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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천년의 고도에서 향기를 느끼며/ 책읽는고양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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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기   저자의 기거하는 곳이 안양이다. 안양에서 경주로 가는 길은 여러 갈래가 있다. 지난날에는 거의 버스를 탔다. 그러나 KTX가 생기고 난 뒤 조금 생각이 바뀐 적도 있다. 우선 차를 시간상 적게 타는 이점이 있으니까? 그런데 자주 가다보니 그것도 그렇지 않다는 것을 발견한다. KTX를 타면 역에서 내려 시내까지 가는 시간, 또 KTX을 타러 가는 시간 등의 소요로 인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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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의 기거하는 곳이 안양이다. 안양에서 경주로 가는 길은 여러 갈래가 있다. 지난날에는 거의 버스를 탔다. 그러나 KTX가 생기고 난 뒤 조금 생각이 바뀐 적도 있다. 우선 차를 시간상 적게 타는 이점이 있으니까? 그런데 자주 가다보니 그것도 그렇지 않다는 것을 발견한다. KTX를 타면 역에서 내려 시내까지 가는 시간, KTX을 타러 가는 시간 등의 소요로 인해 그렇게 많은 이점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 후 버스를 저자는 버스를 탄다고 한다. 버스를 타면 가면서 체력 보충도 할 수 있으니까? 많은 사람들이 KTX 역의 시내와의 거리 때문에 이용하는데 불편을 느끼는 경우가 있다. 나도 그런 적이 있다. KTX 역으로 이동을 하면 항상 개인차가 필요하다.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많은 불편을 겪는다.

 

저자는 경주행에 버스를 이용한다고 한다. 내가 생각해도 현명한 생각인 듯하다. 경주에 특심이 있는 저자의 마음이 그곳을 자주 찾게 만들고, 다니는 방법도 자연 좋은 방법을 터득하게 된 게다. 나도 경주를 갈 때는 승용차로 가지 않으면 거의 버스나 열차를 탄다. 도심에 쉽게 접근할 수 있으니까 

 

경주 둘러보기, 생각하기

 


 

봉황대를 먼저 찾고 있다. 신라에서 단일 무덤으로는 가장 큰 봉분이다. 아이들이 어릴 때, 이곳 가까이에서 아이들이 뛰어논 기억이 있다. 지금도 눈에 선하다. 봉분은 위엄과 능력을 나타내는 상징적인 것이다. 그래서 크게 만들어 집단의 힘을 과시한 것이라 생각해도 되겠다. 사실 미립간이라는 이름으로 왕이 호칭될 때, 백제의 세력이 강했다. 마립간 이전엔 신라가 백제와 가야에 치여 나라의 명맥을 유지하기도 힘들었다. 그런데 마립간 왕들인 내물왕부터 지증왕 때까지 고구려의 도움으로 나라가 강해진다. 후방에 있는 백제를 견제하고자 하는 고구려의 마음이 작용해 신라가 탄력을 받게 되는 것이다. 그 후 진흥왕 때는 가야를 멸망으로 몰고 가면서 세력이 더욱 커지게 되고, 3국이 서로 패권을 다투는데 경쟁을 할 수 있는 나라로 부상한다. 이런 힘을 나타내는데 봉황대 같은 무덤들이 사용되었다. 서봉총은 스웨덴 구스타프 황태자와 관련된 이야기도 전해 준다. 이 고분을 발굴할 때 직접 참여했다고 한다. 그것이 인연이 되어 한국과의 관계가 그 뒤로도 이루어졌다는 이야기도 전해 준다.

 

 

국립경주박물관을 찾는다. 경주라는 도시를 가장 이해하기 쉬운 방법이다. 경주의 역사, 경주 사람들의 삶이 고스란히 녹아 있는 공간이다. 유물, 유적, 고분 등을 살펴볼 수 있다. 고분은 타임캡슐로 인식하고 있다. 과거를 속속들이 들여다 볼 수 있는 곳, 황금유물이 있는 곳이다. 저자는 이곳에서 금관을 만나고, 원효도 만난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저자의 경주에 대한 박학다식함이 많은 것들을 보고 우리들에게 전해 준다. 저자를 따라 들어간 박물관은 살아서 우리들에게 다가 온다. 박물관을 나와 태종무열왕릉으로 향한다. 추사 김정희가 태종무열왕릉을 방문한 사실과 위로 4개 있는 고분의 존재를 확인한 사실을 얘기한다. 즉 추사는 태종무열왕릉 위로 4개의 고분은 조산이 아니고 진흥, 진지, 문성, 헌안 네 분의 왕릉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학자마다 주장은 다르나 위로부터 밥흥왕, 진흥왕, 진지왕, 김용춘이라고 얘기하는 사람들이 많다. 정확히는 알 수 없으나 이들 존재에 대해 신라 진골들의 왕위 계승을 위한 노력이 스며 있는 왕릉의 배치로 저자는 얘기하고 있다. 왕릉에 관한 얘기는 당시의 일들에 대해 상상을 해보게 하고 있다.

 

그렇다면 다음과 같은 해석이 가능하겠다. 법흥왕, 진흥왕까지 만들어져 있던 기존 왕릉에 태종무열왕이 왕위 계승 서열 1위가 되자 사전 작업으로 기존의 다른 곳에 묻혀 있던 진지왕을 옮겨와 이곳에 자리 잡게 하고, 뒤이어 아버지 김용춘도 죽자 이곳에 능을 만든다. 그것을 산등선의 흐름에 따라 순차적으로 내려오도록 자연을 이용하여 세련된 형식으로 꾸민 것이다. 이는 태종무열왕이 진골출신의 왕으로 성골에 버금감을 보여줌으로 왕권의 힘을 보이고 왕위계승의 당위성을 드러내기 위한 노력으로 보여 진다. 비록 상상을 통해 유추하는 것이지만 당대 권력의 흐름을 궁구해볼 수 있는 내용들이다.

 

황룡사는 불국사의 8배에 달하는 거대한 사찰이었다. 원래 궁궐을 만들려던 곳에 17년이나 걸려 만든 거대한 사찰, 그 뒤 100여 년 이어가면서 증축했다 한다. 이곳엔 신라 3보 중 2개가 있다. 장육존불과 9층탑이다. 그리고 솔거의 금당벽화도 이곳에 있다. 황룡사를 처음 짓도록 명한 진흥왕은 불교에 심취해 신라 왕실을 석가모니 일족의 재림으로까지 인식했다고 한다. 그만큼 불법으로 나라를 다스리고자 했고 선덕까지 그런 의식이 이어진다. 그래서 선덕 때 9층탑이 완성되는 결과로 나타난 것이 아닌가 한다. 분황사는 선덕 때 만들어진 사찰이다. 지금은 아담하지만 당시에는 황룡사의 60% 정도였다고 하니 대단한 규모라 할 수 있겠다. ‘향기로운 임금의 절인 이 사찰은 당태종이 보낸 모란 그림과 선덕의 공주 시절 얘기가 얽혀 있다. ‘야간 경주 여행은 경주시가 야심차게 운영하는 프로그램의 하나다. 첨성대, 동궁, 월지(안압지) 등은 불빛 속에 그 형상이 장관이다. 경주에 들르는 사람들에게 권하고 싶은 게 야경을 보는 일이라고 많은 사람들이 말한다. 가본 사람들은 이 야경 관람을 적극적으로 추천한다.

 

 

보문관광단지를 거쳐 문무대왕릉으로 향한다. 삼국사기 문무왕편에 동해 어구의 큰 돌 위에 장사지냈다. 세속에서 전해오기로는 왕이 용으로 변했다 하니, 이로 그 돌을 가리켜 대왕석이라 한다.> 문무왕이 죽어서도 왜적을 지켰다는 얘기가 담겨진 수중릉이다. 하지만 진위에 대해서는 학자들 간의 의견이 많다. 그곳에서 조금만 뭍으로 들어오면 감은사지 흔적이 나타난다. 문무왕이 왜군을 진압하기 위해 이 절을 짓기 시작했으나 마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 용이 되었다는 얘기가 전해 온다. 이 터에 가보면 용이 다닐 수 있는 길을 만들어 놓은 흔적을 볼 수 있는데, 이야기의 근거가 된다고 할 수 있겠다.

 

 

문무대왕릉과 감은사지는 당시부터 왜구가 얼마나 신라를 괴롭혔는지를 생각해 볼 수 있게 한다. 섬에서 살던 그들은 육지의 문화를 숭모하며 뭍으로 나오려고 무척이나 애를 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이 그들 삶의 궁극의 목표가 되었다고도 생각된다. 그러기에 능력이 미천하여도 목숨을 걸고 한반도에 그들의 흔적을 남기는 일을 서슴지 않았던 것이다. 그들을 제어하기 위해 왕이 된 문무왕이 살아 있을 때도, 사후까지 노력한 흔적이 이 둘을 통해 잘 나타나고 있다. 이들을 보는 우리들의 마음은 그 후의 역사(임란과 경술국치)를 무척이나 부끄럽게 인식하지 않을 수 없다.

 

불국사와 석굴암을 만나고 있다. 이들에 대해 저자는 질문을 하고 있다. 개인 사찰인가? 국가 사철인가? 라고. 결론은 내리지 않고 있다. 김대성이 사찰을 건립하기 시작했고, 그의 사후 나라에서 완성했다고 얘기한다. 그래서 소유에 대한 의견이 학자들 사이에도 분분하다. 당시에 개인이 사찰을 지을 수도 있는 재력이 있었다고 이야기하는 저자의 의도는 무엇일까? 보통 사찰이 산 위에 세워졌는데 불국사는 산 아래에 세워졌다. 평지의 감은사와 산의 해인사 중간의 형태로 세워진 사찰로 그 면모를 보이고 있다고 한다. 즉 계단을 적절하게 이용해 올라가는 듯한 느낌을 표현하고 나머진 평지의 모습을 나타냈다. 다보탑, 석가탑 등 두 개의 석탑은 불국사를 빛내는 소중한 존재다. 우리가 배운 교과서에서도 이들의 미학적인 요소에 대해 설명하고 있었다. 예술미도 대단하고 지닌 의미도 그렇다. 석굴암의 본존불은 신비스러운 미소로 세상을 녹이고 있다. 더할 수 없는 자비를 드러낸다. 경주 남산은 신라의 사람들이 세운 큰 탑으로 볼 수 있다. 산 전체가 불교적인 느낌이 강하게 채색되어 있다. 그 후 저자는 잘 꾸며 놓은 황리단 길을 돌아 귀가한 여정을 기록하고 있다.

 

역사에 대한 특별한 마음을 가진 황윤의 역사 에세이다. 역사를 소재로 해 기행문의 형태로 적고 있다. 많은 자료들이 제시되어 있다. 특히 설화나 일화 등은 이야기를 읽어나가는데 큰 도움이 된다. 역사에 대한 해박한 지식이 이런 감칠맛 나는 역사 에세이를 만들고 있지 않나 생각된다. 경주가 새롭게 다가온다. 경주가 살아서 움직이며 다가온다. 신라 천년이 재생되어 우리 곁에 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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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는 나에게도 특별한 의미를 지닌 공간이다. 내가 태어나서 자란 공간이 바로 경주의 옆 동네다. 그러기에 학창시절, 소풍이라는 이름으로, 여행이란 이름으로 자주 들렀던 곳이다. 또한 역사서를 통해서 당대의 흔적들을 많이 가슴에 넣어 두고 있는 곳이다. 그곳을 거닐거나 더듬으면 역사의 흔적들이 재생되어 나타난다. 이곳에 화랑들이 머물며 호기를 뽐냈거니, 이곳에는 효종랑이, 희명이, 김대성이, 원효가 거닐었거니. 그들이 어떤 얘기를 하고 누구를 만났거니 등의 내용들이 살아서 다가오기도 한다. 이 책을 읽으면서 그들과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기회를 제공받은 것도 감사하다. 우리는 오늘을 살고 있어도 언어와 함께 숱한 존재들과 소통하면서 살아간다. 이 책은 천 년을 소통하도록 하고 있다. 특히 나에겐 장소에 대한 애착이 사람들의 환영으로 채색되면서 언어가 날개를 단다. 기쁨으로 읽었다는 느낌이 강하다. 소 중함으로 보았다는 생각이 강하다. 내 삶에 큰 도움이 된 책이다.

j****3 2021.06.27. 신고 공감 22 댓글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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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이 고고학, 나 혼자 경주 여행] 신라 천년의 수도 경주로 떠나는 여행 에세이
"[일상이 고고학, 나 혼자 경주 여행] 신라 천년의 수도 경주로 떠나는 여행 에세이" 내용보기
<일상이 고고학, 나 혼자 경주 여행> 황윤 저/ 책 읽는 고양이 2020년 10월 15일   "신라 천년의 수도 경주로 우리 함께 랜선 역사 여행을 떠나보자!"     1. 랜선 여행 전   25년 전, 중학교 2학년 때 관광버스를 타고 친구들과 재잘재잘 떠들며 경주로 수학 여행을 갔었다. 그때는 학교를 벗어나, 공부에 대한 압박감에서 해방되어 2박 3일이라는 일정 동안 집을 벗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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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고고학, 나 혼자 경주 여행

황윤 저/ 책 읽는 고양이

2020년 10월 15일

 

"신라 천년의 수도 경주로 우리 함께 랜선 역사 여행떠나보자!"


