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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정은이란 작가는 일전에 [디디의 우산]으로 만났다. 그리고 또 다시 연작소설인 이 책 [연년세세]로 만나고 있다. 연작소설은 보통의 소설집보다 읽기가 편하다. 등장인물이나 작품의 배경을 매 작품마다 따로 기억해야 하는 수고로움을 덜 수 있고, 그렇다고 책에 실린 소설들을 순서대로 연달아 읽어야 하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소설을 읽은 까닭은 굳이 그런 이유나 혹은 전작을 읽어 작가의 이름이 눈에 익어서만은 아니다. 연년세세(年年歲歲)라는 말이 연말 혹은 연초에 가장 적합한 단어란 생각이 들어서였다. 시간은 무심하게 흐르고 그 흐름의 어느 한 지점에 지금의 내가 있다면, 내 삶이란 것은 흘러온 시간들의 총합이 아닐까 싶다. 그런 시간들은 계속 이어져 앞으로 나아가겠지만 흘러온 한 지점의 기억 또한 이어질 수밖에 없을 것이기에 연년세세이다.
책에 실린 네 편의 소설은 한때 순자라 불리었던 이순일과 그의 두 딸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한 여인이 살아온 삶의 이야기이지만 한국사회가 겪어온 풍경들이 그곳엔 가감없이 펼쳐진다. <파묘破墓>에서 이순일은 외할아버지의 묘를 없애기로 하고 마지막 제사를 드리기 위해 둘째 딸 한세진을 데리고 최전방부대가 자리 잡은 산속에 위치한 지경리로 떠난다. 그런 이순일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녀가 살아온 세월을 알아야만 했다. <무명無名>은 이순일의 자서전격인 소설이다. 어려서 아버지가 행방불명되고 백부가 월북하자, 다섯 살 이순일은 세 살 된 동생과 함께 외조부에게 맡겨진다. 지경리 사람들은 이순일을 순자라 불렀다. 어느 날 저녁밥을 짓다가 자신의 실수로 아궁이의 불이 동생의 옷에 옮겨 붙고 결국 동생은 죽음에 이르지만, 외조부는 화상을 입은 자신의 손을 보면서도 그 일 자체를 입에 올리지 않는다. 열다섯이 되었을 때 난데없이 나타난 고모라는 사람을 따라 김포로 온 이순일은 아이가 일곱인 고모네집 살림살이를 맡아서 한다. 이웃에 동갑인 순자라는 아이가 있었다. <무명>은 이 순자라는 아이를 회상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학교에도 못가고 외출도 마음대로 못하던 이순일은 순자와 마음을 나누게 되고 순자의 노트를 받아 글을 익힌다. 오랜 식모살이에 지친 이순일은 고모집을 나와 순자의 소개로 남대문에 있는 개인병원에서 간호조무 일을 배우며 반년정도 일한다. 그러다 그곳을 찾아온 고모부의 손에 이끌려 다시 김포로 돌아온다. 돌아온 지 보름쯤 지난 후 순자를 만났지만 순자는 아무런 말이 없고 이순일은 그런 순자의 뺨을 때린다. 시장터에 불이 나고 집들이 다 타버렸다. 순자어머니는 순자를 데리고 말없이 사라졌고, 고모네는 부산으로 간다고 하자 이순일은 같이 가기가 싫어 시장상인의 소개로 만난 한중언과 급히 결혼을 한다.
세월이 지났지만 이순일은 생각할수록 선명한 광경들로 기억되는 ‘순자’를 떠올리며 용서를 구할 수 없는 일들이 세상에 있음을 생각한다. 동생을 떠나보냈을 때 외조부는 순자를 탓하는 대신 월북한 사람들에게 핑계를 대었다. 고모네 집에 다시 끌려와 만난 순자는 자신에게 뺨을 맞으면서도 아무런 변명을 하지 않았다.
<하고 싶은 말>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취직해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고, 결혼을 해 두 아이를 낳은 지금도 늙은 부부의 생활비를 대며 이순일의 짜증과 사물을 감당하는 큰 딸 한영진이 살아온 이야기이다. 그리고 <다가오는 것들>은 시나리오를 쓰는 한세진이 뉴욕에서 열리는 북페스티벌에 참가했다가 노먼의 딸인 이종육촌 제이미를 만나는 이야기이다. 노먼은 미군과 결혼하여 미국으로 건너간 이순일의 이모 윤부경의 아들이다. 한세진은 제이미로부터 ‘안나’라는 이름으로 불렸던 이모 할머니 윤부경의 삶과 어려서부터 엄마가 한인들로부터 ‘양갈보’, ‘양색시’라는 말을 들으며 컸던 노먼이 한국어를 의식적으로 멀리하며 살아왔다는 말을 들으며, ‘미아 한센뢰베’의 영화 <<다가오는 것들>>의 한 장면을 떠올린다.
