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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리만 브라더스가 파산했다. 같은 달, AIG 또한 정부에 의해 인수되었다. 이것이 2008년 금융 위기의 시작이었다. 금융 자본은 통화주의적인 경제학자들의 주장처럼 노동과 생산과정들로부터 상대적으로 자기생성적이지도, 일부 맑스주의자들의 주장처럼 허구적인 가치들과 순수한 투기로 이루어진 것도 아님을 위기를 통해 스스로 증명했다. 금융은 대단히 ‘실제’적이었으며 그 피해 또한 실제적은 차원에서 발생했다. 자본과 언어는 어떤 의미에서 예언적이다. 마라찌의 분석은 2001년 금융 불황을 겨냥했지만 그 화살은 2008년에도 적중했다. 제목에서도 볼 수 있듯이 그는 금융자본, 그리고 그것을 작동시키는 방식을 ‘언어적’이라고 말한다. 어떻게 금융이 언어적인가? 첫째, 그는 관습에 관해 설명한다. ‘관습이 시장에 영향을 미치는 다수의 참가자들에게 인지적인 압박으로 작용한다. 특정한 역사적 시기 동안 일어나는 관습의 반복이란 다른 게 아니라, 거의 항상 다음과 같은 일이 일어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관습의 관례적인 본성은 망각되며,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결국 관습이 사물의 본성에서 비롯하는 것이라고 믿는다. 이러한 관습의 기능은 대단히 언어적이다.’ 그러나 그의 설명대로 이것은 그렇게 믿을 뿐 관례적인 본성이 아니다. 왜냐하면 공황 상황에서 관습은 ‘다시 만들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관습의 관한 비교적 정확한 예는 금융 위기 속에서 찾을 수 있다. 금융 위기에 몰아넣었던 수많은 주식회사들은, 그들을 자체적으로 평가하는 신용평가사들이 있었다. 그러나 평가 시 그들이 공식적으로 받은 등급과 실제의 등급은 전혀 다른 것이었다. 그것을 비판했던 언론에 대한 그들의 변론은 이런 것이었다. “당신이 틀렸다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하고 있고,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고 있으므로 어느 누구도 애널리스트에 의존하면 안된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다.” 이것은 관습의 공적 본성을 정확히 대변하는 것으로 읽혀진다.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다는 것(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곳에 투자한다는 것)은 개인적 판단이 무가치하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어쩌면 더 정보에 밝은, 나머지 세계의 판단에 의지하려고 노력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다수의 또는 평균의 행위를 따르려고 노력한다. 언어에 대해 생각해보자. 소쉬르에 의하면 언어는 인간 동물이 공통적으로 사용하는 관습(랑그)인 동시에 개인적인 발화(파롤)이다. 이 두 가지 범주 중 하나만 해당하는 언어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언어는 어떻게 금융과 연관되는가? 마라찌가 표현했듯 금융이라는 랑그Langue finaciere가 있다. 금융이라는 랑그는 그 자체로 존재할 수 없기에 금융에 참여하는 참가자(파롤)를 가져야한다. 연금기금의 ‘조용한 혁명’이 정확히 그것에 해당한다. 그들은 “노동자의 저축을 자본주의적 변형/재구조화의 과정들을 탄탄히 묶어둠으로써 포드주의 급여 관계에 내재하는 자본과 노동의 분리를 제거하게” 된다. 노동자들은 더 이상 저축하지 않고 주식에 투자함으로써 더 이상 자본(금융)과 분리되지 않는다. “그래서 그들은 자본 일반의 ‘선한 작전’에 공통의 관심사를 갖는다.” 포스트 포드주의에서 말하는 금융화의 역사는 이런 식으로 진행된다. 저축은 더 이상 국력의 신장이 아니다.
