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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씨앗을 보살피는 흙과 같이 (아이들의 이름은 오늘입니다)
"작은 씨앗을 보살피는 흙과 같이 (아이들의 이름은 오늘입니다)" 내용보기
사랑하는 배움책 30작은 씨앗을 보살피는 흙과 같이― 아이들의 이름은 오늘입니다 요한 크리스토프 아놀드 글 원마루 옮김 포이에마 펴냄, 2014.12.1.  이월로 접어들어 하루하루 흐르면서 이월 한복판으로 접어들 무렵부터 우리 집 뒤꼍에서 쑥삭이 돋습니다. 쑥은 무럭무럭 자라서 어른 키보다 훌쩍 크게 자라기도 하는데, 처음에는 그야말로 아주 조그마하면서 앙증맞습니다. 이 조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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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배움책 30



작은 씨앗을 보살피는 흙과 같이

― 아이들의 이름은 오늘입니다

 요한 크리스토프 아놀드 글

 원마루 옮김

 포이에마 펴냄, 2014.12.1.



  이월로 접어들어 하루하루 흐르면서 이월 한복판으로 접어들 무렵부터 우리 집 뒤꼍에서 쑥삭이 돋습니다. 쑥은 무럭무럭 자라서 어른 키보다 훌쩍 크게 자라기도 하는데, 처음에는 그야말로 아주 조그마하면서 앙증맞습니다. 이 조그마한 싹이 나중에 우람한 풀줄기로 커서 꽃을 피우고 잎을 떨구다가 시들어서 다시 흙으로 돌아가요.


  작은 쑥잎은 더 작은 씨앗에서 깨어납니다. 더없이 자그마한 씨앗에서 조그마한 쑥잎이 돋습니다. 흙은 아주 자그마한 쑥씨를 품어서 따스하게 어루만지는데, 이 따스한 품을 고맙게 맞아들인 쑥씨는 그야말로 무럭무럭 자라고, 쑥대가 무럭무럭 자라는 동안 꽤 많은 흙이 쑥대를 붙잡아 주어야 하고, 가을이 지나고 겨울이 다가오면서 쑥대는 천천히 시들어서, 그동안 저를 붙잡느라 힘써 준 흙한테 다시 돌아가 ‘새로운 흙’이 생기도록 온몸을 내놓습니다.


  다른 풀씨를 보아도 쑥씨와 비슷합니다. 모든 풀씨는 대단히 작습니다. 깨알보다 훨씬 작은 풀씨입니다. 아주 작은 먼지조각으로 보이는 풀씨예요. 흙은 이 모든 풀씨를 고이 아낍니다. 풀씨를 고이 아끼면서 보듬고 돌보는 흙은 나중에 풀한테서 너른 사랑을 돌려받습니다.



.. 이 지구를 파괴하는 건 탐욕과 이기심이지 아이들이 아니다. 아이들은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주기 위해서 이 땅에 온다. 가만히 귀를 기울이면 아이들이 우리의 선생으로 왔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 어쩔 수 없이 장시간 일을 해야 하는 사람들은 부모의 역할을 다른 이에게 맡기고 만다. 아침에 아이들에게 옷을 입히고, 밥을 먹이고, 병치레하는 아이를 돌보고, 밤에 아이를 재우는 일을 비롯해 전통적인 부모의 역할을 포기하고 있다 … 서구 사회에는 돈이 넘쳐난다. 하지만 그 돈이 어린이집이나 학교로 흘러가는 모습은 좀처럼 보기 어렵다 ..  (17, 18, 20쪽)



  아기를 낳아 돌보는 어버이는 흙과 같습니다. 작은 씨앗이라고 할 아이들을 아끼고 돌보면서 섬기는 어버이는 흙과 같은 마음결입니다. 작은 씨앗인 아이들은 어버이를 흙처럼 반기고 고마워 하며 기쁨으로 맞이합니다. 이리하여, 작은 씨앗은 흙을 믿고 기대면서 무럭무럭 자라요. 흙은 작은 씨앗을 사랑하고 어루만지면서 무럭무럭 자라도록 북돋우지요.