영화 <<다가오는 것들>>을 본 적은 없다. 그러나 검색을 통해 줄거리를 읽어가다가 “왜 그걸 말해? 모르는 척 하고 살 순 없었어?”하는 대사에서 한영진을, 그리고 한세진을 읽었다. 이순일의 삶은 과거에서 현재로 연년세세 이어졌다. 한국전쟁이 있었고, 전쟁 후 가난했던 삶과 먹고 살기위해 자신의 몸뚱아리를 담보로 해야 했던 시절이 있었다.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던 소녀가장이 있었고, 과거의 비극을 아직도 기억에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우리 사회가 겪었던 비극과 참사, 고통과 슬픔이 이순일과 그의 아들, 딸들의 삶과 언어를 통해 드러난다. 그럼에도 내 아이들은 잘 살기를 바라고, 무사히 어른이 되기를 바라고, 행복하기를 바라는 이순일의 바램이 가슴을 먹먹하게 만들기도 한다.
연년세세, 흘러간 시간은 오늘 우리의 기억 속에서 그 생명을 얻는다. 과거의 바램이 오늘의 우리일 것이다. 또한 오늘의 바램이 미래가 될 것이고, 오늘은 미래에 우리의 기억 속에서 빛을 발할 때 그 의미가 있을 것이다. 소설을 읽으면서 흐르는 시간의 영속성과 우리의 삶이란 그 시간들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것임을 다시금 확인하게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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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구입해 만나면서 아! 이 글은 읽었구나 하는 제목이 있었다. 각기 다른 제목으로 표현된 글을 모아서 묶은 책이기에 그럴 수 있을 것이라 생각된다. 다른 공통의 작품집에 여기에 들어있는 작품이 들어있는 것이 있다. 그때는 읽으면서 그렇구나! 한 할머니의 인생 여정을 그리고 있구나! 할아버지에 대한 도리와 그리움을 담고 있구나! 그렇게 생각했다. 이 책이 연작으로 지어진 글이기에 단편적으로 읽어도 의미가 통한다. 그런데 전체를 읽고 있다 보니 또한 달리 읽히기도 한다. 글들이 서로 연결되어 내용을 보완해 주는 모습을 지니고 있다. 연작이 지니고 있는 속성이리라. 한 가족의 이야기를 통해 이순일이라는 인물이 어떠한 삶을 살아왔으며, 그 가족들은 또 어떻게 살고 있는가가 전체적으로 그려진다. 그러면서 사회적 문제점들을 거론해 보고 있다.
글은 이순일을 중심으로 그려진다. 아마 시선은 글 속에 부분적으로라도 얼굴을 들이밀고 있는 그의 딸인 한세진이 될 게다. 그녀가 지켜본 가족들의 이야기고, 그 가운데 어머니 이순일이 이야기의 가장 중심에 서 있다. 물론 글에 따라서 이야깃거리로 등장하는 인물이 있다. 하지만 그 귀결점은 항상 이순일에게로 향하고 있다. 이순일이 어떻게 어려운 삶을 살아왔으며, 지금은 어떻게 살고 있고, 그가 살아온 사회가 어떠했는가를 얘기하고 있다. 그것을 통해 인생들이 어떠한 고통으로 어려운 세상을 통과해 왔는가? 그러면 지금의 삶은 나아졌는가? 이런 물음을 던져 보고 있다. 참으로 한 여인의 지난한 삶의 여정이 잘 엮여져 있다.