 


 

1. 랜선 여행 전

 

25년 전, 중학교 2학년 때 관광버스를 타고 친구들과 재잘재잘 떠들며 경주로 수학 여행을 갔었다. 그때는 학교를 벗어나, 공부에 대한 압박감에서 해방되어 2박 3일이라는 일정 동안 집을 벗어나 친구들과 함께 이야기도 하고 잠도 자면서 생활할 수 있다는 그 자유가 좋았었다. 지금은 세월호 이후 없어진 '수학 여행'을 이 책을 읽으면서 지금은 세월호 이후 없어진 25년 전 '수학 여행' 기억을 소환해본다. 그 당시 수학여행의 인기 코스는 첨성대, 불국사, 석가탑, 다보탑 등이었다. 역사 수업 시간에 배웠던 통일 신라 시대 유물들을 직접 보고 느낄 수있다는 생각에 기분이 들떴던 생각이 난다. 국립경주박물관에서 각 고분에서 나온 금관, 장신구, 각종 토기 들을 보았던 기억이 난다. 그땐 역사에 대해 제대로 잘 몰랐기에 더욱더 그런 유물들이 신기하고 인상적이었던 것 같다. 경주는 그렇게 나에게 어린 시절 신기하고 아련한 추억으로 남아 있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 25년이 지난 지금, 나는 지금 다시 경주를 여행한다. 직접 가보면 좋겠지만, 코로나 확산으로 이제는 여행하는 것도 마음대로 할 수 없어서, 이 책 [일상이 고고학, 나 혼자 경주 여행]을 가지고 저자의 발자취를 따라 나도 랜선으로 경주를 여행하였다. 코로나가 종식되는 날 제일 먼저, 경주로 달려가리라. 마스크를 벗고 신라 천년의 수도 경주의 문화적 향기를 마음껏 마시고 오리라. 그렇게 다짐하면서 저자와 함께 나는 랜선 경주 여행을 떠난다. 저자는 직접 경주로 가는 버스를 타고, 나는 책과 사진을 통해서 경주를 여행해보고자 한다. 

 


 

2. 랜선 여행 중

우선 여행을 떠나려면 지도가 있어야지. 경주를 25년 만에 가는 나는 어디를 가야 좋을 지 몰라서 경주를 100번 이상 동안 여행해 온 저자의 발자취를 따라 여행보기로 한다. 그래서 저자의 간 문화유적지를 바탕으로 내 나름대로 지도를 만들어 보았다. 나중에 코로나가 종식되는 날 반드시 이 지도와 이 책을 들고 나 또한 '나 혼자 경주 여행'을 해보리라 다짐하면서 말이다. 

<저자의 발자취를 따라 내가 만든  지도>
 

그러면 저자와 함께 이 지도를 들고 경주 랜선 여행을 떠나가보자. 우선 나와 함께 여행할 저자를 소개하자면 저자 황윤은 스무 살 때 처음 경주를 다녀온 이후 지금까지 100번 이상 경주를 다녀온 자칭 신라 경주 마니아라고 한다. [삼국 사기]와 [삼국유사]를 비롯한 삼국 시대에 관한 거의 모든 자료를 섭렵한 소장역사학자라고도 한다. 자칭 삼국시대 역사 박사라고 불릴 수 있을 것 같다. 이렇게 역사 전문가와 함께 경주를 여행하게 되어서 너무나 마음이 든든하고 기대가 된다. 

 

자,  그럼 어디부터 여행을 가볼까. 경주 여행 첫 번째 목적지는 어디일까? 지도상에서 보니 저자가 내린 경주시외버스터미널에서 가장 가까운 '봉황대' 부터 시작하도록 하자. 시외버스터미널에서 20분 정도 걷다보면 유명한 고분인 봉황대를 만나게 된다. 봉황대란 이름은 당나라 시인 이백이 쓴 시 중에서 '봉황루에 올라' 라는 부분을 가져와서 지은 이름이라고 한다. 

조선 시대에는 이곳을 무덤이 아닌 흙으로 쌓은 누각으로 생각하여 봉황대 위로 올라가 주변을 돌아보며 이백이 된 것 같은 기분을 만끽하곤 했던 것이다. (p.17~18)

 

 


 

봉황대는 처음 본 인상은 정말 높은 언덕같이 보인다. 누가 저 흙으로 높이 쌓인 곳이 무덤이라는 것을 알까. 그래서 조선 시대 사람도, 당나라 사람도 무덤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것 아닐까? 저자 또한 봉황대의 모습에 대해 의문을 가진다. " 신라 사람들은 왜 이렇게 큰 무덤을 만든 것일까?" 나 또한 왕릉의 봉분을 높게 쌓아서 그 왕의 위엄과 권위를 높음을 나타내기 위해 그렇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솔직히 말해 이 고분은 정말 거대할 정도이다. 

이에 대해 저자는 그 당시 고구려 보호국에서 벗어나 급성장한 신라의 상황과 관련 있다고 말한다. 원래 신라는 그렇게 강한 나라가 아니었다. 그래서 고구려의 보호를 받을 정도로 힘이 약한 약소국이었으나 그 이후 신라는 국가적으로 급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다. 이처럼 강해진 권력을 대내외적으로 과시하고자 왕을 비롯한 그의 가족들이 평야에 거대한 무덤군을 만들고 거기에 함께 묻혔다고 한다. 이에 대해 저자는 당시 급성장하던 권력의 힘을 무덤을 통해 보여주고자 한 것이라고 말한다. (p.20)

 

이처럼 거대한 무덤인 봉황대 주변에는 위의 사진에서 보는 것처럼 11종의 나무들이 자란다. 보통 고분 위에는 잔디가 자라는데 어찌하여 이 고분 위에는 수 백년 된 나무들이 자라는 것일까. 그 이유에 대해 저자는 신라가 멸망하고 고분 주위로 민가가 가득할 때 집안에서 키우던 나무가 올라타서 자라서 커진 것은 아닐까 추정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봉황대는 정말 무덤같이 느껴지지 않는지도 모른다. 언덕 위에 나무들이 자라는 낮은 구릉 같은 느낌이다.

 

그렇게 봉황대 주변을 돌아보다 봉분이 없는 고분을 발견하게 된다. 주로 고분이라고 하면 봉분이 있기 마련인데 이게 없다니 어떻게 된 일일까. 여기에는 아픈 우리 나라 역사의 슬픔이 숨겨져 있다.


<윗 부분이 사라진 고분, 서봉총 p. 25>

저자는  금령통, 식리총, 금관총, 서봉총 이들 4개의 고분에 봉분이 사라지고 없는 이유는 일제 강점기때 일본인들이 고분 발굴을 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당시 일본인들은 고분 안에 묻혀 있던 유물에만 관심이 있었기 때문에 봉분은 대충 걷어내고 나머지 흙들은 경주 철도 공사에 사용했다고 한다. 우리 나라 문화재가 관리되지 못하고 일본인의 강제 발굴로 인해 소실되고 상실된 것은 참으로 아픈 역사적 사실이 아닐 수 없다. 1926년 일제 강점기 시절 일본 정부는 조선 고분 발굴에 스웨덴의 황태자가 참가하게 하고 그 황태자는 황금 금관을 출토하는 경험을 하게 된다. 그 결과 그 고분 이름이 스웨덴의 한자어인(瑞典)중 앞 글자인 서와 이곳 고분에서 발굴된 금관에 장식되어 잇던 봉황 모양에서 봉(鳳)을 따와 서봉총(瑞鳳塚)이 되었다고 한다. (p.24)  우리 나라와 스웨덴이 이런 인연이 있었는지 몰랐었다. 스웨덴에서는 한국과 정상 외교를 할 때마다 지금까지 이 이야기를 언급하고 있다고 하는데, 어쩌면 지금은 외교가 활발하지 못하지만, 나중에는 스웨덴과 좋은 관계를 맺으며 활발한 외교를 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해본다. 

 

그러면 이제는 이 고분들에서 어떤 황금 유물들이 발견되었는지 알아보러 국립경주박물관으로 가보자. 저자는 국립경주박물관이 '경주'라는 도시를 이해하는 가장 쉬운 방법이라고 말한다. 특히 신라역사관에는 국보 제 188호 천마총 금관과 대릉원에서 출토된 다른 유물등 신라시대 예술품들이 전시되어 있어 인상적이다.

<국립경주박물관 상설전시실인 신라역사관 전경      사진출처: 한국원자력환경공단>
 

고분 속 유물들은 신라인들의 문화와 생활을 보여주는 타임캡슐과도 같이 느껴진다. 천년의 역사를 자랑하던 신라, 그 당시 삼국 중 가장 막강한 힘을 가지고 결국에는 삼국통일, 삼한일통의 대업을 달성한 신라의 타임캡슐 속으로 들어가보자. 

저자는 이 신라역사관의 마스코트는 금관이라고 말하며 금관총과 천마총에서 발견된 금관에 대해 설명한다. '금관총'이라는 아름은 처음으로 금관이 발견된 고분을 일컬어 부르는 이름이다. 앞서 봉황대 흙으로 쌓아서 만든 조망을 위한 인공산으로 인식되었음을 조선 시대 여러 기록들 중에서도 발견할 수 있고 그 기록을 바탕으로 대부분의 고분들이 왕릉으로 인식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조선 시대 사람 눈높이로 볼 때 일반적인 무덤에 비해 너무나 거대한 형태라 언덕으로 인식할 수 밖에 없었으리라. 그래서 일제 강점기에 일본이 금관을 발굴할 때까지 금관을 포함한 황금 유물들은 수천 년의 비밀을 간직한 채 묻혀 있을 수 있었다.

그럼 그 천년의 역사 속 황금유물인 금관을 보러 가보자. 저자는 금관총 금관과 천마총 금관  두 가지 종류의 금관에 대해 말해준다. 그리고 신라역사관에서는 다소 특별한 금관 전시 형태를 만나볼 수 있다.

이에 금관총의 경우 금관과 금 허리띠 외에도 해당 무덤의 주인이 누워 있던 목재관을 중심으로 다양한 부장품이 마치 장례 시점에 배치한 모습 그대로 전시되고 있다. 그 결과 전시 몰입감도 높아지고 이전과 달리 전시하지 않았던 유물도 선보이면서 다양한 볼거리가 만들어졌다. (p. 45)

          <금관총 금관이 출토될 당시 유물이 놓여있던 모습을 재현해놓고 있다.>         출처:구글 이미지

정말 유리관 속에 왕이 금관과 금 허리띠, 온갖 화려한 장식구를 다 하고 누워있는 것 같다. 아마 고분 속에서 이렇게 신라의 왕들은 누워 있었으리라. 대부분의 박물관에서는 정면으로. 평면으로 유물들을 전시해놓았는데 이렇게 입체적으로, 실체적으로 전시해놓으니 정말 저 관 속에 왕이 누워 있는 듯한 착각을 하게 된다. 정말 이런 창의적이고 신선한 아이디어로 인해 나는 더욱 신라의 금관의 멋에 마음껏 취할 수 있었다.

이런 전시는 천마총 금관에서도 나타난다. 이 금관 전시 형태를 보라. 어떤 방식으로 전시되어 있는 것 같은가. 

<천마총 금관, p. 47>

 

 

천마총의 경우 서 있는 사람이 쓰고 있는 형태로 금관이 전시 중인데, 얼굴 구도를 대충 금관아래로 잡고 사진을 찍으면 마치 금관을 쓰고 있는 것처럼 사진이 찍힌다. 사진을 통해서라고 금관을 써보기 위해 다음 차례를 기다리는 사람도 있어 천마총 금관의 인기도 남부러울 것이 없을 듯 하다. (46)

나중에 신라역사관을 가게 된다면 나도 천마총 금관 앞에서 사진을 찍어보리라. 저자의 말대로 금관 아래로 구도를 잡고 찍으면 금관을 쓰고 있는 것처럼 나올까 정말 궁금하다. 정말 기발하고 창의적인 발상이 아닐 수 없다. 

 

국립경주박물관은 정말 하나의 신라인 것 같다. 박물관 안이나 밖에서 우리는 신라를 물씬 느낄 수 있다. 박물관 밖에는 일명 에밀레종이라 잘 알려져 있는 '성덕대왕 신종'과 원효를 만날 수 있는 '고선사지 삼층 석탑'을 만날 수 있다. 

 

성덕대왕신종은 통일신라 시대에 돌아가신 성덕왕을 위하여 만든 커다란 종이라고 한다. 성덕왕은 통일신라 시대 최전성기를 통치했던 왕이다. 

