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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번역본중에 동서월드북으로 접하게 되었습니다. 에밀 졸라는 파리의 하층 계급, 특히 노동자의 삶을 주로 그려낸 작가로 알려져있네요. 졸라는 가난한 세탁부 제르베즈와 그녀를 둘러싼 남자들이 타락해가는 모습을, 그녀가 환경에 따라 변화하는 과정을 관찰해 묘사합니다. 주인공 제르베즈는 처음부터 악한 인물이 아닙니다. 누구보다도 성실하고 소박하며, 작지만 안정적인 행복을 꿈꾸며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사랑을 포기하지 않고 더 나은 미래를 위해 성실하게 하루하루를 살아가지만,,결국... 이 작품은 인간 존재의 구조적 취약성에 대해 파헤쳐보는것 같다 인간의 의지가 얼마나 나약하고 동물적 본능에 따라 서서히 그 의지가 무너지며 크고작은 체념들을 통해 인간의 운명이 어떻게 변하며 무너지는지를 보여주지만, 동시에 그 무너짐이 얼마나 사회적으로 설계된 것이었는지를 인간의 타락이 개인의 나약함 때문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녀가 그렇게 몰락하게 되는 계기는 무엇일까요? 가난 그 자체보다, 가난에 적응해버린 영혼 때문일까요? 그냥 누구나 살아가는대로 그럴수 있는 본능을 따랐을 뿐일텐데... 에밀졸라의 명작을 만나보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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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작가는 처음으로 쓴 민중소설에 대하여 서민층과 귀족층 양쪽으로부터 모두 공격을 받으면서 자기변명을 하고 싶지 않다는 뜻을 밝힌다. 나는 자기변명을 하고 싶지는 않다. 나의 이 작품이 대신 변명해 줄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진실한 작품이다. 거짓이 없고 민중의 냄새가 드러나는 나의 첫 번째 민중소설이다. 민중 전체가 사악하다고 결론지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나의 작중인물들은 사악하지 않고 그저 무지할 뿐이며, 또한 괴로운 노동과 가난한 환경에 의해 오염되어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22, 머리글, 에밀 졸라) 작가가 밝히는 작중 인물들은 순수하지는 않지만 사악하지도 않다. 그들은 많이 배우지 못하였고(그럴 기회나 환경이 받쳐주질 못했다) 그래서 어쩔 수 없는 무지함이 있었다. 산업혁명이 막 일어나기 시작하여 하루 일당이 급속하게 줄어드는 시대적 환경이 그들을 더 가난하게 만들었고, 더 술에 빠지게 만들었다. 그래서 우리는 책을 다 읽고 나서 작중인물 그 누구에 대해서도 비난의 손가락질을 할 수 없다. 나도 그 시대에 그 서민층으로 태어나 그 가정에서 자랐다면 어쩔 수 없이 그런 길을 걸어갈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예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제르베즈는 겨우 스물두 살이었다. 큰 키에 호리호리하고 여려 보였지만, 얼굴에는 생활에 찌든 흔적이 역력했다. 헝클어진 머리에 헌 신을 신고, 가구의 먼지와 기름 얼룩이 잔뜩 묻은 짤막한 흰 윗옷을 입고 벌벌 떨고 있는 그녀는 괴로움과 눈물로 몇 시간을 보낸 탓에 열 살은 더 늙어 보였다. (29) 작가가 작중인물 중에서 주인공으로 선택한 제르베즈는 겨우 스물두 살에 불과했지만 열 살은 더 늙어보인다고 했으니 서른두 살 정도로 보였겠다. 