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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는 양날의 검이다. 국가는 법과 제도를 만들어서 사회를 통제하고 이를 지키지 않는 사람의 자유를 막강한 권력체이다. 이 서슬 퍼런 '국가'라는 검을 누가 이용하느냐에 따라 민중들의 삶은 큰 굴곡과 변화를 겪어왔다 -국가의 거짓말 中에서-
요즘 들어 국가에 대한 책을 유난히 많이 접하게 된다. 박노자 교수의 책은 처음 읽어보는데다가 생소한 이야기들로 인해 당혹감이 드는 책이다. 일반적으로 국가를 생각할 때 국가는 개인의 이익보다는 국가의 이익을 우선시해야 된다는 생각을 무의식적으로 해왔던 것 같다. 다수의 이익을 위해 최고의 선善을 이루는 것이 국가가 가지고 있는 명제지만, 플라톤이 " 이상국가란 철학자들이 국가를 통치하지 않는 한, 혹은 통치자들이 철학을 공부해 국가를 다스리지 않는 한 실현되기 어려운 것일세." 라고 했듯이 국가는 선을 이룰 수 없다는 것은 역사적으로도 증명이 된다. 아니, 역사만이 아니라 현재 우리나라만 보아도 알 수 있다.
국가는 계급사회 권력관계의 중심이고, 생살여탈권은 그 권력관계의 핵심이다. 촛불을 든 국민들에게 물대포를 쏘아대고, 평화롭게 시위하는 국민들을 강경 진압하는 것이 바로 국가의 본질이 아닌가? 촛불은 '재협상.' '고시 철회.' '민영화 철회 및 공공성 강화' 등의 의제를 통해 국가에게 제 역할을 하라고 요구했지만, 제 역할을 하지 않는 것이 국가의 본질이다. 따라서 촛불이 진짜 승리하기 위해선 국가 자체를 넘어서야 한다. 여기서 저자는 국가가 '합리적 조절자'라는 것은 환상일 뿐이고, 지배계급의 '사무총국' 성격을 띤다고 한다. 매우 적절한 비유가 아닐 수 없다. 역사적으로 소수의 기득권층이 자신의 이득만을 위해 '국가'라는 정치권력을 사용할 때마다 항상 '거짓말'이 존재해 왔다. 막스 베버의 유명한 정의대로 근대국가란 폭력의 합법적 독점자이고 , 국내에서 그 합법적 독점자는 바로 경찰조직이다. 과거 용산참사만 보더라도 한국의 지배계급이 사회적 갈등을 어떤 방식으로 '해결' 하려는지 우리에게 직설적으로 보여준 예이다. 최근 제주의 해군기지 또한 국가의 폭력성에서 예외가 될 수 없다. 해군이 민간인을 폭행하고 강압적인 태도를 보여도 국가가 해결해 줄 것이라는 것을 믿고 있는지, 아니면 경제불황으로 인해 모두가 먹고 살기 힘들어서인지 과거처럼 촛불시위도 일어나지 않고 있다. 과거 실미도의 비극이나 베트남에서 한국군이 저지른 만행을 다 알면서도 박정희에 대한 향수를 느끼는 수많은 한국인이 있다는 것을 보아도 우리는 자본주의에 깊숙이 물들어 이제는 폭력을 폭력으로 인식하고 있지 못한 지경에 다다른지도 모르겠다.
과거 이라크와 아프간에서 동시에 두 개의 전쟁을 진행하던 미국정부는 '정의로운 전쟁' 운운하며 전쟁의 정당성을 설파했다. 저자는 이 '정의로운 전쟁'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거짓말'이다. 라고 한다. 특히 자본주의 국가의 성장은 전쟁을 필수적으로 요구한다. 나아가 자본주의 국가로 구성되는 국제 패권 체제는 늘 대규모 전쟁을 출발점으로 삼았다.
이 책에서 가장 의아했던 부분이 있다. 근대의 전쟁은 종교를 하나의 정신적 도구로 보았다는 것이다. 저자는 우리나라의 기독교가 '종교 권력'과 동의어로 자리 잡고 있으며 한국의 시민이 모두 같이 고민해봐야 할 일이라고 한다. 1950년 이승만을 비롯한 열성 개신교가 권력을 독점해 기독교가 '국교 아닌 국교'의 면모를 띈 상황에서 기독교가 대한민국의 유일사상의 역할을 하며 성장해 왔다고 한다. 결국 한국 교회의 기적적 성장 요인으로 작용한 것이 바로 반공의 기독교화와 기독교의 반공화라는 점인데 이런 기독교의 사상이 뿌리깊이 인식되어 있는 한국인들에게 북한이라는 타자에 대한 적대심과 경계심 없이 '국민 통합'이 가능할 것인지 의문으로 남는다고 한다.
이 책은 이렇게 국가의 실체와 국가폭력의 실체에 대한 이야기이다. 무엇보다 더 충격적인 것은 국가의 폭력이 미화되고 합리화되어 정작 현대를 살고 있는 우리들은 그 실체를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자본주의의 진정한 변혁만이 전쟁의 종식을 불러올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언제쯤 인식하게 될까? 다소 불편한 진실일지도 모르지만, 과거 무의식적으로 인식되던 것들의 실체를 확인하게 되는 순간이기도 한 책이다. 국가를 바로 보는 시선, 바로 당신을 위한 국가는 없다라는 사실이 확실히 각인되어진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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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자 교수의 글은 빠짐없이 읽는 편이다. 몇 년 전인가 처음으로 그의 글인 [당신들의 대한민국]을 읽은 후, 아예 푹 빠졌다고 하는 편이 맞는지도 모른다. 우리 토종 한국인들보다도 한국사에 대해 더 잘 아는 사람, 진보는 처음부터 끝까지 평화주의를 추구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 한국을 사정없이 비판하지만, 우리보다 더 잘 이해하고 사랑하는 사람, 흔히 박노자 교수를 평가하는 말이기도 하다. 그러기에 그의 글은 가슴을 후련하게 해주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불편하기 짝이 없다. 쉽게 말하여 그가 끊임없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불편한 진실들을, 왜 우리는 스스로 알려 하지 않는가 하는 자괴감에 빠지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 책은 우리에게 국가란 것이 무엇인지를 알려주는 책이다. 국가는 왜 국민인 우리에게 끊임없이 폭력을 행사하는지, 그리고 그 폭력을 정당화 하기 위하여 국민을 어떻게 길들이는지를 동서양의 다양한 사례를 통하여 그 본질을 알려주고 있다. 국민인 우리가 국가에게 기대하는 것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그렇지만 신자유주의라는 이름으로 벌어지는 작금의 경제, 사회적인 문제들을 바라볼 때, 우리는 국가의 경계를 넘나드는 다국적 약탈적 자본과 이들이 자유무역이라는 이름으로 벌이는 생존권 위협으로부터 국민을 보호해 주기를 원한다. 그러나 국가는 이러한 국민들의 바램과는 달리, 단지 지배계급의 사무총국이며 대자본의 고도의 도구에 불과하다고 저자는 말한다. 그래서 그들은 지배계급과 자본의 이익에 반하는 국민들에 대하여 서슴없이 폭력을 행사하고, 또 그것을 정당화 하기에 이른다. 저자는 이러한 국가폭력의 실체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국가폭력과의 투쟁은 계급사회와의 투쟁, 평등사회를 만들기 위한 투쟁의 일부분임을 머리말에서 밝히고 있다. 먼저 국가의 본질을 설명하면서 저자는 ‘국가는 해당사회의 유일한 합법적 폭력기구다’라는 막스 베버의 말을 인용한다. 평상시에 공권력의 남용이라는 이름으로 나타나는 국가의 폭력은, 국가가 계급사회 권력관계의 중심이고, 국가가 지닌 국민의 생사여탈권은 그 권력 관계의 핵심임을 나타낸다고 저자는 말한다. 이들 국가에 의한 폭력대상은 구미 권에서는 주로 피부색이 다른 이방인이지만, 한국에서는 용산참사에서 보듯 저항을 시도하는 빈민들이다. 합리화하기 어려운 이러한 폭력과 살인에 대한 국가의 태도는 은폐일변도이며, 이는 동서고금 국가의 철칙이라고 한다. 정치성의 부족에서 오는 국가의 폭력은 대체로 시간이 지나면서 대중에겐 망각되고, 피해자의 유족에게만 기억될 뿐이다. 이러한 국가에 대해 사람들은 비판을 하면서도 막연하게나마 국가가 사회계급 갈등에 합리적 조절자 역할을 해주기를 기대한다. 하지만, 이는 국가가 기본적으로 계급성격을 띠고 있다는 사실, 즉 지배계급의 도구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지 않은, 어리석음의 극치라고 까지 저자는 비판하고 있다. 이러한 빈민에 대한 폭력이, 그 동안 한국사회에서 정권을 잡았던 보수, 개혁세력 할 것 없이 공통적으로 나타났다는 것은, 국가의 본질은 결코 변할 수 없는 것임을 알려주기도 한다. 국가의 폭력은 특히 비정상적인 상황인 전시에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자본주의 세계의 현실은, 대량학살의 준비가 자본주의 경제성장을 뒷받침해주고, 군사주의는 국가 구성원간의 각종 갈등을 순화시켜 주는 이데올로기 역할을 하고 있다. 그래서 전쟁은 자본가에게 축복이며 국가의 건강이라고 까지 말하는 것 인지도 모른다. 이윤추구를 기반으로 하는 경제, 사회적 제도가 존재하는 한, 이러한 국가의 살인은 멈출 수 없다고 저자는 말한다. 특히나 정의로운 전쟁이라는 말은 전쟁이 수천 년 동안 계속되면서 생겨난 주류 국가의 명분에 불과하다고 한다. 과거 유럽 국가들의 십자군 전쟁이나, 미국의 이라크 침공까지 전쟁의 명분은 항상 선한 우리가 악한 적을 공격하는 것 이었다. 이것이 정의로운 전쟁이고, 이들 주류국가에 있어서 이러한 전쟁은 야만인에 대한 당연한 처벌이며, 아무리 전쟁에 반대하는 국제법이라 할지라도 야만인을 위한 것은 아니라는 걸, 우리는 중동지역에서 목격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전쟁 중에서도 군인들이 자발적으로 적군을 죽이는 비율은 인간의 본성상 낮을 수밖에 없다고 한다. 이에 국가는 전쟁에 종교를 이용하고, 종교는 또한 그들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하여 국가와 결탁한다. 군목이나 군승으로 불리는 종교인들이 군대에 상설기구화 된 것은, 전쟁에 피폐해진 병사들에게 종교적 위안을 제공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종교적 군기진작에 더 많은 공을 들였다는 사실을 우리는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수많은 전쟁에서 보아왔다. 