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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의 책이 될 것 같다.
이 책은 저자의 박사 학위 논문을 거의 10여년 만에 대중적으로 풀어 낸 책이라고 한다. 이런 글이 박사 학위 논문이라니. 미셸 푸코의 '광기의 역사'를 떠올렸다.
제목이 '슬픈 붓다'이다. 붓다가 열반하신 이후, 붓다의 뜻을 잇겠다는 수많은 불교라는 이름을 가진 종교들이 붓다의 뜻을 거스른다는 의미에서 제목에 '슬픈'이 들어 갔다. '붓다의 뜻'이란 무엇인가. 첫째, 세상 밖에서 수행이 중심이 되는 이상주의적 공동체 건설이다. 두번째, 세상 밖에 있으면서도 세상에 대한 극단이 아닌 중도적 연민을 잊지 않는 것이다.
저자는 역사 속의 붓다를 그리고 있다. 그가 그리고 있던 이상 세계. 이상과 현실 사이의 좁디 좁은 길을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외로이 걸어 가는 붓다의 모습이 훤히 보이는 듯 하다. 이 책은 신화 속의 신도 아닌 극좌적 혁명가도 아닌 역사 속의 인간 붓다, 정말 모두가 잘 사는 세상을 현실 속에서 이루려고 노력한 합리주의자의 모습이 그려졌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붓다를 바라보는 전혀 상반된 측면에서 드러나는 수많은 오해들을 풀고 있다.
사회적 실천과 내적 수행이 일치하는 길은 어디 있을까. 다행히 붓다는 그 길을 먼저 걸어 가셨고, 우리에게 당당히 '와서 보라'라고 말씀하신 분이다. 다시 한 번 좋은 책이다. 더 많이 팔리고 읽혔으면 좋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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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붓다는 브라만 중심의 첨예한 계급사회를 비판하고 의례 중심의 힌두교에서 벗어나 인간 회복을 위해 정진하는 사람들의 모임을 새로운 공동체로 세우려는 휴머니스트였다.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붓다의 삶에 대한 여러 기록은 대부분이 역사 속에서 활약한 한 인간의 행적이 아닌 신의 활약기다. 인간 붓다를 신 붓다로 만드는 작업은 붓다 사후 400년 정도가 지난 뒤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다. 그들은 왜 인간 붓다를 버리고 신 붓다로 그를 신격화했을까? 그것은 그들이 붓다가 세운 해탈이라는 궁극을 추구하는 것이 아닌 세상 속에서 권력을 누리고자 했기 때문이다."(49쪽)
2600년 전, 고따마 싯닷따는 지금의 네팔 남부에 있는 사끼야(석가) 족의 작은 성읍국가인 까삘라와스뚜의 왕이던 숫도다나의 아들이다. 까삘라와스뚜는 갠지스 강 유역과 히말라야 산록을 잇는 교통로상에 있는 작은 도시였다. 붓다의 이름은 싯닷따이고, 사끼야족의 한 가문인 고따마에 속해 있었기 때문에 성이 고따마로 알려졌다. 저자는 붓다 일대기에 등장하는 '사문유관'을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소설에나 나오는 얘기로 간주한다. 사문유관이란 붓다가 성 밖에 나가 사람들 사는 모습을 둘러볼 때 노인, 병자, 시체, 사문을 보고서 출가하게 된 계기를 강조한 이야기다. 싯닷따는 동문 밖에서 허리가 구부러진 노인을, 남문 밖에서 신음하는 병든 환자를, 서문 밖에서 죽은 이의 시신을 운구해 가는 상여를, 북문 밖에서 탁발하러 다니는 출가 사문을 보았다. 야소다라와 결혼하여 아들 라훌라를 얻은 싯닷타는 29세의 나이에 출가를 결행한다. 그런데 저자는 니까야 경전에 나오는 승 라훌라가 붓다의 아들이라는 것은 역사적 증거가 없다는 입장이다.