 

 

<국립경주박물관 입구에서 관람객을 맞아주는 성덕대왕신종, p. 28>

저자는 이  성덕대왕신종이 의미가 있는 이유는 당대 신라인들이 직접 남긴 글이 종의 몸에 고스란히 새겨져 있다고 한다. 종을 만든 사람, 종에 남겨진 글을 지은 사람과 쓴 사람, 성덕대왕신종을 만든 이유, 종의 이름, 만들어진 시기 등이 전부 자세히 씌어져 있다. 이를 통해 우리는 당대 신라의 기록 문화를 엿볼 수 있다. 신라의 기록이 별로 많이 남아 있지 않은 상황에서 실로 귀중한 문화재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성덕대왕신종 외에 옥외 전시장에서 꼭 봐여 하는 것은 바로 고선사지 삼층 석탑이다. 신라 미술관 건물 뒤쪽으로 거대한 탑이 우뚝 서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바로 이 탑이 고선사지 삼층 석탑이라고 한다. 이 탑은 신라 석탑의 시원적인 작품이며, 신라 3층 석탑의 원조라 할 수 있다고 한다. (p.50)


<국립경주박물관 옥외에 전시된 고선사지 삼층석탑  p. 51 참조   출처:위키피디아


그런데 이 고선사지 삼층 석탑이 원효와 관련이 되어 있다고 한다. 고선사는 신라 신문왕 시대에 말년의 원효가 머물렀던 사찰이라고 한다. 1915년에는 고선사에서 원효대사 비석이 발견되기도 했다고 한다. 적어도 이 탑은 원효가 입적하기 전, 즉 686년 이전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고 저자는 말한다. 이 탑이 원효 대사와 관련이 있을 줄이야.

그런데  여기서 궁금증이 생긴다. '왜 이 탑은 고선사가 아닌 국립경주박물관 옥외 전시장에 있을까.' 저자도 나와 같은 궁금증을 느꼈는지 이에 대해 설명해준다. 원래 이 탑은 고선사에 위치한 탑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1970년대에 덕동호라는 댐을 만들면서 고선사지 주변이 수몰되는 상황이 되자 탑을 이 곳으로 옮겨온 것이라고 한다. 

이제서야 그 이유를 알게 되니 속시원하긴 한데, 생뚱맞게 국립경주박물관 앞에 있는 모습이 조금은 낯설다. 하지만 하마터면 수몰될 뻔한 원효대사와 관련있는 이 귀중한 석탑이 이렇게나마 생명을 유지한 채 지금도 한국 탑 역사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면서 우뚝 서 있는 모습이 대견하기도 하고 고맙기도 하다. 나중에 국립경주박물관에 가게 되면 꼭 이 고선사지 삼층 석탑을 보며 원효를 만나고 싶다.

 

그러면 이제 다음은 어디로 가볼까. 지금까지 4~6세기 신라 고분을 보았고, 7세기 삼국 통일 직후 만들어진 고선사지 삼층 석탑을 보았으니 이제는 통일신라 시대로 가보기로 하자. 통일신라 시대의 장을 화려하게 연 왕은 누구였을까. 아마도 백제를 멸망시킨 태종무열왕이 아니었을까. 저자 또한 그렇게 생각했는지 태종무열왕릉으로 향하는 택시를 잡아탄다.

태종무열왕릉에 도착하니 제일 먼저 만나는 것은 '김유신 장군 묘이다'이다. 그런데 이 비석에 숨겨진 비밀에 대해 알고 있는가? 이 비석은 맑은 날과 비가 오는 날에 글자가 다르게 보인다고 한다. 우와 어떻게 글자가 바뀔 수가 있지. 그 비밀의 열쇠는 능(陵)자와 묘(墓)자에 있다고 한다. 그 비밀을 알아내기 위해서는 우선 김유신 장군 묘의 비석에 적힌 글자를 자세히 보아야 한다. 

<김유신 묘의 비석  p. 61 참조   출처:구글 이미지

<물에 적으면 새겨진 글자 중  능(陵)이 묘(墓)로 바뀐다. p. 61 참조> 출처: 구글 이미지

 그러면 왜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일까. 이에 대해 저자는 1934년 이 비석이 처음 만들어 졌을 때 당시 후손들이 사후 흥무대왕으로 승격된 김유신이기에 김유신 '릉'으로 표시하기를 원했는데 잘못 표기되어 김유신 '묘'로 새긴 것이라고 한다. 

어떻게 보면 결국 조상의 묘를 정하는 것이 기록이나 유물 조사 등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가문의 힘에 따라 좌지우지된다는 것이 참 씁쓸하기도 하다.

그래서 '각간묘'라고 불리던 김인문 묘가 김유신 묘로 잘못 오인되어 온 시대도 있었다. 저자는 근처에 보물 70호인 경주 서악동귀부가 위치하고 있는데 이 귀부가 김인문 묘로 결정하는 증거물이 되었다고 말한다.

<각간 묘(김인문 묘)  p. 69 참조   출처:구글 이미지

 

 귀부는 비석을 꽂아두던 받침돌로 돌로 조각된 거북 형태로 만들어져 있다. 사후 해당 인물에 대한 공적을 비석에 남김으로써 고분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리고 공도 널리 기억되도록 만든 것이다. 

<경주 서악동귀부  p. 71 참조   

 

그런데 서악동 귀부 사진을 보니 이상한 점이 하나 있다. 그것은 비석이 있어야 할 부분이  비어 있다는 것이다. 이 비석은 어디 있을까. 저자는 그 비석은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고 한다. 분실된 게 아니라 다행이긴 하지만, 왜 굳이 그 비석만 따로 떼어 내서 박물관에 소장했는지 진짜 이유가 궁금해진다.

 

저자에 따르면 오래 전부터 김인문 묘도 사실은 김유신 묘 중 하나로 알려지고 있었다고 한다. '각간묘'라는 명칭은 태대각간이었던 김유신을 의미하는 이름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아직도 의견이 분분하다. 김인문 묘의 진짜 주인이 누구인지에 대해서 말이다. 무덤에게 물어도 말이 없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 나중에 진짜 각간묘 앞에 가서 물어봐야겠다. 

 

다음은 신라 삼보 중 2개에 해당하는 황룡사로 향해보자. 황룡사는 신라 시대 대표적인 사찰로 알려져 있고 그 면적만 불국사의 무려 8배라고 한다. 경주에는 많은 사찰이 있지만 그 중에서 황룡사는 국가 대표 사찰이었으며 평지에 넓게 위치한 거대 사찰이었다.

그런데 도착한 황룡사지에 황룡사는 없었다. 거대 사찰이라며, 9층 목탑이라며 그런데 어디에 있지? 저자와 함께 만난 모습은 허허벌판이었다. 그 허허벌판이 황룡사가 있었던 자리라고 한다. 정말 황룡사 9층 목탑이 너무나 보고 싶었는데, 복원된 모습을 보니 정말 롯데타워처럼 그렇게 거대하고 높은 탑이었을 텐데 말이다. 아쉬움을 남기며  황룡사지 사진을 보며 거대한 모습의 황룡사를 상상해본다. 

 

<황룡사지   

신라삼보라 불리는 세 가지 신라 대표 보물 중 두 개인 장육존불과 9층탑이 황룡사에 있었다고 한다. 장육존불은 5미터 크기의 금동불상으로 추정되며 황룡사 9층탑은 80미터 높이의 거대한 탑이었다고 추정된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 장육존불과 황룡사 9층탑은 소실되어 볼 수가 없다. 너무도 아쉬운 나머지 저자를 따라 황룡사 역사 문화관으로 가기로 했다. 거기서는 실제 모습은 아니지만 복원된  장육존불과 황룡사 9층탑을 볼 수 있었다. 비록 모형이긴 했지만 말이다. 

 

<황룡사 9층 목탑의 1/10 모형, 황룡사 역사문화관  p. 99 참조   출처:구글 이미지

 

이처럼 거대했던 황룡사는 거대한 규모만큼이나 남달랐던 정신 세계가 몇 대에 걸쳐 투입되어 만들어진 사찰이라고 한다. 진흥왕부터 선덕여왕에 이르기까지 신라를 대표하는 성골 집안의 불교 수호를 위한 자부심이 만들어낸 사찰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 모든 면에서 크고 아름다울 수밖에 없었던 것이 아닐까. 이에 대해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지금은 역사의 상흔으로 황룔사의 형태가 주춧돌 외에는 볼 수 없음에도 그때 명성은 여전히 전설처럼 경주에 남아 있으니 어쩌면 성골 가문의 의도는 성공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p.99)

 

황룡사가 진흥왕과 선덕여왕의 전설이 함께 하는 절이라면 분황사는 선덕여왕이 만든 절이다. 그러면 '향기로운 임금의 절'이라는 뜻의 분황사를 보러 가보도록 하자.

분황사 또한 결코 작은 규모의 사찰이 아니었다. 발굴 조사에 따르면 황룡사의 60% 정도였음을 알 수 있다. 분황사에 있는 모전석탑은 현재 3층밖에 남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뭔가 격조있고 지조있는 모습이다.

                                    <  모전석탑>                                                          출처:위키피디아

 

모전석탑(模塡石塔)을 한문 그대로 해석하면 '모(模), 모방한ㅁ '전(塡), 벽돌 석탑(石塔), 돌탑으로 벽돌을 모방한 돌로 만든 탑'이다. 결국 목표는 벽돌 탑을 모본으로 하여 제작했음을 알 수 있는데, 한반도에는 벽돌 탑이 거의 보이지 않으나 중국에서는 큰 인기리에 만들어진 탑 형식이었다. (p.112)

 

저자에 따르면 모전석탑은 중국의 벽돌 탑 양식을 모방해서 만든 탑이라는 것이다. 하긴 전통적인 신하의 탑들과는 모습이 다르다고 생각하긴 했는데 중국의 영향을 받은 것인 줄은 몰랐다. 또한 국립경주박물관에서 고선사지 삼층 석탑이 원효와 관련이 깊다고 했는데 이 분황사 또한 원효와 큰 인연이 있는 장소라고 한다. 우선 원효가 남긴 위대한 책 대부분은 원효가 분황사에 있을 때 집필되었다고 한다. (p.113)

또한 원효의 모습을 한 상을 만들어서 분황사에 모셔두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몽고에 의해 황룡사, 분황사가 불타면서 아쉽게도 사라지고 말았다. (p.115)

 

경주에는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공간이 있다. 밤에도 문화재들이 마치 살아서 우리와 함께 하는 것 같다. 과거였다면 절대 존재할 수 없었던 천년의 신라의 모습이 밤에도 살아 숨쉰다. 저자는 그래서 당일 여행을 포기하고 1박 2일 여행을 택한 것인지도 모른다. 만약에 나도 경주를 여행했다면 이 아름다운 모습을 보고자 기꺼이 숙박을 하면서까지 경주에 머물렀으리라. 저자를 따라 경주의 야경속으로 들어가본다.

 

<달이 비추는 연못이라는 의미의 월지 야경  p. 136 참조   출처:구글 이미지

 

이제 아름다운 야경도 보았으니 오늘은 이만 여행을 끝내고 내일 날이 밝으면 문무대왕릉으로 떠나기로 한다. 정말 저자의 여행코스를 따라다니다보니 살짝 지치고 힘든 것 같다. 아마 당일치기 여행으로 계획해서 그렇겠지. 정말 저자의 말대로 당일 치기 코스로 이 모든 것들을 다 보기에는 무리인 것 같다. 평일 1박 2일 코스가 제일 적당한 것 같다. 저자는 이 책에서 유적지, 유물에 대한 역사적인 사실 외에 실제 여행에 필요한 깨알같은 팁들도 제시한다. 가령 얘를 들면, 1박을 할 때는 근처 찜질방이 좋다는 것, 이 코스는 택시를 타면 좋다는 것 등의 알짜배기 실제 여행 정보를 주어 나중에 경주를 직접 여행할 때 정말 많은 도움이 될 것 같다. 

 

그럼 이제 다음 날 해가 밝았으니 '문무대왕릉'으로 떠나보도록 하자. 문무대왕릉을 볼 때마다 왠지 마음이 아파온다. 죽어서까지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키려 했던 문무왕의 애국심과 그런 아버지를 뵙기 위해 이견대를 세워 문무대왕릉을 지켜보았던 문무왕의 아들 신문왕의 효심을 생각하면 말이다. 

<문무대왕릉. 바다에 위치한 바위섬, 지금도 바위섬은 병사들로 가득하다.

바다의 갈매기들이 그들이다   p. 161 참조   출처:구글 이미지

 

문무대왕릉은 바다에 위치한 바위섬이다. 그 바위섬은 불과 200m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지도에서 보면 알 수 있듯이 문무대왕릉은 경주 시내와 상당히 멀리 떨어져 있다. 저자 또한 문무대왕릉을 가는데 시간이 좀 걸렸다고 했다. 저자의 말처럼 문무대왕릉은 당일 치기 여행코스는 좀 힘들어보인다. 하지만, 반드시 경주로 여행왔다면, 신라를 느끼기 위해서는 문무대왕릉을 꼭 보라고 말하고 싶다. 나 또한 나중에 경주를 여행한다면 꼭 문무대왕릉에 가보리라. 저 바다 위 문무대왕릉을 직접 내 눈으로 보고 그 문무대왕릉을 지키는 병사들인 갈매기들에게도 새우깡을 던져주리라. 그동안 문무대왕릉을 지키느냐고 수고했다고 말이다.