자본주의의 원활한 운영에 필요한 전쟁에, 하느님까지 동원된 것은 이제 구미 각국의 공공연한 일이고, 주류교회는 열렬한 지지를 보내고 있다. 근대나 현대의 전쟁은 종교를 하나의 정신적 도구로 이용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의 경우라고 다르지는 않다. 1950년 한국전쟁은 반공의 기독교화, 기독교의 반공화가 이루어지는 계기를 마련했고, 이후 남한에 열성개신교도들이 권력을 거의 독점하면서 기독교는 반공성전의 이데올로기가 되었다고 저자는 말한다. 불교 또한 별반 다르지 않다. 수행자들에게는 폭력의 억압을 경계하였지만, 사회적 폭력의 진원지인 국가를 현실로 인정하면서, 착한 폭력이라는 논리까지 개발하여 종교를 국가를 위한 정치적 무기로 만드는데 일조하였다. 이들 종교는 국가와 손잡은 이상 애국을 인정해야 했고, 애국을 인정한 이상 애국에 따르는 살육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국가의 주요사업이 전쟁이고, 종교는 자신들의 기득권 유지를 위하여 국가에 기생하고 있는 현실에서 국민들은 어떨까? 우리는 대부분 국가의 이러한 기능에 대하여 별다른 이견 없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다. 국가 또한 국민들이 순응하도록 끊임없이 길들이고 있다. 전쟁을 소재로 한 문학작품이나 전쟁영화의 일반적인 특징은, 인간성은 우리편의 전유물이며, 탈인간화 되는 것은 저들의 편이라 보는 것이라고 한다. 또한 전사형 남성의 미덕을 과시하여 군대와 군대 특유의 문화를 정당화 시키고 있기도 하다. 그런가 하면, 동서고금의 가부장적 사회의 철칙인 ‘영웅은 전쟁 속에서 만들어 진다’는 영웅신화를 이제는 적자생존의 자본주의를 정당화 하는데 이용하기도 한다. 하지만 실제 전쟁에서 군인들이 적군을 사살하는 데는 커다란 용기가 필요하다. 따라서 국가는 군인들을 살인기계로 만들기 위해 끊임없는 증오교육을 실시하여, 적들에 대한 증오심을 부추긴다. 한국사회 역시 전 남성이 군대를 다녀와야 하고, 지독한 병영국가임을 생각할 때, 이러한 길들이기는 이미 국민 개개인의 마음속에 뿌리깊게 자리잡고 있다. 이런 병영국가화는 국기나 국기에 대한 맹세, 그리고 군대와 관련된 것에 대해서는, 보수주의자나 일반 국민은 물론 진보주의자들마저도 어떤 저항도 할 수 없게 만들었다. 이미 우리는 국가에 철저하게 길들여져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는 이러한 길들이기에 저항하는 사람들이 있다. 여호와증인으로 대표되는 병역 거부자들은 비록 그들의 신앙에 기초해서 그런 것이지만, 병영국가가 요구하는 유순한 국민이 되길 거부하고 있다. 지금은 소수이지만, 저자는 평화운동을 지향하고, 본능적으로 전쟁을 싫어하는 대다수의 국민이, 자본주의 사회의 변혁만이 전쟁의 종식을 불러올수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순간, 국가의 이념지도는 바뀔수 있다고 말한다. 또한 성공회대 김동춘 교수는 추천의 글에서 국가가 합법적인 살인자라는 것을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몸으로는 인정하지 못하는 존재들이 바로 한국에서 진보를 표방하며 살아가는 남성들이고, 그렇기에 그들에게 이 책은 한없이 불편할 것이라고 말한다. 나 역시 진보를 표방하며 살아가는 이 땅의 남성중 한 명이다. 그렇기에 한국사회에서도 보다 근본주의적인 평화운동이 나타나기를 기대한다는 저자나, 김동춘 교수의 말이 묘한 울림을 주며 다가온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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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남이가'로 표현되듯이 '우리'속에 있는 것이 편안한 우리들은 국가, 직장이나 학교에의 소속감과 연대감속에서 편안한 사회적 존재들이다. 더구나 우리는 충효를 근본으로 하고 멸사봉공, 위국헌신등의 구호를 내면화하는 유교적 윤리관이 담긴 교육을 받아왔다. 애국적인 국민들은 국가의 보호를 기대하지만 저자가 보여주는 국가는 말안듣는 국민들에게 폭력을 가하고, 합법적 살인을 행하고, 교육으로 체제에 순응하는 국민을 만들고, 국민들을 전쟁에 내몰기도 하는 악마적 존재이다. "국가란 해당 사회의 유일한 합법적 폭력기구"라는 막스 베버의 정의는 끔찍하다.
성경의 사무엘상 8장에서 자신들에게 왕을 달라고 요구하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보여주는 왕의 이미지는 '국가'와 너무나 흡사하다.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백성들이 너에게 말하는 것을 다 들어 주어라...그러나 그들에게 경고하여라. 그들을 다스릴 왕이 어떤 일을 할지 일러 주어라."...사무엘이 말했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을 다스릴 왕을 달라고 하는데, 그 왕은 이런 일을 할 것이오. 왕은 여러분의 아들을 빼앗아 갈 것이고, 그 아들을 데려다가 자기 전차와 말을 몰게 할 것이오. 여러분의 아들은 왕의 전차 앞에서 달리게 될 것이오... 다른 아들에게는 자기 땅을 갈게 하거나 땅에서 나는 것을 거둬들이게 할 것이오. 또 다른 아들에게는 전쟁 무기나 자기 전차에 쓸 장비를 만들게 할 것이오...여러분 스스로는 왕의 종이 될 것이오."
국가폭력의 합법적 독점자인 근대 경찰조직은 고액 재산 보유자이자 납세자만 투표권이 있었던 19세기 초반 자산가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진정한 의미의 자국민'이 아닌 '비국민'이 국가폭력의 대상이 되는데 구미권에서는 주로 피부색이 다른 이방인, 대한민국에서는 주로 저항을 시도하는 빈민들이다. 이러한 폭력 내지는 합법적 살인을 당한 비국민들의 저항은 오히려 보수 언론으로부터 테러리스트로 매도된다. 체제도전에 대한 폭력적 응징외에도 국가는 교육제도와 징병제도를 이용해서 국가가 원하는 국민을 만들어 낸다. 일제시대의 식민화 교육이나 해방후의 반공교육, 군사정권 시대의 군사교육 등을 생각하면 국가가 사용하는 교육의 힘이 얼마나 큰 지 알 수 있다. 교육의 목표는 체제에 순종적인 노동자와 징병 대상자의 공급이다. (<왜 학교는 불행한가>를 읽어보면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됩니다.)
전쟁은 국가가 저지르는 폭력의 정점에 있다. 저자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생산력의 향상으로 생기는 잉여자본과 과잉생산을 해소시킬 수 있고 사회에 늘 잠복해있기 마련인 계층간의 갈등을 애국심이나 단결이라는 이름으로 감출 수 있는 전쟁 또는 준 전시 분위기는 자본주의 국가의 속성상 불가피하다고 주장한다. 국가 대항 운동경기에도 전국민적 열광이 있는데 국가의 흥망과 국민들의 생사가 달려있는 국가간 전쟁앞에서 개별적 이상을 내세울 수 있는 종교, 정파나 계층은 없다. 주류 사회의 박해를 무릅쓰고 자신들의 반전과 평화에 대한 이상을 지켰던 사람들은 소수 종파들(여호와의 증인, 퀘이커 교도 등)과 사회주의자들뿐이나 이들도 전쟁을 막거나 사회, 경제적 질서를 개편하지 못했다. 저자는 구소련시대에 교육을 받았던 사람으로서 사회주의적 지식인들이 구소련에 대해 가졌던 기대와 좌절의 역사를 보여주면서도 진보성향의 사람들이 다시 평화와 반전의 연대에 나서기를 촉구하고 있다. 이 책이 국가라는 초법적 존재의 어두운 그림자를 드러내는데는 성공했지만, 많은 사람들이 구현하고자 목표로 삼는 유럽식 복지국가의 꿈마저 냉정히 내버리면서도 양심적, 반전평화 지향의 사람들을 위한 다른 전망은 제시하지 못하는 것은 아쉬운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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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어나가는 데 불편함을 떨쳐내기란 쉽지 않다. 바로 ‘나’와 ‘우리’에게 내재화된 생각과 가치관이 잘못되었음을, 어리석음을 지적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저자가 말하는 많은 것들이 새롭거나 낯선 것 들은 아니다. 그러나 『당신을 위한 국가는 없다』는 제목의 ‘당신’에 대한 정의에서 빠져나갈 틈이 없는 대다수의 ‘우리’라 할 수 있는 서민 대중들의 계급적 위치를 적나라하게 일깨우고 있다는 점에서 자극을 받는 탓일 게다.
‘~ 을 위한 국가는 없다.’고 한다. 그런데 누군가에게는 있는 것이고 또 누군가에게는 없는 국가이다. 아니 누군가를 위해서는 있지만 누군가를 위해서는 없다는 것이다. 그 누군가는 이렇게 서로 대척점에 놓여있다. 전자는 소수의 지배계층인 권력과 부를 차지하고 있는 자이며, 후자는 거의 대다수인 서민대중이다. 그래서 지배계층을 제외한 대다수의 한국인들을 위한 “국가는 없다.”는 의미가 된다. 왜 우리 대다수의 국민을 위한 국가는 없다는 것일까? 부자와 권력자 등 상류계층을 위해서는 존재하는 국가가 말이다. 이 물음은 국가를 묘사한 다음의 문장으로 해결된다. “지배 계급의‘사무총국’ 같은 국가” 가 그것이다. 국가는 오직 지배계급의 이익을 위해 행동하는 사무관리 부서의 총체이며 이들 외의 모든 타자는 이용하고, 착취하며, 짓밟고, 억누를 뿐이라고 한다. 이 주장의 진위는 ‘국가’의 행동양태가 실제 그러했는지를 확인하면 될 것이다. 국가가 누구를 위해서는 선하게 작동하고 누구에게는 폭력과 억압과 무관심을 행하는지 말이다. 이 책은 바로 이 확인 작업이다. 근대의 역사와 현재 지구촌에서 벌어지고 있는 실제의 현상들을 통해 국가가 그 존립의 정당성을 잃어가고 있는지를 증명하는 작업인 것이다.
‘당신’은 누구인가?
