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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업이 바빠 5년만에 한 정기검진에서 2기 유방암을 발견했다. 유방x선 촬영(맘마그래피) 후 간호사가 "이렇게 찍으면 병변이 있는 것처럼 보여요. 다시 찍을게요 움직이지 마세요" 라고 말했다. 두 번째로 찍은 후 엑스선 촬영실이 조용해졌다. 간호사도 촬영기사도 나랑 눈을 마주치려 하지 않았다. 아무 말도 없었지만 난 알 수 있었다. 유방암이라는 걸. 39세였다. 검진을 매년 받았다면 더 일찍 발견했을텐데. 이렇게 쉽게 엑스레이 한번 '찰칵'으로 알 수 있는 것을. 조직검사 결과까지 나오는데도 일주일밖에 안 걸렸다. 수술하고 20회의 항암을 했다. 진단 24개월 후인 지금도 살아있고 재발도 하지 않았다. 나의 엄마도 유방암 2기를 건강검진에서 알았고 추적관찰 중 크기가 급격히 커지는게 관찰돼 수술했다. 그래서 난 건강검진의 중요성을 지인들에게 늘 강조한다. 저자가 '안해도 될 유방암 검사'를 하고 돈쓰고 스트레스 받는다고 하는 부분에서 눈을 의심... 각기 5분도 안 걸리는 검사다. 비싸지도 않고 엄청난 방사선이 나올 것도 없다. 저자가 아무리 혈종에서 일했고 의사로서 많은 죽음을 봤다해도 분명히 자신도 자신의 부모도 자녀도 형제도 암에 걸린 적이 없을 것이다. 그날 유방엑스선 촬영실에서 아무도 말해주지 않아도 내가 암인 걸 알았던 것처럼 그냥 알 것 같다. 가족 중에 암환자가 있으면 이렇게 말 못하니까. 그리고 죽어가는 환자들을 보는 것이 불편해서 혈종에 남지 않았다고 할 때도 기분이 착찹했다. '건강하게 살아서 노환으로 돌아가신 부모를 두고 부유하고 건강하게 60세까지 살아온 여성'으로서의 관점들일 뿐임을 저자 자신은 과연 인지하고 있을까? 자신의 관점이 옳다고 주장하는 오만함은 위험해보인다. 저자는 일반인이 아닌 의사니까. 그리고 죽음을 의연하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라는 게 저자의 요지인데 죽음을 해골이나 낫을 든 저승사자로 표현한 기괴한 그림들은 왜 사이사이에 넣는지 이해가 안 간다. 죽음이라는 태어남과도 같은 자연스러운 삶의 과정이 왜 이렇게 그로테스크 하게 그려져야 하지? 저자에게 꼭 우울증 검사를 권하고 싶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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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배운다는 게 가능한 지 모르겠다. 누구에게나 닥치고 주변에서 늘 일어나는 죽음이지만, 모두들 나와는 상관없는 일인 것처럼 외면하고 살아간다. 이 책을 읽으며 죽음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됐다. 작가처럼 그렇게 의연하게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은 소수의 사람이고, 대부분의 사람은 죽음 앞에 혼란스러워하고 고통스러워하며 두려움에 떨게 된다. 언젠가 떠나가실 부모님의 마지막 순간에,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올바르고 단호한 결정을 할 자신이 없다. 그리고 나의 마지막 순간까지도 담담히 결정하고 마주할 정신력과 체력을 가질 자신이 없다. 그래도 이 책에서 내가 얻은 것은 있다. 알고 있었지만 모른 척 했던 죽음에 대한 많은 일들을 직시해야 한다는 것.