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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초엽의 첫 소설집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은 페미니즘의 ‘ㅍ’(혹은 F)도 꺼내지 않지만, 이 소설집을 다 읽고 가장 먼저 느낀 소감은 ‘김초엽은 페미니즘을 지향한다.’는 것이었다. 페미니즘을 전면에 내세우진 않았지만 여성서사로 꽉 채워진 소설들을 보며, 이 책이 독자들에게 전폭적인 지지와 사랑을 받은 건 ‘SF’여서기보다는 소설 속에 내재된 페미니즘적 메시지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엔 총 일곱 편의 소설이 실려 있는데, 특이하게도 일곱 편의 소설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들은 모두 여성이다. 더욱이 그들 중 대부분은 과학자이다. 통상적으로 남성의 영역이라 생각되는 과학 분야에 종사하는 여성들을 전면에 배치시키면서, 김초엽은 과학기술과 인간에 대한 이야기로부터 인류 보편의 이야기로까지 서사의 영역을 확장시킨다.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에는 뛰어난 과학자 릴리 다우드나가 등장하는데, 이민자에 장애까지 있던 그녀가 완벽한 유전자를 조합했던 이유는 자신이 경험했던 장애나 차별, 혐오가 없는 세상을 바랐기 때문이다.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의 주인공 역시 여성 과학자다. 그녀는 딥프리징 기술을 연구하는 과학자였는데, 안티프리저를 개발하기 위해 가족들과 떨어져 홀로 지구에 남는다. 이 기술은 우주 개척의 다음 단계를 위해서도 의료계를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했기에, 인류의 미래에 기여한다는 마음으로 그녀는 연구에 매진한다. 「나의 우주 영웅에 관하여」의 '재경 이모' 역시 인류 최초의 터널 우주 비행사로 선발된 과학자다. 김초엽의 이러한 전략은 매우 영리해보인다. 페미니즘을 전면에 내세웠을 때 쉽게 받게 될 비평들을 피해가면서 본인이 의도하는 메시지를 정확하게 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페미니즘’을 부각시키지 않음으로써 김초엽은, 독자들이 손가락이 아니라 손가락이 가리키는 달을 보게 하는 데 성공했다. 개인적으로는 이것이 이 소설집이 가진 장점이자 최대의 성과라고 생각한다.
<월간 채널예스> 12월호 커버스토리에는 김초엽의 인터뷰가 실려 있다. 여기서 김초엽은 SF소설 중 한 작품을 추천해달라는 인터뷰어의 요청에 한 작품을 추천하기는 정말 어렵다면서, 작가를 추천한다면 어슐러 K. 르 귄의 작품이라고 답변한다. 나는 이것이 김초엽과 김초엽의 글쓰기를 이해하는 단초라고 생각했다. 즉, 김초엽은 어슐러 르 귄을 통해서 자신의 작품관에 대한 어떤 힌트를 준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SF와 판타지 소설의 대표적인 (여성) 작가라고 할 수 있는 어슐러 르 귄 역시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라고 지칭하거나 자신의 소설이나 자신의 소설에 대해 페미니즘을 직접적으로 거론하거나 언급한 적은 없지만, 누가 뭐래도 SF와 페미니즘을 접목한 선구자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가령, 르 귄의 대표작 중 하나인 『어둠의 왼손』 은 ‘게센 행성’을 배경으로 하는데, 이 행성에서는 성별의 구분이 없다. 다만 한 달에 한 번 무작위로 여성과 남성으로 바뀌는 때가 있을 뿐이다. 이런 설정은 남성과 여성이라는 이분법을 당연시하는 사회에 묵직한 질문을 던진다. 성역할과 관련된 많은 것들이 사실은 관습적인 고정관념들이라는 것을 은연중에 드러내는 것이다. 사실 이것이 SF가 가지는 미덕인데, SF가 이곳 아닌 다른 사회를 상상하게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페미니즘 역시 그러하다. 이러한 측면에서 페미니즘은 SF와 상당히 친화력이 있다.
페미니즘은 사회의 소외된 약자들을 품는다. 기실 역사 이래 지속되어온 남성 중심 사회에서 오랜 시간 약자였던 여성이 사회적 약자와 소외계층에 대해 관심을 갖는 건 자연스럽다. 르 귄 역시 젠더 문제뿐 아니라 인종 문제에까지 두루 관심을 가졌다. 앞에서 언급한 『어둠의 왼손』의 주인공은 흑인인데, 이 소설이 출간된 게 1969년이라는 걸 감안하면, 이 소설이 당시의 백인 중심 사회에 끼친 파장이 얼마나 컸을지 짐작할 수 있다.
어슐러 르 귄이 SF와 페미니즘을 결합하고, 성별과 인종의 장벽을 뛰어넘었던 것처럼 김초엽 역시 SF라는 도구를 통해 시대와 인간을 조명한다. 소설들의 배경은 가깝거나 먼 미래지만, 이 소설들을 통해 우리가 경험하고 사유하는 것은 지금, 현재, 우리가 사는 이 곳이다. 따지고 보면 미래를 통해 현재를 들여다보는 것이 SF라는 장르의 속성이기도 하다.
주목할 것은 김초엽의 ‘여성 과학자’들은 모두 실패를 경험하는데, 그 실패가 결코 끝은 아니라는 점이다. 앞에서 언급한 <채널예스>와의 인터뷰를 다시 한 번 살펴보자. 인터뷰어가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에서 가족이 있는 행성을 향해 수만 광년을 가로지르는 안나는 실패가 예정되어 있어요. 하지만 출발한 채로 여지를 남겨놓죠.”라고 말하자, 김초엽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저는 주로 그 가능성의 목격자를 쓰거나, 아니면 미래 세대에서 답을 찾는 것 같아요. 앞선 세대의 실패가 실패로 끝나지 않고, 다음 세대의 가능성이 될 수 있는 것들에 주목해요.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에 지켜보는 사람이 있잖아요. 지켜보는 사람의 변화를 끌어내는 것이 실패의 역할이 아닐까 생각했어요. 「나의 우주 영웅에 관하여」에서는 미래 세대에 대한 가능성이 제일 크게 보였던 것 같아요.”
나는 여기서 실패와 오류를 인정하면서 앞으로 나아가는 페미니즘의 가능성을 보았다.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의 릴리 다우드나는 분명 실패한 과학자다. 그의 기술은 오히려계급간의 차이를 견고히 함으로써, 이후의 세계는 ‘악몽’이 되었다. 그녀가 다른 행성에 새로운 마을을 만들기로 결심한 것은 자신의 실패를 인정했기 때문이다. (물론 ‘완벽한 유토피아’로 보이는 그 세계의 아이들 중 일부는 실패한 지구에서의 삶을 ‘선택’하는데, 김초엽의 인터뷰를 기초로 판단하자면 이조차 실패를 통해 다음 세대에 가능성을 열어준 것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의 주인공 안나는 과학자로서는 원하는 것을 성취했을지 모르지만 그로 인해 가족을 모두 잃었다는 측면에서 실패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소설의 말미에서 그녀는 불가능인 줄 알면서도 가족이 있는 곳으로 떠나는 ‘선택’을 한다.
「나의 우주 영웅에 관하여」는 다음 세대(자녀 세대)의 관점에서 이전 세대(부모 세대)의 실패를 들여다보고 해석하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을텐데, 우주인이 된 가윤은 '재경 이모'가 무엇을 선택했느냐 여부와 상관없이 그녀는 자신의 영웅이라고 말한다. 사람들은 재경의 도전이 인류에게는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재경이 터널 너머에서 우주 저편을 최초로 마주할 때 이쪽 세계의 사람들에게는 어떤 영향을 줄 것인지, 그런 거시적인 관점의 답을 기대했(p.282)고, 이를 기준으로 하자면 재경의 선택은 실패이자 인류 전체에 대한 배신이라고도 할 수 있지만, 가윤은 “이모에게는 우주에 가지 않는 것이 해방인 게 아니었을까?”(p.307)라고 말할 정도로 성숙한 사고를 한다.
나는 이것이 페미니즘이 나아갈 바라고 생각한다. 페미니즘의 비판자들이 조목조목 지적하는 페미니즘의 문제점이나 한계들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으로 페미니즘이 실패했다고 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페미니즘은 실패와 오류를 인정하면서 앞으로 나아갈 것이며, 그 가운데 소수자와 사회적 약자들과 연대하며 인간에 대한 이해의 폭을 점점 더 확장시킬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누군가를 이해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관내분실」에서는 ‘마인드’를 통해 죽은 사람의 삶을 선명하게 이해하게 되고, 「공생가설」에서는 동물과 사람의 언어를 이해하는 프로젝트가 시행되기도 하는데, 의사소통이 불가능한 동물이나 어린아이를 이해하는 것만큼이나 의사 소통이 가능하고 심지어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인간들 사이에서도 서로를 이해한다는 것은 어렵다. 심지어 부모자식 간에도 말이다. 이때 가장 쉽게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단념하고 포기하는 것이지만, 이해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할 수도 있다. 이러한 시도들이 인간 사이의 견고한 장벽을 허문다.