서점가를 보면‘선비 정신’ 혹은 ‘선비의 나라’에 대한 전근대 사회의 향수를 말하는 책들이 즐비하다. 마치 우리 대다수가 선비의 후손인 것처럼. 선비란 조선조 사대부 양반계급을 일컫는다. 전 인구의 10%내외의 특권계층이다. 이후 조선조 말기 매관매직으로 40~50%에 이르며 체제가 스스로 붕괴되었지만 말이다. 이것은 절대다수의 국민이 선비의 자손이라기보다는 “선비에게 착취, 토색질, 무시당하는 상것들의 자손”이라는 얘기다. 그런데 무슨 선비의 나라라고? 성호 이익의 『성호사설』에는 “소유욕, 지배욕, 출세욕으로 상것의 재산을 빼앗는데 혈안이 된 선비들”의 망국적 질환을 한탄하는 구절이 있다.19세기 전근대 시절조차 이 땅에는 서민대중을 위한 국가는 없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20세기 근대화가 진행되어 오늘에 이른 한국사회에는 누가 ‘당신’일까? 썩을 대로 썩어빠졌던 이승만, 박정희니 하는 독재시대의 얘기는 생략하자. 바로 지금의 우리를 얘기하기에도 숨이 가쁘니 말이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최근에 ‘국가의 힘’이 어떻게 사용되고 있는지를 보면 ‘당신’을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의사, 약사들 중산층이 자신들의 기득권적 이익을 차지하기 위해 시민을 볼모로 집단적 자기과시를 할 때에는 경찰의 동원이나 폭력적인 저지를 보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용산 참사’, ‘쌍용자동차 투쟁’,‘한진중공업 영도 조선소 투쟁’과 같이 가지지 못한 자들의 저항에 대해서는 합법적 살해로서 대응한다. 없는 자가 대들기만 하면 폭력으로 짓눌러 생물적 공포를 자극하고 가시화해서 저항 의식을 꺾어버리는 데 최대한의 힘을 발휘한다. 금융기업들의 파렴치와 부도덕에는 눈을 감고, 대기업 등 재벌에게는 감세 등 각종 정책적 혜택을 베풀어 재산을 보충해주며, 그들이 부실해지면 국민의 혈세를 동원해 구제금융 자금을 퍼준다. 국가가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 지는 이처럼 너절하게 열거하지 않아도 될 만큼 뻔하다. 시장자본주의 국가에서는 이들 10%내외의 소득 상류계층의 부를 보호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지 나머지인 ‘당신’을 위해서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무튼 국민의 80%이상이 ‘당신’이다. 그런데 왜 많은 한국인들은 자신이 ‘당신’임을 인정하지 못할까? 왜 지배계급의 자기 유지와 확대를 위한 행동에 동조하는 것일까?
오늘, ‘당신’들의 국가라고 생각하는 것은 어떤 일을 하고 있나?
이와 같은 ‘당신’의 ‘자기모순’적 행동을 이해하는 데 좋은 예가 있다. 대부분의 상류층은 기피를 상습적으로 하고 있으며, 중산층은 어떻게든 회피하려 갖은 수를 쓰고, 나머지는 도리 없이 의무를 수행하는 것, 바로 ‘병역’이다. 그럼에도‘병역 기피’는 마치 신성모독인 것처럼 전 국민에게 부정적 인식이 팽배하다. 여기에는 외형적으로 “군대만큼은 다들 똑같이 간다.”라는 자기 위안에 매달리는 애처로움, 지배체제가 내면화시킨 순응성의 효율성이 있다. 질서에 고분고분 복종하고 서열사회를 체득하는 체제순응 과정의 의미를 은닉하고 있는 “군대에 갔다 와야 남자가 된다.”는 말 속의 이중성과 같은 의미일 것이다. 그러나 서민 대중은 이를 남성의 건강성이라는 쿨한 의미의 해석에 머문다. 위선적이고 모순이 가득한 어리석음 아닌가? 자기를 위해 존재하지 않는 것에 동조하는 그 숨겨진 모순성, 바로 그것이리라.
지배계급이 자기체제 보호와 유지를 위한 대중을 향한 내면화 방법에는 이러한 조국애, 민족애와 같은 신성불가침적 자극뿐 아니라 ‘학교’교육과 같은 핵심적 과정이 있다. 결코 ‘비판적 시민’이 양성 되지 못하게 하는 데 있는 것인데, 교육을 통해 지배 이데올로기 - 경쟁의 우상화, 서열주의, 승자독식, 나와 타자의 구별, 재화와 소비의 쾌락, 물질지상의 감각 ... - 를 내면화시켜 체제 순응자들을 만들어 낸다. 아마 자신들 스스로가 ‘당신’임을 자각하지 못하게 하는 데에는 최상의 방법일 것이다. 이렇게 체제 순응자로 내면화된 다수는 불평등의 세습화에도 불구하고 지배계급에 공헌하게 된다. 결국 자신들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존재를 위해 충성하는 것이다. 국가는 이렇게 지배계급을 위해 모든 유무형 자원과 사회시스템의 에너지를 투입한다.
책은 이처럼 국가가 대중을 내면화시킨 것들과 이데올로기들을 서술하고 있다. 문학과 예술 작품을 통해서, 영화와 TV 등 집단 기억을 부단히 재생산해내는 미디어를 통해서 계층을 분화하고, 전쟁을 미화하며, 군사주의와 영웅주의로 순응하는 인간들을 만들어 내고 있는 양상들을. 또한 서민 대중의 자식들이 총알받이가 될 것이 뻔한 전쟁이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인지, 진정, 역사 이래 전쟁이 이(利)가 아니라 의(義)를 위해 수행된 적이 있는가하고 반문한다. 여기에 더해 문명사적으로 기이하기 그지없는 한국 기독교의 이상적 부흥이 군사주의에 기생해서 지배계급에 편승하는 추악한 한국의 종교사 조명에 이르면 이맛살이 찌푸려지다 못해 읽기를 중단하고 싶어지기까지 한다.
그런데 듣기 싫고, 보기 싫다고 해서 외면 할 수 없는 ‘당신’인 바로 ‘나’와 ‘우리’를 위한 이야기이고, 한국 사회에 대한 깊은 연민을 기초로 하는 저자의 의지를 알기에 그만 둘 수가 없기도 하다. 우린 2007년 7월 4일 부산 남구에 있는 한 중학교 교사(국가 공무원)가 성적이 나쁘다고 체벌을 하여 한 중학생을 죽인 사건을 기억하지 못한다. 대다수 언론이 이슈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한 산재 사망률이 OECD가입국 중에서 단연 최고라는 사실도 알지 못한다. 2위인 멕시코의 3배나 높은 수치이고, 소득이 불평등하기로 소문난 국가인 영국의 30배에 이른다고 한다. 우리사회가 “미시적 차원에서 국가 폭력에 얼마나 익숙해져 있는지를”, 즉 국가가 사회적 약자들, 서민 대중에 대해 얼마나 무심한지, 국가에 대해 대다수의 민중이 어떤 기대를 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지를 확인케 하는 이런 사실들을 어떻게 외면만 할 수가 있겠는가?
맺는 말
이렇듯이 우리의 “속살에 배인 일상”은 보통 반성적 고찰의 대상이 되기 어렵다고 한다. 그래서 국가 폭력의 실체에 초점을 맞추고, 그 폭력이 지금 한국사회에서 어떻게 합리화되고 낭만화되고 있는지에 대해 집중 조명하고 있는 이 책이 우리의 길들여진 반(反)민중적 감각에 강력한 충격들을 가하여 반성적 고찰의 대상으로 깨워내는 불편한 작업을 하게 했으리라. 국가는 무엇인지, 당신들은 어떻게 길들여지는지, 한국 사회의 현실과 동서양 근세사, 각종 인문학적 기록들을 통해 재인식하는 귀중한 기회를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곧 입법부 의원들을 선출하는 선거가 있다. 그간의 선거가 비록 민중의 삶과 연결된 정책으로 변화하지는 않았지만, 이 번 만큼은 대다수 서민대중을 위한 진정한 민중의 조직화를 위한 첫 걸음이 되기를, ‘당신’을 위한 국가로 만드는 현실적 제도장치로서의 역할이 될 수 있기를 기대해 보게 된다. 더 이상 ‘당신’을 위한 국가가 아닌 국가의 바로 섬을 위해 제도정치에 출사표를 던진 저자‘박노자’에게 응원을 보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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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에게 국가란 어떤 존재인가? 사회학자 베네딕트 앤더슨의 표현을 빌면 국가는 '상상의 공동체'다. 이 말은 국가가 다름아닌 근대가 만들어낸 유사종교의 주박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한국인의 국가에 대한 관점은 이중적이다. 한편으로는 아버지와 같은 보호의 울타리로 생각한다. 우리가 복지국가와 사회보장시스템의 확충에 관심을 기울이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폭력과 억압의 근원으로 바라본다. 가령 평화주의자의 입장에서 국가의 가장 중요한 사업이 전쟁이라는 점을 비판하고 공권력의 남용을 두려워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한편으로는 국가의 폭력성을 비판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사회·경제의 합리적인 조절자로서의 국가에 여전히 희망을 걸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국가의 참모습은 어떠한가?
박노자는 국가의 실체를 직시하라고 충고한다. 박노자는 국가는 지배계급의 사무총국이며 외국인뿐만 아니라 내부의 비국민, 즉 가난한 사람들을 조직적이고 대량으로 살해하는 기계라는 주장을 펼친다. 가령 쌍용 자동차 투쟁의 폭력적 진압이나 용산 참사가 대표적인 케이스다. 이처럼 국가는 시장주의적 민생파괴의 견인차 노릇을 하고 있다.
"국가가 가난뱅이들을 학교와 군대에서 가혹하게 훈육하여 명령을 잘 듣는 순종적 노동자로 만들지만, 그들의 생명에는 별다른 책임을 지지 않는 게 현실이고 국가의 기본 체질이다. '미개'지역의 민간인에 대한 '문명'국가 군인의 사살이 일단 무죄로 추정되는 것과 마찬가지의 논리다. 자국 내의 빈민이나 이민자, 그리고 오지의 '유색인종'등은 국가가 독점한다는 폭력의 무게에 일차적으로 부딪히게 되어 있다. "(28쪽)
20세기 초반 자본주의의 특징은 평화지향이 아닌 치열한 패권투쟁과 전쟁의 기계화·산업화였다.막스 베버의 말대로 국가는 해당 사회의 유일한 합법적 폭력기구이고 국내에서 그 합법적 독점자는 바로 경찰조직이다. 경찰이 사회의 안녕질서 보호에 필요한 물리력만을 독점하는 것이 아니라 주류의 재산권에 도전하거나 도전할 확률이 높은 반항자, 주류 사회 바깥에 있거나 주류 사회 안에서 내부식민지로 전락해 있는 각종 열등한 타자들에 관해 경찰조직은 단순한 물리력 사용권뿐만 아니라 잔혹행위를 저지르고도 대부분 그 책임을 면할 비공식적 권리까지 향유하고 있다.
