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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의 전통철학에 반발, 해체철학을 주장한 것으로 알려진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 1930~2004)는 그 연장선 상에서 도덕적 기준과 금기에 대한 반감을 드러낸다. 왜냐하면, 평범한 인간이 도저히 지킬 수 없는, 지나치게 높은 도덕적 기준은 결국 미국의 금주법(禁酒法)에서 볼 수 있듯이 위선으로 흐르고, 약자(弱者)에 대한 배려라는 명목으로 사회적 합의가 이루어진 사항인 금기(禁忌)는 배타적 권력으로 변질되기 때문이었다. 때문에 그는 “생전(生前)에도 많은 사람들에게 경탄과 존경을 불러일으킨 동시에, 질서를 파괴하고 무책임한 혼란과 허무주의만을 야기한다는 의혹과 경계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이러한 논란은 그의 죽음 앞에서조차 사라지지 않아서 슬픔에 잠긴 추모의 글 못지않게 다수의 비판적인 반응을 불러일으키는 놀라운 사태를 보여주었다.1)”고 한다. 사람이 죽으면 추모를 위해 일정 기간 동안 그를 신랄하게 비판하기 보다는 가능한 그의 장점을 회상하려고 노력하는 문화를 가진 우리에게는 낯선 반응이다. 어째든 이러한 자크 데리다에 대한 비난은 동료 철학자들이 적극적으로 나서서 그에 대한 추모의 글 형식으로 그가 남긴 유산(遺産)에 대해 정당하게 평가해줄 것을 요구했다. 그것이 바로 이 책, <아듀 데리다>다. 코스타 두지나(Costas Douzinas, 1951~ )는 사실상 서문인 ‘데리다의 추모사’를 통해 이 책이 발간된 배경과 다른 저자들의 글을 간단히 요약하고 있다. 덕분에 이 책을 읽는 사람들이 명확한 지도를 가지고 ’자크 데리다’라는 미로에 과감히 발을 들일 수 있다. 장 뤼 낭시(Jean-Luc Nancy, 1940~ )는 ‘광기에 사로잡힌 데리다’에서 미셸 푸코(Michel Foucault)와의 광기(狂氣)와 이성(理性)에 대한 논쟁을 통해 드러낸 자크 데리다의 입장을 정리하였다. 즉, 이성(理性)과 광기(狂氣)를 구분함으로써 이성(理性)이라는 굳건한 성벽을 세운 미셸 푸코와 달리, 자크 데리다는 이성(理性)의 폐쇄성을 찢어버림으로써, “이성(理性) ‘그 자체’에 내재한 더 본질적인 불일치를 내세우게 만든 것이다. 이것이 데리다가 이성(理性)이 자기 내부에서 스스로를 확인하는 순간 제 스스로 침몰하고 마는 광기(狂氣)를 포용2)”할 수 밖에 없는 이유라고 했다. 알랭 바디우(Alain Badiou, 1937~ )는 ‘자크 데리다에게 경의를 표하며’에서 차연(差延, différance)과 실존 / 비(非)실존에 대해 언급한다. 알랭 바디우는 “데리다가 ‘차연(差延)’ 개념을 제안했을 때, 그는 원존재/존재 간의 차이에 존속하는 형이상학적 대립 요소를 사라지게 함으로써 우리가 그 행위 속에서 차이 그 자체를 포착하기를 바란 것3)”이라고 판단했다. 또한 노자(老子)의 <도덕경> 첫머리의 “道可道, 非常道(도(道)가 말해질 수 있으면 진정한 도(道)가 아니고) 名可名, 非常名. (이름이 개념화될 수 있으면 진정한 이름이 아니다.)4)”처럼 자크 데리다의 “해체에 정확한 의미를 부여하는 일은 어떤 의미에서는 그것을 무용지물로 만드는 일5)”임을 밝히며 단호하게 진영을 구분, 대립하지 않는 공간에서 접촉을 통해 존재하기에서 실존하기로 미끄러짐을 부각시킨다. 그에 따르면 자크 데리다가 이러한 미끄러짐을 언어에 적용하였기에 사람들이 자크 데리다를 오해하고 비난하였다는 것이다. 