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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언론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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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폭력의 자유>는 언론의 역사에 관한 책이다. 제목에서 풍기는 것은 한국현대사에서 국가 폭력에 관한 내용인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이 책은 거의 최초로 우리나라 언론의 역사에 대해서 다룬 책이다. 우리나라가 해방되고 독립국가가 생긴뒤부터 언론이 어떤 역할을 해 왔으며 특히 국가와 어떤 관계적 결탁을 통해서 권력적 언론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렇게 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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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폭력의 자유>는 언론의 역사에 관한 책이다. 제목에서 풍기는 것은 한국현대사에서 국가 폭력에 관한 내용인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이 책은 거의 최초로 우리나라 언론의 역사에 대해서 다룬 책이다. 우리나라가 해방되고 독립국가가 생긴뒤부터 언론이 어떤 역할을 해 왔으며 특히 국가와 어떤 관계적 결탁을 통해서 권력적 언론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렇게 대한민국 언론의 총체적 역사를 쓰려면 그 사람의 누구인가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우리나라 언론의 총체적 역사를 쓴다는 것은 언론의 역사 한가운데 있었던 사람이 가장 적합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 책의 저자는 김종철이다. 그가 어떠한 사람이고 어떠한 언론경력을 가지고 있는지 살피는 것은 이 책이 어떠한 질적인 내용을 가지고 있는지를 가늠할 수 있는 잣대가 된다고 생각한다. 그는 서울대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1967년 동아일보 기자로 언론에 첫발을 내딧였다. 그 당시는 국가에 의해 언론이 통제된 시기였기 때문에 언론인들은 자유언론실천운동에 참여하여 언론의 자유에 대해서 투쟁했다. 바로 저자 김종철은 1974년 10월에 시작된 자유언론실천운동에 적극 가담했고 그러한 이유 때문에 언론인 110명과 함께 강제해고 당하였다. 그리고 민주화운동에 가담하여 두 번이나 옥살이를 하였다. 그리고 한겨레 신문의 창간에 참여하고 논설위원으로 활동하였다. 우리나라 근현대사 언론의 중심에 서있었던 저자는 평생 언론의 자유와 정론운동에 힘썼고 언론인으로써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권력의 억압에 펜으로 싸워온 언론계의 거목이다. 저자의 이력만 보아도 대한민국 언론사에 대한 이 책의 가치를 가름해볼 수 있다.

 

언론사에 대한 이 책의 범위는 그야말로 총제적이라고 할수 있다. 일제강점기와 미군정기 시대의 언론에서부터 이승만 정부와 장면 정부의 언론, 박정희 시대의 언론, 박정희의 죽음부터 전두환 정권의 언론, 노태우 정권시기의 권력과 언론 유착에 대해, 김영삼 정권과 보수 언론의 관계에 대해, 김대정 정권의 언론에 대해, 노무현 정권과 조중동의 극한의 대결까지 대한민국 근현대사의 권력과 언론의 관계를 모두 조망한 그야 말로 대한민국 언론사라고 말할 수 있다.

 

저자 김종철은 대한민국 언론사를 한마디로 정리한다. 그것은 ‘있는 그대로 표현할 수 있는 언론의 자유를 헌납하고 권력에 붙어 폭력의 자유를 누린 굴욕사’라는 것이다. 우리나라 대표적인 언론이라고 할 수 있는 조선일보, 중앙일보, 동아일보는 자신들이 대한민국의 폭력의 권력을 감시한 민주적 권력이라고 하지만 김종철은 이러한 주장이 얼마나 터무니 없는 치욕의 역사를 감추고 있는지 그것을 폭로하고 있다. 저자는 한국의 언론은 권력에 붙어서, 특히 일제강점기와 군사독재때 자신이 자유를 언납하고 민중들에게 폭력의 굴레를 덮어씌운 굴욕의 역사를 가지고 있고, 현대에 와서는 권력과 대자본에 붙어서 오히려 폭력을 폭로하는 것이 아니라 언론자체가 폭력이 되었다고 한다. 그는 언론에 오래동안 몸담은 경험과 기억을 되살려 근현대의 언론이 얼마나 권력의 야합의 역사였는지 치밀하게 정리하였다.

 

책이 상당히 두껍지만 저자의 경험과 기억을 통해서 재구성되고 서술된 이 <폭력의 자유>는 잘 읽히고 각 정권마다 어떻게 언론이 정권과 관계를 맺어왔고 언론의 기능을 가져 왔는지 서술하고 있다. 대한민국 언론에 대한 역사는 이 한권으로 정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모든 인간의 가치의 기본은 바로 ‘자유’에 있다. 언론이 권력과 야합하지 않고 권력을 견제할 수 있는 자유를 누릴때만 언론은 참 언론으로서의 기능을 담당할 수 있을 것이다.



YES마니아 : 골드 f****1 2013.09.30. 신고 공감 2 댓글 0
리뷰 총점 종이책
언론의 폭력 앞에 유린당하는 대중
"언론의 폭력 앞에 유린당하는 대중" 내용보기
조선일보에 대한 채동욱 전 검찰총장의 기자회견이 있은 후 각계각층에서 하고 싶은 말을 쏟아내고 있는 형세다. 언제 한번이라도 조선일보가 이름 그대로 언론이었던 적이 있었나 싶고 언제 한번이라도 검찰이 이름 그대로 사법기관이었던 적이 있었나 싶은데 너도나도 이것이다 저것이다 하며 말이 많다. 입이 있고 손이 있는 것은 신체의 자유이고 하고 싶은 표현을 하는 것은 표현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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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에 대한 채동욱 전 검찰총장의 기자회견이 있은 후 각계각층에서 하고 싶은 말을 쏟아내고 있는 형세다. 언제 한번이라도 조선일보가 이름 그대로 언론이었던 적이 있었나 싶고 언제 한번이라도 검찰이 이름 그대로 사법기관이었던 적이 있었나 싶은데 너도나도 이것이다 저것이다 하며 말이 많다. 입이 있고 손이 있는 것은 신체의 자유이고 하고 싶은 표현을 하는 것은 표현의 자유이다. 하지만 조선일보와 채 전 총장을 둘러싼 일련의 사건은 뻔한 연예인 스캔들 기사를 보는 것보다 더 노골적이고 저질적이다.