우리는 아직도 자본의 위협으로부터 안전하지 못하다. 1929년부터 2008년 금융 위기까지, ‘공황’이라고 표상되는 수많은 위기가 이것을 말해준다. 그러나 자본이 우리를 위협하는 방법은 시대에 따라 항상 변해왔다. 예컨대 “예전에 토마토가 높은 가격을 유지하기 위해 그리고 노동인구의 임금을 낮추기 위해 파괴되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오늘날 사회적 소통의 수단들은 일반지성의 신체의 평가를 절하하기 위해 해체된다.” 자본은 더 이상 우리가 노동이라고 말하는 것만을 착취하려 하지 않는다. 사무실에서, 공장에서 정해진 시간 동안 일을 하며 통제되고 감시되는 역할의 자본은 포드주의의 자본이다. 신경제에서는 비-노동(휴식, 열정, 정서, 지식) 등을 노동 안으로 포섭시킴으로써 신체 자체를 통제하려고 한다(수없이 인용되어왔던 광고를 생각해보라, 우리는 편하게 TV를 보면서 노동을 하고 있다). 그러나 신경제의 위기는 일반지성을, 지구 전체에 널리 분포되어 있는 그 기동적인 신체를 추구할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더 이상 해체는 지식을 파괴하지 못한다. “오늘날 일반지성은 산 지식으로, 다중의 신체 안에 남아 있는 협력의 역량으로 이루어져있다.” 즉, 다중의 신체는 자본을 극복할 수 있는 하나의 가능성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퇴장에 대해 생각해보자. 퇴장은 물질적 부의 이동으로 귀결된다. 자본의 순환의 관점에서 볼 때 퇴장은 그 자체로 공황의 한 요소이다. 여기에 마라찌가 설명하는 2가지 방법의 퇴장이 있다. 금융 시장에서 주식을 판매하는 것은 합리적인 선택에 의해, 즉 주식이 정점에 도달했다고 믿어질 때 판매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금융시장에서 이 합리성은 개별적인 것과 집단적인 것이 함께 고려되기 때문에 모순적이다. 모두 같은 시기에 주식을 판매한다면 구매자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사적 소유의 재할당 과정을 계속해서 만드는 것은 ‘가망 없는 합리성’이다. 그러나 또 하나의 방법, 부의 생산이 오로지 일반지성 속에, 고정된 유형의 자본을 갖지 않는 산 노동의 협력 속에 집중될 때의 퇴장은 “다중 사이의 사회적 협력의 자유, 다중을 관통하는 언어들의 자유, 그리고 자신의 신체에 대한 다중의 소유”를 만들어낸다. 마이클 하트는 서문에서, 금융시장의 유동성, 소통, 미래 지향성 등을 다중 해방의 예시(전도되고, 왜곡되고, 훼손된 예시일지라도)로 읽는 것이 가능한지 물었다. 신경제에서 자본주의적 통제를 벗어나는 잠재적 자율, 이것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아래로부터 삶정치’를 발전시켜야 한다는 것. 아직 답변되지 않은(이 답변은 실천을 통해서 답변되어야 할 것이기 때문에) 하트의 질문에 비르노를 인용하여 간격을 메우도록 해본다. “살아 있는 신체는 국가의 행정 기구의 관심사로서, 아직 실현되지 않은 힘의 유형의 기호이며, ‘아직 대상화되지 않은’ 노동의 시뮬라크라, 또는 맑스가 뛰어난 표현으로 말한 것처럼, ‘주체성으로서의 노동’의 시뮬라크라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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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요로움은 지속될 것만 같았다. 다시는 과거와 같은 빈곤의 노예가 되는 일은 인류에게 발생치 않을 것이었다. 하지만 희망에 가득찬 외침은 곧 절망을 불렀다. 딱히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없었던 우리조차도 갑자기 찾아온 경제위기에 휘청였다. 누가 이 위기를 불러일으킨 직접적인 원인제공자인지에 대한 고찰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저 나라가 어려우니 모두가 고통을 감내해야 한다는 말만이 떠돌았다. 시계바늘은 거꾸로 움직여 100년 전을 정확히 가리켰다. 