<파묘> 휴전선 근처에서 외조부에 의해 키워진 이순일은 15살 때 먼 친척이 산다는 김포로 보내졌다. 그리고 집안일을 돕다가 시장 상인의 중매로 한중언과 결혼했다. 할아버지는 1978년 지경리에서 죽었다. 마을 사람들이 시신을 산에다 묻었고, 이순일이 성묘를 했다. 한세진은 이순일의 딸이다. 한세진이 면허증을 따고는 버스를 타고 다니던 이순일의 성묘에 동행했다. 그래서 비교적 휴전선 안에 있는 할아버지의 묘가 익숙했다. 그런데 이순일도 이젠 할머니가 되었고, 쉽게 성묘를 할 수 있는 몸도 못되었다. 그래서 묘를 없애기로 하고 마지막 성묘를 위해 길을 나선다. 그곳에 있는 사람들과 연결하여 파묘를 해줄 사람들을 구하고, 모든 절차를 마친 후 한세진과 이순일은 2-3 시간 걸리는 길을 달려간다. 도착하니 일하는 사람들은 벌써 산에 올라가 있다. 올라가는 길이 험해 이순일은 쉽게 올라가지 못한다. 한세진이 부축해 꾸역꾸역 올라가니 벌써 파묘를 하고 있다. 먼저 제사를 지내고 하려고 했는데, 이순일의 모습에는 아쉬운 기운이 인다. 한만수는 이순일의 막내며 외동아들이다. 그는 호주에 가 있다. 호주에서 일자리를 위해 배움의 시간을 가지고 있다. 그러다 2016년 한국에 다니러 나오게 되고 서울에는 촛불집회가 열리고 있는 상황이었다. 호주에서도 한국의 촛불집회에 관심이 많다고 하면서 세진에게 같이 그 현장에 가줄 것을 종용한다. 세진은 마지못해 같이 간다. 만수는 촛불과 자신의 모습이 들어간 사진을 찍어달라고 하며 그것을 호주로 전송한다. 그리고 그곳을 빠져나가 레스토랑으로 간다. 그곳에서 식사를 하면서 호주에서는 힘들게 살고 있음을 얘기한다. 누나 덕택에 이렇게 좋은 식사를 한다고 하면서. 그의 한국사회에 대한 태도와 촛불집회를 바라보는 시각이 세진에게는 쓰리게 다가온다. 파묘를 끝내고 내려오는 길에 또 일하는 사람들을 놓친다. 힘들게 내려오니 벌써 유골을 거의 태웠다. 그리고 분쇄를 시작한다. 그 자리에 전을 펴고 가져간 음식을 차려 제사를 지낸다. 마지막 인사를 한다. 인부들에게 수고비를 전한다. 이제는 누가 묘를 찾는 일이 없으리라는 처연한 마음을 지니면서 돌아선다. 효에 대해 생각해 보게 하는 글이다. 남녀의 역할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게 한다. 조상들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게 하고 촛불집회에 대한 생각도 해보게 한다. 조금은 무책임하고 쓸쓸함을 느끼게 하는 분위기의 글이다.
<하고 싶은 말> 이순일의 딸 한영진은 물건을 대단히 잘 팔았다. 다른 이들이 똑같이 해도 팔지 못하는 것을 영진이 만지면 팔렸다. 특별한 상술이 있는 것도 아니다. 아마 진심이 들어가니 그런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영진은 이불을 팔고 있다. 영진이 학교에 다닐 때 가세가 크게 기울었다. 그래서 영진은 진학을 생각도 할 수 없는 입장이 되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직장에 들어갔다. 그때부터 경제적으로 집의 가장 노릇을 해야 했다. 그것은 결혼을 하고도 지속되었다. 신랑 친가 측의 건물에 아버지, 엄마가 들어와 살게 하기 위해 애를 썼고, 지금은 아래 위층으로 해서 같이 살고 있다. 대신 엄마 이순일이 두 집의 살림을 살았다. 남편은 처가 식구들을 좋게 여기지 않는다. 영진은 동생 세진이 학교를 다닐 때, 막내 만수가 국내에서 공부하고 호주로 더 공부하러 나갈 때 모두 물질적으로 도왔다. 그런 것이 자격지심이 된다. 엄마가 안쓰럽다. 하지만 자신도 힘이 든다. 세진이 가게에 와서 의사표현도 안 하고 물끄러미 바라본다. 적극적으로 언니에게 다가오지 못한다. 그것도 힘겹다. 영진은 자신이 아이를 가졌을 때, 아기에 대해 그렇게 밀착된 마음이 되지 못하는 것을 느꼈다. 자신은 부모로서 자격이 없는가 하는 생각도 했다. 아이 둘을 지금 할머니가 키우다시피 하고 있다. 엄마에 대한 짠한 마음이 된다. <하고 싶은 것을 다하고 살 수는 없다.> 영진은 엄마에게 자신은 왜 늘 법상머리에 붙들어 두려고 했는가를 묻고 싶다. 만수는 들어오지 말고 터를 잡은 호주에서 살라고 하면서 말이다. 이것은 차별이 아닌가 생각한다. 영진은 바라보는 엄마의 마음은 곡진하다. 아마 자신의 대리인으로 생각하는 듯하다. 영진은 집에 돌아올 때 전봇대 앞에서 기다리던 엄마와 자신이 짊어져야 했던 삶의 무게 사이에서 마음이 복잡하다. 자식에 대한 무관심도 그런 연장선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자녀에 대한 무감각한 자신에 대한 안타까운 느낌이 전해진다. 하지만 그것이 쉽게 형성된 것은 아니다. 엄마가 아이들을 맡아주니 그렇게 된 듯하다. 엄마에게 더욱 잘 해야 하는데 마음뿐이다. 내가 하고 싶은 것에 제약이 가해질 지라도.
