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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젝은 세계적인 사기꾼이다. 지젝은 촌구석 차원의 무뢰배가 아닌 전지구적 차원의 지적 건달이다. 이 말을 해놓고 보니 내가 마치 임금님이 벌거벗었다고 말한 안데르센 동화의 순진한 소년처럼 느껴진다. 지젝의 표현을 빌어 나도 이 지면에선 '똑똑 바보'의 천치 역할을 연기 좀 해야겠다. '헛똑똑이'라는 말이 좀 더 우리말스럽지만 말이다. 지젝의 사기꾼적 기질은 헤겔을 라캉을 전유해서 해석하겠다고 나선다는 점에 있다. 변증법자 헤겔을 굳이 반변증법자의 대명사라 할 수 있는 라캉을 통해 볼 필요가 있을까? 잘 알다시피 심리학의 거두 프로이트와 라캉 모두 무척 반철학적이었다. 라캉이 살아있다면 분명 자신의 담론으로 헤겔을 풀어보겠다는 지젝의 '장난질'에 반감을 표시했을 것이다.
그래도 지젝의 의도는 일단 접수했다. 지젝이 라캉으로 헤겔을 읽겠다는 것은 독일관념론에 대한 전복과 비판적 오독을 겨냥한 것이라는 것을. 독일관념론의 전통은 칸트, 피히테, 셸링, 헤겔이라는 4인방이 확립했다. 지젝은 교묘하게 칸트는 뉴턴 과학에, 피히테는 정치에, 셸링은 예술에, 헤겔은 사랑에 귀속시킨다. 그런데 지젝의 이런 범주화는 아무 의미도 없다. 솔직히 칸트의 저작에서 과학뿐만 아니라 예술과 사랑과 정치 모두를 읽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헤겔 철학이 '사랑'의 철학이라는 지젝의 궤변이 우습다.
지젝은 이 책 서문에서 독자들의 비판력 향상을 위한 유용한 개념어를 마련해 주었다. 그것도 세 가지나 말이다. 천치(IQ 0-25), 또라이(IQ 26-50), 얼간이(IQ 51-70)가 그러하다. 단지 지능지수에 따른 분류가 아니라 라캉이 말한 '큰 타자'와의 맥락을 고려한 분류이기도 하다. 지젝의 '욕'에는 철학과 심리학이 담겨 있다.
"천치는 그야말로 혼자로, 큰 타자 바깥에 있으며, 얼간이는 큰 타자 내부에 (멍청하니 언어 속에 거주하면서) 있으며, 또라이는 이 둘 사이에 있다. ㅡ큰 타자가 필요하다는 건 알지만 그것에 의존하지는 않은 채, 그것을 불신하면서.ㅡ"(25쪽)
지젝은 천치의 전형으로 천재수학자 튜링을, 얼간이의 전형으로 위대한 탐정의 멍청한 파트너들, 가령 홈즈의 왓슨, 푸아로의 헤이스팅스 등을 꼽았다. 그리고 또라이의 전형으로 카프카와 후기 비트겐슈타인을 내세운다. 그런데 어찌할까나? 지젝을 추종하는 국내외 얼간이들도 넘쳐나는데 말이다. 이런 얼간이들은 비록 먹물은 좀 먹었지만 헤겔도 라캉도 하이데거도 제대로 읽어보지 못한 풋내기들이다.
그런데 지젝의 말대로 라캉과 라캉의 이론이 정녕 헤겔의 반복에 불과할까? 보다 정직하게 얘기한다면 두 사람 모두 그저 플라톤의 반복, 아니 신플라톤주의자의 뒤를 잇는 지루한 철학적 재생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 스탈린주의자로 자처하는 지젝은 헤겔을 읽는 것이 우리의 넘어설 수 없는 인식지평이라고 주장하는데 스탈린이나 히틀러의 전체주의도 우리의 넘어설 수 없는 악의 지평을 펼쳐보인 장본인들이다. 내가 존경하는 노엄 촘스키 선생이 지젝이 얘기하는 것이 무슨 말인지 하나도 이해못하겠다고 평한 것은 무척 정당한 비판이다. 칸트와 헤겔의 철학을 적절하게 이해한다면 지젝의 반칸트적 노선에 불만을 품을 수 밖에 없다. 내가 보기엔 지젝은 진보적인 뉘앙스를 풍기는 괴팍한 영화평론가, 혹은 자신만의 독창적인 이론체계가 없는 삼류 정치학자에 불과하다.
