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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님은 기독교인이 반드시 알아야 하고 또 항상 쓰는 말이면서도 성령님이 누구신지 잘 몰랐습니다. 더구나 한국교회에선 솔직히 말해 성령님에 대한 관점이 너무 다양해 건전하다 혹은 믿을 만하다는 책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너무 신학적이거나 한쪽으로 치우쳐져 있어서 오히려 헷갈리게 만든 적이 많았거든요.
그런데 토저라는 믿음직한 필자가 성령님에 대해 명쾌히 지적하는 걸 읽으면서, 전통적인 그리고 한국교회의 보편적인 신앙정서를 가진 사람으로서 성령님의 의미와 하시는 일, 그리고 그러한 성령님을 모시고 충만한 삶을 사는 참된 비결까지, 이 책이 설명을 해주는군요! 그동안 감정 위주의 기복적인 성령론이나 이론적인 성령론에 치우쳐 있었다면, 올바른 성령님 이해를 위해 토저의 글이 매우 유익 했습니다. [인상깊은구절] 성령충만은 '정상에서 벗어난 어떤 것'이 아니다. 나는 그것이 '특별한 것'임을 인정한다. 왜냐하면 성령충만한 삶을 사는 사람이 아주 적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비정상인 것은 아니다. 절대 다수가 병자인 지역에서는 건강한 사람이 특별한 사람인 것이 사실이다...본문 77쪽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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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인가, 쇼인가!’를 읽고 (A.W.토저/이용복/규장)
저자의 책은 처음이었다. 몇 번인가 다른 작가들의 글에서 인용되거나 했던 것으로 이 작가에 대해서 막연하게 알고 있는 것 이외에 저자의 글이나 생애를 접해 본적이 없었다. 그래서 친근한 이름이었으나 실상은 모르는 이였다. 그리고 이 특이한 제목의 책을 대하게 되었다.
이 책은 예배에 대해서 토저가 설교했던 여러 편의 설교들 가운데 엄선한 내용을 모와서 편집한 것이다. 각각의 다른 대상을 두고 수회에 걸쳐 설교된 여러 설교를 순서에 맞도록 편집하는 방식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한편 한편의 설교에 하나님의 예배를 향한 기대와 인간을 향한 기대, 그리고 그분이 바라시는 예배에 대해서 강력한 메시지가 담겨 있었다. 한편 한편의 설교도 설교로서의 완결성을 갖추고 있었고, 그 설교들을 모와 놓은 책 전체도 위의 주제들 안에서 조화롭게 편집되어 있었다.
총 3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1부에서는 인생의 목적과 예배의 연관을 밝히며, ‘인생의 목적이 하나님을 하나님답게 예배하는 것이다’라는 것에 대해서 두 편의 글을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해야하는 당연한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밝히고 있고, 2부에서는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예배가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 세세하고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예배의 특징들에 대해서 바라봄, 체험, 교제, 사모, 숭모, 간구, 찬양 이라는 예배에 꼭 있어야 할 것들을 제시함으로 바른 예배의 모습에 대해서 보여주었고. 3부에서는 사이비 예배가 어떤 것이고 그것들의 폐해에 대해서, 그리고 그것들을 중단해야 하는 것에 대한 준엄한 책망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 한편 한편의 글도 완결성을 갖지만 책 전체를 관통하는 흐름 역시 대단히 명료하게 편집되었기에 마치 토저 스스로가 이 책들을 편집한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책은 처음부터 달랐다. 책을 읽을 대상을 고려했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오직 하나님의 얼굴만 바라보고 설교하는듯한 느낌이었다. 어느 곳에도 독자의 마음의 상할 것에 대한 고려, 독자가 불편해야 할 것이라는 고려는 없었다. 오직 하나님의 음성에만 오직 하나님의 기대에만 관심을 갖는 설교가였다는 것을 여실하게 보게 되었다. 어느 한편의 글도 대충 넘어갈 수 없는 적용과 결단을 촉구하는 글 없이 끝나지 않았고, 쉽게 내뱉어진 소리가 없었다. 글을 읽는 동안 그가 설교하는 강단 아래서 앉아 그가 선포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듯 했다. 살아있었고, 강력했다.
