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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4월 16일 세월호 사고의 충격으로 온 나라가 슬픔에 빠졌다. 너무 많은 학생들의 목숨을 앗아간 참사이기에 그들의 가족과 이웃뿐 아니라 대다수의 시민이 눈물을 흘리며 안타까워했다. 진도 팽목항까지 가서 자원봉사를 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안산의 분향소에서 추모하는 이들도 많았다. 저마다 자신의 방법으로 슬픔을 공감하고 위로했다.
당시 내가 즐겨듣는 팟캐스트가 여럿 있었는데, 1~2주에 한 번씩 방송을 업데이트했다. 과학 상식을 다루거나 책을 소개하는 내용이었다. 갑작스러운 세월호 사고 비보에 진행자들도 방송을 취소할까 하는 생각을 했다는데, 그렇게 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조금은 다른 방식으로 추모에 참여했다. 이야기를 나누고, 슬픔을 말하면서 그들 자신과 청취자에게 따뜻한 위로가 되어주었다.
그때 한 과학방송에서는 '별의 탄생과 죽음'이라는 주제로 광대한 시공간의 우주 속에서 작고 나약한 인간의 존재에 대해 생각하게 했다. 인간은 별에서 와서 별로 돌아가고, 그 별도 언젠가는 우주 저 너머로 사라져 간다. 우리 개인의 삶은 유한하지만 나는 더 크고 지속되는 존재와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삶이 허무하지는 않다는 생각에 위로를 받는다.
책을 소개하는 방송은 문학평론가 신형철이 진행한 <문학 이야기>였다. 원래 다루려던 내용을 내려놓고 그는'슬픔'을 진솔하게 들려주는 것으로 한 시간 반을 채웠다. 타인의 슬픔을 완벽히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우리는 이해해 가까이 다가가려는 노력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고. 슬픔은 공부해서라도 배워야 하는 것이라고 말이다. 그 공부에 필요한 내용이 이 책에 담겨있다.
신형철이 그때 방송에서 했던 말 중 일부를 대략 옮겨본다.
슬픔 앞에서 무감각하고 무례했던, 그래서 우리를 분노하게 했던 분들이 있다. 라면을 먹고, 기념사진을 찍고, 종북을 운운했던 분들, 그리고 상황을 지휘하고 이끌었어야 했던 사람들의 무표정한 얼굴, 이런 것들은.. 슬픔에 대한 무감각은 그 자체가 폭력이 아닐지는 모르겠지만, 그것이 밖으로 드러날 경우에는 매우 폭력적인 것이 될 수밖에 없다. 흉기로 사람을 찌르는 것만큼이나 슬픔의 당사자들에게는 고통스러운 일이 될만한 일이다. 당신들이 슬픔이 무엇인지 모른다면, 그것을 배워야 한다고 말해주고 싶다. 이 말은 내가 나 자신에게 그리고 우리 모두에게 해당되는 말이어서 나 자신과 모두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일지도 모르겠다. 당사자가 아니라면 그 슬픔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안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도록,, 더 정확히 이해할 수 있도록 노력은 해야 한다. 노력할 수 있는 잠재력 정도는 우리에게 있다라는 것 그것이 중요한 것이다.
티브이에서 몇몇 언론인들이 방송을 진행하면서 목이 메어 침묵을 지키고 눈물을 흘리고 했던 그 장면을 보면서 그 모습 자체가 우리에게 감동적이었던 이유는. 인간이라는 게 이런 존재지... 세월호와 진도 vts 사이의 교신은 엉망이었지만, 슬픔이라는 감정의 교신은 이런 식으로 이뤄지는구나라는 것을 확인하면서 느끼는 안도감 같은 것이 아니었나. 도무지 슬픔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 앞에서 예의조차 갖추지 않는 사람들을 보면서 인간과 인간 사이의 슬픔의 교신이 이토록 어렵구나라는 절망감을 느꼈다가 그 순간에 교신이 성공하는,, 완전한 성공은 아니겠지만, 모습을 보면서 안도감을 느꼈던 것이죠.