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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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은 늘 우리곁에 있지만 우리는 죽음이 아주 먼 미래라고 생각 하며 죽음을 도외시 한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죽음의 현장을 잘 볼 수 없다. 어릴적 보던 상여도 조부모의 죽음도 요즘은 볼 수가 없다~우리에게 너무나 동떨어진 미래처럼느껴진다. 이책은 그런우리에게 죽음을 생각하라고 준비하라고 어떻게 죽음을 맞이해야하는지를 담담하게 잘 풀어내고 있다. 우리아이들에게도 조카들에게도 꼭 읽어보라고 하고 싶은 책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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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가는 방법도 배워야 하고, 늙음도 배워야 하고, 죽음도 배우고 생각해야 합니다. 관련 책들을 많이 읽었는데 이책도 참으로 좋습니다. 삶의 모든 과정을 고민해보며 사는게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책을 읽으며 내가 생각해보지 못했던 부분도 고민해 볼수 있고 그렇게 함으로써 생각이 더 깊어질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잘 살기위해, 잘 나이들고, 잘 죽기위해 깊은 사유가 동반된 삶이어야 한다고 생각하며 이책이 도움이 될거라는 생각에 처음으로 리뷰를 남겨 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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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여러 해가 지났다. 뇌출혈을 일으킨 친지가 병원에 입원했고, 부모를 따라 병문안이라는 걸 갔다. 중환자실에 들어가야 했는데 왠지 내키지 않아 홀로 복도에 앉아 있었다. 의식이 있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병실의 분위기를 전해 들으며 막연히 내가 느꼈던 감정의 두려움임을 깨달았다. 아직은 죽음에 대해 생각하고 싶지 않다는 거부감은 생각하는 것보다 더욱 드세게 날 뒤흔들었다. 좋건 싫건 죽음은 피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언젠가 한 번은 건너야 하는 생의 관문이고, 과거에 비한다면 이를 대하는 태도에 많은 변화가 있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대다수는 죽음을 생각 않고 생활한다. 준비 없이 맞이한 죽음은 우산 없이 만난 비보다도 난해하다. 나의 몸임에도 의료진의 판단을 따라야 한다. 죽음을 삶으로 되돌릴 수 있다면 행하리라는 비장한 각오를 하게 될 수도 있는데, 누구도 그 과정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에 대해 말해주지 않는다. “최선을 다 했습니다”라는 말로는 내가 받은 치료의 효능이 어느 정도였는지, 혹은 아예 무의미했는지 따위를 헤아리기 힘들다. 현직 의사가 죽음을 기술했다. 류마티스내과. 잘은 모르지만 관절염이 떠올랐다. 고된 집안일을 오래도록 해온 여성을 비롯하여, 나이 든 많은 이들이 앓는다는 류마티스 관절염은 만성 질환과도 같다. 통증을 일정 부분 완화할 수는 있겠지만 아예 없는 것으로 만들기란 어렵다. 내가 짐작한 게 그의 전문 분야인진 잘 모르나 적어도 죽음이 과정인 것만은 분명하다. 태어난 생명체는 모두 죽음을 향해 걷는다. 나이가 들수록 쇠약해지고, 오랜 시간 사용해온 몸의 여기저기가 고장나면서 이를 실감하게 된다. 그런데도 본격적으로 죽음을 준비하는 이들은 거의 없다. 