내가 보기엔 지젝은 폐기처분 되어야 마땅한 전체주의 신화를 다시 재활용하려고 노력하는 얼간이에 불과하다. 그래서 헤겔 철학과 라캉 심리학에서 폭력적인 정치적인 신화를 재구성하려고 한다. 이런 시도는 결코 성공하지 못할 것이다. 무척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지젝이 추구하는 정치적 이데올로기는 유물론과 인지주의에서 이것저것 끌어모았지만 하나의 통일된 유기체를 이루지 못했다. 지젝이 묘사하는 헤겔은 진짜 헤겔의 초상이라고 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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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젝은 어떤 분과학문이 위기에 처할 때 명제들을 기본적인 틀 내부에서 수정하거나 보충하려는 시도들을 지동설의 쓸데없는 자기합리화에 빚대어 '프톨레마이오스화'라고 비꼰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도, 마르크스의 정치경제학도 오늘날 이런 지동설의 처지와 다를 바 없다. 그런데 지젝은 용감하게도 철학이 과감하게 정신분석을 포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책에서 드러난 지젝의 이미지는 철학과 심리학의 연합전선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소피스트를 닮았다.
지젝이 헤겔을 교묘하게 변주하고 있지만 그것은 마르크스의 반복도 아니고 라캉의 반복도 아닌 셈이다. 지젝은 오히려 비마르크스주의자의 담론을 보여준다. 그리고 지젝은 그의 포스트모던 정치경제학 담론에서 윤리적 요소를 완전히 배제하고 있기 때문에 집단적 광기를 야기할 위험성이 크다. 역사상의 정치혁명의 실패를 보다 더 급진적이지 않았다는 허름한 이유 한 가지로 환원하면서 지젝은 과장된 수사법을 동원하여 개인의 권리와 자유보다는 집단의 권리와 급진적인 몸짓을 더욱 강조한다. 이는 지젝이 모택동의 문화대혁명을 지지하는 근본적인 배경과 일치한다. 하이데거를 '미래의 공산주의자'로 재해석하고 간디가 히틀러보다 더 폭력적이라며 '신성한 폭력'을 지지하는 지젝의 허튼 소리에 공감할 지식인이 있을지 의문이다.
인지주의자 안토니오 다마시오는 자아의 점진적 출현을 크게 원-자아·나· 자서전적 자아의 단계로 설명한다. 원-자아는 몸을 안정과 자기재생산의 한계 내에서 유지하는 자가조직적 행위자다. '나'는 단독적인 자기의식의 출현을 말하고, 자서전적 자아는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서사적 역사의 조직화의 과정이자 그 결과다.
지젝은 오늘날 '자아'에 대한 이론적 입장을 크게 네 가지로 정리한다.
"여기서 우리는 네 가지 기본적인 입장을 다루고 있다. (1)자아로서의 우리에 대한 통상적인 일상적 이해. (2)자아에 대한 철학적 이해(그것은 독일관념론과 선험적 나라는 이 이론의 개념에서 정점에 달한다). (3)현대의 인지주의와 뇌과학들에서의 자아 이론들. (4)정신분석적(프로이트적, 라캉적) 주체 개념. 뇌과학들은 암묵적으로 (2)와 (4)의 입장은 인간 정신에 대한 이해에서 할 수 있는 내속적 역할이 아무것도 없는 역사적 호기심들이라고 전제하고 있다."(126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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