지금 현대사회에서는 서른두 살이라고 해서 늙어보인다고 표현하지 않는다. 하지만 서른두 살처럼 늙어보인 스물두 살의 제르베즈의 꿈을 보라. 이보다 소박하고 간소하고 아름다운 꿈이 있을까. "아, 나는 그렇게 욕심쟁이가 아니에요. 난 많은 것을 바라지는 않아요. 내 꿈은 조용히 일하고 언제나 먹을 빵이 있고 잠을 잘 수 있는 자그마한 집이 있는 거예요. 거기에다 침대 하나와 탁자 하나, 그리고 의자가 두 개쯤 있다면 더 이상 바랄 게 없지요. (59) 그녀는 그저 일할 수 있고, 먹을 수 있고, 잠잘 수 있는 집만 있다면 행복할 수 있다고 말한다. 겨우 욕심을 낸다는 것이 침대, 탁자, 의자 같은 가정생활에 꼭 필요한 가구에 불과한 것들이었다. 사실 작가는 초반에 이 책에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는 거의 다 말해 버렸다. 제르베즈의 삶에 확대경을 들이대면서 정말 끔찍하리만치 자세하고 구차한 묘사를 구사하면서, 저자의 목적을 거침없이 드러낸다. 하지만 독자는 마지막 책장을 덮기 전까지 안심하지 못한다. 주인공 제르베즈의 삶이 몰락하지 않기를, 가난을 이겨내고, 술꾼 남편을 이겨내고, 사랑을 쟁취하고, 자녀를 번듯하게 키우고, 빵 한 조각에 연연하지 않기를 바라면서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책장을 넘긴다. 하지만 세상이란 그렇게 순수함을 넘어선 순진함과 강한 척 속에 감추어진 연약함으로 똘똘 뭉칭 사람에게 무지막지하게 허리케인처럼 달려든다. 그 속에 빠지면 정신은 혼미해지며 판단력을 잃고 순수함마저 나락으로 떨어지고 만다. 그녀를 의지가 강한 여자라고 믿는 건 잘못이었다. 반대로 그녀는 아주 연약했다. 그녀는 누군가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이 두려워서 사람들이 떠미는 대로 살아왔다. 그녀의 꿈은 정직한 사회에서 살아가는 것이었는데, 나쁜 사회는 도살용 몽둥이처럼 순식간에 사람들의 머리를 깨부수고 여자들을 뭉그러뜨리기 때문이다. (65) 남자들은 급여를 받아도 아내 몰래 술집으로 가 싸구려 브랜디를 마시기 바쁘고, 다른 집 여자들을 훔쳐보고 농락하기에 바쁘다. 술힘으로 친구가 되고, 술힘으로 친구의 아내를 홈치고, 센 척하며 세상을 타락시킨다. 여기 제르베즈가 술에 취한 남편 쿠포가 이제 친구가 되었다며 자신의 집으로 데리고 온 제르베즈의 이전 동거남 랑티에를 맞이하는 건 또 어떤 상황인가. 결코 그럴 수 없음에도 세상은 그렇게 돌아간다. 제르베즈는 그저 절망할 뿐이다. 쿠포가 마침 거리를 건너오고 있었다. 그는 문을 잘못 밀다가 하마터면 어깨로 유리를 깰 뻔했다. 그는 몹시 취하여 창백하게 이를 악물고 있었는데, 불만이 가득해 보였다. 그의 살갗을 창백하게 만든 나쁜 피 속에는 '목로주점'의 싸구려 브랜디가 들어 있음을 제르베즈는 금세 알아보았다. 그녀는 전에 그가 포도주를 마시고 어린애같이 순진하게 굴던 때처럼 웃으며 재워 주려고 했다. 그런데 그는 아무 말도 없이 그녀를 밀어젖히고 그대로 혼자 침대까지 가려고 하며, 그녀에게 주먹을 쳐들었다. 그 꼴은, 때리다 지쳐서, 저 윗방에서 코를 골고 있는 또 하나의 주정뱅이와 똑같았다. 그러자 그녀는 몸도 마음도 얼어붙었고, 결코 행복해질 수 없으리라는 절망감에 가슴이 저미어서 남자들에 대하여, 남편과 구제와 랑티에에 대하여 생각해 보았다. (210) 제르베즈가 불운했다면 그것은 그녀가 너무 순수하고 순진했다는 것이다. 물론 그것이 다른 잘못을 뒤덮거나 퉁칠 수 있는 그런 가치나 의미를 가지진 못한다. "그런 짓은 못 해요, 구제 씨. 아주 좋지 못한 짓이죠.... 나는 결혼한 몸입니다. 자식도 있고요. 나 때문에 당신이 많이 괴로워하는 것도 잘 알고 있어요. 하지만 그런 짓을 한다면, 우린 후회하게 될 뿐, 아무런 즐거움도 누리지 못할 거예요.... 나도 당신을 좋아해요. 