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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에 관한 책 서평을 쓴다는 것은, 기도에 관한 책을 쓰는 것에 견줄 수는 없으나, 정말 부담되는 일이다. 저자의 말처럼 “좀 더 깊은 기도의 체험이 있어야”(9쪽) 서평을 쓸 수 있지 않을까? 솔직히 나는 하루에 단 몇 분, 나만의 고독한 장소를 찾아가 무릎을 꿇는 것으로 만족하는 목사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이 책을 선택했을까? 까를로 까레또의 표현처럼, “하나님의 행복의 샘”에서 생수를 맛보고 싶어서가 아니었을까.
시인이자 목사인 저자 고진하는 일상의 소소함 속에서 ‘영혼의 젊음’을 향유하며, 노동과 수도, 예술과 영성이 어우러지는 ‘예수 명상 공동체’를 꿈꾼다. 이 책은 한 겨울 산속에 칩거하며 시쓰기에 몰입하고 있을 때 ‘성서 속 기도의 스승들’에 관한 책을 써 달라며 “푹푹 빠지는 눈길을 뚫고 찾아온 기자의 간곡한 요청”(9쪽)을 거절하지 못해 저술하게 되었다.
이 책은 성서 속의 기도의 스승 15명(혹은 17명)의 23편의 기도의 특징을 다루고 있다. 남자와 여자, 주인과 종, 유대인과 이방인, 그리고 그들의 중심에 예수님의 기도가 자리한다.
얼마 전 미국에서 목회하는 인도네시아 목사를 만났다. 그와 장시간 대화를 나누던 중, 최근 인도네시아의 기독교 성장세를 듣고 놀란 적이 있다. 기독교의 증가 현상의 배경에는 여의도순복음교회와 영락교회로 대표되는 한국 교회의 벤치마킹이 큰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인도네시아에도 기도원이 생겼고, 치유와 성공을 강조하는 긍정적 사고방식의 설교가 주를 이룬다. 그의 결론은, 교회의 성장은 현실과 이원화된 신앙생활, 기도생활이 필수라는 것이다. 그런 그에게 대답해 주었다. 인도네시아 교회가 계속해서 한국교회를 답습하면 조만간 우리 꼴 날 것이라고.
기도, 고통의 현장에 동참하는 것 무엇이 문제인가? 왜 우리의 기도는 차안에 대한 무관심과 애오라지 피안에 대한 열망이어야만 했는가? 강원도 원주 근교 산골짜기에서 ‘예수명상공동체’를 꿈꾸고 있는 저자에게 기도는 현실 자체요, 이 땅의 고통 받는 사람들의 울음소리 자체다. “꿈 없이 살던 한 여인... 더부살이 식물처럼 몸종으로 살던 기구한 운명의 여인”(15쪽) 하갈이 어린 아들과 함께 광야로 쫓겨났다. 죽음의 땅에서 아들의 울음을 들으며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 때 ‘어미’의 귀를 통해 들려오는 울음소리를 들으신 ‘하나님’을 조명하면서, 기도란 이 땅의 수많은 하갈들의 아픔을 듣는 것에서 시작된다고 강조한다. “우리의 귀가 밝아져 그 신음소리를 들을 때 그 소리를 듣는 우리의 귀는 곧 하나님의 귀가 됩니다”(23쪽). 한마디로 기도는 고통 받는 사람들의 삶의 현장에 동참하는 것임을 분명히 하고 있는 것이다.
기도, 일상의 이야기 우리는 일상을 살고 있으며, 작가 조정래의 말처럼, 그 속에서 “더러 성공도 하고, 많이는 실패하면서 또 새롭게 모색하고 시도”하면서 살아간다. 기도는 일상과 분리되지 않으며, 일상에 함몰되지 않고 일상의 신비를 경험케 한다. 그런 의미에서 기도는 ‘인간 연습’이 아닐까. 한마디로 기도는 일상 속에서 신비한 나니아의 세계로 들어가는 ‘옷장’이다. 기도할 때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절대자와 조우하는 ‘하나님의 집’으로 들어갈 수 있으며(31쪽), 소소하고 비루한 일상의 이야기를 토로함으로 수용감을 경험하며(46쪽), 마음 깊숙한 곳에 담아 둔 이야기를 털어놓음으로 “하나님과의 합일에서 오는 융융한 희열”을 맛볼 수 있다(62쪽). 이해할 수 없는 일상의 고통 속에서 숨어계신 하나님을 찾아 떠나는 삶의 여정이요, 숨어 계신 분을 향한 탄원(143쪽)이다.
기도, 자기 비움 한국 사회는 집단 정신분열질환에 빠져 있는 것 같다. “돈, 편리, 속도의 악령이 인간의 영혼을 삼켜버렸”(194쪽)고, 하나님과의 ‘사이 없는 사이’, ‘서로 안에 있음’(191쪽)이 깨지고 무한경쟁의 정글의 법칙이 지배한다. 죽도록 공부하고 일하다가, 죽음 앞에서는 그런 삶을 후회한다. ‘기적의 세대’를 노래하며 열광하다가 결국 그 누구도 구원할 수 없는 한계성에 절망한다. 채움과 독점을 축복으로 믿다가 삶의 무게에 짓눌려 버렸다. 이에 저자는 “복 받는 것에 대한 관심보다 복의 근원에 대해 깊이 묵상해야 할 때”(147쪽)라고 조언한다. 이제는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벗어나 고독의 절정에서 탐욕을 비우고 더 가까이 다가오는 따스한 체온의 절대자를 붙잡아야 할 때다(35쪽). 야베스에게 덧씌운 우리의 욕망을 벗겨내고, “‘십자가’가 지향하는 초월성과 ‘황금’이 가리키는 속물성의 ... 부조화한 간통”의 시대로부터 탈출해야 한다(169쪽). “세상의 소자들과 하나가 되”(214쪽)는 자기포기의 기도를 통해 진정한 해방의 기쁨을 맛볼 수 있다는 것이다(217쪽).
다시 기도의 자리로 한 때 우리는 기도에 올인했던 적이 있었다. 새벽기도, 금요철야, 수요기도, 기도원이 한국교회의 상징이었다. 하지만 어느 덧 우리는 이런 것들을 부끄러운 구습이라고 여기게 되었고, 차츰 교회에서 기도가 사라졌다. 기도를 많이 했던 것이 문제가 아니라, 현장을 떠난 기도, 이웃의 아픔에 동참하지 않고, 육신의 소욕을 쫓는 기도가 문제였는데 말이다. 우리는 이웃의 아픔을 외면하지 않은 채, 나만의 고독의 장소로 나아갈 수 있을까? 일상 속에서, 일상에 함몰되지도, 그렇다고 일상과 분리되지 않은 채, 기도의 자리로 나아갈 수 있을까? 저자는 그래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니까 우리가 여기저기서 조금씩 드린 기도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우리 속에 있는 하나님의 제단에 기도의 불이 꺼지지 않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247쪽). 잘못된 기도를 비판하다가 어느 순간 기도 자체를 부정했다. 통성기도, 방언기도, 관상기도... 어느 기도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삶의 현장에서 눈물짓는 이웃의 아픔을 들으면서도 삶의 무게에서 ‘나’를 지켜내려면 기도해야 한다. 나도 이제 일어나 하나님의 행복의 샘으로 나아가 영원한 행복의 노래를 부르러 가야겠다. “이보게, 진정 살아 있다는 건, 우리가 기도하고 사랑할 수 있다는 거야!”(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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