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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제는 프랑스혁명에 관한 책을 추가한다는 일이 여태껏 쌓아올린 산 정상에 새로이 흙 한줌을 얹는 일이나 되려는지 모르겠다. 혁명이 역사적인 대사건임은 벌써 주지의 사실이고, 혁명에 관한 이야기들은 이미 차고 넘친다. 더 이상 추가할 이야기가 없다고 느껴질 만큼. 프랑스혁명의 ‘원산지’인 프랑스에서도 대혁명 200주년을 맞아 이제는 혁명이 “끝났다”고 선언한 뒤로 이십여 년이 지난 시점에서 더 이상 무슨 새로운 이야기들이 남아있을까. 그런데 이미 할 수 있는 모든 이야기가 나온 것 같이 보임에도 프랑스혁명이 “끝났다”는 선언은 무척 일방적인 느낌이 든다. 정말로 프랑스혁명이 가져온 변화들은 이제 완전히 자리를 잡았고, 혁명이 남긴 숙제들은 더 이상 문제로써 작동하지 않고 있는가? 혹은 우리가 아는 “프랑스대혁명”은 과연 ‘혁명적’이었는가? 혹은, 오늘날은 더 이상 ‘혁명이 필요하지 않은 시대’인가 시기적절하게 『혁명의 배반, 저항의 기억』이 출간되었다. 저자인 육영수는 오늘날 사회가 분명히 문제를 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해결할 “혁명이 불임(不姙)된 시대”이기 때문에 프랑스대혁명을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그는 서문에서 작년에 흥행한 영화 ‘레미제라블’의 예를 들어 현 상태를 점검한다. ‘불편한 시대’에 ‘혁명을 그리는’ 사람들이 많아 ‘레미제라블’이 흥행했다고 보는 시선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육영수는 단호하게 그러한 분석들에 일침을 가한다. ‘레미제라블’을 혁명영화로 보았던 사람들은 거의 없고, 오히려 이 영화는 뮤지컬 영화 특유의 매력과 더불어 성탄을 맞아 따뜻한 가족영화로써의 흥행기록을 세운 것이라고. 보는 시선에 따라 다르겠지만, 영화 ‘레미제라블’에서는 원작이 고발하려던 혁명기 프랑스 사회의 부조리에 대한 메시지들이 다소 침식되어 있다. 더 이상 ‘불편한 혁명’ 혹은 ‘불편해서 나온 혁명’의 절박함과 숭고함은 남겨지지 않은 채, 인간 장발장의 ‘불쌍한 삶’과 더불어 “사랑과 화해”라는 주제만이 남아 분위기와 상관없이 뜬금없는 “라 마르세예즈”와 함께 장내에 울려퍼진다. ‘이런 혁명영화’라면 천만, 이천만의 관객들이 보더라도 원작의 메시지나 그것이 현 시대에 남기는 의미를 제대로 전달하지 못한 채 그날 저녁의 따뜻한 휴먼드라마로만 남을 따름이다(문득, 마르쿠제가 지적한 “예술적 소외”가 떠올라 섬칫해진다). 오히려 ‘레미제라블’의 흥행이 “혁명의 불임시대”를 증명한 꼴이 되었다. 기실 ‘레미제라블’은 치열했던 1789년의 대혁명을 무대로 그려진 이야기가 아니다. 1830년 오를레앙 공 루이 필리프의 7월 왕정이 출범한 이후, 새로운 지도자가 ‘혁명의 적통’이 아니라 “덜 나쁜”왕에 불과함을 알았을 때, “아버지 세대”가 이뤄낸 혁명을 잃었음을 깨닫고 그것을 되찾기 위해 나선 100여명의 시민군의 이야기이다. 그러나 ‘레미제라블’의 바리케이드 전투를 보면서 “아버지 세대”가 이뤄낸 민주화를 알게 모르게 잃어가고 있는 자신들에 대한 반성이나 역사에 대한 부채감을 느꼈던 관객은, 영화를 보았던 오백만 관객 중 몇이나 될까. 더 이상 아무도 프랑스혁명을 혁명으로써 기억하지 않고 그저 "지나간 사건"으로만 기억한다. 대중은 ‘그 시대가 얼마나 힘들었을까’에나 약간의 관심을 가지는 체하며 '레미제라블'을 주말저녁 가족의 오락거리로만 여겼을 지도 모른다. 대중은 더 이상 오늘날의 문제들이 프랑스혁명기의 문제들과 오버랩된다고는 느끼지 않는다. 육영수 교수는 그런 시점에 혁명을 다시 복기(復碁)할 것을 제안한다.