당신을 많이 좋아해서 더더욱 당신이 어리석은 짓을 하게 놔둘 수가 없어요." (273) 나중에 그녀는 이때의 순수함을 헌신짝처럼 내던지고 주변 환경에 똑같이 녹아 들어갔기 때문이다. 아니 오히려 더 큰 나락으로 떨어졌기 때문이다. 무엇이 그녀를 이렇게 만들었는가 하는 문제는 많은 토론 주제가 될 수 있다. 제르베즈의 개인적인 책임감, 인생에 대한 무신경함, 스스로를 이겨내지 못한 나약함 때문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고, 다른 한편으로는 주변 환경의 거대한 프레임, 벗어날 수 없는 가난과 술꾼 남자들의 횡포 때문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어쨌든 순수했던 제르베즈는 이제 방탕한 사람이 되고 말았다. 그것은 슬픈 일이지만 그것이 현실인 것이다. 그래서 그녀의 방탕은 습관이 되고 말았다. 이제는 그것이 먹고 마시는 것처럼 규칙적인 일이 되어버렸다. 쿠포가 술에 취해 돌아올 때마다, 그녀는 랑티에의 침실로 갔다. 일주일에 적어도 월요일, 화요일 수요일은 그렇게 되기 마련이었다. (294) 그 정도까지 망가지면, 여자로서의 긍지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다. 제르베즈는 그 옛날의 기품과 애교, 애정, 예절, 존경받고 싶은 욕구도 마치 어딘가에 내버린 것 같았다. (389) 마지막 끝부분에 가서 너무 배가 고파 거리를 헤매면서 구걸을 하고 다니는 제즈베르의 비참한 장면은 작가가 이 책에서 사실적으로 묘사한 파리 서민층 실상의 민낯을 가장 험악하게 독자에게 직면시키는 칼날 같은 아픔이었다. 그동안 굶주림에 대한 가장 뛰어난 문학이라고 늘 생각해왔던 노벨문학상 수상자 크누트 함순의 <굶주림>, 폴 오스터의 <빵굽는 타자기>의 묘사를 뛰어넘는, 마치 조지오웰의 <위건부두로 가는 길>을 읽는 착각이 들 정도의 생생한 묘사였다. 가난하다는 것, 굶주린다는 것이 어떠한 아픔인지를 잘 알기에 나는 읽는 내내 가슴이 찢어졌다. 바주주 영감의 뻐구기 시계가 3시를 쳤다. 그녀는 아직도 3시밖에 되지 않았다는 생각에 눈물이 나왔다. 7시까지 기다릴 힘이 도저히 없었다. 그녀는 심한 고통을 잊으려는 소녀처럼 몸뚱이를 흔들어대며, 배고픔을 느끼지 않기 위해 몸을 구부리고 쭈그려 앉아서 열심히 배를 눌렀다. 아! 배고픈 거보다는 아이를 낳는 게 훨씬 편하겠다! (414) 배고픈 것보다 아이를 낳는 게 훨씬 편하겠다고 생각하는 제즈배르의 배고픔, 아직 세 시밖에 되지 않아 저녁까지 남은 하루를 어떻게 견딜 수 있을까 절망하는 제즈배르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또 다른 우리의 모습이다. 이런 책을 살 수도, 읽을 수도, 토론할 수도 없을 정도로 가난하고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지금 우리 주변에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 생각을 하면 이렇게 책을 읽고, 생각하고, 토론한답시고 앉아서 이 책이 어떻네 저떻네 하는 것들이 모두 사치스럽다는 생각에 슬퍼진다. 아,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 저자는 그저 파리 서민층의 삶을 고발할 뿐, 윤리적인 문제는 관여하지 않겠노라고 말했다. 내가 이 책을 읽고 뭔가 실질적인 행동으로 직접 실천하는 것이 없다고 할지라도, 나는 이 책을 읽기 전의 내가 아닌 것은 분명하다. 나는 에밀 졸라의 <목로주점>을 읽고 난 사람으로서 살아갈 것이다. 내가 앞으로 어떤 마음과 어떤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야 할지는 내가 가장 잘 알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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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밀 졸라가 누구인지 어떤 영향력이 있었던 작가였는지 그런건 관심없었다. 