<무명> 이순일의 지나온 삶이 고스란히 그려져 있다. 6.15 때 부모가 죽고 난 후, 백부에게 얹혀살다가 백부 가족이 북으로 갈 때 따라 나선다. 하지만 도중에 놓치고 혼자 집으로 돌아온다. 그때가 5-6살 때다. 혼자였으면 어떡하던 따라갔을 것인데, 등에 3살 먹은 동생이 업혀 있었다. 어쩔 수 없이 아랫마을에 있는 외조부와 같이 살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된다. 도중에 동생은 죽고 외조부의 구박을 받으면서 산다. 그 고생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그러다 15세 쯤 되었을 때, 김포 사는 아버지와 배가 다른 고모라는 사람이 데리러 왔다. 공부도 시켜주겠다고 하는데 따라가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고모네 집에 도착하니 고모네 아이가 7명이었다. 고모와 고모부는 늘 밖에 나가 있고 그 7명을 순일이 돌봐야 했다. 공부할 여가도 없을 뿐 아니라 쉴 틈도 없었다. 그때 순일은 순자라고 불렸다. 옆집에 또래의 동명이인인 순자가 있었다. 둘은 서로 시간이 날 때 만나고 소식을 주고받았다. 옆집 순자를 통해서 고모의 집을 벗어날 수 있는 길을 안내 받고 어느 날 도망을 간다. 너무 힘들기 때문에 버틸 재간이 없는 상황이었다. 어떤 병원으로 가게 되고 그곳에서 주사를 놓은 방법을 익히면서 생활을 한다. 그것도 반 년 정도다. 고모부가 데리러 와서 잡혀 고모의 집으로 돌아온다. 옆집 순자의 고자질이 마음에 아픔이 된다. 하지만 말할 수가 없다. 모진 시집살이 아닌 시집살이가 지속된다. 그러면서 나이를 먹게 되고, 고모 네가 부산으로 떠나야 할 상황이 된다. 이순일(순자)는 같이 갈 이유를 느끼지 못하고 당시 시장에서 건실하다고 생각되는 한중언에게 시집간다. 그리고 호적을 정리하다가 가족의 호적이 그대로 날 것으로 남아 있는 것을 본다. 심지어 죽은 동생이 은일이라는 것도 알게 되고, 살아있는 것처럼 되어 있는 호적을 본다. 그 모든 것을 정리하고 한씨 집안으로 자신의 적을 옮긴다. 외조부는 1970년대 후반에 죽었다. 순일이 연락을 받은 것은 산에 무덤을 만들고 난 후다. 혼자 남은 유가족인데 연락도 되지 않고 안장을 한 것이다. 그 후 80년대 중반부터 산소를 찾기 시작했다. 86 아시안 게임이 서울에서 열리고 있을 때 순일은 전화를 한 통화 받는다. 이순일의 이모라고 하는 사람, 윤부경에게서다. 미군과 결혼해 미국에서 산다고 한다. 이모가 적응하면서 살기가 무척이나 힘들었던 모양이다. 자식에 노먼 카일리가 있다. 이모완 서울에서 덕수궁 길을 걸으면서 만난다. 최루탄 냄새가 배어 있는 길에서 어색한 만남이 이루어진다. 가족이라는 울타리가 모두 삭은 듯하다. 이순일은 현재 신발 가게에 있다. 자신이 산에 가면서 신고 가서 버리고 온 등산화가 한세진의 것이다. 세진이 필요할 때 그것이 없어 곤욕을 치른 일이 있다. 그러므로 등산화를 말도 없이 가져간 것은 용서의 대상이 아니다. 말 못할 아픔이다. 병원에 잘 있는 자신의 소식을 알려줘 고모네로 다시 잡혀오게 한 옆집 순자의 그것도 용서를 구할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그것은 그냥 덮고 가야할 일이다. 동생의 죽음처럼. 그런 것들은 말을 할 수가 있는 것이 아니다.