 

문무왕은 태종무열왕의 맏아들이자 김유신의 조카로 핏줄에 있어 자신의 삼촌처럼 신라 진골과 가야 진골의 피가 섞인 인물이다. 문무왕은 혈통 면에서 불리한 점은 있었지만 아버지인 태종무열왕 덕분에 당나라에도 다녀오는 등 세계적인 식견을 가진 태자가 될 수 있었다. 또한 김유신과 함께 백제 정벌에도 참가해엿 5000 결사대의 계백을 물리치고 백제 수도를 점령하는 전투까지 직접 눈으로 봄으로써 군사적인 경험도 겸비한 인물이었던 것이다. 또한 당나라와의 전투에서도 대승리를 거둔다. 문무왕은 살아 생전에도 나라와 백성을 사랑하고 걱정하는 훌륭한 왕이었는데 죽어서까지도 그의 나라 사랑은 이어졌다. 문무왕은 죽으면서까지도 죽어서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키겠다고 수장을 요구했다. 그리고 문무대왕릉은 단순히 바다 위에 있는 능이 아니라 국경선에 위치한 능으로써 정말 문무왕은 죽어서 용이 되어 그 바다 위 바위섬에서 신라를 지키고 있었을까. 분명 문무대왕릉은 당시의 관념에서 상당히 벗어난 것이다. 왕의 묘를 수장한다는 생각은 그 당시 받아들여지기 힘들지 모르지만, 나라와 국민을 생각하는 문무왕의 애국심에 따라 수장을 했던 것이리라. 그렇게 나라를 사랑했던 문무왕의 마음이 느껴지는 듯하다. 

 

그러면 이번에는 신문왕이 용이 되고자 한 아버지 문무왕의 유언을 중요시 여겼다는 또 다른 증거인 장소인 감은사지 탑을 향해 가보도록 하자. 감은사는 그동안 다른 사찰들과는 달리 높은 언덕 위의 평지에 올라가 있다. 그리고 감은사 이후로 신라 사찰은 산과 같이 높은 지대에 짓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자연이 만든 높은 지대에 건축물을 만듦으로써 높고 낮음을 구성하여 자연스럽게 서열과 위계가 구축되도록 만든 것이다. 그리고 감은사에는 감은사지 삼층 석탑이 있는데 이 탑의 정확한 명칭은 감은사지 동 서 삼층 석탑 이며 국보 112호다. 고선사지 탑과 감은사지 탑 모두 신라 3층탑의 시원이기에 디자인 특면에서도 유사한 면이 있다. 

<감은사지 삼층 석탑  p. 179 참조   출처:구글 이미지

 

그리고 감은사에는 신문왕의 아버지 문무왕에 대한 효심을 나타내 만든 것이 있다. 그것은 감은사지에 남아 있는 금당 터 아래 인공 연못을 만든 흔적이다. 마치 용이 된 왕이 언제든지 와서 쉴 수 있도록 배려한 신문왕의 효심이 돋보인다. 


 

<감은사지에 남아 있는 금당 터 아래 인공 연못을 만든 흔적. p.181>

 

감은사지 3층 석탑을 보면 탑머리 위에 기다란 철로 된 철주가 마치 칼이나 창을 꽂아둔 모습이 보인다. 마치 저 철주로 하늘을 찌를 듯 하다. 저자는 이 모습을 보고 살벌한 분위기가 느껴진다고 하는데 나 또한 왠지 저 철주에 찔릴 것 같아 무섭기도 하다. 이렇게 3층으로 탑을 만든 이유는 무엇일까? 이에 대해 저자는 이렇게 생각한다고 밝히고 있다.

짐작컨데 목탑을 대신하면서도 일정한 권위를 부여할 수 있으며, 비례와 크기에서 아름다움을 추구하면서도 큰 비용이 들지 않는 효과적인 디자인을 고민한 결과로 만든 것이 아닐까. (p.183)

 

이제 경주 랜선 여행도 막바지에 이르렀다. 마지막으로 통일신라 시대의 문화를 상징하는 곳인 불국사로 가보도록 하자!

수학여행 코스로 빠지는 않는 코스로는  불국사, 다보탑, 석가탑 코스가 있다. 25년 전 나의 학창시절때에도 자주 와봤던 곳이기도 하다. 솔직히 그 당시에는 '경주' 하면 생각나는 게 불국사일 정도였다. 그렇게 불국사는 신라의 유명 사찰 중에 가장 대표적인 사찰이었다

그런데 불국사는 개인 사찰이라는 기록이 있다고 한다. 당연히 국가 사찰이라고 생각했는데 개인이 지은 절이라니 이게 말이 되는 소리인가. 

그런데 기록에 보면 이렇게 적혀 있다고 한다.

"불국사와 석굴암이 김대성의 개인적 불심으로 만들여졌으나, 마지막은 국가에서 사업을 마무리한 점으로 미루어 국가 사찰이다." "김대성 또는 그의 집안이 운영하던 개인 사찰이다." 라는 주장도 있다. (p. 196)

그 당시 신라 시대에는 물론 국가 사찰도 존재했지만, 귀족들이 자신의 집안 사찰을 만들어 운영하기도 했다고 한다. 저자는 개인적인 생각으로 김대성 가문의 사찰이 아닐까 하고 생각한다고 한다. 그러나 나는 그래도 불국사를 국가 사찰이라고 믿고 싶다. 아직 명확하게 밝혀진 것은 없지만 나는 불국사를 신라를 대표하는 국가 사찰로 기억하고 싶다. 저자의 말처럼 불국사가 개인 사찰인지 국가 사찰인지는 영원히 풀리지 않는 비밀일 것이다.

<불국사     출처:구글 이미지

 

불국사는 다른 절과 달리 기단이 단단히 접혀 있는 부분이 무척 인상적이다. 사각의 기둥 안에 크기와 선이 딱 맞게 돌이 차곡차곡 쌓여 돌담처럼 쭉 연결되어 있고 그 위에 나무로 된 건물이 올라와 있어 무척 치밀하고 안정된 느낌을 준다. 물론 김대성이 기초부터 공을 얼마나 들여서 만들었는지도 이 부분을 통해 알 수 있다. (p.200)

 

 정말 불국사는 다른 절과 건축 방식이 다른 것 같다. 기단을 단단히 접어서 쌓고 마치 나무를 쌓아서 올린 모습같이 느껴진다. 특히 불국사는 다른 사찰과 달리 산자락 아래에 위치한 사찰이라는 것이다. 즉 불국사는 산자락의 특성을 활용하여 낮은 지형에 돌로 기단을 단단히 쌓아 올려 높은 쪽과 경사를 맞춘 후 절의 건물이 만들어진 공간을 평평하게 구성하여 사찰을 올린 것이라고 한다. (p.201)

불국사에는 다양한 이야기들이 담겨 있다. 불국사를 세우기 시작한 김대성의 이야기도 있고, 한때 일본에 의해 타더니 일제 강점기 시대에 일본에 의해 다시 복원된 불국사 이야기도 들리고, 현대에 새로 부각된 불국사 이야기, 통일 신라 시대 돌 하나하나 땀을 흘려가며 조각하고 운반하던 신라, 백제 사람들의 이야기도 들려 온다. 이처럼 다양한 모습의 사람들의 이야기들이 존재하는 곳이 불국사인 것이다.

 

그리고 불국사를 이야기할 때 빼놓지 않고 이야기하는 탑, 역사 교과서에서 많이 보았던 탑을 보러 가보자. 내가 어렸을 때 보았던 모습 그대로 석가탑과 다보탑은 변함없이 서 있었다. 


<불국사 석가탑,  다보탑 p. 207, 211>

 

불국사의 꽃인 석가탑과 다보탑을 보라. 왼쪽 석가탑을 보니 단순하지만 지조있고 간결한 분위기가 느껴지고 오른쪽 다보탑을 보니 화려하고 조화있고 균형잡힌 분위기가 느껴진다.

 

그런데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을 저자는 말한다 그것은 국보 21호인 석가탑의 본래 이름이 석가탑이 아니라는 것이다. 한때 석가탑은 무구정광탑, 서석탑이라고 불리었다고 한다. (p.208)

또한 석가탑에서는 무구정광대다리니경이 발견되는 데 조사 결과 이것은 통일 신라 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제작 시기는 대략 8세기로 보고 있다고 한다. (p.208)

 

다보탑은 석가탑과 달리 돌 하나하나를 목조 조각처럼 맞추어서 제작한 것이다. 이것은 실제 신라에 존재했던 목탑의 디자인을 그래도 모방하여 만든 것으로 추정이 된다고 한다. 그 당시 3층 석탑이 만들어지고 있었는데 불국사를 세운 김대성은 디자인을 다시금 과거로 회귀해서 목탑 디자인을 더해 다보탑을 만들었는데 그 이유가 궁금하다. 
 

<불국사 금동아미타여래좌상(위), 금동비로자나불좌상 p. 221>

 

 

그리고 불국사 불당 안에는 두 부처상이 있는 바로 금동아미타여래좌상과 금동비로자나불좌상이다. 금동아미타여래좌상은  통일신라 시대 만들어진 작품으로 풍채가 남다르다. 그러나 이 부처님은 단순히 풍채가 좋은 것뿐만 아니라 세련되고 높은 기술로 제작되어 부처의 얼굴부터 몸, 옷, 주름까지 세세한 부분 하나하나까지 완성도가 무척 높아 보인다. 그리고 금동비로자나불좌상은 국보 26호으로써 비로전이라는 건물 안에 있는 부처다. 

저자는 불국사 비로자나불을 만나면 단순히 조형의 아름다움을 넘어 그 안에 있는 독자적인 철학과 사상도 통일신라 시대에 완성도가 상당했음을 느끼게 된다고 한다. 

 

불국사를 나오면 석굴암을 만나게 되는데 저자는 석굴암을 관람할 수 있는 최적의 시기가 바로 '부처님 오신 날'이라고 한다. 그 날에만 유일하게 석굴암이 개방되어 안까지 구경할 수 있다고 한다. 그 날이 아닌 평상시에는 유리벽 너머로 바깥에서 석굴암의 모습을 볼 수밖에 없다고 한다. 나중에 석굴암을 보고 싶으면 부처님 오신 날 방문하면 될텐데 나의 경우는 거의 불가능해보인다. 그날은 사람이 엄청 많기 때문에 불국사까지 제대로 올 수 있을지 미지수이기 때문이다. 

그 밖에도 저자는 경주의 남산에 대해서도 언급을 한다. 마치 서울의 남산과 같은 이름인데 이 남산은노천 박물관이라 불릴 정도로 많은 유물과 유적지가 있는 장소이다. 그런 만큼 국내에서도 꽤 유명한 여행지로 알려져 있어, 어떤 사람들은 "하루 만에 남산 보물을 다 보겠다."는 욕심으로 찾아온다고 한다고 한다 그런데 등산을 막상 해보면 처음 욕심과 달리 절대 하루 만에 남산의 유믈을 다 볼 수가 없다는 걸 알게 된다. (p. 231)

 

 저자는 남산을 끝으로 요즘 경주의 핫플레이스로 떠오르는 황리단길을 거닐며 여행을 마친다. 황리단길은 요즘 카페, 맛집, 숙박 등으로 요즘 경주에서 가장 뜨는 지역이며 젊은이들이 많이 찾고 있는 곳이다. 각종 유적지를 통해 경주의 과거를 경험할 수 있다면 황리단길을 통해 경주의 현재와 미래를 체험할 수 있다. 문화 유적지에 어떻게 현대식 카페와 맛집들이 들어서 있는지 궁금하기도 하지만, 어쨌든 황리단길을 통해 경주가 과거, 현재가 공존하는 듯 하다. 이에 대해 저자 또한 앞으로 경주에 어떤 여행 아이템이 등장할지 자뭇 궁금하다고 말한다. 

     <황리단길 >             출처: 구글 이미지

 


 

3. 랜선 여행 후

저자와 함께 숨가쁘게 다녀온 1박 2일간의 랜선 경주 여행이 끝났다. 실제 경주를 갔다온 저자만큼 정말 많은 것을 보고 느낀 것 같다. 무엇보다 천년의 수도 경주를 제대로 배우고 문화적 향기를 느낀 것 같다. 이 책을 읽고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이 길로 당장 경주로 떠나고 싶다'는 것이다. 저자와 함께 보고 느낀 것을 직접 나도 저자처럼 내 온 몸으로 느끼고 싶어졌다. 하지만 현실은 코로나가 아직도 기승을 부리고 있다. 날이 늘어갈수록 기세를 또다시 떨쳐가는 코로나로 인해 아직 여행을 계획하기가 두렵기도 하다. 그래서 지금은 이렇게 랜선 여행으로 만족하기로 한다.

 

이제는 제대로 경주를 느낄 수 있을 것 같다. 경주를 100번 이상 다녀온 저자는 경주를 다녀온 소감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경주를 잘 아느냐 라고 묻는다면 글쎄, 대답이 쉽지 않다. 나 역시 수십 번을 여행왔으나 내가 아는 경주는 매번 그 모습을 달리하는 것 같다. 계절에 따라 새로운 볼거리가 생길 때마다, 내가 유적을 보는 지식이 쌓일 때마다 경주는 조금씩 색이 달라진다. "

-p.251-

 경주를 갔다 온 지인들도 나에게 한결같이 말한다. "경주는 갈 때마다 새롭다'라고 말이다. 나 또한 나중에 경주를 저자만큼 많이 가게 되면 이렇게 말할까. 나는 과연 뭐라고 말할까.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경주는 신라의 천년의 수도이며, 아직도 그 천년이 살아 숨쉬며 끊임없이 그 모습이 달라지는 곳이다. 따라서 1박 2일, 2박 3일의 여행으로는 경주에 대해 다 알 수 없다. 천년의 역사와 문화가 살아 숨쉬기에 저자처럼 일상적으로 자주 경주를 찾아 그 비밀을 찾아보는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코로나가 끝나는 날! 나는 경주로 가는 버스 표를 손에 쥐고 배낭을 짊어지고 내가 만든 지도를 가지고 나만의 경주 여행을 할 것이다. 그 때를 꿈꾸며 열심히 이 책으로 열심히 랜선 여행을 할 것이다. 