가야트리 차크라보르티 스피박(Gayatri Chakravorty Spivak, 1942~ )은 ‘자크 데리다에 대한 찬사에 부치는 소고(小考)’에서 페미니즘에 대해 언급한다. 그가 생각하는 페미니즘은 “데리다가 말하는 어머니의 어린아이-흔적과 무관하지는 않지만 그것과 다른 곳에 있다.6)”고 한다. 따라서, 페미니즘은 “재생산적 이성애 규범성(RHN)을 가장 심오한 일반성의 차원에서 흔적의 장(場)으로 재배열7)” 하지만 자크 데리다의 질문이 흔적을 추적하는 것과는 달리 규정적인 작업으로서의 한계를 드러낸다는 것이다. 에티엔 발리바르(Étienne Balibar, 1942~ )는 ‘보편의 구축과 해체 : 자크 데리다의 감각적 확신’에서 “데리다의 '해체' 작업이 (보편적 범주들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보편과 특수라는 대립 구도를 와해시킴으로서 고전적인 '보편의 역설'을 해결하는 전적으로 새로운 방법을 처음으로 시작했다8)”고 말한다. 자크 랑시에르(Jacques Rancière, 1940~ )는 ‘민주주의는 유효한가 ’에서 자크 데리다의 저서에 대한 언급을 회피하는 대신, 민주주의에 대한 그의 생각과 ‘민주주의의 역설’이 가져오는 문제점에 대해 이야기 한다. 자크 랑시에르에 따르면, “데리다는 소위 ‘자유민주주의’와 다른 민주주의를 대립시키면서 두 가지 시간성을 같은 시간 안에, 또 두 가지 공간을 같은 공간 안에 위치시킨다. (즉,) 한쪽에 통치의 한 가지 형태로서 자유민주주의를 두고, 다른 쪽에는 새로 오는 것에 대한 무한한 개방성과 사건에 대한 무한한 기대를 둔다.9)” 어떻게 보면 이런 상황이 ‘민주주의의 역설’을 가져올 것처럼 보인다. 여기에 대해 자크 데리다는 ‘새로운 인터내셔널’에 대한 요청을 제안한다. 물론 그 ‘새로운 인터내셔널’에 대한 개념이나 형태는 주어지지 않았다. 그것을 만들어가는 것이, 혹은 만들기 위해 고민하는 것이 그가 남겨놓은 숙제가 아닐까? 드루실라 코넬(Drucilla Cornell)은 ‘데리다 : 미래라는 선물’에서 왜 자크 데리다의 죽음에 대해 ‘나는 왜 데리다를 애도하지 않는가’와 같은 헤드라인의 기사나 왜 데리다와 해체가 대수로운 문제가 아닌지를 장황하게 늘어놓는 요령부득의 글이 쓰여졌는가에 대해 의문을 던진다. 그리고 그 의문에 대해 자크 데리다가 용감하게 ‘도래할’ 미래를 주장했기 때문이라고 답한다. ‘도래할’ 미래를 아직 도착하지 않은 미래라고 바꾸어 보면, 현재의 상황은 늘 ‘시기상조’라고 할 수 있다. 흔히 시기상조란 행위를 지연시키는 핑계로 이용된다. 그런데 데리다의 ‘시기상조’는 다르다. 그의 ‘시기상조’는 ‘진행중인 시기적절함’ 이기 때문이다. “데리다는 우리의 의무가 ‘진행중인 시기적절함’에 주의를 기울이기라고 아름답게 쓰고 있다. 그의 표현대로 그것은 가상적이고, 금지된 상태이며, 미래에 수용될 가능성으로 충만한 채 기다리고 있다. 내 생각에 데리다가 다른 사람들에게 위협적이었던 이유는 그가 침묵하고 있는 ‘소수이지만 엄연히 존재하는’ 힘에 대해 한치의 흔들림도 없이 지속적으로 주의를 기울였기 때문이다. 병원으로 마지막 여행을 떠나던 날까지 여전히 청원서에 서명을 하고 있었듯이, 데리다는 그들의 목소리에 끊임없이 귀를 기울였다. 아마도 그가 임종하는 순간에 절실하게 느낀 것은 ‘우리는 지금 행동해야 한다’는 이 강력한 요청일 것이다. 