지난 이명박 정권 이후 지상파 뉴스와 종이 신문을 보지 않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버젓이 한 나라에서 같은 공기를 마시고 사는 이들인데 SNS상에서는 뜨거운 이슈가 9시 뉴스에서는 전혀 보도되지 않고 아침 신문들에서는 정권과 여당, 수구세력을 대변하는 기사만 쏟아낼 뿐이었다. 조폭처럼 국회를 점거해 통과시킨 종합편성 채널은 내년 재심사를 앞두고 또 말도 되지도 않는 편향적 기준을 만들어 내고 있는 중이다. 뭐, 그것도 자유다. 한겨레, 경향, 오마이뉴스 같은 신문과 인터넷 언론이 못마땅한 사람에게는 채널A와 TV조선이 좋을 수 있다. 반대로 조·중·동은 물론 지상파 TV뉴스도 보지 않는 사람에게는 종편 같은 것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짐짝 취급을 받을 수 있다. 아무리 종편채널을 싫어한다 해도 하루 종일 종편을 틀어놓는 식당에서 점심을 먹으며 굳이 식당 손님 모두가 보는 TV의 채널을 바꿀 필요는 없다. 그럴 권리도 없고. 반대로 누구나 자신의 의견을 자유롭게 개지하는 것이 가장 큰 사용 이유인 SNS의 어떤 의견과 발언 또한 제재할 필요도 권리도 없어야 한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에서는 한쪽의 권리는 무작정 보장해주는 반면 반대쪽 권리는 각종 규정과 법률, 댓글알바 따위로 제한하고 있다. 그것도 자유인가?

결코 자유일 수 없다. 애초에 공정한 룰과 공정한 경기장이 확보되지 않은 채 벌이는 싸움은 그 자체로 잘못된 것이다.

 

 

“종합편성채널은 상업 유료방송인데도 방송법에는 ‘의무전송 채널’로 규정되어 있다. 공영방송도 누리지 못하는 특혜를 받은 것이다. 편성과 광고에 대한 심의 규정도 느슨하다. 이명박 정권이 밀어붙인 ‘언론 시장주의’는 ‘미디어 악법’을 통한 종편 체제 구축으로 정점에 이르렀다.” (p.489)

 

지난 대선 이후 대선에 패배한 진영에서는 부랴부랴 언론 싸움에 뛰어들었다. ‘종편이 뭐 대선에 영향을 주겠어? 1% 시청률도 안 나오는데~’라고 쉽게 생각했다가 크게 당했다. 생각보다 기득권과 노년층, 보수 세력은 종편에서 방송해주는 뉴스와 프로그램을 기가 막히게 이용하고 영향을 받았다. 그래서 매달 거의 강제적으로 시청료를 내고 있음에도 공영방송, 공적 언론의 역할을 전혀 하지 않고 있는 뉴스와 언론을 포기 했다. 여러 개의 협동조합 형태의 언론이 탄생했고 몇 만 명의 후원자를 모집해 그나마 언론의 역할을 해내고 있는 몇 개의 인터넷 뉴스를 만들었다. 뭐 그래봐야 계란으로 바위치기다. 고래와 피라미 정도의 싸움이랄까?

박근혜 대통령과 새누리당, 기존의 기득권은 원하는 것을 그대로 밀어 붙이고 있다. 각종 기관의 장에 수구세력을 심고 있고 대선 때 부르짖었던 공약은 이미 집어 치운 것 같다. 아무리 촛불을 켜도 눈 하나 깜빡이지 않는다. 지난 이명박 정권이 후퇴시켰던 정치적 민주주의와 개인의 자유의 정도는 곱절로 후퇴하고 있는 것 같다.

 

 

이 책 「폭력의 자유」는 언론 자유의 역사에 대한 기록이 아니다. 언론을 통제하려는 자들의 자유에 대한 역사적 기록이다. 이 책을 쓴 김종철씨는 동아투위 때부터 공정언론과 언론의 민주화를 위해 온몸으로 싸워 온 사람이다. 말 그대로 기자다.

 

 

“심지어 국내의 움직임을 외국의 출판물을 통해 알기가 일쑤다. 언론은 국민들로부터 불신당하고 언론인들은 자기의 의무를 다하지 못해 긍지를 잃고 실의에 빠져 있다. 우리는 오늘날 한국의 언론이 중대한 위기에 처해 있음을 통감” (p.182) -1971년5월 동아기자-

 

국정원 대선 개입 사건에 대한 뉴스가 한국에서 벌어진 일임에도 언론들은 꿀 먹은 벙어리처럼 조용했다. 마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모두들 동시에 입을 다물었다. 오히려 외국 언론에서 더 적극적으로 기사를 쓰고 칼럼을 썼다. 외국 언론을 통해 이 나라의 상황을 파악하는 것은 40년 전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왜 이렇게까지 언론이 망가진 것일까?

저자는 언론 중 신문의 역사에 주목한다. 일제 강점기 언론의 상황에서부터 이명박 정권과 박근혜 정권에 이르기까지 언론이 어떻게 통제되어 왔고 또는 권력에 유착해 어떻게 살아왔는지 자세하게 기록했다. 차마 하나하나 소개하기가 민망할 정도다. 한국의 메이저 신문이라는 것들이 일제 강점기부터 미군정기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이명박을 거치며 어떻게 기생해 왔는지 또는 권력을 좌지우지했는지 적나라한 그들의 치부가 고스란히 드러난다. 언론이라 함은 권력의 4부가 되어야 하고 사회의 공기이며 비상식과 불의에 타협하지 않고 진실을 추구해야 하는데 한국의 신문은 전혀 그렇지 못했다는 것이 주된 내용이다. 언론은 언제나 권력의 편이었고 사회를 더 어지럽히기 일쑤였으며 상식과 정의에는 눈감았다.

