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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은 추천을 받아서 읽게 되는 경우가 많다. 제목이 근사한 이 시집을 구입해놓고 며칠 흘려보냈다. 할 일이 늘어서 그런지 잠이 늘어서 그런지 요즘 일찍 자게 된 때문이다. 시집은 별점 체크하는 것이 없었으면 좋겠다. 아니 책에 별점을 채우는 일은 매번 부담스럽다.
시집을 읽을 때 '시인의 말'을 따로 메모해 두는 노트를 하나 장만했다. 책 속의 시를 읽기 전 가슴 두근거리며 펼치게 되는 시집의 맨 앞에 나와 있는 이 짧은 말에 시집의 정수가 담겨있는 듯해서다. 김행숙 시인은 훔친 물건을 돌려주기 위해 다음 날 밤을 기다리는 /도둑이 있었다.//저마다/ 더 깊은 밤이 필요했다. 라고 적었다. 따로 할 말을 적기보다 시로 시인의 말을 대신했으니 시를 한 번 읽어보자.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내 기억이 사람을 만들기 시작했다 나는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는가, 그래서 나는 무엇인가 사람처럼 내 기억이 내 팔을 늘리며 질질 끌고 다녔다, 빠른 걸음으로 나를 잡아당겼다, 촛불이 바람벽에다 키우는 그림자처럼 기시감이 무섭게 너울거렸다 사람보다 더 큰 사람그림자, 아카시아나무보다 더 큰 아카시아나무그림자 그러나 처음 보는 노인인데……힘이 세군, 내 기억이 벌써 노인을 만들었다면 나는 어떻게 되었을까 나는 생각을 할 수 없었다, 생각을 하는 누군가가 나를 돌보고 있었다
기억이 나를 앞지르기 시작했
어미를 생략한 동사로 마무리 한 첫 시를 읽으며 어느 날 문득 컨트롤 되지 않는 기억 때문에 깜짝 놀라고 있을 미래의 나를 보았다. 기억으로 구성 된 내가 더 이상 기억을 만들지 못하고 기억 속에 빠져 허우적대는 것도 모자라 기억만이 앞으로 나간다면 더 이상 나를 나라고 할 수 있을까. 이 시집은 기억을 화두로 삼으며 우리를 만든 기억의 세계를 톺아보았다. 그 동심원에는 카프카와 그레고르 잠자와 벌레와 시인이 있었다.
간지럼은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했다. 그렇지만 나는 내가 아니고, 카프카는 카프카가 아닌 순간이 있다. 그 순간에 ㅋㅋㅋㅋ 계속 웃어야 한다면 우리는 드디어 참을 수 없는 고통에 빠지게 된다. 나는 나를 뒤집어야 한다. 허공을 향해 가늘고 많은 내 다리들이 웃고 있다. 아우성치고 있다. 이봐, 날 좀 도와줘. 카프카, 카프카, 지금 대체 뭘 보고 뭘 듣고 있는 거야. 쫓기는 사람처럼 카프카가 맹렬하게 글을 쓰기 시작한다. (카프카의 침상에서, 부분)
카프카는 왜 아직도 많은 사람의 사랑을 빼앗아 가는가. 그 매력이 어디서 나오는지 콕 집어 말할 수 없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더 빛나는 드문 작가임은 분명하다. 김행숙 시인을 사로잡은 카프카의 매력을 엿보고 싶다면, 시인이 붙잡은 그레고르 잠자의 세계에 대해 알고 싶다면 이 시집 곳곳에서 만날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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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이 잘 생각날 때도 있지만 하나도 생각나지 않을 때도 있어요. 꿈을 꾸다가 잠깐 깨고는 괜찮은 꿈이었어 하고 다시 자고 일어나면 그 꿈이 생각나지 않기도 해요. 자면서 꿈 잊어버리지 않아야지 하면 정말 잊어버리지 않기도 해요. 꿈은 무의식이 만들어내는 건지, 생각이 만들어내는 건지. 둘 다일 것 같아요. 그러고 보니 얼마전에 안 좋은 꿈 꿨어요. 그건 제가 걱정하는 일이었어요. 걱정이 똑같이 꿈으로 나타나기도 하죠. 안 좋은 꿈은 잊고 좋은 꿈만 기억하면 얼마나 좋을까요. 언제나 반대가 되는군요. 기억도 다르지 않네요. 전 꿈꾸는 거 좋아해요. 꿈이 생각나면 잠을 깊이 못 잔 거겠지만. 꿈을 이어서 꾼다는 사람도 있던데, 저는 그런 일 딱 한번 있었어요. 한동안 학교 다니고 시험 보는 꿈을 꿨는데 이제 그런 꿈 안 꾸는군요. 차라리 그게 나은데. 그 꿈에서 저는 다른 사람과 다르게 문제 못 푼다 해도.