<다가오는 것들> ‘다가오는 것들’은 영화 제목이다. 친구 하미영이 좋아하는 영화다. 영화는 한국에 제시된 포스터를 보면 로맨스를 그리고 있는 듯한데, 실상은 주인공들이 같이 걸어가면서 각자의 생각에 잠겨 있는 모습이 원본 포스트다. 이 영화는 로맨스와 화해에 대한 기대를 적절하게 실망시키는 내용인데 하미영은 그 자체로 좋다고 생각한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하마영이 병원 신세를 진다. 그 친구를 두고 한세진은 미국 뉴욕으로 일행들과 일 관계 때문에 출장을 간다. 한국 문제에 관한 미국 작가들과의 대담 때문이다. 그러면서 엄마의 이모인 윤부경의 아들, 노먼 카일리와 통화를 한다. 한세진이 있는 뉴욕이 노먼에겐 자동차로 4시간 걸리는 곳인데 찾아오겠다고 한다. 이모할머니와 엄마가 서울에서 만났을 때 군인이었던 노먼과 어렸던 한세진이 같이 만났던 기억이 있다. 그때 윤부경과 이순일은 부둥켜안고 울었다. 윤부경과 이순일이 그렇게 닮았던 모양이다. 노먼은 미국에 가서도 한국에 엄마와 똑 같은 사람이 있다고 가족들에게 자주 얘기를 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그의 딸 제이미도 이순일에 대해서 많이 들었다. 노먼은 미국에 들어가서도 한세진과 연결이 되고 연락을 주고받는다. 그것이 이유가 되어 미국에 간다고 하니 만나러 오겠다는 얘기를 하는 것이다. 막상 미국에서는 노먼은 만나지 못한다. 한편 노먼의 딸 제이미가 한세진을 찾아온다. 그녀는 언니라고 하면서 뉴욕에 살고 있다고 한다. 제이미는 노먼이 한국말을 무척 싫어한다고 한다. 이민자들이 윤부경이 결혼으로 이민에 무임승차한 듯한 것이 그들의 마음에 들지 않았던지 윤부경을 비하하는 용어(양색시, 양공주)를 사용한다. 그것이 성장하면서 노먼에게는 큰 상처가 된 모양이다. 한국말은 알아도 사용도 하지 않는다고 한다. 우리가 많이 생각해봐야 할 대목이 아닐까 생각된다. 이것을 <시간은 다가오니까>로 덮어 나간다. 울림이 강하게 다가오는 글이다.
육이오가 가져온 고통스러운 삶을 그려내고 있다. 어려운 시절 여인의 몸으로 살아가는 고통도 그려져 있다. 전쟁이라는 것은 가족도 보살피지 못할 참혹함을 만들어 내고, 이성이 마비된 행위들이 자행되는 결과를 초래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육이오를 겪어온 당시를 살았던 사람들의 고통이 잘 전달된다. 촛불집회를 대하는 사람들의 의식을 문제로 그려내고 있다. 절실함이 있었던 사람들도 있었겠지만 유희로 참여한 모습들도 보여 진다. 촛불 집회에 대한 외국의 시각도 삶의 문제라기보다는 흥미로 바라보는 관점이 드러나고 해외에 나간 우리 민족들이 서로를 보듬어 주고 위해주기 보단 질시와 비난으로 나쁜 모습을 은연중에 심어 감을 얘기한다. 가족 구성원들의 조화롭지 못한 모습을 통해 아픈 일상들을 그려내고, 가족 간의 불신으로 현실적인 삶의 질곡을 보여준다. 오늘의 평범한 가정의 일상이 대유되어 그려진다. 참 삶이 아프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글이 너무 부드럽게 전개 된다. 한 가족이 중심이 되는 이야기다. 이순일을 중심으로 그의 두 딸 한영진, 한세진 둘과 아들 한만수 그리고 남편 한중언 이렇게 다섯 명이 가족이다. 거기에 이순일을 방목한 외조부, 식모로 부린 고모, 고모부와 영진의 남편과 두 아이들, 세진의 친구 하미영이 보조하는 인물들이다. 또한 이순일의 이모라는 사람이 등장하고 그의 미국인 남편, 아들 노먼, 손녀 제이미가 들어와 이야기의 폭을 넓히고 있다. 한 세대를 건너오면서 우리 민족이 얼마나 힘겨운 삶을 살아왔는가? 하는 점을 생각해 보게 한다. 그러면서 그렇게 어렵게 살았으면, 대개 이야기라면 되는 해피엔딩으로 되는데, 이 이야기는 그렇지도 않다. 지난한 일상이 그래도 지속될 뿐이다. 가난하고 어려운 인생을 담담한 필치로 그려내고 있는 글이다. 그러기에 가슴에 더 가까이 다가든다. 가족사 소설, 연작소설이다. 이야기가 아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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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자'라는 이름을 보았을 때 중학교 때 친했던 아이 이름이 먼저 떠올랐다. 