 

 

“5.16 군사혁명은 문자 그대로 혁명이기 때문에 ‘비민주적인 방법이긴 하나’ 장 정권의 무능과 부패를 이 이상 묵인하여준다고 함은 다시 걷잡을 수 없는 위험한 사태를 초래하는 것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 국민의 공통된 느낌이었으니 한국의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우해서는 다소간 ‘비민주적인 방법’이라 하더라도 이를 피할 도리는 없을 것이다.” (p.132)

<동아일보 1961.5.26 ‘혁명 완수로 총진군하자’>

 

독재 권력에 굴종할 수밖에 없었다고 애써 변명하고 싶겠지만 그렇다면 독재 권력에 그렇게 굴종했던 과거를 제대로 참회하고 사과해야 한다. 서슬 퍼런 독재시절 국민들은 살아가는 것 자체가 공포였는데 신문이라는 것들이 국민의 편이 되기보다는 정권의 나팔수가 되었으니 그 역할을 다하지 못한 것이다. 역할은커녕 존재 이유 자체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그들은 박정희, 전두환 독재권력 내내 그들 편에 붙었다. 독재자들은 장군님으로 위대한 영도자로 찬양하고 그들을 뒷받침했다. 당연히 그에 따른 보상은 광고나 투자로 돌아갔다. 노태우, 김영삼 정권 때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김영삼 정권 말기 나라 경제가 와르르 무너지는 와중에도 그들은 “경제위기감 과장 말자 (중앙일보 11월1일자)” “경제 비관할 것 없다(조선일보 11월 2일자)” “외신들의 한국 경제 흔들기 (동아일보 11월 10일자)” 라고 하며 무작정 권력의 편에 섰다. 그리고 진짜 나라 경제가 무너지고 빈털터리가 되었을 때 그들은 단 한 번도 잘못된 보도에 대한 사과를 하지 않았다. 이후 민주 정부 10년 동안은 줄곧 정권 트집 잡는 것으로 시간을 보냈다.

 

 

여기서 저자는 중요한 사실을 지적하는데 한겨레, 경향과 같은 소위 개혁·진보 신문의 행태다.

 

“한겨레와 경향신문의 반성과 자기비판은 두 신문의 제작책임자와 일선 기자들이 왜 검찰의 ‘기획·표적 사정’에 휘말려들었는지에 관한 원인과 과정을 명확히 밝히지 않았다. ‘노무현 죽이기’가 대세를 이룬 상황에서 지나친 상업주의적 보도 경쟁에 뛰어들었는지, 노무현에 대한 적대적 감정에 편승했는지를 해명하지 않았던 것이다.” (p.471)

 

고 노무현 대통령을 두고 검찰과 조중동이 칼춤을 추고 있을 때 참여정부의 언론 자유 아래 마음껏 날개를 펼쳤던 소위 진보 매체들 또한 그 칼춤에 동조 했다. 무분별한 추측과 가정, 폭로와 음모가 활개를 치고 있을 때 어느 진보 매체 하나 객관적이고 중립적으로 그 사안을 다루지 않았다. 사실 이 문제에 있어서는 적극적으로 동의하고 노무현을 욕하던 부류이든 암묵적으로 동의한 채 입 다물고 있던 부류이든 져야 할 책임의 무게는 크게 다르지 않다. 그때는 모두들 그 배를 타야만 했다. ‘모든 것이 노무현 때문이었다.’ 노무현 대통령이 서거한 후 그들의 태도는 조중동이든 진보 매체든 180도 달라졌다. 그들의 칼춤에 대한 반성은 전혀 없었다. 애초에 그런 것을 기대하는 것이 불가능한 조중동이야 원래 그런 존재들이니 말할 필요 없지만 진보매체들의 행태는 이해하기 어렵다.

 

 

“‘천안함 사건’ 명예훼손 재판이 열리던 시기에 한겨레와 경향신문, 오마이뉴스와 프레시안을 비롯한 ‘진보적 매체들’은 ‘침묵의 카르텔’을 맺었던 것인가? 2010년 3월 26일 천안함 침몰 사고이래. 그렇게 끈질기게 기사와 논평으로 ‘북한 어뢰에 의한 폭침설’을 반박하던 자세는 어디로 사라졌는가?” (p.507)

 

천안함 사건과 같은 중차대한 문제에 대해서도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법이 없다. 모든 사안이 그렇지는 않겠지만 권력과 언론은 한 몸이 된 지 오래다. 모든 것이 정치적 물타기 혹은 정치적 노림수를 위한 보도 내지는 폭로는 아니겠지만 그런 일이 많다. 그래서 한꺼번에 확 하고 타올랐다가 금세 후다닥 하고 잊어버린다. 그리고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다른 먹잇감을 찾아 하이에나 떼처럼 두리번거린다. 4대강도 그랬다. 쇠고기 파동도 그랬고 이명박 정권에서 일어났던 수많은 비리와 의혹들에 대해서도 그랬다. 앞서도 말했지만 조중동이야 원래 그러니 애초에 기대같은 것도 없지만 진보 매체 또한 그들과 똑같으니 대중의 실망이야 짐작조차 하기 어렵다.

언론이 4의 권력이 되어 실제 권력을 견제하고 면밀하게 지켜보고 비판하는 기능을 잃어버렸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다. 실제 권력과 한 몸이 된 언론은 그 자체로 폭력이다. 그런 폭력 또한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자유라고 말할 지도 모르겠지만 그것은 대중에게는 폭력이다. 그들이 만들고 싶은 사회와 정치, 문화와 의식을 점유하고 있는 시장과 자본, 권력의 배후를 발판삼아 손쉽게 만들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대중은 실제 몸으로 체감하는 현실과 다른 만들어 낸 현실에서 판단을 흐리게 된다. 이렇게 되면 옳고 그른 것, 상식과 몰상식, 정의와 불의의 구분은 모호해 진다. 민주주의는 후퇴하고 개인의 자유는 통제의 대상에 들어가게 될 수도 있다.

 

 

오늘 오전 주요 포털의 메인과 검색어 상위를 장식하고 있는 것은 연예인의 열애 기사와 추신수, 류현진 뿐이다. 오늘 오전에 박근혜 대통령이 스스로 공약을 지키지 못한 것에 대해 기자회견을 했는데 그런 사안에 대해서 각종 논쟁이 쏟아지고 분석이 나와야 하는데 다들 침묵이다. 국민과 대중을 호구로 알아도 이렇게 호구로 취급할 수는 없다. 하지만 착한 것인지 정치의식이 없는 것인지 대중과 국민들은 별로 그런 것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대통령이 선거 공약을 뒤집거나 폐기해도, 말도 안 되는 정책과 인사가 이루어져도 별 말 하지 않는다. 제대로 된 공동 저항조차 하지 않는다. 너무도 조용한 국민들이다. 그러니 ‘이 정도쯤 해도 가만있을걸.’이라는 생각이 저들에게도 가득할 것이다. 어차피 언론은 자기들 편이니 언론에서 물타기로 며칠간 시끌벅적하게 만들어 관심을 돌려 버리면 그만인 것이다.