네가 나를 찾아서 돌아다니는 곳들이 궁금해. 너는 어디에 있는 나를 기억할까. 너의 상상력은 나를 어디까지, 어디까지 데려갈 수 있을까. 나를 상상하는 너를 상상하면 나는 네 둘레를 하염없이 맴돌 수 있을까. 너를 상상하는 나를 상상하면 너는 내 꿈으로 걸어 들어올 수 있을까. 너는 나를 물끄러미 들여다본 적이 있었다, 한참을. 그리고 모르는 사람이라고 중얼거렸지. 미안합니다, 너는 사람을 잘못 봤다고 몹시 부끄러워했어. 내가 사람 모양을 하고 있구나, 그때 난 생각했지. 너는 왜 부끄러울까.
그때 너는 다른 시간 속으로 후다닥 뛰어갔다. 그때 나는 너의 등 뒤에서 비처럼 쏟아졌다. 내가 비 모양을 하고 있구나, 그런데 내 모습이 그렇게 변한 걸 사람들은 어떻게 알았을까. 기다렸다는 듯이 사람들 머리 위로 검은 우산이 둥실둥실 떠다니기 시작했어. 사람들은 거의 젖지 않았어. 그리고 너는 그날 우산도 없이 빗속에서 나를 찾으러 어딜 그렇게 그렇게 쏘다녔을까.
-<의식의 흐름을 따르며>, 20쪽~21쪽
이 시는 꿈속에서 누군가를 찾는 걸까요. 꿈속에서 만난 건지. 어쩐지 시가 꿈 같네요. 김행숙 시인 시집은 처음입니다. 이번이 여섯번째 시집인 듯한데. 지금까지 이름도 몰랐습니다. 책을 읽지 않아도 이름 아는 작가 있기도 하잖아요. 언젠가 황인찬 시인이 라디오 방송에서 김행숙 시인 시를 읽어줬어요. 이름을 그때 안 건 아니지만, 그걸 들으니 새로 나온 김행숙 시인 시집 한번 보고 싶더군요. 그 시가 담긴 시집을 봐야 했을지도. 한달에 시집 한권 보기는 잘 못합니다. 보려고 사둔 시집은 여러 권인데. 꿈은 알기 어려워요. 자기 꿈이든 남의 꿈이든.
잘 아는 길이었지만…… 우리가 아는 그 사람처럼 알다가도 모를 웃음처럼
안개가 자욱하게 낀 날이었어요. 눈을 감고도 갈 수 있는 길이었지만 눈을 감지 못하는 마음이었어요. 나는 전달책 K입니다. 소문자 k입니다.
거기까지 가는 길은 아는데 왜 가는지는 모릅니다. 오늘따라 나는 울적합니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어요. 이럴 때 나는 내가 불편합니다.
만약 내가 길가에 떨어진 돌멩이라면 누군가가 나를 주워 주머니에 숨길 때 그 마음을 누군가가…… 누군가를 쏘아보며 나를 집어 던질 때 그 마음을 내가 어떻게 알겠어요? 내가 알면 뭐가 달라지나요?
평소에도 나는 나쁜 상상을 즐겨했습니다. 영화 같은 영화보다 더 진짜 같은
그러나 상상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라면 우리의 모든 상상이 비껴가는 곳에서 나는 나를 재촉했습니다. 한 명의 내가 채찍을 들고 한 명의 내가 등을 구부리고
잘 아는 길이었는데 눈을 감고도 훤히 보이는 길이었는데…… 안개가 걷히자 거기에 시체가 있었습니다. 두 눈을 활짝 얼어놓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무슨 심부름을 가는 길이니?>, 68쪽~69쪽
시집 제목이기도 한 시네요. 길을 잃었다는 말이 나오다니. 이 시 다기 보기 전에 라디오 방송에서 스트레이(stray)라는 말을 들었어요. 저 말 들어본 말인데 무슨 뜻이더라 했습니다. 바로 떠올렸느냐 하면 그러지 못했습니다. 무슨 뜻인지 말하는 걸 듣고서야, ‘맞아’ 했습니다. 시간이 조금 지나고 스트레이 쉽이 생각났습니다. 이건 어디에 나오는 말일까요. 소세키 소설 《산시로》지요. 하루키도 쓴 적 있던가 했는데 그건 모르겠네요(《양을 쫓는 모험》이 그거던가). 이 시 마지막에서는 시체가 기다렸네요. 나였는데 우리가 되다니. 그건 나와 나일까요. 시체도 자기 자신이 아닐지. 제 마음대로 생각했군요. 아직도 꿈에서 벗어나지 못했나 봅니다.