현대 교회의 문제라고 여겼던 예배에 대한 그의 생각들을 읽으며 이제야 겨우 생각하게 된 내용들에 대해서 50년 전에 이미 고민했었다는 것에 대해서 놀라왔다. 예배가 하나님 중심에서 사람 중심으로 바뀌고, 소비자 중심이라는 철학이 교회 안에 만연하게 될 것이라는 것에 대한 예견과 그것의 병폐는 오늘날 우리 한국 교회 안에서도 심하게 나타나는 현상이고 그것에 대해 이제야 무언가 대책이 필요하다고 말하고 있는데 그 대책에 대해서 50년 전에 말했던 선각자가 있었음에 대해서 놀랐고, 그가 말하는 그 대책들이 꼭 우리에게, 꼭 우리 교회의 예배에 필요한 것이라는 것에 대해서 보게 된다.
“예배당에서 드리는 예배, 주일 예배 외에 삶의 예배가, 평일 날들의 예배가 없다면 우리의 예배는 예배일 수 없다”라든가. “하나님께서는 일꾼을 찾으신다. 하지만 예배하는 일꾼을 찾으신다”라고 말하는 것이라든가. “예배는 하나님께 드려지는 온전한 시간이다. 그분만이 예배를 받으셔야 한다.”등의 불같은 논리 앞에서 많이 느끼고 많이 흥분했고, 함께 호흡이 빨라졌다. 간만에 책을 읽으며 흥분해 봤다.
이 작은 책을 통해서 우리네 예배가 달라지기를 한국 교회의 쇼가 멈춰지고, 살아서 역사하는 영이 있는 예배들이 교회를 채울 수 있게 되기를 소원해 본다. [인상깊은구절] 그들은 하나님을 끊임없이 찾았다. 그러나 우리는 어떤가? 우리는 주님을 영접하고 난 뒤에는 주님을 다 찾지 않는다. 다른 것들을 제쳐두고 오지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만을 추구하라. 텔레비전을 꺼라. 그 대신 하나님과 교제하고 하나님의 자비를 기뻐하라 |
| 근래에 읽은 책 가운데 보기 드물게 강력한 메시지를 가진 책이다. 한편으로는 지나치게 보수적이지 않나, 과연 이런 메시가 현대인들에게 먹힐까하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하지만, 저자의 논리적이면서도 강렬한 메시지는, 받아들이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힘이 있다. 과연 우리는 성령님과 세상 속에서 얼마나 타협하고 중도적인 입장을 취하는데 익숙해 왔는가를 회개하지 않을 수 없다. 자그마한 책자이지만 강력한 힘이 있는 책이다. 무엇보다도 이책에서 강하게 느껴지는 메시지는 세상과 연합하지 말라는 것이다. 책을 펴면 “세상과 연합하지 마라”는 소제목으로 시작한다. 세상과 교회의 연합은 실상 불가능한데도 세상과 서로 양보하며 사이좋게 지내는 것을 선으로 착각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많다. 하지만, 성경 전체는 교회와 세상 사이에 분명한 선을 긋는다. 중간지대는 없다. 주님은 교회와 세상이 서로의 차이를 존중하며 사이좋게 지내는 것을 용인하지 않으신다. 한쪽에는 하나님을 아는 ‘우리’가 있고, 다른 한쪽에는 예수님을 모르는 ‘그들’이 있다. 이 두무리 사이에는 아무도 건널 수 없는 너무나 큰 도덕적 심연이 가로 놓여있다. 우리가 우리의 시대에 하나님과 동행하려면 세상을 거부해야 한다. 세상을 단호히 거부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이다. 양다리 걸치지 마라! 두번째는, 성령님과 사로잡힌 삶을 위해서는 결단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정색을 하고 당신에게 묻고 싶다. 당신은 당신의 영이 아닌 다른 영에게 사로잡히기를 진정으로 원하는가? 그 영이 당신을 사로잡는다는 것은 그분이 당신의 삶의 완전한 주인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성령님이 당신의 삶의 주인이 되시기를 진정으로 원하는가? 세상의 편한 길을 용납하지 않으시는 성령님과 동행할 준비가 되었는가? 이러한 질문에 그렇다고 답할 수 있는 결단이 필요하다. 만약 그렇다고 답할 수 없다면, 그것은 당신이 성령님과 동행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는 것이고, 그것은 당신의 것을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을 포기하라. 그러면 하나님의 모든 것을 얻게 될 것이다. 당신은 작은 것을 놓치지 않으려고 움켜쥐고 있다. 하지만 그것 때문에 전부를 잃고 있다. 성령충만을 받으려면, 첫째 당신의 몸을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 둘째, 성령 충만을 구해야 한다. 셋째, 하나님께 순종해야 한다. 넷째, 믿음을 가져야 한다. 성령으로 충만하기 위해서는 성령 충만을 받겠다는 열망으로 가득해야 한다. 