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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시간 속에 숨어 있던 것이 내 손안에 돌어왔다
"지금까지 시간 속에 숨어 있던 것이 내 손안에 돌어왔다" 내용보기
_슬픔이라는 감정의 실체를 잡으려는 건 처음부터 무의미한 집착인지도 모른다. 누구에게도 불가능한 일이고, 누구도 슬픔의 비밀를 알고 싶어하지 않는다. 안다고 한들 공기처럼 도처에 부유하는 슬픔을 지울 수는 없다. 사람들은 그런 슬픔에 등을 돌리고 다른 이유를 찾아내서 우는 것일까.   _삶이란 이렇듯 늘 분주하기 마련이다. 죽음이 눈앞에 닥쳤을 때는 실컷 슬퍼하겠다고
"지금까지 시간 속에 숨어 있던 것이 내 손안에 돌어왔다" 내용보기

_슬픔이라는 감정의 실체를 잡으려는 건 처음부터 무의미한 집착인지도 모른다. 누구에게도 불가능한 일이고, 누구도 슬픔의 비밀를 알고 싶어하지 않는다. 안다고 한들 공기처럼 도처에 부유하는 슬픔을 지울 수는 없다. 사람들은 그런 슬픔에 등을 돌리고 다른 이유를 찾아내서 우는 것일까.

 

_삶이란 이렇듯 늘 분주하기 마련이다. 죽음이 눈앞에 닥쳤을 때는 실컷 슬퍼하겠다고 마음먹고 있지만, 현실에서는그럴 시간도 없이 이제 죽나 싶으면 이미 죽었을지도 모르고, 언제 죽을지 미리 안다고 해도 다른 자잘한 일들을 처리하느라 슬퍼할 겨를이 없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결국 슬픔과는 아무런 연도 없이 이 세상을 살다 생을 마치는 셈이다.

 

_슬픔을 피함으로써 살아올 수 있었던 것이라고도, 그렇게 시간의 표면을 부유해온 것 자체가 다름아닌 어머니의 슬픔이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어머니는 앞으로도 내내 강박적으로 바삐 몸을 움직이다 삶이 다했을 때 오빠나 내 아들의 일은 오히려 기쁨으로 떠올릴지도 모른다.

 

_기억이 되살아났다는 감촉은 아니었다. 분명 그때, 지금까지 시간 속에 숨어 있던 것이 내 손안에 돌어왔다. 뜻밖의 기쁨에 나는 꿈결에도 눈물을 흘렸다.

 

:「슬픔에 대하여」, 쓰시마 유코, 『묵시』

 

 

내용이 무겁다고 듣고서 한꺼번에 다 읽지 않겠노라, 오늘은 한 꼭지만 읽어야지 하고 펼쳤는데 그만 다 읽어버리고 말았다. 도무지 중간에서 그만둘 수가 없었다. 누군가를 잃어버리는 일은... 죽음을 맞이한 일이라 똑같다 할지라도 찬란했던 날들이 지나 수명이 다해 가 버린 사람과 이제 겨우 인생의 초입에 들어선 아이들 잃어버리는 일은 달라도 많이 다를 것이다. 그래서 더 마음이 무겁고 슬프다.

 

이 소설집은 소설의 형태를 띠고 있지만 산문 같다. 소설의 주인공과 다르지 않는 작가. 그녀를 낳자마자 세상을 떠난 아버지, 자라면서 잃어버린 오빠, 그에 자신의 아들마저 어린 나이에 보내버린 여자. 그러니 그녀의 슬픔을 우리가 안다고 해도 얼만큼 이해할 수 있을까, 눈물이 안 나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슬퍼하지도 못하는 마음 역시 그러할 것이다.

 

소설집 중에 유독 이 단편이 눈에 들어온 것은 그 슬픔에 대해 그녀가 적어놓았기 때문이다. 나의 슬픔처럼 다가온 문장들이 읽을 때마다 가슴을 아리게 한다.