2. 육영수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국내 서양사가들 중 한명이다. 한국의 서양사학자가 학자로써 무슨 메리트를 가질까 한다면 사실 잘 몰라서 쉬이 답할 수 없겠지만, 뛰어난 한국인 서양사학자의 존재는 곧 한국인 독자들이 서양사를 이해하는 데 커다란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점은 이야기할 수 있다. 그는 한국어를 아주 유창하게 구사한다. 한국식 표현에 익숙하고, 어떻게 글을 전개해야 한국어 독자들이 저자가 주려는 뉘앙스나 강세를 그대로 전달받을 수 있는지 알고 있다. 적절한 비유와 한국식 표현들을 이용해 딱딱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정확히 전한다. 육 교수의 글을 보면, 글을 잘 쓰는 한국인 서양사학자가 한국어권 독자에게 줄 수 있는 최대의 선물은 단연코 “이해”와 “교감”의 능력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내가 그를 좋아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그가 내미는 주제들이 “섹시”하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는 중학교 사회교과서에서부터 시작이던가, 프랑스대혁명은 구체제를 무너뜨리고 근대로 이행하게 되는 “위대한 전환점”으로써 대중들에게 소개된다. 맑스주의자들의 경우, 프랑스혁명을 - 중요하긴 하지만 - 역사발전 단계에서 필연적으로 건너는 통과의례 정도의 의미로써 파악하곤 한다. 육영수는 이러한 기존의 해석틀을 과감히 버리고 수정주의적 시각을 중심해 프랑스혁명을 역사의 ‘전환점’이나 ‘끝난 사건’ 등이 아닌 사건 자체로써 재점검한다. 물론 그러한 시선들이 온전히 육영수만의 독창적인 의견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육교수는 자신의 뛰어난 글솜씨를 이용해 정통주의 해석에 이어진 수정주의의 새로운 비판들을 한국 독자들에게 매우 효과적으로, 또 여러 가지 측면에서 소개한다.
3. 아주 안타깝게도, 『혁명의 배반, 저항의 기억』은 프랑스혁명을 이제라도 공부하고자 하는 이들이 개설서로써 읽을만한 책은 아니다. 엄밀히 말해 저자인 육영수는 ‘프랑스혁명을 잊은’이들이나 ‘프랑스혁명을 그저 그렇게 알고있는’ 이들의 관심을 환기하고 새로운 주제를 던지려는 의도로 책을 썼지 ‘프랑스혁명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처음부터 프랑스혁명을 차근차근 알려주고자 이 책을 집필하지는 않았다(이미 개설서가 너무 많은 상태에서 “그 나물에 그 밥”을 하나 더 추가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판단했을 지도). 『혁명의 배반, 저항의 기억』은 총 3부로 이루어져있다. 1부는 “우리가 알고있던 프랑스혁명은 없다”라는 제목을 통해 그동안 프랑스혁명이 그동안 쓰고 있던 ‘진보’라는 왕관을 벗겨내고 혁명과 눈높이를 맞추고자 한다. 프랑스혁명은 여성에게도 진보적인 사건이었는가? 과연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은 모든 이들에게 공정한 인권이 부여되는 시대를 여는 조약이 되었는가? 프랑스대혁명의 숭고한 정신이 노예들을 비롯한 서유럽 외부세계에도 동일하게 적용되었는가? 등의 이슈이다. 육영수는 1부에서 혁명을 열렬히 환호하며 직접 왕을 끌고나왔던 여성들이 혁명과 어떻게 연을 맺고, 강제로 “파혼”당하고, 계속해서 외면되어왔는지를 다룬다. 