  풀은 흙이 있어서 자랍니다. 흙은 풀이 있어서 기름질 뿐 아니라, 비가 아무리 퍼부어도 쓸리지 않습니다. 드세거나 거친 비바람에 흙이 좀 쓸리면, 때로는 많이 쓸리면, 흙은 아파 하거나 슬퍼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새로운 작은 풀씨가 해마다 나고 지고 자라고 시들면서 새로운 흙을 빚으니까요. 오랜 나날에 걸쳐서 흙은 제자리를 되찾습니다.


  높은 봉우리는 높이가 낮아지지 않습니다. 백두산도 한라산도 지리산도, 봉우리 높이는 언제나 그대로입니다. 왜 그러할까요? 새로운 풀씨가 끝없이 자라고 돋아서 시들어서 흙한테 돌아가기 때문입니다. 흙이 쓸리고 쓸려도 새로운 흙이 태어나기 때문입니다.



.. 마음에 상처를 입은 아이도 여전히 희망을 품고 당신을 보며 묻는다. “제 손을 잡아 주실 수 있나요? 이 세상에 제가 있어야 할 곳은 어디죠?” … 강제력을 동원해서는 진정한 교육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아이 스스로 배우고 싶어 해야 한다 … 정부가 요구하는 학업 프로그램 탓에 아이들은 놀며 배울 기회를 점점 더 빼앗기고 교사들은 과도한 서류 작업에 짓눌리고 있다 … 1000년에 걸쳐 아이들은 마을 어른들 곁에 앉아 인생을 배웠다. 노인들의 말을 듣다가도 어디론가 뛰어가 흥미로운 걸 찾아 놀곤 했다. 이것 역시 배움이다 ..  (25, 33, 37, 43쪽)



  그런데 사람들이 억지로 삽차를 써서 흙을 파헤치면, 이때에는 흙이 앓는 소리를 냅니다. 이때에는 풀씨가 죽는 소리를 냅니다. 억지로 쥐어짜거나 뒤흔들거나 괴롭히면 풀씨도 흙도 모두 고달프면서 아파서 눈물을 흘립니다.


  오늘날 물질문명은 풀씨와 흙이 앓다가 죽는 소리에 귀를 닫습니다. 오늘날 학교교육과 제도권과 법률과 정치경제는 모두 풀씨와 흙이 아파서 죽어 가는 모습에 눈을 감습니다.


  피를 말리는 싸움을 붙이는 물질문명입니다. 피가 뒤도록 다투게 몰아세우는 현대사회입니다. 이런 틈바구니에서 작은 풀씨와 너른 흙은 모두 괴롭습니다. 물질문명 현대사회에서 아이와 어른 모두 고단하면서 힘에 부쳐서 쓰러지고 맙니다.



.. 요즘 부모들은 아이에게 노래를 불러 주기보다 모차르트의 음악이 아기의 두뇌 발달에 미치는 효과를 운운하는 연구 결과에 귀를 기울인다 … 제3세계 국가에서 아이들을 징병한다는 소식에 우리는 놀란다. 하지만 사실 우리 아이들도 제3세계에 있는 아이들 못지않게 잔인한 민병대의 일원으로 우리 가정 안에서 자라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 기업이 여러분의 자녀에게 어떤 친구를 사귀고 어떤 옷을 입고 어떤 말을 하고 어떤 생각을 하라고 일러 주는 것이 과연 타당한 걸까 … 아이들에게 평생 남는 것은 물질이 아니라 부모가 주는 사랑이다 ..  (49, 69, 84, 92쪽)



  요한 크리스토프 아놀드 님이 글을 쓰고, 원마루 님이 한국말로 옮긴 《아이들의 이름은 오늘입니다》(포이에마,2014)를 읽습니다. 책이름에서도 드러나지만, 아이들 이름은 ‘오늘’입니다. 아이들 이름은 ‘어제’도 ‘모레’도 아닙니다. 아이들은 바로 ‘오늘’입니다.


  그러면 어른들 이름은 무엇일까요? 어른들은 ‘어제’일까요? 어른들은 ‘모레’가 되면 될까요? 아니에요. 어른들도 이름은 아이들과 똑같이 ‘오늘’입니다. 모든 사람은 ‘오늘’을 삽니다. 모든 사람은 오늘을 살면서 어제를 돌아보고 모레를 내다봅니다. 모든 사람을 오늘을 지으면서 어제를 사랑하고 모레를 꿈꿉니다.