 

이 소설집은

쓰시마 유코가 자신의 단편집에서 손수 고른 작품들만 실렸다. 한데 일부러 자신의 아픔과 관련된 소설들을 골랐다. 그녀의 아픔이 십 년에 걸쳐 전해 온다. 누구든, 사랑하는 누군가를 잃어버리는 일은, 세상에서 가장 슬픈 일임에 틀림 없을 것이다.

 

 

 

 



j****o 2013.08.20. 신고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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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예술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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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예전부터 예술은 인생의 위로라고 생각했다. 예술이 생존에 필요한 요소는 아니지만 예술이 없으면 생존할 수 없는 것 또한 진실이라고 생각했다. 어떤 형태의 예술이든 인생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에게는 예술이 필요하다고.   요즘 나는 언어를 통한 예술에 푹 빠져있다. 문학. 언어 예술. 문학.   그전까지는 문학이 무엇인지, 그것이 왜 예술인지 생각하지 못했다. 어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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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예전부터 예술은 인생의 위로라고 생각했다. 예술이 생존에 필요한 요소는 아니지만 예술이 없으면 생존할 수 없는 것 또한 진실이라고 생각했다. 어떤 형태의 예술이든 인생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에게는 예술이 필요하다고.

  요즘 나는 언어를 통한 예술에 푹 빠져있다. 문학. 언어 예술. 문학.

  그전까지는 문학이 무엇인지, 그것이 왜 예술인지 생각하지 못했다. 어떨 때는 흥미로 책을 읽거나 어떨 때는 저축하듯이 단순히 독서량을 늘리기 위해 읽었다. 그런데, 가끔 가다가 아주 가끔 가다가 나를 멍하게 하는 책들이 있다. 그 다음 책을 읽을 수 없게끔 감정에 푹 빠지게 하는 책들이 있다. 이 책도 그런 책들 중 하나다. 아주 진귀한 책이다. 이런 책은 사실 그다지 쉽게 만날 수 없으므로.

 

  우선, 표제작 묵시는 자신의 뜻대로 사랑하는 남자의 아이를 낳고 혼자서  아이를 키우는 화자와 일 년에 한 번 아이들을 만나는 아이의 아버지의 침묵의 거래, 그리고 아버지가 없는 아이들과 아버지가 되어주는 들고양이들의 침묵의 거래(묵시)를 의미한다. 신형철의 문학 팟캐스트를 듣고 이 작품을 구입하게 되었다. 그러나 다 읽고 나서는 그 다음에 이어지는 작품들 때문에 나는 이 책을 좋아하게 되었다.

 

  예전에 죽은 오빠의 죽음을 통해 죽음의 의미를 생각하는 이야기(「욕조」, 무방비한 상태일 때 찾아오는 혼령에 대한 상상).

  사랑했던 남자에게서 얻은 아들에 대한 사랑 이야기(「신비한 소년」, 자신의 꿈이 만들어 낸 소년에 대한 이야기).

  그 아들의 죽음 이후 아들이 살아 돌아오는 꿈을 반복해서 꾸는 이야기(「꿈의 기록」, 수없이 반복되는 같은 내용의 꿈. 그건 죽은 아들이 다시 살오는 꿈이다.)

  집들에 대한 상념들로 표현된 아들을 잃은 지은이의 회한(「자카 도프티-여름 집」, 아들이 살고 싶어했던 집에 대해서, 아들이 살았으면 좋았을 집에 대해서 말하고 말하고 말하는 이야기. 그리고 그 아들이 살아 있었다면 같이 살았을 집들에 대한 꿈을 계속해서 꾸는 이야기).

  시간이 흐른 후 자신이 겪었던 감정들에 대해 서술하는 이야기(「슬픔에 대하여」, 직접 겪은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진짜 슬픔에 대한 이야기).

  이 네 편의 단편의 시간 순서대로 죽은 아들과 관런된 이야기이다. 앞의 두 편은 아들이 죽기 전에 쓴 것이고 뒤의  두 편은 아들이 죽고 난 뒤 쓴 소설로 생각이 된다.