일제에 의해 조작된 현실을 타파하겠다며 가진 것 없는 이들이 가정 내에 존재하는 값어치가 좀 나가겠다 싶은 쇠붙이들은 모조리 자진납세했다. 우리는 이를 국채보상운동이라고 부른다. 1998년 우리는 현대판 국채보상운동을 재현했다. IMF가 요구한 바를 이보다 더 충실히 이행한 국가는 없다고도 했다. 비교적 짧은 시간에 위기 상황으로부터 탈출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이후 대부분의 삶은 어려워졌다. 소수 부유한 이들만이 지금이 예전보다 더 좋다, 철없는 외침을 남발했을 따름이다. 지배적인 가치가 허물어졌다. 모든 분야에서 ‘포스트’라는 단어를 들을 수 있었다. 노동과 생산 분야에서 그렇게 우리에게 다가온 것은 ‘포스트 포드주의’였다. 단일품종을 대량생산해 막대한 부를 축적하는 시대에 노동자는 자율성을 누릴 수 없었다. 하루 종일 볼트를 돌리고 너트를 조이기 바빴던 이들은 자연스레 사회가 원하는 바보가 되어갈 수밖에 없었다.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에 순응치 않고 각성한 이들은 ‘위험하다’고 했다. 그래서 포드주의가 붕괴되었을 때 누구보다도 기뻐했어야 하는 이들은 바로 노동자였다. 노동하는 사람 못지않게 소비자들도 자신의 욕구에 대해 재고하기 시작했다. 획일적으로 생산되는 품목이 그저 시장에 나와 있으므로 구입하던 시절은 지났다. 그들은 적극적으로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가를 시장에 주문하기 시작했다. 수요와 공급이 만나는 시장은 분명히 과거보다 더욱 복잡한 양상을 지니게 될 터였다. 노동과 소비 모두가 주체성을 지니는 시절은 그러나 희망적이지 못했다. 바로 ‘자본’ 덕분이었다. 과거에도 자본은 막강한 힘을 휘둘렀다. 시대가 달라졌다고 하여 갑자기 자신의 기득권을 놓아버릴 리 없는 자본을 우리는 미처 고려치 못했다. 그들은 막대한 부를 기반으로 모든 것을 잠식한 지 꽤 되었다. 맘만 먹으면 언제라도 여론을 조작할 수 있었고, 교육 분야 역시 요리조리 뒤틀어가면서 자신을 도드라져 보이게 만들뿐만 아니라 자신의 입맛에 맞는 인력을 길러낼 수 있었다. 지난 시절의 경제 위기가 허황된 구름 같은 것은 아니었다고 믿고 싶다. 하지만 자본은 제 필요에 의거해 위기를 조작하기 시작했다. 숱한 퇴보가 이루어졌다. 어려운데 딴 말을 하는 건 불경하다고 했다. 야금야금 남성들의 영역까지 진출해 꽤 괜찮은 성과를 내던 여성들에 대해서는 “가정으로 돌아가 남편의 축 쳐진 어깨에 힘을 실어달라”고 요청했다. 그것은 경제에 기댄 일종의 반동이었다. 성인 남성도 일하기 힘든 시대에 어디 여성이 노동 시장에 발을 들이느냐는 뜻의 부드러운 표현이었지만 기대 이상으로 외침은 잘 먹혔다. 어렵다는 말은 깡패와도 같아서 노동자들로 하여금 기존과 같은 노동을 하면서도 임금과 복리 면에서는 박한 조건을 받아들이도록 만들기도 했다. 일자리를 잃는 것보다는 그 편이 더 나았다. 속으로는 울며 겨자를 먹는 심정이었겠지만 그들은 백수가 되길 원치 않았기에 어디에도 하소연하지 못했다. 얼마 전 신문을 보니 버냉키 전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 의장이 금융위기 시에 더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못했던 것에 후회한다는 말을 남겼다는 기사가 눈에 들어왔다. 한 때 그의 막대한 영향력은 전 세계 사람들에게 절대 진리와도 같이 여겨졌었다. 한 사람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세계 경제라니, 촘촘히 살펴보면 과거 포드주의 시절과 놀라울 정도로 닮은꼴을 하고 있음을 깨달을 수 있다. 어쩌면, 아니 위기는 분명 조장된 측면이 강했다. 거짓된 위기를 통해 미국은 미국대로 제 영향력을 확대하고자 노력했으며, 유럽 역시 유로존을 구축해가며 이에 대항했다. 두 견고한 세력 간의 다툼 속에서 우리처럼 힘없는 이들은 끊임없이 무너졌다. 이는 총과 칼을 들지 않았다 뿐이지 전쟁이었다. 겉으로는 피를 흘리지 않으므로 평화로워 보이지만 기본적인 끼니를 해결할 수 없어 아이들이 굶주리다 못해 쓰러지고, 갑자기 일자리를 잃은 노동자가 경제적인 어려움과 제 무너진 자존심 사이에서 신음하다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이 빈번히 발생했다. 