2009년말 버락 오바마가 노벨평화상을 받으면서 제기한 '정의로운 전쟁'의 기준을 언급하며 이러한 정전론의 역사적 맥락을 추적한다. 오바마가 강조한 정전론의 기준은 "전쟁의 목적이 방어인가, 전쟁이 최후의 수단으로 이용되었는가, 그리고 양민에 대한 폭력이 예방되었는가 등이다." 오바마가 언급한 세 가지 기준은 로마공화국의 키케로부터 네덜란드의 흐로티위스를 거쳐 근대로 이어지는 정전론의 논리적 결론이라고 설명힌다. 그러나 가장 오래된 전쟁옹호론은 "우리는 우리의 신에게 선택을 받은 종족이니 우리의 전쟁은 정당하다"는 단순무식한 종교적 정전론이었다. 구약의 <신명기>에도 등장하듯 우리 부족과 국가의 신이 허락한 전쟁은 모조리 정의로운 전쟁이라는 논리다. 정전론이 철학적 탐구 대상이 된 것은 기원전 4세기 경이었다. 보편적인 도덕률을 전쟁에도 적용한 것은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이나 로마 철학자 키케로, 중국 사상가 맹자의 철학적 정전론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철학적 정전론도 전쟁 자체의 야만성을 그럴듯한 '명분론'으로 맘껏 포장하고 미화할 뿐이라는 사실이다.
"과연 이런 모습의 동아시아 전통을 미화만 해서 되겠는가? 연좌제 같은 무서운 지배 도구를 구사하던 과거의 유교적 국가를 우리가 자랑스럽게만 봐야 하는가? 전통사회에는 '미풍양속'과 '자랑스러운 문화유산'뿐만 아니라 소름 끼칠 정도로 무자비한 지배 기술, 피지배자의 공포와 욕망을 조정하는 기술도 존재했다는 사실을 잊어버린다면 앞으로 지배자의 폭력은 지속될 것이다."(101쪽)
박노자의 말이 옳다. 정전론은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거짓말'이다. 가령 중국의 유교적 명분주의는 대개 강력한 제노사이드의 명분으로 이어졌다. 저자는 유교국가의 이율배반적 면모를 고발하고 있는데 과중된 군비로 인한 경제사회적 위기를 두려워한 유교 관료가 불필요한 전쟁을 회피하면서 차라리 국제적 모략 전술을 이용하려 했고, 이와 동시에 의로운 전쟁이라는 명분을 내걸어 강제로 징집된 병사를 사지로 내몰고서 무자비한 연좌제로 그들을 속박했다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역사적으로 유교가 평화주의를 표방한다는 것이 거짓이라는 사실을 저자는 강조하고 있다. 그런데 이게 어디 유교만의 일이던가? 사회주의, 공산주의, 기독교, 불교의 역사도 실은 평화주의와는 동떨어진 전쟁기계와 군대에 예속된 모습을 자주 보여주었다. 특히 미국과 한국에서 만연했던 '반공의 기독교화'와 '기독교의 반공화'는 광신적인 성전(聖戰) 이데올로기에 바탕을 두고 있다.
※오기 정정
6쪽 "로마에서 중세에 이라는…" →"중세에 이르는…" 52쪽 "차열(車裂)"→"거열(車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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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위한 국가는 없다』
서평: 국가라는 이름의 ‘만들어진 신’
철학적 사고는 비판적 사고에서부터 시작되는데, 이
비판적 사고란 나에게 익숙한 어떤 것을 ‘대상화’, 또는
‘타자화’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하지만 사상, 물건, 사람
등 무엇이 되었든 간에 내 몸의 일부처럼 여겨지는 어떤 것을 나에게서 분리한 뒤 객관적으로 본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게다가, 이처럼 ‘익숙함에
젖어 있는 나를 그 익숙함으로부터 분리시키는 행위’는 내게 단순한 어려움을 넘어선 고통을 안겨주기도
한다.
『당신을 위한 국가는 없다』의 저자인 박노자 교수는 『왼쪽으로, 더 왼쪽으로』, 『당신들의 대한민국』 시리즈, 『우승열패의 신화』 등의 저서를 쓴 유명 작가이자 학자로, 그는
진보신당의 비례대표로 출마하는 등 실천적인 면모를 갖춘 운동가이기도 하다. 박노자는 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교 조선학과를 졸업하고 모스크바 대학교에서 고대 가야사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현재는 노르웨이
오슬로 대학교 한국학 교수로 재직 중이다. 박노자는 탈민족적이고 탈국가적인 관점으로 대한민국을 면밀히
들여다봄으로써 한국인들로 하여금 한국 사회를 비판적으로 바라보게 해준다는 평을 듣고 있다.
박노자는 『당신을 위한 국가는 없다』를 통해 한국인들에게 있어 매우 익숙하고도
친숙한 ‘국가’를 ‘대상화’하며 매우 전복적인 사고를 시도하고 있다. 『페미니즘의 도전』으로
널리 알려진 여성학자 정희진 선생은 일전에 일간지를 통해 ‘어려운 글은 없고 다만 익숙하지 않은 사유가
있을 뿐’이라고 말한 바 있는데, 『당신을 위한 국가는 없다』가
바로 그런 글이다. 러시아 태생으로 2001년 한국에 귀화한
박노자는 러시아 태생의 사람이 썼다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유창한 한국어 글솜씨를 선보이면서, 동시에
‘한국인’들에게 매우 낯설 수밖에 없는 국가관을 소개하고
있다. 이를 보여주기라도 하듯 『당신을 위한 국가는 없다』의 부제는 “박노자의
삐딱한 국가론, 폭력으로 유지되는 국가와 결별하기”다. 박노자는 한국인들에게 낯설게 느껴지는 자신의 “삐딱한 국가론”을 총 5부에 걸쳐 소개하고 있다.
1부 <국가란 무엇인가>에서
박노자는 국가가 자행해 왔던 폭력들을 드러내면서 국가의 실체를 밝히고 있다. 먼저 박노자는 국가가 저질러
온 ‘살인’에 주목한다. 박노자는
국가를 “유일하게 합법적 살인을 할 수 있는 기관”이라 칭하고, 이어서 ‘피살의 대상’에
주목한다. 박노자에 의하면, 국가에 의해 합법적으로 피살되는
사람들은 ‘진정한 의미의 자국민’이 아닌 ‘열등한 타자’들이다. 이
열등한 타자들은 국가의 주류 시민보다 ‘못한’ 존재이면서
‘다른’ 사람들, 즉
약소국민, 유색인종, 식민지인, 노동자 등을 의미한다. 박노자는 앞서 언급한 열등한 타자들이 상대적으로
계급 체계에서 하층을 차지하는 ‘비주류’라는 점을 지적하면서, 국가가 근대 경찰 제도 등을 통해 이들에 대한 합법적 폭력과 살인을 저질러왔다고 본다.
이후 박노자는 전근대부터 국가의 폭력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다양한 사례들과 함께
주장한다. 박노자는 전근대 사회의 질서가 국가에 의해 공개적으로 집행된 극형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본다. 그러나 근대를 거치며 극형과 같은 국가의 노골적인 폭력은 점차 사라지게 되었고, 이에 대해 박노자는 근대 이후 국가가 ‘교육’을 통해 피지배자들을 자신의 입맛에 맞게 ‘교정’하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즉 군사주의적이고 국가주의적인 교육을 통해
국가는 국민으로 하여금 폭력을 내면화하게 한 것인데, 이에 대한 대표적인 사례로 박노자는 국사 교육을
제시한다. 박노자는 국가가 대한민국사의 주체를 군주와 군인 위주로 서술했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국방사관’ 위주의 국사 교육에 의문을 제기한다. 1부의 마지막에서 박노자는 국가란 ‘상시 전쟁을 준비하는 전쟁기계’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박노자는 이 ‘전쟁 기계’를 돌아가게 하는 기제로 ‘군산언예학 복합체’를 제시한다. ‘군산언예학
복합체’란 미국 사회학자 밀스(C. Wright Mills)가
주장했던 ‘군산복합체’라는 개념을 확장한 것으로, 이 개념은 군의 수뇌와 군수 산업이 결합체를 이루어 전쟁을 일으키는 기제로 작용한다는 아이디어를 내포하고 있다. 이 군산복합체에다 박노자는 군복을 입고 웃고 있는 ‘연예인’의 모습을 내보내는 등 군사주의를 미화 및 정당화하는 ‘언론’과 각종 국방 연구 등을 통해 피 묻은 돈을 받으며 살아가는 ‘학계’를 더하는데, 이것이 바로 박노자가 주장하는 ‘군산언예학 복합체’이다. 박노자는
군산언예학 복합체에 의해 움직이는 자본주의 체제가 전쟁과 불가분의 관계에 놓여있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자본주의에
대해 도전하지 않는 평화 운동이란 있을 수 없다고 소리 높여 말한다.
이어서 박노자는 2부 <전쟁에 대한 거짓말>에서 국가가 전쟁을 ‘정의로운 것’으로 조작해 온 과정과 국가, 자본주의, 전쟁 간의 유기적 공생 관계를 파헤치고 있다. 박노자에 따르면, 고대 국가에게 전쟁은 이로운 것이었다. 이는 전쟁이 고대 국가의 지배층에게 재물과 노비를 안겨주었고, 하층민에게는
신분 상승의 기대감을 품게 해줌으로써 사회에 만연해 있던 계급 갈등을 일시적으로나마 감추는 역할을 담당하였기 때문이다. 박노자는 전쟁이 강간, 살인 등 평소 비일상적인 것으로 간주되는
‘남에 대한 무자비한 행위’를 상례화시킴으로써, 특정 국가의 남성 평민들에게 ‘우리는 하나’라는 일종의 단결력을 갖도록 했다고 본다.
그런데 이 ‘평민들의 단결력’으로 가장 큰 이득을 보는 것은 바로 ‘국가’다. 이 맥락에서 박노자는 국가가 전쟁으로 인한 이득을 취하기 위해
전쟁을 ‘정의로운 것’으로 조작하게 되었다고 본다. 그러나 박노자는 전쟁을 정당화하는 각종 ‘수사’에도 불구하고, 전쟁의 야만성은 그대로임을 지적한다. 한마디로 박노자에게 ‘정의로운 전쟁’이란 ‘뜨거운 아이스크림’처럼
형용모순이었던 것이다. 박노자가 보기에 전쟁의 실상은 정의가 아니라 지배자의 제국적 야욕과 폭력으로
점철되어 있을 뿐이었다.
이 맥락에서 박노자는 전쟁을 견제하기 위한 국제법들 역시 일종의 ‘수사’이자 ‘희망 사항’에 불과한 것이라고 본다. 이는 국제법의 적용이 강대국들의 해석에
달린 데다가, 자본주의 체제에서 중시되는 것은 국제법과 같은 명분이 아니라 ‘실리’나 ‘효율’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박노자가 보기에 자본주의는 전쟁과 불가분의
관계에 놓여있다. 전쟁은 자본가 계급에 엄청난 부를 가져다주고 자본주의 경제를 움직이게끔 하는 윤활유
역할을 담당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자본주의 체제에는 군언산예학 복합체처럼 전쟁으로 득을 보는 지배계급들이
존재하는데, 여기에 더해 국가는 애국주의를 조장하고 폭력은 오락화되어 하나의 산업이 되어버렸다. 박노자는 이 같은 자본주의가 존재하는 이상, ‘국가의 살인’은 멈추지 않을 것이라는 진단을 내린다.
