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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워가는 것이 아니라 비워가는 자의 미학... <열세가지 이름의 꽃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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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윤의 글은 묵은 먼지같다, 라고 써놓고 보니 정말 그런 것 같다. 한 발 디디면 폴싹,공기중으로 흩어지는 그 알갱이들이 보이는 것만 같다. 하지만 바라보고 있으면 조용히 제자리로 가라앉아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바닥에서 사람들을 올려다본다. 읽고 나도 청소가 덜 된 다락방처럼 말끔하지 않지만,그렇게 기억의 한귀퉁이에서 언제든 청소를 기다리는 방처럼 가라앉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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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윤의 글은 묵은 먼지같다, 라고 써놓고 보니 정말 그런 것 같다. 한 발 디디면 폴싹,공기중으로 흩어지는 그 알갱이들이 보이는 것만 같다. 하지만 바라보고 있으면 조용히 제자리로 가라앉아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바닥에서 사람들을 올려다본다. 읽고 나도 청소가 덜 된 다락방처럼 말끔하지 않지만,그렇게 기억의 한귀퉁이에서 언제든 청소를 기다리는 방처럼 가라앉아 있다.

 

「전쟁들 : 그늘 속 여인의 목선」. 스치듯 지나쳤던 어린 시절의 가장 친한 친구라 불리운 친구들 중의 한 아이를 생각하는 주인공.어른이 되어 남자 친구를 면회하기 위해 찾아간 장터에서 그 아이를 생각하는 주인공.그 장터에서 그 아이의 어머니의 목선을 가진 채소 장수를 찾아낸 주인공. 가물거리는 추억속의 여인에게서 그 목선만이 확대되어 들어오는 주인공의 어설픈 몸짓의 의미들,잘 모르겠다. 과거의 기억들이 마치 하늘거리는 머플러처럼 길고 아련하련하다.

 

「전쟁들 : 숲 속의 빈터」. 서울을 벗어나 얻은 전원주택. 그 전원주택의 목욕탕을 만들 준비를 하며 얻은 설레임과 끈끈한 기대.하지만 뒷산에 나타나 벌거벗은 채 자위하는 남자로 인해 모든 것은 사라지고, 마을 전체에 은밀하게 공유되는 사건의 기억. 폭력이 만들어 놓은 숲속의 빈터가 사적 개인과 마을공동체에 미치는 영향을 향한 외부의 시선.솔직히 무슨 얘기를 하려는 건지 짐작이 안 간다. 차이나 경계, 그리고 사물을 대하는 내부의 시선과 외부의 시선, 은밀한 공유(마을 사람들에겐 과거의 사건, 나와 민구에겐 목욕탕)를 마땅치 않아 하는 타자. 흠...

 

「창밖은 푸르름」은 불온한 상상력으로 뭉쳤던 자살 클럽의 일원들이 살아내는 삶에 대한 이야기이다. 모르트, 데드, 하데스, 데쓰라는 이름으로 자살에 대해, 아니 자살만을 이야기했던 이들은 이제 그때의 기억들을 구석에 밀어 놓은 상태이다. 그래서 창밖이 푸른건가?

 

「파편자전:사물이 영향을 미치는 몇 가지 방식」은 사물을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을 간직하고 있다.물론 뒤집어보면 그건 작가가 사물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사물이 영향을 미친 작가의 생각이라고 할 수도 있다. 단지 그 시선의 근원을 제공한 것을 어디로 볼 것인가의 문제인 것이다.등장사물들은 이렇다. 유성기 바늘. 톰보우 연필. 사물 창고. 상자. 체크 무늬 치마. 물 램프. 비어 있는 창고.

 

아, 최윤의 이 마지막 단편을 읽고 있는동안 무언가 비슷한 것이 얼핏 머리에 떠올라 지워지지 않는다 했더니, 현대문학에 연재되는 미셀 투르니에의 산문이었다. 미셀 투르니에는 그 산문들에서 인간,그리고 그 인간이 겪은 작은 사건들을 통해 자신의 생각을 비워나가는 듯 보였다. 최윤의 글이 그런 것 같다. 자신의 생각을 자신의 글로 완성하거나, 채워가는 것이 아니라 비워가고 있다는 느낌을 주는 것.