아마 나도 이를 낫게 만들고자 병원을 찾지 싶다. 오늘날과 같은 의학이라면 모든 질환을 고치는 게 가능하다. ‘불사조도 만들 수 있다’ 하면 어처구니없어 할 테지만, 우리가 지닌 믿음은 그와 크게 다르지가 않다. 그렇기에 자연스러운 노화 증상조차도 질환으로 여기고, 무어가 됐건 조치를 취할 수 있길 희망한다. 나의 몸이지만 오로지 나 하나에 귀속되는 건 아니다. 가깝게는 가족들이 있고, 내 몸 상태를 살뜰히 살피는 의료진 또한 고려해야 한다. 제도가 완벽하면 좋을 테지만 아직은 아니어서 만일 내 신변에 문제가 발생한다면 여럿이 고생한다. 중증 질환을 앓고 있고 나이도 이미 고령인 경우를 생각해 보자. 이미 온몸에 암 세포가 퍼져 의료적 처치를 취한들 나아지기가 힘들다고 말이다. 가족들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치료를 요구할 것이다. 그들의 노력이 불과 몇 시간의 생명 연장 결과를 낳을지라도 일단은 해보는 게 자식의 도리라고 여기는 것이다. 무의미한 연명 치료는 하지 않기로 판단했다면 비난을 감수해야 할지도 모른다. 불효를 저질렀다는 말을 자신의 형제자매, 이웃, 심지어 의료진으로부터도 들을 수 있다. 그 때마다 죄책감에 시달릴 거란 점은 충분히 예측 가능한 바다. 모두가 연명치료 미시행으로 뜻을 모았을 시에도 문제 발생의 소지는 존재한다. 조금이라도 생존의 가능성이 존재하는데 치료를 행하지 않은 것은 살인 방조와도 같다는 식의 추궁, 심각하면 소송에 시달리는 일도 발생한다. 죽음에 임박해서 결정을 내리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죽음은 차근차근 준비해야 하는 무언가다. 책의 제목처럼 생은 곧 죽음을 배우는 시간이어야 한다. 자신의 죽음이 어떠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선택의 순간에 봉착했을 때 어땠으면 좋겠다는 것을 기록으로 남기고, 세상은 개개인의 결정을 존중해 주어야 비로소 죽음까지도 존엄해질 수 있다. 여전히 코로나19가 기승이다. 한계를 모르고 퍼져나가는 바이러스를 바라보는 마음이 시큰하다. 격리와 통제가 별다른 소득을 거두지 못하고 있는 지금, 무엇이 우리에게 최선일지를 묻게 된다. 아울러, 이 와중에도 죽음을 향해 성큼 다가서고 있는 많은 이들이 외롭지 않았으면 좋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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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이라는 단어는 대부분에 입에 올리기 꺼려한다. 당장 일어날 일도 아니고, 부정적인 이미지가 강하기 때문에 웬만해서는 말하지 않고, 다른 사람이 이것을 얘기해도 적당히 회피하려고 한다. 1세기 전만 해도 죽음은 우리 삶의 현장에서 너무도 흔하게 발생해서 친숙한 개념이었지만 지금은 현대 의학이 발전하면서 우리와는 동떨어진 일로 간주하고 있다. 그렇지만 죽음은 시간적으로 뒤로 밀리긴 했어도 여전히 우리 곁에 있다는 인정해야 한다. 아무리 의술이 발달해도 노화라는 자연현상을 막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저자의 핵심 주장은 "현대 의학은 죽음을 자연스러운 과정으로 인식하지 않고 치료해야 하는 질병으로 취급한다"는 것이다. 죽음을 자연 현상의 하나로 받아들이면 죽는다는 것을 받아들이기가 더 쉬워지고, 그러면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면서 죽을 수 있는 길이 열린다. 그렇지만 죽음을 치료해야 할 질병으로 여기면 죽음은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회피해야 하는 것으로 보면서 연명치료라는 지옥문이 열린다.