왜냐하면 지금 이 순간 우리가 즉시 행동해야 한다는 이 요청이야말로 죽음에 대한 데리다의 생각과 불가분의 관계이기 때문이다.10)” 슬라보예 지젝(Slavoj Žižek, 1949~ )은 ‘차연(差延)으로의 복귀를 청하는 호소 : 가벼운 자기변호와 함께’에서 자신이 해체에 내재한 것으로 감지한 윤리적 전회에 대한 이의에도 불구하고 데리다의 차연(差延)이 자신의 개념인 시차와 동일한 ‘최소 차이’를 나타낸다고 결론짓는다. J. 힐리스 밀러(J.Hillis Miller, 1928~)는 ‘고(故) 데리다’에서 자크 데리다가 <로빈슨 크루소>의 유명한 장면인, 모래 사장에서 맨발 자국과 마주쳤을 때 로빈슨 크루소의 반응에 주목하였음을 이야기 한다. 무인도에 표류했기에 그는 자기 자신을 제외한 어느 누구와도 관계를 맺을 수 없어 고독할 수 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그가 모래 사장에서 맨발 자국을 발견했을 때 공포에 휩싸인다. “기도를 통해 (간신히) 마음을 가라앉힌 후에 이제 그는 자신이 어디에 있으며, 어디에 있었고, 어느 길을 따라 왔는지 묻는다. 그리고 한층 더 불안한 마음으로 그 맨발 자국이 혹시 자기 자신의 발자국은 아닐까 자문해 본다. 그가 이미 지나온 길에 난 자기 발자국 말이다. 실제로 그는 그 흔적이 자신의 것인지 아닌지 전혀 확신하지 못한다. 그는 그것에 대해 어떤 것도 알지 못하며, 자신이 그것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만을 안다. 그것이 나인가? 그것이 내가 지나간 길인가? 그것이 내가 남긴 자국의 유령, 내 유령의 자국인가? 나는 지금 돌아가는 과정 중에 있는가? 나는 유령, 즉 망령이 아닌가? 타자의 흔적으로서의 나의 길, 이미 귀환의 길이자 돌아오는 길이라고 할 수 있는 그 길에서 내가 엇갈리게 되는 나 자신의 망령인가 11)” 이처럼 자크 데리다의 독법(讀法)에 따르면, 로빈스 크루소는 “마치 망령이 되어 돌아온 자기 자신에 의해 쫓기고 있는 것12)”처럼 보인다. 마치 뫼비우스의 띠에서 달리듯이, 시간이 역전된 상황에서 죽음을 피해서, 그렇기에 죽음을 향해서 달음박질을 하는 것이다. 이 책을 펼쳤을 때는 자크 데리다가 사망한 지 두 달 후인 2005년 5월과 6월, 런던 대학 버벡 칼리지에서 강연한 것을 모은 것이기에 전문가를 상대로 한 글보다는 조금 이해하기 쉽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 있었다. 하지만, 다 읽은 지금도 철학용어들만 머리 속을 빙빙 돌 뿐 여전히 자크 데리다가 말하고자 했던 것이 무엇인지 모르겠다. 다른 이의 시각을 통해 한번 걸러진 것이라서 그런 것일까? 앞으로 10년이고 20년이고 좀 더 내공이 쌓이면 다시 한번 도전해보고 싶다. * 이 글은 출판사로부터 제공받은 책에 대한 리뷰입니다. 1) 코스타 두지나 外, <아듀 데리다>, 최용미 옮김, (인간사랑, 2013), p. 275 2) 코스타 두지나 外, 앞의 책, p. 41 3) 코스타 두지나 外, 앞의 책, p. 79 4) 최진석, <노자의 목소리로 듣는 도덕경>, (소나무, 2001), p. 21 5) 코스타 두지나 外, 앞의 책, p. 75 6) 코스타 두지나 外, 앞의 책, p. 100 7) 코스타 두지나 外, 앞의 책, p. 106 8) 코스타 두지나 外, 앞의 책, p. 114 9) 코스타 두지나 外, 앞의 책, p. 175 10) 코스타 두지나 外, 앞의 책, pp. 191~192 11) 코스타 두지나 外, 앞의 책, p. 246 12) 코스타 두지나 外, 앞의 책, p. 25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