또 프랑스 대혁명기의 세 가지 인권선언문을 분석하며 각 선언문이 혁명이 흘러감에 따라 어떻게 변해왔는지를 추적한다. 그리고 그 선언문들이 단순히 모든 인간의 근대적 인권을 추구했다기보다는 변화하는 지배층의 이념적 스펙트럼에 맞추어 입맛에 맞는 문장들로 채워졌음을 지적한다. 곁가지로 인권문제의 결정판인 유엔 세계인권선언문조차 동서이념의 충돌 속에서 ‘모든 인간의 동의를 얻지 못했’음을 밝혀 프랑스혁명이 선언한 ‘근대적 인권’이 아직까지도 ‘미완’의 작품임을 시사한다. 또, 혁명기 프랑스 식민지였던 아이티에서의 일련의 사태들, 자유와 평등, 우애를 부르짖었던 혁명 프랑스가 식민지 노예들의 자유를 정치적 흥정의 대상으로 삼았다는 것을 지적하며 이러한 문제제기를 통해 과연 프랑스혁명이 ‘누구를 위한’ 혁명이었는가를 되짚어보도록 질문을 던진다. 1부를 통해 ‘역사 진보의 상징적 사건’이었던 프랑스혁명에게서 진보라는 ‘까방권’을 빼앗은 뒤, 저자는 프랑스혁명을 맨눈으로, 또 여러 가지 방법으로 보고자 한다. 그 ‘새로운 방법’으로써 저자는 영화의 예를 든다. 그는 “빛으로 쓰여진 역사”로써 영화를 비롯한 영상물, 히스토리오포티(historiophoty)가 글로 쓰여진 역사인 히스토리오그래피(historiography)와 비교해 가질 수 있는 가능성에 주목한다. 프랑스혁명에 대해 다룬 몇 가지 영화들을 통해 “빛으로 쓰여진 역사”가 보여줄 수 있는 감성과, 반대로 영상매체 자체가 가지는 전달력의 한계나 편집의 주관성이나 미약한 고증이 가져오는 한계 등을 점검하는 것이 2부의 주된 내용이다. 50대 중반에 접어든, 한창 학문적으로 완성될 나이지만 동시에 변화에 익숙해지지 않기 시작할 즈음의 연구자가 새로운 방법들에 열린 태도를 보이며 직접 소개하고자 하는 모습은 꽤나 생동감이 넘친다. 이는 저자가 단순히 시간이 남긴 잔해 안에 갖힌 채 과거의 일만을 더듬는 먼지투성이 역사가가 아닌 계속해서 현재와 소통하고 새로운 방법과 도전을 통해 대중과 소통하려는 태도를 가졌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것이 내가 육 교수를 좋아하는 또 다른 이유이기도 하다. 3부야말로 『혁명의 배반, 저항의 기억』의 가장 중요한 국면이 아닐까 싶다. 저자는 1부에서 그동안 지배적으로, 또 기계적으로 가르쳐져 왔던 프랑스혁명의 이미지를 깨부셨다. 그리고 2부에서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프랑스혁명을 서사하고 바라볼 수 있는 방법론의 한 예를 들었다. 그리고 3부는, 프랑스혁명을 입체적으로 바라보고자 하는 시도라고 할 수 있다. 3부는 프랑스혁명의 정치사적인 연구사 대신 혁명의 문화적 측면과 담론적 측면 등에 대한 수정주의자들의 접근을 소개하고 있어 내용이 다소 생경하고 어렵다. 그러나 내용이 어렵다는 사실보다 놀라운 - 그리고 중요한 - 점은, 그것들이 “어렵게 느껴진다”는 사실이다. 인류 역사상 가장 중요한 사건들 중 하나로 꼽히는 프랑스혁명, 모든 학교의 역사수업에서 빠지지 않고 짚고 넘어가는 프랑스혁명에 관해 루이 16세와 로비스피에르, 나폴레옹 등 ‘몇 사람에 불과한 이름들’을 빼면, 우리의 기억은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는 사실이, 얼마나 충격적인가? 프랑스혁명을 단순히 3신분이 구체제의 문을 닫고 근대를 가져온 정치적 사건으로만 이해해온 단선적인 시각들에 일침을 놓는 대목이다. 3부의 초반에 저자가 소개하는 수정주의 학자 퓌레의 말처럼, “혁명은 많은 사람들에게 많은 것을 의미함”에도 ‘몇 사람’에게 주어지는 프랑스혁명의 의미만으로 프랑스혁명을 안다 생각했던 나 같은 사람에게는 꽤나 중요한 깨침이 되겠다.