셋째, 성령님과 동행하는 삶을 위하여 저자가 자신의 삶과 신앙을 통하여 제시하는 조언이다. 1. 성령님은 살아계신 “인격체”이다. 성령님은 비인격적 힘이나 맹목적인 에너지가 아니다. 2. 예수님께 점점 더 몰두하라. 예수님을 높여라. 예수님이 영광을 받으셨을 때 성령님이 오셨다. 이것이 원리다. 3. 의 가운데 행하라. 우리는 자신에 대해서는 건전하게, 주변 사람들에 대해서는 의롭게, 그리고 하나님에 대해서는 경건하게 살아야 한다. 4. 당신의 생각을 ‘깨끗한 성소’로 만들라. 하나님의 우리의 생각이 어떠하냐에 관심이 많으시다. 당신의 생각은 당신의 마음과 기분과 태도에 큰 영향을 끼친다. 하나님은 그것을 당신의 일부로 간주하신다. 그러므로 당신이 성령님과 친해져서 가까이 지내기 원한다면 당신의 생각을 잘 지켜야 한다. 5. 성경이 성령님을 무엇이라고 가르치는지 연구하라. 성경이 아닌 다른 책들을 너무 많이 읽지 마라. 성경을 묵상하는 사람이 되자. 혼자 묵상하라. 넷째, 성령님을 바로 알아야 한다. 성령님은 누구신가? 성령님은 하나님이시다. 우리 가운데 존재하시는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다. 그분은 생각하고 느낄 수 있는 ‘인격체’이시다. 성령님은 누구신가? 성령님은 예수님이시다. 성령님은 아버지와 아들의 영이시다. 성령님은 도덕적 불이요, 영적 불이요, 지적 불이요, 의지의 불이요, 감정의 불이시다. 이 모든 영역을 지배하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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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의 책 중 '이것이 예배이다'라는 책을 먼저 읽었습니다. 참된 예배가 무엇인지 좀 더 알기위해 이 책을 구입했는데 결론만 말하자면 좀 중복되는 부분이 많이 있습니다. '이것이 예배이다'라는 책과도 많이 겹치고 책 내에서도 중복되는 내용, 비슷한 문구가 계속해서 나옵니다. 이 책은 저자인 A.W.Tozer 목사께서 설교나 강연했던 내용들을 정리해서 출판한 책이라고 하니 어느정도의 중복은 피할 수 없겠지만 ... 그렇다고 이 책이 별로다라는 말은 절대 아닙니다. '이것이 예배이다'에서는 알 수 없었던 다른 내용들도 적지 않구요, 한 꼭지 한 꼭지가 짧게 나뉘어 있어서 소집단 인도나 성경학교에 인용할 내용을 찾는데는 훨씬 수월할 것 같습니다. 두 권다 읽어보시면 훨씬 도움이 될테지만, 그래도 굳이 두 책 중 한권을 추천하라면 저는 '이것이 예배이다'를 추천하겠습니다. |
| 사실, 토저 시리즈가 나올때는 꽤 큰 반향을 불러 일으킬수도 있을것이다 라고 생각하였는데, 그렇게까지 대단하진 않았다. 왜냐하면 그 어떤 이론보다 정확하고 명확하게 신앙과 세태를 집어내었으며, 기독교의 세속화와 부정적 요소들을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사람은 1963년에 작고하였다는 사실이, 그 시대에 벌써 작금의 문제를 지적해내었다는게 너무 놀라웠다. 어쨌든 간에, 이 사람은 성경에 대해 있는 그대로의 살아있는 언어로 매우 강력하게 전달하는데 정평이 나있다. 이 시리즈 1편인 예배인가 쇼인가란 책의 제목에서 알수있듯이 세상과 타협하고 더 넓은 길로 가려는 신앙적 퇴보들에 대해 한치의 두려움도 갖지 않고 적확히 비판하고 있다. 가장 큰 문제 - 종교에 있어서, 특히 기독교에 있어서 문제는 신앙과 세상의 논리, 도덕, 가치와의 양립할 수 없는 요소에 대한 화해와 타협이었다. 서로 공존하고 함께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자는 자유주의자의 주장은 적어도 기독교 역사상 성공했던 적이 한번도 없었다. 약간의 허용과, 관대함, 유연한 대처 방식은 신앙의 후패와 퇴보를 가져왔고, 급기야 정체성을 잃게하였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 하나님이신 성령님에 대해 명확하고, 정확한 이해를 하라고 역설하고 있다. 성령은 곧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삶 가운데, 명백한 주인이 되시고 늘 우리와 함께 계신, 우리가 특별한 노력이나 간구를 통해 얻을 은혜가 아닌, 그 은혜 자체인 것을 주장한다, 성령을 부어주소서가 아니라 언제나 처음부터 우리와 늘 함께 하신 분이었고 다만 우리의 영이 그 분을 받아들일수 없는, 우리 가운데 죄와 불순종의 문제가 있을 뿐이었다. 겸손히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그대로 믿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된다. 가장 중요한 것은 그대로 믿고 따라가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언제나 우리가 문제가 되는것은 자의식과 나름의 가치관대로 생각하다, 잘못된 사고와 옳지 못한 길로 가는 우를 범하게 된다. 말은 쉽지만 그렇게 되기가 힘들기에, 늘 겸손히 성령과 동행하며 그에 뜻을 따르는 삶을 간구해야 할 것이다. |