「공생가설」에서는 사람의 아이를 양육하는 외계인들이 등장한다. 성장하면서 모두 그들을 잊었을때 유일하게 그들을 기억한 사람이 류드밀라였다. 「스펙트럼」에서는 다섯 개의 위성이 뜨는 행성에 홀로 남겨져 외계인과 조우한 과학자 희진이 등장하는데, 희진은 결국 루이의 언어를 어렴풋이나마 이해하게 된다. 외계인과 사람 사이도 그렇다면, 인간 사이에도 이해라는 것이 가능하지 않을까? 노력만 한다면. 「관내분실」에서 엄마의 마인드를 만난 지민이 그랬듯이 말이다. “무슨 말을 하더라도, 그게 진짜로 엄마의 지난 삶을 위로할 수 있는 건 아니겠지만…… 이제…… 엄마를 이해해요.” (p.271)
이해를 통한 관계의 확장, 관계의 확장을 통해 더 많이 이해하게 되는 것, 이것이야말로 페미니즘이 지향해야 할 바라면, 김초엽의 소설들은 인종과 계급, 세대의 차이를 극복하는 페미니즘이 나아갈 바를 명확하게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매우 유의미하고 가치있다고 할 수 있겠다. 르 귄의 계보를 잇는 그의 소설 세계가 더욱 확장되길 바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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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움과 슬픔은 동격이다. 김초엽의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을 읽고 나는 이런 문장으로 글을 쓰고 싶었다. 왜냐하면 이 소설집에 나오는 단편은 하나같이 아름답고 슬프기 때문이다. 아름다운데 왜 슬프냐고 묻는다면 당신도 이 소설을 읽어보면 알 거라 답하겠다. 미래의 삶을 상상한 SF 소설에 대한 나의 편견은 김초엽의 소설로 인해 전부 사라졌다. 한때 내게 과학 장르 소설은 이해하기 힘든 이야기였다. 상상할 수 없는 세계였다고 할까. 현재의 일상을 살아가는 이야기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여겼다. 김초엽이 안내하는 소설은 분명 현재가 아닌 가깝거나 먼 미래가 있다. 그런데 소설을 읽다 보면 이질감이 들지 않는다. 가상의 공간과 가상의 도시에서 살아가는 그들을 알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지구가 아닌 다른 행성이 존재한다. 그곳을 탐험하고 거주한다. 새로운 생명체를 만나고 관계를 맺는다. 우리가 기존에 영화나 소설로 만난 이야기와 다른 건 없다. 하지만 뭔가 특별하다. 불편이라고는 존재하지 않는 평화로운 마을에서 열여덟 살이 되면 이동선을 타고 순례의 길을 떠난 이들이 돌아오지 않는 이유가 궁금한 데이지가 지구에 대해 들려주는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속 지구는 현재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 모든 게 완벽하게 태어난 ‘신인류’와 그렇지 못한 ‘비개조인’으로 분류된 사람들, 과학자 릴리의 인공 배아 디자인이 성공하면서도 그렇게 되었다. 릴리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지구 밖에 새로운 마을을 만들었다. 어떤 장애가 있더라도 불행하지 않지 않고 상처를 주지 않는 유전자로 태어난 사람들. 지구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세계. 그런데 왜 순례자 가운데 돌아오지 않는 이들이 생겨났을까?
이제 나는 상상할 수 있어. 지구로 내려간 우리는 그 다른 존재들을 만나고, 많은 이들은 누군가와 사랑에 빠질 거야. 그리고 우리는 곧 알게 되겠지. 바로 그 사랑하는 존재가 맞서는 세계를. 그 세계가 얼마나 많은 고통과 비탄으로 차 있는지를. 사랑하는 이들이 억압받는 진실을. (중략) 그리고 그들이 맞서는 세계를 보겠지. 우리의 원죄. 우리를 너무 사랑했던 릴리가 만든 또 다른 세계. 가장 아름다운 마을과 가장 비참한 시초지의 간극. 그 세계를 바꾸지 않는다면 누군가와 함께 완전한 행복을 찾을 수도 없으리라는 사실을 순레자들은 알게 되겠지.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 52~53쪽)
데이지가 상상하는 장면은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의 오늘과 너무도 똑같다. 어딘가에서 끊임없이 이어지는 고통과 슬픔, 그것을 같이 나누는 연대의 모습. 과학의 발전이 불러올 인류가 소설과 다르다고 자신할 수 있을까. 완벽과 완전만 추구하는 세상에도 존재할 불완전한 삶을 향한 김초엽의 다정한 시선을 감지할 수 있어 좋다.
우주여행자를 위한 정거장을 관리하는 남자와 100년 동안 정거장을 점유하고 있는 안나가 나누는 이야기로 시작하는 표제작「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에서도 느낄 수 있다. 지구가 아닌 다른 행성으로의 이주가 가능한 시대에 과학자인 안나는 지구에 남았고 남편과 아들은 슬렌포니아 행성계로 떠났다. 안나도 연구를 끝내고 가족이 있는 그곳으로 갈 예정이었다. 그러나 지구와 행성 간의 새로운 이동 수단인 웜홀 통로가 발견되면서 이전의 워프 방법을 이용해 운항하는 우주선은 사라졌다. 그 사실을 안나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가족이 존재했던 그곳으로 갈 수밖에 없다. 슬렌포니아 행성계로 향하는 일은 죽음을 의미하는 것일지라도.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조차 없다면, 같은 우주라는 개념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나? 우리가 아무리 우주를 개척하고 인류의 외연을 확장하더라도, 그곳에 매번, 그렇게 남겨진 사람들이 생겨난다면…….”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181쪽)
사회와 국가를 위한 성공, 그들을 위한 소수의 희생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세상을 생각한다. 우리가 그토록 꿈꾸는 우주는 정말 무엇일까 하는 의문과 함께 말이다. 문득, 오늘과 내일이라는 시간으로 사라지는 수많은 어제를 붙잡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진다. 안나 할머니가 느꼈을 그리움과 절망을 나는 짐작조차 할 수 없겠지만.
이처럼 김초엽은 과학적인 이론과 소재를 끌어와 이야기를 만들지만 그 안에는 우리 사회 곳곳에서 만날 수 있는 약자와 소수자에 대한 차별과 소외, 그들이 받는 고통에 대해 주목한다. 비혼모의 48세 동양인이 우주비행사로 선발되는 과정을 다룬 「나의 우주 영웅에 관하여도」과 소설집에서 가장 좋았던 「관내 분실」에서도 겹쳐진다. 죽음을 애도하는 미래의 방식으로 죽은 사람들의 정보를 데이터로 만든 ‘마인드’를 관리하는 도서관이 등장한다. 새로운 형태의 추모공원 같다고 할까. 마인드와 접속하여 죽은 자의 영혼과 만날 수 있는 시스템이다. 소설에서 지민은 엄마를 잃어버렸다. 그러니까 엄마를 인식하는 마인드가 분실된 것이다. 소설은 임신한 지민이 죽은 엄마(은하)의 마인드를 찾는 과정을 보여주면서 여성이 사회와 어떻게 단절되고 고립되는지 섬세하게 보여준다. 산후우울증을 심하게 앓고 딸에게 집착하는 은하를 이해할 수 없었던 지민이 임신을 통해 막연하게 느끼는 어떤 두려움. 그것은 지금 우리 시대의 여성이 경험하고 견디는 현실이다.
“마인드들은 우리가 생전에 맺었던 관계들, 우리가 공유했던 것들, 우리가 다른 사람의 뇌에 남기는 흔적들과 세상에 남기는 흔적들을 자신들의 방식들로 기억한다는 것이죠. 마인드와 자아의 관계에 대한 의문이 영원히 미해결로 남는다고 해도, 우리는 마인드를 통해 그들의 삶을 더 선명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관내 분실」, 257쪽)
나 아닌 타인을 이해한다는 것은 가능할까? 이해한다는 것이 감정을 읽고 공유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낯선 행성에 도착해 외계 지성 생명체를 만나 그들과 지낸「스펙트럼」속 희진은 가능했을 것이다. ‘루이’로 불린 그들이 색채를 의미로 읽는다는 설정은 신선했다. 감정 자체를 조형화한 제품을 구매한다는「감정의 물질」에서는 자신의 감정을 상대가 이해하기를 원하는 인간 본연의 욕구를 생각하게 한다. 가장 가까운 이의 감정도 이해하려 노력하지 않는 인간과 「스펙트럼」속 ‘희진’과 ‘루이’를 비교하게 된다. 인간이 유년 시절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을 미지의 외계 생명체와의 공생으로 풀어낸 「공생 가설」을 통해서도 내밀한 관계를 말하는 듯하다. 타자를 이해하고 공감하고 배려하는 미래, 그것이 우리가 바라는 것이라는 걸 말이다.
현재를 살아가기에도 급급한 나는 우주를 살아가는 미래를 상상한 적이 없다. 그러나 김초엽의 소설을 통해 만난 미래라면 조금 달라진다. 조금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연대하고 공생을 꿈꾸는 사람들의 살아가는 미래, 나도 그 미래의 구성원으로 살아가기를 원한다.
*리뷰어클럽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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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은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 “스펙트럼”, “공생가설”,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감정의 물성”, “관내분실”, “나의 우주 영웅에 관하여”라는 7개의 단편으로 이루어진 소설집이다. 겉보기에는 가까운 미래를 다루는 과학소설, 즉 SF지만, 각각의 단편이 담고 있는 것은 우리의 현실이다. 게다가 하나의 이야기가 담고 있는 담론(談論)이 커서 이 짧은 지면에 7개 모두를 다루는 것은 무리라고 생각한다. 고민 끝에 내가 선택한 이야기는 장애와 비장애, 정상과 비정상,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에 대한 고민을 담은 “순레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였다.