이어서 3부 <종교, 전쟁, 국가의
삼각관계>에서 박노자는 도발적인 주장을 펼치고 있다. 3부의
요지는 오늘날의 기독교와 불교가 군사주의와 국가주의를 온몸으로 체득하게 되면서, 초기에 이들 종교가
주장했었던 평화주의를 잃어버리고 ‘짠맛을 잃은 소금’처럼
되어버렸다는 것이다. 박노자는 초기 기독교의 정신에 ‘비타협적
평화주의’가 자리하고 있었다고 주장하는데, 이는 초기 기독교가
한 개인을 ‘시민’이면서 동시에 세상에 속하지 않는 초월적
신앙인으로 인식했다는 점에서 기인한다. 그렇다면 기독교가 전쟁에 대해 다른 태도를 취하게 된 것은 언제부터인가? 이에 대해 박노자는 기독교를 로마의 ‘국교’로 만든 콘스탄티누스 1세 때부터였다고 주장한다. ‘기독교 국가’라는 것이 생겨나면서 전쟁은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의로운 것’이 되어버렸다는 것이다. 즉 기독교는 평화를 내세우던 예수의 가르침으로부터 탈선하고 말았고, 그
결과 종군 목사와 신부 등의 직책을 만들어내며 전쟁 시 군기를 진작시키는 하나의 수단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와
관련해 박노자는 “근대의 전쟁이 종교를 하나의 정신적 도구로 이용”했다고
주장하면서, 이러한 주장의 연장 선상에서 한국 기독교와 반공주의 간의 끈끈한 결합에 주목하고 있다.
다음으로 박노자는 평화주의를 잃어버린 오늘날의 불교를 들여다본다. 박노자에 의하면, 초기 기독교와 마찬가지로 석가모니로 대표되는 초기
불교 역시 ‘비폭력’을 주장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여기서 초기 불교가 갖는 문제는 석가모니가 말한 비폭력이 개인 구도 차원에서만 머물렀다는 점이다. 즉 초기 불교는 폭력이 나쁜 결과를 낳는다는 생각은 갖고 있었지만, 폭력으로
점철된 사회질서를 근본적으로 바꾸거나 거부해야 한다는 생각까지는 갖고 있지 않았다. 그런데 박노자에
따르면, 석가모니 사후의 불교는 ‘폭력 기구’인 국가와의 유착을 강화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처럼 국가와 손을 잡게
된 오늘날의 주류 불교에 대해 박노자는 지배자의 살육과 애국을 정당화하는 지경에 이르는 등 석가모니의 가르침에서 벗어나고 말았다는 평을 내린다.
이어서 박노자는 4부 <국민은 어떻게 길들여지는가>를 통해 전쟁, 폭력 등이 어떤 과정을 거쳐 사람들에게 온당한 것이 되었고 “문화적으로
낭만화”되었는지 주목한다. 먼저 박노자는 전쟁영화에 주목한다. 박노자는 전쟁영화에 ‘우리 편-아군’에만 정당성을 부여하고 ‘상대 편-적군’은 악마화시킨다는 장르적 특징이 있다는 점을 간파해 낸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것은 ‘우리 편-아군’에서도 배제되는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가부장적 사고를 기반으로
하는 전쟁영화는 전통적 남성미와 군대 문화를 미화시키는데, 이 과정에서 여성은 철저히 배제되고 만다.
굳이 전쟁영화가 아니더라도, 이처럼
가부장적 이데올로기에 기초하여 폭력을 정당화하는 문화적 요소들은 무수히 많다. 실제로 이와 관련해 박노자는
칼 숭배 이데올로기, 『삼국지연의』, 『수호전』, 『삼총사』, 무사도, 자폭
이데올로기 등 역사 속에서 가부장제, 인종주의, 폭력, 살인 등을 미화시키고 정당화해왔던 사례들을 소개한다. 이러한 ‘낭만화 과정’을 거쳐 폭력은 하나의 ‘미담’이자 ‘덕목’이 되었고, 이후 자본주의 체제가 되면서 이 폭력은 ‘경쟁’과 화학 작용을 일으키며 ‘상품’이면서 ‘교육 방식’이
되었다. 박노자는 페인트 볼과 같은 ‘모의 전쟁 게임’이 전쟁을 ‘즐거운 소비재’로
만들었으며, 해병대 캠프 등으로 상징되는 ‘모의 군 생활’이 사회에서의 훈육을 담당하게 되었다고 지적한다.
끝으로, 박노자는 책의 마지막을 장식하고
있는 5부 <국가폭력에 저항하는 사람들>에서 군사주의와 국가주의에 저항해 온 집단 중 하나로 ‘여호와의
증인’에 주목하고 있으며, 이후 세계사적 관점에서 국가 폭력에
저항해 왔던 사람들의 역사를 훑으며 글을 맺고 있다. 박노자는 대한민국에서 여호와의 증인에게 붙어있는
‘이단’, ‘또라이’ 등의
딱지를 떼고, 이들이 전쟁과 군대에 가장 단호하게 반대했다는 점에 주목한다. 한편 박노자는 해방 전후 여호와의 증인 신도들의 계급적 위치에도 주목하는데,
이들에게는 내세울 만한 경제자본, 문화자본, 사회자본, 상징자본이 딱히 없었다고 한다. 한마디로 해방 전후에 걸쳐 여호와의
증인 신도들은 철저하게 비주류면서 소외계층이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이들은 병영국가에 대해 저항하며, 자신들의 종교적 신념을 지켰다. 그러나, 신념을 지킨 여호와의 증인 신도들에게 돌아온 것은 전과자라는 낙인이었다. 박노자는
여호와의 증인이 보이는 평화주의적 태도가 기독교의 원리원칙과 그렇게까지 다른 것이냐고 물으면서, 여호와의
증인 신도들의 반(反)징병제 투쟁을 높이 사고 있다.
지금까지 살펴보았던 박노자의 국가관은 한국인들에게 매우 낯설게 느껴질 수밖에 없는데, 이에 대한 원인을 알아보려면 먼저 박노자의 ‘정체성’에 대해 살펴보아야 한다. 우선 박노자는 우리가 평소에 보아오던 ‘한국인’들과 매우 다른 사람이다.
‘백인-좌파-지식인’이라는 박노자의 정체성은 날 때부터 국가가 편집한 역사인 국사를 배워오며 한국어를 모국어로 배워 왔었던 ‘한국인’들의 정체성과는 뿌리부터 다르다. ‘한국인’들은 각종 교육과 미디어를 통해 ‘애국심’을 주입 받아 왔으며, 특히
남성들은 성인이 되어서도 복무 간의 정훈 교육 등을 통해 애국심을 공고히 할 것을 요구받는다. 한마디로
한국인들에게 대한민국이라는 ‘국가’는 떼려야 뗄 수 없는
대상인 것이다. 그러나 ‘좌파-지식인’이라는 박노자의 정체성은 박노자로 하여금 국가에 대해 비판적인
시선을 감추지 않게끔 했고, ‘백인’이라는 그의 생득적 정체성은
대한민국을 ‘객관화’ 혹은 ‘타자화’해서 보는 것을 용이하게 해주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박노자의 『당신을 위한 국가는 없다』를 추천할 수밖에 없는 이유 중 하나다. 푸른 눈의 시선으로 대한민국을 면밀히 들여다본 박노자의 글은 대개의 한국인들이 ‘대상화’하지 못하는 국가를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당신을 위한 국가는 없다』에서 주목할 만한 또 다른 점은 박노자가 동서양의 고금을
넘나들며 제시하는 자료들에 있다. 추천사에서 성공회대 김동춘 교수가 말하듯이 동서양을 가리지 않는 박노자의
지식은 적재적소에 배치되어 책의 논지를 뒷받침하고 있는데, 실제로 그는 서양의 대표 종교 기독교와 동양의
대표 종교인 불교를 동시에 깊이 있게 다루고 있다. 일부나마 서방에 속하는 러시아에서 태어났으면서, 동시에 한국의 고대사를 전공하고 현대사까지 섭렵한 박노자라는 인물이 소개하는 지적 에피소드들은 한국인들의 제한적인
시선을 넘어 보다 거시적인 관점에서 국가를 바라보게끔 해준다.
『당신을 위한 국가는 없다』가 지닌 또 다른 장점으로는 박노자가 대중적 언어를
구사하고 있다는 것이다. 앞서 말했듯이, 박노자는 본서에서
러시아 태생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의 한국어 실력을 뽐내고 있다. 대중들 사이에서 흔히 사용되지 않는
한자어들이 간혹 보이기는 하지만, 전체적인 내용을 훑어가는 데 있어 큰 어려움은 없을 것으로 생각된다.
앞서 말한 것과 같이 『당신을 위한 국가는 없다』가 훌륭한 책인 것은 사실이지만, 이 책에도 한계는 존재한다. 박노자의 주장을 듣다 보면,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하는가?”라는 의문이 남는다. 박노자가 제기한 문제들은 ‘진정한’
좌파가 정권을 잡으면 해결될까? 그럴 리 없다. 박노자는
김동춘 교수의 말대로 “국가에 대한 일말의 기대를 걸고 있는 우리 자신의 이중적 모습”을 고발하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박노자는 “우리에게 익숙한 부르주아적 ‘제도민주주의’ 또는 ‘의회민주주의’가
세계 평화를 가져올 수 있다는 믿음은 유해한 허상일 뿐”이라고 단언하고 있다. 1899년 사회주의자로서는 프랑스에서 최초로 입각했던 프랑스 제3공화국의
12대 대통령 알렉상드르 밀레랑(Alexandre Millerand)의
‘변절’이나, 급진적
사회주의자였으나 입각 이후 무자비하게 파업을 탄압하였던 프랑스의 클레망소(Clemenceau) 등 우리는
역사적 사례를 통해 개혁적이고 진보적이었던 인사들이 집권 이후 한결같이 부패하거나 변절한 사실을 알고 있다. 사실
프랑스까지 갈 것도 없다. 한국에서도 얼마나 많은 자칭 진보 인사들이 부패하거나 변절하였던가.