하지만 리뷰를 쓰려고 앉았더니 시어머니 이름이 '순자 씨'였지 하는 자각을 한다. 작가가 1946년생 순자 씨로부터 이 소설을 쓰게 되었다고 했는데 시어머니 또한 같은 세대인 1942년생 이다. 전쟁을 겪은 세대는 우리와는 다른 기억과 경험들을 알고 있는 많은 순자 씨들을 향한 소설이 이 작품이지 않을까. 순자라고 불렸던 이순일도 그의 친구도 순자였으니 순자 씨들이 왜 이렇게 많았는지 모를 일이다. ![]() 황정은의 연작 소설로 이순일 씨와 한세진, 한영진으로 이어지는 세 모녀의 이야기들이 소설 네 편에 실려 있다. 과거와 현재를 아우르는 내용들이 가족이란 것이 무엇인지, 어떤 의미인지를 묻는다. 사람들은 자기가 살아온대로 생각하기 마련이다. 이순일 씨는 할아버지의 산소를 돌보았고 칠십대의 나이가 되어 다리가 불편해 움직이기가 힘들어지자 파묘를 결심한다. 「파묘」는 한세진의 시점으로 엄마 이순일 씨를 바라본다. 이순일 씨의 남편 한중언이나 맏딸인 한영진, 막내인 한만수는 철원의 오지로 성묘를 가려고 하지 않아 한세진이 직접 운전해 엄마를 모시고 철원으로 향했다. 나도 한영진처럼 관심이 없는 입장일수도 있겠다. 내 엄마도 아니고 외증조부의 묘를 누가 그렇게 매년 다녀가며 정성을 다하여 돌볼까. 그렇지만 그 할아버지가 엄마의 친정이었음을 깨닫는 이는 성묘를 함께 다녔던 한세진 뿐이리라. 가족이라고 하여도 그 뜻을 다 알기란 힘들다. 자기 사는 것에 바빠 나 아니면 관심이 덜하다. 다만 함께 삶을 영위하고 있는 가족이라면 그 마음을 엿볼 수도 있는 일임을 안다. 「하고 싶은 말」은 백화점에서 유능한 판매원인 한영진의 이야기다. 한영진은 누구보다도 물건판매를 잘한다. 아이 이불을 사러 온 여자에게 엄마가 더 좋은 이불을 써야 한다며 팔 수 있는 그지만 정작 자신은 비싼 이불을 덮지 않는다는 게 아이러니랄까. 남편 즉 시댁의 건물에 엄마 아빠를 모셨고, 엄마가 그들의 살림을 도와주지만 하고 싶은 말이 있다. 어려서부터 일을 해 가족들을 보살폈던 한영진은 자신만의 삶을 사는 한만수나 한세진이 부러웠을 터다. 가깝다 여기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한없이 먼 관계가 가족이기도 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야말로 순자 씨의 이야기인 「무명」은 우리를 전쟁 속으로 불러 들인다. 한국전쟁으로 부모를 잃고 할아버지 집에서 있었던 순자 씨의 독백이다. 좋은 것을 먹이고 학교도 보내주겠다는 고모의 말에 거절의 말을 찾지 못했다. 고모의 집에 갔더니 아이들이 일곱이었다. 장사를 하는 고모 내외를 대신해 그집 살림을 떠안았다. 어머니인 이순일 씨에게 살림이란 어떤 의미일지 생각해 볼 수 있는 대목이다. 딸 한영진의 시댁 건물 4층에서 남편의 음식을 챙기는 자기 살림을 하고, 5층의 한영진과 그 남편과 아이들의 살림을 꾸리고 있다. 앞치마를 벗을 새 없이 하루종일 두 집 살림을 하는 이순일 씨의 고단함을, 그 누구에게도 물려주고 싶지 않을 것 같다. 그렇지만 결혼을 하지 않고 혼자 사는 한세진에게 자신의 살림을 물려 받으라는 이순일 씨의 말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다가오는 것들」에서 작가인 한세진은 북페스티벌 참가때문에 뉴욕으로 향했다. 이모할머니인 윤부경의 자식인 노먼 카일리를 그녀가 고등학생일 때 만난 적이 있어 이번 뉴욕행에서 만나기로 하였다. 노먼은 나오지 않고 그의 딸 제이미를 만나 한세진은 혼혈인으로 살았던 때 노먼이 들었던 말들 때문에 모어를 버렸다. 오히려 모국의 사람들이 나쁜 말들을 더 한다는 것. 그로인해 자신의 모어를 버린 노먼을 백퍼센트 이해할 수 있을까. 한국어를 말할 줄 알면서도 일부러 쓰지 않는 그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일까. 한세진과 함께 살고 있는 하미영은 영화 「다가오는 것들」을 보며 기대하는 것들을 배제하는 부분이 좋다고 말한다. 기대를 저버리는 감동을 안겨주는 동명의 영화가 궁금해지는 참이다. ![]() 황정은의 소설이 왜 사랑받는가. 실감할 수 있는 소설이라고 말해도 될까. 차분한 단어, 깔끔한 문장에 깃든 깊은 감정들. 그 속에서 우리를 들여다 볼 수 있게 만들기 때문이 아닐까, 조심스럽게 생각해본다. 