이 이야기는 데이지가 소피에게 보내는 편지로 시작한다. “소피,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야 할까. 이 편지가 네게 도착했을 때는 이미 내가 떠났다는 소문이 퍼진 이후이겠지. 어른들이 많이 화가 났을까. 그동안 나처럼 성년이 되기 전에 마을을 뛰쳐나온 사람은 없었으니까. 괜찮다면 대신 이야기를 전해줄래? 여전히 그분들을 많이 사랑한다고, 하지만 내 결정을 후회하지 않는다고 말야. 너도 내가 왜 이런 선택을 했는지 궁금할 거야. 믿을지 모르겠지만 나는 지금 ‘시초지’로 가고 있어. 맞아. 우리가 순례를 다녀오는 그 장소를 말하는 거야.” [p. 9]
언뜻 보면 명절에 고향을 가는 이가 남기는 편지의 서두처럼 보이는 이 이야기는 천재 과학자 릴리 다우드나(이하 ‘릴리’)로 인해 ‘완벽한’ 유전자의 선택이 가능해져 처음부터 완벽하게 태어난 ‘신인류’와 그렇지 못한 ‘비개조인’이 살고 있는 가까운 미래를 배경으로 한다. 어떻게 보면 익숙한 배경이다. 1997년에 개봉된 영화 <가타카(Gattaca)>에서도 유전자 선택에 의해 태어난 사람들이 사회의 상층부를, 자연의 섭리에 의해 태어난 사람들이 사회의 하층부를 구성한다. 정확하게는 열등인자를 가진 이가 사회의 하층부에 속하는 것이지만.
그렇다면, 유전자 조작을 통해 ‘완벽한 인간’을 만들어 내면 어떨까? 그렇다면 ‘차별 없는 세상’이 만들어질까? ‘신인류’를 만들어낸 생애 초/중반기의 릴리는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다. 이는 훗날 올리브가 스미소니언 자연사박물관에서 발견한, 릴리의 마지막 기록으로도 알 수 있다. “릴리는 오랫동안 자신의 삶을 증오한 것으로 보인다. 릴리에게는 나와 같은 질환, 얼굴에 결코 지워지지 않는 흉측한 얼룩을 남기는 유전병이 있었다. 지구의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릴리를 마음껏 멸시하고 혐오할 수 있는 하나의 낙인이었다. 이민자의 딸, 그리고 흉측한 외모를 가진 음침하고 삐쩍 마른 소녀. 릴리는 생애 초반기에 어느 누구와도 제대로 된 관계를 맺지 못한 듯했다. ~ 중략 ~ 릴리가 하필 인간배아 디자인에 손을 대게 된 계기는 정확히 기록되어 있지 않다. 하지만 그 이유를 짐작할 수는 있다. 릴리는 태어나는 아이에게 아름다움을, 아무런 병도 갖지 않고 오직 뛰어난 특성들로만 구성된 삶을 선물하는 것이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종의 선행이라고 믿었던 것 같다. 결과적으로 릴리의 배아 디자인 연구는 세상을 배제의 층계로 나누었을 뿐” [pp. 44~45]이었다.
릴리의 ‘착한’의도와는 반대로 그녀는 훗날 ‘시초지’라고 불리는 지구를 차별과 배제가 판치는 디스토피아 혹은 지옥으로 만들어버렸다. 이 얼마나 아이러니한 일인가.
그녀의 나이 40대 중반에 그녀는 새로운 계획을 세웠다. 자신의 인간배아 디자인 기술을 이용해 만든 올리브에게 자신과 동일한 흉측한 얼룩이 생길 것임을 확인하고, 올리브를 위해 ‘마을’을 만들기 시작했다. 지구 밖에 조성된 마을은 장애도, 차별도, 혐오도 없는 그리고 사랑도 없는 일종의 ‘유토피아’가 된다. 하지만 ‘마을’도 또 하나의 디스토피아 혹은 미성숙한 세계라고 볼 수 있다. 아마도 그래서 성년이 되면 ‘순례’라는 이름의 성인식을 하는 관습을 만든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장애를 가진 이들을 한 곳에 모아 둔다고 그들이 행복할까? 오히려 그들은 하나의 게토에 갇혀버린 유대인들처럼, 동물원에 갇힌 다양한 동물처럼 사회에서 격리되고 구경거리가 된 것이 아닐까 인간이 사회적 동물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사회에서 격리된 인간은 더 이상 인간이라는 존재라고 할 수 있을까? 아마도 그런 상황 속에 놓이게 되면 머지 않아 미치거나 죽어버릴 것이다.
‘마을’의 순례 관행은 그런 불행을 막기 위한 장치였을 지도 모른다. 그리고 돌아오지 않는 순례자들은 현실의 우리가 어떻게 보면 혐오와 차별, 모순으로 가득 찬 세계에서 왜 그렇게 치열하게 싸우며 살아가는지 보여주는 수단일지도 모른다.
“지구에는 우리와 완전히 다른, 충격적으로 다른 존재들이 수없이 많겠지. 이제 나는 상상할 수 있어. 지구로 내려간 우리는 그 다른 존재들을 만나고, 많은 이들은 누군가와 사랑에 빠질 거야. 그리고 우리는 곧 알게 되겠지. 바로 그 사랑하는 존재가 맞서는 세계를. 그 세계가 얼마나 많은 고통과 비탄으로 차 있는지를. 사랑하는 이들이 억압받는 진실을. ~ 중략 ~ 순례자들은 누구를 사랑했을까. 그들은 아주 다채로운 모습으로 여러 방식의 삶을 살겠지. 하지만 그들이 어떤 모습이건 순례자들은 그들에게서 단 하나의, 사랑할 수 밖에 없는 무언가를 찾아내겠지. 그리고 그들이 맞서는 세계를 보겠지. 우리의 원죄. 우리를 너무 사랑했던 릴리가 만든 또 다른 세계. 가장 아름다운 마을과 가장 비참한 시초지의 간극. 그 세계를 바꾸지 않는다면 누군가와 함께 완전한 행복을 찾을 수도 없으리라는 사실을 순레자들은 알게 되겠지.” [pp. 52~53]
이 소설에 나오는 순례자들은 어쩌면 우리가 눈 돌렸던 수많은 선구자들처럼 끊임없이 고통과 슬픔을 나누며 변화를 지향하고 있을 것이다. 분명 그 길은 가시밭길일 것이다. 하지만 웃으며 걸을 수 있는 가시밭길일 것이다. 데이지의 편지 마지막 부분처럼 “우리는 그곳에서 괴로울 거야. 하지만 그보다 많이 행복할 거야.” [p. 5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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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은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 “스펙트럼”, “공생가설”,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감정의 물성”, “관내분실”, “나의 우주 영웅에 관하여”라는 단편들로 이루어진 소설집이다. 가까운 미래를 다루는 과학소설, 즉 SF의 형식을 빌린 이 7개의 단편은 하나 하나의 이야기가 담고 있는 담론(談論)의 규모가 커서 7개 이야기 각각을 다루는 것은 무리였다. 고민 끝에 내가 선택한 것은 외계 생명체와 인간의 소통을 다룬 “스펙트럼”에 집중하는 것이었다. 여전히 세상은 소통이 부재(不在)하고 있기에.