설명을 안 해주면 모를 때는 설명을 해줘도 모를 것이다. 우리는 타인의 슬픔을 완벽히 100% 이해하고 완전히 공감하는 것은 불가능할 수밖에 없는 불완전한 존재들일 텐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럴 수밖에 없는 불완전한 존재라면 슬픔이라는 감정에 대해서도 우리는 공부를 해야 한다.라는 생각을 저는 했습니다. 왜 이 중요한 것을 학교에서 가르쳐주지 않는 것일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우리를 분노하게 했던 그분들, 그리고 정도의 차이가 있을지언정 본질적으로는 다르지는 않을지도 모를 우리 자신이 슬픔에 대해서 더 많이 공부하기 위해서 도움이 될만한 그런 글들을 한번 읽어드려보면 어떨까. 그게 지금 제가 할 수 있는 일중의 하나 아닐까.
지금까지도 그때의 방송을 가끔 듣는다. 다른 사람의 감정을 제대로 알지 못하면 위로할 수 없다고 신형철이 말했다. 따뜻한 인간애와 진실한 성의만으로는 위로가 발생하지 않는다고. 감정을 읽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나는 종종 타인의 감정을 읽는 데 실패한다. 어색하고, 난처해진다. 하지만, 방송의 이야기가 나에게 위로가 되었던 것은 이해에 가까이 가려는 마음이었다. 마음을 느끼게 되면 정확히는 알지 못해도 위로에 가닿는다고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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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가 되면 항상 올해는 독서를 열심히 할거라고 다짐하여 읽어보고 싶은 읽어야지 생각한 슬픔의 위안이라는 책을 한권 구입하였다
뒤에 적힌것 처럼 아직 책을 다 읽지는 않았지만 다 읽고 나면 나도 읽고 큰 위로를 작은 위로라도 받았으면 좋겠다 (저번 책과 마찬가지로 왜 책을 구입하면 항상 검정 자국이 남아있는지 하얀책이라 더 티가 잘 보인다
슬퍼하는 사람이 주변에 있다면 아무말 말고 그냥 옆에 있어주자 옆에 있어주는게 큰 힘이 될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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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다가 멈추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 하는 일이 바빠서 독서할 여유가 사라졌을 때, 기대보다 재미가 없을 때, 예상했던 내용이 아닐 때, 너무 좋아서 아껴 읽고 싶을 때, 또 뭐가 있으려나…. 어쨌든, 이 책은 읽기를 포기했다. 위에 열거한 이유는 아니다. 여유가 없을 만큼 바쁘지도 않고, 재미도 있다. 예상한 주제의 책이고, 아껴서 읽을거리는 아니다. 멈춘 이유는, 너무 쓸쓸해서다. 사별과 슬픔에 대해 감당하기 힘들어서이다. 오래전 사별의 경험에서 겪지 않았던 감정이 살아 돌아오려 해서 이 책 읽기를 포기했다. 참 잘 쓴 책이다. 슬픔의 디테일을 극한까지 묘사한 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슬픔의 세포를 모두 깨워낼 만큼 무시무시한 책이기도 하다. 잘 간직하다가, 견디기 힘든 슬픔의 순간이 오면 꺼내보려 한다. 몇 안 되는 "봉인된 책"의 리스트에 올랐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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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개를 끄덕거리면서 읽었다. 2020년 책들은 비교적 쉽고 빠르게 읽힌다. 내 지능으로는 이정도 글이 가장 알맞는 것 같다. 전기가오리 나는 못 읽는 사람 * 시바타 쇼에서 살짝 실망했는데, 이번에는 만족한다. 