YES마니아 : 플래티넘 k******i 2007.02.07.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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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세 가지 이름의 꽃향기 <최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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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풍이 이는 날에는 수로의 난간에 가까이 가는 것을 금하라. 그리고 안개, 특히 겨울 안개를 조심하라..... 그리고 미로 속으로 들어가라. 그것을 두려워할수록 길을 잃으리라.' 소설 의 시작은 이렇게 주문과도 같은 문장 몇 개로 시작된다. 안개와도 같은 하나코를, 십수년만에 찾아가는 - 그 찾아감이 의도적이든, 아니든 - 길은 미로와도 같다. 딱히 어떤 것이라고 규정짓기 꺼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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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풍이 이는 날에는 수로의 난간에 가까이 가는 것을 금하라. 그리고 안개, 특히 겨울 안개를 조심하라..... 그리고 미로 속으로 들어가라. 그것을 두려워할수록 길을 잃으리라.' 소설 <하나코는 없다="">의 시작은 이렇게 주문과도 같은 문장 몇 개로 시작된다. 안개와도 같은 하나코를, 십수년만에 찾아가는 - 그 찾아감이 의도적이든, 아니든 - 길은 미로와도 같다. 딱히 어떤 것이라고 규정짓기 꺼려지는 어떤 사건 후에 하나코와 '우리'들은 멀어졌고, 우리들은 그녀의 이름을 발음하는 것조차 불편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코'라는 암호를 사용하기로 한다. '장진자'라는 촌스러운 이름 대신, 코가 예쁘다는 이유만으로 몇개의 글자를 조합하다 '하나코'라는 그럴듯한 별명이 만들어 진다. 그녀는 그 후에 장진자가 아닌 하나코가 되었다. (나는 여기서 왜 하나코가 하나코인지 알게 되었다.) 물 위로 거대한 도시를 이고 있는, 그 하중을 아슬아슬하게 견디고 있는 베네치아의 골목길이 가지는 아득함과 아슬아슬함만큼이나 하나코에게로 가는 길은 멀고도 어렵다. 결국 그의 발걸음은 하나코에게로 닿지 못하지만, 베네치아에 있는 내내 그녀의 주위를 맴돈다. 하나코와 베네치아는 섞이고 뒤엉켜 마침내 그녀를 계속 추억하게 되는 것이다. 나탈리 우드의 코와 닮은, 앞에서 보나 옆에서 보나 기가 막히게 멋진 코를 가지고 있으며 조각을 공부하는 미대생이며, 누구의 이야기든지 기꺼이 들어주는 여자. 어떠한 이야기에도 놀라지 않으며, 그녀의 예쁘장한 코가 돋보이도록 사십 오도로 얼굴을 쳐들고 이야기를 경청하는 유아같은 체구의 여자. 남자들로 하여금 편지를 쓰고 싶게끔 만들며, 그 어떤 편지에도 가장 멋진 답장을 해주는, 모든 대화에서 오호!하는 감탄사를 내뱉게 하는 멋진 말을 할 줄 아는 여자. 객기어린 시시한 대화에 "왜 그렇게 생각하죠?" 라든지 "아마 우리가 모두 젊기 때문일 그럴 거예요. 어떻게 젊음을 써 야 할지 모르기 때문에 말이죠"라는 말로 '우리'들을 당황게 만들던 여자. 그녀가 '우리'로부터 멀어지게 된 것은 사회 생활을 시작한 후 이삼년 후에 있었던 여행에서였다. 낙동강으로 무작정 차를 몰고 가서, 여관을 잡고 놀던 '우리'들은 갑자기 허탈감에 빠져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고, 그 노래는 시간이 흐름에 따라 노래가 아닌 일종의 '악다구니'가 되어 버렸으며, 그것은 하나코에게 노래를 부르라는 강요 혹은 협박을 변질되어 버렸다. 노래라 면 잼병이던 하나코에게 그들은 협박조로 노래를 부르라고 윽박질렀고, 취기를 가장하여 폭력까지 행사하게 된다. 그리고... 하나코는 광란의 웃음속 에서 친구와 함께 춥고 어두운 밖으로 떠나게 된다. 