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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경란의 소설집 『사람들』 중 <언덕 위의 집>
아픈 아들의 소원을 들어주기 위해 가난한 아버지는 언덕 위에 집에서 산다. 하늘과 가까운, 마지막 계단이 있는 곳에. 그리고 배고픈 사랑이 담긴 맛난 아채를 판다. 좋은 사람, 귀밑머리 반듯한 사람은 아들의 소원을 지키기 위해 재개발을 반대한다. 그리고 그들에게 나쁜 사람이 된다. 부자가 되기보다 전설을 지킨다. 그리고 전설이 된다. 이 작품에서는 길이 있다고 하지만 정말 길이 있는걸까? 우리는 언덕 위의 집을 찾기나 하는 걸까? 무심과 방관, 오히려 자신의 이익을 망친다며 손가락질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 사람의 처지가 어떻든지 간에. 집들이 어떻게 이어지고 어떻게 길이 있게 되었는지는 관심 없이 말이다. 이 시대는 전설을 잃어버렸다. 전설을 이어갈 아이를 잃어버렸다. 날고 싶다는 소년을. 그럼 나는 어떠한가? 나 또한 전설을 잃어버린 이 사회의 일원이다. 나의 전설을 찾아가야겠다. 언덕 위의 집, 잃어버린 진정한 소망의 전설을 되찾아야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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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경란의 소설집 『사람들』 중 <당신의 자서전> -분명 꿈이었다. 분홍돌고래의 출현이 바다일 수는 없었다. 아마존이어야 옳았다.-
분홍돌고래는 진짜 아마존에 산다. 우리는 자신의 범위 안에서만 타자를 판단한다.
단편<사람들>에서도 륜은 진실을 찾는다. 금령도, 양춘도, 리켈, 날개. <당신의 자서전>의 화자도 진실을 찾는다. 이 사회에서 진실은 비웃음과 무관심과 외면의 대상이다. -제가 알고자 하는 진실의 실체는 저입니다.- 곧, 진실의 실체인 자신에게 조차도 비웃음과 무관심과 외면을 하는 시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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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경란의 소설집 『사람들 』 중 <그날 이후로 >
금령은 자신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TV 에서 듣고 알 수 있었다 . ‘위안부 ’ 침묵하고 싶었던 일을 들추는 것은 너무나 불편한 일이다 . 그러나 같은 일을 겪은 누군가가 침묵을 깨고 말한 것은 금령에게 충격이었다 . 금령은 그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야 했다 . 그래서 글을 배운다 . 우리는 다문화가정을 이룬 리엔에게 대문을 활짝 열어 주었던가
60 년 넘는 세월을 조용히 숨 죽이고 살던 금령이 서울 나들이에서 본 일본 대사관 앞의 모습은 충격이었다 . 그들은 무슨 말을 하고 있는가 ? 금령은 그것이 궁금했다 . 침묵을 깬 그들의 말을 알고 싶었다 . 우리는 쉽게 죽지 않는다 . 작가는 금령이 집으로 돌아 오는 길에 비를 맞게 함으로 금령의 몸을 드러나게 만든다 . 숨기려 했던 금령의 기억이 드러나는 것이다 .
그래서 당신도 나를 사랑하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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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반대 황경란의 소설집 『사람들』 중 <킹덤> (이 책을 다 읽지 않고 단편들을 읽어가며 리뷰를 쓸 예정이다. 일종의 읽기 과정의 리뷰.)
첫문장: 타마타브 항구의 밤이 어둠의 빛을 잃었다. 마지막 문장: 리켈은 양손을 모아 입에 대고 할아버지를 향해, 아버지를 향해, 자신의 소원을 외쳤다.