잘해보자는 의미에서 만점을 주었다. * 슬픔 덕분에 누릴 수 있는 심리적 특전은 슬픔이 애매모호함을 이해하게 해주고 삶의 진실이 절대 하나가 아니라 적어도 둘, 보통은 그 이상임을 일깨운다는 점이다. 슬픔은 자기 이야기만 변화시키는 게 아니라 삶 자체에 대한 이야기도 변화시킨다. 중요한 사람을 잃고 나면 삶은 절대 다시는 명백해지지 않는다. 다시는 삶이 그냥 한 가지가 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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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은 어떠한 삶을 살아가든 결국 본인이나 가까운 이들의 죽음을 마주할 수밖에 없게 된다. 이러한 경험으로 결국 슬픔과 좌절, 방황 등을 겪게 될 수 있고 적지 않은 시간 동안 고통을 느끼게 될 수도 있다. 이 책은 이러한 것들에 대해 현실적인 대안과 적절한 도움을 주는 내용들로 이루어져 여러 가지로 도움이 되었다. |
| 신형철 평론가님의 책에서 이 책을 언급한 부분이 있어 궁금해서 구매해보았습니다. 한창 상실과 애도, 불안에 대해 골몰하던 떄여서 더 구미가 당겼던 것 같습니다. 그런 시기를 좀 지나와서 뒤늦게 읽었는데 너무 좋았던 책이었습니다. 추천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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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까운 사람의 죽음이 찾아올 때 우리를 지나가는 가장 큰 감정은 슬픔이다. <슬픔의 위안>은 소중한 사람의 죽음을 경험한 후 어느 날 찾아온 슬픔을 가만히 응시하게 되기까지 슬픔에 관한 이야기를 진솔하게 풀어낸 에세이로 인상적이다. 뿐만 아니라 이 책은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과 연관된 문학작품이나 다양한 사례들을 통해 슬픔이라는 감정을 내밀하게 전하며 독자의 어깨를 천천히 쓰다듬는다.
이 책은 '1장 슬픔의 무게, 2장 정직한 대면, 3장 아홉 가지 위안, 4장 슬픔의 흔적'이라는 4개의 목차로 구성되어 있다.
"슬픔에는 절대적인 것이 없다. 쉽게 견딜 비법도 없고 빠져나갈 구멍도 많지 않다. 사별의 슬픔처럼 개인적인 경험을 이해하고 나면 다양한 방식으로 다양한 사람과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누구든지 슬픔을 이해하는 자신만의 길을 찾아야 할 것이다. 책은 그 길을 가는 동안 동행해줄 뿐이다. 슬픔은 아주 개인적인 경험인 만큼, 책을 읽다 보면 분명 당신의 독특한 상황에 맞는 길을 찾아낼 것이다. 부디 그러길 바란다. 그것이 바로 이 책의 존재 이유다."
저자는 사랑하는 이가 죽은 뒤 잃게 되면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떠올릴 수 있는 가장 소소하고 평범한 것들이라고 말한다. 가장 익숙하고 일상적인 것들이 우리 삶이라는 피륙 속에 가장 깊이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저자는 삶을 사소한 것들이며, 슬픔은 그 사소한 것들을 비틀어서 떼어내 버린다고 이야기한다. 죽음은 사소한 것들을 베어내 버리고 난 뒤 그 자리를 공허감 대신 인식 가능한 고통의 무게로 채운다. 이 책에서 슬픔은 저항할 수 없는 고통의 실체라는 저자의 글에 깊이 공감한다. 특히, 저자가 셰익스피어의 희곡 <존 왕>에서 콘스탄스라는 여인이 어린 아들을 잃은 뒤 부재라는 무거운 실재에 대한 생생함 묘사하며 지극한 슬픔을 표현한 글을 소개하여 눈길을 끈다. 이 희곡은 셰익스피어 자신이 어린 외아들 햄릿을 잃은 직후에 쓴 것이다.
"슬픔은 떠나간 아이의 빈방을 채우고, 아이의 침대에 눕고, 나와 함께 서성거리고, 아이의 귀여운 표정을 짓고, 아이가 하던 말을 흉내 내어 말하고, 아이의 사랑스럽던 몸 구석구석을 떠올려주고, 아이의 형상이 되어 주인 잃은 아이의 옷을 걸치네."