하지만 그가 남겼던 몇몇 작품을 오래전에 이미 난 읽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인지하고 작가 개인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이 책을 다시 읽게 되었다. 책 자체는 출판사에서 책장에 잘 놓아둘 수 있게 고전스러운 디자인 그리고 보너스같은 사진과 삽화가 책안에 배치되어있고 역사적인 사실을 작가의 삶과 더불어 기록되어 있어서 이야기와 별개로 기분좋은 소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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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빅토르 위고와 더불어 19세기 프랑스를 대표하는 작가 중 하나인 '에밀 졸라'는 사실주의와 자연주의를 드러낸 여러 작품을 발표했다. 에밀졸라는 19세기 중반의 정치적/사회적 갈등에 휩싸인 프랑스의 상황을 사실적으로 드러내고자 1871년 '루공가의 재산'을 시작으로 1893년에 발표한 '파스칼 박사'에 이르기까지 거의 년마다 작품을 발표했다. '루공 마카르 총서'라 칭해지는 이 20권의 시리즈를 통해 한 뿌리에서 파생된 두 가계(루공가와 마카르가)의 삶을 냉정한 관찰자의 눈으로 파헤치고 당시 '제2 제정기'를 겪고 있던 격동기의 프랑스인의 삶을 표현했다. '목로주점'은 총서의 7번째에 위치한 작품으로 주인공 제르베즈의 불운한 삶을 통해 도시의 변두리에 사는 하층민들의 삶을 묘사하고 있다. '목로주점', 이 책을 읽는 내내 제르베즈의 기구한 삶에 동정심과 더불어 암울함을 피할 수 없었다. 그녀의 삶은 어느것 하나 제대로 돌어가는 것이 없었으며 작은 희망의 빛이 비추는듯 하다가도 이내 사라져버리는 좌절과 슬픔의 반복이었다. 제즈베르는14살의 어린 나이에 임신해 동거를 시작했고, 녹녹치 않은 결혼생활에 돌파구를 찾아 파리로 이주하지만 가난한 자에게 도시생활은 하루하루 끼니를 걱정해야 하는 처절한 일상의 반복이었고 남편 랑티에마저 바람나 도망가 버리자 그녀의 삶은 더 각박해진다. 그럼에도 생에 대한 의지와 희망을 품고, 성실함을 무기 삼아 생존을 위해 발버둥 치다보니 좋은 사람을 만나 새롭게 살림을 꾸리고 자신의 가게를 차릴 수 있게 되었다. 그녀에게도 밝은 미래를 암시하는 서광이 비추는 듯 했지만 그것도 잠시, 그녀를 둘러싼 환경과 사람들은 다시 그녀를 나락으로 끌어내린다. 그녀는 절망적 현실에서 벗어나고자 곧은 자세와 성실한 태도로 버텨보지만 안타깝게도 그녀의 삶은 진흙창에서 벗어날 수 없다. 무엇이 그토록 그녀를 괴롭히고 그녀의 삶을 사회의 맨 아래층, 그 중에서도 다시 하류에 속하는 삶으로 끌어당겨 놓았을까! 처음에는 그녀를 둘러싼 악한 환경이라 변명할 수 있지만 제르베즈가 자신의 삶의 방향을 결정할 수 있는 기회를 쥐었을 무렵부터는 그녀가 스스로를 망치는 주역이 되어버린다. 그녀와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들, 남편, 친척, 이웃 등은 그녀의 작은 성공에 질시하고 그녀의 실패에 고소함을 느끼는 선한 마음을 읽어버린 사람들이었고 그런 자들로 인해 제르베즈의 좌절과 절망은 깊어지고 선한 마음과 성실함을 읽어간다. 안타까운 점은 제르베즈는 성실함과 겸손함을 잃어가고 있음에도 스스로 자각할 수 있는 소양이 부족했기에 그녀에게 일어나고 있는 그릇된 변화를 인지하지도 못하고 바로 잡지도 못했다는 점이다. 내가 에밀졸라의 작품을 처음 접하게 됐던 건 '제르미날'을 통해서다. 