| 세상의 물건들 중엔 진짜가 있고 가짜도 있다. 그런데 가만히 살펴보면 진짜보다 가짜가 더 많아 보인다. 가짜가 마치 진짜처럼 활개를 치는 세상이다. 그런데 이것이 세상에만 있는게 아니라 영적인 세계에도 있다는 사실이다. 마치 주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시면서 천국에는 알곡과 쭉정이가 있어 그것을 구별한다는 말씀처럼 현재 교회에서 신앙생활하는 크리스천들 가운데도 진짜 성도가 있고 가짜 성도가 있다는 것이다. 많은 성도들이 자신은 진짜 성도라고 생각하는데 사실 그렇지 않은 실정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찔리는 부분들이 많이 있었다. 귀중하고 소중한 복음을 너무 싸구려 복음으로 만들지는 않았나 하는 마음이 들었다. 또한 내 믿음 생활을 다시 한번 전반적으로 점검하는 귀한 시간이 될 수 있었으며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른 크리스천이 되기 위해 더 주님의 모습을 닮아 가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말씀을 삶 속에서 실천하는 성도가 진짜 크리스천이 아닐까?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순종하며 살아보자. 자신의 심앙을 점검하는 귀한 시간이 될 줄 믿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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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란 그 제목으로 그 내용을 표현한다. 그런면에서 이 책의 제목은 원제를 직역하는게 더 좋았으리라는 생각을 해본다. 내가 제목을 만든다면.. ' 믿을수없이 대단한 크리스챤 ' 전에 토저 목사님의 ' 세상과 충돌하라 ' 라는 책을 읽은후 꽤 지난 시점에서 다시 그분의 책을 접하게 되었다. '세상과 충돌하라'는 사실 그다지 감동이 없었다. 이 책은 나에게 큰 감동을 주었다. 아마도 이 책을 읽는 시점과 이 책의 내용이 잘 맞은듯 하다. 책의 내용은 원제가 말하듯이 위대한 크리스챤의 삶은 어떠해야 하는지를 말해준다. 크리스챤이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 믿는 바가 무엇인지 그 믿음을 행동으로 옮길것과 세상에서 승리할것을 책을 통하여 설명하며 가르친다. 이 책의 내용이 나의 신앙을 다시금 점검하게 하여준것을 감사하게 생각한다 |
| 한때 예배가 일상화되고 습관화된다는 문제가 있었다. 그도 그럴것이 신앙인에게 예배란 매우 일상적이고 너무나 당연시되어 - 어쩌면 진정한 가치를 잃어버리기가 쉬운 부분이 있다. 하지만 최근에는 예배의 정통성이나 본래의 의미 형태 - 매우 보수적이고 경직적인 비판을 받을만한 주제들에대해 - 가 한란스러울 정도로 조심스럽게 '변질' 이란 단어를 사용하여 세대를 논할만큼 매우 혼잡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열린예배니, 대중문화적, 요소와 특성들을 혼용하여 예배의 본질을 잃어버리고 주체도 바꿔버리는 가치가 완전히 거꾸로된 모습들이 나타나고 있다. 에이든 토저는 경고자적 메세지를 전달하는 사람이다. 이 사람은 시대적 경고 및 파수꾼 적 역할을 하였는데 이 사람이 말하고 있는 바는 현대 기독교에 너무나 정확한 비판적인 일깨움이다. 놀라운 것은 이 사람은 1963년에 세상을 떠났다. 예배란 무엇인가, 이 일반적이고 모든 사람이 알고있는 단어는 매우 간단하지만 그 의미를 매일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도 알기 힘든 실정이다. 우리는 예배를 신앙의 가장 필수적이고 보편적인 형식이며 의식, 기초라고 생각하는데 이는 맞다. 그럼 왜 예배를 드리고 예배란 무엇인가 하는점이다. 우리는 예배를 드림으로서 하나님앞에 나와 안식을 얻고 신앙을 유지하며, 새롭게 됨을 얻는다고 생각하는 게 예배에 대한 보편적 의식인데, 이것은 엄밀하게 말해 정반대로 바뀌어진 '오류'이다. 