그 여행 길에서 이 책은 나에게 길안내자이자, 길동무가 되어줄 것이다

자! 여러분들도 지금 저자와 함께 신라 천년의 수도 경주로 랜선 여행을 떠나보자!

 

YES마니아 : 로얄 이달의 사락 s*******4 2021.07.06. 신고 공감 18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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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이 고고학 : 나 혼자 경주여행
"일상이 고고학 : 나 혼자 경주여행" 내용보기
지금 당장 여행을 떠날 수 있다면 나는 주저 없이 경주로 떠날 것이다. 그만큼 내가 정말 사랑하는 도시 경주! 경주를 좋아하는 이유는 산과 바다를 모두 볼 수 있고 무엇보다 내가 좋아하는 문화재가 가득한 곳이기 때문이다. 이상하게 나는 어릴 때부터 역사를 좋아했고 차를 타고 지나가다가 갈색 표지판에 문화재가 나오면 저곳에는 어떤 문화재가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항상 해
"일상이 고고학 : 나 혼자 경주여행" 내용보기

 


 

지금 당장 여행을 떠날 수 있다면 나는 주저 없이 경주로 떠날 것이다. 그만큼 내가 정말 사랑하는 도시 경주! 경주를 좋아하는 이유는 산과 바다를 모두 볼 수 있고 무엇보다 내가 좋아하는 문화재가 가득한 곳이기 때문이다. 이상하게 나는 어릴 때부터 역사를 좋아했고 차를 타고 지나가다가 갈색 표지판에 문화재가 나오면 저곳에는 어떤 문화재가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항상 해왔다. 고등학교 때도 국사와 한국 근현대사는 제일 좋아하는 과목이었으니까.

 

이런 경주를 나는 살면서 딱 3번 가봤다. 한 번은 수학여행으로 또 한 번은 7번 국도를 타고 여름휴가를 가던 중 잠깐 경주에 들렸었다. 그리고 마지막은 재작년에 아이들과 함께 경주로 1박2일 여행을 다녀왔다. 난 아직 3번밖에 못 가봤는데 이 책의 저자는 무려 100번을 넘게 경주를 다녀왔다고 한다. 우와 부럽다..라는 말이 절로 나왔다.

 

100번 넘게 경주를 다녀온 저자의 눈에는 경주가 어떻게 보일까? 저자는 고고학을 통해서 경주를 바라본다. 그럼 고고학이란?

인간이 남긴 물질 증거와 그 상관관계를 통해 과거의 문화와 역사 및 생활 방법을 연구하는 학문 (출처:네이버)

아.. 어렵다 고고학 자체가 참 어렵네. 이것저것 문화재를 보면서 생활 방법과 역사 그리고 문화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있는 책일까? 책 내용이 참 궁금해졌다.

 

 

 

책에 시작은 저자가 안양에서 버스 표를 구매해서 경주로 떠나는 아주 소소한 일상에서부터 시작된다.

프롤로그 속에는 경주로 떠나는 저자의 설렘이 아주 잘 담겨있다. 읽으면서 내가 버스를 타고 경주로 떠나는 느낌이었으니까.

버스에 내려서 저자의 발길이 처음 향한 곳은 바로 봉황대이다.

 


 

 

조선 시대 사람 눈높이로 볼 때 일반적인 무덤에 비해 너무나 비상식적으로 큰 형태인지라 언덕으로 인식할 수밖에 없었고, 그 결과 일제 강점기 시대에 금관이 발견되기 전까지 거대 고분들은 자신들의 비밀을 철저히 숨길 수 있었던 것이다. p41

 

 

경주에 갔을 때 골목 사이로 보이는 엄청 큰 무덤이 참 이색적으로 느껴졌다. 길을 걷던 둘째가 "엄마, 여기 사람들은 바로 옆에 저렇게 큰 무덤이 있는데 무섭지 않을까?? 무덤이랑 같이 사는 거잖아"라고 말했다. 생각해 보니 그렇네. 무덤 옆에서 밥을 먹고 무덤을 풍경 삼아 커피를 마신다. 정말 신기한 풍경이 아닐 수 없다.

 

 


 

 

 

경주와의 만남을 고분으로 시작한 저자가 향한 곳은 그 고분 안에 있는 황금 유물을 간직하고 있는 국립경주박물관이다.

3~4개월마다 바뀌는 특별 전시, 이것 때문에 1년에도 3~4차례 하루씩 날 잡아서 경주를 방문한다니. 우와 정말 저자의 경주사랑에 박수를!

 

나도 아이들과 방문했던 곳이다. 경주 여행을 계획하면서 꼭 가보고 싶었던 곳이었으니까. 수학여행 때도 왔던 곳이었는데 기억나는 것은 야외에 있던 선덕대왕신종 하나뿐이다. 정말 내 기억이 맞을까? 하는 의심을 가지고 입장한 국립경주박물관에는 정말 에밀레종으로 유명한 성덕대왕신종이 있었다.

내 기억이 틀리지 않았던 것이다. 그것 말고는 기억나는 게 하나도 없는 이곳에서 하나하나 둘러보는 국립경주박물관은 정말 재미있었다. 아이들이 사진을 제일 많이 찍었던 곳은 바로 금관 있었던 곳이다. 고분 안에 들어왔을 때의 느낌을 그대로 받을 수 있었던 곳이었는데 어두컴컴한 곳에서 보는 금관은 정말 화려하고 멋있었다.

 

 


 

 

성덕대왕신종 외에 옥외 전시장에서 꼭 봐야 할 것은 고선사지 삼층 석탑이다. 국립경주박물관 본관 뒤편으로 가면 석가탑과 다보탑의 복제품이 자리 잡고 있는데, 그 자리에서 다 안 쪽으로 걸어가 보자. 왼쪽에 있는 신라미술관 건물 뒤쪽으로 거대한 탑이 하나 우뚝 서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위치가 안쪽으로 쑥 들어가 있어 박물관 건물에 가려져 일반적인 각도로는 보이지 않아 구경 못하는 이가 많을 듯하다. p50

 

 

책에서는 박물관 내부뿐만 아니라 옥외에도 다양한 유물이 전시되어 있다고 소개한다.

내가 경주국립 박물관에 방문했을 때는 마침 비바람이 몰아치던 날이라서 뛰어다니기 바빴던 기억만 나는데.. 정말 아쉽게도 옥외 박물관을 구경하고 오지 못했다. 관에서 관으로 뛰어가면서 우와 여기 탑이 있네?라는 것을 보기는 했지만 눈에 잠깐 담았을 뿐 바람을 피해 건물 안으로 들어가기 바빴다.

 

이 탑은 신라 3층 석탑의 원조라고 하던데.. 다음에 국립경주박물관에 방문하면 꼭 이 탑을 찾아서 보고 와야겠다. 저자처럼 나도 이 탑과 함께 원효대사를 생각하고 싶다. 책 속에 숨은 이야기가 정말 재미있다. 궁금하면 읽어보시길!

 

 

경주국립박물관에서 나와 태종무열왕릉을 거쳐 저자는 황룡사와 분황사로 향한다.

내가 경주를 방문했을 때 시간 때문에 정말 간만의 차로 들어가서 봤던 곳이 분황사이다. 분황사 모전석탑을 담 밖에서 보고 갈 뻔했던 아찔한 상황이 생각난다. 다행히 마감 시 감 10분 정도가 남아서 들어가서 볼 수 있었다. 분황사가 절이라고 생각은 못 하고 그냥 석탑이 하나 있구나 생각했었는데 책을 읽고 깜짝 놀랐다. 신라 시대에 분황사는 작은 곳이 아니었다니. 황룡사가 큰 것은 알고 있었는데 분황사도 황룡사의 60% 크기를 자랑한다고 한다. 우와..

 

 


photo by. 별 @모전석탑

 

 

내가 직접 본 모전석탑은 결코 작은 크기가 아니었고 위로 올라가서 보면 탑 안에도 들어갈 수가 있었다. 아이들은 다보탑이랑 석가탑을 보고 방문한 뒤라 이전에 봤던 탑들과 조금 다른 느낌에 신기해했다. 모전석탑은 말 그대로 모방한 석탑, 벽돌을 모방한 돌로 만든 탑이라는 뜻이다. 이곳에서도 만날 수 있는 원효와 추사 김정희 이야기는 재미있다. 생각보다 경주에는 원효와 추사의 흔적이 많이 남아있다는 것도 책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

 

 



photo by. 별 @황룡사지

 

분황사 바로 옆에 있는 황룡사지. 내가 수학여행 때 왔을 때 정말 당황했던 기억이 난다.

절이라면서요.. 왜 아무것도 없어요?? 드넓은 벌판에 드문드문 있는 이상한 돌들이 너무 이상하게 느껴졌었다.

하지만 다시 방문한 황룡사는 정말 다른 느낌으로 다가왔다. 황룡사는 그대로인데 변한 것은 나뿐이라는 생각도 함께 들었다.

 

 

황룡사 역사문화관을 가보고 싶었으나 마감시간이 지나서 아쉽게도 멀리서 바라만 보았는데 이곳에 황룡사 9층 목탑의 모형이 전시되어 있다고 한다.

황룡사에 대해서 조금 더 자세히 알고 싶다면 황룡사 역사문화관을 방문해볼 것을 추천! 나도 다음에 이곳을 아이들과 함께 꼭 다시 오고 싶다.

 

황룡사 터를 바라보면서 아이들은 몽골군 나쁘다며 몽골 초원을 다 불태워버려야 한다는 분노를 표출했는데 책에서는 조금 다르게 설명한다.

 

신라 시대에 만들어진 황룡사 9층 목탑은 고려 시대인 954년, 벼락을 맞고 불타 사라지면서 약 300년간의 생을 마감한다.

그럼 역사 책에서 배운 몽고 침입으로 불타서 없어졌다는 황룡사 9층 목탑은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몽고에 의해 불타 사라진 목탑은 고려 시대 때 복원한 황룡사 9층 목탑으로 고려 현종 때인 1021년, 이전에 벼락을 맞아 사라진 탑을 새로 올리면서 만든 것이다. 다름 아닌 이것이 1238년, 몽고 침입으로 사라지게 된다. 결국 신라가 만든 탑은 300년, 고려가 만든 탑은 200년, 총 합쳐서 500년을 경주의 기둥으로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p101

 

벼락을 맞고 불타 사라졌다는 이야기가 조금 충격적이었다. 한 번도 배운 적 없는 내용이라서 그런가?

몽고 침입으로 사라지게 된 줄 알았는데.. 조금 더 깊게 알게 되니 새롭게 보이는 황룡사 9층 목탑이었다. 또 생각보다 오래 경주의 기둥으로 존재했음에 조금은 숙연한 마음도 들었다. 선덕여왕의 그 간절한 마음을 느낄 수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저자는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버스터미널로 갔다가 1박을 결심하고 표를 환불한다. 그 이유는? 바로 경주의 야경!

갑자기 24시간이 충전된 저자의 흥분감이 책 속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무계획이 계획이 되는 것. 바로 여행의 묘미가 아닐까?

이렇게 갑작스러운 24시간을 충전한 저자가 처음으로 향한 경주의 야경은 바로 첨성대이다.

낮에 보는 첨성대와 밤에 보는 첨성대는 정말 천지차이다. 경주에 도착하자마자 첨성대를 볼 확률은 정말 높다. 생각보다 경주 시내 중간에 드넓은 공간에 우뚝 서있으니까. 차로 오고 가면서 아주 잘 보인다. 그래서 굳이 가까이 가서 봐야 할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야간에는 다르다.

느낌 자체가 달라진다. 나는 야간에는 주차할 곳이 없다는 팁을 미리 보고 갔기에 분황사를 둘러보고 바로 맞은편에 있는 동궁과 월지에 주차를 하고 첨성대까지 걸어갔었다.

 

 


photo by. 별 @첨성대

 

 

이렇게 현대 기술을 통해 핑크빞으로 물든 첨성대가 보이는 순간 휴대폰을 꺼내 사진을 찍느라 바쁜 사람들. 나 역시 추억을 위한 사진 하나를 찍고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다가가 첨성대의 위용을 살펴본다. p127

 

 

생각보다 큰 첨성대의 높이에 아이들이 멍하니 쳐다봤던 게 생각난다. 그러고는 둘째는 어머 이건 찍어야 해!라면서 자기 카메라에 첨성대를 담았다.

첨성대는 현존하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천문대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직접 보면 볼수록 저게 정말 천문대가 맞나? 하는 의심이 들기는 한다.

저자는 이 건축물을 보면서 신라 토기를 떠올린다. 와.. 역시 많이 알면 알수록 떠올려지는 자체가 다르네.

이 부분을 읽으면서 신라 토기를 검색해봤다. 목이 긴 토기 모습이 얼핏 보면 첨성대를 담긴 했다. 구체적인 기록이 없는 게 또 다른 매력으로 다가오는 순간이다.