.. 무조건 복종하는 아이로 만드는 게 양육의 목적이 될 수는 없다. 아이들이 확신을 갖고 인생을 탐험하게 돕되 자신의 한계도 알게 해야 한다 … 하루하루가 새로운 출발이어야 하고 과거는 깨끗이 용서받아야 한다 … 아이들이 보이는 문제 행동을 일종의 질병으로 간주하고 잠재적으로 위험성이 있는 약을 주는 것은 곤란한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안일한 길을 선택하는 것에 불과하다 … ‘정상’이라는 것이 있기나 하는 걸까? 어린아이를 ‘비정상’으로 분류하는 대신 변화의 뿌리에 초점을 맞추는 게 어떨까 ..  (123, 125, 140, 146쪽)



  어버이가 할 몫은 삶을 지어서 아이와 함께 누리고 가꾸는 길입니다. 아이가 할 놀이는 삶을 짓는 어버이 곁에서 신나게 뛰어다니면서 웃고 노래하는 길입니다.


  어버이는 삶을 짓습니다. 아이는 놀이를 누립니다. 어버이는 일을 합니다. 아이는 노래를 부릅니다. 어버이는 살림을 가꿉니다. 아이는 웃음을 짓습니다. 이리하여, 어른(어버이)과 아이는 한집을 이루어 아름다운 보금자리를 마련하지요. 아름다운 보금자리에서는 사랑스러운 싹이 터서 새로운 숲이 우거집니다.


  학교에 맡겨야 할 교육이 아니라, 집에서 삶을 지으면 되는 하루입니다. 사회생활을 잘 해야 하는 아이들이 아니라, 삶을 슬기롭게 가꾸어야 할 아이들입니다. 정치나 경제나 문화나 예술에 이바지를 할 아이들이 아니라, 내 보금자리에서 숲을 돌보면서 사랑과 꿈으로 하루를 누려야 할 아이들입니다.



.. 나는 모든 아이가 태어날 때 창조주의 흔적을 안고 태어난다고 믿는다 … 아이들이 자라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만큼 즐거운 일은 없다 … 마음만 있으면 어떤 식으로든 아이들의 마음에 닿을 수 있다 … 규칙이나 금지 따위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 부모가 사랑을 보여주면 아이들에게는 안정감이 선물로 따라온다 ..  (163, 179, 185, 186쪽)



  우리 모두 씨앗을 심어요. 우리 모두 텃밭을 일구어요. 도시에는 텃밭 삼을 땅이 없다구요? 그러면 자가용을 내다팔아요. 자가용을 내다팔고 땅을 한 평이든 두 평이든 내 몫으로 장만하고, 아이 이름으로 마련해요. 자가용은 돈을 더 모아서 나중에 다시 장만해도 돼요. 그러나, 내 땅은 바로 오늘 장만해야 해요. 도시에서도 한 평짜리 자투리땅부터 장만해요. 그리고 이 땅에 씨앗을 심어요. 두 평을 장만할 수 있으면 한 평에는 풀씨(푸성귀 씨앗)를 심고, 다른 한 평에는 나무를 심어요. 이윽고 석 평과 넉 평을 더 장만하고, 자꾸자꾸 땅을 넓혀서 열 평과 백 평을 이루도록 해요. 시골에서는 백 평이나 천 평씩 꾸준히 땅을 넓혀서 아름다운 숲으로 가꾸어요. 도시에서도 텃밭과 조그마한 숲정이를 이루어서, 아이와 어른이 함께 웃고 노래할 터전으로 가꾸어요.


  땅값이 비싼가요? 땅값이 비싸면 이 땅값을 댈 만큼 즐겁고 씩씩하게 돈을 벌어요. 아니면, 땅값이 싼 곳으로 집을 옮겨서 ‘부동산’ 아닌 ‘보금자리’가 될 곳을 찾아야지요. 그대로 머무르지 마셔요. 그대로 고인 물이 되지 마셔요. 우리는 도시에서나 시골에서나 ‘씨앗을 손수 심어서 가꿀 수 있는 땅뙈기’에 보금자리를 지어야 합니다. 우리 집을 우리가 손수 지어야 합니다.


  건물까지 손수 지으면 가장 나으나, 건물은 남이 지은 데에 들어갈 수 있어요. 그러나, 땅만큼은, 씨앗만큼은, 바로 우리 어른들이 아이들과 함께 심어서 숲으로 가꾸어야 합니다.