폭력에 시달리고 싶은 사람은 없다. 하지만 애당초 폭력을 폭력으로 인식하지 못하고 그저 질질 끌려 다니는 사람들의 태도도 문제다.

 

 

“과거를 망각하는 민족은 자유를 향유할 자격이 없다.” (p.86)

 

한국의 언론 역사는 질곡의 과정이었다. 민족지, 정론지 자청하는 자들은 있지만 정작 자세히 살펴보면 그런 것과는 거리가 먼 자들이다. 언론이 제대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잘못된 과거를 반성하지 않은 채 지금에 이르렀다면 그 자체로 역사는 잘못된 것이다. 과거의 잘못을 덮어두지 않고 청산해낸 프랑스는 현재 언론 자유의 최상위에 위치해 있다. 드골의 나치 협력자 숙청이 없었다면 지금의 프랑스는 없었을 것이다. 이것은 단순히 민족정기를 바로 세운다는 도덕적 차원의 해석보다는 ‘반역의 역사’를 다시는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 후세에 중대한 교훈을 남겨준 사실에서도 큰 의미를 갖는다. 박근혜 대통령 집권 이후 민주주의가 급속하게 후퇴하고 잘못된 과거를 부활시키려는 분위기가 일어나고 있다. 친일청산에서부터 독재부역에 이르기까지 잘못된 과거를 단 한 번도 제대로 청산하지 못한 까닭이다. 반민특위는 친일파 경찰에 의해 습격을 받았고 독재에 부역한 언론과 재벌은 이제껏 살아남아 떵떵거리며 기득권이 되었다. 그러니 역사의 시계를 수십 년 뒤로 돌리는 일에 주저하지 않는다. 기가 막힌 일이지만 기껏해야 SNS상에서나 뜨거운 감자일 뿐이고 TV에서나 신문에서는 이런 경향을 아예 다루지도 않는다.

드골의 말대로 ‘과거를 망각하는 민족은 자유를 향유할 자격이 없다.’ 이 사회의 전반적인 면에서 잘못된 과거에 대한 청산이 필요하다. 그 중에서도 언론 분야는 더욱 심각하고 시급하다. 지금까지 그래 왔던 것처럼 망각하면서 시간을 보내면 언젠가는 돌이키려는 시도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망가져 있을지도 모른다.

 

 

“권력이나 대자본과 하나가 되거나 스스로 권력이 되어 민중을 억압하는 언론은 그 자체가 반사회적이다. 가난하고 소외당한 사람들을 자유롭게 하는 언론이야말로 민중의 진정한 벗이다.” (p.7)

 

대중은 자신의 마음을 줄 곳을 찾는다. 표류하는 바다 위에서 등대 불빛 하나를 찾는 것이다. 대단한 것을 바라는 것도 아니다. 진실을, 사실을 그대로 보도해 주는 것만으로도 만족할 것이다. 분명히 오늘 일어나고 있는 일이 왜 9시 뉴스에서 다음날 아침 신문의 1면에서 찾아볼 수 없는지 그것이 궁금한 것이다. 그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지금 몇몇 대안 언론들이 탄생하여 활동하고 있는데 사실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단지 선거를 앞두고 연합하는 것이 아니라 장기적인 관점에서 조중동과 지상파 뉴스를 뛰어 넘을 수 있는 세력이 되어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공정한 룰과 경기장을 가질 수 있다.

 

대중과 국민도 그럴 자격을 미리 갖추어야 한다. ‘내 먹고 사는 일하고 관계 없는데 뭐~’,

‘정의, 진실 찾아봐야 뭐 도움이 돼~’, ‘어차피 똑같은 것들인데 뭐~’ 라는 수동적이고 패배

주의적인 자세는 버려야 한다. 조금 더 관심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반응하고 행동해야 한다.

후원같은 것도 제대로 시작해 보고 찾아서 홍보도 해보는 노력이 필요하다.

 

더 이상 저들의 폭력이 자유롭게 우리를 유린하지 못하게.

 

 



l****h 2013.09.26. 신고 공감 2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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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에나 같은 언론, 프리라이더 언론...'폭력의 자유'
"하이에나 같은 언론, 프리라이더 언론...'폭력의 자유'" 내용보기
역사적으로 언론 자유는 교회나 정부 권력에 의한 사전 검열에서 벗어나 사상을 자유롭게 표현하는 것을 의미한다. 영국은 세계 최초로 검열이 폐지된 나라인데 그들의 언론사(言論史)가 보여주는 바는 그들의 그런 당연해 보이는 자유조차 출판의 자유를 주장한 밀턴의‘아레오파지티카’가 출간된 지 반 세기가 지난 후에 이루어졌을 정도로 지난한 과정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런 어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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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으로 언론 자유는 교회나 정부 권력에 의한 사전 검열에서 벗어나 사상을 자유롭게 표현하는 것을 의미한다. 영국은 세계 최초로 검열이 폐지된 나라인데 그들의 언론사(言論史)가 보여주는 바는 그들의 그런 당연해 보이는 자유조차 출판의 자유를 주장한 밀턴의‘아레오파지티카’가 출간된 지 반 세기가 지난 후에 이루어졌을 정도로 지난한 과정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런 어려움은 우리라고 예외가 아니다. 하지만 언론 선진국과 우리 사이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굳이 언론에 한한 문제가 아니지만 프랑스의 경우 우파의 드골 임시정부와 사회주의자와 공산주의자 중심인 반나치 저항세력이 단결해 나치 협력 세력을 완전히 숙청함으로써 해방 후 드골의 우파와 좌파 세력을 통합하는 민족해방 세력을 중심으로 새 국가 건설의 주체 세력을 형성한 것이다. 비시 정권에 협력한 죄목으로 사형당한 사람들 가운데‘오늘’신문 사장 쉬아레즈,‘내가 도처에 있다‘ 신문 편집국장 브라지야크, ’신시대‘ 신문 사장 장 뤼세르, ’라디오 파리‘ 방송 사장 장 파키 등 주요 언론인들이 포함되어 있음은 시사하는 바 크다.