붓다가 제자들에게 설파한 근본 교리는 사법인, 사제와 팔정도, 연기 세 가지다. 사법인은 불교의 진리를 네 가지로 함축한 것이다. 법인이란 법의 도장이라는 말로 도장을 찍어 결제를 하듯이 참된 이치를 가리켜 '이것이 진리'다 하고 결정확인한다는 뜻이다. 사법인은 제행무상인(모든 것은 변화하기 때문에 모든 행위는 덧없다), 제법무아인(모든 것에는 영원한 아뜨만이 없다), 일체개고인(그런데고 그 법을 모르기 때문에 모든 것이 고통스럽다), 열반적정인(그러한 번뇌의 불꽃이 꺼지면 닙바나에 이른다)이다. 사제-팔정도는 모든 것이 고통이고, 그 원인은 집착이며 그것을 끊어야 하는데 오로지 여덟가지 바른 길을 가는 것이야말로 열반에 이르는 길이라는 얘기다. 열반이란 탐진치의 소멸, 즉 탐욕의 소멸, 노여움의 소멸, 어리석음의 소멸이다. 붓다의 열반 개념은 스토아 철학의 아파테이아, 에피쿠로스의 아타락티아, 칸트의 자유 개념에 비견할 수 있다. 열반을 실현할 방도가 팔정도인데, 정견(올바른 견해), 정사(올바른 사고), 정어(올바른 언어), 정업(올바른 행동), 정명(올바른 사명), 정정진(올바른 노력), 정념(올바른 생각), 정정(올바른 명상)이다.
팔정도는 무엇보다도 '중도'를 표방한다. 미다가야에서 다섯 명의 비구를 상대로 한 붓다의 첫 설법을 '초전법륜'이라 하는데, 쾌락주의와 금욕주의라는 두 극단적인 입장에 대한 비판이 초전법륜의 시작이다. 온갖 욕망에 집착하는 쾌락주의와 스스로 고행을 일삼는 금욕주의는 붓다 자신이 과거 몸소 체험한 생활 방식에 대한 반성이기도 하다. 인간 붓다는 한마디로 말해서 "중용과 조화를 중시한 합리주의자"다.
연기는 모든 것은 다른 것과의 관계 속에서 생성하고 소멸하므로 어떠한 사물이든 혼자 존재할 수는 없고 다만 원인과 결과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붓다는 사제 중심의 베다 종교인 힌두교를 버리고, 개인 주체의 깨달음을 추구하는 합리주의 종교운동을 전개한 인류의 큰스승이다. 우빠니샤드 스승들이 카스트 제도 안에서 제사가 아닌 깨달음을 추구하자고 하는 입장이었다면, 붓다는 브라만 중심의 제사, 의례, 가문, 혈통의 본질주의를 완전히 부인하고 평등한 공동체를 꿈꾼 개혁가였다. 저자는 우빠니샤드가 힌두교의 내부 혁신을 강조한 온건한 종교운동이라면, 불교나 자이나교는 힌두교의 폐기론을 내세운 급진적 종교운동이라고 해석한다. 그런데 주의할 점이 있다. 그것은 붓다가 카스트 체계 반대론자가 아니라는 점이다. 저자는 그렇게 주장한다. 즉 붓다가 카스트 체제 자체를 부정한 것이 아니라 다만 브라만의 권력독점을 비판한 것이라고.
붓다가 건설한 수행공동체, 즉 상가는 마르크스-엥겔스가 추구한 원시공산사회의 형태로 볼 수도 있는데, 붓다가 사회개혁을 추구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혁명을 추구한 마르크스와 다르다고 저자는 설명한다. 또한 마르크스가 계급 없는 이상 사회를 꿈꾸었지만, 붓다는 기본적으로 카스트의 존재를 인정했다. 붓다가 비록 브라만의 독점 권력을 비판했지만 자기가 속한 끄싸뜨리야의 사회적 역할을 더욱 우선시했고, 최하층 슈드라에 대해선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았다.