중환자실에서 인공호흡기를 달면서 누워있는 환자들을 보자. 어떻게 해서든지 부모님을 살리고 싶어하는 자식들의 소망에 의해 여러 가지 기계 장치에 의해 목숨만 붙어 있는 환자들이 인간으로서 존엄성을 지키고 있는지 다시 한번 물어본다. 저도 이 책을 읽으면서 처음 안 것인데 인공호흡기를 달면 숨이 자동으로 쉬어지는 것으로 아니라 인공호흡기가 제대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자연적인 호흡 과정을 억제하기 위해 강력한 진정제를 놔서 대부분의 중환자실 환자들이 의식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실제로 중환자실에서 살아나온 환자의 증언에 의하면 "지옥이 따로 없다"고 한다.
여러 가지 질병으로 병약한 부모님이 어떤 증상에 의해, 예를 들면 폐렴으로 인한 고열로 인해 응급실에 실려갔다고 가정해보자. 의사는 일반 병실이 아닌 중환자실에서 치료할지를 결정하라고 하면 우리는 쉽게 그렇게 하겠다고 한다. 그런 결정이 내려지는 순간 이후 모든 결정은 환자 보호자의 손을 떠나게 된다. 무슨 얘기냐면 중환자실에 들어가서 인공호흡기를 다는 결정은 쉬워도 떼는 결정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보라매 병원 사건> 이후 병원에서는 나중에 돌아올 법적 책임 때문에 법원에서 떼도 좋다는 결정이 나오기 전까지는 인공호흡기를 떼지 않는다. 그런 상태로 있다가 갑자기 상황이 안 좋아지면 여러 가지 약을 투입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심폐소생술을 한다. 그런데 심폐소생술을 받아도 고령의 중환자실 환자들은 대부분 사망한다. 아주 잠깐 더 생존하기 위해서 갈비뼈가 부러지는 고통을 견뎌야 하는 것이 과연 환자를 위한 것인지 저자는 다시 묻는다. 의식이 없다고 하지만 갈비뼈가 부러지는 고통이 어떨지에 대한 고민없이 심폐소생술이 무조건적으로 시행되는 한국의 의료 현실. 그렇다고 의사가 심폐소생술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만약 하지 않으면 나중에 의사가 충분한 노력을 하지 않아서 환자가 죽었다고 고소하는 일이 횡행하는 것이 현실이다. 오히려 환자 가족이 봤을 때 과도하다고 느낄 정도 과하게 심폐소생술을 시행하면 나중에 보호자들에게 원망을 듣지는 않는다는 웃픈 현실.
모두들 백세 시대를 얘기하지만 인간의 신체는 40~50년을 살도록 만들어져 있다. 관절이 망가지기 시작하는 것도, 노안이 오는 것도, 성인병 및 암이 찾아오는 것도 대개 이때부터다. 그것을 받아들이고 서서히 거기에 적응해가야 하지만 우리는 현대 의학의 사탕발림 같은 소리에 속아서 천년 만년 오래 살 줄 알면서 병원을 신봉한다. 그렇지만 현대 의학은 수명을 잠깐 연장해줬을 뿐이지 근본적인 문제는 거의 해결하지 못했다. 사실 20세기 들어서 수명이 는 것은 영양의 개선, 공중 위생의 향상, 전염병 및 감염병의 통제로 인한 것이지 실제로 우리의 생명을 위협하는 질병에 대한 현대 의학의 도전은 아직 초라할 뿐이다. 그 만큼 노화라는 자연 현상에 대해서 인류는 무력할 수밖에 없고, 그렇기 때문에 그것을 수용하고 대자연의 원리에 순응하라고 저자는 권고하고 있다.
마지막 부분에 있는 엔딩노트는 정말 죽음을 준비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저자의 고민을 온전히 녹여낸 핵심이다. 과연 나도 그렇게 할 수 있을지는 자신이 없지만 죽음에 대해서 오랫동안 고민해온 저자의 내공이 온몸으로 느껴지는 부분이라서 꼭 한번 읽어보길 추천드립니다.