“스펙트럼”의 화자(話者)인 ‘나’의 할머니인 희진은 스카이랩의 서른세 번째 생물학자로 탐사선에 올랐다가 실종되었다. 훗날 광자 추진체의 결함으로 그 탐사선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는 것이 밝혀졌고, 40년 만에 탐사 참가자 가운데 희진만 간신히 구조되었다. 지구로 귀환한 희진은 실종된 기간 동안, 외계 지성체와 조우(遭遇)했다고 주장했지만, 그 행성의 위치도, 외계인이 실존한다는 증거도 내놓지 않았다. 당연히 그녀의 주장은 불쌍한 노인네의 공상(空想)으로 간주되었다. 희진의 주장에 따르면, 항해 중에 우연히 지구와 매우 유사한 행성을 발견해서, 경로를 바꾸어 접근하다가 무언가 잘못되어 각자 탈출을 시도했다. 희진은 겨우 탈출셔틀에 올라탔지만 정신이 들었을 때는 이미 낯선 행성의 지표면에 떨어져 있었다. 희진은 “이곳이 지구 어딘가의 사막일 수도 있다고 믿고 싶었다. 그러나 밤마다 떠오르는 다섯 개의 위성들은 이곳이 지구가 아님을 증명하듯 빛났다. 기록장치만이 희진에게 익숙한 지구식 시간의 흐름을 알려주었다. 마침내 그들을 만났을 때, 희진은 자신이 환각을 보고 있다고 생각했다. 사람이 있었다. 이족 보행을 하는, 팔다리를 가진 사람들. 누군가 드디어 희진을 구하러 온 걸까. 아니다. 그럴 리가 없었다. 이곳은 낯선 행성이다. ” [pp. 64~65] 그녀가 지적인 외계 생명체인 첫 번째 루이와 만난 순간이었다. 소통을 위해 희진이 노력했지만 극적인 변화는 없었다. 두 번째와 세 번째를 거쳐 네 번째 루이와 함께 있으면서 그녀는 그녀가 ‘무리인’이라고 부르는 지적 생명체의 수명이 3~5년이고, 영혼이 이전 개체에서 다음 개체로 이어지는 방식으로 영생(永生)을 하며, 음성 언어대신 색채 언어를 쓴다는 것 정도를 알 수 있었을 뿐이다. “갑자기 웃음이 나왔다. 마음이 느슨해졌다. 루이가 바로 며칠 전까지 함께 지내던 바로 그 루이처럼 느껴졌다. 루이는 희진을 보고 있었다. 그리고 희진의 뒤로 펼쳐진 노을을 보고 있었다. “그럼 루이, 네게는.” 희진은 루이의 눈에 비친 노을의 붉은 빛을 보았다. “저 풍경이 말을 걸어오는 것처럼 보이겠네.” 희진은 결코 루이가 보는 방식으로 그 풍경을 볼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희진은 루이가 보는 세계를 약간이나마 상상할 수 있었고, 기쁨을 느꼈다.” [p. 88]
이후 무리인들의 천적이 습격해 왔고, 다섯 번째 루이가 무기를 들고 이들을 막는 사이에 희진은 도망치는 대열에 휩쓸려 협곡을 떠났다. 그리고 그녀는 원래의 협곡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고 했다. 그러다가 도착한 또 다른 협곡에서 10년 만에 극적으로 탈출 셔틀의 신호를 수신해서 그 셔틀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리고 탈출 셔틀에 탑재된 구조 신호 발신 모듈 덕분에 구조될 수 있었다고 말한다. 화자(話者)인 ‘나’에게 있어 할머니인 희진의 얘기는 늘 갑작스럽게 끝이 났다. 게다가 그녀는 그 순간을 떠올리기 괴롭다는 이유로 마지막 순간들에 대해 구체적으로 이야기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그녀의 “마지막 이야기에는 거짓이 있다. 할머니는 그 행성에서 구조 신호를 발신한 적이 없다. 할머니의 셔틀이 구조된 장소는 망망대해 같은 우주의 진공 한가운데였다. 할머니는 무리인들의 행성에서 10년을 보냈다고 했지만, 실제로 할머니가 구조된 건 조난 이후 40년 만이었다. 시공간 여행의 시차를 고려하더라도 할머니는 20년 이상을 다시 혼자가 되어 떠돌았다는 이야기가 된다. 어쩌면 할머니는 어떻게든 행성에서 멀리 떠날 방법을 찾아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누구도 그 행성의 위치를 추적할 수 없을 장소에 도달한 다음에야 마침내 구조 신호를 보낸 것인지도” [pp. 92~93] 모른다. 그녀의 이야기가 거짓이 아니라면, 희진은 지구인에 의해 ‘무리인’이라는 지적 외계 생명체들의 행성이 식민지화되는 것이 싫었기에 먼 우주 공간에 나간 뒤에야 구조신호를 보낸 것인 셈이다. 그녀의 선택이 이해가 된다. 다른 문명과의 평화로운 소통은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라. 평화를 선호하고 우리와 비슷한 수준의 문명과 접촉이
이루어질 확률이 얼마나 희박한지. ‘인디언’이라고 불리는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처음 유럽인을 맞이했을
때, 그들은 선의(善意)로 소통을 시도했다. 하지만 다 알다시피 그 선의는 잔인하게 짓밟혔고, 사실상 그들의 멸족을 가져왔다. 19세기 제국주의 침략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소통은 존재하지 않았고, 일방적인 강요만 남았다. 그렇기에 희진이 자신의 20년을 소모해서 자신이 방문한 행성의 위치를
숨기려고 한 것을 이해할 수 있다. 당신도 당신의 진정한 친구를 다른 이에게 착취의 대상으로 내주고
싶지 않을 테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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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 들었던 이야기 중 여태 기억하는 게 하나 있다. 초등학교 6학년때 담임 선생님이 해주신 이야기. 당시 이야기 주제가 타임머신이었는지 빛에 관한 것이었는지는 모르겠다. 과거의 지구 모습을 볼 수 있는 방법이라고 담임 선생님께서 설명하신 내용이다. 과학기술이 발전해서 우리가 빛보다 빠른 속도로 여행을 할 수 있게 되면 지구가 우주로 보낸 빛을 따라잡아 그 빛을 분석하면 된다는 말씀이었다. 지금보다 훨씬 오래 전 지구를 떠난 빛을 따라 잡으면 몇 십년 몇 백년이 지난 과거의 모습을 볼 수 있다는 얘기다. 타임머신이란 기계를 만들어 과거로 갈 수 있다는 주장보다 훨씬 설득력이 있었나 보다. 그게 가능한 일인지 알 수 없을 나이였는데도 당연하게 여기게 됐으니 말이다.
가끔 그럴 때가 있다. 과거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질 때. 나는 이제 나와 키재기를 할 만큼 훌쩍 커 버린 두 아들을 보며 가끔 아이들 과거 모습을 떠올린다. 예전 사진이나 동영상을 보고 또 보고 한다. 예쁘기만 했던 아이들 어린 시절. 그립지만 다시는 볼 수 없는 아이들 모습. 아이를 키우며 이런 간절함을 느낄 거라고 생각지도 못했다. 그 시절로 다시 돌아가 더 사랑해주고 더 예뻐해 주고 싶다는 간절한 마음이다. 빛의 속도보다 훨씬 빠르게 우주로 날아가 실제 아이들 예전 모습을 다시 볼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한다. 이런 아쉬움 덕분에 지금 더 사랑하자고 다짐한다. 시간이 지나면 지금 이 순간도 언젠가 그리워지는 순간이 될 거라는 사실에 위안을 삼으며.
김초엽 작가의 소설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에 수록된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을 읽다가 나는 부모 마음이 되었다. 절대로, 무슨 방법을 쓰더라도 사랑하는 사람을 다시 마주할 수 없다면, 심지어 빛의 속도로 날아간다고 하더라도 그들이 있는 곳에 닿을 수 없다면 어떤 심정일지 공감해보려 했다. 나는 아이들과 같은 공간을 공유하며 살지만 소설 속 엄마는 광활한 우주라는 공간을 가족과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 만약 그리움의 크기가 가족과 떨어져 있는 거리와 비례한다고 한다면 내가 그 엄마의 마음을 공감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해진다. 우주를 이야기할 때 '광년' 단위로 표현되는 거리 개념을 지구인인 내가 상상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게 떨어져 있어본 적도 없기 때문이다.
우리에겐 1,000km, 10,000km 란 거리도 쉽게 다가오지 않는다. 그런데 우주로 나가면 단위가 '광년'이 된다. 1광년은 빛이 1년 간 날아가는 거리를 말하고, 빛은 1초에 지구를 7바퀴 반을 돈다고 한다. 그 빛의 속도로 날아가더라도 수만 년이 걸리는 거리를 상상 하는 일은 불가능에 가깝다. 그곳에 가족이 있다면? 평생을 가도 닿지 않는 곳에 가족이 있다면? 만약 우리 삶의 기반이 지구가 아니라 우주 단위로 넘어간다면 우리 일상은 지금 일반인들이 상상하기 힘든 이런 일들로 채워질 것이다. 우주가 배경이 되면 같은 하늘 아래 산다는 표현을 쓸 일이 없어진다. 대신 어떤 표현이 이 말을 대체할 수 있을지 살짝 궁금해진다. 빛의 속도로 간다고 해도 인간 수명으로는 평생 가지 못할 곳들이 대부분인 이 우주라는 공간에서 말이다.
예전에는 헤어진다는 것이 이런 의미가 아니었어. 적어도 그때는 같은 하늘 아래 있었지. 같은 행성 위에서, 같은 대기를 공유했단 말일세. 하지만 지금은 심지어 같은 우주조차 아니야._(p.181)
천체 물리학이나 양자 물리학 세계로 들어가보면 우리 상상을 초월하는 세상을 만난다. 상상이 아닌 실재하는 세상인데도 전혀 익숙하지 않은 세상이다. 우리 자신에 대한 이야기, 우리가 살고 있는 공간에 대한 이야기인데도 지구 감각만 가진 우리가 쉽사리 이해하기 힘든 사실들로 가득하다. 우리가 감각할 수 있는 사실들이 아닌 과학이 풀어낸 세상이기 때문에 그렇다. 이 책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을 읽으며 필요했던 게 바로 우리가 모르는 세상을 그려보는 상상력이였다. 이 책은 우리 뇌 안에서 일어나는 일부터 드넗은 우주로 나가 우리와 다른 생명체를 대하는 순간까지 낯선 이야기들로 가득하다. 마치 어둠에 적응한 눈이 밝은 빛에 노출됐을 때처럼 이야기의 시작은 이해하기 힘든 지점에서 출발해 서서히 익숙해지는 과정을 거친다.
단 한 마디를 전하고 싶어서 그녀를 만나러 왔다. "엄마를 이해해요."_(P.271)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을 부모 마음으로 읽었다면, '관내 분실'은 자식의 마음으로 읽었다. '엄마가 실종되었다.'로 시작하는 이야기는 함께 있는 동안 그리고 살아있는 동안 더 이해하고 사랑하는 일이 중요한 이유를 깨닫게 한다. 우리는 알고 있다. 알면서도 누구나 한다는 후회에 대해. 부모가 돌아가신 후 자식들의 반응말이다. 부모가 돌아가신 후에 어떤 마음이 되던 그건 전혀 중요한 일이 아닌 게 된다. 관내 분실처럼 프로그램이 만든 망자를 다시 찾는 일도 전혀 위안이 되지 않는다. 존재하지 않는 상대와는 더 이상 소통하고 쌓아둔 감정을 해소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사랑하고 이해하며 살아야 한다는 규칙은 지금 이 순간 당장 해내야 할 일이란 사실을 소설 속 지민과 엄마의 사연에서 깨닫게 된다.