세계는 원조랍시고 자비로운 손을 내밀었지만, 기껏해야 자국 국민총생산(GNP)의 1%도 되지 않는다. 국가에 더는 희망이 없는 걸까. 저자는 우리에게 주어진 노동력과, 이를 가능케 만드는 온전한 신체에 주목한다. 아래로부터의 꿈틀되는 삶, 스스로를 돌보는 정치, 즉 저항운동이야말로 이러한 폭력주의, 포드주의보다도 더욱 획일적인 흐름에 대항할 수 있는 희망이라고 힘줘 말한다. 반세계화는 반국가적, 반체제적이라는, 우리가 흔히 듣는 말은 그럼 무엇일까. 알게 모르게 너무도 친자본적인 성향을 지니게 된 우리 자신을 되돌아보게 만드는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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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시간에 걸쳐 「자본과 언어」를 다 읽었습니다. 경제와 금융에 문외한인 저로써는 이 책을
읽는 것이 쉽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저는 이 책을 긴 시간을 두고 다시 꼼꼼히 읽을
생각입니다. 「자본과 언어」는 분명 오늘날의 한국이 포함되어있는 거대한 세계경제체제의 흐름을
다시 생각해 볼 수 있게 하는 현재와 미래의 서書이기 때문입니다. 크리스티안 마라찌는 오늘날의 경제적 상황을 ‘신경제’라는
이름으로 이야기합니다. 신경제의 특징은 투기자본 중심의 금융 부문이 경제의 중심이 되는 것, 언어와 언어적 수행을 통해 생산되는 새로운 노동이 지배적인 노동형태가 되면서 노동과 삶의 분리가 사라지는 것입니다. 장기간의 변화, 그리고 2000년대
이후의 급격한 세계화로 인해 이와 같은 상황은 심화된 것 같습니다. 그리고 2008년의 미국 발 금융위기 때, 우리는 우리의 노동과 재화 유통에
아주 얇은 끈만을 연결한 것 같은 가상의 체스판으로서의 금융계가 그 모순을 드러낸 것을 확인하였습니다. 모든
문제는 실물경제와 금융자본의 이동 사이의 불균형이 만들어낸 당대의 특수한 문제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마라찌는 그러한 생각에 반대합니다. 그가 볼 때 2008년과
그 이후에 드러난 신경제적 상황은, 역사적 실수나 우연이 아닌 우리가 걸어온 역사의 귀결입니다. 마라찌는 책 전반에서 그와 같은 역사적 경로를 닦아온 미국의 제국주의적인 금융조치와 복지국가 축소를 통한 자본주권의 강화를 지적합니다. 이 논의 역시 매우 날카롭고 중요하지만, 이 글에서 주목하고 싶은
것은 마라찌의 주된 주장인 언어와 노동의 관계입니다. 신경제의 노동은 언어와 언어적 상징들을 사용하여
재화를 생산하는 노동입니다. 욕망이 자본화되고, 욕망을 제한하는
물질적 공간이 사이버 스페이스와 기타 다양한 과학기술을 통해 무한하게 확대되면서 이러한 언어적 노동은 중요해졌습니다. 우리는 다양한 언어와 상징들을 내 욕망의 상상을 풍부하게 하는 원료 삼아 소비합니다. 이러한 소비재를 만드는 생산자 역시 자신의 언어와 욕망을 노동하게 함으로써 상품을 만들어내어야만 합니다. 자신의 욕망을 ‘그들’의
욕망과 연결짓고 확대하는 형태의 노동이야말로 내밀하고도 공통적인 무언가를 끄집어내는 작업이니까요. 이러한 심리적이고 ‘아이디어’ 적인 작업, ‘유연하고 인지적이며 소통적인 노동’이 가져온 상황은 노동 시간의
연장입니다. 신경제에서, 노동자들의 임금은 점차 상승하지만
그들의 실질적 노동시간에 비하면 임금은 점차 낮아지고 있다고 마라찌는 지적합니다. 오늘날의 노동은 시간과
장소에 상관없이, 항상 일할 수 있는 두뇌와 매체들, 스마트기기를
앞에 두고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모 기업의 마케팅부서에서 능력을 인정받은 지인의 말이 떠올랐습니다. 그는 회사에 몸을 두고 있는 주중 시간에 상품 이름, 또는 좋은
광고 글귀가 생각나지 않는다면 주말에도 계속 그것에 대해 생각한다고 합니다. 예비군 훈련을 받을 때도, 연애를 하는 동안에도 그의 업무는 계속됩니다. 오늘날의 모든 노동이
이렇지는 않을 것입니다만, 마라찌의 말 대로 삶과 일의 경계를 흐리게 하는 이러한 노동형태들은 현대의
주된 노동이라고 생각됩니다. 마라찌의 말대로 오늘날의 첨단기술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노동을 삶의 가장 본질적인 부분으로, 가장