밤에만 꿈을 꿀까요. 잠은 밤에만 자지 않는군요. 낮에 자면 더 이런저런 꿈을 꿀지도 모르겠습니다. 온다 리쿠는 꿈은 바깥에서 온다고 했는데. 전 아침, 낮도 좋지만 밤을 더 좋아해요. 그때 깨어있는 게 좋아요. 다른 사람은 잠들고 조용해서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아침이 오기 전에 자야 할 텐데. 잠을 잘 때만 꿈꾸지 않아요. 깨었을 때도 꿈꿔요.
김행숙 시인은 카프카를 좋아하는가 봐요. 카프카나 그레고르 잠자 이야기를 시로 쓰기도 했습니다. 잠자는 성이지만, ‘잠 자’ 하는 말로 봐도 괜찮지 않을지. 이런 말장난을. 카프카가 쓴 소설은 꿈 같지 않나요. 이야기는 어떤 것이든 꿈 같군요. 이야기를 쓰는 것뿐 아니라 읽는 것도 꿈으로 들어가는 거네요. 이런 생각하니 멋집니다. 여기 담긴 시는 꿈 같습니다. 현실을 나타내는 말도 있을지 모를 텐데 제가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시를 만나는 건 괜찮아도 시를 말하기는 어렵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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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신이 보낸 심부름꾼 - 김행숙 시집 『무슨 심부름을 가는 길이니』 (문학과 지성사, 2021)를 읽고
설익은 풋과일의 독기를 넘어 완숙미라고 하면 좋을까. 쥐락펴락하는 노련미에 끌려다니다 나온 것 같다. 변주를 위한 변주로 국내외의 유명 작가들의 작품들이 끌려 나왔다. ‘내가 더 잘 쓸 수 있다’고 당당하게 외치는듯 하다. 특히, 프란츠 카프카는 아주 여러 번 등장 한다.
“꼭 잡고 있던 아이의 손을 놓치면 영영 잃어버리는 것”(「1월1일」)부터 바짝! 긴장되었다. 길거리의 가난한 사람들, 노점상, 취객까지 “우리는 저마다 기다란 불꽃 같을 거예요”라고 위로하는 말들로 추운 겨울날에 추운 것들의 손을 잡아 주고 싶어 하는 선한 시인을 만났다.
“나를 상상하는 너를 상상하면 나는 네 주위를 하염없이 맴돌 수 있을까. 너를 상상하는 나를 상상하면 너는 내 품으로 걸어 들어올 수 있을까.”(「의식의 흐름을 따르며」) 시를 생각하고 시를 찾아 헤매며 시가 찾아오길 바라는 오직, 시 쓰기만 생각하는 시인이다.
「밤의 층계」에서 “가장 깊은 밤이란, 달의 인력이 파도처럼 계단을 공중으로 끌어 올리는 것이다. 그리고 계단에 빠진 사람은 삶의 바닥이 얼마나 깊은지 깨닫고 커다란 충격에 휩싸이는 것이다.”라고 썼다. 차이구어치앙이 고향 바다 밤하늘에 쌓은 ‘천국으로 가는 계단’이 떠올랐다. 그 계단을 타고 다른 세상으로 훌쩍, 넘어갈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삶의 바닥이 깊은 사람에게 밤에는 잠깐, 너그로운 공상이 허용되는 시간이기도 한 것 같다.
「담배와 콩트」는 밝고 환하고 즐거운 분위기도 아닌데, 슬프게 읽히는데도 좋아서 되풀이해 읽었다. “허공에 그려진 물음표”, “순간아! 너는 반딧불이처럼 아직 꺼지지 않는 담뱃불이 허공에서 깜박이는 것” 김행숙! 시인은 순간의 빛처럼 영원히 빛나는 시인이기를!
두 사람, 두 명, 두 자매, 너와 나, 커피와 우산, 우산과 담배, 두 장의 커튼, 두 개의 날개, 검은 천 두 장, 굴뚝청소부 두 명 등 시인은 외로움을 극도로 싫어하는 사람은 아닐까. 사물도 사람도 친구를 만들어 주려는 것 같다. 시인은 좌나 우로 치우치지 않고 모두를 아우르는 생각을 갖고 있는 품이 넓은 사람인 것 같다.