지구에서 그 모든 것을 보고 우리가 무엇을 외면해왔는지, 우리가 우리만의 아름다운 마을에서 살아가는 동안 저 행성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보고 오라는 의미였겠지._(p.51)
작고 무의미한 일들이 우리 눈을 가리고, 주의를 분산 시킬 때, 힘들어 현실을 외면하고 싶을 때 쉽게 방향을 잃고 마는 우리다. 이 책은 낯선 과학기술들이 동원된 세상으로 우리를 떠나보낸 후 우리가 돌아와야 할 곳은 바로 이곳이란 사실을 알게 해준다. 시초지로 순례를 떠난 이들이 자기 삶의 터전 바깥에서 자신의 삶터를 돌아보는 것처럼 말이다. 내가 빛의 속도보다 훨씬 더 빨리 지구의 빛을 좇아 우주로 날아가 내 아이들의 과거 모습을 찾아 보는 건 신기한 경험일지 모르지만, 아마 우주 저편으로 날아갔다가 가족의 소중함을 깨닫고 황급히 지구로 돌아올지도 모른다. 소중한 것을 소중하게 여기며 살자는 의미에서 자주 이 말을 떠올리기로 했다. '나는 내가 가야 할 곳을 정확히 알고 있어'라고. 이야기 속에서 찾은 말이다. 이 말이 담고 있는 간절함 때문에 쉽게 잊지 못할 것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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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에 돌아가신 엄마의 자료가 도서관의 마인드에 저장되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소설에서처럼 살아온 궤적을 도서관에 저장할 수 있다면. 오래도록 병원에 누워계시다 가신 탓에 제대로 된 사진이 없어도 괜찮지 않을까. 돌아가시기 전 사진이 너무 아파 보여 싫은데 엄마의 삶이 도서관에서 꺼내어 볼 수 있다면 다행이라 여기지 않을까.
수많은 소설에서 나타났지만 우울증이든 다른 이유로 아픈 엄마였을때 엄마와의 기억은 제대로 간직하고 있지 못하다. 오래도록 꺼내보지 않다가 문득 사무치게 보고 싶은 마음에 기억들을 떠올려보지만 엄마가 살아왔던 삶을 제대로 알기란 어렵다. 내게 어떤 일이 일어났을 때에야 엄마의 삶을 조금쯤은 이해하게 된다. 「관내분실」이라는 단편에서처럼 지민이 임신한 상태에서 엄마의 흔적들을 찾기 시작했던 것처럼 말이다.
우리가 오래전에 상상했던 미래는 유토피아에 가까웠다. 하지만 영화나 소설에서 나타난 미래는 디스토피아에 가깝다. 하늘을 나는 자동차 사이로 인간과 사이보그 사이에서 살아가는 모습은 꽤 우울하다. 물과 식량이 부족해 먹을 것을 찾아 떠나는 자들과 그들 위에 군림하는 자들을 나타내는 내용들은 많다. 그럼에도 다행이다 싶은 건, 그러한 상황에서도 진정한 휴머니즘을 다룬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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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초엽의 소설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은 그러한 우리의 우려와는 달리 좀더 가까운 미래를 과학적인 발전 위에 있는 것으로서 본 것 같았다. 일곱 편의 소설에서 다양한 이야기들을 다루며 우리가 상상해볼 수 있는 미래를 예감한다. 부정적인 면보다는 긍정적인 면을 부각시켜 미래에도 여전할 우리의 관계과 감정들을 말하고 있었다.
오랜 시간이 지나도, 혹은 미래의 어느 순간이 와도 가족 관계는 변할 수 없는 법인가 보다. 갈등 관계에서 화해의 방법을 찾아가는 것. 누군가를 이해한다는 것도 결국 내가 그 사람을 이해할 마음의 준비가 되어야 하지 않겠나.
언젠가는 우리도 우주여행을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막상 우주여행을 떠나는 사람들은 얼마나 될까. 우주의 신비를 직접 눈으로 보고 느끼는 것 만큼 중요한 것도 없지만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에서처럼 100여 년 동안 우주정거장에서 슬렌포니아 행성계로 떠날 우주선을 기다리는 안나 씨의 사연은 자못 안타깝다. 우주 과학 연구를 하다 가족과 함께할 삶을 놓친 노인의 이야기는 오늘의 우리에게 일침을 가하는 듯 하다. 언제든 떠날 준비를 하고 있는 백일흔 살의 안나에게 슬렌포니아에 언젠가는 도착할 수 있을까.
낡은 셔틀에는 아주 오래된 가속 장치와 작은 연료통 외에는 붙어 있는 게 없었다. 아무리 가속하더라도, 빛의 속도에는 미치지 못할 것이다. 한참을 가도 그녀가 가고자 했던 곳에는 닿지 못할 것이다. (187페이지,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중에서)
지극히 현실주의자인 내게 우주의 「스펙트럼」을 이해하기란 몹시 어려운 일이다. 우주 어딘가에 있을 우주 생명체를 탐사하기 위해 우주로 향했던 생물학자 할머니는 40년이 지나서야 구조되었다. 이 소설 또한 작가의 상상력의 산물이기 때문에 오랜 시간이 지나 구조되었을 것이다. 또한 외계 생명체 루이와의 기억 또한. 이 부분에서는 영화 「그래비티」의 장면이 떠올랐다. 우주선 밖으로 향하는 순간 한 점의 먼지가 되어 사라지고 말테지만 소설 속에서는 외계 생명체로부터 보호를 받고 루이의 기억을 간직한 몇 명의 루이 때문에 살아남아 손녀에게 그 기억들을 말하는 부분은 할머니가 손녀딸에게 들려주는 옛날 이야기와도 같다. 무릎을 베고 들었던 할머니의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도 있었지만 많은 에피소드는 결국 할머니의 상상력이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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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로 지구가 그렇게 고통스러운 곳이라면, 우리가 그곳에서 배우게 되는 것이 오직 삶의 불행한 이면이라면, 왜 떠난 순례자들은 돌아오지 않을까? 그들은 왜 지구에 남을까? 이 아름다운 마을을 떠나, 보호와 평화를 벗어나, 그렇게 끔찍하고 외롭고 쓸쓸한 풍경을 보고도 왜 여기가 아닌 그 세계를 선택할까? (51~52페이지,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 중에서) 릴리 다우드나를 찾아 지구를 찾아왔던 데이지의 고백으로 읽는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에서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를 본다. 그토록 아름답고 평화스러운 곳이라고 해도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가 아니라면 영원히 사는 것에 무슨 의미가 있겠나. 영원히 삶을 살 수 있는 걸 포기하고 고통과 불행이 있는 삶을 선택해 죽음에 이르는가의 이유를 설명한 글이었다.
우리가 우주로 떠날 수 있어도 기꺼이 지구에서 사람들과 부대끼며 살아가는 이유도 결국 사람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살아갈 진정한 이유를 깨달았기 때문이 아닐까. 디스토피아 적인 미래지만 그러나 유토피아를 향한 희망을 잃지 말자는 메시지로 읽혔다.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삶의 이유를 찾아 오늘을 살아가고 있다. 한줄기 햇빛 같은 희망 한 조각을 기대하면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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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름 책을 좋아한다고 말하고 다니지만 아직 SF쪽은 손이 안갔다. 테드 창이 아니었다면 나는 여전히 SF문학은 미루고 미루었을 것이다. 처음부터 너무 센 작가의 작품으로 만나긴 했지만 테드 창의 『당신 인생의 이야기』는 충격을 넘어 경외심을 갖게 한 작품집이었다. 나의 상상력이 얼마나 좁은지, 얕은지, 처절히 깨닫게 해준 독서였다. 문목하의 『돌이킬 수 있는』을 읽은 뒤 SF문학 도서를 고민없이 사기 시작했다. 2019년, 그렇게들 ‘김초엽김초엽’ 하는 데도 꿈쩍 않던 내가 드디어 올해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을 사게 된 이유다.
7개의 단편이 실렸다. 마인드맵을 그려가며 읽었다. 진입이 어려웠기 때문이다. 시작을 한 세 번은 한 것 같다. 몇 페이지 읽다가 관두고 또 처음부터 읽다가 관두고. 이래선 안되겠다. 마음을 단단히 먹고 이번엔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읽어나가겠다는 각오로 연필과 연습장을 펴고 읽어나갔다. 몰입의 단계로 진입하기까지 몇 분만 버티면 되는 것이었음을 그제야 깨달았다. 나는 빛의 속도로 이 소설집에 빠져들었다. 읽는 내내 나의 상상력 부재와 끈기 부족을 탓하며 이제라도 이 책을 만났음에 안도했다.
책을 다 읽고 나니 어김없이 나의 직업병이 기어 나왔다. 이건 애들에게 무조건 읽혀야 해! 라는 극단적인 다짐을 한 것이다. 실현 불가능한 다짐을 실현 불가능해 보이는 소설 이야기에 푹 빠져서 해댄 것이다. 얘들아! 너희들의 상상력이 여기 일곱 이야기에도 못 미치면 안되지 않겠니? 라고, 아이들을 설득할만한 대사까지 만들어 생각해둔다. 한 학기 한 권 읽기에 꼭 넣어야 할 도서목록으로 체크해둔다.