그리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책 뒤에 있는 해설을 쓴 정과리는 이를 두고 '일상으로부터 탈출하고 싶어하는 무의식적 충동의 표현으로서의 '가장된 취기'는 '광란의 웃음'을 거쳐, 그 탈출의 상징적 표지(하나코)를 마침내 망가뜨리고 만 것이다' 라고 설명하고 있다. 실제로 하나코는 그들에게 있어서 탈출구이자 안식처였다. 그들은 여자 친구와의 관계가 틀어지거나 소일거리가 없을 때 하나코를 불 러내곤 했다. 심지어 결혼 날짜를 잡기 일주일 전에 하나코에게 열렬한 구애의 편지를 보내는 이도 있었다. 그들은 아무도 그들의 결혼식에 하나코를 초대하지 않았고, 하나코 역시 그들에게 "설마 결혼식 같은 것을 그토록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아니겠죠?"라는 말로 미안함을 일축시키는 여자였다. 자신의 신상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라치면 슬그머니 말머리를 돌리는, 땅 위에 두 발을 딛고 살아가는 것 같지 않은, 문 뒤의 다른 세상에서 살고 있는것 같은 여자, 그녀가 하나코였다. 학교를 졸업하고 일상의 챗바퀴에 - 얼마나 훌륭하게 써먹을 수 있는 표현인가, '챗바퀴' - 지쳐있는 그들은 하나 코를 어둠 속으로 몰아내면서 영원히 그들의 낙원을 버리고야 만다. 결국 그는 하나코에게 전화를 하지만, 만나지 못한다. 그녀에게 아이는 몇이냐고 물었을 때 그녀의 대답은 다음과 같았다. "그렇게 날 몰라요? 그렇게도?" 베네치아에 갔던 '우리' 중의 그 누구도 하나코를 만나지 못했다. 그녀는 흔쾌히 '오세요'라고 대답했건만, 아무도 다시 그녀에게로 돌아가지 못했다. 그들은 이미 너무 멀리 떠나와 있었던 것이다. 아무도 베네치아에서 미로와도 같은 길을 헤치고 그녀에게 닿지 못했다... 그리고 그녀는 외국 바이어들을 위한 이탈리아 잡지에 유망한 디자이너로서 수록된 채로 그와 다시금 조우하게 된다. 그는 그곳에서 그녀의 약력과 디자이너로서 성공하게 된 과정을 접하게 되지만, 전부 생소하기만 한 것들이었다. 그에게 있어서 장진자는 디자인을 공부하는 미대생이기 보다는 편지에 일일이 답장을 해주며, 고개를 쳐든채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들어주던 '하나코'였기 때문이다. 그녀는 더 이상 '하나코'가 아니었던 것이다. 거듭 이 소설을 읽으면서 나는 알게 되었다. 그가 찾는 여자 친구란 일상의 권태를 잊게 해주는 일종의 해소 공간임을. 그리고, 하나를 더 알게되었다. 결코 그는 그녀를 만나게 되지 못할 것임을 말이다. 그런 낙원은 유감스럽지만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낙원은 영원히 낙원으로만 남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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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세가지 이름의 꽃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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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기 소리없이 한점 꽃잎이 지고'를 대학 시절 읽고 난 이후 최윤은 성실한 한국문학 번역자로만 기억하고 있었다. '하나코는 없다'를 오래 전에 읽은 기억이 있으나, 그들의 하나코처럼, 나에게도 그 짧은 소설은 짙은 안개 속에 숨어 있었다.   힘을 내고 싶지만, 기운을 내고 싶지만, 다시 한 번 날아오르고 싶지만, 나 자신을 속이지 않고 정직하게 말해, 힘을 내어본 적도, 기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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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기 소리없이 한점 꽃잎이 지고'를 대학 시절 읽고 난 이후 최윤은 성실한 한국문학 번역자로만 기억하고 있었다. '하나코는 없다'를 오래 전에 읽은 기억이 있으나, 그들의 하나코처럼, 나에게도 그 짧은 소설은 짙은 안개 속에 숨어 있었다.