그러나 상상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지만 우리의 모든 상상이 비껴가는 곳에서 나는 나를 재촉했습니다. 한 명의 내가 채찍을 들고 한 명의 내가 등을 구부리고 - 「무슨 심부름을 가는 길이니 」 중
「무슨 심부름을 가는 길이니?」를 읽고 나서, 시인도 나도 ‘신이 보낸 심부름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무슨 심부름을 왔는지는 스스로 기억해야 하는 것 같다. 존재론적 물음과 그 사명을 찾아야 했다. “상상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라고 말하며 스스로 채찍을 들고 채찍을 맞으며 “눈을 감고도 훤히 보이는 길이었는데” 뚜렷한 해결책을 모르고 살아가는 현실에서 나는 신의 심부름을 무사히 완수할 수 있을까 걱정 되었다.
책의 끝까지 읽고 나서 나는, 신의 심부름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사물이든 사람이든 외롭지 않게 하라는 사명을 눈치채고 말았다. 그 아름다운 심부름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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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어도 열어도 다 열리지 않는 기다란 서랍처럼 그 복도를 나는 천천히 걸어간다. 아직도 끝이 보이지 않다니. 그 복도의 길이를 도무지 믿을 수 없어서 뒤를 돌아보면, 누군가 나를 가만히 지켜보고 있는 것이다. 그때, 우리는 아주 잠깐 눈이 마주쳤을 뿐, 어느 생의 법정에서도 서로의 얼굴을 영원히 증언할 수 없을 거야. - 그 복도 일부 - 믿을 수 없을 만큼, 무언가가 갑자기 이루어지는 순간이 있다. 그런 순간이 오면, 기쁨에 앞서 당황함이 먼저 다가올 것이다. 그런 순간 나는 어떻게 기쁨을 표현해야 하는 것일까. 믿을 수 없어 뒤를 돌아보면, 내가 걸어온 길에 어느 덧 그런 일이 있었구나 하는 생각들. 슬프지는 않다. 그리고 몹시 기쁘다. 그래서 나는 어딘가로 가고 있는 이 순간. 이제는 나를 찾을 때가 되었나. 어딘가에 나는 있겠지 하는 생각은 여전히 하지만, 나는 여전히 못 찾는다. 열어도 열어도 열리지 않는 어느 마법의 문처럼. 어느 순간 내가 갑자기 열리기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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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행숙 작가님의 <무슨 심부름을 가는 길이니> 처음엔 이북으로 구매하여 읽었다가 완독하고 나서는 꼭 종이의 질감으로 직접 페이지를 넘기며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종이책 또한 구매하게 되었습니다 곱씹고 매만지게 되는 문장들이 많아서 계절마다 한번씩 재독할 것 같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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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과지성사 출판사에서 출간된 김행숙 작가님의 [도서] 무슨 심부름을 가는 길이니 리뷰입니다. 시집을 읽어보고 싶어서 둘러보다가 충동적으로 구매한 시집인데 읽기가 어렵지도 않고 한 번씩 펼쳐 보기 좋았어요. 이렇게 시인 한 분을 알게 되네요. 다른 시집도 얼른 둘러보고 하나씩 추가해야겠습니다. 시리즈로 나오는 시집이라서 모으는 재미도 있을 것 같아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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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김행숙 시인의 시집 『무슨 심부름을 가는 길이니』는 2020년 여름에 나온 시집인데, 참고로 2020년은 시인이 데뷔한지 21년이 되는해였단다. 90년대에 데뷔해서 2000년대를 주도한 미래파 시인인 김행숙 시인이 등단한지 벌써 22년이 되었다니, 내가 이 시인을 좋아한지도 정말 오래됐구나 하는 새삼스런 마음이 든다.
이 시집은 총 3부로 구성되는데, 1부의 제목은 '기억이 사람을 만들기 시작했다'이다. 첫 시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나 「고도의 중얼거림」 등 기존의 문학작품을 연상케 하는 제목의 시들부터 마치 연작시처럼 읽히는 「커피와 우산」, 「우산과 담배」, 「담배와 콩트」를 포함해 대부분의 시들이 다 좋다. 꽤 분량이 긴 시들이 많은데, 모두 군더더기 없이 집약되어 있다.