공상과학소설, 이 분야가 이렇게 매력적이다니! 인터스텔라. 자꾸만 그 영화가 떠오르는 건 나뿐만이 아닐 것이다. 외계, 우주로 뻗어 나가는 이야기를 읽다 보면 나 혼자 찡찡대고 투덜대며 살아가는 일상들이 참 하찮게 보인다. 사소한 것에 욱하고, 화내고, 한탄하는 내 모습이 참으로 찌질해 보인다. 우주의 먼지로도 취급 못 받을 그런 존재 주제에 오늘도 속상해하며 울며 보낸 하루가 참 없어 보인다.
김초엽의 작품에서 단지 대단한 상상력이야, 하는 감탄만 할 수 없는 것이 이것을 인간의 영역으로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마치 일상 속의 장면들 같이 느껴진다는 점이다. 젊고 싱싱한 상상력에만 기댄 작품이 아니었다. 묵직한 메시지를 가만히 생각하게 만들지만 그것이 무겁고 부담스럽지 않다. 그녀가 과학(화학)을 전공해서 문학을 하는 사람이라는 것이 얼마나 보배 같은 일인지! 무언가 신뢰를 주는 과학적 요소를 살포시 얹되 결코 어렵지 않은 설명들.(더욱이 테드 창에 비하면 절대 어렵지 않아!)
표제작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은 100년 전 태어난 노인과 어느 우주 정거장을 해체해야 하는 파견 노동자 사이의 대화가 주다. 두껍고 굵은 흐름에 잔잔한 울림을 주는 이야기였다. ‘슬렌포니아’, 행성의 이름도 얼마나 아름다운지. “예전에는 헤어진다는 것이 이런 의미가 아니었어. 적어도 그때는 같은 하늘 아래 있었지. 같은 행성 위에서, 같은 대기를 공유했단 말일세. 하지만 지금은 심지어 같은 우주조차 아니야. 내 사연을 아는 사람들은 내게 수십 년 동안 찾아와 위로의 말을 건넸다네. 그래도 당신들은 같은 우주 안에 있는 것이라고. 그 사실을 위안 삼으라고. 하지만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조차 없다면, 같은 우주라는 개념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나? 우리가 아무리 우주를 개척하고 인류의 외연을 확장하더라도, 그곳에 매번, 그렇게 남겨지는 사람들이 생겨난다면…….”
아마도 여성 독자들일수록 공감하며 기분 좋았을 작품이다. 단편 소설들의 주인공이 모두 여성이기 때문이다. 20대부터 100세 넘은 안나까지, 거기다 삶을 주체적으로 살아가는 여성들이다. 그래서일까, 읽고 나면 기분이 얼마나 좋은지 모른다.
김초엽 작가는 아직 20대(93년생)이다. 30대가 되고 40대가 되고, 점점 그의 작품 세계도 어떻게든 변해갈 것이다. 어떤 작품이 나올까, 어떤 세계를 그릴까, 어떤 소재로 인간의 영역을 확장할까, 어떤 윤리적 문제들을 끌고 나올까, 기대가 크다. 참으로 오랜만에 뭉게구름처럼 부풀어 오르는 기대감을 갖게 만든다. 막 신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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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기 재우다 잠들어버렸고, 문득 깼는데 새벽 세시...... 뭔가 싸한 기분에 더듬더듬해보니 이 녀석 고 사이 대용량 쉬를 방출하였구나..... 떠지지 않는 눈을 감은 채로 매트리스 커버를 벗기고 옷을 뽀송하게 갈아입혀주다보니 잠이 깨고, 못 치우고 잠든 집을 치우고 나니 오늘 아침 도착해 조금 신나는 하루가 되게 해주었던 장기하의 신간을 펼칠 기분이 들었다 키키키 사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이것만 치우고 다시 쓰러져 잘테다!! 했지만 음 뭐 벌써 새벽 5시가 다 되어가도록 읽고있다 사실 책 읽기 전에 내일 아이 먹일 작두콩차에 불을 올리고 앉았는데 막 신나게 읽다 아뿔싸!!하고 가보니 이미 작두콩차는 절반으로 졸아있고...... 다시 물 올리고 오니 흐름이 깨졌네 뭔가 리뷰를 좀 써볼까?? 장기하도 책 내놓고 반응이 궁금하지 않겠어? 리뷰쓰고 가서 불끄면 시간 딱인데?! 오 딱이야~ 하는 마음이 들어버려서 이렇게 장황하게 쓰며 혼자 즐거워하는 새벽인 것인 것이다- 지금 86쪽까지 읽었는데 간결하게 다듬고, 하지만 쓰고싶은 내용으로 충분히 채우고, 뭔가 대화로는 줄줄이 길게 늘어놓기 힘든 평소 생각들을 덤덤히 솔직하게 풀어놓은 듯한 챕터 하나하나의 내용들이 충분히 흥미롭고 재미있고 솔직히 좀 귀엽기도 하다 본인도 알고 있겠지만 <귀엽다> 라는 단어는 장기하 라는 인간을 의외로 관통하고 있는 단어가 아닐까? 물론 팬들만 느끼는 것일 가능성이 크지만 ㅋㅋㅋ 근데 사실 끝까지 완독한 것이 아니라 리뷰를 써도 되나 하는 기분이 들긴하는데 사실 리뷰 쓸 기분이 들었을 때 따끈따끈하게 쓰는 게 괜찮을 것 같기도 하고 지금 아니면 쓸 마음과 타이밍이 언제 들까 싶기도 하고 어쨌든 결론은 이 책 썩 괜찮아요 여러분!! 요즘 책 사면 연말정산 소득공제도 해주는데 땡기면 사보시죠~ 부록으로 주는 노트도 쓸만하고 참고로 저는 운좋게도 싸인본을 받았답니다 우루루끼얏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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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라는 아직은 대중적이라고 하기엔 조금은 낯선 장르에 혜성처럼 등장하여 작년 한해동안 큰 이슈가 되었던 책과 저자가 있었다. 아직은 일부 마니아층이 선호하는 SF소설분야이고 첫 소설집을 낸 신인임에도 불구하고 2019년 올해의 작가상을 수상해서 이례적인 일로 언급되고 그래서 더 이슈가 되었었다. 작가의 프로필도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는데 한몫 했던것 같다.
93년생의 아직 풋풋한 외모의 젊은 작가는 포스텍 화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 석사학위를 받은 과학계의 주목받는 지성인으로 특이하게도 소설을 쓰면서 전업작가의 길을 가기로 했다는 인터뷰를 보았던 기억이 난다. 왠지 그 분야를 살려서 취업을 하거나 연구원이 되어도 잘 나갈거 같은 능력있는 젊은 인재인데 이제 작가의 길을 가기로 했다는 그 결정도 인상적이었다. 작가에 대한 이런저런 이슈들과 인터뷰는 정작 접했지만 책에 대한 아무 사전지식이나 정보 없이 읽기 시작했다. 첫번째 이야기를 읽고나서 느낌은 마치 영화한편을 본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리고 연달아 든 생각이 '와...이 젊은 작가는 어쩌면 이렇게 이야기를 재미있게 구성하였을까.' 였다. 그리고 이어서 든 생각은 '이 이야기 안에 담겨있는 이 인간에 대한 고민과 따뜻함은 뭐지?' 였다. 왠지 젊은 작가이고 SF 소설이다보니 그런 부분은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것 같다. 그런데 예상과 다르게 너무나 인간적고민이 담기고 우리가 갖고 있는 인간 본연의 마음들을 떠올리게 되면서 이 작가의 역량과 이야기를 풀어내는 방식에 완전히 빠져들게 되었다. 이 책 안에 담겨있는 단편들이 각각 모두 너무 재미있다. 소설을 거의 안읽는 편이고 어쩌다 읽는 소설도 크게 재미를 느끼면서 읽지를 못했다. 유일하게 좋아했던 소설이 추리소설이었다. 그리고 솔직히 말하면 소설가의 문체에 나는 아무리 익숙해지려해도 익숙해지기가 쉽지 않았다. A를 A라고 하지 않고 B라는 감정을 B라고 표현하지 않고 그걸 빙빙빙빙 돌려서 언저리에서 묘사하면서 비유하거나 함축하는 표현 방식이 나에게는 어색하고 여전히 어렵다. 누군가는 내가 이과라 그렇다라고 하는데 별로 그런 생각을 하면서 살아오질 않다 책모임에서 문과출신들과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내가 교육받아오고 생각해온 방식이 나의 생각을 말이든 글로든 전달하는 방식이 그런식이었고 그 영향이 없지는 않겠다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었다.
늘 간결하게 전달해야하고 듣거나 읽는사람에게 오해나 혼돈없이 명쾌하게 전달해야 가장 잘된 문서이고 발표임을 교육받고 연습하며 살아온 나에게는 내가 인지하지 못하는 사이 그런식으로 나의 쓰고 읽는 스타일에 영향을 주었을수도 있겠다 싶다. 무엇보다 그런 스타일의 책들을 더 선호하면서 나에게 점점더 익숙한것과 어려운것들이 구분지어지게 된것 같다.