저자는 시몬 드 보부아르가 <편안한 죽음>에서 다음과 같이 어머니의 마지막 나날을 회고하며 쓴 글을 이야기한다. "물건의 힘은 모든 사람이 알고 있다. 그 속에 생이 응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생의 그 어느 순간보다 바로 이 순간 더욱 분명하게, 탁자 위에 놓인 물건들은 버림받고 무용한 존재가 되어 쓰레기가 되거나 새 주인이 나타나기를 기다린다." 저자는 보부라으는 여동생이 얼마 전 고인이 된 어머니의 물건 하나에 아주 강렬하게 반응하는 것을 보고 나서 이 같은 통찰에 이르었고, 그 물건은 단순한 검은 장식용 리본에 불과했지만 보부아르의 여동생은 그 리본을 보고 감정이 북받혀오른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저자는 아무리 위대한 생일지라도 마지막에 가서는 몇 가지 물품으로만 남을지 모른다는 인식만이 있을 뿐이라고 이야기한다. 한때 사랑하는 사람의 소유였던 물건은 놓아버리기 쉽지 않지만 떠나보내야 할 때가 찾아온다.
"한 사람의 온 생애가 그렇게 쉽게 마분지 상자나 큰 가방에 담긴다는 것에 충격을 받는 이들이 있을지도 모른다. 당신이 사랑하는 누군가가 트렁크 하나로, 혹은 트럭 한 대 분량의 잡동사니로 쪼그라들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 것이다. 당신은 자문할지 모른다. "이게 다라고? 그 사람의 전부가 고작 이거라고?""
저자는 모루는 대장장이가 쇠를 단련할 때 쓰는 도구로, 슬픔에 빠진 사람들에게는 항상 그들을 후려치는 모루가 있다고 말한다.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낸 지 서너 달이 지나 그럭저럭 지내는 것 같을 때, 예상치 못한 계기로 촉발된 감정에 휘달려 만신창이가 된다. 특히, 저자는 이런 순간은 스스로 아주 잘 견디고 있다고 자만할 때 느닷없이 찾아와서는 당신을 우스꽝스러운 꼴로 만든다고 이야기한다. 뿐만 아니라 저자는 무엇 때문에 모루가 떨어질지는 절대 알 수 없으며, 작가 콜레트가 이런 상황을 섬세하게 그린 글을 소개하여 인상적이다. 하늘은 당신이 정확히 언제 슬픔에 빠지는지, 정확히 언제 떨어지는 모루를 피하며 살아가는지는 모른다. 저자는 다른 사람들 역시 똑같은 일을 겪을 것이고, 그래서 당신이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면 위로가 될 것이지만, 그렇다고 그 모든 결코의 무게가 가벼워지는 것은 절대 아니라고 이야기한다.
"참 궁금하다. 슬픔으로 가장 고통스러울 때 어떻게 눈물을 보이지 않고 꿋꿋할 수 있는지. 그런데 그때 누군가가 창문 뒤에서 다정하게 손짓을 하거나, 어제만 해도 봉오리에 지나지 않던 꽃이 어느새 환하게 피어 있는 것을 보거나, 서랍에서 편지 한 통이 떨어진다. ...... 그러면 모든 것이 무어져버린다."
저자는 끔찍한 일을 당하면 처음에는 슬픔에 짓눌릴 수 있지만 슬픔은 이미 일어난 나쁜 일 때문에만 느끼는 감정을 아니라고 말한다. 슬픔은 일어나지 않을 모든 좋은 일 때문에 느끼는 감정이기도 하다. 저자는 당신은 고인이 된 사랑하던 이와 삶의 가장 멋진 순간에 함께하지 못하는 모든 행사를 깨닫기 시작할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아이의 탄생이나 졸업이나 결혼식이 모두 그런 경우다.