  
  이건 자전소설이다. 그런데 사실이라서 충격적이거나 사실이라서 생생하다거나 소설이라서 흥미롭다거나 묘사가 아름답다거나 이런 말이 아니다. 그냥 아들을 잃은 엄마의 마음이 그대로 느껴졌다. 그리고 내 마음이 너무 저릿했다. 그냥 석양 속에서 홀로 멍하게 서 있는 기분이 들었다. 그뿐이다. 분석할 수 없기 때문에 나는 이것이 진짜 예술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 소설은 마음의 기록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마음을 정확하게 언어로 표현했다는 점에서 궁극의 예술이고 궁극의 아름다움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덧붙이자면 이 소설집에 나오는 문장들이 자꾸 나를 붙든다. 그런데 그런 문장들을 잘라서 따로 기억할 수가 없다. 그것들은 따로 있을 때보다 하나의 작품으로서 나를 붙든다. 그래서 나는 계속해서 그녀의 작품들을 오롯이 읽고 또 읽고 그대로 흡수하는 중이다.  

i******2 2016.01.20.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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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과 주고받는 은밀한 묵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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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시마 유코의 단편집 『묵시』를 읽었다. 제목이 주는 느낌처럼 담담하고 깔끔하고 고즈넉한 이야기들이 가득했다. 독립된 작품이라고는 해도 『묵시』 안의 단편들은 유기적이라 할 만큼 많이 닮아 있다. 내 바로 옆에서, 마치 내 일부인 것처럼 존재했던 대상을 잃은 후의 상실감. 지금까지 발맞춰 걸으며 함께 만들어 왔던 발자국을 이제는 혼자 찍어야 하는 외로움과 쓸쓸함. 앞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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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시마 유코의 단편집 『묵시』를 읽었다. 제목이 주는 느낌처럼 담담하고 깔끔하고 고즈넉한 이야기들이 가득했다. 독립된 작품이라고는 해도 『묵시』 안의 단편들은 유기적이라 할 만큼 많이 닮아 있다. 내 바로 옆에서, 마치 내 일부인 것처럼 존재했던 대상을 잃은 후의 상실감. 지금까지 발맞춰 걸으며 함께 만들어 왔던 발자국을 이제는 혼자 찍어야 하는 외로움과 쓸쓸함. 앞으로 더 가지 못하고 계속 돌아보며 그리워하다가 쭈뼛쭈뼛 돌아가서 그 발자국 위에 내 발 하나를 슬며시 대보기도 하고 어느새 앞서가고 있는 발자국의 환영을 보기도 한다.

 

남겨진 자들은 주로 여자였다. 그리고 어머니였다. 절대적으로 믿고 의지하는 이의 죽음을 경험한 어머니와 그런 어머니의 고독에 휩쓸리는 것이 두려웠던 딸. 어머니처럼 살고 싶지 않아 어머니 반대편으로 멀리멀리 도망쳤지만, 결국은 그 시절의 어머니와 비슷한 눈빛을 하고 그녀와 마주보는 사이가 됐다. 그림만 놓고 보면 비극적이고 비애가 서린 풍경이겠지만 그녀들이 안쓰럽거나 청승맞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상실을 겪은 여자들을 그리면서도 감상으로 빠지지 않고, 오히려 질척한 감정을 쏙 뺀 작가 특유의 담담하고 깔끔한 문체가 돋보였다.