https://blog.naver.com/orthojs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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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우리는 죽음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책을통해서 읽어보며 그게 아님을 알 수 있을 것이며 우연한 기회에 예스24 홈페이지에서 책 죽음을 배우는 시간을 만나고 나서 바로 구입해서 읽어보았다. 역시 나는 죽음에 대해 잘 알고 있지 않음을 알았으며 더나아가 어떠한 방향으로 죽음을 대해야하는지 배울 수 있어 좋았다. 사실 병원에서 근무하고 있어 자세히 알 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여전히 모르는 점도 있어서 나에게 많은 도움이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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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들어 치매에 걸린 노인들, 몸부림처질 정도로 아픔을 겪으며 죽음에 다가가는 사람들을 보며, 잘 죽는 방법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던차에 유튜브에서 저자의 강연을 듣고 책을 구입하게 되었다. 순식간에 읽혀 내려갔다. 의사들이 차마하지 못하는 말을 의사로서 소명과 책임감을 가지고 쓴 책이라 생각한다. 어두침침한 곳에 처박아놓은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죽음'을 제대로 알고 고찰해보는 시간이었다. 죽음을 쉬쉬하는 문화에서 죽음을 얘기하고 준비하기는 참 어려운 일이지만, 용기를 내서 다가올 죽음들에 대비해야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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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배우는 시간" 병원에서 알려주지 않는 슬기롭게 죽는 법 개인적으로 아주 고민이 많았던 주제였는데 책을 읽으면서 어느정도 해소가 되는듯하다. 죽음앞에서 연명치료를 할것인가 말것인가에 대한 고민의 해답이 들어있는듯 하다. 지인들에게 추천해고 싶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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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저자는 내과 전문의로 30년을 의사 생활에서 준비 없이 맞이하는 죽음이 모두에게 얼마나 큰 비극을 초래하는지를 수 없이 지켜본 경험을 이 책에 담았다. 죽음에 대한 철학적, 인문학적인 글에서는 느끼기 어려운 극히 현실적인 죽음의 모습을 의사의 시각에서 구체적으로 묘사했다. 의사이면서도 환자 가족의 입장에서 죽음을 이해하려는 저자의 글은 용기있고 따뜻하게 느껴진다. 앞만보고 달려가기 빠쁜 현대인의 생활과 죽음조차도 돈으로 해결하려는 자본주의가 서로 얽히면서 죽음이 우리 주변에 분명히 존재하는 것을 서로 알면서도 죽음을 못본척하는 위선적인 상황이 만들어졌다. 비극적인 모습의 죽음을 맞이하면서, 죽어가는 사람은 살아 있는 사람에게 알릴 힘이 없고, 죽은 사람은 더 이상 말이 없고, 살아 있는 사람은 잘 모르거나 모른 척하고 살아간다. 누구나 예외없이 맞게 되는 죽음을 회피하지 않고 삶의 마지막 단계로 자연스럽게 수용하며 좋은 죽음을 맞이하려는 웰다잉(Well-Dying)은 삶에서 욕심을 내려놓고 받아들이려는 마음으로 잘 살기(Well-Being) 위해서라도 반드시 배우고 준비해야 한다. 