사람을 설레이는 연애소설이 아닌데도 왜 연애소설처럼 그의 작품이 기다려지고 반가운 것인지. 그것이 이유라고 해도 될까. #연년세세 #황정은 #창비 #책 #책추천 #책리뷰 #소설 #소설추천 #한국소설 #한국소설추천 #파묘 #하고싶은말 #무명 #다가오는것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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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여자의 이야기가 우리와 무관할 수 없는 평범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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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뷔 후 많은 문학상을 거머쥐었던 작가를 처음 접하는 책이다. 문단에선 이미 그의 글이 인정을 받았다는 뜻일 것이다. 사람 사는 냄새가 물씬 나는 작가라고도 하고, 삶의 이야기가-어 떤 글이 그렇지 않으리요만-있고, 잘 산다는 것에, 인간답게 산다는 것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고... 19년 기 발표된 두 편과 처음 발표하는 작품 두 편으로 이루어졌지만 동일한 한 가족의 이야기가 이어져가는 작품집이다. 한국전쟁을 겪은 어머니 이순일과 그의 두 딸 한영진, 한세진의 이야기가 연이어 나온다. 어머니를 키원준 조부의 묘가 있는 그곳에 간다. 묘가 있는 그 곳은 어머니의 고향이라 할 수 있고.,..일흔이 넘은 어머니는 마지막 절을 하고... 장녀 한영진은 딸은 어머니를 닮는다 했던가... 혈육이란 단어가 주는 무게감과 다위성과 끊어지지 않는 연결고리로.... 하루하루 삶의 무게가 그녀들의 삶을 힘들게 하더라도 그건 우리 모두의 일인것이기에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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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말 오래 오래 오래 기다렸다 황정은 작가의 연년세세 왜 이렇게 짧아요 작가님 길게 좀 써줘요 아까워서 읽을 수가 없....흑흑흑흑
* 잘 쓰는 건 백년 전에 알았지만 이제는 뭐 그냥 레벨이 다르다 차원을 넘어섰고 못 따라가 나는 틀렸어....
* 산에 홀로 사는 할아버지와 남겨진 아이 계속해보겠습니다에도 비슷한 관계가 그려졌던 거 같은데 궁금하고요
* 챕터 하나하나 끝날 때마다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 사랑해요 황정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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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인생을 보며 나는 엄마처럼 살지 않겠노라 말했었다. 눈물 많은 삶, 무작정 참아야 하는 삶, 때론 시댁 식구의 무시(?)를 감당해야 하는 삶, 엄마이기에 욕심을 부리지 않아야 하는 삶, 희생하며 사는 삶이 나와 맞지 않다고 생각했었다. 이제 반백이 된 나의 삶. 나는 엄마처럼 살고 있을까? 나는 엄마처럼 살지 않지만, 엄마처럼 살 수 없음을 안다.
모두 4개의 소설은 엄마와 두 딸의 이야기다. ‘파묘’는 이순일의 외조부 묘를 없애기로 한 뒤 마지막 제사를 지내기 위해 철원으로 가며 시작된다. 다리가 아파 더 이상은 산에 오를 수 없는 이순일이 파묘를 하는 날 등산화 밑창이 떨어져 나가고 그곳에 밑창을 남겨둔다. ‘하고 싶은 말’은 이순일의 장년 한영진의 이야기다. 한영진은 고등학교를 졸업하자 취직해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 왔다. 그녀는 판매에 소질이 있는지 매출이 높았다. 한영진이 결혼하고 두 아이를 낳은 후 이순일은 한영진의 살림을 돌보았고, 부모님의 생활비를 댔으며 엄마의 짜증도 감당하게 된다. ‘다가오는 것들’은 이순일의 어릴 적 이야기다. 순자로 불린 이순일과 김포에서 만난 동무, 이웃 동갑인 동명의 순자이야기.