4. 솔직히 말하자면 육 교수가 내미는 주제나 그의 글솜씨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지만, 『혁명의 배반, 저항의 기억』의 구성에는 의문이 조금 있었다. 아마도 그동안 발표했던 육교수의 논문들을 조금 고쳐 내는 정도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러나 3부의 내용들을 읽으면서 분명 저자가 이 책을 꽤나 ‘시기적절하게 편찬했다’는 생각이 다시금 들었다. 3부에서 육교수가 소개하는 프랑스혁명의 문화사적 접근들이 오늘날 우리 사회의 문제들과 무관하다고 느껴지지가 않았기 때문에. 오늘날의 정치는 ‘담론’과 ‘이미지’의 정치이며, 오늘날의 권력은 푸코의 지적처럼 일상까지 스며들어 있다. 저자가 3부에서 소개한 ‘프랑스혁명의 문화사적 전환’속에도 이백 년 전 프랑스의 ‘담론’과 ‘이미지’의 정치, ‘일상권력’이 내재되어있다. ‘잡범’이었던 콩도르세와 미라보는 ‘보통 교도시설’인 바스티유 감옥을 절대적 악의 상징물이라며 비난했고, 이윽고 바스티유는 수많은 이들의 손에 의해 혁명의 당위성을 위한 ‘마녀’가 되었다. 바스티유의 다소 억울한 사연에서 우향우로 돌아가는 사회분위기 속에 “국민통합”의 희생물로써 팔자에도 없던 ‘종북’딱지가 붙은 채 뭇매를 맞고 있는 두 전임 대통령이 떠오르는 건 우연일까 싶더니 ‘라 마르세이유’를 비롯한 혁명가요들을 두고 벌어진 정치게임의 역사가 등장할 즈음에는 곧바로 지난 오월 ‘임을 위한 행진곡’을 둘러싼 불편한 ‘대탕평 정부’와 오월단체들의 갈등이 연상되기도 한다. 혁명기 프랑스의 공연문화에 관한 소개도 인상깊다. 강제로 침묵을 강요받게 된 “파르테르”들에게서 오늘날의 미네르바 사건이나 민간인 불법시찰도 문득 스쳐지나가고, 극장에서 의회를 진행하며 배우처럼 움직이고 말하던 국민의회의 정치인들과 각종 바람잡이들을 동원해 혁명의 분위기를 ‘연출’했던 혁명기의 ‘극장정치’는 십알단과 국정원 댓글사건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이 모든 연상들이 육 교수가 『혁명의 배반, 저항의 기억』에서 말하고 복기하려던 지점이었을까, 아니면 나의 과대해석과 개인적 이념의 잣대에서 불거지는 과대망상일까.
5. 저자는 분명히 오늘의 문제를 생각하고 “저항”의 연대가 “올바른 지점에 도달하기” 위해 『혁명의 배반, 저항의 기억』을 통해 과거를 답습하자고 했지만, 의외로 내가 앞에 쓴 것마냥 직접적으로 “이 사건은 이런 현대적 의미를 가지고, 저 사건은 저런 교훈을 가진다”는 둥의 잔소리는 하지 않는다. 나 같은 강성(强性)한 어린 친구가 이러쿵 저러쿵 다 아는 척 해설하기에는 해석의 여지나 생각할 구석이 많기도 하다. 분명 뒤에 실린 힘이나 특유의 분위기도 있고, 같이 음미하고자 하는 메시지도 있지만, 언제나 “그래서 하고자 하는 말이 이거지?”하는 순간에 “글쎄요”하며 결정적인 판단은 독자에게 온전히 내맡기는 스타일이 저자로서 육영수의 또 다른 매력이기도 하다. 날이 덥고 습하다. 걷기만 해도 땀이 흘러 아무것도 하기 싫은 오늘도 시청에서는 몇몇 사람들이 지상파에 방송되지 않는 국정원 대선개입사태에 대한 진상규명 집회를 열었다. ‘레 미제라블’을 보며 이들을 떠올리지 못하는 “혁명의 불임시대”, 그러나 혁명의 정신이 필요한 시대. “원조 혁명”의 기억을 다시금 더듬으며 현 상태의 불편함에 대해서 재고해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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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이라는 말만으로도 우리나라 사람들의 성향을 충분히 알아 볼 수 있다.