 

 

첨성대를 뒤로하고 다시 왔던 길을 돌아서 동궁과 월지로 향한다. 가는 길에 월성해 자가 발굴 현장을 볼 수 있다. 또 드문드문 예쁜 조형물들이 오고 가는 길을 즐겁게 해준다. 저자는 첨성대에서 반월성으로 향한다. 반월성이 어디지? 내가 봤던 곳인가? 하고 지도를 살펴보니 첨성대에서 계림을 지나 반월성으로 갈 수 있었다. 얼핏 표지판을 본 것도 같은데.. 미리 알았다면 돌아가는 길에는 저쪽으로 가볼걸..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가고 싶은 리스트에 하나 더 추가!

 

 

첨성대와 함께 경주의 아경 중에 야경으로 꼽히는 곳은 바로 동궁과 월지. 처음에 경주를 방문하기 위해 이것저것 검색하는데 도대체 동궁과 월지가 뭐야??

이런 곳이 있었어?라고 생각했는데.. 안압지였구나. 수학여행 이후 방문한 적이 없으니 이름이 바뀌었는지도 몰랐다.

동궁과 월지에 도착하면 이색적인 풍경이 펼쳐진다. 바로 LED 풍선!

 

photo by. 별 @ 동궁과월지 LED풍선

 

 

구매하면 가지고 입장할 수 없는데도 정말 많은 상인들이 풍선을 팔고 있었다. 나만 봤나 했더니 저자도 책에서 풍선을 이야기한다.

 

야간의 동궁과 월지는 참으로 화려하다. 오후 8시가 된 지금은 한창 사람이 몰리며 야간 조명이 화려할 때다. 아마 통일신라 시대 경주도 이정도로 화려하지는 못했을 텐데, 역시나 최첨단 조명인 LED 파워를 여실히 느끼게 한다. 경주에서 LED의 힘과 자부심이 얼마나 대단한지 동궁과 월지 근처로 가면 상인들이 아예 LED풍선까지 만들어 팔고 있다. 즉 야간 불빛이 가능한 풍선이다. P135

 

신기한 풍경을 뒤로하고 동궁과 월지에 입장한다. 미리 입장권을 구매해 놓는 것을 왜 추천하나 했는데 나올 때 보니 줄 서서 구매하고 줄 서서 입장한다.

 

입장권 구입하는 곳에 아주머니 3분이 상주해서 입장권 구매를 빠르게 도와준다. 시간 타임을 잘못 맞추면 주차부터 입장권 구매 그리고 입장까지 생각보다 많은 시간을 소요할 수 있다. 이곳에 주차를 하고 미리 동궁과 월지 표를 구매해놓고 첨성대를 다녀온 게 정말 신의 한 수였다. 나오는 길에 만난 주차장의 수많은 차와 매표소 앞에 줄에 깜짝 놀랐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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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by. 별 @동궁과 월지

 

동궁과 월지를 수학여행 때 방문했을 때는 낮이었고 이렇게 큰 곳이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연회를 즐기고 나라에 중요한 손님이 왔을 때 접대 장소로 활용된 곳이라고만 알고 있었는데. 당을 최종적으로 물리친 문무왕이 동궁을 이곳에 만들면서 연못 이름은 월지고 건물은 동군 전이 있었다는 의미로 동궁과 월지로 불린다고 한다. 밤에 방문해서 화려함밖에 보지 못한 게 아쉽긴 했다. 정말 예쁘고 멋있고 사람들이 왜 야경하면 동궁과 월지를 추천하는지 고개가 끄덕여졌지만 사람이 너무 많다. 다음에 경주를 방문했을 때는 낮에 방문해서 조금 더 자세히 동궁과 월지를 둘러보고 싶어졌다. 낮에는 조금 여유롭게 천천히 사람 없는 동궁과 월지를 만날 수 있겠지.

 

 


photo by. 별 @월정교 

 

 

저자는 동궁과 월지를 뒤로하고 하루를 마무리한다. 갑작스러운 1박으로 숙소에 대한 고민 끝에 찜질방으로 향한다.

이 부분에서 어찌나 반갑던지. 내가 아이들과 경주 여행을 갔을 때 나도 1박으로 머물렀던 곳이다. 게스트 하우스나 호텔을 예약할까 하다가 후기를 보고 하룻밤 머물기에 괜찮을 것 같아서 선택했던 곳이다. 가격은 기존 찜질방보다는 조금 비쌌지만 최신식이라서 깨끗하고 무엇보다 맨 위층에 아이들 공간이 정말 잘 되어있었다. 키즈카페인줄. 무엇보다 오락기가 정말 많았는데 다 무료. 자기 전까지 오락하고 자고 일어나서 나가기 전에도 오락하고.. 오락하러 경주를 온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까. 자는 곳도 맨바닥이 아닌 긴 의자처럼 생긴 곳에서 잘 수 있었는데 생각보다 훌륭했던 기억이 난다.

이곳을 이 책에서 만날 줄은 몰랐는데. 신기하다.

 


 

 

찜질방에서 푹 자고 일어난 저자는 버스를 타고 문무대왕릉으로 향한다.

바다에 있는 무덤. 수학여행 때 이곳에 방문했을 때 비가 와서 학년 전체가 우비를 입고 이곳을 둘러봤던 기억이 난다.

아이들과 이곳을 방문하고 싶었는데 생각보다 경주 시내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서 아쉽게도 보지 못하고 왔었다. 그래서 책에서 만난 문무대왕릉은 뭔가 조금 더 반가웠다.

 

 

문무대왕릉. 바다에 위치한 바위섬으로 땅에서 불과 200m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지금도 바위섬은 병사들로 가득하다. 바다의 갈매기들이 그들이다. p162

 

 

나도 이곳에 방문했을 때 수학여행으로 내 의사와는 전혀 상관없이 간 곳이지만 그 묘한 느낌이 아직도 선명하게 머릿속에 남아있다. 용이 되어서 바다를 수호하고 싶어 했던 문무왕의 마음이 느껴져서 였을까..

 

 

동해 어구의 큰 돌 위에 장사 지냈다. 세속에서 전해오기로는 왕이 용으로 변했다 하니, 이로 인해 그 돌을 가리켜 대왕성이라 한다. <삼국사기> 문무왕 편 P164

 

 

처음부터 이곳이 문무대왕릉인 줄 알았는데 이곳이 문무대왕릉으로 인식된 것이 불과 1970년대 일이라고 한다. 이전에는 괘릉을 문무대왕릉으로 인식했었다고.. 시일이 흘러 1967년 문화재청과 삼산 오악 조사단이 문무왕의 능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기록과 유적을 대비해보니 대왕암이라는 바위가 문무왕의 장례지임을 파악하고 경주 김씨 문중도 5년간 문중 토의를 거친 후에야 괘릉의 주인을 문무왕에서 원성왕으로 바꾸고 대왕암이 문무대왕릉으로 비정하게 되었다고 한다. 문무대왕릉이 문무대왕릉이 되기까지 참 오랜 시간이 걸린 것 같다.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어서 그런지 다음에 방문했을 때는 조금 더 다른 느낌으로 바라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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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문무대왕릉을 뒤로하고 이견대에 올라 문무대왕릉을 보고 감은사지 탑으로 향한다. 이견대에서 감은사지까지는 걸어서 10여 분 정도 걸린다고 한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경주도 문화재와 문화재 사이가 대중교통으로 이동하기가 조금 더 편리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봤다. 

 

감은사지는 다른 사찰과 달리 높은 언덕 위의 평지로 올라가 있다는 점이 특이한 곳이다. 감은사 이후로 신라 사찰은 산과 같이 높은 지대에 짓는 경우가 많아졌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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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은사지에는 특이한 터가 있는데 바로 금당 터이다.

 

금당 돌계단 아래에 동쪽을 향해 구멍을 하나 뚫어두었으니, 곧 용이 절로 들어와 돌아다니게 하려고 마련한 것이다. 왕의 유연에 따라 뼈를 보관한 곳이므로, 대왕암이라고 불렀고 절은 감은사라고 하였다. 뒤에 용이 모습을 나타낸 곳을 이견대라고 하였다. <삼국유사>기이편, 만파식적 P185

 

문무왕이 바다에서 용이되어 싸우다가 쉬어갈 수 있는 공간을 만들었다. 그곳이 바로 금당 터이다. 이것만 보아도 감은사지는 충효의 사찰임을 알 수 있다.

 

아버지를 위해 남다른 노력을 한 신문왕, 효성이 정말 남다르게 느껴지는 곳이다. 문무대왕릉을 보고 이견대를 지나 감은사지까지 문무대왕을 조금 더 깊이 만날 수 있는 코스로 딱 좋은 것 같다.

 


photo by. 별 @불국사

 

감은사지 구경을 끝내고 간 곳은 바로 불국사. 생각보다 불국사는 시내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어서 여행 코스를 짜던 중 난감했던 적이 있다.

불국사와 석굴암까지 함께 보고 다시 시내로 돌아올 생각이라면 여유를 조금 두고 계획을 세워야 할 것 같다.

 

 

불국사는 국가 사찰이라고 생각했는데 책에서는 조금 다른 시선으로 불국사를 바라본다. 개인 사찰일까? 국가 사찰일까?

 

앞서 예를 들었듯이 불국사, 석굴암 건설이 김대성 가문의 힘으로 충분히 가능하다고 여기지만, 남아 있는 자료의 한계로 100& 정답은 이야기 할 수가 없다. 다만 김대성 설화를 읽어볼 때 당대 볼사로는 대단한 이목을 끌었던 것은 확실히다. 또한 삼국유사를 보면 귀족이 만든 가문 사찰의 예가 무척 많았음을 알 수 있으나, 이 정도로 한 개인의 이름이 부각되는 경우는 무척 드물다는 것을 볼 때 내 개인적으로는 김대성 가문의 사찰이 아닐까 생각하고 있다. P199

 

 

아 어릴 때는 불국사 이야기를 읽으면서 그렇구나 김대성이 만들었나 보다는 생각만 했었는데 물론 이 책을 읽기 전까지도 그랬다. 하지만 이 책에서 던져준 질문은 다른 생각도 해볼 수 있게 해줬다. 김대성의 개인적 불심으로 시작되었지만 마지막은 국가에서 사업을 마무리했다. 그러면 국가 것일까??

근데, 직접 방문했을 때 불국사 크기도 장난 아니었는데 이것을 만들 정도의 집안이면 신라 귀족들의 부가 어느 정도였는지 살짝 예측해 볼 수도 있다.

당대 진골의 부는 정말 어마어마했을 듯.. 영원히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는 잠시 접어두고 불국사를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기로 한다.

 

 


photo by. 별 @불국사

 

아이들과 불국사를 방문했을 때 아이들이 제일 신기했던 것은 바로 두 개의 석탑이다.

첫째랑 둘째는 책에서는 엄청 작아 보였는데 실제로는 생각보다 높은 탑에 깜짝 놀라 했다. 연신 진짜 높다 진짜 높다를 연발했으니까.

그냥 멋있다고 생각했던 두 탑에는 생각보다 깊은 신라의 뜻이 담겨있다.

 

 

신문화이자 신라에서 만들어낸 3층 석탑인 석가탑과 본래 탑의 기원을 그대로 표현한 다보탑이 함께 있게 되니, 이로써 불법의 과거부터 현재까지 불국사 한자리에서 선보인 것이다. 즉 다보탑과 석가탑을 통해 신라 불교 세계관의 확대, 그리고 탄탄한 족보를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이다. 인도와 중국으로부터 부처의 말씀 (다보탑)을 신라가 받아들여 불교가 시작되었으나, 결국 신라인들은 자신의 것으로 이를 완성(석가탑) 시켰다는 이야기. P214

 

 

이 부분을 읽으면서 신라가 얼마나 발전했었는지 유추해 볼 수 있었다. 자신들만의 세계관을 사찰을 통해서 표현할 만큼 문화적으로 엄청난 성장을 이뤄냈었다는 생각을 했다. 자신의 세계관을 건축물로 세련되게 표현하다니. 신라 사람들의 센스에 감탄을!

 

 


photo by. 별 @불국사

 

 

교과서에서 보던 탑과 다른 모습에 마음을 빼앗겨 사진을 엄청 많이 찍고 극락전으로 옮겨갔다. 극락전에는 복 돼지라 불리는 황금돼지가 있는데, 극락전 건물의 현판 뒤를 자세히 보면 노란색 돼지가 보인다. 나도 이 돼지를 무한도전에서 봤던 기억이 있어서 아이들과 극락전에 가자마자 찾아봤다. 나는 극락전에 돼지만 찾으러 갔었는데 저자는 극락전 안에 있는 국보 27호인 금동 아미타래 여래좌상을 만나기 위함이었다. 이 부처님은 통일 신라 시대를 대표하는 3대 금동 불상으로 알려져 있다고 한다. 그런데 불국 산에는 국보 27호의, 형제 부처가 비로전이라는 건물 안에 하나 더 있다고 한다.

 

불국사 비로자나불을 만나면 단순히 조형의 아름다움을 넘어 그 안에 있는 독자적인 철학과 사상도 통일신라 시대에 완성도가 상당했음을 느끼게 한다. P223

 

불국사를 통해 신라의 세계관을 알았던 것처럼 비로나자불을 통해서 통일신라의 조금은 독특한 불교 철학을 느낄 수 있었다. 문화적으로 성장한 신라의 힘도 대단하다고 느낄 수 있었고.

 

 

 

불국사를 지나 석굴암으로 향한 저자! 아.. 나도 석굴암을 보고 왔어야 했는데..

