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톨스토이의 생애부터 이해해본다. 55세에 집필한 이 번역서는 영미 번역판이 아니라, 1992년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출판된 <레프 톨스토이 선집> 제23권 중 <나의 신앙은 어디에 있는가>에 해당하는 부분을 번역한 것이라고 번역가는 밝히고 있다. 자신을 구원한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자신이 의문을 가지고 직접 확인하면서 진실된 그리스도의 깊은 마음을 이해하면서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함께 하기를 희망하면서 적어간 책이기도 하다. 출판이 금지가 된 이유들도 <부록 2>에서 이해하게 된다. 그 시대적인 상황과 정치적 상황, 종교적 상황들을 고려해보지 않을 수가 없다. 신앙인이 아닌 상황으로 오랜 세월을 살아오면서 그가 직접 경험한 것들은 그가 신앙인으로 믿음을 고백하면서 변화되는 삶들이 책에서도 많이 열거된다. 좋아했던 것, 악했던 것, 높았던 것, 낮았던 것들을 독자로써 함께 떠올려보지 않을 수가 없다. 믿음을 가지기 전의 삶과 믿음을 고백하면서 다르게 보이기 시작하는 세상의 이치와 삶의 의미들을 다시금 하나둘씩 떠올려보는 값진 시간이 되었던 책이다.
세련되고 우아한 삶보다는 근면하고 검소하고, 소박한, 절제하는 삶을 톨스토이의 시선에 들어오게 된다. 그리고 그는 변화되고 실행하면서 살아가는 고백과도 같은 책이기도 하다. 군대에서 장교로 전쟁에 참전하였던 저자는 전쟁의 참혹함들이 자리 잡고 있었음을 충분히 짐작하게 한다.
십자가를 지는 게 아니라 군장과 소총을 짊어져라. 그리고 각종 고통과 확실히 죽음이 기다리는 전쟁터로 가자. 나를 따르라. 241쪽 세상의 가르침 때문에 삼천만의 사람들이 전쟁터에서 죽어간다. 245쪽 병사들, 보안관들, 헌병들의 장전된 권총 64쪽
폭력에 대해서도 책은 언급하고 있다. 전쟁이라는 폭력과 혁명이라는 폭력도 책은 놓치지 않고 짚어낸다. 폭력이 가진 살인과 고문, 사형 등에 대해서도 냉철하게 비판한다. 교회가 온전히 감당해야 할 몫을 교회가 하지 않았음을 그 시대적 상황에서 고려하면서 읽어가게 된다. 그리고 유럽의 모습을 비판하는 글도 마주하게 된다. 불편한 심기가 느껴지는 내용도 여러 번 마주하게 되는데 이 책이 처음으로 출간된 나라는 프랑스 파리이다. 두 번째 출판도 역시 그곳이다. 그리고 독일어와 영어 번역이 이어서 나왔다고 책은 전한다. 당시의 유럽의 모습과 러시아의 상황들을 떠올려보면서 읽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가르침의 해석들이 현존하는 악을 정당화하고자 하는 목적에 기초해 그리스도의 가르침의 빛을 가리고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애매하고 불명확한 그런 해석들, 모순적인 것들까지도 짚어내면서 직접 확인하는 내용들도 많은 도움이 되었던 부분이기도 하다. 성경을 읽다 보면 애매하게 이해하는데 불편하게 기록된 내용들을 종종 마주하였던 기억이 다시금 떠오른다. 톨스토이의 명석함이 책으로 기록되어서 많은 사람들에게 선택받고 읽히면서 진실된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만나보면 좋지 않은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떠올려보지 않을 수가 없었던 시간이었다. 어리석음으로 가득한 인간들이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성전을 짓고 율법을 지키며 계명을 지키는데 악행은 멈추지 않고 있음을 이 땅에서도 온전히 경험하였음을 이 책의 내용들을 읽으면서도 느껴보게 된다. 제자들의 질문도 부족함이 넘친다. 그리스도가 진정으로 우리들에게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이 책을 통해서 간단명료하게 만나볼 수 있는 책이다. 톨스토이의 시선에서 교회의 해석과 그리스도의 해석은 상이하다. 그리스도가 가르치고 있는 것은 개인이라는 삶으로부터 구원을 받는 것과 이 땅에서 개인의 삶에 있어서 더 적은 고난과 더 많은 기쁨을 얻는 것이라고 톨스토이는 책에서 전한다. 말로만 머리로만 이해하는 믿음이 아니라, 실천하는 믿음의 사람이 되도록 독려하는 한 권의 책이다.
노동을 예찬하는 내용과 적과 악인, 도둑까지도 모두 인간이라고 말하면서 그들도 구원을 그리스도의 가르침 속에서 찾기를 바란다고 전한다. 읽으면서 유토피아의 책 내용에 등장하는 도둑에 대한 글 내용이 떠오르기도 했고, 드라마 <악의 꽃>이라는 등장인물과 사건들도 연관 지으면서 떠올려보지 않을 수가 없었던 내용이었다.