우리의 경우 처음부터 친일 신문을 표방한 신문은 물론 민족지를 표방하고 출범한 신문들도 3.1 운동이 계기가 되어 시행된 일제의 기만적 문화정치의 산물이라는 원천적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조선과 동아 두 신문은 일왕 히로히토를 저격한 이봉창을 불경(不敬) 사건의 범인으로 몰아붙이는 데에서, 중일 전쟁을 일으킨 일본군을 아군 또는 황군(皇軍), 아방(我邦) 등으로 부르는 데에서, 일왕 히로히토의 생일인 천장절을 맞아 낯 뜨거운 용비어천가를 바치는 데에서 별 차별성을 보이지 않았다.



미군정은 좌파 언론을 탄압하고 언론 정책 전반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등 폭압적이었고 이승만 정권은 진보적인 민주주의를 표방하면서 정권을 비판하던 신문들을 가혹하게 탄압했다.(71 페이지) 박정희 정권이 특히 강조한 것은 사이비 언론인들의 부패와 타락이었다.(133 페이지) 박정희 정권은 채찍과 함께 언론사 경영진이 거부하기에는 너무 유혹적인 당근을 함께 제시, 활용했다. 특별히 언급하고 싶은 신문사는 파란만장한 행보를 보인 경향신문이다.



지금은 한겨레신문과 함께 대표적인 진보 신문으로 꼽히는 경향신문은 처음에는 중도 노선을 표방했었다. 이승만 정권의 탄압을 받아 폐간당했다가 4월 혁명 덕에 복간된 경향신문은 5.16 쿠데타를 기성정치인의 구태의연한 사고방식과 부패, 무능, 파쟁의 소치로 보며“드디어 올 것이 왔다는 감을 짙게 한다.“(130 페이지)는 사설을 실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1964년 5월 허기진 군상 등의 시리즈를 통해 도시 영세민들의 비참한 삶과 정경유착 실태 등을 대대적으로 보도해 박정희의 격분을 사 강제 매각당하는 수모도 겪었다.



우리 언론사에서 가장 치욕스런 오점은 다수의 신문, 방송이 5월 광주를 난도질한 것이다. 그 난도질은 5월 광주를 피로 물들인 전두환에 대한 찬가로 이어졌다. 저자가 말했듯 현대판 용비어천가에 관한 한 1980년부터 시작된 전두환 찬가에 필적할 사례는 없을 것이다.(275 페이지) "육사(육군사관학교)의 혼이 키워낸 신념과 의지의 행동 - 인간 전두환, 그가 육사를 지망한 것은 적의 군화에 짓밟힌 나라를 구하는 길은 내 한 몸 나라에 던져 총칼을 들고 싸우는 길 밖에 없었다는 일념 때문이었다.", "민권의 생활적 실현의 선도자로서 전두환 대통령을 우리는 날마다 목도하고 있다.", "편견없는 성품은 항상 약자편이며 서릿발 같은 판단력 뒤에는 훈훈한 인정을 느낄 수 있는 서민풍이 숨어 있다."



굳이 신문사를 가려 말할 필요가 없는 것은 당시 우리 언론이 편파와 왜곡, 살아남기 위한 적극적 처세를 보인 데 있어서 별 차이가 없었기 때문이다. 당시의 관건은 사실성에 대한 천착이 아니라 작문 실력에 있었던 듯하다. KBS와 MBC 등 방송도 전두환 찬양에 뒤지지 않았고 야당 지도자와 청년 학생들을 좌경 용공으로 매도하는 데 열심이었다.(303 페이지) 그래도 다행인 것은 1987년 6월 항쟁 이후 진보언론이 태어났고 언론사 노동조합이 조직된 것이다. 반면 조선, 중앙, 동아 등을 심판대에 세운 (여소야대의 산물인) 5공 청문회는 가장 극적인 반전이다.



저자는 "일제 식민지 시대부터 권력과 결탁하여 민족을 억누르고 착취한 사이비 민족 언론이 오늘에도 대를 물려 민중을 속이고 있음을 온 국민에게 알리라는 한겨레신문사와 내가 속한 단체(자유실천운동)의 명령을 받고 거기(청문회)에 (증인으로) 나갔다."는 말을 했다.(331 페이지) 정권에 따라 조작의 대상 또는 길들임의 대상이 되었던 언론은 김대중 정권의 세무조사를 받고서는 (특별히 보수 언론사에 해당하는 이야기이지만) 총공세로 맞서기도 했다. 노무현은 보수 언론의 사상 공세와 악의적 편파 보도에 시달렸다.



미국 뉴욕타임스가 내는 인터내셔널 헤럴드 트리뷴이 2007년 6월 7일자로 내보낸 "한국은 이제 어떠한 제약도 없는, 아시아에서 가장 민주화된 국가들 가운데 하나로, 한국신문사의 사설들은 일상적으로 대통령을 정신병자로 칭한다."(458 페이지)는 글은 당시 노무현이 받은 부당한 억압과 공격을 잘 보여준다. 인상적인 것은 언론이 자기들 마음에 안드는 사람을 부당하게 짓밟는다는 유시민의 말이다.(449 페이지) 이성의 단계에 접어들지 못하고 옳고 그르고가 아니라 좋고 싫고의 원초적 감정으로 세상을 보고 설득력 절대 미달의 막무가내의 적대감으로 특정인을 집요하게 공격하는 언론의 행태는 하이에나를 무색하게 한다.



언론시장주의와 미디어 악법을 앞세운 이명박 정권은 언론을 장악하는 데 많은 노력을 쏟았다. 이명박은 민의를 왜곡하고 자신의 의사를 관철시키는 데 적극적이었던 언론과 밀월관계를 유지했다. 하지만 그는 퇴임 후 표변한 감사원의 4대강 사업 결론에 직면해야 했다. 인생무상 이상의 의미를 읽을 만한 대목이다. 이제 언론은 정부 권력으로부터 검열받고 탄압받는 데서 벗어나 적극적으로 권력을 감시하는 세력 또는 그 자체 권력이 되었다. 그런 현상을 표현하는 데 적당한 말은 격세지감이란 말 말고 달리 없을 듯하다.