오랜 옛날부터 20세기 후반까지도 사람들은 자신이 마지막까지 살던 집에서 가족과 가까운 사람들 곁에 둘러싸여 임종을 맞았다. 연로하신 할아버지나 할머니가 머지않아 곧 돌아가시게 될 것을 가족들이 알아 차리면 온 가족이 노부모의 임종을 맞이 할 준비를 했다. 불과 몇백전 전만 해도 죽음은 항상 사람들 가까이에 존재했다. 전염병이 창궐해서 도시 인구의 절반이 죽어 나가고, 끊임없는 전쟁으로 죽는 사람도 언제나 있었다. 죽음은 인간의 삶에 항상 등장하는 존재였고, 항상 승리하는 존재였다. 긴 인류의 역사에서 종교, 철학, 문학, 예술은 항상 죽음이 우리 삶의 한 부분이라고 알려 주었다. 현대 의료 기술의 급속한 발달로 마치 죽을 사람도 살릴 수 있다는 착각과 함께 ‘노화에 의한 자연사’라는 만고의 진리가 옛 이야기처럼 간주되는 시대가 되었다. 언젠가 부터 상황이 바뀌어 사람들은 집 대신에 병원에서 죽고, 병원에서 죽어가는 사람의 곁을 더 이상 가족들이 아닌 의료 장비와 의사들이 지키게 되었다. 이러면서 사람들이 일상 생활에서 죽음을 직접 목격하는 일이 점점 더 줄어들었다. 그 결과 사람은 언젠가 반드시 죽는다는 사실을 애써 외면하고 또 어떤 사람은 죽지 않고 영생할 방법이 있을 거라고 믿는 시대에 살고 있다. 우리 사회는 죽음을 수용하고 준비하기 보다는 현대 의학 기술의 위대한 발달로 인간이 얼마나 오래 살 수 있게 되었는지, 예전 같았으면 죽었을 사람이 극적으로 생명을 연장할 수 있는지에 더 관심이 있다. 이제는 죽음이 집에서 병원으로 떠넘겨진 사회가 되었다. 전통적으로 가족이 맡아오던 죽음을 병원에 외주맏겼다고도 할 수 있다. 병원은 병을 치료하는 장소이다. 당연히 병원에서 모든 죽음은 치료해야 하는 질병으로 간주된다. 나이가 많이 들어서 나타나는 노화 현상 조차도 치료가 필요한 질병으로 치부되고 있다. 자본주의 사회의 병원은 노화로 인하여 죽는 자연사도 치료의 대상으로 본다. 병원에서 노화로 사람이 죽는다는 것은 부자연스러운 사건이 되었고, 적극적으로 치료하지 않고 맞이하는 자연사는 안락사 내지는 살인과 혼동되기까지 한다. 병원에서는 죽음이 의료의 실패로, 의료가 싸워서 이겨야 할 적으로 간주되고 있다. 현대의 병원에서는 환자의 죽음은 어떻게 해서든지 일어나면 안되는 일종의 사고 같은 것이 되어 버렸다. 환자가 사망하면 병의 경과를 떠나서 의료진은 환자의 보호자로 부터 질책당할 일이 없는지 먼저 살피고, 환자의 사망이 병원 평가에 나쁜 영향을 주지 않을지까지 따져야 한다. 이러한 의료 시스템은 의사들이 죽음을 자연스러운 과정으로 보는 것을 점점 더 어렵게 만든다. 죽음에 이르기까지 시간을 끄는 것이 환자는 물론 환자의 가족에게 고통스러운 상황이라 할지라고 어떻게든 죽음을 늦추려는 시도를 할수 밖에 없는 경우를 흔히 본다. 거의 도움이 안되는 수액이라도 맞다가 죽어야 정상인 것처럼 오인하는 사회 분위기까지 조성되고 있다. 나이가 많이들어 쇠약해진 노인이 생의 거의 거의 마지막 단계에서 임종에 이르는 몇가지 과정이 있다. 근력 약화에 의한 활동력 저하 -> 식이 섭취 부진 -> 영양실조 및 탈수에 의한 장기 기능 저하 -> 인두근 약화에 의한 흡인과 폐렴 -> 사망 이라는 과정을 격는데, 이 모든 단계가 병원에 입원하는 순간 치료 해야하는 질병으로 탈바꿈된다. 노인의 사망진단서에는 더 이상 노환이 사망 원인으로 명시되지 않는다. 심부전, 폐렴, 각종 감염증 등, 모든 사망에는 의학적인 진단과 병병이 붙는다. 저자는 이 책에서 중환자실의 모습을 의사로서 리얼하게 표현한다. 호흡을 돕기 위한 산소 마스크의 착용까지는 문제가 안된다. 어렵고 곤혹스러운 상황이 인공호흡기 착용 시점부터 시작된다. 숨이 막혀 고통받는 환자의 호흡 곤란을 해결하기 위하여 손가락 굵기의 기도삽관을 연결한 인공호흡기를 부착하게 된다. 기계로 숨을 불어 넣는 인공 호흡은 자연 호흡과 리듬을 맞추기 어려워서 환자가 의식이 있는 경우 몹시 고통스럽고 견디기 힘들기 때문에 강력한 진정제를 투여해 환자를 의식이 없는 상태로 만들어 자발 호흡을 죽인 상태에서 시행된다. 