결국, 박노자가 우리에게 제시하는 것은
‘정권 획득’이 아니다. 실제로
그는 머리말에서 “마르크스의 말대로 다수의 생각은 하나의 물리력이 되니, 세계관의 변화가 결국 사회 · 정치적인 진보에 보탬이 될 것이라 믿고 이 책을 쓰게 되었다”고 밝히고 있으며, 정치적인 행위나 운동 만이 우리가 취할 수 있는
유일한 해결책이 아니라고 본다. 그렇다면 박노자의 대안은 무엇인가? 『당신을
위한 국가는 없다』를 관통하는 핵심 내용은 바로 ‘양심에 의한 거부’다. 한마디로 자본주의와 국가 폭력의 병폐를 깨닫고, 이를 ‘거부’하자는 것이다. 이를
이해했을 때, 앞서 『당신을 위한 국가는 없다』가 갖고 있다고 했던 한계는 희석된다. 『당신을 위한 국가는 없다』는 ‘한국인’ 독자로 하여금 국가의 실체와 자본주의 체제의 문제점을 깨닫게 하는 목적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본서를 통해 박노자가 독자들에게 전하고 싶었던 것은 대안보다는 ‘사고의
전환’이라 할 수 있다. 문제 해결은 문제를 올바르게 인식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한다는 말도 있지 않던가. 박노자의 글은 ‘문제를
올바르게 인식하는 것’에 주안을 두고 있다.
한편 박노자의 글은 기독교인인 나에게 “기독교인이
국가에 대해 취해야 하는 입장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남겼다. 초기
기독교와 달리 오늘날의 기독교는 예수의 가르침에서 벗어나 평화주의를 잃어버렸다는 그의 주장을 곱씹어 보면 볼수록,
기독교인으로서 ‘국가’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라는
의문이 머리를 맴돌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대답으로 성서는 사무엘상 8장 11절~20절을 통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었다. "당신들을 다스릴 왕의 권한은 이러합니다. 그는
당신들의 아들들을 데려다가 그의 병거와 말을 다루는 일을 시키고, 병거 앞에서 달리게 할 것입니다. 그는 당신들의 아들들을 천부장과 오십부장으로 임명하기도 하고, 왕의
밭을 갈게도 하고, 곡식을 거두어들이게도 하고, 무기와 병거의
장비도 만들게 할 것입니다. 그는 당신들의 딸들을 데려다가, 향유도
만들게 하고 요리도 시키고 빵도 굽게 할 것입니다. 그는 당신들의 밭과 포도원과 올리브 밭에서 가장
좋은 것을 가져다가 왕의 신하들에게 줄 것이며, 당신들이 둔 곡식과 포도에서도 열에 하나를 거두어 왕의
관리들과 신하들에게 줄 것입니다. 그는 당신들의 남종들과 여종들과 가장 뛰어난 젊은이들과 나귀들을 끌어다가
왕의 일을 시킬 것입니다. 그는 또 당신들의 양 떼 가운데서 열에 하나를 거두어 갈 것이며, 마침내 당신들까지 왕의 종이 될 것입니다. 그 때에야 당신들이 스스로
택한 왕 때문에 울부짖을 터이지만, 그 때에 주님께서는 당신들의 기도에 응답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공동번역)
박노자의 지적대로 현대의 주류 기독교는 하나님에 대한 순종과 지도자 및 국가에
대한 순종을 동일한 것으로 여기곤 한다. 그러나 예수는 어떤 인물이었는가? 예수는 반정부인사이자 반체제인사였다. 오늘날 교계는 박노자의 지적을
단순한 비종교인의 비난으로 치부하는 것이 아니라, 이를 매우 주의 깊게 경청할 필요가 있다.
정리하자면, 박노자는 『당신을 위한
국가는 없다』를 통해 ‘우리 조국’이라는 미명 아래 숨겨져
있던 국가의 폭력성에 주목하였다. 박노자가 말하는 국가는 국민들에게 폭력을 자행하고 이를 정당화해왔으며, 국민들에 대한 통제 및 교정을 일삼아 온 ‘일종의 전쟁기계’다. 또, 박노자는 이
폭력이 계급에 따라 달라진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국가의 폭력이 계급 구조를 적나라하게 드러낸다는 점을
분석하였다. 나아가 박노자는 전쟁의 허위성을 폭로하면서 전쟁과 정의가 양립할 수 없는 가치임을 지적하고
있으며, 오히려 전쟁은 자본과 결탁하여 지배층의 배를 불리는 좋은 수단일 뿐이라고 말한다. 즉 리처드 도킨스의 책 제목처럼, 국가는 만들어진 것이지만 신으로
군림하고 있다. 그리고 박노자는 이 ‘만들어진 신’의 실체를 파헤치고 있다.
우리는 『당신을 위한 국가는 없다』에서 ‘당신’이 누구를 뜻하는 것인지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책 한 권을 통해
박노자는 ‘당신’이 자본가나 지배층이 아닌 보통의 서민들을
뜻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한마디로 소수의 자본가나 지배층을 제외한 국민의 대다수는 박노자가 말하는
‘당신’에 포함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당신’들은 국가에 대한 일말의 기대를 놓지 않는다. 정작 국가는 ‘당신’들에게 아무런 관심이 없는데 말이다. 주는 사람은 생각도 안 하는데 김칫국부터 마신다 했었나. 국가와
‘당신’의 관계란 바로 이런 것이다. 자끄 엘륄은 “민주주의 체제들이 당연하게 생각하는 법치국가론은 처음부터
끝까지 허구”라고 말했고, 니체는 “국가는 모든 냉혈 괴물들 가운데 가장 냉혈한 것”이라 말하지 않았던가. ‘당신’들은 국가를 ‘대상화’해서 이해해야만 하며, 국가에 끊임없이 이의를 제기하고 국가를 의심해야만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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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지은이인 박노자 교수님은 러시아에서 귀화하신 분이다. 이분은 평소 다른 저서 <당신들의 대한민국> 에서와 같이 우리 사회에 깊이 내장되어 있는 폭력적이고 전근대적인 사고방식을 자주 비판하셨다. 또한 항상 외국인의 입장에서, 탈 민족주의의 시선으로 항상 대한민국을 바라 볼 수 있는 사람들 중 한명이다. 내가 이 책, <당신을 위한 국가는 없다>를 선택한 이유는 단순히 박노자 교수님에게 흥미가 있었기 때문이다. 고등학교 때 친구가 나에게 박노자 교수님을 아냐고 물었고 책을 별로 읽지 않았던 나는 당연히 모른다고 대답했다. 그 뒤 친구가 그 교수님에 대한 장황한 설명을 해주었지만 내가 기억하는 것은 딱 하나 ‘러시아 사람인데 나보다 글을 잘 쓰신다.’ 이 정도였다. 마침 운이 좋게도 박노자 교수님의 저서를 읽을 기회가 있어 나는 이 책을 집어 들게 되었다. <당신을 위한 국가는 없다>는 탈 민족주의의 시각으로 국가의 행동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다. 국가는 공권력을 바탕으로 합법적인 살인을 하고 국가 경제력을 향상시키기 위해 일부러 전쟁을 일으킨다. 또한 문학 작품이나 교육 등으로 우리를 국가 이익만을 위해 일하도록 세뇌시키기도 한다. 이 책을 읽다보면 국가는 악랄한 짓만을 한 것으로 보일정도로 그의 부정적인 면만을 적절히 지적했다. 국가는 근대 이후 국경이란 개념이 생기면서 구체화 되었다. 이는 우리를 감시하며 행동을 억압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우리를 지켜주기도 한다. 전쟁 자체에서 목적이 단지 사람을 죽인다는 것이면 이성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지만 내부적으로는 우리나라 사람을 지키는 수단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또한 인간의 본성인 욕심이 물질을 추구하게 되면서 갈등이 생기기 마련인데, 전쟁은 이 욕심을 추구하는 수단이다. 그러나 우리가 물건을 얻기 위해 침략해서 일으키는 전쟁이 있지만 반대로 이 침략을 막으려는 전쟁도 있다. 만약 이 싸움에서 진다면 우리는 상대 국가의 욕심에 우리의 모든 것을 내줘야 할 것이다. 국가는 우리에게 이로운 존재일까 해가 되는 존재일까? 답은 명확하다. 둘 다이다. 어느 하나가 일방적으로 나쁜 것은 드문 듯하다. 돈을 많이 버는 부자들에게, 국가는 자기 인생에 도움이 안 되는 존재일 수 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세금을 비교적 많이 부과하니까. 그러나 정말 힘들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생계회복을 위해 주어지는 복지 혜택은 그들이 국가를 좋아하게 만든다. 이렇듯 국가가 좋고 나쁨은 개개인의 경우에 따라 다르기 때문에 따질 수 없다. 우리의 앞선 세대는 광복 후 군부독재 하에서 살아왔다. 군인이 나라를 지배한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군대를 동원한 군사 독재에 반발을 사기도 했지만 우리에게 이로운 몇 가지 면이 있다. 그 중 하나는 우리나라 경제를 급속도로 발전시킨 것이다. 대한민국은 이때 세계에서 이례적으로 엄청난 발전을 이루었다. 6.25로 황폐화된 국가에서 다른 나라를 도와 줄 수 있는 나라로 성장했다. 더불어 우리들의 생활수준은 크게 향상되었고 전에는 누려보지 못한 풍요를 누리고 있다. 이는 국가가 우리에게 도움이 된 경우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나는 이러한 일방적이고 강압적인 국가를 무조건 옳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예를 들어 우리가 경제 발전을 이룰 수 있었던 데에는 지하에서 일했던 노동자들의 희생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국가의 수출 산업으로 고된 노동을 강요당했다. 일하는 노동에 비해 턱없이 작은 임금, 당장 병에 걸려도 이상하지 않을 불결한 환경, 한 달에 두 번의 휴일 등등. 전태일 열사의 분신자살 사건도 이런 이유로 발생한 것이다. 이들이 없었다면 우리는 지금보다 더 가난한 삶을 살고 있었을 것이다. 나는 이 책을 좋은 시선으로만 바라볼 수 없다. 왜냐하면 너무 일방적인 시선으로만 쓰였기 때문이다. 나는 좋은 편이고 너는 나쁜 편이다 같은 이거 아니면 저거의 흑백논리는 받아들여지기 힘들다. ‘폭력으로 유지되는 국가‘를 보여주기 위한 증거들은 아주 훌륭했다. 그러나 국가의 좋은 점을 들면서 동시에 국가는 폭력적이다 라는 자신의 개인적인 국가관을 서술했다면, 독자들이 어느 하나의 성향에 파묻히지 않고 객관적인 시선으로 읽을 수 있겠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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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위한 나라는 없다-박노자
이 책의 저자 박노자는 러시아 태생으로서 한국에 귀화한 인물이다. 성장기때 러시아에 지내서 서양적 시각으로 역사관 그리고 종교관등 배운 사람으로, 태어나서부터 지금 까지 대한민국에서 자란 나하고는 다른 시각을 가지고 있다. 즉 나는 이 사회에서 나쁜 점이 좋은점 이든 무비판적으로 받아 들였지만 , 박노자는 서양의 시각을 통해서 대한민국을 보니까 나 스스로 납득이 되지 않는 면들이 책에서 보여주고 있다. 나를 위한 국가는 없고 지배 계급을 위한 국가만 존재하며, 전쟁은 국가의 중요한 사업이고,어떠한 역사적, 자국민 보호 등으로 인하여 전쟁의 명분으로 가지면서 정의로운 전쟁 이라고 표현하려고 노력하지만, 사실은’ 정의로운 전쟁은 없다라는 것이다.