개인적으로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와 「밤의 층계」가 좋았다. '시인의 말'을 음미하면서, '밤'의 의미에 천착하며 시들을 읽게 된다.
II 2부의 제목은 '바보의 말을 탐구해보자'이다.
1부의 시들도 그랬지만 2부에 실린 시들도 어떤 시나 작품을 인용하거나, 그 작품에 기인해서 시작한 시들이 많다. 전반적으로 '리뷰' 혹은 '리라이팅'이라고 해도 무방할 성격의 시들이다.
2부의 시들 중엔 「변신」이 가장 좋았는데, (아마) 이 시집을 대표하는 시라고 해도 무방하지 않을까 싶다. 그만큼 좋다. 이 시집 전반의 성격이 가장 잘 드러난 시라고 생각된다.
1920년 7월 29일, 카프카는 55kg이었다고 한다. 눈을 감으면 어둠속에 희끗희끗 나타나는 것, 그것은 신장 182cm의 카프카가 밀레나에게 장문의 편지를 쓰려고 구부렸던 등뼈의 잔상이다. 이날 카프카는 밀레나에게 두 통의 편지를 썼는데, 그 두번째 편지에서 자신은 물리에 대해서는 그 어떤 것도 이해할 수 없었노라고 고백한다. '나는 세상의 저울을 이해 못 하겠소. 물론 그 저울도 나를 이해 못할 게 분명하오. 그렇게 거대한 저울이 55킬로그램밖에 안 되는 나를 가지고 도대체 무얼 할 수 있겠소. 아마도 내가 존재한다는 사실조차도 모를 거요' (p.57)
카프카가 밀레나에게 쓴 이 편지를 읽고 시를 쓴다면 어떤 시가 나올 수 있을까? 이 편지를 쓰는 카프카를 떠올리며 쓴 시는 어떤 형태일까. 그게 궁금하다면 「변신」이라는 김행숙의 시를 읽어봐야 한다. 단연코 최고의 시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2부는 전체가 카프카에 대한 시들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위에서 언급한 「변신」이 그런 것처럼 2부에 실린 거의 대부분의 시들도 카프카를 호명하거나 카프카나 그의 작품들을 모티브로 한다. 아예 제목이 '「변신」 후기'인 시도 있다. 위에서 이 시집은 전체적으로 리뷰 혹은 리라이팅의 성격을 가진다고 지적했는데, 그런 이 시집의 성격이 매우 잘 드러나는 것이 바로 2부, 특히 그 중에서도 '「변신」 후기'라는 시다.
'각주가 있는 시'라는 게 이 시집이 가진 또 하나의 특징인데, 각주에서 언급하는 작품들이나 작가들을 보면 시인의 선호나 시인을 시로 이끈 것들이 무엇인지 유추할 수 있다. (개인적으로는 그 점도 좋았다.이 시집이 가진 미덕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III 3부 '우리가 그림자를 던지자 첨벙, 하고 커다란 소리를 냈다'에 실린 시들은 뭐랄까... 시리아 내전처럼 어떤 극한 상황에 처한 사람들을 연상케 하는 시들이다. 2부가 '김행숙=카프카=그레고리 잠자'에서(혹은 '으로') 쓰여진 시들이라면, 3부는 조금 결이 다른 셈이다.
3부의 첫 다섯 편의 시들이 내전을 경험한 화자에 의해 쓰여진 것 같다면, 이후의 열다섯 편의 시들은 하나의 주제나 모티브로 묶이지는 않는다. 굳이 말하자면 전작인 『에코의 초상』처럼 다양한 '에코'들의 목소리처럼 읽힌다.
「에코의 중얼거림」에서 그런 인상이 가장 강렬한데, 이 시는 전작인 『에코의 초상』을 연상시키면서도 이 시집의 에필로그의 역할도 하고 있는 것처럼 여겨진다.
이 시집은 기본적으로 리뷰이자 리라이팅이라는 지적을 계속 하게 되는데, 3부의 시들 역시 그러하다. 배수아 등 기존에 언급했던 작가부터 심지어 양준일의 노래 가사까지 시의 일부로 이용되고 있다.