  교육을 학교한테 맡기지 마셔요. 삶을 사회한테 맡기지 마셔요. 사랑을 정치한테 맡기지 마셔요. 살림을 경제한테 맡기지 마셔요. 꿈을 인문학한테 맡기지 마셔요. 이야기를 종교한테 맡기지 마셔요. 놀이를 스포츠한테 맡기지 마셔요. 노래를 영화나 예술한테 맡기지 마셔요. 모든 배움(교육)과 삶과 사랑과 살림과 꿈과 이야기와 놀이와 노래를 우리가 손수 지어서 기쁘게 누려요. 바로 오늘 이곳에 내 삶을 날마다 새롭게 짓는 길이 있어요. 4348.2.22.해.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배움책)



h*******e 2015.02.22. 신고 공감 0 댓글 0
리뷰 총점 종이책
사랑, 그것 하나면 충분하다
"사랑, 그것 하나면 충분하다" 내용보기
지금껏 육아와 교육에 관한 책을 읽지 않은 것은 관심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조바심을 칠 필요가 없다는 생각에서였다. 더군다나 그런 책들에서 이야기하는 내용이란게 거기서 거기다. 다 알고 있는 내용을 복습하는 것은 독서의 즐거움을 해친다.  육아에 정답이 있는가,라는 회의도 든게 사실이다. 아이를 어떻게 대할 것인가, 라는 문제에 나는 정답을 갖고 있었다. 그것은 사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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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껏 육아와 교육에 관한 책을 읽지 않은 것은 관심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조바심을 칠 필요가 없다는 생각에서였다. 더군다나 그런 책들에서 이야기하는 내용이란게 거기서 거기다. 다 알고 있는 내용을 복습하는 것은 독서의 즐거움을 해친다.  육아에 정답이 있는가,라는 회의도 든게 사실이다. 아이를 어떻게 대할 것인가, 라는 문제에 나는 정답을 갖고 있었다. 그것은 사랑이다. 넘치는 사랑 말이다. 되돌아보니 사랑만을 주겠다는 각오는 빗나가고 말았다. 사랑뿐만 아니라 상처 또한 준 것이 사실이다.  왜 어른들은 사랑하면서도 아이에게 상처를 주게 되는걸까.  내 잘못을 되짚어보고자 요한 크리스토프 아놀드의 <아이들의 이름은 오늘입니다>(포이에마,2014)를 읽었다.


그는 영국에서 국제적 기독교 공동체 브루더호프를 이끌고 있는 목사다. 책이 큰 줄기에서 기독교적 가르침을 차용하고 있다. 하지만, 그런 색채보다 강한 것은 지난 40년동안 수많은 부모와 아이들을 상담하며 얻은 교육과 양육의 지혜였다.  그의 이력에서 특별한 것은 1999년부터 전신마비 사고를 당한 뉴욕 경찰관 스티브 맥도날드와 함께 `폭력의 고리끊기'라는 프로그램을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 프로그램에선 학교에서 문제아로 낙인찍힌 중,고등학생과 대학생들을 상대로 용서를 통한 화해의 메세지를 전한다.  다양한 경험과 상담 사례가 아이들의 양육에 관한 평범하지만 진심이 담긴 저자의 가르침으로 승화한다. 


아이는 질책보다 용서가 필요한 존재며, 미움이 아닌 사랑받아야할 개체다. 이것이 양육과 훈육의 기본 원칙임을 저자는 강조한다. 아이를 망치는 것은 어른의 욕망이지 아이의 잘못이 아니다. 아이가 어른의 스승으로 이 세상에 왔다는 것은 종교적인 수사가 아니다. 아이가 그릇된 길로 나아가는 것은 어른을 흉내내서다.  아이는 따라하기의 천재들이다. 결과를 놓고 질책하는 것은 주객전도라 할 수 있다. 오염된 세상은 어른이 만드는 것이고,  그 세계에 자연스럽게 물든 이들이 바로 아이들이다. 우리가 잘못된 길로 들어선 아이들을 용서하고 흔쾌히 보듬어야 하는 이유다.