저자는 슬픔은 아무 예고도 없이, 한 순간에 찾아온다고 말한다. 그러면 모든 것이 변한다. 슬픔이 찾아오는 순간 우리는 늘 깜짝 놀란다. 모든 사별의 슬픔은 끔찍한 순간과 함께 시작된다. 저자는 이 순간의 온전한 의미는 참으로 가슴 아프고 남과 나눌 수 없을 만큼 깊고 고독하다고 이야기한다. 이처럼 저자는 사랑하는 이를 잃고 슬픔에 빠져 있는 사람은 아마 거의 늘 가벼운 패닉 상태를 느낄 것이라고 말한다. 슬픔은 언제라도 뭔가 나쁜 일이 다시 일어날지 모른다는 불안한 감정이라고 볼 수 있다. 신이 끝마무리를 하려고 준비하고 있다는 두려움을 느끼는 것이다. 저자는 사랑하는 이를 보내고 슬퍼하는 많은 사람들이 이런 감정을 안고 살아간다고 이야기한다.
"끔찍한 순간에는 정직해지기가 어렵다. 정직해진다고 해서 이미 일어난 슬픔과 비극이 완화되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분명 패닉은 줄여준다. 순간의 무섭고 혹독한 시련을 이겨내려면 엄청난 용기가 필요하다. 어니스트 헤밍웨이가 용기를 "강요된 품위"라고 정의한 것은 유명하다. 그러나 슬픔에 관해서라면 아마도 시인 필립 라킨의 정의가 더 적절할 듯하다. 그에게 용기의 의미는 사람들을 두렵게 하지 않는 것이다."
저자는 죽음과 슬픔은 미래와 젊음, 건강과 활력, 즐거움이라는 당당한 미국적 미덕과 완전히 대립된다고 말한다. 죽어가는 사람과 죽은 사람 때문에 슬퍼하는 이는 패배자다. 저자는 상실을 비정상적으로 보는 문화적 특성 때문에 상실을 겪는 사람은 자신을 어딘가 문제 있고 사회적으로 용인받을 수 없는 예외적인 존재로 느낀다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저자는 슬픔과 결부된 이상한 수치심, 사랑하는 이를 잃어 모욕을 당한다는 수치심에서 해방되길 바란다고 조언한다.
저자는 고인에 대한 존경의 글을 지나치게 과장해서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고인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솔직하게 알려주는 것이라고 말한다. 수수하지만 글 속의 고인이 선명하게 그려져야 한다. 저자는 시간이 지나도 빛을 잃지 않을 만들은 감상적이지 않고 진실하다고 이야기한다. 고인에 대한 글은 장엄하게 쓰려고 하는 대신 의미를 잘 전달하는 수수한 말 한마디와 정곡을 찌르는 묘사를 찾는데 힘쓰는 게 낫다고 이야기한다.
저자는 슬픔은 신처럼, 때로는 신보다 더 강한 존재로 느껴질 만큼 대단한 위력을 발휘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저자는 유머는 슬픔이라는 거인을 말뚝 한두 개로 쪼그라뜨린 뒤 그 힘을 빼앗고, 파이로 내리쳐서 음울한 위엄을 악화시키는 방법이라고 이야기한다. 저자는 슬픔의 폭풍우 한가운데에 있을 때 반드시 떠올려야 하는 것은 다시 유머를 즐기게 되리라는 것, 삶은 계속되리라는 것, 시계는 다시 똑딱똑딱 가고 별들이 다시 보고 싶어지리라는 것이라고 말한다.
저자는 슬퍼하는 사람이 참 하기 어려운 것 가운데 하나지만, 순수한 휴식은 슬픔의 고통을 치료해주는 가장 효과적인 치료제라고 말한다. 사랑하는 이를 잃고 비탄에 잠긴 이들은 자기 자신을 가장 혹독하게 감시하는 감독자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저자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슬픔에 잠겨 있다면, 휴식이 주는 치유의 첫 단계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저자는 자연은 스스로의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동시에 그 섭리 속에 숨어 있는 오래된 지혜를 느끼게 하는 방식으로 우리를 위로하며, 사랑하는 이를 잃고 비통해하는 사람은 자연이 좋은 것이라는 가르침을 다시 받을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저자는 자연은 슬픔이 일으키는 문화의 위협을 겪고 난 후에 우리가 우리 자신을 회복시키는 데 필요한 하나의 수단이라고 이야기한다. 뿐만 아니라 저자는 최상의 상태에 있는 자연을 접하면 우리는 자연이 얼마나 선한지, 얼마나 공정하고 아름다우며 신성한 경이로움인지 이해하게 된다고 말한다. 저자는 슬픔이라는 역경에는 좀처럼 달콤한 것이 없지만, 우리는 자연 덕분에 비록 슬픔은 좋지 않더라도 삶은 좋은 것임을 깨닫는다고 이야기한다.