그것은 비극이다. 사람들의 생각이 그만큼 한방향으로 고정이 된 상태에서 살
고 있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만큼 우리의 생각과 삶이 경직되어 있
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기도 할 것이다. 물론 그 경직된 가운데에서도 혁명이
라는 말의 사용방법에 따라서 사람들이 느끼는 것이 조금 더 달라진다. 개인적
으로는 자기 계발서가 혁명이라는 말을 남용하면서 사용하는 것에 거부감을 갖
고 있다. 그런 점에서 내가 생각하는 혁명은 아마도 우리나라의 사람들 중에서
혁명이라는 것에 어느 정도 기대와 동의를 하는 이들에게 가까운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그것은 어쩌면 우리나라에서 혁명이라고 이름을 붙일 수 있
는 가장 마지막 모습을 보고 자란 후에 그 혁명이 망가지고 새로운 혁명을 꿈꾸
는 것이 금지된 지금을 살아가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 책 혁명의
배반 저항의 기억은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우리에게 다가온다. 우리의 혁명의
기억과 합쳐지면서 말이다.
아니다. 자칭 혁명이라고 부르며 무력으로 정부를 전복시킨 이의 죽음을 기억
하기에는 너무 어렸다. 그래서 내가 기억하는 혁명은 6월 항쟁의 모습이었다.
그리고 내가 다닌 성당의 정문을 막은 전경들의 버스였다. 그리고 그 6월 항쟁
의 결과물이 망가지는 것을 지켜보면서 자라야 했고, 그 망가짐을 인식할 수 있
게 되었을 때에는 이제 과거의 존재가 되었던 망령들이 우리 사회로 다시 돌아
온 것을 목격해야 했다. 하지만 그 망령들은 이제 과거보다 더 강하게 우리 사회
를 지배하고 있는 모습이다. 과거에는 무력으로 그렇게 했다면 이제는 무력에
돈을 갖고 그런 지배를 정당화하고 있는 모습이다. 그래서 이 책 혁명의 배반 저
항의 기억은 우리의 역사와 합쳐지면서 더욱 더 인상적으로 느껴졌다. 프랑스 혁
명이라는 세계사적으로 가장 중요한 사건의 과정에서 보여진 이율배반적인 모습
들과 그 혁명을 성공으로 이끈 두 계급이 결국은 갈라져 하나는 다시 과거의 지배
자들처럼 변하고 착취하는 과거로 돌아가는 그 모습은 그래서 우리의 혁명과 지
금의 모습으로 다시 비춰진다. 어쩌면 세상의 모든 나라는 같은 과정을 밟아간다
는 생각을 증명이라도 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게 이 책은 혁명이라는 이름의 시
간이 지난 다음을 이야기한다. 그 혁명이라는 이름이 지나고 새로운 체제가 자리
를 잡으면서 그 혁명이 어떻게 목숨을 걸고 싸운 사람들의 이상을 짓밟았는지를
잘 보여준다. 그리고 그 모습에서 다시 우리의 현실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어쩌
면 이 책에서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은 유럽의 프랑스가 아닌 바로 우리의 모습일
지도 모른다.
어쩌면 2002년 월드컵의 그 순간순간과 그 모습이 이어진 2002년 말의 모습이 바
로 우리가 경험할 수 있었던 마지막 혁명이었을지도 모른다. 어느 작가는 그 현
장에서 자기의 세대는 끝났고, 나는 더 이상 그 시대를 기록할 자격이 없다는 말
을 하면서 신문사를 그만뒀다고 한다. 그렇게 가장 혁명적이지 않으면서도 가장
혁명적인 시간을 마지막으로 이제 우리의 세상에서 혁명은 더 이상 만나지 못할
것처럼 느껴진다. 혁명을 이야기하는 것도, 혁명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생
각하는 것도 모두 미숙한 생각처럼 느껴진다. 이제 혁명은 자기 계발서에서나 만
날 수 있는 말일지도 모른다. 우리의 세상에서 이제 혁명은 그 수명을 다한 것일
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책의 제목처럼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 남아있다. 잘못된
것에 저항한 그 행동들은 기억해야 한다. 크게 변하지 않는다고 해도 그 저항이
결국은 우리의 지금을 그래도 아주 조금은 더 좋은 방향으로 변화시켰기 때문이
다. 우리가 저항할 수 있는 인간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그리고 이 책은 혁명
이 아닌 저항을 기억하라고 우리에게 이야기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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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프랑스 혁명을 앙시앵 레짐을 모두 청산했는가 프랑스 혁명을 바라보는 두 가지 시선 정통주의와 수정주의
18세기 프랑스의 모든 권력은 귀족과 성직자를 중심으로 한 특권계층에게 집중되었다. 당시 프랑스는 법적으로 성직자, 귀족, 제3신분의 3개의 신분으로 구분되어 있었는데, 중세 이래 많은 변화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사회신분은 여전히 특권층과 비 특권층으로 크게 양분화 되어 있었다. 전체 2700만 인구 중에서 50만이 채 안 되는 성직자와 귀족, 즉 특권층은 전체 토지의 30%이상을 차지하고 있었으며 세금도 부담하지 않았다. 반면 특권계층은 그들의 향락적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서 과도한 세금을 거두기 시작했다. 결국 계급 간 경제적 불평등은 점차 심화되었고, 이에 따라 가난한 농민은 물론이요, 상공업자들 까지도 무거운 세금과 사회적 의무에 시달릴 수밖에 없었다.