여튼 김초엽의 '우리가..' 이책은 분명 쉽고 명쾌하고 재미있다. 비유 은유 이런걸 쓰지도 않으면서도 잔잔한 감동과 깊은 울림을 주기도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너무 재미있어서 작가의 상상력을 따라가다보면 어느새 이야기의 마지막에 다달아 있다. 읽는 중간에는 쉽게 내려놓을수가 없을정도다. 신인임에도 불구하고 이야기의 흐름과 서사가 아주 자연스럽고 소재에서 뽑아내는 아이디어들도 재미있다. 이야기는 SF소설이 분명 맞다. 소재와 배경이 그렇고 끌고 나가는 주요 사건들 속에는 분명 과학의 소재들이 곳곳에 들어가 있다. 인간 배아복제나 유전자 편집, 우주의 행성 이주를 배경으로 하는 이야기들, 외계인이 등장하는 이야기, 뇌스캔을 통한 죽은자의 영혼을 불러내는듯한 그러나 실은 데이터를 기반으로 한 AI 아바타 , 화학물질을 통한 인간의 감정통제 등등... 그러나 이 이야기들을 읽으면서 소설을 시작하는 단편적인 소재나 모티브로 과학이 등장하는것은 맞지만 이 이야기의 주된 부분은 오히려 인간 그 자체와 인간의 감정과 감성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보니 과학은 그렇게 크게 와 닿지 않는다.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에 대한 근원적 물음과 그 현상들을 관찰하고 지금 이야기되고 있는 과학적인 실험들과 시도들이 펼쳐지는 미래가 되어도 여전히 소외되고 배제되는 인간들은 존재할것이고 심지어 첫번째 소설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 에서는 분리주의로 치달을수 있는 그래서 과학이 돈이 되고 권력이 되는 어느 순간 힘과 돈있는 사람들이 배아복제나 유전자 편집을 이용할수 있으면서 과학의 성과로 만들어질수 있는 결과물을 그들만이 향유할수 있는 순간이 올 수도 있는 가능성도 엿볼 수 있었다.
위험들이 다 통제된 그래서 행복하기만 한 마을이라는 행성에서 살아가는 주인공이 의문을 품고 시초지에 대한, 일종의 금기로 되어 있는 행성에 대해 알아가고 그곳을 경험한 이야기를 듣고 결국 떠나는 모습에서 이 이야기는 과학의 이야기라기 보다는 소설적 장치를 위해 과학은 하나의 소재로 사용되었지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느낌을 받았다.
이 시초지에 대한 이야기를 읽으면서 묘하게도 미국의 아미쉬 마을 공동체에 대한 생각이 떠올랐다. 미국에 머물때 한번 꼭 가보고 싶었지만 못가본 아미쉬마을에 대한 이야기를 오래전에 읽었었다. 일체의 전기나 기계적인 것들의 사용을 배제하고 철저히 자연주의 방식으로 살아가며 가내수공업처럼 각자 생산한 것들로만 그 마을안에서 살아간다는 공동체의 생활은 참 충격적이면서도 새로웠다.
그런데 이 마을에도 자라나는 젊은 세대와 청소년들이 있고 그들은 도시의 문명과 새로운 세계에 대한 갈망이 있지 않을까라는 궁금증이 일었는데 청소년기가 되면 이 세계에 대해 경험해볼수 있고 그곳에 남을지 마을로 돌아와 공동체에서 평생을 살아갈지를 선택할 수가 있다고 들었었다. 마치 성년식을 치룰때가 되면 낡은 우주선을 타고 시초지로 떠나는 마을의 아이들처럼 말이다. 시초지에 남겨지는 사람들이 있고 다시 돌아오는 사람들이 있는것을 보면서 그리고 그 위험과 차별과 고통이 있는 지구를 선택하고 그곳에 남겨지는 사람들과 모든 위험이 차단된 안정과 평화의 마을을 선택해 다시 돌아오는 사람들이 있다는것. 묘하게 아미쉬마을이 떠올랐다.
'우리는 행복하지만, 이 행복의 근원을 모른다는것. '(p.19)
'떠나겠다고 대답할때 그는 내가 보았던 그의 수많은 불행의 얼굴들 중 가장 나은 미소를 짓고 있었지. 그때 나는 알았어. 우리는 그곳에서 괴로울거야. 하지만 그보다 많이 행복할 거야.' (p.54)
마지막부분에서 작가의 생각을 엿볼수 있다. 고통과 위험과 차별이 존재하지만 사랑할 존재가 있고 같이 연대해서 헤쳐나가야 할 과제들이 있고 고통스럽지만 살아갈 의미가 있는 시초지 지구를 선택하는 주인공의 모습이 바로 그렇다.
그리고 이 책에 등장하는 과학의 배경은 과학에 대한 약간의 관심만 있어도 아주 새로운 사실들은 아니라는걸 알게된다. 유전자 편집으로 태어나는 인간 배아에 대한 실험이 이미 중국에서 있었고 그것에 대한 세계의 비난과 여러가지 조치들이 언급되었기 때문에 첫번째 소설인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 에서 유전자 편집을 통해 태어난 한 세대에 대해 신인류라 명명하는 자연사 박물관의 코너를 언급한 부분에선 등골이 서늘해졌다.
지구상의 중국 러시아 같은 곳들이 이런 위험성 있는 실험을 지금도 진행중이고 어느곳에서는 이 소설과도 같은 불법적 유전자편집으로 태어나는 아이들과 그 부작용으로 어떤 일을 겪을지 알수 없는 아이들도 있을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미 많은 SF영화와 소설들에서 다뤄지기도 했던 다양한 소재들은 아주 새롭거나 너무 생소하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지성을 갖춘 외계 생명체가 우리의 뇌 속으로 들어와서 공생하며 일정기간 살아가고 우리에게 인간성이라고 말할수 있는 많은 도덕적인 규범들을 이 시기에 가르친다는 '공생가설'은 대단히 흥미롭고 색다르게 다가왔다. 이 소설을 읽을때가 밤 늦은 시간이었고 신생아들의 뇌파를 통한 대화를 분석하는데 그 대화속에 철학적이고 어른들의 대화같은 내용이 추출되었다는 묘사를 읽을때 순간 소오름이 쫙 끼쳤다. -_-;;;
뇌파를 검색하고 뇌를 스캔하고 우리가 말하거나 생각할때 뇌의 시냅스 어느부분이 활성화되고 이런 과학적인 소재들을 이런 외계생명체의 이야기로 끄집어 낸것은 정말 재미있었다. 그런데 읽다보면 재미를 넘어서서 우리안에 근원적인 그리움- 누구나 갖고 있지만 설명할 수 없는 근원적 그리움을 묘사한 부분이 참 대단한것 같았다.
그 외로움과 그리움은 김초엽 소설집의 표제 소설이기도 한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에서 그 절정을 이룬다. 남편과 아이가 먼저 떠나버린 슬렌포니아로 갈수 있는 방법이 끊기면서 우주정거장에 백년 이상을 냉동과 해동을 반복하며 그 정거장에서 떠날수 있는 우주선이 존재하는 그 날이 올때까지 기다리고 있는 주인공 안나의 모습속에서 가슴 한켠이 싸늘해지는것을 느낄수 있었다. 처음엔 워프항법이 개발되어 우주를 이동하다가 웜홀을 발견하고 안정화된 웜홀로 행성간 이동이 가능해지면서 워프항법이 저물게 되고 그리하여 수지타산이 맞지 않는 워프항법으로 가는 우주선은 운행을 안하게 되었고 웜홀이 지나가지 않는 슬렌포니아 같은 행성은 먼 우주가 되어버리고 그곳에 갈수 있는 방법 자체가 존재하지 않게 된다.
결국 안나는 마지막에 우주정거장에서 지구가 아닌 먼 행성으로 출발을 한다. 자살과도 같은 행위인 이 모습을 지켜보는 우리는 마음 한켠이 다시한번 먹먹해진다. 도달할수도 없는 그곳에 그리고 설상 도달한다해도 이미 100년도 넘은 시간 남편과 자식은 살아있지도 않은곳에 꼭 가야만 한다는 안나의 모습을 보면서 안타까움을 넘어선 감정을 느끼게 된다.
"예전에는 헤어진다는 것이 이런 의미가 아니었어. 적어도 그때는 같은 하늘 아래 있었지. 같은 행성 위에서, 같은 대기를 공유했단 말일세. 하지만 지금은 심지어 같은 우주조차 아니야. 내 사연을 아는 사람들은 내게 수십 년 동안 찾아와 위로의 말을 건넸다네. 그래도 당신들은 같은 우주안에 있는 것이라고. 그 사실을 위안 삼으라고. 하지만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조차 없다면. 같은 우주라는 개념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나? 우리가 아무리 우주를 개척하고 인류의 외연을 확장하더라도, 그곳에 매번, 그렇게 남겨지는 사람들이 생겨난다면...." (p.181)
또다른 소설 스펙트럼에서는 주인공을 돌보는 외계인루이가 등장한다. 루이의 생은 3년남짓밖에 안되는 짧은 생애지만 그 루이가 죽고나면 또 새로운 루이가 등장해서 과거의 기록을 보며 외계에서 온 주인공 희진을 돌본다. 이 소설에서 흥미로웠던 부분은 외계인들의 언어가 우리와 다른데 그들의 언어가 색채의 언어라는 부분이었다. 우리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다른 부분들을 그들은 보기때문에 더 다양한 색채를 볼수 있고 그 색채를 통해 언어로 전달할수 있다는 부분. 흥미로운 아이디어였다.