 

힘을 내고 싶지만, 기운을 내고 싶지만, 다시 한 번 날아오르고 싶지만, 나 자신을 속이지 않고 정직하게 말해, 힘을 내어본 적도, 기운을 내어 본 적도, 날아올라본 적도 없다는 걸 ...

 

어떤 이유로 '하나코는 없다'가 이상문학상을 받았던 걸까. 문학상이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 걸까. 다시 읽고 난 다음, 문학상을 받을 만한가 고개를 가우뚱거렸다. 하긴 사람들은 기억을 잃어가고 있으며 모든 걸 과거의 일로, 지금 일어나는 일은 먼 미래의 일로 여기고 싶을 정도로 너무 빠르게 흘러가는 고통과 상처들을 돌이켜볼 여유도 없으니. 그건 이미 지나간 일이야. 이건 글쎄, 굳이 지금 볼 필요가 있겠어. 나중에 하면 되겠지.

 

출근길 가을 대기가 무거운 게, 가슴 한 곳이 쓰리다. 쓰린 곳을 도려내어 진한 커피 잔 속에 담그며 더 이상 아프지 말아라. 더 이상 아프지 말아라 라고 말을 되뇌인다.

 

더 이상 내 것들이 아닌 이 세상이니, 최윤도 그렇게, 사람이나 마을, 어떤 사건의 실체를 그대로 드러내지 못하고 등장인물의 짧은 대사 속에 숨긴다. 인물들은 어떤 행동을 하지만, 파란 불일 때 건널목을 건너가는 행동이 되지 못하고 파란 불이 켜진 건널목 앞에서 서서 '난 지금 건널목을 건너고 있어'만 중얼거리고 있었다. 모든 것들을 타자화시키고 싶어하며 결국 자기자신마저 타자화시키기에 여념없다. 그러자 인물은 배경 속으로 묻히고 사건은 드러나지 않고 모든 것들은 해프닝처럼 그렇게 독자들 앞을 지나갈 따름이다. 그리고 독자들은 책 앞에 서서 사뿐하게 지나는 문장들을 보면서 감탄해할 지 모르나, 향기는 없고 '향기가 난다'라는 소리만 들었다는 걸 아주 오랜 후에 깨달을 게다. 아주 오랜 후에.  