한편 특권층 중에서도 하급에 속하는 시골 신부나 가난한 귀족의 경우 일반 상공업자나 농민에 가까운 어려운 생활을 해야 했다. 그러나 구시대의 경우 어쨌거나 문벌이 사회적 성공이나 출세를 결정했기 때문에 교육적인 측면에서 이들은 계속해서 성장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들에게 당시 프랑스의 구조적 차별은 분노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결국 굶주린 파리 시민들뿐만 아니라 구조적 차별에 분노하던 가난한 특권층까지 합세한 민중의 무리가 앙시엥 레짐의 불평등 타파를 부르짖으며 스스로 혁명의 주체가 되기 시작한다. 즉 1789년 7월 이전까지의 차별과 불합리함에 대한 반발로 일어난 것이 바로 프랑스 대혁명이다. 일련의 성공을 거둔 가공할 이 혁명은 유럽과 세계 역사에서 정치권력이 소수 왕족과 귀족, 성직자에서 일반 시민에게 옮겨지는 시민사회로의 전환점이 되었다.
여기까지가 ‘자유와 평등에 대한 소신과 이를 지키기 위한 피나는 투쟁’으로 프랑스 대혁명을 바라보는 정통주의적 시선이었다면, <혁명의 배반 저항의 기억>에서는 학계의 지배적 이론이었던 정통주의적 해석에서 벗어나 수정주의적 해석에 기반을 두고 논의를 펼쳐나간다. “여성에게도 과연 르네상스가 있었는가?”라는 조안 켈리의 물음을 통해 ‘프랑스혁명은 여성에게도 진짜 혁명적이었는가?’라는 물음을 던지고, 더불어 ‘프랑스혁명이 노동자, 유색인에게도 혁명이었는지’라는 의문을 제기한다.
굵직굵직한 역사적 사건들이 역사학자마다 다른 사관(史觀)에 따라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되는 것은 익숙한 일이다. 하지만 우리나라 학계에서는 1980년대 중반까지 혁명의 근원이라고도 불리는 프랑스 혁명에 관해서만큼은 정통주의 사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간단히 프랑스 혁명에 대한 정통주의적 해석과 수정주의적 해석을 정리해 보자면, 정통 해석에서는 앞에서 언급했듯이 ‘특권 계급이 우위를 차지하던 구체제 아래서 성장한 부루주아지가 정치권력 싸움에서 승리를 확보하기 위해 민중과 결합, 봉건제를 완전히 파괴한 부루주아지가 선도한 반봉건 사회혁명’으로 프랑스 혁명을 파악한다. 반면 수정 해석은 이에 완전히 반대되는 입장을 취하고 있는데, 우선 프랑스 혁명의 반봉건적 성격을 부정하면서 토지 소유에 입각한 통치 체제로서의 봉건제도는 프랑스 혁명 때 없어진 것이 아니고, 혁명이 일어나기 전에 이미 사라진 것이라고 주장한다. 또한 프랑스 혁명의 시민 혁명적 성격을 부정하면서, 기존의 귀족과 혁명 주체인 부르주아지 사이에 별 차이가 없음을 지적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결국 프랑스 혁명은 부르주아 혁명이 아니라 유산 계급의 혁명이며, 계급 혁명이 아닌 정치 혁명에 불과하다는 주장인 것이다.
