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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올로기는 건재하다. 마르크스에 의해 허위의식으로 규정된 이데올로기는 여전히 제대로 작동하고 있다. '나쁜' 이데올로기는 건재하다. 죽은 것은 다만 긍정적인 이상주의로서의 이데올로기다. 역사의 종말과 거대 서사의 죽음을 외치던 예언자들은 결국 보다 은밀해진 이데올로기에 놀아난 사이비로 판명이 되었다.
허위의식은 언제나/이미 엘리트 권력을 위해 복무한다. 영국의 좌파 저술가 일레인 글레이저는 정보 조작, 홍보 마케팅, 기만의 수사학, 넛지 정치, 연성 권력 같은 대중조작들이 더욱 교묘해지고 영악해지고 있다고 지적한다. “당신이 의심이 많다고 해서 속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지 마라.”
오늘날은 선전사회, 홍보사회다. 선전과 홍보의 도가니 속에서 옥석을 가려내는 일이 점차 어려워지고 있다. 저자는 진보에 대한 낙관주의와 현실에 대한 비관주의가 결코 반대의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마치 문학적 유토피아가 기실 디스토피아적 요소를 포함하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물론 낙관주의든 비관주의든 앞에 형용사 '현실적'이라는 표현을 반드시 덧붙여야 한다. 저자는 '현실적인 유토피아주의'를 요구한다.
"누구나 세상의 진보를 낙관할 수 있지만, 낙관주의야말로 비판에 근거해야 한다. 문제를 간과한다면, 그리고 반짝이는 예외들 뒤로 진실을 숨긴다면, 어떻게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겠는가? 마케팅으로 만들어낸 가짜 해결책을 우리가 계속 구매한다면 어떻게 세상을 개선할 수 있겠는가? 선택과 기회라는, 그리고 접근하기 쉬운 정보라는 가정 때문에 우리는 계속해서 환영들을 구매하는 데 합의하고 있다."(9-10쪽)
저자의 취지는 이해하지만 뭐랄까, 다소 학구적이라고 표현해야겠다. 저자의 말대로, 권력의 계략과 속임수를 폭로하기 위해서는 비관주의가 필요하다. 대중적 의지로 포장된 엘리트의 이익으로 가득한 세계에서 현실을 직시하기 위해서는 비관주의가 필요하다. 또한 혁명에 대한 과장 광고와 유토피아적 환상을 지적하기 위해서도 비관주의가 필요하다. 보다 중요한 사실은 이런 합리적인 비관주의에 기반한 비판은 결국 진정한 진보를 발견하는 계기를 가져온다는 점에서 낙관주의의 토대를 제공한다는 점이다.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여전히 문제가 되는 것은 현실적인 유토피아주의의 '피와 살', 즉 세부항목이다.
'넛지'에 대해 호감을 가진 독자, 넛지 효과를 실무에 활용하려고 노력했던 독자라면 이 책의 주장을 읽고서 다소 충격을 받을 수도 있다. 저자는 넛지 정치학은 대중들이 이성적으로 사고하고 행동하도록 권유하는 데 관심이 없고 오히려 대중의 비이성적인 행동패턴을 알아내어 대중들의 선택을 조종하는 데 관심을 갖는다고 비판한다. 저자가 사용한 넛지 정치는 비판적인 표현이다. 저자는 넛지 정치는 신경과학과 행동주의 경제학 연구로부터 파생되었으며, 프로이트 정신분석에 대한 거부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설명한다. 뇌과학의 지지자들은 인간을 조종하는 근원은 초자아와 이드가 아니라 뇌의 배선과 점화라고 주장하고 있는데, 저자는 오히려 프로이트를 지지하고 나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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