 

욕실 창은 집안의 다른 창문과 달리 거의 밤에만 보게 된다. 그것도 벌거벗고 밤의 창을 바라보는 것이다. 사람이 이렇게까지 무방비한 상태로 바라보는 창이 있을까. 죽은 이가 그런 창을 놓칠 리 없다. 밤이 되고 욕실 창에 불이 밝혀지면 사자死者는 그리운 마음에 성큼성큼 다가와 유리창에 얼굴을 갖다 댄다. … 언제까지 찾아올 생각일까, 이젠 이쪽으로 들어올 수 없는데. 아무리 욕실 창에 붙어 있어도 이제는 결코 안으로 들어올 수 없다는 죽음의 의미, 그것만이라도 오빠에게 전하고 싶었다. _「욕실」 중

 

남겨진 이의 눈에는 죽은 아들의 모습이, 돌아가신 어머니의 움직임이 보인다. 흐릿하지도 단편적이지도 않은, 또렷하고 아주 말끔한 모습으로. 남겨진 이는 기쁘고도 감동스러워 다른 이들을 잡고 이야기하지만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 진지하지 않은 타인의 반응에 조금 섭섭하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하지만 그래도 괜찮다. 죽은 이는 나를 위해 찾아온 것이고, 그래서 내 눈에만 보이는 거니까. 나만 알아주면 되는 것이다. 아무 소리도 내색도 없이 스치듯 주고받는 눈맞춤,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꽉 차는 것 같은 행복감. 그 모습을 은밀히 지켜보는 나(독자) 또한 마음 한구석이 따뜻해진다. 마치 소설과 묵시를 주고받은 듯한 느낌이다.

 

나는 내 좁은 집에도 아들아이가 숨어서 살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깨닫고 나니 조금도 뜻밖이 아니었다. 아들아이는 작디작은 알갱이 같아서 딸아이조차 알아차리지 못했다. 하지만 세심히 주의를 기울이면 어디서든 발견할 수 있다. … 나는 지금도 여전히 슬픔을 모른다. 아이가 여기저기에 살아 있다는 사실을 아는데 무어 슬퍼할 필요가 있을까. 작은 알갱이가 된 아이가 매일 내게 기쁨의 빛을 전해준다. _「슬픔에 대하여」 중

 

남동생을 잃고 홀로 된 딸아이를 보는 엄마의 마음이 편할 리 없다. 죽은 동생과 관련된 이야기가 나오거나 그를 환기시키는 무엇을 볼 때, 엄마는 슬그머니 딸의 눈치를 한 번 더 보게 되지만 딸아이는 무덤덤하고 무신경한 척 제 인생을 살아간다. 아들아이를 잃은 일로 딸아이에 대한 걱정과 불안이 덩달아 높아지긴 했지만, 무신경한 척 하려는 아이를 부러 자극할 이유도 없을 터. 어느새 훌쩍 자란 딸아이를 한 발짝 멀찍이서 지켜볼 뿐이다. 자식을 소유하려 하지도 미화하려 하지도 않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인정. 이것이야말로 타인에게 줄 수 있는 가장 은근하고 완벽한 배려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아이도 부모의 묘한 꿈이 자기 몸으로 파고들었음을 깨닫고 반발, 혹은 동의하면서 자신이 부모와 연결되어 있음을 인정하게 된다. 부모와 아이가 연결되어 있다면 끈은 그것뿐이다. 부모라 해도 결국 아이들에게서 자신의 꿈을 뽑아내는 게 고작이다. … 이 아이가 세상에 살고 있다는 사실만을 생각하게 되었다. 아이와 함께 이 세상을 살고 싶었다. _「‘신비한 소년’」 중

 

『묵시』는 대상뿐 아니라 죽음 그 자체에 대해서도 인정한다. 매일매일 죽은 이를 회상하며 그리움 속에 빠져 살지 않고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더 열심히!’하고 억지로 힘을 쥐어짜는 것도 아니다. 그냥, 살아간다. 오늘은 오늘대로 내일은 내일만큼, ‘지금’과 ‘지금 곁에 있는 사람들’에게 충실히 살아가는 결연한 발걸음이 느껴진다.

그만큼 자주, 오래오래, 죽은 이를 꺼내어 보고 생각하며 울고 웃고, 다시 또 그리고 좌절하다가 초연해졌을 날들이 상상돼 사실은 마음이 아프지만, 나에게 안타까워할 자격이나 있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들어 말도 마음도 아끼게 된다. 소설이 보여주었듯, 나도 이 소설을 그 자체로 인정하는 것만이 말 못 할 나의 마음을 전하는 길이리라.