이러한 영미계 학자들의 수정주의 해석이 받아들여지기까지 격렬한 논의가 상단 기간 이어졌으나, 결과적으로는 1980년대 이후 새로운 세대의 프랑스 역사가들이 등장하면서 정통 해석을 비판하면서 프랑스 혁명의 정치사적 측면을 더 부각시키는, 즉 프랑스 혁명을 정치적 문화혁명으로 보는 시각이 주류가 되었다. 저자 육영수 교수는 이러한 현대 프랑스 역사가들의 새로운 수정주의 해석을 우리나라에 소개한 장본인이다. <혁명의 배반 저항의 기억>은 그가 1997~2013년 사이에 써온 글들을 모은 것이다. 프랑스 혁명을 새로이 조망하는 글이지만, 목적은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에 혁명이란 무엇이어야 하는지 성찰하는 것이다. 저자의 프랑스 혁명과 현재에 대한 치열한 고민이 돋보이는 책이다.
1부 : 우리가 알고 있던 프랑스 혁명은 없다
여성을 위한 프랑스 혁명은 없다? 프랑스 혁명 초기 부르주아 여성들은 청원과 제안 등의 역할 뿐만 아니라 혁명의 대중적 동력을 일으키는데도 큰 역할을 했다. 부르주아 여성들은 빵을 요구하는 하층계급의 여성들과 함께 대중적인 시위에 앞장서며 혁명의 중요한 대중적 동력으로서의 역할을 자임한 것이다. 바스티유 감옥 습격, 베르사이유 행진 등의 선봉은 여성들이었고 그들을 이끌었던 것은 부르주아 여성들이었다. 따라서 프랑스 혁명이 ‘여성을 해방시키고 그들의 평등과 우애를 향상’시켰다는 정통의 평가가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에 대하여 반박하는 수정주의적 견해가 등장한다. 혁명 전에도 살롱 문화를 통해서 자연스럽게 자신들만의 권력을 행사하던 엘리트 여성들을 제어하기 위해 자코뱅 혁명정부가 여성의 집회를 금지시켰고, 또한 남성 혁명주의자들은 ‘젠더에 바탕을 둔 예의범절 코드’를 주조함으로써 여성은 가사에 전념하는 것이 하나의 미덕인 것처럼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처치는 모두 혁명의 미완성을 이러한 경계를 넘는 여성들의 탓으로 돌리기 위한 남성 혁명가들의 음모에 다름없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프랑스 혁명을 이끌었던 여성들이 남성 혁명가들에 의해 반혁명 분자라는 오명을 쓴 것과, 나아가 ‘서양의 다른 나라 여성들보다도 더 선구적이며 희생적으로 여권쟁취를 위해 투쟁했던 프랑스 여성들에게 가장 늦게 참정권이 주어졌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프랑스 혁명의 새로운 이면을 발견하도록 해 준다. 이 장에서 저자는 프랑스 혁명 속의 여성뿐만 아니라 인권선언과 아이티 혁명 사례에 초점을 맞춰 혁명 속 노동과 복지, 유색인에 대해서도 서구 중심주의적 한계를 지적하며 새로운 수정주의적 시각을 제시한다.
2부 : 영상으로 서술한 프랑스 혁명 세 편의 극영화 <메리쿠르>, <슈앙>, <나폴레옹>을 통해 프랑스 혁명의 새로운 얼굴을 묘사한다. 프랑스 혁명은 1789년 일어난 이후 끊임없이 예술가들의 단골 주제가 되어 왔다. 최근의 영화 ‘레미제라블’ 역시도 프랑스 혁명 시기를 묘사한 작품으로 국내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 이 장에서는 프랑스 대혁명이라는 동일한 사건을 ‘문자로 쓴 역사’와 ‘영상으로 쓴 역사’가 어떻게 달리 해석하는지 사학사적 관점에서 고찰하고 있다.
3부 : 프랑스 혁명의 문화적 전환 프랑스혁명을 ‘문화적 사건’으로 재조명해보려는 글들을 담았다. 프랑스혁명은 봉건귀족에 대한 부르주아지 계급의 승리라는 거대담론일 뿐만 아니라 혁명가요와 혁명축제가 꽃피었으며 민중문화와 엘리트문화가 충돌하고 교류했던 정치문화의 일상무대였음을 흥미롭게 보여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