황경란의 소설집 『사람들』 의 작품들을 읽으려면 맨 앞에 있는 <사람들>을 자꾸 봐야 한다. <사람들>에서 잘나가는 작가가 썼다는 『삶의 반대』, “가난보다 추할까”를 보여 주는 작품이 <킹덤>이다. “그게요 선배” 하며 부장에게 “가난은 추하지 않아요. 가난보다 추한 건요, 세상에서 가장 추한 건, 그건….” 하며 륜이 말 줄임표를 남겼다. 난 그 지점에 물음표를 넣어었다. 륜이 ‘무슨 말을 하려는 걸까?’와 '나의 답은?' 없었기 때문이다. <킹덤>이 그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황경란 작가 특유의 절제된 묘사와 은유, 글의 구조, 문장과 단어에 소름이 돋았다. <킹덤>의 장소적 배경은 타마타브, 말라가시어로 토아마시나 "소금기 있는" "소금 같은"뜻을 가진 도시이다. 세계에서 4번째로 큰 섬 마다가스카르의 두 번째 큰 도시로 동부에 위치한 항구도시이다. 바오밥나무가 상징인 마라가스카르는 프랑스에서 1960년 독립하였고, 군권력의 통치가 있었다. 1970년대 민주화 투쟁들이 있었고, 1990년대 민주화를 받아들여 2000년대 이후 정치적 안정을 이루었다. 1990년대 IMF 관리를 받은 적이 있다. 한국은 2007년 광업진흥공사가 암바토비에 니켈광 합작 투자에 진출했다. 마다가스카르 밀레니엄 빌리지 프로젝트 지원 사업등을 했다. <킹덤>은 이런 배경을 바탕으로 한다. 작가는 이런 배경설명 없이 시작한다. 이런 점은 독자로 하여금 <사람들>을 이해하게 하는 작가의 의도로 보인다. <킹덤>은 열다섯 리켈이라는 소년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여덟 살 아이 때 만난 “안녕하세요”라고 인사하는 한국인 쌩파(프-synpa 호감을 주는 상냥한)와 그들이 7년 동안 지어가는 킹덤이 마을을 어떻게 바꾸는지 보여준다. 그리고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기억하는 리켈의 선택을 보여준다. 아버지는 흑인의 얼굴이 너무 까매서 그들이 감정을 읽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는 그들에게 시위로 자신들의 뜻을 전달한다. 할아버지는 할아버지의 시대의 문제를 가지고 정부와 싸웠다. 그들은 단지 어부로 살고 싶을 뿐이었다. 그러나 아무도 그들의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정부도, 기업도, 마을 사람들도. ‘킹덤’은 제련소의 머리이며 팔, 다리 같은 철골 구조물을 가지고 있다. 마을의 전기를 몽땅 끌어다 쓰며, 220킬로미터의 관이 암바토비 광산과 연결되어 있다. 컨테이너박스는 리켈이 보기에 킹덤의 먹이다. 쌩파의 말대로 광산의 니켈이 컨테이너에 실리는 순간 타마타브는 이곳의 킹덤이 아닌 저들의 킹덤이 되었다. 숲은 사라지고, 낮에는 고기 잡고 밤에는 깊은 잠에 빠져는 삶을 더 이상 살지 못하며, 누구의 엄마, 누구의 언니는 매음굴로 간다. 그리고 새로 산 아버지의 배는 정박시킬 부두가 없다. 리켈은 할아버지가 왜 민주화를 외치는 사람들에게 있었는지, 아버지는 왜 컨테이너 부두에 가서 시체로 돌아왔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들이 원하는 것은 어부의 삶이었기 때문이다. 그곳은 어부의 삶과 상관없는 곳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젠 여덟 살이 아닌 열다섯의 리켈은 알 것 같았다. 매음굴 앞에 정차된 화물차에서 경유를 빼내고 이제는 제 키 높이가 된 컨테이너 위로 올라간다. 사회 서적에서나 볼 수 있는 이야기를 단편으로 만나니 완전 다른 느낌이었다. 사회 서적에서는 머리로만 만났다면 황경란의 <킹덤>에서는 가슴으로 만난다. 그리고 머리로 다시 생각하게 된다. 마다가스카르를 찾아보고 우리나라 광물공사가 한 일도 살피게 된다. 그리고 리켈을, 생파를 기억한다. 쌩파가 리켈에게 준 책 『삶의 반대』, 정말 삶의 반대는 무엇인가? 시인 유계영은 “삶의 반대는 죽음이 아니라 살 수 없음입니다” 이라고 말한다. 리켈은 삶의 반대가 죽음인가 를 스스로 물으며 죽은 아버지를 다시 떠올린다. 그리고 할아버지가, 아버지가 침묵하지 않았듯이 리켈도 자신의 소리를 내기로 결정한다. 가난이 추하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가난의 풍요를 모른 체 풍요의 가난을 짓밟고 자신들이 생각하는 추한 가난으로 바꾸어 버렸다. 그들의 상냥한 권력으로. 