집으로 돌아가는가는 길이 멀어 불국사만 들렸다가 서둘러 집으로 향했던 기억이 난다. 둘째는 아직도 석굴암을 보고 오지 못한 것을 제일 아쉬워한다.

그럴 때마다 석굴암 못 봤으니까 경주에 또 갈수 있잖아?라며 달래본다. 나도 석굴암은 수학여행 때 한번 다녀온 기억이 있고 상당히 먼 거리를 걸어 올라갔던 것 같다. 어릴 때라서 더 멀게 느껴졌을지도 모르겠지만.

 

토함산 석굴암으로 올라가는 꼬불꼬불한 도로를 따라가다 드디어 주차장에 도착하면 그곳에서 저 멀리 동해 바다가 보인다. 이것이 장관이다. 왜 김대성이 이곳에다가 석굴암을 만들었는지 이해가 된다. 특히 새벽에 오면 석굴암에서 동쪽으로 해가 뜨는 것도 볼 수 있다. P225

 

왜 내 기억에는 동해바다는 없는 거지. 다음에 석굴암에 방문하게 되면 꼭 동해바다도 보고 와야지.

부처님 오신 날에는 365일 중에 단 하루 입장료 무료, 개방시간이 1시간 앞당겨져 새벽 5시 30분 입장 그리고 유리벽이 아니라 인공 굴 안을 둘러보는 것 가능. 사람이 엄청나게 많을 것 같긴 하지만 조금 부지런하게 움직여 일출도 보고 유리벽이 아닌 석굴암 안을 신라시대 사람들처럼 거니는 엄청난 경험을 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저자는 버스를 타고 황련단길로 가는 중에 남산을 떠올린다. 나도 남산을 가본 적이 있다. 바로 수학여행 때. 서울에 있는 남산이 경주에 있다는 게 신기했다. 그때는 등산을 하는지도 모르고 이름이 신기하네라는 생각만 했던 것 같다. 그리고 지금 내 기억 속에는 힘들었던 기억과 드문드문 엄청 큰 바위에 뭔가가 그려져 있었던 기억만 있다. 그 후 1박2일이라는 프로그램을 통해 남산을 본 적이 있는데 그때 정말 다시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던 곳이다.

 

경주 남산은 노천 박물관이라 불릴 정도로 많은 유물과 유적지가 있다고 한다. 100개가 넘는 절터와 100개가 넘는 석불과 100개가 넘는 석탑이 존재하는 산이라.. 하루 만에 다보는 것은 불가능하다. 경주남산연구소라는 재단이 있는데 남산 답사를 전문으로 하는 재단이다. 경주남산 안내소에 모여서 함께 등산을 시작하고 도중에 유적지를 만나면 알찬 설명도 해준다고 하니 남산을 처음 방문하는 사람이라면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 같다. 거기다가 참가비는 무료!

 

 

인구가 증가하면서 왕궁인 월성을 중심으로 경주 택지가 꽉 차기 시작했자, 말과 도보로 이동할 수 있는 생활권 거리 내로 왕릉, 국가 사철마저 서서히 이동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일정 거리 내 택지마저 꽉 차버리니 드디어 산으로 옮겨진 것이다. 상황이 이러하니 시간이 흐르면서 남산 계곡 안까지 사찰이 올라가기 시작하였다. 높아서 접근하기 힘들고 그만큼 손이 닿기 힘든 곳까지 가야지 집에서 가까운 거리 내 사찰을 만들자는 꿈이 가능해졌다는 의미다. P234

 

 

남산 자체가 하나의 커다란 문화재이며 신라인들이 직접 만든 하나의 사찰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다음 경주 여행에는 꼭 남산 답사를 넣고 싶다.

 

 

 


photo by. 별 @황리단길 도깨비명당

 

 

마지막 답사 지는 바로 황리단길. 나도 방문해봤지만 정말 많은 사람들에게 인기 있는 곳이다. 그 어딜 가도 여기보다 사람 많은 곳은 없을 것이다.

인기 있는 카페나 음식점의 대긴 줄은 기본인 것 같다. 나도 이곳에 방문해서 점심을 먹었었는데 20분을 기다렸다가 들어갔다. 가려고 했던 카페는 줄이 너무 길어 다른 곳으로 이동해서 커피를 마셨다. 경주 근처에 사는 사람들은 문화재보다 카페나 음식점을 이용하러 경주에 방문하는 경우도 많다고 한다.

카페에서 커피 한 잔 마시고 근처 고분을 둘러보는 정도로 간단하게 경주를 즐기고 돌아간다고 한다. 부럽다. 나도 경주 가까이 살고 싶네.

 

 


 

 

 

저자가 경주를 자주 방문한 이유가 조금 특이했다. 신라가 최종 승리한 이유가 무엇일까? 역사를 배우면서 한 번도 왜 신라가 최종 승리했을까를 궁금해 본 적이 없는 것 같은데.. 저자는 그 이유가 무엇일지 궁금해져서 경주를 자주 찾기 시작했고 그들의 승리 역사를 이해해 보려고 했다고 한다.

 

 

신라인들은 자신의 능력이 되는 한 적어도 한번도 내에서는 최고 수준의 무언가를 만들고자 노력하였다. 이를 위해서는 과정 중 순간의 비굴함도 참을 수 있었으며, 국가적 위기에서는 가장 높은 신분의 인물들이 가장 앞장서 자신을 희생했다. 이것이 신라가 승리한 역사를 만든 이유가 아니었을까? 그리고 그 흔적이 경주 곳곳에 남아 있는 것이다. P254

 

 

내가 다시 경주를 방문한다면 조금은 다른 눈으로 경주를 보고 싶다. 나만의 경주 이미지를 생각해 본다. 저자가 마지막에 남겨준 생각주머니인 경주는 ( )곳의 빈칸은 다시 한번 방문했을 때 채워봐야겠다. 똑같은 문화재를 봐도 조금은 다르게 생각할 수 있을 것 같다. 다음에 방문하는 계절은 봄이었으면 좋겠다. 경주벚꽃이 그렇게 예쁘다던데:)

 

l******i 2021.07.05. 신고 공감 13 댓글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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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여름 휴가는 경주, 그곳으로 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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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권이 거주지인 사람들에겐 경주가 결코 가까운 여행지는 아니다. 하지만, 대한민국 국민가운데 많은 이들의 가슴 속에는 경주의 추억이 다들 한 조각쯤 있지 않을까?  머나먼 학창시절, 지겹도록 집과 학교를 맴돌던 우리에게 일상을 박차고 집을 떠나 친구들과 합법적으로 밤을 지새고 놀 수 있게 해 준 수학여행은, 그 시절 우리에겐 가장 큰 이벤트 중 하나였다. 그 설레었던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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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권이 거주지인 사람들에겐 경주가 결코 가까운 여행지는 아니다. 하지만, 대한민국 국민가운데 많은 이들의 가슴 속에는 경주의 추억이 다들 한 조각쯤 있지 않을까? 

머나먼 학창시절, 지겹도록 집과 학교를 맴돌던 우리에게 일상을 박차고 집을 떠나 친구들과 합법적으로 밤을 지새고 놀 수 있게 해 준 수학여행은, 그 시절 우리에겐 가장 큰 이벤트 중 하나였다. 그 설레었던 수학여행의 장소가 바로 경주였다. 장난기 드글드글한 소녀들로 가득한 빛바랜 사진들과 판에 박은 듯 모두 같은 포즈와 구도로 찍은 불국사, 천마총, 첨성대를 배경으로 한 단체사진도 이제와 다시 보니 모두 소중하기만 하다. 

그 후 대학시절 몇몇 친구들과 배낭 하나 짊어지고 대구, 경주, 부산을 훑고 다녔던 여행을 끝으로 어쩐 일인지 더이상 경주를 못 가본 채 이렇게 시간이 흘렀다. 제주도나 해외여행은 오히려 몇차례 다녀왔어도, 왜 경주 여행은 못 했는지.... 이유는 명확지 않다. 그런데, 이렇게 여행이 자유롭지 못한 시절을 맞고 보니, 문득 경주가 떠올랐다. 버스나 기차를 이용하면 3~4시간이면 가 볼 수 있고, 부지런을 떨면 당일치기도 가능하다. 더군다나 경주에는 유네스코에서 지정한 문화 유산을 비롯한 신라의 빛나는 유산이 넘치도록 많은 곳이지 않은가?

아이들은 이제 다 자랐다고, 저희들끼리 여행 다니기 바쁘고, 마음 맞는 친구들과는 시간 맞추기가 아직도 쉽지 않고... 요즘 혼여 (혼자 떠나는 여행)도 유행이라는데, 한 번 감행해 볼 만 하겠다 싶은 차에 "일상이 고고학 나혼자 경주 여행"이란 책을 만나게 되었다. 

책의 저자는 안양 집에서 출발해 시외버스를 이용해 경주에 도착해 1박 2일동안 부지런히 돌아 다닌 여정을 꾸밈없고 진솔하게 적어간다. 이 여행 에세이는 마치 내가 직접 그곳을 돌아 다니고 있는 듯한 착각을 일으킬만큼 사실적이다.  저자의 배경지식 또한 풍부하여 피상적으로만 알고 있던 유적지와 유물에 대한 깊이있는 이야기는 사진과 함께 흥미로움을 더한다. 

여행의 일정은 책의 목차를 따라간다. 첫 여행지는 시외버스 터미널에서 도보로20분 정도 이동해 도착한 봉황대이다. 이곳은 높이 22m의 거대한 고분이다. 신라시대에 이렇게 거대한 고분을 만든 이유는? 그시대 고분의 대부분이 주인이 누구인지 밝혀지지 않았듯, 황봉대 또한 누가 묻혔는지 알 수 없다. 다만, 마립간 시대 왕실의 권위를 과시하기 위해 거대한 고분을 만들었을 것으로 추측할 따름이다. 초기 가야에 의지하고, 백제와 일본으로부터 끊임없이 위협을 받던 신라는 고구려의 도움으로 고구려의 보호국에서 결국은 비로소 국가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고 한다.

황봉대 근처 4개의 봉분 없는 고분에 얽힌 이야기는 흥미롭지만 씁쓸하기 그지없다. 일제 강점기 고분 속 유물에만 눈이 어두워 봉분을 모두 걷어 내었다니, 황당할 따름이고, 그 중 서봉총은 일제 강점기 구스타프 스웨덴 황태자에게 잘 보이고자 고분을 일부러 그에게 발굴 하도록 하고, 이름마저 스웨덴의 한자어인 서전중 앞글자인 서 와 이곳 고분에서 발굴된 금관에 장식되었던 봉황 모양에서 봉을 따와서 서봉총이 되었다니, 씁쓸한 기분이 안 들 수 없다. 

다음은 유명한 국립경주박물관. 봉황대에서 시내버스를 타고 갈 수 있다. 에밀레종으로 유명한 성덕대왕신종이 있고, 정면에는 신라역사관이 있다. 역시 신라의 유물하면 금관 아닐까? 신라의 금관은 총 6개가 박물관 소장중인데 그중 3개가 이곳 국립경주박물관에 소장되었다고 한다. 그것은 금관총, 서봉총, 천마총인데 특히 천마총 금관은 사진찍기로 유명하다. 


옥외 전시장에서는 성덕대왕신종 외에 '고선사지 삼층 석탑'을 꼭 봐야 할 것으로 저자는 강조한다. 이유는 신라 석탑의 시원적인 작품으로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신라 3층 탑의 원조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음은 택시를 타고 태종무열왕릉으로 향한다. 태종무열왕보다 우리에겐 김춘추로 더 익숙한 인물의 묘이다. 그 주위엔 김유신의 묘도 있다. 김춘추와 김유신 집안에 얽힌 여러 일화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등장한다. 특히, 태종무열왕을 위로 쭉 이어진 고분 4개가 눈에 띄는데, 조선시대 명필가 추사 김정희가 이것이 조산이 아니고, 왕릉임을 밝혔다고 한다. 대충 위의 고분부터 법흥왕, 진흥왕, 진지왕, 태종무령왕의 아버지 김영춘이라고 한다. 그러나, 아직도 고분의 주인이 누구인지 정확히 알 수 없다.

다음은 택시를 타고 황룡사지로 향한다. 황룡사는 신라 시대 대표적인 사찰로 불국사의 8배였다고 한다. 신라인들은 거의 100여년을 이어가며 황룡사를 증축했으며, 선덕여왕 시절 황룡사지 9층 목탑이 완성되면서 그 업적이 마무리 된다. 장육존불, 9층탑, 솔거의 금당벽화가 이곳에 있었다 한다. 황룡사지 터 바로 옆에 위치한 박물관 형식의 건물인 '황룡사 역사문화관'에는 황룡사 9층 목탑, 황룡사 이야기, 장욱존불 복원품 등 3가지 이야기가 테마로 구성되어 있다. 그 중 황룡사 9층 목탑이 지금으로 치면, 대략 30층 아파트와 비슷한 높이였다는 점과 내부에서 사람이 올라 갈 수 있었다는 구조가 새삼 놀랍다. 