김종철 기자의 ’폭력의 자유‘는 우리의 언론사(言論史)가 친일(親日)을 넘어 부일(附日) 또는 익찬(翼贊)이라 할 만한 행동, 상업주의, 권력과의 밀착, 작문(作文) 수준의 추태, 왜곡, 불리한 상황에서의 적극적 침묵, 표변 등으로 얼룩졌다는 사실을 알게 한다. 언론과 권력의 관계는 언론과의 전쟁 선포를 불사할 때가 왔다(447 페이지)고 한 해양수산부장관 시절의 노무현의 발언을 통해 극적으로 드러난다. 노무현의 말은 거칠지만 핵심을 찌르는 면이 있다. ’폭력의 자유’룰 통해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은 진보를 자처하는 신문사들이 노무현에 대해 편파적이고 왜곡을 일삼는 보수 언론과 별 차이 없는 논지를 보이기도 했다는 사실이다. 눈쌀이 찌푸려지는 안타까운 현실이지만 반성과 함께 발전의 계기로 삼아야 할 대목이다.



언론에 대해, 그리고 더 나아가 유권자들에 대해 하고 싶은 말이 있다. 민주주의하에서 한 표는 소중하고 신성한 권리라고 한다. 하지만 마음에 드느냐 아니냐의 기준으로 새상을 보고 작문(作文)을 하거나 살기 위해 과거를 손바닥 뒤집듯 표변하는 언론, "수많은 치명적 약점"( 이진경 지음 '뻔뻔한 시대, 한 줌의 정치' 147, 148 페이지)은 애써 못본 척 하고 경제 살리기에 현혹되어 표를 던지고 초원복국집 사건(373 페이지)에서 보듯 "우리가 남이가"라는 선동적 호소에 흔들려 투표 대상자를 바꾸는(54.5 퍼센트에서 56.3 퍼센트로, 35.7 퍼센트에서 41.3 퍼센트로) 유권자들을 보면 선대인이 말한 프리라이더란 말이 생각난다.



이 말은 세금을 내지 않는 무임승차자들을 의미하지만 전기한 언론과 우권자들에게도 적용된다. 투표에서 한 표가 소중하고 신성한 것은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판단에 의거해 신중하게 투표하는 사람들로 인해 또는 그런 전제하에 나온 말일 뿐 결코 마음에 치우쳐 마르쿠제식으로 1차원적으로 붓을 휘두르거나 도덕성은 무시하고 경제만을 보는 유권자들에게는 해당하지 않는다.(마음에 치우치고 왜곡하고 조작하고 작문하는 언론이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한 표를 행사할 확률은 제로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민주주의에서 선거는 소중하고 신성한 한 표를 행사하는 것이라는 일반론은 앞서 말한 이성적 판단에 의거해 미래를 내다보고 신중하게 투표하는 사람들로 인해 나온 말이니 그렇지 않은 언론과 유권자들은 무임승차자들일 뿐이다. 이것이 내가 하고 싶은 말이다.

이달의 사락 m******1 2013.09.04. 신고 공감 1 댓글 0
리뷰 총점 종이책
대한민국 언론은 왜 '폭력'의 대명사가 되었나!
"대한민국 언론은 왜 '폭력'의 대명사가 되었나!" 내용보기
이 책, 제목부터 명확하게 의도를 밝힌다. 그렇다. 언론을 다뤘지만, ‘언론의 자유’가 아니다. 폭력의 자유다! 언론이 아닌 왜 폭력으로 제목을 잡았는지, 잡았어야 했는지, 책은 여실하게 보여준다. 그것, 한편으로 오욕이다. 명예를 더럽히고 욕되게 함. 근대화를 자주적으로 이끌지 못한, 일제강점기가 36년이나 지속된 것에는 언론도 한몫했다. 아니, 언론의 역할이 아주 컸다. 그
"대한민국 언론은 왜 '폭력'의 대명사가 되었나!" 내용보기


이 책, 제목부터 명확하게 의도를 밝힌다. 그렇다. 언론을 다뤘지만, ‘언론의 자유’가 아니다. 폭력의 자유다! 언론이 아닌 왜 폭력으로 제목을 잡았는지, 잡았어야 했는지, 책은 여실하게 보여준다. 그것, 한편으로 오욕이다. 명예를 더럽히고 욕되게 함. 근대화를 자주적으로 이끌지 못한, 일제강점기가 36년이나 지속된 것에는 언론도 한몫했다. 아니, 언론의 역할이 아주 컸다. 그것은 지금까지도 우리의 발목을 잡는 한 요소인지도 모르겠다. 민주주의가 망가지고, 양극화사회 혹은 격차사회로 진행된 것에 언론은 지대한 역할을 했다. 


언론이 사회의 ‘공기’라거나 ‘목탁’이라는 말, 당연해야 할 말이다. 그러나 이 책을 보자니, 언론은 사회의 ‘폭력’이다. 권력(지배세력)에 빌붙어 주구 노릇을 하는데, 이게 전형적인 용역깡패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 그리고 용역깡패 짓거리를 하면서 욕심이 생긴 거다. 명령 받아 움직이는 것도 신물이 난 것일까. 권력을 조정하는 권력 그 자체가 됐다. 정치권력의 비위를 맞추거나 주구로 존재하면서 특혜를 누리는 데서 그치지 않고 스스로 권력이 된 경우다. 조중동으로 대표되는 언론 아닌 찌라시 깡패들이 그것을 대변한다. 


세상은 본디 폭력과 이권에 의해 움직인다고 생각하는 내게, 하긴 언론이라고 다를까마는 문제는 그들이 반성도 성찰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언론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언론이 맞는가. 좋은 언론이란 무엇일까. 그들은 질문하지 않는다. 매일 바삐 기사를 쓴다는 명목으로 정당화할 뿐. 스스로에 대한 감시나 성찰은 없다. 그렇다고 그들을 견제하고 감시하는 주체가 있는 것도 아니다. 권력으로 육화한 언론은 무소불위의 존재가 됐다. 독자들이 감시하고 견제하지 않느냐고? 에이, 농담하지 말자. 독자의 신뢰가 가장 중요하다고, 독자의 신뢰를 잃으면 끝이라고 말하지만, 입 발린 소리요, 아주 늦게나 씨가 먹힐 소리다. 진짜 그렇다면 조중동은 이미 망하고도 남을 역사 속에서만 존재하는 신문이었어야지. 