"붓다는 모든 사람을 상가의 구성원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하지만 실제 경전을 보면 붓다가 받아들인 구성원은 상층 카스트인 브라만, 끄샤뜨리야, 바이샤 중심이었다. 그 가운데서도 특히 지배 계급인 브라만과 끄샤뜨리야 출신이 다수였다. 붓다의 최고 제자인 사리뿟따, 목갈라나, 까띠야야나는 젊은 브라만 출신이고, 아난, 라훌라, 아누룻다는 끄샤뜨리야 출신이다."(13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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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불교의 부처, 이 책에서는 붓다라고 불교를 시작한 위대한 인물에 대한 이야기이다. 붓다가 행하고자 했던 내용과 시간이 지나면서 달라진 불교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그래서 초기 부처의 사상이 훼손되어 온 지금의 시점에서 볼 때, 초기 부처의 사상을 다시 알아보고 그것을 역사적으로 보자는 것이다. 붓다가 원하는 것과는 다른 형태의 종교가 되어 버린 불교, 그것을 보면서 눈물을 흘릴지도 모르는 슬픈 붓다인 것이다. 불교는 중동지역에서 생긴 기독교와 이슬람교와는 다른 형태의 종교이다. 불교는 선악을 다루는 종교가 아니다. 그래서 불교에 있어 옳고 그름도 없고, 유신이니 하는 형태도 없는 것이다. 이 종교는 각 지역별 토착 종교와도 별 문제없이(이차돈의 순교?) 잘 결합되고 있다. 붓다의 신격화는 그의 사후 400년 이후에 붓다짜리따 경전에 신으로 윤색되어 그려졌다고 한다. 그리고 초기 경전에도 붓다의 기록은 거의 없다고 한다. 붓다 생애 45년 중 출가 후 5년만이 그려진다고 한다. 당시 인도에는 힌두교가 성행하고 있고,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카스트 제도의 기반으로 사회가 안정되고 있었다. 당시 힌두교는 제사 의식이 강한 의례 만능 주의였다. 그리고 제사가 행해질 때 아주 많은 소들이 희생의 제물로서 바쳐졌다고 한다. 이것이 농경사회에서 소를 중시하는 사회에 경제적인 어려움을 줄 정도였던 것이다. 또한 사회적으로는 철기가 도입되고 농경 산업이 발전되고 교역이 늘어나는 시기였다. 그에 반하여 잉여가 발생하여 국가 체제가 군주제와 공화제가 섞여 있는 사회였으며 더 많은 영토를 차지하기 위해 영역국가가 서로 전쟁을 일으키는 시기였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힌두교의 의례 만능 주의에 대해서 반대하는 세력이 등장하게 된다. 하나는 우삐니샤드 운동으로 힌두교 체제 내에서 활동하는 세력이고, 다른 하나는 붓다처럼 힌두교를 벗어나서 활동하는 세력이다. 붓다의 가장 기본은 열반이다. 즉 윤회의 사슬을 끊고 열반의 경지에 드는 것이다. 윤회는 모두 인에 의한 것으로 사회 활동에서 발생한다. 즉 사회 생활을 끊는 것이 중요하다. 세상밖으로 나가는 것이다. 그래서 붓다가 시작한 것이 세상밖으로 나가는 일인 것이다. 그리고 공동체인 상가를 설립하고 불법을 설파한다. 인도 특성상 4개의 우기가 있는데 이 기간을 이용하여(우한거) 공동체에서 법을 설파하고, 나머지 8개월 동안은 다른 활동을 하는 형태이다. 이것이 가장 기본적인 붓다의 철학이다. 붓다의 행적에서 몇 가지 내용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첫째는 경제 행위이다. 붓다는 제자들에게 일체의 생산행위를 하지 말라고 했다. 보시를 통해 먹을 것, 입을 것, 잠잘 곳, 약품 등을 조달하는 행위이다. 둘째는 평등에 대한 내용이다. 붓다가 카스트 제도에 대해서 반대했다는 내용은 없고, 다만 최상급 계급인 브라만 계급에 대해서는 비난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핏줄로 카스트 제도가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직능에 따라 형성되는 것으로 이해했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플라톤의 철인 정치와 붓다의 카스트제도가 비슷한 면도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세 번째는 정치와의 관계이다. 붓다는 왕정에 대해서 옹호했다는 것이다. 공자가 말하는 왕도 정치와 비슷한 면도 있어 보이고, 홉스의 리바이어던 정도가 아닌가 생각한다. 