인공호흡기를 장착한 대부분의 환자가 의식이 없는 것은 이 때문이다. 전 삼성전자 이건희 회장에게 시술되어졌다고 해서 유명해진 체외막산소요법 에크모(ECMO: Extracorporeal Membrane Oxygenation)는 더 드라마틱하다. 심장의 기능이 정지된 환자의 정맥에서 뽑아낸 혈액에 인위적으로 산소를 공급하여 다시 환자의 몸에 주입하는 첨단 의료 장비이다. 엄청난 의료비를 지불하면 심장이 멈추어도 법적으로 사람이 살아있다고 할 수 있는 어이없는 상황이 벌어진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현대 의학은 살아있는 이해 당사자의 필요에 따라서 죽음의 속도와 시간을 마음대로 조정할 수 있게 되었다. 인공호흡기와 에크모(ECMO)는 한번 환자의 몸에 장착하면 법리적 절차를 거치지 않고는 누구도 떼는 것이 불가능하다. 연명치료 의료 기술이 너무 빨리 발전하는데 비하여 이에 대한 우리 사회의 윤리적, 철학적 논의가 성숙되기도 전에 법리적 결정이 우선해 버린 결과이다. 대형 병원의 중환자실은 일시적인 문제로 생명이 위독해진 환자들이 의학적인 시술의 도움으로 위험한 시기를 넘기고 다시 건강한 몸으로 돌아기기 위한 특별한 치료 목적의 공간이다. 그러나 이러한 기본적인 원칙이 현대 의료에서는 빈번히 깨진다. 죽음을 말하기 싫어하는 의사와 죽음을 받아들일 수 없는 환자 가족 사이의 암묵적인 합의하에 중환자실은 임종을 맞기 위한 장소로 급속히 변질되고 있다. 누구도 ‘이제 그만’이라는 말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중환자실에 입원을 안 시킬 경우, 심한 경우 의료 소송의 빌미를 제공할 수도 있다. 그 결과 정말 치료가 필요한 사람들이 중환자실에 입원하지 못하게 된다. 이러한 넌센스는 환자와 가족에게 고통스러운 죽음의 과정을 연장할 뿐만 아니라 큰 경제적 손실을 입게하고, 국가 차원에서는 제한된 의료 자원의 낭비를 초래하다. 반드시 중환자실 치료가 필요한 환자의 치료 기회를 박탁함과 동시에 의료 비용의 천문학적 증가를 초래한다. 우리나라에서 80세 이상 고령자의 중환자실 입원율은 2002년 7.3%에서 2013년 23.1%로 증가했고 현재는 더 높을 것으로 추정된다. 중환자실이 노인들이 몸에 무언가를 많이 주렁주렁 달은 상태로 삶을 마감하는 장소로 급속히 전환되고 있다. 노화로 임종을 맞이하는 경우, 의식이 있는 상태에서 가족과 작별할 수 있는 부모를 중환자실에서 의식도 없이 억지로 육체만 세상에 붙들어 놓았다가 보내는 상황이 만들어 진다. 2018년 미국의 의료 보고서에 따르면 중환자실에 입원한 평균 연령 67세 이상의 환자 중 어차피 생존할 사람은 중환자실 연명치료와 무관하게 생존한다. 대부분의 환자들에게 중환자실 치료는 단지 사망에 이르기 까지의 시간을 얼마간 더 연장하는 연명치료일 뿐이다. 노년의 부모가 건강할 때 자식을 포함한 가까운 가족에게 ‘조용히 죽겠다’, ‘아파도 병원에는 절대 안 가겠다.’라고 말했어도 막상 노년에 죽음이 닥치면 그런 뜻은 거의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우리나라에서는 법적인 문제로 이어 질 소지가 크기 때문이다. 노화로 인한 임종을 지켜보는 일도 사람을 죽이는 것과 같이 살인이라는 뜻이다. 우리나라 임종 문화의 총체적인 혼란상에서 비롯되는 어이없는 비극이다. 이러한 혼란은 병원과 의료인의 입장뿐만이 아니라 환자의 가족을 포함한 다양한 이해 당사자들이 관여하면서 점점 더 복잡한 양상으로 전개된다. 이것을 막기 위한 방편으로 우리나라는 2018년 부터 만 19세 이상의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향후 임종 과정에 있는 환자가 되었을 때를 대비하여 연명의료 및 호스피스에 관한 의향을 명시한 ‘사전연명의료의향서’ 제도를 도입했다. 