"자연은 당신이나 당신의 슬픔, 당신의 삶에 아무 관심이 없다. 도우려고 하거나 옳은 말을 해주거나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주지도 않는다. 자연은 둔감하고 무관심하다. 자연 자체 그리고 경외심을 불러일으키는 온갖 자연현상과 비교하면 당신은 하찮아 보인다. 이런 기분을 느껴보려고 그랜드캐니언에 갈 필요는 없다. 억수같이 쏟아지는 폭우를 보고도 느낄 수 있으니 말이다. 자연과 접해보면 생명이라는 더 거대한 관성 안에서 우리의 역할이 보잘것없음을 깨닫게 되지만 오히려 그런 깨달음이 진실한 위안과 평온함을 준다. 자연은 우리에게 책임질 일이 없음을, 그리고 그것이 좋은 일임을 깨닫게 한다."
"우리는 평범한 삶에서 너무도 많은 진실을 외면한다. 슬픔이 주는 몇 안 되는 선물 가운데 하나는 사람들이 슬픔을 겪고 나서 진실을 돌아보게 된다는 점이다. 사랑하는 누군가가 죽었다는 사실보다 더한 진실은 아무것도 없다. 자신이 누구인지, 사람들이 사랑해주는지 아닌지, 미래의 모습은 어떨지 같은 것들은 얼마든지 거짓으로 말할 수 있다. 교묘하게 속일 수 있는 것들이다. 그러나 사별의 슬픔은 속일 수 없다. 사랑하는 이는 영원히 가버렸으며, 그것으로 끝이다. 슬픔이 진실의 어두운 면이라면 자연은 진실의 밝은 면이다. 어떤 식으로든 자연과 접촉하면 그 이면에 지혜롭고 상서로운 무언가가 있다고 느끼게 된다."
저자는 슬픔으로 괴로워하고 있다면 일상이라고 부르는 것이 주는 위안이 존재한다고 말한다. 그날그날의 소소한 활동과 기분, 상호작용에서 크나큰 위안을 얻을 수 있다. 이처럼 저자는 흔히 진정한 회복이 시작되는 순간은 평범한 일에 빠져 있는 자기 자신을 발견하는 때라고 이야기한다.
저자는 슬픔은 자기 이야기를 바꾸고,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한 기존의 생각을 변화시키는데, 흔히 그 변화는 도발적이고 혁신적이라고 말한다. 뿐만 아니라 저자는 슬픔 덕분에 누릴 수 있는 심리적 특전은 슬픔이 애매모호함을 이해하게 해주고 삶의 진실이 절대 하나가 아니라 적어도 둘, 보통은 그 이상임을 일깨운다고 이야기한다. 슬픔은 자기 이야기만 변화시키는 게 아니라 삶 자제에 대한 이야기도 변화시킨다는 저자의 글에 공감한다.
"사별을 겪고 비탄에 젖은 모든 이들은 틀림없이 "당신이 없는 난 누구지?" 하는 의문이 들 것이다. 그리고 그 질문에 답을 하면서 자기 이야기는 되살아난다. 슬픔은 자기 자신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다. 자신이 사랑한 사람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하며, 자신이 사랑한 사람의 인생에 대한 이야기다. 또 그 사람과 함께한 자기 자신의 인생에 대한 이야기인 동시에 그 사람 없이 살아야 하는 자기 삶에 대한 이야기다. 슬픔은 자기가 자신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다. 그러나 공저자가 있다. 사랑한 사람의 죽음으로 인해 해방된 감정들이 계속 제 목소리를 내려고 할 테니 말이다. 이 사실에 익숙해지라."