어떤 책인지 제목이 기억나진 않지만 19세기 유럽 노동자들의 삶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작품으로 '제르미날'을 추천했고, 큰 기대감 없이 읽었던 '제르미날'이 내게 에밀졸라에 대한 경외감을 품게했다. 배경이 되었던 탄광의 분위기를 묘사한 부분이나 노동자들의 주거 공간, 의복, 행동 등을 표현한 문장들이 굉장히 명확하고 구체적으로 다가와고, 탄광 노동자들의 처지를 빌려 당시의 열악한 노동 환경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이를 개선하고자 시도했던 사회적 흐름을 엿볼 수 있었다. 책에서 받은 감흥이 깊었기에 1993년 제작된 영화 '제르미날'을 찾아보게 됐고, 글에서 묘사했던 환경, 배경, 인물 등을 시각적으로 재구성해보고 머릿속에서 맴돌던 내용을 보다 구체적으로 정리할 수 있었다. '제르미날'을 계기로 에밀졸라에 대해 더 찾아보고, 이번에 읽은 '목로주점'을 비롯한 여러 작품에 대한 호기심을 갖게 됐다. 덕분에 '루공 마카르 총서'의 순서와 대략적인 흐름, 그리고 한국에 발간된 에밀 졸라의 저작들을 알게 됐다. '루공 마카르 총서'는 각각이 하나의 완결된 소설이지만 주인공들은 혈연으로 이어져 있다. 각 작품을 읽는데 전혀 불편함이 없을 정도의 연관성이지만, 아마 20권의 총서를 모두 읽는다면 19세기 중후반의 프랑스의 사회적 분위기를 계층별로 들여다볼 수 있고 에밀졸라가 소설을 통해 알리고자 했던 당시의 사회상을 전체적으로 파악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목로주점'에 등장하는 많은 인물들을 통해 '가난'이 얼마나 사람을 결핍되고 잔인하게 할 수 있는지를 생생한 서술로 접하게 된다. 비슷하게 빈궁한 형편을 살아가는 서민들이 서로를 의지하고 끌어 줄 것이라 믿는 선한 기대와 달리, 자신보다 조금이라도 나은 위치로 나아가는 자들에 대한 강렬한 시기와 질투, 그리고 상대방의 도약을 폄하하고 상대방의 불행에 쾌재를 부르는 이 사람들에 대해서 제르베즈에게 느끼는 연민과는 다른 형태의 연민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나는 어떠한가'라는 질문에 잠시 머무르게 된다. '나는 누군가의 행복을 진심으로 축복해주고 누군가의 불행에 진심으로 슬픔을 주는 사람인가'를 자문해 봤을 때 '그렇다'고 대답할 수 없는 사람이라 부끄럽다. 마지막으로 선과 악이 어디서부터 오는 것인지에 대한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어려운 형편이 악을 부르는 것인지, 악하기 때문에 어려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인지, 이 난해한 질문은 현대까지도 이어져 내려와 우리 곁에 머물고 있는 듯 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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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밀 졸라가 스스로 가장 '순결한' 작품이라 말한 소설이다. 자신이 쓴 최초의 민중 소설이자 자연주의의 성행을 알린 작품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만큼 인물들의 비참함이 가장 잘 드러난다. 한 사람도 빠짐없이 비참함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데, 아무래도 민중들의 삶을 관조적으로 표현했기 때문에 연재중지가 되기도 했다. 그 어떠한 작품보다도 당시 프랑스의 암울하고 꿈과 희망도 없는 현실을 가장 잘 묘사한 것이 장점이라고 할 수 있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