이 책의 제목 처럼 당신을 위한 나라는 없다. 여기서 당신은 99%의 사람들을 의미한다 즉 돈도 없도 빽도 없는 일반 시민들을 지칭한다. 시민들이 힘든 상황에서 처해 있으면, 정규과정을 통해서 배운 국가의 역할 로써 시민들을 도와 주어야 하는데, 현실은 그와는 정반대다. 철저히 국가는 상위 1%즉 지배세력을 위해 존재하는 집단이라는 것이다, 초창기때 경찰의 존재 목적은 국민의 지팡이로서 국민 수호가 아닌, 권력 집단에 반발하는 시민들을 다스리기 위한 기구일 뿐이다. 학교는 권력 집단에게 잘 통제하기 위한 시민들을 가르치는 기구, 언론은 진실 보도 보다는 정부의 입장을 대변하기 위한 기구, 이런 불편한 진실을 추상적으로 알고 있었지, 저자의 책을 보면서 이것이 확신이라는 생각을 한 그 다음부터 나를 우울하게 했다.
솔직히 이 책을 읽으면서 책을 몇 번을 덮고 생각한지 모르겠다. 이 저자의 말하는 사실들이 대한민국에 익숙한 나한테는 불편한 진실로 다가 왔다, 이성적으로 납득이 되나 감성적으로 본능적인 거부감이 들었다
나는 배운 지식 및 사회적 의식들이 지배계급에 순종하기 위해서 수많은 시간을 보냈다는 사실이 나를 우울 하게 했다. 내가 여태까지 믿고 있었던 진실과 국민들을 보호하는 나라는 없었다. 그럼 나는 이러한 사실들을 알고 나서 할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이 지배계급에 들어가는 건가? 아니면 거부하면서 살아가는 것인데 기존의 타성에 젖어 있는 나인데 과연 거부하면서 살 수 있을까
그렇다고 내가 노력한다고 해도 이 지배 계급에 들어갈 수 있을까? 기껏해야 지배계급을 유지하기 위해 일하면서 일반 시민보다 좀더 안락한 삶을 사는 존재 밖에 되지 않는다. 기꺼해야 남들보다 조금 더 나은 환경을 살고 있는 것이지, 그래 봤자. 잘 길들여진 지배계급의 사냥개 밖에 되지 않는다. 사냥개는 주인이 필요할 때 사랑을 받지 필요가 없어지면 그대로 버려지는 존재........ 아~~~~~
P52 학교에서 배우는 지배자들의 ‘당연한 진리’들은 ,궁극적으로 피 교육자로 하여금 지배체제의 폭력을 당연시하게 만들고, 또 그 폭력의 주체가 되도록 유도한다. 학교야 말로 피지배자가 집대체체와 일체화를 경험할수 있는 가장 중요한 핵심적인 장이다.
P286. 제도적 민주화는 됐지만,중상층 상층부이하 남성을 말 잘듣고 유순하며 장시간 노동을 잘 견디는 노동자로 만들어야 하는 착취공장과 같은 국가, 대한민국에서 탈병영화는 훨씬 더 어려운 문제인 모양이다. 상류층이외의 그 어떤 예외도 인정하려 하지 않는 철저한 징병제는 그만큼 노동력 착취 중심의 한국형 자본주의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고 봐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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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말하는 이념으로 나를 분석하면 나는 어떤 이념을 가진 사람일까? 사회민주주의자, 온건적 진보주의자, 급진적 민족주의자, 중도 보수주의자. 하나의 단어로 표현할 수 없을 것 같다. 한국만큼 이념을 가지고 서로를 공격하고 수렁에 빠지고 빠트리는 사람들이 많은 국가가 있을까 싶다. 누구 말대로 미국의 텍사스주 보다 작은 땅덩어리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이렇게 분열되어 있고 나뉘어져 있는 경우는 아무 없을 것이다. 외국의 정치학 논문에서 대상으로 한다면 학위는 당연히 받을 만한 특수한 상황이다. 지역 간 분열을 물론이고 세대 간 분열도 최근 아주 극심해졌다. 거기에 더해서 같은 세대 속에서도 분열이 조장 되고 상호 비방이 일상화 된 사회다. 경제 규모자체는 10위권에 속해 있다고 늘 자랑스레 얘기하지만 세부적인 수치를 따져보고 경제 규모에 대한 수치를 제외한 다른 거의 모든 수치에서는 OECD국가 중 최하위를 기록하고 있는 국가다. 자살률은 단연 압도적 1위를 기록하고 있다. 세계 모든 국가를 포함하더라도 공부를 많이 시키고 부모들의 교육열이 심각할 정도로 큰 곳이다. 그런데 아이들은 대학에 입학해서 바로 또 공부를 시작한다. 대학에서 누려야 할 청춘의 맛은 취업 준비를 위한 공부로 뒤덮인다. 내가 살고 있는 국가는 어떤 곳일까? 아무리 책을 읽고 고민을 하고 자료를 찾아보고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어 보아도 뚜렷한 해답을 찾을 수 없다. 어차피 내가 발붙이고 살고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특정한 사안을 마주할 때 객관적인 입장에 있는 것이 가장 공정할 때가 많다. 그런 면에서 한국인인 나는 한국에 대해서 아주 객관적으로 불 수 있을 가능성은 작다. 그래서 박노자 교수의 논리와 주장은 꽤 설득력이 있다. 이미 귀화해 한국 사람이 된 박노자 교수이지만 그가 가진 외모만큼 그의 생각은 나와 같은 날 때부터 한국인의 그것과는 다를 가능성이 크다. 박노자 교수의 전작을 대학 때 읽으며 사고의 지평을 넓힐 수 있었다. 그리고 흔히 우리가 최고 선진국이라고 생각하는 북유럽 국가들에 대한 가감 없는 속살을 시원스레 폭로하는 그의 주장에 낯설기도 했다. 우리네 일상과 현실이 워낙 짜증나고 힘들고 비상식적이어서 ‘혹시 스웨덴이나 노르웨이 같은 나라에 살 수 있다면 참 좋겠다.’ 라는 생각을 한 번씩은 해봤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나라들도 문제가 많고 한국인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낭만적이고 이상적인 곳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귀화를 했다고 하지만 여전히 푸른 눈을 가졌는데 뭐 한국 비판하는 거 들을 필요 있어?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오산이다. 박노자는 노르웨이도, 스웨덴도, 핀란드도 한국과 똑같이 비판한다. 그래서 진보입네 흉내 내지만 내용 없는 이야기 늘어놓는 국내 지식인들의 허울 보다는 훨씬 낫다.
이 책 「당신을 위한 국가는 없다」는 국가폭력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국가폭력……. 어린 시절부터 반공교육을 받아 온 나의 세대와 그 이전 세대들에게 국가는 신성한 존재였다. 매일 국기게양식을 지켜봐야 했고 애국가를 4절까지 외워야 했고 국민교육헌장을 무슨 가훈 외듯 외워야 했다. 국가가 있어 내가 있고 국가는 마지막까지 나를 지켜주고 나를 보호해주는 존재로 인식되었다. 그런데 그런 국가를 제대로 알아 가면 갈수록 국가에 대한 사랑과 존중은 줄어갈 수밖에 없었다. 국가라는 이름으로 갖는 괴물과 같은 힘이 너무 컸다. 비정상적으로 수립되고 구성되었으며 전개된 독재 권력과 군사정권은 그들이 가지지 못한 정권의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해 어거지로 국가지상주의 라는 괴물을 낳고 키웠다. 한국이라는 국가의 간판을 내걸고 수십 년이 지난 후에야 제대로 된 절차적 민주주의를 이루어 냈고 정치적 상식을 이루어 냈지만 국가는 도구로 사용되기만 했다. 어린 시절을 지나며 교육을 받고 국가에 대한 진실을 체득하면서 자연스레 국가를 인식하고 국가에 대한 사랑과 존중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강요하고 세뇌하는 것이 구조화되다 보니 정권이 바뀌고 정치적 자유화를 이루어도 쉽게 바뀌지 않았다. 민주·개혁 정권 10년을 겪으며 많은 것을 바꿔보려 했지만 지난 5년 만에 20∼30년 뒤로 완전히 후퇴해 버렸다. 그들이 말하는 국가는 그렇게 쉽게 바뀌고 언제든 정략적으로 정치적으로 이용될 수 있다는 것을 낱낱이 보여 주었다.
“국가폭력의 주된 표적, ‘열등한 타자’” (p.44) 박노자 교수는 참 아프지만 정확하게 지적 한다. 한국이라는 국가가 가진 국가폭력의 주된 표적은 ‘열등한 타자’였음이 분명하다. 아무리 변명해보려 해도 저 말이 맞다. 책에서도 소대된 사례 용산참사는 이것의 전형을 보여 준다. 밀려나고 밀려나다가 망루에까지 오른 철거민들은 이 사회가, 한국이라는 국가가 ‘열등한 타자’로 규정했다.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를 공장 옥상에서 살육하듯 진압한 장면도, 각종 시위에서 등장하는 공권력의 진압 장면도 국가가 규정한 ‘열등한 타자’에 대한 표적 폭력이다. 대의고 명분이고는 중요하지 않다. 조금만 생각해 봐도 한국의 역사를 통해 ‘열등한 타자’는 늘 폭력을 당해 왔다. 늘 구차한 변명을 따라 왔다. 국가를 위한 길이다. 국가를 위한 길…….