개인적으로 2부에 수록된 시들이 가장 좋긴 하지만, 시집이 전반적으로 다 좋다. 근래에 읽었던 시집들 중 압도적으로 최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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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밤의 기도 -김행숙 지금 내 어머니의 입술은 끓는 물 같습니다. 기도 중입니다. 불쌍한 여인이 불쌍한 여인을 이기는 중입니다. 작은 몸 안에 교회를 짓는 중입니다. 예배당 밖에서 나는 붉게 언 손을 비비며 어머니를 기다리다가……우리 동네의 미친 사람을 만났습니다. 나는 달아났습니다. 그의 눈동자와 머리카락은 일찍이 하얗게 타버렸습니다. 그에게 나는 십 년 전에 가출한 계집애로 보입니다. 내가 아부지다, 내가 니 아부지다, 괴성을 지르며 쫓아왔습니다. 겨울밤에 우우우 버림받은 짐승처럼 울부짖었습니다. 돈을 받지 못하거나 이제 그만 나오라는 말을 듣거나. 내일의 알 수 없음으로 불안해질 때 기도를 합니다. 친구 따라 간 교회에서 찬송가를 부르고 그날의 기도를 올리고 식당으로 들어가 밥을 먹었습니다. 그때가 제일 좋았습니다. 식판에 밥을 가득 담아 달라고 미역국을 더 달라고 말하지는 못했고 주는 대로 먹고 나오는 일요일 아침. 집에 전화가 없어 엄마가 연락을 줄 수 없어 교회로 전화를 한다고 했습니다. 예배 시간에 잠깐 방에 들어가 전화를 받게 해달라고 말해야 했는데 그 말을 못 했습니다. 엄마는 하염없이 전화를 걸었다고 나중에 말했습니다. 왜 전화를 받지 않았느냐고. 언제 만날지 몰라요. 만나는 건 확실해요. 미안한데 사랑한다고 말해야겠어요. 기도합니다. 열대야 -김행숙 한밤중에 지구는 미끄러워지는 것 같습니다 지구의 중력은 썰매처럼 차들을 끌고 어디론가 마구마구 달아나는 것 같습니다 술과 침에 젖은 승객은 3일 중에 가장 깊은 잠에 빠지고 검은 선글라스를 낀 기사는 앞만 보고 있습니다 앞에 뭐가 있길래? 밤 속의 밤 속의 밤 속의 밤에? 땀을 뻘뻘 흘리며 자다가 일어나서 베란다로 나왔습니다 나는 어떤 생물인가? 방충망 앞에서 독백을 시작하는 나는 방충망의 구멍들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하는 나는 날아가지 못하는 나는 작은 구멍을 들락날락하는 날벌레들에 대해 꾹 닫은 입에 대해 곡기를 끊고 7일 후 공기를 끊은 입에 대해 너는 중요한 것을 택시에 두고 내릴 거야 다음 날 알게 되는 것들에 대해 중얼거리기 시작했습니다 이미 시작되었다가고 중얼거리기…… 끓어오르기…… 달걀을 삶는 밤입니다. 삶은 달걀이니까요. 풋. 마트에서 보내오는 광고 알림을 유심히 들여다봅니다. 달걀 한 판에 2.990원. 냉장고에 넣어 놨다가 삶기 시작합니다. 긴 낮잠을 자고 깨어나니 날이 저물었습니다. 여름에는 참지 못하고 에어컨을 틀었습니다. 죄책감을 갖지 않으려 더운 척 연기하면서 리모컨을 찾는 하루였습니다. 마스크를 쓰고 나가야 해서 외출은 자제했습니다. 도시에 갑자기 코로나 확진자 수가 늘어나면서 일을 쉬어야 했습니다. 불안과 두려움이 늘어가는 밤. 스티븐 킹을 읽었고 텔레비전을 샀습니다. 나의 밤에 가벼운 환희가 깃들길 바라면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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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아는 길이었지만 우리가 아는 그 사람처럼 알다가도 모를 미소처럼 안개가 자욱하게 낀 날이었어요. 눈을 감고도 갈 수 있는 길이었지만 눈을 감지 못하는 마음이었어요 나는 전달책 k입니다. 소문자 k입니다." - 무슨 심부름을 가는 길이니? 안개가 낀 날 심부름을 떠나야만 한건지 심부름을 떠나니 안개가 낀건지 어디로 가야만 안개가 흩어지는지 어디로 가야만 살아갈 수 있는지 어디로 가야만 함께할 수 있는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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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의 뒷표지에 적혀있던 시와 시인의 말이 마음에 들어 평소 시를 잘 읽지 않음에도 덥썩 구매하게 되었다. 줄 글처럼 긴 길이의 시들이 많아서 평소 소설에 익숙해져있던 나로서는 읽기 더 편했다. 각 부마다의 내용이 일관성이 있고 좋은 문장이 많아서 필사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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