이제 관광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려 시외버스 터미널로 들어서던 저자는 느닷없이 경주의 야경이 보고 싶어 1박을 결정하고 다시 택시를 탄다. 첫번째 야경 관광지는 첨성대다. 첨성대까지 차가 못 들어가니 첨성대 근처에서 걸어야 한다. 특히, 주말 저녁은 차량으로 정체가 심해지니 반드시 감안 해야 할 것 같다. 첨성대는 흔히 별의 움직임을 관찰하는 천문대로 인식되어 졌는데 삼국유사에는 점성대라는 표현도 있어서 점이나 제사를 보던 공간이라는 느낌도 들게 만든다. 저자는 첨성대를 보면서 신라 토기를 생각한다고 한다. 첨성대 주변 고분들도 조명이 켜지면서 여러개의 UFO가 지상에 내려온 분위기를 만들고 있다. 

다음 코스는 '동궁과 월지'. 월지는 한때 안압지로 불렸는데 '기러기와 오리가 노니는 못'이라는 의미다. 오직 연못만 남은 이곳을 보고 조선시대 사람들이 안압지라 이름을 붙였다. 그러나 이곳에서 유물을 발견하면서 월지라는 파편을 통해 달이 비추는 연못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고 한다. 연못 이름은 월지, 건물은 동궁전이었다는 의미의 동궁으로 불리게 되었다. 


 

찜질방에서 1박을 하고, 다음날 아침 다시 길을 떠난다. 이번엔 문무대왕릉이다. 문무왕은 삼국통일을 이루고, 당나라와의 밀고 당기는 외교를 통해 진정한 삼한일통을 이뤄낸 인물이다. 문무대왕릉은 바다에 위치한 바위섬으로 땅에서 불과 200m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이곳이 문무대왕릉으로 알려지게 된 일화가 책에 자세히 소개되어 있다.  대왕암이 진짜로 문무왕의 능이 맞느냐에 대한 여러 학자들의 주장이 있지만, 저자는 이곳에 와 보면 문무왕의 이이상과 걸맞는 장소임이 분명해 보인다고 주장한다. 문무왕의 아들 신문왕이 만든 이견대라는 정자를 거쳐, 감은사로 향한다. 감은사는 그동안의 사찰과 달리 높은 언덕 위의 평지로 올라가 있다는 점이 특이하다. 자연이 만든 높은 지대에 건축물을 만듦으로써 높고 낮음을 구성하여 서열과 위계가 구촉되는 것이다. 이런 형식이 더욱 발달하게 되면서 현재 우리에게 익숙한 소위 산 속에 사찰이 만들어지게 되는 것이다.  또한, 이곳의 삼층석탑에서 목탑에 집중하던 신라가가 석탑을 만들기 시작했음을 알 수 있다. 이유는 구하기 쉬운 재료인 화강암으로 석탑을 만들기 시작했고, 특히 돌로 탑을 만든 경험이 풍부했던 백제를 신라가 흡수한 뒤로 석탑 시대를 열게 된다. 

마지막은 드디어 불국사다. 여행시 꿀팁으로 경주시티 투어의 동해안투어 코스가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불국사와 석굴암은 통일신라 시대 재상을 지낸 김대성이 만들었다. 불국사에는 김대성의 이야기, 일본에 의해 불 탔다 다시 일본에 의해 복원된 이야기, 돌 하나하나 조각하고 운반하던 신라, 백제 사람들의 이야기가 있다. 불국사의 유명한 두개의 탑, 석가탑과 다보탑은 감은사지 3층석탑이 어느새 귀족적인 미감으로 완성되었음을 보여준다. 신라는 자신의 세계관을 세련되게 건축물로 표현할 정도로 최고의 문화적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마지막으로 석굴암과 남산을 둘러볼 때 알아두면 좋은 정보들을 소개하며 저자는 황리단길을 거쳐 다시 집으로 향한다. 

이렇게 저자의 1박2일간의 경주 여행은 끝났지만, 이후 에필로그에 쓰여진 그의 글에 더욱 눈길이 간다. 만약 에필로그가 없었다면 그저 그런 여행 에세이로 남았을 지 모르겠다. 그러나 마지막 에필로그에서 저자는 왜 신라의 고장인 경주를 가 봐야 하는지, 그리고 지금 현재의 시점에서 우린 신라로 부터 무엇을 배우고, 취해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지를 말하고 있다.

고구려 백제에 비해 국력과 문화가 떨어지는 것을 잘 알았언 신라인들은 외부와 적극적 교류를 통해 자신을 자각하면서 끊임없이 최고를 추구하고자 했다...... 이처럼 신라인들은 자신의 능력이 되는 한 적어도 한반도 내에서는 최고 수준의 무언가를 만들고자 노력하였다. 이를 위해서는 과정 중 순간의 비굴함도 참을 수 있었으며, 국가적 위기에서는 가장 높은 신분의 인물들이 가장 앞장서 자신을 희생했다. 이것이 신라가 승리한 역사를 만든 이유가 아니었을까? 그리고 그 흔적이 경주에 곳곳에 남아 있는 것이다.  p254

마지막으로 저자가 과제로 내준 자신만의 경주 이미지를 만들기 위해 이번 여름엔 경주로 향하기로 마음 먹었다. 책에서 소개해준 일정도 좋고, 그와 달리 나만의 일정을 짜보는 것도 의미 있겠다. 경주는 (       ) 한 곳. 이 빈칸을 어떤 말로 채울 수 있을까? 그 어떤 여행보다 경주 여행이 이렇게 설레일 줄은 미처 몰랐다.   

s******a 2021.07.07. 신고 공감 2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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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이 고고학, 나 혼자 경주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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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이 고고학, 나 혼자 경주 여행을 읽었다. 경주 여행은 여러번 가봤고 유적지들도 매우 친숙하고 잘 기억나는 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 책이 도움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나의 역사적 소양은 한계가 있고 또 아는 것이 있다고 해도 다 아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그렇고 이렇게 저자의 발자취를 따라가며 여행가는 기분을 느끼는 경험도 흔치 않았다. 새롭게 다시 한 번 경주를 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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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이 고고학, 나 혼자 경주 여행을 읽었다. 경주 여행은 여러번 가봤고 유적지들도 매우 친숙하고 잘 기억나는 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 책이 도움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나의 역사적 소양은 한계가 있고 또 아는 것이 있다고 해도 다 아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그렇고 이렇게 저자의 발자취를 따라가며 여행가는 기분을 느끼는 경험도 흔치 않았다. 새롭게 다시 한 번 경주를 둘러보고, 신라를 느끼는 느낌이 들어 좋았다. 

j******6 2022.12.31. 신고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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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여행 성공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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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여행을 가기 위해 사서 읽었습니다.여행은 아는 만큼 보이는 법이니까요.특히나 역사 가득한 여행을 할 수 있는 경주를 가기 전에 기본적인 것은 꼭 알고 가야한다고 생각했습니다.황윤 작가님 책의 좋은 점은 가볍게 친구와 이야기하는 듯한 느낌으로 술술 쉽게 읽힌다는 것입니다.덕분에 역사공부도 하고 즐거운 여행도 잘 하고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이 책을 읽고 백제 시리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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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여행을 가기 위해 사서 읽었습니다.

여행은 아는 만큼 보이는 법이니까요.

특히나 역사 가득한 여행을 할 수 있는 경주를 가기 전에 기본적인 것은 꼭 알고 가야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황윤 작가님 책의 좋은 점은 가볍게 친구와 이야기하는 듯한 느낌으로 술술 쉽게 읽힌다는 것입니다.

덕분에 역사공부도 하고 즐거운 여행도 잘 하고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이 책을 읽고 백제 시리즈도 사서 읽었어요.

박물관편도 있던데 그것도 나중에 읽어볼까 하고 있어요.
r****k 2024.02.18.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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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이 고고학, 나 혼자 경주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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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이 고고학이면 얼마나 좋을까! 일상이 고고학 시리즈는 <나 혼자 가야 여행>, <나 혼자 경주 여행>, <나 혼자 백제 여행> 등이 있는데 내 눈과 마음에는 경주 여행이 가장 궁금했다. 지붕없는 박물관 경주... 그 곳은 가고 가고 또 가고 싶은 곳이다. 구경했지만 공부하면 또 다른 즐거움이 생겨서 다시 가고 싶은 곳! 경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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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이 고고학이면 얼마나 좋을까! 일상이 고고학 시리즈는 <나 혼자 가야 여행>, <나 혼자 경주 여행>, <나 혼자 백제 여행> 등이 있는데 내 눈과 마음에는 경주 여행이 가장 궁금했다. 지붕없는 박물관 경주... 그 곳은 가고 가고 또 가고 싶은 곳이다. 구경했지만 공부하면 또 다른 즐거움이 생겨서 다시 가고 싶은 곳! 경주다.

YES마니아 : 골드 j***9 2022.06.27.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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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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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이 고고학. 나 혼자 경주 여행. 황윤.☆☆☆☆우선 책이 작다. 저자가 직접찍은 사진은 현장감을 더해준다. 아주 술술 읽힌다. ^^하루 코스의 경주여행. 하지만 아쉬움에 하루 더 연장해서 1박 2일 여행. 버스를 타고가서 대중교통과 택시를 이용한 여행을 담은 책. 저자는 이미 수십번을 그렇게 여행을 다녔고, 문화유적에 담긴 이야기를 연구했다. 그래서, 이 책은 1박 2일의 경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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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이 고고학. 나 혼자 경주 여행. 황윤.

☆☆☆☆

우선 책이 작다. 저자가 직접찍은 사진은 현장감을 더해준다. 아주 술술 읽힌다. ^^

하루 코스의 경주여행. 하지만 아쉬움에 하루 더 연장해서 1박 2일 여행. 버스를 타고가서 대중교통과 택시를 이용한 여행을 담은 책. 저자는 이미 수십번을 그렇게 여행을 다녔고, 문화유적에 담긴 이야기를 연구했다. 그래서, 이 책은 1박 2일의 경주 여행이지만 많은 역사와 유적에 얽힌 이야기들이 담겨있다.

고등학교? 중학교? 수학여행으로 가보고 경주를 가본 적이 없다. 다녀온 사람들의 이야기는 많이 들었는데, 기회가 없었다. 부러운 이야기다. 주말에 일찍 일어나 버스를 타고 경주에 가서 유적지를 돌아보고 다시 버스를 타고 온다는 것. 생각만으로도 설렌다.

수학 여행 전 날이었다. 학생주임 선생님의 호출로 모든 학생이 운동장에 모였다. 여행 출발 전 주의사항을 강조하고 싶으셨던거다. 다른 학교 학생들과 싸우지마라, 술, 담배는 절대 금지다. 많은 인원이 이동하는 거라서 시간 잘 지켜야 한다는 거였다. 그리고, 마지막.
"음식이 맛이 없을거다. 생각한 것보다 휠씬 맛이 없을거다. 그렇다고, 식판을 던지거나 음식을 버리진 말아라."
진짜 그랬다. 단체급식이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손이 가는 반찬이 없었다.
책에도 나오지만 맛집 이야기는 거의 없다. 돼지국밥집 하나 빼고..

. 인도의 석굴 사원을 석굴암으로, 중국의 목탑을 다보탑으로, 신라의 불법 완성은 3층 석탑으로 해석할수 있겠다.
즉 인도 -> 중국 -> 신라로 이어지는 불법 이동을 김대성은 사찰 건설을 통해 완벽하게 표현한 것이다. 이렇듯 황룡사 등 거대 사찰을 만들던 때와 비교하여 비록 사찰의 규모는 작아졌으나 오히려 사찰이 지닌 세계관 확장에 있어서는 그동안의 사찰에서 보여주지 못하던 세계사적 관점을 등장시키고 있다. 이는 곧 신라인들이 가지고 있던 당대 세계 지도이자 인도, 중국을 거쳐 신라에서 화려하게 꽃을 피운 불교 역사의 최종 집대성이었다.

. 삼국 통일 때의 강인한 무력과 힘이 과거 이야기로 밀려나고 귀족 문화를 기반으로 하는 미감이 경주에서 인기를 얻게 된 결과가 바로 세련된 형태의 석가탑과 다보탑인 것이다. 이처럼 신라는 자신의 세계관을 세련되게 건축물로 표현할 정도로 최고의 문화적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이는 삼국 통일 더 나아가 강대국이었던 중국의 당나라까지 이겨낸 자부심이 만들어낸 독자적 세계관의 자신감 있는 표출이기도 했다.

. 결국 백제는 한강을 고구려에게 뺏긴 후 언제나 고토 회복에만 집중했고, 고구려 역시 위대한 전성기가 사라진 후 그 시대를 복원하는 데 집중하였다. 그러나 신라는 동일 시점에 두 국가와 달리 과거 화려했던 시기가 없었기에 오히려 당당하게 미래만 보며 움직일 수 있었던것이다. 물론 신라도 삼한일통이라는 업적을 세운 후에는 그 전성기를 누리면서 서서히 몰락하지만말이지.
이처럼 국가든 사람이든 가장 중요한 것은 '때'인 것 같다. 잘나가는 시기 최대한 업적을 만들어내고 활동 영역을 키워두어야 언제든 힘이 빠지는 시기가 닥쳐도 유지할 수 있는 힘이 생긴다. 신라는 그 좋은 '때' 에 최선을 다해 최대한의 업적을 만들었고, 그 결과는 백제, 고구려도 하지 못한 한반도 통합 세력의 등장으로 마무리된다. 승리한 역사로 남게 된 것이다.
YES마니아 : 골드 e***n 2021.08.24. 신고 공감 0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