니라 우리의 역사에 대해 더욱더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책임감을 가지지 않을까 싶다. 또한 <이이화의 동학농민혁명사3>에서는 어떤 이야기들이 나올지 궁금해진다.
리딩투데이 지원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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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이화의 동학농민혁명사2 동학농민혁명을 바라보는 시선 당신에게 동학농민혁명이라는 것은 어떠한 이미지로 각인되어 있으신가요? "새야 새야 파랑새야!" 라는 노래와 함께 농민들의 함성 소리? 녹두장군 전봉준이라는 이미지? 괜한 그들의 소요로 인해 일본의 침략 구실 힘없는 자들의 울부짖음? 오합지졸들의 모임? 사실 우리들은 동학농민혁명에 대해서 제대로 알지 못합니다. 교과서에서도 자세히 기록되지 않았었고(20년전에는 그랬습니다만 지금의 교과서는 잘 모르겠습니다) 막연하게 성공하지 못한 혁명으로만 인식할 뿐입니다. 일부 식민사학자들에 의해 오히려 동학농민혁명으로 인해 조선의 한계를 드러내고 이 소요를 진압하기 위한 외세의 침략을 스스로 가져왔다라고 보는 시각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이화의 동학농민혁명사]에서 만나는 동학농민혁명은 그러한 모습이 아닙니다. 철저하게 준비하고 계획했던 민중혁명입니다. 그 안에서 최대한의 힘을 끌어모아 쏘아올린 대포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한 나라의 국민으로서 자주성을 찾아가고자 했던 엄청난 운동입니다. 만일 동학농민혁명이 없었다면 과연 일제의 조선침략이후 그렇게 많은 이들이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며 독립운동에 뛰어들 수 있었을까요? 그저 양반들의 나라였던 조선에? 어찌보면 동학농민혁명은 우리나라 백성들이 한반도라는 이 땅을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 한민족이 얼마나 끈끈한 사이인지를 직접 체험할 수 있었던 시간이었습니다. 동학농민혁명이 없이 바로 일제치하로 들어갔더라면 일본의 우리나라 백성들에 대한 분열정책은 더 심각했을 것이고 그동안 조선이라는 나라에 대한 실망이 가득했던 농민들이 주저없이 일본의 편으로 돌아섰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동학농민혁명을 통해 '농민'이 주체가 되는 그러한 삶을 집강소를 통해 경험했던 이들이기에 더이상 외세의 지배를 받기 보다는 스스로의 힘, 자주적 나라를 세우기 위한 노력을 기울일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또한 손병희 등 33인의 독립운동가들을 만들어내는 과정에서도 '동학농민혁명'은 우수한 인재 양성의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천민이니까, 백정이니까, 그동안 신분제의 차별속에 막혀있던 이들의 앞날에 길을 열어주고, 우리는 모두 평등하다라는 평등사상을 심어주었기에 많은 사람들이 현재의 상황에 그냥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더 나은 삶을 위해 노력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실 [이이화의 동학농민혁명사] 2권은 읽으면 읽을수록 화가 납니다. 무력하게 당할 수 밖에 없었던 대한제국의 황실에 화가 나고, 지들의 나라도 아니면서 우리나라를 두고 왈가왈부하는 일본과 중국의 행태에 화가 납니다. 또한 동학농민혁명군 사이의 분열을 보면서도 조금만 더 정신을 차리지 하는 속상함도 생깁니다. 만일 전봉준, 최시형, 김개남의 연합이 잘 이루어져 동시에 움직였다면 우금치전투에서의 패배는 없었을까? 하는 아쉬움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아쉬움은 뒤로하고 역사는 이미 지나간 것.. 우리들이 봐야 할 것은 이러한 역사속의 교훈들을 잘 찾아나서는 것입니다. 우리 역사의 분명 큰 부분이었으나 그 참여자들이 일반 백성, 천민, 농민이었기 때문일까요? 지금 이 시점에도 큰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는 동학농민혁명. 지금이라도 나라에서 단순 기념일 지정을 넘어서 "국가공휴일" 선포 등 그 가치를 조금 더 부각시킬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무엇보다 이 책 [이이화의 동학농민혁명사]가 우리나라 역사를 알고자 하는 분, 민중혁명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신 분, 일제치하 우리나라이 상황을 이해하고 싶으신 분들에게 좋은 길잡이가 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네이버 독서카페 리딩투데이의 리포터즈로 지원받은 도서 [이이화의 동학농민혁명사2] 잘 읽고 솔직하게 작성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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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어찌 죄인이라 하는가?" -전봉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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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역사에서 가장 많은 민중이 참여한 동학농민혁명이 진행된 1년쯤 되는 기간에 조선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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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일전쟁에 있어서 현지 동원했던 이들이 도망을 가작 그것을 자살로 마무리하는 육군 소좌 고시 마사츠나의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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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와 조정이 제 백성을 돌보기를 포기했던 것이다." (p.1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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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리석은 대중들을 현혹시키고, 그들의 여론을 잘 형성하는 것이 어찌보면 지도자가 가장 잘 해야 하는 일 중의 하나 일듯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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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금치 전투 그리고 곰티 전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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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봉준이 그렇게 넘고 싶었던 고개에는 지금 차들이 쌩쌩 달리고 있다." (p.13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