 

『묵시』는 화장기 없는 어머니의 말끔한 맨 얼굴 같은 소설이다.

그래서 더 정겹고, 소중하고, 시시때때로 울컥하게 만드는 소설이다.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인생이다.

y****a 2015.04.05.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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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의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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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인사말을 읽는 순간 박완서 선생님이 떠올랐다. 나뭇가지가 툭하고 부러져나간 나무 이야기 부분에서 감이 왔다. 아들을 잃은 어미의 슬픔이 알알이 박혀있다. 요란스럽지 않게 덤덤히 기술하지만 생사의 경계를 넘나드는 혼미한(몽환적) 상태로, 죽음과 상실 이후에 오는 산자의 ‘드러낼 수 없는’(전달될 수 없는) 슬픔을 말하고 있다. 시기적절한 말의 결핍으로 인해 망망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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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의 인사말을 읽는 순간 박완서 선생님이 떠올랐다. 나뭇가지가 툭하고 부러져나간 나무 이야기 부분에서 감이 왔다. 아들을 잃은 어미의 슬픔이 알알이 박혀있다. 요란스럽지 않게 덤덤히 기술하지만 생사의 경계를 넘나드는 혼미한(몽환적) 상태로, 죽음과 상실 이후에 오는 산자의 ‘드러낼 수 없는’(전달될 수 없는) 슬픔을 말하고 있다. 시기적절한 말의 결핍으로 인해 망망대해의 고립감과 역정이 양산된다. 아주 가끔이지만 그것이 선율로든 인간의 언어로든 슬픔에 제대로 가닿을 때 그런 순간은 신비롭게 아름답고 벅차다.

 

남에게 전할 수 없는, 막힌 곳에서 울리고 있어야 할 소리가 현실에서 하나의 노래가 되어 있었다. (57)

 <묵시>에는 배출되지 못한 채 멍울져 있는 슬픔들이 가득하다. 차라리 소리내어 울기라도 하면 감정 정화라도 될 텐데 작가(혹은 화자의 딸아이)의 호통에 그만 눈물을 꾹 참아야만 했다. 아버지를 잃고 이어 형제를 잃고 아들마저 잃은 이 앞에서 눈물은 감상적인 반응이라 내리 눌러야했다. 작가는 눈물과 슬픔을 나란히 두지 않는다. 다음 인용문에서처럼, 어느 정도의 감정적인 여유가 있을 때 발생하는 것이 슬픔이란다. 그렇다면 그 전까지는 충격과 넋 나감, 통각인 것일까.

 

그때도 슬픔이라 부를만한 감정은 내게 없었다. 흐느낌과 눈물은 나조차 알 수 없는 곳에서 흘러나오는 것으로, 날이 추우면 소름이 돋고 상한 것을 먹으면 토하는 것처럼 몸의 자동적인 반응에 지나지 않았다. (171)

 

일반적으로 말하는 슬픔이란 스스로를 가여워하는 감정을 의미하는 것일까. 하지만 스스로를 가여워하기 위해서는 우선 스스로를 용서해야 한다. 스스로를 용서하기 힘든 사람은 쉽게 슬퍼할 수도 없다. 아니면 자책이란 감정 자체가 이미 슬픔의 영역에 포함되는 것일까. 그렇다면 노여움 역시 슬픔 속에 흡수되는 하나의 감정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 (174)

 

 작가는 상실과 죽음 이후 살아서 이어가는 시간 속에 슬픔의 본질이 드러나고 파악된다고 말하는 것일까? 아니면 진짜 슬픔을 조우하기 전까지는 그 무엇도 슬픔이 아니라는 것일까? 막연히 슬픔이라고 싸잡아 말하는 것에 대해 구분을 두고 있다. 작가는 독자에게 충격을 물기로 풀어내며 지나칠게 아니라 뼈에 사무치게 매일 밤낮으로 그 빈자리를 응시할 것을 요구한다. “슬픔은 언제까지고 사라지지 않”(23)으니, 억지로 삶에서 들어내거나 잘라내지 말란다. 삶의 실제 영역 안으로 죽은 자를 되살려 안으로 들일 순 없지만, 꿈 속 공간 안에서 만큼은, 함께 그린 집에서 만큼은, 그리고 어미라는 사람의 눈과 품안에서 영원히 사라지지 않음을 말한다.