특이하고 개인화된 부분으로 간주하는 것 같습니다. 이들이 아니더라도 오늘날의 ‘혁신적인’ 젊은이들에게 자신의 노동은 거의 언제나 자아실현이자, 가치 실현입니다. 마라찌는 젊은이들을 채용하는 기준이 ‘적성’, ‘적응성’, ‘잠재력’ 등이 되었다고 말하는데, 오늘날의 한국에서 구직기간을 겪은 젊은이로써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부분입니다.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드는’ 언어 한마디는 이러한 상황과 많은 연관이 있다고 봅니다. 앞서 언급했듯이 타인의 욕망의 현현을 소비하는 것, 뿐만 아니라
내가 어떤 가치를 향한 욕망의 실제가 되어서 노동력으로써 소비되는 것은 모두 언어적 작용입니다. 그런데
마라찌가 잘 지적하고 있듯이, 이들의 언어는 관습적입니다. 어느 순간부터 공동체에 통용되고, 진리적인
것으로 여겨지게 된 관습적인 언어는 시장의 참여자들을 ‘합리적’으로
움직이게 만드는 명령어입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 전반이 이러한 관습적 명령의 힘을 지닌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입니다. 자신의 욕망을 소비자들의 욕망과 연결지어 상품을 제작하고 광고를 선보이는 노동자들은
이러한 관습 명령어의 영리한 프로그래머들입니다. 주식시장의 동향을 몇 마디 말로 좌우하는 그린스펀 같은
사람들과 그 말을 통해 자신의 투자경로를 빠른 속도로 변경하는 투자자들 역시 그러한 관습 언어의 훌륭한 사용자들입니다. 이들은 자신이 속해있는 세상의 흐름을 이야기 할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즉
이들은 자신이 쓰는 언어가 진리적임을 자신하고 있으며, 또한 이들이 형성하는 일반지성적인 여론이 세상의
경제적 흐름을 좌우하는 것입니다. 어떤 발화가 시장 흐름을 좌우하는 것을 넘어서 우리의 경제적/사회적 상황이 노동으로서의 언어작용에
좌우된다는 마라찌의 지적은 그러므로 무서운 면이 있습니다. 자본주의의 대안으로 제시된 흐름들,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들을 수행하는 언어들은 자본주의의 관습 명령어입니다. 문제의
지적과 대안의 제시는 같은 언어 안에서 순환합니다. 우리가 오늘날 경제상황의 문제들을 많이 알고 있고
심지어 체감하면서도 벗어나려 하지 않는,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아마도 마라찌의 지적대로 현실의 언어들 속에서 한 개인으로서 소통하며 살아가길 원하고 그렇게 생존할 수 밖에
없는 인간적 상황 때문에, 그리고 다른 소통의 길을 열어주는 새로운 언어가 없기 때문은 우리는 그렇게
머물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출구, 아니 체스판을 깨는
것은 바로 관습의 위기입니다. 다른 관습을 선택하고 새로운 언어를 만드는 것이 필요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마라찌와 여러 지성들이 강조하는 ‘다중’의 흐름입니다. 서평을 마무리 질 단계에 오니 제 금융이해의 부족이 더욱 안타깝습니다. 그러나 「자본과 언어」는
지금 나와 벗들의 삶에서 일어나고 있는 상황들에 대한 적절하게 지적하고, 우리가 휘둘리고 있으면서도
안주하는 자본주의의 상황을 정교하게 설명하고 있기에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계속 눈이 가는 책입니다. 무엇보다도
역할에 너무나도 충실한(?) 오늘날의 경제학자들과 달리 정치와 철학에 대한 깊은 조예를 바탕으로 우리
삶의 타자가 아닌 하나의 주거 차원으로서 경제상황을 분석하는 저자의 능력에 감탄할 뿐입니다. 조만간
책에 대한 더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또 하나의 서평을 남기고 싶은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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