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역사에서 근대라 함은 일본이 일으킨 운요오호 사건으로 강화도조약이 체결된 1876년을 그 기점으로 보고 있다. 그리고 현대란 일제 식민지상태가 끝이 난 1945년 이후를 가리킨다. 1차 세계대전은 세계사에서 근대와 현대를 가르는 분기점이 되어왔다. 그러나 현대의 시작은 나라마다 다를 수밖에 없다. 러시아는 러시아혁명을, 중국은 5.4운동을 현대사의 기점으로 삼고 있으며, 식민통치를 받고 있던 나라들은 독립이 곧 현대사의 출발점이 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8.15해방이 현대사의 시작이 된 것이다. 지금까지 약 70여 년이 되었다. 근대사에 대한 우리의 인식은 사건위주, 더군다나 일제강점기 동안 일어났던 일들은 대부분이 독립운동의 차원에서만 배워왔기 때문에, 빈약하기 이를 데 없다. 그렇다면 현대사는 어떠할까? 현대사 역시 근대사와 마찬가지이다. 우리들이 살고 있는 현재에서 가까운 역사이다 보니, 보다 자세하고 정확히 알고 있을 것 같지만, 사실은 이런저런 이유로 더 잘 알지를 못하고 있다. 특히나 절대권력과 관계된 부분은 왜곡되고, 은폐되기 일쑤여서 지금도 밝혀지지 않은 것들이 많음은, 우리의 현대사가 그만큼 오욕의 세월을 거쳐온 것에 다름 아니다. 이 책의 저자는 우리의 현대사, 즉 해방 이후 70여 년간의 역사 중, 전반기에 해당하는 약 35년간의 역사를 두 권의 책에서 다루고 있다. 역사에 대한 전문 연구자가 아닌 저자는, 그가 쓴 책이 통사도 아니고 특정분야만을 다룬 부분역사서도 아니라고 말한다. 그 시기는 한국전쟁 중 군대에 징집되었던 우리들 부모세대가 청춘을 보낸 시대였고, 우리들이 어린 시절과 감수성 예민한 청년시절을 보낸 시대였다. 또한 그 시기는 이승만과 박정희가 대통령으로 살아간 시대이기도 했다. 먼저, 1권인 이 책 [산골대통령 한국을 지배하다]에서는 해방 후부터 4.19혁명이 일어나기 전인 1959년까지 가혹하기만 했던 경찰국가 시절을 다루고 있다. 저자는 그 시절에 일어났던 사건들 중, 자신의 눈에 들어오는 것을 임의로 선정해서 다루었다고 말한다. 해방 후 3년간의 역사는 역사학자 김기협이 쓰고 있는 [해방일기]에 자세하게 나와있다. 일제패망 후, 남한 땅에 들어 온 미군은 점령군으로써 진주했다. 그러나 그들은 이 땅을 점령할 준비가 전혀 되어있지 않았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공식어가 영어가 되면서 하루아침에 출세한 사람들은 통역관들 이었다. 그렇지만 그들 대부분은 친일파이었거나, 역사의식이 없는 사람들 이었다. 좌우 대립이 극심했던 당시, 미군정청은 이 땅의 민중들의 바램과는 달리, 통치의 편이성을 위하여 친일파를 중용했고 좌익 탄압만을 우선 목표로 삼았다. 그 결과 쌀값 폭등과 같은 경제문제는 사람들의 삶을 피폐하게 만들기에 이르렀다. 1946년 대구에서 시작된 10월항쟁은 이런 문제들이 곪아터져 일어났음에도 결과적으로 실패로 끝났고, 이는 좌익의 기반이 무너짐과 동시에 우익에게 대중장악력을 높여 주었다. 미소공위의 결렬은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가속화시켰고, 이는 1948년 4.3사태와 여순반란사건이 일어나는 원인을 제공하기도 하였다. 또한 이 사건들은 해당지역 민간인들을 집단 학살하는 것으로 끝이 났고, 이것들로부터 미군정청은 결코 자유롭지 못했다. 1948년 8월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다. 7월17일 선포된 제헌헌법은 대한민국이 3.1운동과 임시정부의 정통성을 계승하고 있음을 분명히 하였으나, 막상 수립된 정부는 그러하지 못했다. 