 

어떤 어머니라도 아이를 키우는 내내 무언가 아이 입장에서 보면 조금도 정당하지 않은, 바보스럽기 그지없는 꿈을 꾸지 않을까. 부모들은 각자의 꿈속에서 아이들을 키운다. 현실적으로 보이는 꿈이든, 정말 꿈같은 꿈이든 마찬가지다... 물론 그 어느 쪽도 꿈일 뿐이다. 하지만 꿈이 싫다고 아무런 꿈도 꾸지 않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필요하니까. 자기에게서 태어난 아이에게 특별한 감정을 품기 위해. 만약 꿈을 꾸지 못한다면 부모들은 과연 아이에게 얼마만큼을 품을 수 있을까. 아이도 부모의 묘한 꿈이 자기 몸으로 파고들었음을 깨닫고 반발, 혹은 동의하면서 자신이 부모와 연결되어 있음을 인정하게 된다. 부모와 아이가 연결되어 있다면 끈은 그것뿐이다. 부모라 해도 결국 아이들에게서 자신들의 꿈을 뽑아내는 게 고작이다... 미치에의 꿈이 어느새 음악처럼 울려퍼지기 시작했다. (70-71)

 

 자식을 품음과 함께 시작된 꿈은, 그 “멋지고 완벽한 꿈”(67)은 물리적 시간을 뚫고 꿈결같이 계속 될 수 있단다. 한 남자의 사랑을 잃고도 살 수 있는 게 이 생명체의 따뜻한 감촉이 있기 때문이다. 모든 생명체는 언젠가는 소멸될 운명에 처한다. 그렇기에 이 한정된 시간 안에서 후회 없이 만지고 애정 할 수 있어야겠다. 이 지옥불 같은 세상에서 그래도 사람을 살게 하는 것은 누군가 나를 위해 지어주는 밥과 기꺼이 나눠주는 온기, 그리고 나의 부재를 통렬히 안타까워하며 나의 선택과 미래를 일말의 의심 없이 믿어주는 어떤 기운 덕분이 아닐까 싶다. 가급적 곁에 머물며 함께 하려는 진심 때문에 오늘이라는 공기에 숨을 실을 수 있는 것일 게다.

 나는 책을 읽는 내내 '싸구려 눈물'을 쏟지 않으려했다. 나중에 거울을 보니 토끼처럼 눈이 새빨갰다. 눈빛이 형형하고 얼굴은 까칠했다. 올해 4월 생떼 같은 자식을 잃었던 어미들의 넋 나간 모습이 스쳐가면서 한발 늦게 읽은 것이 오히려 소설의 요지에 맞지 않았나 핑계를 삼아 본다. 적어도 억지스럽고 불필요하게 형식적인 위로를 건네는 실수는 하지 않았으니 말이다. 가보지 않은 시간과 겪어보지 않은 일에 대해 우리는 지나치게 아는 척하며 간섭하고 쉽게 말한다(나부터가 그렇다). 당면하지 않은 일에 대해, 내가 마주해 본 시간이 아닐 때는 책의 제목처럼 ‘묵시’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책의 묵시는 “침묵을 지키면,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는 일 없이 언제든지 거래를 재개할 수 있는 상태를 유지할 수 있”(29)는 데서 가져왔다. 내가 이해하기로는 어설픈 말이나 섣부른 제스처보다는 건드리지 말아야 할 영역을 존중하는 것을 묵시로 정의한 듯싶다. 사전적인 의미로는 默示, 직접적으로 말이나 행동으로 드러내지 않고 은연중에 뜻을 나타내 보인다, 이다.