무정부 상태는 오히려 민중이 가장 많은 피해를 입으니 피해야 한다고 인식했던 것으로 보인다. 붓다는 힌두교의 의례를 반대하고, 윤회를 끊고 열반에 이르라고 설파한다. 하지만 붓다의 제자들은 붓다가 죽자마자 바로 붓다의 무덤에 스투파를 만들었다. 의례에 대해서 반대하고 상징을 만들지 말라고 했지만, 불교처럼 번져 나간다. 열반 중심의 무미건조한 관념 세계는 퇴출되고 다시 힌두교의 세계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힌두교 브라만 계급이 권력을 가지고 부를 축적하는 것을 비난했지만, 붓다의 제자들은 불교를 이용하여 권력을 가지고 부를 축적한다. 그래서 붓다는 전혀 자신의 의지와 관계 없이 이적을 행하는 권위있는 신이 되고 만다. 결론으로 붓다는 온건 합리적인 진보주의자이다. 기존 질서인 힌두교의 허례인 의례 중심을 반대하고 사회 밖의 공동체를 만들어 내지만, 권력과의 적당한 거리, 보호해야 할 민중과의 적당한 거리를 두어 공동체를 유지할 수 있다. 하지만 후세에 불교에서 다시 힌두교와 같은 의례 형식과 종교 지도자의 권력과 부의 축적은 막아내지 못한다. (개인적으로는 내가 힌두교에 대해서 아는 것이 없어서 아직 힌두교와 불교의 차이점에 대해서 잘 모르겠다. 그리고 힌두교는 그렇게 많은 소를 희생으로 잡았는데, 언제부터 소를 신성한 가축으로 했는지 모르겠다. 힌두교에서 불교가 나왔지만 정작 인도에서는 불교는 힌두교에 흡수되었고, 유대교에서 기독교가 나왔지만 정말 유대인들은 기독교를 믿지 않는 현상이 흥미롭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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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본인이 역사학적으로 불교를 본 역사학자라로 하지만, 초기불교와 대승불교와 실제 부처님이 말한 것을 제대로 구분하지 못한 오류가 곳곳에 있어 그 확인 작업도 검증받지 못한채 이러한 책을 폈다는 사실에 그 자질이 의심스럽다. 그러하면서 자신은 객관적이라는 말을 서두에서 부터 말을 하다니 실소를 금할수 없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주장하신 기본 3가지에서 사법인과 사성제,팔정도와 연기법을 논하면서 석가모니 부처님 말씀하신것은 12연기법인데, 저자는 대승불교의 연기법을 말하면서 이것을 석가모니 부처님이 말씀하셨다고 말하니 무엇이 석가모니 부처님이 말씀하신것인지, 무엇이 초기불교인지, 무엇이 대승불교인지도 모르면서 단순히 단편적인 지식으로 모든 것을 평하려는 실수가 도처에 있다. 또한 분명히 종교는 현세적인 대중들을 위한 종교라고 하면서, 그러한 시류에 편승한 대승불교는 잘못됐다고 주장하는 본인의 모순점도 곳곳에 남아 있다. 또한 역사학자라고 한다면 인문학적 이성적 근거가 있는 명확한 논리로 접근해야지 감정적이나 시류에 편승된 짧은 지식으로써 짜집기식 편집은 참으로 한심한 생각이 든다. 어떠한 진실도 이렇게 짜집기식이나 90%사실을 가지고 10%오류로써 정리한다면 그 어떤 종교나 체계도 잘못된 지식의 전달이나 주장이 될수 밖에 없다. 종교에 관심이 없더라도 제대로된 이성적 논리로 본다고 해도, 교수나 학자가 지었다고 보기 힘든 문체등은 교수의 자질을 의심하게 한다. 또한 충고도 아니고 비평도 아니고 푸념도 아닌 전체 줄거리는 '당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냐고 묻고 싶지만 본인 스스로 마지막에 주장한다고 마무리는 지었니 그런줄은 알겠지만, 그냥 술자리에서 말하는 것 같은 논체는 차마 저자가 교수나 학자라고 믿기 어렵다. 모두가 인도철학사를 한번만 읽어도 알수 있는 일이고, 대승불교나 초기불교에 잘못된 이해를 적어 놓은 것부터 과연 당신이 부처님에 대한 그러한 짧은 지식으로써 불쌍하다고 할 만큼 자질이 있는가? 하고 그런 입장이나 놓였는가? 라는 의문부터 든다. 또한 당신이 그렇게 비평하는 스님들이나 수행자나 재가신자들이 없었다면, 당신이 알고 공부할 만한 불교는 남아있지도 않았을 것이라는 현실적인 상황도 이해하지 못하고 무조건 비평꺼리만 찾는 이책의 내용에서 참으로 불만만 쌓인것을 책으로 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책2권도 비슷한 생각이 들어 참으로 한심한 책이라 생각이 된다. 돈 벌기 위한 책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