책에 의하면, 권력과 언론, 불가근불가원이었어야 할 존재들이 밀착했던 역사는 일제강점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일제강점기 직전 생겨났던 언론은 자유롭고 독립적인 언론의 길을 확립하기 전에 권력에 굴종하는 법부터 배웠다. 동아일보가 자랑스럽게 내세우는 역사가 있다. 일장기 말소 사진. 손기정 선수가 베를린올림픽에서 우승했을 때, 그의 옷에 걸린 일장기를 지운 사건인데, 김종철 저자는 이것의 속살을 알려준다. 이것은 동아일보가 의도한 것도 아니요, 처음 했던 것도 아니었다. 한 편집기자의 의해 돌발적으로 발생한 것이었는데, 동아일보는 이 기자를 파면했고, 당국에 백배사죄했다. 비굴했던 오욕의 역사인데도, 동아일보는 그것을 지운 채 현상만 놓고 자가발전하고 있다. 쪽 팔리지도 않은가? 


“동아일보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자기 신문이 일제강점기에 식민지배자들에게 강력히 저항한 대표적 사건으로 ‘일장기 말소’를 내세웠다. 조선중앙일보가 훨씬 먼저 거사를 실행에 옮겼다는 사실은 물론 밝히지 않았다. 그리고 사주 김성수와 사장 송진우가 총독부의 압력에 굴복해서, ‘일장기 말소’를 주동한 젊은 언론인들을 강제 해직한 것은 덮어둔 채 동아일보사가 주도한 ‘역사적 사건’이라고 자랑했다.”(p.34) 


문제는 뻔뻔함이다. 일제강점기부터 해방 이후의 독재정권들에 이르러 권력 지향적 야합을 일삼던 언론의 DNA에는 분명 뻔뻔함이 자리 잡고 있음이 분명하다. 현장성 넘치는 저자의 이야기에선 그것이 잘 드러난다. 그래서 아프다. 권력에 대한 부역을 일삼은 언론인에 대한 청산을 제대로 못한 역사 때문이다. 반민특위의 해체는 이 사회 전체를 지금에까지 왜곡에 이르게 한 가장 큰 역사적 사건일 텐데, 언론계라고 다르지 않다. 저자도 그 지점을 아쉽게 토로한다. 혹은 비통하게. 


“반민특위의 강제 해체는 결국 부일 혹은 친일 세력의 영속적인 세습을 불러왔다. 조중동 같은 족벌언론에서는 지금도 친일파의 후손들이 경영권과 인사권을 장악한 채 입맛에 맞는 정권과 결탁해서 온갖 특혜를 누리고, 권력을 휘두르고 있다.” 


저자는 다른 책을 인용해 프랑스의 경우를 드는데, 우리의 역사가 왜 여전히 왜곡을 일삼고 권력의 입맛에 맞춰 흔들리는지를 충분히 알 수 있다. 성찰과 반성을 못하는 사람, 조직에겐 청산이라도 필요했던 것인데, 우리의 역사는 그것조차 하지 못했다. 


“드골의 나치 협력자 대숙청은 단순히 민족정기를 바로 세운다는 도덕적 차원의 해석보다는 ‘반역의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 후세에 중대한 교훈을 남겨준 사실에서도 큰 의미를 찾는다. “과거를 망각하는 민족은 자유를 향유할 자격이 없다”는 역사의 교훈을 드골의 나치 협력자 숙청은 잘 반영하고 있다.” 《프랑스의 나치협력자 청산》(주섭일, 사회와연대)


물론, 일부 언론인들의 바람직하고 당연한 저항이 있었다. 박정희 정권 시절, 언론자유수호를 위한 결의문을 발표하거나, ‘언론의 정도를 지키지 못한 것’을 반성하는 뜻으로 사표를 냈으며, 제작에 불참했다. 정보기관에 연행돼 모진 고문을 당할 것이 뻔한 데도 자유언론실천의 깃발을 들고 ‘기관원’의 언론사 출입을 정면으로 거부하기도 했다. 결기가 있었고, 정신이 있었으며, 실천할 줄 아는 행동력이 있었다. 박정희 정권 때도, 전두환․노태우 정권 때도 언론에는 그런 낭만이 있었다. 패할 것을 알면서도, 산산이 부서질 것을 알면서도 그래야만 했던 비장미 섞인 낭만.


그러나 지금은 어떤가. 변곡점은 IMF 직후가 아니었을까 조심스레 판단해보는데, 이제 기자는 기자가 아니다. 그냥 회사의 직원이자, 더 심하게 말하면 노예다. 세상에 대한 단독자였던 기자는 이제 한갓 회사 입장을 대변하는 타이피스트로 전락했다. 한 기자 친구가 내게 토로했었던 말이 생생하다. “말만 기자지, 왜 이렇게 비루한 걸까.” 비루한 기자. 이 어울리지 않는, 형용 모순이 지금의 기자를 대변하는 말일지도 모르겠다. 저자가 1970년대 겪은 바와 크게 다르지 않은 근무환경일지도 모르겠는데, 그래도 그때는 기자들에게 단독자 정신, 기자 정신이 살아있었지만, 지금 대부분 기자들, 모르긴 몰라도 ‘먹고사니즘’의 노예다. 


“근무조건이 제일 낫다는 동아일보사 기자들이 가장 불만을 품고 있던 것은 사주와 경영진이 사원들을 ‘마름’이나 가속(家屬)처럼 다룬다는 사실이었다. 근로기준법에 규정된 사용자와 노동자가 아니라 봉건적인 상하관계가 불문율처럼 되어 있었다.”(pp.190~191)


이제 언론은 정치권력보다 자본의 노예다. 독립 언론을 선언한 몇몇 언론은 늘 자금압박에 시달린다. 독자들의 호응도 예전 같지 않다. 언론 전체의 신뢰가 떨어진 까닭일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다름없는 것이 있다면, 저자의 말마따나 자유롭고 독립된 언론의 길을 가는 사람에겐 박해와 탄압이 가해진다는 것. 참으로 슬픈 일이다. 비통한 일이다. 