YES마니아 : 로얄 s***s 2011.06.27.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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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위에 떠 있는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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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자다 깬 얼굴로 뛰쳐나가 베네치아라는 물의 도시로의 여행을 시작한다. 그 도시는 연인들이 사랑에 빠지거나 신혼부부가 사랑을 속삭이는 낭만적인 장소가 아니다. 침몰 직전의 유람선처럼 흔들리는 수면 위에 불안하게 떠있는 거대한 도시, 모든 것이 서서히 바다로 빠져들어 갈 것같은 정신을 잃고 길을 잃어버리게 만드는 곳이다. 작가는 독자를 물에 풍덩 빠뜨린다. 소리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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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자다 깬 얼굴로 뛰쳐나가 베네치아라는 물의 도시로의 여행을 시작한다. 그 도시는 연인들이 사랑에 빠지거나 신혼부부가 사랑을 속삭이는 낭만적인 장소가 아니다. 침몰 직전의 유람선처럼 흔들리는 수면 위에 불안하게 떠있는 거대한 도시, 모든 것이 서서히 바다로 빠져들어 갈 것같은 정신을 잃고 길을 잃어버리게 만드는 곳이다. 작가는 독자를 물에 풍덩 빠뜨린다. 소리의 단절에 놀라고 무중력에 몸을 허둥댄다. 작가는 속삭인다. '미로 속으로 들어가라. 그것을 두려워할수록 길을 잃으리라.' 평화롭고 단조로워 보이는 일상에 어떻게 불안과 폭력이 스며들어 있는지, 또 청산되지 않은 과거가 어떻게 현재로 불려져 오는지 보여주고 있다. 주인공들은 평범한 일상을 꾸려나간다. 결혼을 하고 경제적으로 안정이 되고 자식들이 커가고 친구들과 평범한 모임을 갖는다. 혹은 평범한 일상을 꿈꾼다. 소나무 숲이 앞산에 보이는 곳에 집을 짓고 목욕탕을 만드는 계획을 세우고, 아이를 갖기 위해 병원을 다니고 군대 간 남자친구에게 면회를 간다. 그렇게 삶은 꿈꿔지고 이루어질 수 있는 것 같았다. 『의식 깊이 지배하는 타성의 힘. 그러다가 문득문득 타성의 두꺼워진 각질을 뚫고 그녀를 깨우러 온다. 처음에는 별다른 불편함을 만들지 않을 정도로 미미하게 의식의 문을 두드리고 방문하다가, 어느 날 아무렇지도 않은 사소한 계기로 무섭게 다가온다.』 그러나 주인공들은 잔잔한 물결에 바위가 떨어지듯 일시에 일그러지고 흔들리는 황망한 경험을 한다. 존재는 참을 수 없이 불안하고 위태로워진다. 청산되지 못한 망령들은 과거의 무덤에서 잠들지 못하고 자꾸만 현재에 그 모습을 드러낸다. 별명으로만 친구사이에서 통하는 하나코라는 여인의 소식이 들려오고, 어릴 적 집을 나간 병원 원장의 부인이 나물 장수 아줌마로 나타나고, 동반 자살한 부부의 아이가 집을 무서워하며 악악 울어대고, 숲속 한적한 빈터에 총기난사 사건의 유령이 찾아오고, 자살클럽에서 죽었던 친구가 밤거리에서 자신을 부르고, 아내가 일상용품을 잔뜩 주문하고는 불현듯 자살한다. 수수께끼와 미로의 구덩이에 떨어진 주인공은 조각 퍼즐 게임을 하고 잠수의 유혹에서 벗어나기 위해 수영을 배우고 검은 승용차 안 검은 그림자의 정체를 밝히기 위해 밤거리를 헤매 다니지만 성공하지 못한다. 불안과 미해결의 종종걸음으로 되돌아온다. 저 멀리 검은 골목 끝자락에는 '어둠 속으로 사라진 그림자의 실상'만이 있을 뿐이다. 이들은 거대한 침묵으로 어긋난 조각과 생의 이면을 황망히 쳐다볼 뿐 다시 예전의 평범한 꿈을 꾸던 시절로 돌아갈 수 없다. 관계는 단절되었고 위선과 가식적인 일상만이 현재를 버티는 가면으로 남아 있다. 이제 존재의 흔들림을 경험한 주인공들은 평범하게 일상을 살아나갈 수 없다. 과거의 유산을 청산하지도 완전히 현실의 일상으로 복귀하지도 못하고 혼돈과 미로의 여행에서 발길을 되돌린다. 그렇게 일상을 꾸려나가다 또다시 거리를 헤매고 여행을 떠나고 조각 맞추기를 하며 반쪽짜리 일상을 버티어내는 것이다. 그러나 적은 보이지 않는다. 삶의 미로 벗어나기는 진전을 보이지 않는다. 『"대체 어찌 된 셈이지. 