사전연명의료의향서는 막연한 웰다잉(Well-Dying) 준비가 아니다. 현대 의료 시스템에서 준비되지 않은 모든 죽음은 개인에게는 물론이고 사회적 재앙으로까지 이어진다. 노환으로 사망한 환자에게도 마지막에 심폐소생술을 시행하지 않으면 살인 혐의로 고소를 당하는 세상이다. 그렇기 때문에 DNR(Do Not Resuscitate, 심폐소생술은 시행하지 말 것에 대한 요청서)를 포함한 철저한 준비가 필요하다. 죽음을 준비하지 않은 결과는 때로 참혹하다. 보건의료 통계를 보면 한 개인이 사망하기 한달 전에 쓰는 의료비가 그 이전 평생에 걸쳐 쓴 의료비보다 더 많다고 한다. 선진국에서 이러 불합리하고 불행한 결과를 막기 위해 완화의료(Palliative Care)를 중심으로 하는 죽음의 질 향상에 관한 논의가 일어나게 되었다. 완화의료는 반드시 임종을 목전에 두고 있는 사람에게만 시행하는 치료가 아니다. 병으로 하루하루가 힘겨운, 누가 보아도 임종이 눈앞에 닥친 사람에게만 완화의료가 필요한 것은 아니다. 고혈압, 당뇨, 중풍 등 노년에 닥치는 온갖 만성 질환들의 후유증으로 신체의 정상적인 기능을 잃고 침상 생활을 하면서 대소변을 받아내야 하는 환자는 언제 임종이 올지 알기는 어렵지만 남은 삶을 좀더 편안하게 해주는 치료가 필요하다. 이 책에서 저자는 가장 바람직한 형태의 죽음의 모습을 스님들의 예에서 찾는다. 큰스님이 열반에 들기 전, 곡기를 끊고 죽음을 재촉했던 이야기, 옆에서 사람들이 음식을 바치며 애원해도 듣지 않고 의연히 죽음을 마주하는 스님들의 이야기에서 저자는 죽음의 가장 자연스러운 모습을 본다고 한다. 곡기를 끊고 스스로 죽음을 향해 걸어가는 모습은 삶을 구차한 영양제나 수액 따위로 연장하는 것 만큼이나 고통스럽지 않을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능동적인 죽음을 자살 내지는 자살 방조로 보고 생의 무게에 힘겨운 환자에게 강제로라도 급식과 영양 주사라도 주는 것이 최선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아직은 대부분이고, 이러한 믿음을 병원의 치료 시스템이 받치고 있다. 평화로운 임종은 죽음의 불안함에서 벗어나고, 혼자서 임종하지 않고, 가족과 아이들과 함께 있는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 우리 사회의 살아가는 모습에서는 현실적으로 어려운 조건이다. 특히 가장 가까운 가족과의 접촉조차 매우 어려운 중환자실에서의 죽음은 더욱 그러하다. 이러한 이유로 병원은 생의 마지막을 보내는 장소로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고 저자는 말한다. 심하게 표현하면 연명치료를 위한 복잡한 기계 장치가 갖추어진 병원이라는 시설로 부모를 고려장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고 보인다. 그 옛날 죽을 부모를 내다 버리는 자식의 심정은 슬프고 비통했겠지만, 대형 병원에서 부모의 임종을 맞게하는 지금의 시스템은 삶의 마지막 단계에 격게되는 죽음과 슬픔을 병원이라는 커튼 뒤로 숨겨 버렸다. 저자는 이 책의 끝에서 의사의 입장에서 죽음에 대하여 취하는 자세를 말한다.
우리 사회는 노화로 인한 거의 모든 증상을 병원의 일로 만들었고, 가족들은 노화를 곁에서 함께 지켜보는 대신에 열심히 노동하고 돈을 벌어 치료비를 대고 남아 있는 삶을 살아 나간다. 이러한 시대의 흐름을 거스르기가 쉽지 않겠지만 어쩔수 없는 죽음을 앞둔 사람의 입장에서 무엇이 좋은 죽음일지를 우리는 진지하게 고민해 보아야 한다. ★네이버 블로그 원문★ https://m.blog.naver.com/wesley22/2233671374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