그 시절의 엄마들은 왜 다 그렇게 힘들고 아픈지. 가족들을 위해 어린 나이에 식모살이를 했어야했던 누군가의 엄마 이야기. 나라도 그 시절에 태어났다면 그렇게 살았을까? 나의 딸에게는 이런 삶을 남겨주고 싶지 않겠지만, 그 딸 또한 그렇게 힘든, 평범하게 힘겨움을 이겨내고 있다. 인생의 또 다른 반환점에 있다. 그래서 더욱 어떻게 살아야 할지 고민할 수밖에 없다. 나는 잘살고 있는 것일까? 어떻게 하면 잘살게 되는 것일까? 나와 내 주변을, 그리고 우리 가족을 다시 생각하게 하는 책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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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애는 거기 살라고 하면서 내게는 왜 그렇게 하지 않았어. 돌아오지 말라고. 너 살기 좋은 데 있으라고. 나는 늘 그것을 묻고 싶었는데. 하고 싶은 걸 다 하고 살 수는 없다. 한영진은 오래전에 그 말을 들었고 중요한 선택을 할 때마다 그 말을 지침으로 여겼다. (81-2)
가족이란 무엇일까. 모녀관계란 무엇일까. 황정은의 <연년세세>는 이순일과 한영진, 한세진 세 모녀의 이야기를 주로 다룬다. 큰딸 영진은 고등학교 때 가세가 기우는 바람에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백화점에 취업해 현재는 남편과 딸 하나를 둔 워킹맘이다. 작은딸 세진은 대학교 1학년 때 집을 나와 현재는 연극을 하면서 살고 있다.
두 딸 밑으로 아들 하나가 있는데, 이 아들은 한국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 준비를 하다가 현재는 뉴질랜드로 옮겨가 영주권을 딸 생각을 하고 있다. 영진은 동생이 낯선 외국에서 열심히 살고 있는 건 기특하지만, 동생에게 한국으로 돌아오지 말고 영영 외국에서 살라고 말하는 엄마한테 서운함을 느낀다. 같은 자식인데 왜 나에게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는가. 대학도 안 보내고 가장 노릇 시킨 것으로 모자라 결혼 후에도 자신의 집에 살면서 자신을 놓아주지 않는 엄마가 원망스럽다.
이런 식으로 애증이 교차하는 엄마와 딸들의 이야기인데, 딸로서 K-장녀로서 읽는 내내 공감 가는 대목이 많았다. 세진이 가족 중 유일하게 순일의 성묘를 돕는 것처럼, 엄마가 벌이는 일을 누구보다 탐탁지 않게 여기면서 막상 엄마 혼자 그 일을 하고 있는 걸 보면 속에서 열불이 나서 그 일을 돕게 되는 나. 남편은 늙어가고 아들은 없으니 큰딸에게 의지하고 싶어 하는 엄마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그 마음에 보답하고 싶기도 하지만, 그러다 영진처럼 엄마와 가족들 뒤치다꺼리하다가 내 삶을 다 홀랑 까먹을까 봐 두려운 나. 이런 나의 모습을 여러 번 마주할 수 있었던 소설이다.
딸이라서, 같은 여자라서, 엄마가 어떤 삶을 살았고 어떤 사람인지 너무나 잘 알아서, 누구보다 엄마를 더 사랑하면서도 미워하고, 미워할 수 없으면서 사랑할 수도 없는 복잡한 감정까지 너무나 잘 그리고 있는 소설이다. 언제쯤 엄마에 관한 소설을 마음 편히 읽을 수 있을까. 아마 그런 날은 평생 오지 않을 거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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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래 기다렸다. 반가운 글을 올해도 읽었다. 다음에도 그 다음에도 우리는 글로 만날 수 있겠지. 이 다음을 즐겁게 기다릴게요. * 파묘 그 다음이 늘 궁금했다. 지난해 나는 죽은 사람의 몸을 만져 보았고 그게 얼마나 차가운지를 알게 되었다. 그 딱딱함에 대해 느껴보게 되었다. 돌아오지 않는 온기를 떠올리며 이 책을 읽었다. 살았고 살았지만 살아갈 수 있는 어떤 자신을 잃어가며 읽었다. 그래도 건강하고 싶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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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들이 선정한 올해의 책 중 1위를 했다는 이야기를 보고 찾아 읽게 되었습니다. 단편이지만, 모든 이야기가 한 가족의 이야기를 보여주고 있어서 장편같은 느낌이 들었어요. 어머니와 딸들의 관계를 다시금 생각해보게 해주는 이야기였습니다. 말할 수 있음에도 말하지 않는 이야기가 있다는 대목이 참 공감되면서도, 저는 생각해보지 못한 표현이라서 더 울림이 있었던 것 같아요. 필사해놓기까지 했습니다ㅎㅎ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황정은 작가님 디디의 우산보다 더 감동적이었던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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