《폭력의 자유》는 현대 언론의 역사와 권력의 역사를 일제강점기부터 이명박 정권까지 짚어보는 여정이다. 한때 언론인이었으나 재능과 능력도 딸리는데다, 자본과 권력에 예속돼 움직여야 하는 현실에 더 이상 자신을 끼워 맞추기 싫었던 나는 새삼 이 책을 읽고서 저자의 말에 절실하게 공감했다. “언론은 권력의 도구가 되어서는 안 되며, 언론 자체가 권력이 되어서도 안 된다.”(p.595) 



며칠 전 책을 덮은 뒤, 정독도서관에 갈 일이 있었는데, ‘동아일보 창간사옥 터’라는 표지가 있었다. 정독도서관 앞이 동아일보 창간사옥 터라는 것을 처음 알았는데, 그만 침을 뱉었다. 누군들 이 책을 읽고 그러지 않을까. 그럼 어떻게 그들로 하여금 제대로 언론의 길을 걷게 만들 수 있을까. 동아일보가 부당한 광고탄압을 받던 시절, 저자가 겪은 한 에피소드가 그것의 한 가지 답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격려 광고를 내려는 시민들의 소리를 기사화하기 위해 일요일에 회사에 나간 저자. 어느 날 저녁, 허름한 차림의 중년 남자가 머뭇거리며 사무실을 찾아왔다. 천 원짜리 두 장을 꺼내며 독재정권과 싸우는 데 조금이라도 보탬이 됐으면 좋겠다고 그에게 말했다. 무작정 서울에 상경해 하루 종일 시내를 걸어 다니며 행상을 하는 사람이었다. 저자는 가슴이 막혀 아무 말도 못하고 눈물을 떨어뜨리며 생각했다고 했다. 그리고 생각했다. ‘저렇게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은 언제 올까?’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 단언컨대, 그것은 영원히 오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언론은 그것을 위해 복무해야 한다. 그리고 질문하고 문제제기 해야 한다.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을 저렇게 죽음의 길로 내모는 나라와 권력은 도대체 무엇일까? 그런 이웃에게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하는 언론은 또 무엇인가? 돌아보고 성찰하며 되짚어 봐야 한다. 


1967년 동아일보에 입사한 저자의 삶을 바꾼 것은 한 권의 책이라고 했다. 《친일문학론》(임종국, 평화출판사, 1966). 그에게 가장 큰 충격은 동아일보 사주이자 ‘민족운동 지도자’로 알고 있던 인촌 김성수의 적극적인 친일행각이었다. 위인으로만 알고 있던 자신의 직장 사주가 친일을 넘어 부일을 했다는 사실이 그를 황망하게 만들었고, 그는 진짜 언론인을 고민하며 이후 자신의 삶을 거기에 맞춰 살아온 것 같다. 이 책도 어느 누군가의 삶을 바꿀지도 모르겠다. 진짜 언론인을 고민하는 사람이나, 고민하지 않았으나 고민하게 된 사람이나. 


언론의 악행의 평전과도 같은 이 책을 보면서, 지금 찌라시 깡패들의 소멸을 생각해 봤다. 이들이 없어지면 시민들이 좋아할까? 어쩌면! 그때 그 시절처럼 말이다. “동아일보와 조선일보가 폐간되자 1940년 8월 12일부터 1945년 8월 15일까지 ‘민족지’가 없는 언론의 암흑시대가 계속되었지만, 두 신문이 부르짖던 ‘언론 보국’과 ‘천황 폐하 만세’를 더 이상 듣지 않게 된 것을 오히려 다행으로 여긴 조선인들이 많았을 것이다.”(p.40) 


아, 조중동이 문을 닫아도 분명히 새로운 포스트 조중동이 나타날 것이라는 것, 나도 안다. 그땐 그때 가서 또 생각해 보자. 폭력(과 이권)은 세상을 움직이는 근간이니까. 새로운 폭력은 당연히 나온다. 독재정권(전두환)에 부역했었던 지울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을 지닌 김훈의 말이 맞다.


* 출판사로부터 책을 받아 썼으나, 그에 상관없이 내 감상만을 적었다. 

 



j******2 2013.09.29. 신고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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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로언론인의 정치와 신문예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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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4년생 이니까 인제 칠순을 넘기셨다. 동아일보 해직기자.  1970년 입사해서 75년까지 5년,짦은 기간동안 서슬퍼런 박정희 정권시절의 언론길들이기를 현장에서 지켜봤다.   막내시절  조금 눈이 뜰 무렵, 선배들과 멋도 모르고 정권비방때문에 해직된 뒤, 사람하는 동아일보에 못 돌아가고 8년간 재야, 민통련,반정부활동에 몸을 담았다.   그후 88년인가 해직기자 복직을 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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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4년생 이니까 인제 칠순을 넘기셨다.

동아일보 해직기자.  1970년 입사해서 75년까지 5년,짦은 기간동안 서슬퍼런 박정희 정권시절의 언론길들이기를 현장에서 지켜봤다.

 

막내시절  조금 눈이 뜰 무렵, 선배들과 멋도 모르고 정권비방때문에 해직된 뒤,

사람하는 동아일보에 못 돌아가고 8년간 재야, 민통련,반정부활동에 몸을 담았다.

 

그후 88년인가 해직기자 복직을 김상만회장에게 요구하고 사표를 던졌던 송건호주간을

중심으로 한겨레 신문이 수많은 주주들에 의해 창간되고, 중고윤전기와 시설을 50억에 사면서

한겨레에 몸 담는 다..

 

예기는 일제시대 부터 이명박대통령시절까지 정치와 언론 아니, 주로 신문사의 저항과  굴복등을

정치사의 흐름과 같이 설명해 준다.

친일신문으로 1920년 조선일보가 , 글구 동아일보가 창간된다.

45년 해방기까지는 신문사들의 친일행보에 관한 예기가 소개되고, 가장 극심한 대립이

있었던  박정희의 장기 집권과   유신,  직선이 아닌 통일주체국민회의에 의한 대통령선출,

처음 전두환도 써 먹었던, 그 유신에 대한 신문사기자들과 재야세력, 정치인들에 대한 눈물겨운 저항 예기가 쏟아진다.

 

그 와중에, 부귀영화에 영혼을 팔아 먹은 시커먼 빈티나는 이진희, 글구  노무현추종자 정현주,

조선일보 외신부차장출신, 전두환의 충복 허문도등   이단아기자들도 고발하고 울분을 삼킨다.

 

전두환과 노태우,김영삼,김대중 정부까지의 정치의 흐름과 이에 저항하고 고민하는

기자들의 모습과  사주들의 청문회모습을 적나라하게 그려낸다.

 

출판사에서 도와줬겠지만, 깔끔한 편집, 일기 쉬운 글자체, 방대한 사실자료와 수많은

신문의 사설들이 알차게 들어 차 잇다.

이제 인생을 마감하려는 그 분의 마지막 작업.

아직도 기자, 동아일보기자에 대한 미련과  회환, 아쉬움이 묻어 난다....

YES마니아 : 로얄 d******3 2013.08.27. 신고 공감 0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