남한만의 단독정부이자, 정부와 군대와 경찰 모두를 친일파들이 장악한 것이다. 1948년 11월, 여순사건의 여파로 국가보안법이 제정되었다. 이는 안보보다는 당시 이승만의 정치적 반대세력에게 올가미를 씌우는데 사용하기 위함이었으며, 제정과 동시에 헌법 위에 존재하는 괴물이 되어갔다. 아직까지도 그 수명이 붙어있는 것을 보면은 그때나 지금이나 정치인들의 속성은 별반 차이는 없는 것 같기도 하다. 1949년 농지개혁법이 국회를 통과하였고, 1950년 농지개혁이 확정되었다. 이는 비록 유상몰수, 유상분배 방식이었으나, 공식적으로는 이 땅에 소작농이 존재하지 않음을 뜻하는 것이었다. 친일파 지주계급들의 격렬한 반대가 있었음에도, 북한은 이미 1946년 무상몰수, 무상분배를 실시하고 있어, 더 이상 미룰 수가 없었기에 가능했다.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났다. 이승만 정권은 전쟁기간 중 국민들에게 거짓말로 일관했다. 이들에게는 국가나 국민들보다 자신들의 안위가 더 중요했다. 전쟁이 한창인 와중에도 이승만은 자신의 대통령직 유지를 위하여 부산정치파동이라는 친위쿠데타를 일으켜 대통령직선제로 헌법을 개정한다. 그런가 하면 전쟁기간 중 일어난 수많은 민간인 학살은 흑백논리에 따른 편가르기와 인간의 광기가 주원인이었다. 국민보도연맹사건, 거창학살사건, 국민방위군사건 등, 모든 민간인 학살의 배후에는 권력에 눈이 먼 이승만과 그의 추종자들이 버티고 있었다. 전쟁이 끝나자, 한국에는 두 명 이상의 대통령이 지배하는 시기로 접어들었다고 저자는 말한다. 하나는 정치적으로 필요할 때마다 민의를 들먹이며, 민의대라는 관제 데모대를 동원하는 민의대통령 이승만이었고, 산골마을에서 이장들의 뺨을 서슴없이 갈기는 산골대통령 지서주임들이 다른 하나이었다. 이승만시대는 분명 경찰국가 시대였다. 경찰은 정권수호의 하수인으로 민중의 지팡이가 아니라 민중의 몽둥이였다. 1954년 총선은 산골대통령의 위력을 실감한 선거였고, 결국 국회는 사사오입개헌이라는 희극을 연출하며 대통령 중임제한을 폐지하고 이승만 영구집권의 길을 열어 놓았다. 이승만은 우리나라 초대 대통령이었다. 우리들이 어렸을 때, 학교에서는 그를 국부라고 가르쳤다. 그랬기에 우리의 현대사는 왜곡될 수밖에 없었다. 모든 것을 반공을 국시로 하는 우익의 입장에서 바라보았고, 그런 우익의 정점에 친일파들과 정치 모리배들로 둘러싸인, 권력의 화신 이승만이 있었다. 그러했기에 좌익의 주장도, 민족주의자의 주장도 들어설 틈이 없었다. 당연히 죽어나는 것은 국민들뿐이었다. 이승만은 결국 4.19로 쫓겨나지만 현실에서는 승리한 정치가였다. 반면에 통일을 위한 행보를 하였던 김구는 현실에서 패배한 정치가였다. 그러나 역사적 평가에서는 반전이 일어난다. 공과에 다소간의 이견이 있지만, 김구는 살아나고, 이승만은 죽었다. 아침신문에 한국사를 수능필수과목으로 넣느니, 빼느니 하는 논란이 일어나는 것을 보고서 착잡하기 이를 데가 없다. 우리의 역사를 개인의 선택에 맡긴다는 것은 곧 우리의 정체성을 포기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국민들이 역사를 몰라야 되는 이유가 있을까? 그것으로 득을 보는 세력은 누구인지 생각해보게 만든다. 우리의 현대사, 지금으로부터 결코 멀지 않은 시기에 일어난 일들이지만, 우리들이 얼마나 아는지 궁금해진다. 과거의 역사에서 교훈을 찾지 못하면, 그 역사는 반드시 반복된다고 한다. 그러기에 우리들은 과거의 역사를 알아야 하고, 거기에서 교훈을 찾아야 한다. 저자가 쉽게 풀어 쓴 현대사의 사건들을 읽으면서, 우리의 역사가 너무나 안쓰럽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비단 나만은 아닐 거라고 믿고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