 어쩌면 우리가 소란스럽고 떠들썩함을 피해 조용한 밀실로 찾아드는 것은 너무 많은 말과 장식들에 치이고 지쳤기 때문일 것이다. 아이로니컬하게도 그 지친 몸과 마음은 진정한 소통과 진심어린 말을 갈구한다. 타인과의 부대낌과 생각과 현실의 차이, 내 뜻대로 따라주지 않는 세상을 향한 갈증과 허기가 나를 움츠려들게 하고 거듭 외부와 경계막을 치게 하면서도, 나의 시선은 늘 밖을 향하고 있다. 그래서 “슬픔이란 감정이 진정 내 것이었던 적이 있었는지”(168) 묻게 되는 것 같다. 삶의 진면목과 진실을 마주하면서도 ‘도망치고’ 빠져나오느라 그 너비와 깊이를 제대로 가늠해보지 못한 게 아닌지, 그래서 어떤 일이 있고 난 다음에도 특별한 말로 재현할 수 없는 게 아닌가 싶다. 상실과 죽음과 삶, 그 ‘종이 한 장’의 경계를 예리하고 섬세하게 글의 양식으로 담아내는 이들의 부단한 노력과 독대하는 자세에 다시금 마음이 숙연해진다. 내 삶에서 글로 안착되지 못하고 그저 날아가 버린 것들을 향해 허망하게 손을 뻗어본다. 이런 유의 빚진 마음이 우리 안에 다 있지 않을까 싶다. “시간을 의식할 때 사람은 슬퍼진다”(175)라지만 <묵시>를 읽는 동안 되돌릴 수 없는 어떤 시간에 생명과 활기를 불어넣는 그 징하고 찡한 삶의 자세에 나는 그만 알록달록 물들고 말았다. 나뭇가지로부터 떨어져 나온 낙엽은 쓸쓸하고 아프겠지만 그 고혹적인 자태로 충분히 아름답다.

 ‘다시 보자’(비앵토)라는 말이 이토록 정겹고 희망적인 것인지 미처 몰랐다. <모든 죽은 이의 날>에서 외사촌지간에 뜻밖에 벽이 무너져내려 '쏟아지는 말'에 희망을 걸어보고 싶다. 그리고 생사의 경계를 아스라하게 넘나들던 화자에게 그나마 힘이 되어 주었던 것은 다름 아닌 딸의 “단순한 언어”(125)였다. 투박하고 까칠하고 예리하지만 그런 객관화와 거리두기를 통해 삶의 어느 부분은 균형을 잡는 '척'이라도 할 수 있다. 무엇보다 그게 무엇이든 이야기로 되살아나는 순간은 마술적이고 따뜻하고 희망적이지 않나 싶다.

 

돌아간다, 는 말을 순순히 쓸 수가 없었다. 언제나 돌아간다고 생각은 하면서도 그 말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그만큼 돌아간다는 말에 어린 시절과 다름없는 실감이 느껴지길 바라며 생떼를 쓰듯 매달렸다고도 할 수 있다. 누구에게도 돌아갈 곳은 없다. 돌아가고 싶어도 그리운 그 시절로 돌아갈 수는 없는 법이다... 잃어버린 것을 잃어버린 것으로 직시하는 가장 작은 책임을 나는 아직 다하지 못했던 것이다. (206)

 

멀리 떠나오니 도쿄는 이제 시간이 멈춘 공간이 되어서, 시간 속에서 잊혀야 할 추억이 오히려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되살아나. 귀신처럼 계속. (207)

 

언젠가 어디선가 너와 그 시간을 그리워하며 이야기를 나누게 될까. 웃으면서. 아니면 곤혹스러워하면서. 슬픔에 싸여서. 영어로, 아니면 불어로. 그도 아니면 일본어로.

나는 지금 일본어로, 너와 함께했던 그 시간들을 더듬는 중이야. (253)

s********d 2014.11.10. 신고 공감 0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