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불문학 입문 수업시간에 이 책이 교재로 선정되었다. 카뮈 <적지와 왕국="">, 사르트르 <벽>, 플로베르 <보바리 부인="">, 그리고 볼테르의 <캉디드>를 다뤘었는데, 가장 쉽게 읽힌 작품이 이 <캉디드>였다. 처음 읽었을 때의 느낌은 뭐랄까... 한편의 동화나 우화를 본 듯했다. 실제로 현재의 감각으로, 또는 소설의 구성을 중점적으로 본다면 이 소설은 헛점투성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몇번이나 죽은 줄 알았던 등장 인물들이 살아나서 주인공 캉디드를 만나곤 한다, 이유도 제대로 납득되지 않는 채로 말이다.
그러나 이것을 소설의 관점에서만 해석해서는, 그 의의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이 <캉디드>는 사상가 볼테르가 당대에 퍼져있던 라이프니츠류의 낙관주의에 일침을 가하기 위한 수단으로써 택하고 있는 '철학소설' 혹은 '철학콩트'다. 그 점에 초점을 두고 본다면은, 이 작품은 나름대로의 역할을 다하고 있다. 더군다나 볼테르는 '계몽' 철학가의 대표적 인물 아닌가. 프랑스 혁명이 시작되기 직전까지 살아오며, 혁명의 정신을 고취하는 데 주력한 이 사상가에게 '세상은 언제나 최선으로 되어있다'는, 터무니없는 낙관주의는 분명 타파하고 계몽해야 할 대상이었을 것이다. 사실 말이지, 팡글로스의 말에 따르자면 우리가 세상에서 바꾸어낼 수 있는 것이 어디에 있겠는가. 그의 논리에 따르자면 진보는, 그리고 혁명은 결코 있을 수 없을 것이 아닌가.
더불어, 이 때에 근대적 소설이라는 장르가 아직 제대로 정립되어 있지 않았다는 점도 간과해서는 곤란하다. 볼테르는 그야말로 세상에 대한 낙관주의를 공박하고, 자신의 사상을 역설하기 위해 한 수단으로 '철학소설'이란 형태를 빌고있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볼테르가 의도했든 하지 않았든, 현대 소설에서 말하는 '낯설게 하기'의 효과를 성취하고 있다는 점 또한 <캉디드>를 읽으며 재미있게 생각해볼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이 책은 그리 어렵지 않다. '소설'이라기보다는, 우화라는 표현이 더 적절할지도 모르겠다. 다만 '비판적'이라는 접두어가 붙어야 할 것이다. 보통의 우화와는 확실히 다른, 세상에 대한 비판 정신이 이 책엔 담겨있다. 그리고 그것을 풀어내는 볼테르의 얘기 방식은 현실을 무시하고 있지 않다. 실제로 그는 작품에서 형이상학적이고 추상적인 이론들을 경멸하고 있으며, 당시 유럽에서 일어났던 주요한 사건들을 다루면서 현실에 집중하고 있는 것이다. 현실의 세계에서도, 볼테르는 라이프니츠류의 낙관주의를 정면으로 논박하고 있지 않은가. 그에게 있어 중요한 것은 구체적 현실이지, 형이상학적 추상의 세계가 아니었던 셈이다.
팡글로스의 말 중 '코는 안경을 걸치게끔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안경을 쓰고 있습니다. 다리는 바지를 꿰어 입게끔 만들어졌지요. 그래서 우리는 바지를 이렇게 입고 있지요. 돌은 다듬어서 성을 지으라고 있습니다.'라는 대목은 볼테르 작품의 단면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모든 것은 최선으로 되어있다'는 신학적이며 형이상학적인 허구적 합리성을, 볼테르는 이렇게 간단한 예로 파헤쳐내고 있는 것이다. 재미있고 쉽게 읽어나가며 세상의 추함과 비합리성을 단적으로 파헤쳐낸다는 그 점, <캉디드>의 가장 큰 장점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인상깊은구절] 토론하지 않을 때에는 사는 것이 너무나 지루하여, 하루는 노파가 이렇게 말할 정도였다.
"나는 도대체 어떤 것이 더 불행한 삶인지 알고 싶어요. 검둥이 해적한들한테 1백 번이나 겁탈당하는 것, 엉덩이 한 쪽을 잘리는 것, 불가리아인들에게 몽둥이찜질을 당하는 것, 종교화형식에서 죽도록 매맞은 다음 교수형을 당하는 것, 교수형당한 후 다시 해부당하는 것, 그리고 갤리선에서 노를 젓는 것- 우리 모두가 지금까지 겪은 이 모든 고난에 비해 아무 할 일 없이 이곳에서 지내는 일이 더 행복한 것인지 도대체 알 수가 없군요."
"정말 생각해볼 문제로군요." 하고 캉디드가 말했다.캉디드>캉디드>캉디드>캉디드>캉디드>보바리>벽>적지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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