<슬픔의 위안>은 소중한 사람의 죽음이라는 상실이 남긴 슬픔이라는 감정을 제대로 들여다보고 따뜻한 위안을 전하는 책으로 깊은 여운을 남긴다. 뿐만 아니라 이 책은 슬픔이 지나가는 과정을 경험하는 주변인들을 어떤 태도로 대해야 하는가에 대한 배움을 얻을 수 있어 인상적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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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서 조금 아슬아슬한 부분이 있다면 근래들어 많은 현대인들이 반려견이나 반려묘 혹은 반려새 반려오리 심지어는 반려로봇청소기까지. 하여튼 남다른 유대감을 형성해서 그 반려무엇들과의 이별에서 사람과의 이별 못지 않은 상실감을 느끼는 시대가 도래했기때문에, 저자의 문장 중에서, 그런 반려무엇들과의 이별을 사람과의 이별보다는 조금 축소시킨 발언이 있어서. 근데 저는 반려묘는 길러본적이 있기는 하나 저도 매우 사랑했고 고양이에 환장한 사람이긴한데 제 개인적인 취향으로 동물권운동가나 혹은 동물을 인간비슷하게 취급하는 것을 안좋아하기때문에. 근데 슬픔은 존중해야하니까. 뭐 그렇다고 치고.
뒷 부분에 남성과 여성의 애도과정의 차이에 대한 부분도 조금 아슬아슬하게 느껴지기는 했습니다만, 그럭저럭 납득이 아예 안가지는 않았고. 성별적 경향성에 관한 문제는 저도 답이 내려지지 않아서. 그런데 한쪽으로 지나치게 편중된 느낌은 아니었어서 만족스럽게 읽었습니다.
일단 카테고리가 깔끔하게. 주제의식에 맞게 전개가 산만하지 않아서 좋았구요. cs.루이스가 헤아려본 슬픔 이라는 작품에서 부인과 사별한 경험에 대해 쓴 에세이가 자주 인용되는데, 저도 그책 한 십년전에 봤거든여. 덕분에 간만에 그책도 다시 봤네여.
글을 보는 내내 느낀것이. 우울증을 비롯해서 많은 "슬픔" 의 증상을 가진 기분장애들도 이런 애도의 과정과 매우 닮아있구나. 하는 생각. 참 힘들겠다. 하는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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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슬픔 중에서도 사랑하는 이를 잃은 사별의 슬픔을 대하는 방법에 대한 글이다 슬픔은 마냥 회피할 것이 아니라 정직하게 마주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치유에 더 도움이 된다 하지만 모든 것을 대면할 필요는 없다 절대 마주하고 싶지 않은 부분들은 끝까지 외면해도 된다 슬픔은 겪은 자들만이 서로를 이해할 수 있고, 평소에 아무리 가까웠던 사람들이라도 사별의 슬픔을 겪은 이들에게는 도움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실수를 하거나 상처를 줄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어쨌든 사랑하는 사람이 떠났어도 우리의 삶은 계속 되기에, 슬픔을 정직하게 마주하고 들여다보고 나아가야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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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에 대한 다양한 에피소드가 많은 도움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다음은 책의 내용 중 기억에 남는 문장들이다.
반면에 "당신이 그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알겠어요"는 나름의 확신을 가지고 할 수 있는 말이다. 누군가가 다른 쪽 끝을 잡고 있으리라 믿고 붙잡을 수 있는 밧줄이다.
"밤새도록 휴대전화를 쥐고 있을게요. 당신 전화번호가 뜨면 언제라도 받을게요"라고 말해준다면 한결 더 낫다. 이는 그 사람이 알 수 있는 사실이고, 또 할 수 있는 일이다. 신뢰해도 되는 밧줄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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