" 과잉 인구가 지구를 파괴한다는 전문가들의 말에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이 지구를 파괴하는 건 탐욕과 이기심이지 아이들이 아니다. 아이들은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주기 위해서 이 땅에 온다. 가만히 귀를 기울이면 아이들이 우리의 선생으로 왔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복잡하기만 한 세상에서 우리 어른은 아이들만 줄 수 있는 교훈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17쪽, <아이들의 이름은 오늘입니다>


세계에서 가장 높은 학업성취도를 보이는 핀란드에선 아이가 일곱 살이 되어야 공부를 시킨다. "이들 국가의 교육자들은 일곱 살까지 아이들이 가장 잘 배우는 방법은 노는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고도 그들은 학교를 졸업할 때쯤이면 학업 성취도가 세계 상위권이다. 유치원부터 조바심을 내고 아이를 들볶는 한국 상황과는 여러모로 비교된다.  교육이란 획일적인 가르침이기 마련이다.  획일성은 창의성의 건너편에 있는 말이다.  일곱 살 이전의 아이는 놀면서 가장 많이 배운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아이가 자유롭게 노는 일을 불안하게 바라보는 부모들은 자녀를 창의적 인간으로 길러내는 것을 자신도 모르게 방해하는 것이다.


오늘날 맞벌이 부부는 아이들과 함께 하는 시간이 부족하다. 이 부족한 시간을 보상하는 방법으로 자녀들에게 스마트 기기를 선물한다. 바쁜 부모와 시간을 보낼 일이 없는 아이들은 컴퓨터와 테블릿 피시를 조작하는 일에 익숙하다. 어떤 부모들은 아이가 최신 전자기기를 자유롭게 조작하는 일을 빠르게 배우길 소망한다. 최신 기술도 공부의 일종이라 믿기 때문이다. 반면, 캘리포니아 로스앨터스에 거주하는 구글, 애플, 휴렛패커드의 경영진 자녀들은 발도로프 학교에 다닌다. 발도로프 학교에선 첨단 기기만 아니면 그 어떤 것도 교육 자료로 환영한다. 펜과 종이, 뜨개질바늘, 가끔은 진흙도 등장한다. 컴퓨터는 눈을 씻고 찾아도 볼 수 없다. 첨단 기술 기업의 경영자들이 자녀를 컴퓨터로부터 보호하는 학교를 선택했다는 것은 의미심장한 일이다.


"컴퓨터 엔지니어 출신의 교사 캐시 와이드는 배움을 아주 매력적이면서도 손에 잡힐 수 있을 정도로 실제적인 것으로 만들려고 애쓴다. 작년에 캐시는 산수 시간에 분수를 가르치기 위해 학생들에게 음식을 자르게 했다. 사과, 케사디야, 케이크를 4분의 1,  2분의 1,  16분의 1로 잘랐다. `4주 동안 분수로 먹고 살았어요.  제가 아이들에게 다 돌아갈 수 있게 케이크를 자를 때 아이들이 딴짓을 하고 있었을 거라고 생각하세요?'  교실을 첨단 기술로 가득 채우는 정책을 옹호하는 이들은 현대 사회에서 경쟁하려면 컴퓨터가 필요하다고 항변하지만, 발도로프 학교의 부모들은 되레 묻는다.  `그렇게 배우기 쉬운 컴퓨터를 뭐 하러 서둘러 가르쳐요?'"  74-75쪽


아이의 양육 과정에서 갈등을 겪는 부모들은 순전한 사랑과 엄격한 훈육 사이에서 어떻게 균형을 유지할 것인가로 고민한다. 모든 부모는 사랑이란 감정을 훼손하지 않는 채,  아이가 잘못된 습관과 행실을 고칠 방법을 연구해야 한다. 그런데, 사랑과 훈육을 결합하기가 쉽지 않다.  내면의 사랑을 외부의 엄격성으로 드러내기 마련인, 훈육 과정은 아이에게 상처를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어린 시절의 기억을 되살리며 정답에 가까운 조언을 건넨다.  "아이를 훈육하기를 두려워마라. 하지만 아이가 미안해하는 걸 느끼는 순간 즉시 완전히 용서하는 걸 잊지 마라"(119쪽)  유년을 생각해보면 우리 자신이 얼마나 눈치가 빨랐고 영리했는지 깨닫게 될 것이다.  지적당하지 않아도, 아이들이란 자신의 잘못을 깨닫기 마련이고 질책 당할 준비를 하기 마련이다.  우리의 목적지는 질책이 아니라 사랑이다.  잘못을 고백하는 아이를 따뜻하게 안아주고 용서하는 것이야말로 사랑이란 진심을 드러내는 최고의 훈육이다.