우리의 눈은 사실 모든것을 볼 수 있는것이 아니라 가시광선만 볼수 있고 우리의 눈으로 볼수 없는 영역들이 있다. 귀도 마찬가지로 우리가 들을수 있는 영역이 정해져 있다. 우리 인간의 몸이 얼마나 제한적이고 한계가 있는지 새삼 깨닫게 된다. 그야말로 지구라는 토대위에 적응하기 가장 좋은 형태로 진화되었을뿐이지 모든 외계의 생물과 동물의 가장 진보한 버전이라고, 모든 외계의 생물들보다 뛰어난 존재라는 생각은 오만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그리고 우리가 보고 있는것들의 불완전성에 대해서도 생각해보았다. 사실 우리가 보고 있는 별들은 지금 그 자리에 동시간에 존재하는것이 아니라 먼 거리에서 태양을 통해 들어온 시간차가 존재하기에 몇십년 몇백년 전에 존재하는것을 우리가 볼수도 있는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인간이 참 불완전한 존재이며 시공간이라는것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가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보게 된다.
김초엽의 소설은 참 신선하고 재미있다. 그런데 그 재미속에는 SF적인 요소로 인간이 극단의 상황에 몰리면서 두드러지게 보여질수 있는 인간의 특징과 약함을 더 극명하게 드러내주는것 같다.
과학소설임에도 사랑, 그리움, 연대, 약자, 배제, 돌봄 이런 단어들이 끊임없이 떠오르는건 그런 이유들 때문이리라. 시작부터 마지막 까지 정말 재미있게 읽었다. 그리고 그 재미 뒤에 인간에 대한 성찰과 따뜻함을 심어놓은 작가의 배려덕에 오랜시간 기억될 소설일듯 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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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가 아닌 다른 행성이 존재한다. 그곳을 탐험하고 거주한다. 새로운 생명체를 만나고 관계를 맺는다. 우리가 기존에 영화나 소설로 만난 이야기와 다른 건 없다. 하지만 뭔가 특별하다. 불편이라고는 존재하지 않는 평화로운 마을에서 열여덟 살이 되면 이동선을 타고 순례의 길을 떠난 이들이 돌아오지 않는 이유가 궁금한 데이지가 지구에 대해 들려주는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속 지구는 현재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 모든 게 완벽하게 태어난 ‘신인류’와 그렇지 못한 ‘비개조인’으로 분류된 사람들, 과학자 릴리의 인공 배아 디자인이 성공하면서도 그렇게 되었다. 릴리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지구 밖에 새로운 마을을 만들었다. 어떤 장애가 있더라도 불행하지 않지 않고 상처를 주지 않는 유전자로 태어난 사람들. 지구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세계. 그런데 왜 순례자 가운데 돌아오지 않는 이들이 생겨났을까? 이제 나는 상상할 수 있어. 지구로 내려간 우리는 그 다른 존재들을 만나고, 많은 이들은 누군가와 사랑에 빠질 거야. 그리고 우리는 곧 알게 되겠지. 바로 그 사랑하는 존재가 맞서는 세계를. 그 세계가 얼마나 많은 고통과 비탄으로 차 있는지를. 사랑하는 이들이 억압받는 진실을. (중략) 그리고 그들이 맞서는 세계를 보겠지. 우리의 원죄. 우리를 너무 사랑했던 릴리가 만든 또 다른 세계. 가장 아름다운 마을과 가장 비참한 시초지의 간극. 그 세계를 바꾸지 않는다면 누군가와 함께 완전한 행복을 찾을 수도 없으리라는 사실을 순레자들은 알게 되겠지.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 52~53쪽) 데이지가 상상하는 장면은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의 오늘과 너무도 똑같다. 어딘가에서 끊임없이 이어지는 고통과 슬픔, 그것을 같이 나누는 연대의 모습. 과학의 발전이 불러올 인류가 소설과 다르다고 자신할 수 있을까. 완벽과 완전만 추구하는 세상에도 존재할 불완전한 삶을 향한 김초엽의 다정한 시선을 감지할 수 있어 좋다. 우주여행자를 위한 정거장을 관리하는 남자와 100년 동안 정거장을 점유하고 있는 안나가 나누는 이야기로 시작하는 표제작「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에서도 느낄 수 있다. 지구가 아닌 다른 행성으로의 이주가 가능한 시대에 과학자인 안나는 지구에 남았고 남편과 아들은 슬렌포니아 행성계로 떠났다. 안나도 연구를 끝내고 가족이 있는 그곳으로 갈 예정이었다. 그러나 지구와 행성 간의 새로운 이동 수단인 웜홀 통로가 발견되면서 이전의 워프 방법을 이용해 운항하는 우주선은 사라졌다. 그 사실을 안나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가족이 존재했던 그곳으로 갈 수밖에 없다. 슬렌포니아 행성계로 향하는 일은 죽음을 의미하는 것일지라도.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조차 없다면, 같은 우주라는 개념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나? 우리가 아무리 우주를 개척하고 인류의 외연을 확장하더라도, 그곳에 매번, 그렇게 남겨진 사람들이 생겨난다면…….”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181쪽) 사회와 국가를 위한 성공, 그들을 위한 소수의 희생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세상을 생각한다. 우리가 그토록 꿈꾸는 우주는 정말 무엇일까 하는 의문과 함께 말이다. 문득, 오늘과 내일이라는 시간으로 사라지는 수많은 어제를 붙잡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진다. 안나 할머니가 느꼈을 그리움과 절망을 나는 짐작조차 할 수 없겠지만. 이처럼 김초엽은 과학적인 이론과 소재를 끌어와 이야기를 만들지만 그 안에는 우리 사회 곳곳에서 만날 수 있는 약자와 소수자에 대한 차별과 소외, 그들이 받는 고통에 대해 주목한다. 비혼모의 48세 동양인이 우주비행사로 선발되는 과정을 다룬 「나의 우주 영웅에 관하여도」과 소설집에서 가장 좋았던 「관내 분실」에서도 겹쳐진다. 죽음을 애도하는 미래의 방식으로 죽은 사람들의 정보를 데이터로 만든 ‘마인드’를 관리하는 도서관이 등장한다. 새로운 형태의 추모공원 같다고 할까. 마인드와 접속하여 죽은 자의 영혼과 만날 수 있는 시스템이다. 소설에서 지민은 엄마를 잃어버렸다. 그러니까 엄마를 인식하는 마인드가 분실된 것이다. 소설은 임신한 지민이 죽은 엄마(은하)의 마인드를 찾는 과정을 보여주면서 여성이 사회와 어떻게 단절되고 고립되는지 섬세하게 보여준다. 산후우울증을 심하게 앓고 딸에게 집착하는 은하를 이해할 수 없었던 지민이 임신을 통해 막연하게 느끼는 어떤 두려움. 그것은 지금 우리 시대의 여성이 경험하고 견디는 현실이다. “마인드들은 우리가 생전에 맺었던 관계들, 우리가 공유했던 것들, 우리가 다른 사람의 뇌에 남기는 흔적들과 세상에 남기는 흔적들을 자신들의 방식들로 기억한다는 것이죠. 마인드와 자아의 관계에 대한 의문이 영원히 미해결로 남는다고 해도, 우리는 마인드를 통해 그들의 삶을 더 선명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관내 분실」, 257쪽) 나 아닌 타인을 이해한다는 것은 가능할까? 이해한다는 것이 감정을 읽고 공유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낯선 행성에 도착해 외계 지성 생명체를 만나 그들과 지낸「스펙트럼」속 희진은 가능했을 것이다. ‘루이’로 불린 그들이 색채를 의미로 읽는다는 설정은 신선했다. 감정 자체를 조형화한 제품을 구매한다는「감정의 물질」에서는 자신의 감정을 상대가 이해하기를 원하는 인간 본연의 욕구를 생각하게 한다. 가장 가까운 이의 감정도 이해하려 노력하지 않는 인간과 「스펙트럼」속 ‘희진’과 ‘루이’를 비교하게 된다. 인간이 유년 시절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을 미지의 외계 생명체와의 공생으로 풀어낸 「공생 가설」을 통해서도 내밀한 관계를 말하는 듯하다. 타자를 이해하고 공감하고 배려하는 미래, 그것이 우리가 바라는 것이라는 걸 말이다. 아름다움과 슬픔은 동격이다. 김초엽의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을 읽고 나는 이런 문장으로 글을 쓰고 싶었다. 왜냐하면 이야기가 아름답고 슬프기 때문이다. 아름다운데 왜 슬프냐고 묻는다면 당신도 이 소설을 읽어보면 알 거라 답하겠다. 미래의 삶을 상상한 SF 소설에 대한 나의 편견은 김초엽의 소설로 인해 전부 사라졌다. 한때 내게 과학 장르 소설은 이해하기 힘든 이야기였다. 상상할 수 없는 세계였다고 할까. 현재의 일상을 살아가는 이야기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여겼다. 김초엽이 안내하는 소설은 분명 현재가 아닌 가깝거나 먼 미래가 있다. 그런데 소설을 읽다 보면 이질감이 들지 않는다. 가상의 공간과 가상의 도시에서 살아가는 그들을 알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현재를 살아가기에도 급급한 나는 우주를 살아가는 미래를 상상한 적이 없다. 그러나 김초엽의 소설을 통해 만난 미래라면 조금 달라진다. 조금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연대하고 공생을 꿈꾸는 사람들의 살아가는 미래, 나도 그 미래의 구성원으로 살아가기를 원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