예배는 하나님을 경배하고 영광을 돌리는 '거룩한 의식'이다.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에 대한, 그 행하심 -우릴 돌보시고 지켜주심, 영원한 소망에 대한 감사-등에 대해, 찬양과 흠모와 숭배의 정신이 어우러진 그래서 하나의 행동양식으로 체계화된 매우 중요한 의식이다. 예배는 우리가 필요한 것을 얻고자 나아가는 것이 아니고 감사와 신앙적 열망의 자세로 거룩하고 신령된 모습으로 경배 '드리러' 나아가는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며 매일 습관화되고 어쩔땐- 거의 그렇다- 그냥 앉아있다 시간떄우고 오는 - 그런 모습이엇음을 볼때, 완전 잘못된 생각으로 살고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문제는 현대에 들어서 더욱 큰 문제가 발생하게 되었다. 점점 교회가 그 진정한 가치와 신앙적 모습을 잃어버리면서 여러가지 '혼잡'한 양상을 띠게 되었는데 양적 성장과 외형에 치중한 나머지 대중을 위해 영합하는 방향으로 가게 되는 것이다. 아무 의미없는 본래 가치를 잃은 예배는 그저 지루한 시간일 뿐이다. 여기에 사람들은 대중문화적 특질 - 재미, 볼거리, 감동, 극적 분위기를 추가하였고, 오늘날 예배는 저자가 말한대로 쇼적 요소들을 매우 중시하게 되는 것이다. 열린 예배라는 것 자체도 말 자체가 잘못된 시대적 미혹이다. 구원은 누구에게나 열려있고, 닫힌 예배는 기존의 딱딱하고 지루한 예배 형태를 말하게 된다. 토저의 가장 큰 특징은 본질은 벗어난, 우리가 미혹될 수 있는 아주 작지만 매우 강력한 범위들을 차지할 수 있는 시대적 문제들에 대해 아주 강력하고 명료하게 지적하고 훼파한다는 점에 있다. 기독교의 가치는 신적 절대성과 그의 영광을 추구함, 자신을 버리고 온전히 나아감에 있다. 그 외에 것은 모두 배제하고 믿음의 절대적 본질을 가르친다는 점에 있다. 오늘날의 교회는 이런 신앙적 가치를 잃어버리고 양적 성장에 치우쳐 각종 내홍을 겪고 있다. 시대를 새롭게 그분의 영광으로 이끄는 목소리는 거의 없으며 그런 길을 밝히는 등불도 없는 상태이다. 어두운 시기에 토저라는 예언자적 사명자의 목소리가 더욱더 많이 울려지기를 소망하게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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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의 기독교를 강력하게 훈계하고 있는 A.W. 토저의 강렬한 메시지가 담긴 책이다. 예전 같았다면 너무나 강한 어조의 그의 어투가 강요하는듯 부담스러울 수도 있었겠다 싶기도하다. 하지만 성경을 조금씩 알게되고 이런 저런 책들을 읽고나니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이 조금은 실감나는 순간이 많다. 내가 지금껏 알아왔던건 정말이지 빙산의 일각에 지나지 않았구나. 무엇보다 내 편한대로 생각해 왔던게 많았던거같다. 저자의 말처럼 교회는 점점 고난이나 십자가의 고통보다는 나긋한 방향이 많음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될것같다. 특히나 현실의 어려움 속에서 교회가 주는 환상이 분명 존재한다. 언 발에 오줌누기' 식의 언행도 많고,... 물론 기독교가 영향을 미치는 희망과 사랑, 평화 이런것들도 하나님의 본질이지만 사람들이 간과하고 있는 부분이 분명 많다는걸 느낀다.믿음으로 구원받지 행위로 구원받는다고 하면 이단이다.라고 무섭게 말하는 사람들도 많다. 이것이 잘못된 말은 아니나 믿음의 테두리를 어디에다 두느냐'가 문제인듯하다. 그리고 신앙서적을 읽다보니 해석의 차이를 자주 느낀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씌여진 성경의 한 구절을 해석하는데에도 저자마다 어디에 핵심을 두느냐'에 따라 메시지가 각양각색이다. 같은 곳을 짚어주고 있으면서도 다른 해석을 내놓기도 한다. 큰 테두리의 성경은 있지만 그 말씀을 다루는 사람들에 따라 다양한 견해가 있을 수 있다는 말이다. 하다못해 성경읽기를 같이 하다가도 사람들의 의견이 같은 곳에서도 다르게 나올때가 많다. 큐티를 매일하는것이 중요한 것이 그 날 그날의 성경의 말씀은 다른 메시지를 전달하기 때문인거같다. 매일의 영의 양식을 쌓지 않으면 - 성경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하면- 개인의 의견에 휘둘릴 수도 있겠다 싶다.