적의 모습이 보이질 않아. 아무리 조각을 맞춰봐도 나타나질 않는군." 내가 밤 산책을 하는 동안 그는 기껏해야 수십 개의 퍼즐 조각을 맞추었을 뿐이다. 여기저기 모아진 덩이들이 있지만 아직까지는 아무런 형상을 드러내지 못한 채 고립된 섬으로 놓여 있다.』 <하나코는 없다=""> <창밖은 푸르름=""> <물방울 음악=""> 전쟁들 3부작들이 보이지 않는 적, 현대인의 삶의 불안함에 대해서 얘기하고 있다면 <열세가지 이름의="" 꽃향기="">는 슬픈 동화처럼 시작된다. 슬픈 운명, 시련, 고독, 열병, 사랑의 자기장, 고통, 혹한을 거치고 깊은 잠에서 깨어나듯 바람국화가 피어난다. 거짓의 세상에 진실의 향기를 풍겨줄 꽃이다. 그러나 바람국화는 학자들의 권력 싸움인 학명 싸움으로 사라질 운명이 되고 서식지는 스키장으로 깎여버린다. 바람국화를 만들었던 파랑손과 바이는 북극으로의 여행을 꿈꾸며 바닷가에서 죽는다. 다만 그 죽음의 장면을 보았던 사람만이 이 슬픈 전설을 기록할 것이다. 예술가의 자화상을 보여주는 작품으로 최윤 자신이 추구하고 걸어가는 작가의 모습이기도 하다. 그의 장편 <겨울, 아틀란티스="">의 모습과 많이 닿아 있다.
v****e 2001.12.08.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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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른한 일상과의 투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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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윤의 중단편 8편 중 제일 눈길을 끄는 작품은 '전쟁들:숲속의 빈터'라는 중편이었다. 이 작품엔 똑같이 지리멸렬하게 반복되는 노곤하고 지루한 일상의 묘사가 섬뜩할 정도로 날카롭게 박혀 있다. 작은 시골 마을에 동거생활을 시작한 남녀의 생활이 불현듯 나타난 한 미친 남성의 행동에 의해 산산조각 부서지게 된다. 정체불명의 그 남성이 둘 사이에 가져온 불협화음의 공포는 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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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윤의 중단편 8편 중 제일 눈길을 끄는 작품은 '전쟁들:숲속의 빈터'라는 중편이었다. 이 작품엔 똑같이 지리멸렬하게 반복되는 노곤하고 지루한 일상의 묘사가 섬뜩할 정도로 날카롭게 박혀 있다. 작은 시골 마을에 동거생활을 시작한 남녀의 생활이 불현듯 나타난 한 미친 남성의 행동에 의해 산산조각 부서지게 된다. 정체불명의 그 남성이 둘 사이에 가져온 불협화음의 공포는 주인공들이 우연히 과거 그 마을에서 벌어진 잔혹한 총기난사사건을 접하고 나서 조금씩 소멸해 나간다. 하지만 이와 함께 그들은 삶의 커다란 기쁨이자 즐거움이었던 목욕탕 만드는 일에도 흥미를 잃고 시들시들해지고 만다. 목욕탕에 대한 관심을 잃은 그들에겐 이미 삶을 향한 불타는 열정 따윈 사라지고 없다. 우리네 삶에 대단한 것은 없다는 삶의 위대한 본질을 깨달은 셈인가... 자살클럽을 소재로 한 '창밖은 푸르름'이란 단편도 인상적이었다. 자살을 주제로 오프라인으로 만나는 자살클럽 회원 5명의 이야기. 결국 이들이 암묵적으로 지켜 온 가상 현실을 토대로 한 룰은 한 회원이 실제로 자살을 실행하면서 깨지게 되고 자살클럽도 자연 무너지게 된다. 몇년후 회원이었던 남녀가 우연히 만나게 되면서 결혼에 이르게 된다. 하지만 그들의 생활은 처절할 정도로 건조하고 나른하다. 그 부부 둘사이에 생긴 깊고 짙은 강은 과거 한켠에 자리잡고 있는 '자살클럽'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수 없다는 데서 점점 더 강물만 거세어 간다. 아내는 밤산책을, 남편은 퍼즐맞추기에 열중하면서 서로 하루하루를 하릴없이 보내는 것이다. 제일 이해하기 힘들었던 소설은 '파편자전~'이란 작품이었다. 모호함으로 가득찬 이 작품은 실험적이고 파격적이긴 하지만 그만큼 무척 난해했다. 최윤이 무겁고 어두운 역사의 진실만을 파헤치는 작가라고만 알아 왔었다면 이 작품을 통해 최윤의 새로운 면모를 접할 수 있을 것이다.