“국가의 실체와 함께 국가폭력의 실체에 초점을 맞춘 이 책은, 무엇보다 그 폭력이 여태까지 어떻게 합리화되고 낭만화 되어 왔는가 하는 ‘과정’을 중점적으로 조명한다.” (p.14) “어느 정도 진보적 성향을 지닌 한국인이라면 박종철이나 이한열 등의 열사를 모를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가시적 정치성이 부족한 국살은 대체로 대중에게 망각되고 피해자의 유족에게만 기억된다.” (p.27) 나는 국가의 실체가 무엇인지 규정하지 못했다. 그것에 대해 얘기해주지 않는다. 먹고 살기 힘든데 무슨 쓸데없는 소리냐 할지도 모르겠다. 박노자 교수의 말대로 가시적 정치성이 강한 국살에 대해서는 어김없이 들고 일어났다. 얘기만 들어 왔던 민주화 투쟁이 아니더라도 몇 년 전 쇠고기 수입에 대한 촛불시위만 돌이켜 봐도 알 수 있다. 물론, 국가폭력에 의한 항거로 규정하기에는 무리가 따르기는 하지만 비슷한 맥락에서 숙고해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지금은 가시적인 정치적 국살이 없어서 대중은 국가폭력에 대한 관심이 없는 것일까? 어떻게 보면 이것 또한 한국이라는 국가를 움직이는 기득권이 노리는 오래전부터의 야욕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신자유주의가 본격화 되고 허망하게 망하면서 사람들에게 남긴 건 단 하나, 돈이 최고다. 라는 인식이다. 그 최고의 가치인 돈을 위해서는 좋은 직장, 안정된 직장에 들어가야 하고 그렇다면 청춘을 논하고 캠퍼스 운운하는 대학생활은 포기해야 한다. 대학은 직장예비학교로 전락했고 대학에서 배우던 조직과 사회, 공동체 생활은 멸절했다. 직장생활을 시작하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으면 어느새 기성세대로 불리게 된다. 지난 이명박 정권에서 저지른 많은 범죄 중 가장 심각하다고 생각했던 국가의 힘에 의한 민간인 사찰 건은 사람들에게 환기를 불러일으키지 못했다. 당연히 잘못된 일이고 언제 어느 때 나도 국가로부터 사찰을 당할지도 모르는 중차대한 일인데 관심이 없었다. 어차피 내 일이 아니면 관심이 없다. 국민들은 점점 정치로부터 멀어지게 하고 혐오를 넘어 무관심에 이르게 하는 것이 기득권의 목표였다면 그들은 확실하게 목표를 달성했다. 요즘 들어 최고의 현안인 국정원 대선 개입 사건을 NLL로 물 타기 해버린 저들의 계략 또한 넓은 범주에서 보면 국가폭력과 다름없다. 이미 정권의 하수인이 된 언론은 그 국가폭력을 대행하는 용병이다. 예전처럼 최루탄을 쏘고 고문을 가하는 것만이 국가폭력은 아니다.
“우리에겐 여전히 풀뿌리 민중의 조직화 같은 ‘하찮은’ 이야기보다 ‘거대’ 전국 정치판의 이야기가 더 흥미롭게 들린다. 국가에 대해 도대체 어떤 비현실적인 기대를 하기에 이렇게 되는 것인가?” (p.11) 국가에 대한 비현실적인 기대를 하는 것이 아니고 아예 관심이 없다. 또한 건국 이후 ‘하찮은’ 풀뿌리 민중의 조직화가 성공한 역사가 없다. 산발적으로 생겼다가 사라지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그렇게 열심히 민주화 투쟁에 앞장서던 사람들이 변절해서 기득권 끄트머리에 들러붙는 꼴을 반복적으로 경험해 온 한국의 국민들은 비현실적인 기대조차 없다. 그저 ‘우리당 사람 뽑아줘야지’ 하는 것이 전부다. 그래서 정치적 후진국의 영예를 벗을 수 없는 것이다.
“한때 히틀러의 유대인 학살이나 전시 일본의 ‘일억옥쇄(一億玉碎)’의 집단 광풍 등을 ‘후발 발전국의 후진성을 증명하는 예외적인 야만’으로 보는 견해가 우세했지만, 오늘날 학계에서는 오히려 홀로코스트를 ‘근대성의 당연한 산물’로 보는 지그문트 바우만의 설이 유력해지고 있다.” (p.117) 홀로코스트를 근대성의 당연한 산물로 주장한 지그문트 바우만의 논리와 비슷한 맥락으로 이러한 한국 국민들의 특수성을 이해하면 오히려 편하다. 덧붙여 수십 년 동안 동일한 패턴으로 인식화 되다 보니 오히려 국가가 의도한 대로 사는 것이 편한 것이다. 아무것도 해준 것 없고 그렇게 당했는데도 ‘아이고 불쌍해서 우짜노~ 뽑아 줘야지~~’라는 사람들을 탓할 수 없다. 국가가 그렇게 만들었고 그것을 의도했다.
박노자 교수는 여기에 더해 국가폭력이 가장 극적으로 사용되는 전쟁에 대해 이야기 한다.
“철저하게 불평등하고 이러한 불평등이 세습화된 한국 사회는 ‘군대만큼은 다들 똑같이 간다’는 생각에 매달리며 이를 위안으로 삼는다. 좌우간 전 사회군사화의 산물이든 사회적 불평등 희생자들의 기만적 자기위안이든 의무로서의 병역에 대한 인식이 강한 것은 사실이다.” (p.221) 지난 2002년 대선 노무현 민주당 후보가 엄청난 국민적 인기를 등에 업고 대선 후보가 되었지만 그 이전 몇 년간 대세론의 파도를 타던 사람은 이회창 한나라당 후보였다. 아무리 당시 민주당 경선이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고 노무현이라는 인물에 대한 인기가 상당했다고하더라도 이회창과 한나라당을 넘기는 어려워 보였다. 그런데 이회창의 여러 가지 스캔들이 터졌다. 그중에서도 아들의 병역면제가 가장 큰 타격을 입혔다. 대법원장을 지낸 사람의 아들이 몸무게 미달로 병역을 면제했다는 사유는 대구에 사는 개도 믿지 않을 코미디다. 박근혜만큼 당시 이회창의 대세론은 막강하고 단단했다. 그런데 아들 병역문제로 한 방에 날아갔다. 박노자 교수의 적나라한 분석대로 철저하게 불평등이 세습화되고 공고화된 한국 사람들에게는 ‘병역’만큼은 저들과 내가 똑같다는 것이 위안이 된다. 그래서 내가 아닌 남의 병역에 대해 그렇게 관심이 많고 혹시나 병역에 관련된 문제가 생기면 아무리 인기 있는 연예인이라도 단번에 낭떠러지로 떨어지게 된다. 박노자 교수는 한국인의 병역에 대한 집착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고 그만큼 한국인들에게 군대라는 국가폭력의 실행조직이 일상화 보편화 되어 있다는 것을 지적하고자 한다.
“전장에서 ‘우리’의 단결을 높이는 최적의 방법은 무엇인가? 바로 ‘남’에 대한 끔찍한 잔혹 행위다.” (p.80) 전쟁이 일어나는 전장은 죽음의 장소이다. 적을 향해 총구를 지향하고 포구를 지향하고 있는 것이다. 전쟁은 국가폭력이 가장 극적이고 적극적으로 이행되는 장소이다. 전쟁으로 인해 그간 무디어진 애국의 날을 세울 수 있다. 20세기 초 두 번의 끔찍했던 세계대전을 겪으며 인류는 국가폭력의 잔혹성을 그래도 맛보았다. 한국인들은 3년 동안의 한국전쟁을 경험했다. 비극적인 국가 간 폭력의 결과는 참혹했다. 아직도 그 상흔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박노자 교수는 현대에도 지속되는 전쟁의 이유를 자본주의 문명의 발전과 궤를 같이 해서 분석한다.
“전쟁이 없는 자본주의 문명은 과연 불가능한 것인가?” “전쟁 없는 자본주의라고? 수류탄부터 미사일까지 온갖 무기를 생산·수출해 세계7위의 무기 수출국으로 군림하면서도 노벨 평화상을 주는 등 ‘평화국’으로 행세하는 노르웨이 같은 나라에서는 일단 국내에선 전쟁이 보이지 않게 할 수 있다. 노르웨이산 무기로 아프간의 미군이나 가자지구의 이스라엘군이 미성년자 ‘테러리스트’를 아무리 많이 살육해도, 이를 많은 노르웨이인은 그저 몰라도 되는 것이다.” (p.112) 직접 전쟁을 일으키거나 남의 전쟁에 참전하지 않더라도 여전히 전쟁을 계속되고 광범위하게 펼쳐진다는 것이다. 앞서 말했듯이 박노자 교수는 한국인들이 이상적인 국가라고 생각하는 북유럽 국가에 대한 치부를 낱낱이 파헤친다. 노르웨이가 세계7위의 무기 수출국이라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다. 몇 년 전 극우주의자에 의해 끔찍한 대량 살인이 벌어졌지만 여전히 노르웨이는 살고 싶고 가고 싶은 나라인데, 자기 손에 피 묻히지는 않지만 세계 7위의 무기 수출국이라는 사실에 적잖이 놀랐다. 국가 중심주의를 내세우지 않고 보편적이고 상식적인 복지가 이루어지는 국가에서조차 자본주의의 구조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이 허탈하기도 하다. 박노자 교수의 말대로 노르웨이 국민들은 전혀 모를 수도 있다. 전쟁을 일으키지도 않고 남의 전쟁에 참전하지도 않으니까 말이다.
어떤 방식, 모양이든 국가는 국가폭력을 자행하고 있다. 정도가 다르고 각국의 상황에 따라 각국의 국민들이 체감하는 폭력의 강도도 다르겠지만 지속되고 있다. 가시적인 국가폭력이라면 오히려 두려워 할 수도 있겠지만 비가시적인 경우라면 인식조차 못하기 때문에 그 공포는 배가 된다. 처음 리뷰의 도입부에서 생각해 본 것처럼 한국이라는 국가에 살고 있는 내가 어떤 이념으로 분류될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정답을 찾을 수 없었다. 사실 국가폭력이 어떠한 형태로 어떻게 박노자 교수의 말대로 ‘열등한 타자’ 들에게 가해지는지 정확하게 알 수 없다. 가해자도 피해자도 자신이 가해자인지 피해자인지에 대한 정체성을 구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 심각한 문제다. 애국심, 국가주의는 강요하고 세뇌한다고 해서 생기는 것이 아니다. 국민으로 사는 것이 부끄럽지 않고 국가가 ‘국민의 한 사람인 나를 위해서 이렇게까지 해주는 구나.’라는 생각이 든다면 국가에 대한 애국심은 저절로 생길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의 제목처럼 당신을 위한 국가가 없듯이 나를 위한 국가가 없다는 것이 이 책을 읽으며 내가 내린 유일한 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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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교롭게도 며칠전 "나는 다른 대한민국에서 살고 싶다"란 제목의 책을 읽었는데 박노자의 글은 본토 한국인으로서 자존심을 긁는 경우가 많다. 러시아 출신으로서 귀화한 한국인답지 않게 언어구사력이나 한국사에 대해 전문가 수준 이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글에서 그의 주장과 논지는 합리적이고 설득적이지만 그 주장의 보편성에는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이 책에서 기독교의 본질상 전쟁을 수용할 수 없는데도 불구하고 전쟁참여를 미화하는 기독교를 비판한다. 전쟁을 실시하고 있는 이 시대 최대강대국 미국의 대통령 오바마에게 노벨평화상을 준 사건에 대한 단상은 공감이 간다. 세계평화주의자라고 스스로 주장하는 나로서는 국가보다 개인이 앞선다고 생각하는 그의 주장에 동조하는 편이면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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