삶의 반대를 깨달은 리켈은 할아버지와 아버지처럼 이런 권력을 향해 행동하고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향해 자신의 소원을 외친다. 지금 작가는 그 소원을 우리에게 들려주는 것이다. 3대에 이어져 내려오는 그 소원을 나는 이제야 제대로 듣는다. 나비의 날개짓 같은 이 소원이 반드시 이루어지길 나도 소원한다. ‘땅 속의 물과 뿌리가 영원하기를’ 그들의 킹덤이 이루어지기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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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경란의 소설집 『사람들』 중 <선샤인 뉴스>
p18 “ 아! 진실이요? 그건 역사처럼 시간이 필요한 거에요. 그러니까 최소한 하루라도 독자들에게 시간을 주는 거죠. 이게 제가 꿈꾸는 신문이에요.” 이런 말을 했다. <선샤인뉴스>는 륜의 그런 생각을 치윤을 통해 보여 주는 소설 같다. 그래서 제목이 <선샤인뉴스> 인가? 작가를 만나서 물어보고 싶다. 지난밤 라디오방송을 점자로 기록하고 하루종일 그것들을 생각하고 다시 듣게 되고, 다시 생각하고 읽고 쓰기를 반복하며 기억하는 치윤. 스토리는 단순하게 느껴진다. 흥미가 되지 못할 뻔한 소재로 보인다. 그러나 이야기는 전개 과정속에서 구성, 인물, 장소, 시간, 사건, 문장과 단어들을 의미를 가지고 올올이 엮어있다. 곳곳에 숨겨진 의미의 장치들이 있다. 그리고 독자에게 그 의미를 파헤쳐 다시 풀게 한다. 그러곤 독자만의 것으로 만들어 볼 것을 제안하는 듯 하다. 전문 문학평론가들은 이 책을 어떻게 평론할까? 듣고 싶다. 나의 언어로 이 단편을 리뷰하는 것은 <선샤인 뉴스>를 ‘선샤인’ 답지 못하게 하는 듯 하다. 리뷰를 준비하고 쓰는 동안 ‘<선샤인 뉴스>를 잘 보셨나요? 자, 이제 당신이 채워보세요’ 라고 륜이 말하는 것 같았다. 리뷰, 치윤이 느림을 훈련해야 한다고 했듯이 나에게도 느림의 훈련이 필요한 것 같다. “살려주세요” 우리는 이 소리를 잘 듣고 있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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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경란의 소설집 『사람들』 중 <얼후> 앞의 글 <사람들>에서 나왔던 연변합창단 이야기일까 양춘의 입장에서 글은 전개된다. “가서 걷고 와라.”
p62 “한국 사람들에겐 연변 아리랑이 불순할 수 있어도 우리에게 연변 아리랑은 순정이란 말입니다. 순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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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사 부장의 내면을 중심으로 하여 ‘륜’이라는 부하 기자를 관찰하는 시선으로 쓰여졌다. 륜은 2년차에 사회면 연재 기사를 쓰게 되었다. 그는 주제를 ‘사람들’로 잡았다. 시련을 극복한 사람들의 모임을 만들어 그들을 기억해 한다는 기획의도에 부장은 미친놈이라 생각했지만 ‘사람들’ 이라는 점 하나가 맘에 들어 허락한다. “신문은 일기장이 아니야” “그게 문제죠. 신문에는 선과 악, 행복한 사람과 불행한 사람밖에 없잖아요” 부장은 륜의 ‘은유’와 ‘연민, 환멸을 닮은 흔해 빠진 단어들’을 잘라낸다.
륜이 연재를 쓴 지 얼마 안 되어 갑자기 일본에 ‘시모토리’를 만나기 위해 떠나야 한다고 연락한다. ‘강제전향 장기수’ 시모토리. 그는 죽었는데 륜은 만나야 한다고 한다. 부장은 허락하고 그를 대신해 연재를 쓰려고 준비하면서 륜을 생각한다. 그의 행태, 모양, 그의 글 스타일, 작업 스타일은 생각나는데 정작 륜의 얼굴이 떠올려지지 않는다. 그러다.....
부장은 륜을 대신 해 글을 쓰기 위해 그의 컴퓨터를 켠다. 륜이 분류한 ‘사람들’의 기준은 ‘사람에 의한 시련’, ‘외부 충격에 의한 시련’. 사람을 이렇게도 분류할 수 있구나. 그가 찾은 ‘사람들’이 궁금하다. 파일 맨 밑의 문장. “과거를 잊어버린 사람들은 ‘사람에 의한 시련’과 함께 ‘외부 충격에 의한 시련’을 모두 가할 수 있다.” 그리고 마지막 문장, “그래서, 모든 시련은 여기서 출발한다.” 이 말은 충격이었다. 그야말로 나에겐 뉴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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