[인상깊은구절]
하루의 일상이 끝났다. 어제보다 더 피곤하지도 덜 피곤하지도 않은 하루 근무를 끝내고 귀가해 별스러울 것 없는 일로 작은 집안을 서너 바퀴 돌고 나면 어느새 늦은 밤이 되어 있다. 제대로 듣지도 않으면서 건성으로 켜놓았던 텔레비전의 웅얼거림이 어느 순간 멎으면 정수는 끙 소리를 내면서 일어나 퍼즐 판이 놓여 있는 거실 구석에 켜진 집중 조명 속으로 퇴거한다. 그는 빛 속에 갇히고 소파에 앉아 있는 내 가슴은 바로 그때부터 정체 불명의 고통으로 조금씩 조여 온다. 나는 천천히 일어선다. 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의자에 걸쳐놓은 상의를 집어 든다.
e******3 2000.12.31.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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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기 나는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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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윤의 세 번째 소설집일거다. 8편의 소설이 들어있고, 그 중 '하나코는 없다' 와 '전쟁들:숲속의 빈터'는 이미 읽은 작품이다. 단편 소설은 체질에 맞지 않고, 또 이렇게 작품이 겹쳐서 나오는 소설집은 사지 않는 편인데, '최윤'이라는 이름을 보고 머뭇거리며 샀다. 최윤의 소설들은 매력적인 문체를 가지고 있다. 절제되고, 독특한 날카로움을 가진 단어와 표현들은 나처럼 '소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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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윤의 세 번째 소설집일거다. 8편의 소설이 들어있고, 그 중 '하나코는 없다' 와 '전쟁들:숲속의 빈터'는 이미 읽은 작품이다. 단편 소설은 체질에 맞지 않고, 또 이렇게 작품이 겹쳐서 나오는 소설집은 사지 않는 편인데, '최윤'이라는 이름을 보고 머뭇거리며 샀다. 최윤의 소설들은 매력적인 문체를 가지고 있다. 절제되고, 독특한 날카로움을 가진 단어와 표현들은 나처럼 '소설은 문체다' 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참 좋은 양식이다. 그냥 질겅질겅 씹는 맛에 먹는 양식 같다. 음악을 타는 것 같기도 하고, 단정하고 수선스럽지 않은 화려한 문체가 읽는 사람을 행복하게 한다. 그의 깔끔함이 부럽다. '하나코는 없다' 와 '전쟁들:숲속의 빈터'을 제외한 나머지 단편만 읽었는데, 뒤에 해설에 나온 것처럼 '최윤의 인물들은 정보를 모으면 모을수록 누구인지 알 수 없는 존재' 가 되어 버린다. 책의 제목처럼 모호한 여러 종류의 향기만 남는다. 그리고 그 향기는 우리 삶과 아주 가깝게 닿아 있으며, 슬프다. 다음에 나올 '최윤'의 소설에서는 기쁨을 찾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인상깊은구절]
그가 그녀 앞에서 장난으로, 소위 군기가 담뿍 들어가 음절이 나누어지지 않은 동물의 소리 같은 말을 내지르면서 군대식 경례를 올려붙였을 때, 그토록 짧은 기간 동안에 형성된 군대식 은어와 군대식 몸짓이 마치 생래적인 어떤 것처럼 너무도 자연스럽게 뛰어나왔을 때, 그녀는 그것이 재미있지 않았다. 그녀는 호들갑스럽게 웃어줄 수가 없었다...그의 것이 되어버린 부대안의 반복적이고 고달픈 일상의 경영에 대해 쌍소리를 처음 배우는 소년처럼 작은 흥분을 담아서 말하는 그를, 그녀는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h****i 2001.01.19. 신고 공감 0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