토저의 글은 현세의 기독교를 개탄하는 듯 읽힌다. 제대로 알지 못해 저마다의 논리로 하나님을 따르고 믿는다고 말하지 말라고 외치는듯 엄중하다.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있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포커스가 맞추어져 있다. 십자가의 과거 현재 미래를 모두 꿰뚫고 전개되는 그의 논리는 엄격한 잣대를 스스로에게 지워야 함을 강조하면서 그리스도의 탄생과 죽음, 영광스런 보좌의 미래상까지 전면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더 깊은 삶, 경건한 삶으로의 인내와 고난, 십자가가 내포하고 제시하는 모든 것들을 인정하고 받아들여야만 제대로된 십자가를 알고 예수님의 삶을 따르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으이라 말하는 듯하다. 세상에선 세상적인 것들에 흔들리고 주일에 반짝 교회에 가서 목사님 설교 듣는 동안이나 교제를 나누는 찰나의 순간에만 하나님을 믿는다 말하는 것은 진정한 그리스도인도 성경에서 말하는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삶도 아니라고 강조한다. 기독교인이라고 해도 십자가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해보지 않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십자가는 고통의 상징이기도 하고, 고난의 정점이라 여기기도 한다.여기에서도 언급되었듯이 예쁜 십자가를 먼저 떠올리는 사람도 있을지 모른다. 나에게 십자가란 무얼까? 생각해보니 교회의 상징, 골고다 언덕, 예수님의 수난, 마귀를 쫓는 강력한 무기(?) 정도.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는 죽음과 고통의 상징이다. 하지만 그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주님으로 인해 인류는 죄에서 구원을 받았고 부활이 이루어진다. 십자가의 죽음은 곧 새로운 탄생을 의미한다. 죽음으로 끝나는 십자가라면 아무 의미 없었을 테지만,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는 부활을 잉태한 죽음이었다.
여기에서 엄격하게 경고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시려는 생명은 ' 죽음에서 나온 생명'이다. 그것은 언제나 십자가 너머에 있다. 그 생명을 소유하려는 자는 십자가를 통과해야 한다. 그는 자신을 부인해야 하고, 자기에게 떨어지는 하나님의 판결에 동의해야 한다. - 세상과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동행할 수 없다. 세상도 놓칠 수 없고, 하나님과의 관계도 소홀히 할 수 없다? 이런건 존재하지 않는다고 단언하고 있다. 세상적으로 비난을 받더라도 예수님의 길에 서 있는 자로 그런 삶으로 살아가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는것이다. 사람들은 흔히 말한다. 뭘 그렇게 빡빡하게 구느냐고 , 혹은 너무 빠져 있는거 아냐? - 세상에 편승하기는 너무나 쉽다.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는 시류에 편승하여 편하게 살면서 < 믿습니다> 한마디에 천국에 동승하는 얄팍한 어떤 것이 아니다. 모든것 중에 최우선이 스스로의 인생에서 무엇인지 되묻고 있는듯하다.
주님이 지신 십자가를 따르는 삶이란,겉의 죽음과 고난, 고통을 넘어 구원의 은혜, 완전한 사랑이 약속된 미래를 선물받은 자가 나아가야 할 길인지도 모르겠다.어렵다 힘들다 꼭 이렇게 살아야하나를 말하기 전에 하나님이 약속하신 십자가 뒤의 영광과 환희를 바라볼 줄 아는 자가 되어야할 것같다. 영광의 빛을 선택한 자가 어둠의 굴레에서 헤매는 것은 어리석지 아니한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