이 책의 후반부에는 독일 소설가 에리히 마리아 레마르크의 소설 <귀로 Der Weg zuriick>가 소개 돼 있다. 그는 1차 세계 대전 직후, 한때 시골 학교 교사로 재직한 적이 있었다. 그는 이 시기의 짧은 기억을 소재로 훗날 <귀로>라는 소설을 집필한다.  자신의 경험을 투영한 듯한 이 작품은 비참하고 잔인한 전쟁터에서 돌아온 교사가 해맑고 순수한 아이들을 맞대고 선 교탁에서, 어른들의 잘못된 욕망과 범죄로 물든 세계를 반성하는 모습이 잠시 등장한다. 소설 속 교사의 모습으로 화한 레마르크는 이렇게 적고 있다. " 이 끔찍한 시대에도 홀로 죄악에 물들지 않고 순전함을 지킨 너희 작은 생명에게 나는 무엇을 가르쳐야 할까?"(166쪽)   야만적인 전쟁에 참여한 사람으로서, 그는 자신과 우리의 문명이 유년의 밝은 빛을 띄는 아이의 순수성을 오염시키지 않기를 소망하고 있다.  이 소설의 마지막 단락은 이렇게 끝난다.


" 경련이 온 몸으로 퍼져 마치 돌처럼 굳어가는 것만 같다. 이러다 무너져 내릴 것만 같다... 간신히 입을 연다. `아이들아, 이제 가거라 오늘 수업은 없다. ' 내 말이 진담인지 확인하려고 어린아이들이 나를 살핀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금 말한다. `그래, 맞아. 오늘은 가서 놀아라.  하루 종일. 숲에 가서 놀든지, 개나 고양이와 함께 놀려무나.  내일까지 학교에 돌아올 필요는 없다.' "  166-167쪽


"우리 아이가 이렇게 달라졌어요"라는 프로그램을 한 때 열심히 본 적이 있다. 그 프로그램에선 어떻게든 아이를 어른이 생각하는 방향으로 교정하기 위해 노력하고, 결국 프로그램의 말미에선 아이가 교정되고야 만다. 잘못된 습관을 고쳐주는 것은 어른의 책임인 것은 맞다. 그러나, 우리가 너무 조급한 것은 아니지 되돌아봐야 한다. 이 책의 저자라면 아마도, 보다 더 많은 인내와 대담한 용기를 부모에게 요구했을 듯하다. 그리고 좀 더 참아주고 인내하지 않았을까. 아이가 어른의 사랑과 인내에 보답하는 그 순간까지 말이다. 아이가 잘못된 습관과 못된 행실을 갖고 있다면, 그것은 일차적으로 어른의 책임이기 마련이다.  우리는 아이가 바뀌길 희망하면서, 우리 자신을 바꾸지는 않는다. 


말로써, 아이에게 무엇을 가르치지 말고 행동으로 어른이 본을 보이는 것은 어렵다. 교육과 양육이 어려운 것은 어른 자신은 변하지 않으면서 아이에게 이상적인 욕망과 형태를 투사하기 때문은 아닐까?  레마르크의 소설 <귀로>에 나오는 선생님은 양심의 가책을 느낀다. 그는 아이들을 볼 낯이 없는 것이다. 그가 교단에 선 것은 어른이기 때문이지 선생으로서가 아니었다. 오히려 전쟁과 욕망에 파괴된 세상이야말로 아이들의 정직과 순수함에서 가르침을 받아야 한다.  아이들은 어른들의 진정한 스승이며 거울이다. "아이는 언제나 옳다"  잘못된 것은 세상이고 어른들이다.  하여, 우리는 하루에 수십 번이라도 용서해야 한다. 아이들이 번번이 말썽을 피워도, 아이를 향한 믿음을 잃지 말아야 한다. 저자는 "아이들에게 희망이 없어라고 체념하는 것은 본래 그들에게 희망이 부족한 탓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사랑이 부족한 탓이라"고 단언한다.  자녀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더 많은 사랑이다.  그곳에서 지혜와 인내가 샘솟을 것이다. 사랑, 그것 하나면 충분하다. 



s*****7 2015.04.11. 신고 공감 0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