<부록 1>에 실려있는 <1장에 덧붙이는 글>도 기억에 남는 내용 중의 하나가 된다. 모든 사유재산을 그리스도를 위해서 바치고 싶다고 했을 때 목사가 하였던 말의 의중이 매우 인상적으로 기억에 남는 내용이기도 하다. 계속 사치스럽게 살고, 십일조만 내고, 신비로운 은총을 계속 이용해 먹기만 한다면 그만이라는 것. 324쪽 그래서일까, 322쪽에서 톨스토이는 '교회는 벌써 오래전에 죽었다'고 단정한다. 러시아에서 출판금지된 이유가 너무나도 분명한 내용들이 직설적으로 기록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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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래에는 톨스토이와 프란츠 카프카 작품을 동시에 독서하고 있다. 두 작가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아우라의 결은 다르지만 두 작가 모두 대문호라는 수식어를 앞에 붙여도 손색이 없다. 톨스토이 사상 전집 두 번째는 <나의 신앙은 어디에 있는가>작품이다. 삶과 죽음에 대한 고뇌로 방황을 하던 톨스토이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나서 자신의 삶의 방향과 내재되어 있던 욕망들이 사라지며 선과 악의 자리가 바뀌었다고 고백한다. 이 작품에서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논의하는 장이 아니라 자신이 어떻게 단순 명료하고 의심할 바 없이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이해하게 되었는지. 또 가르침을 받아들인 후 자신의 인생에 일어난 변화에 대해 서술하고 있다. 톨스토이는 스스로 복음서를 찾아 읽게 된다. 사랑과 화평에 대한 설교와 낮아짐 자기희생, 악을 선으로 갚으라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매료된다. 교회에서는 희생과 사랑에 대해 가르친 그리스도의 영광을 찬양하면서도 가르침과 양립할 수 있는 일을 인정했는데 이 부분이 그를 교회로부터 멀어지게 만들었다. 톨스토이에게는 기독교 진리를 근본으로 하는 삶이 귀중하고 필요로 했다. 매일같이 복음서를 읽고 또 읽던 어느 날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대한 생각이 일변하기 시작한다. 말로는 신앙을 고백했지만 행동에 있어서는 그를 부정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거기에서부터 자신의 오해가 기인되었다는 것을 발견한다. 이후 그는 1880년부터 하나님의 영원한 법을 찾아내는 일을 시작한다. 그는 원서를 읽기 시작하면서 번역과 문법적으로 어긋나는 문장 해석상에 실수가 있을 것으로 보이는 문장들을 찾는다. 이러한 문장들을 앞에다 두고 다른 사람의 해석에 따르지 않고 스스로 사유하기 시작하는데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단순하고 명료하며 값지고 명쾌하다는 결론을 도출해낸다. 삶의 구원에 관한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세상의 모든 현인들이 한 말을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톨스토이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두 가지 측면으로 나눈다. 하나는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사람들의 삶에 대한 가르침이고. 또 다른 하나는 인간은 그렇게 살아야 하는가. 그렇게 살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가 하는 형이상적 가르침이다. 톨스토이는 자신의 구원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실행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믿으며 바로 여기에 자신의 신앙이 있다고 말한다. 안나 카레니나 이후 톨스토이는 발표하는 작품마다 기독교적 세계관과 인간관을 주요 테마로써 녹여내었다. 이 작품은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대해 자신이 생각하는 해석을 자세히 설명함으로써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관하여 대중들이 좀 더 쉽게 왜곡되지 않게 접근할 수 있도록 돕는다. 종교와 무관하게 읽을 수 있는 작품이다. 나는 불교신자임에도 불구하고 거부감이 들지 않았고 오히려 조목조목 상세히 알려주고 있어서 쉽게 작품을 소화해 낼 수 있었다. 그리스도를 믿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하나의 복음서로 자리매김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인간에게 있어 종교의 역할은 무엇인지. 인간이 신앙을 가지게 될 때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되는지 생각해 볼 수 있는 시간의 장을 선물해 준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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톨스토이 (Lev Nikolayevich Tolstoy,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작품은 알지만 그에 대해 아는 것은 별로 없었습니다. 더 나은 사회를 위해 끊임없이 노력한 거인의 삶 서거110주년을 맞아 원전의 뜻을 정확하게 살린 번역과 현대적 디자인으로 만나는 톨스토이 사상선집
리처드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 에서는 “신의 존재를 의심하고 인간의 능력을 주목하라. 신이라는 이름 뒤에 가려진 인간의 본성과 가치를 탐색하라”고 해서 전세계 종교계에 파란을 일으킨 유명한 작품이 있었습니다. 사람은 유약하기에 어디 한 곳 기댈 곳을 마련하기 위해 종교를 갖고 신앙을 믿는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톨스토이는 평생 무신론자로 살다가 오십이 넘어 기독교를 믿게 되었지만 예수의 가르침을 실천하지 않고 왜곡하는 교회와 국가 그리고 지배층들을 강하게 비판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이해하고 어떻게 그것이 내 영혼을 변화시키는지를 항상 신앙심에 물었고 악에 대한 무저항. 서로가 서로에게 악을 행하지 말면 악이 없을 것이라는 점에 주안점을 두고 역설했습니다.
어디에 나의 행복이 있으며, 그것을 믿기 때문에, 즉 그것에 나의 신앙이 있기 때문에 나에게서 나의 행복을 의심할 여지없이 때앗아가는 그러한 행동을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중략) 내가 믿은 것은, 이성적인 삶이 바로 나에게 주어진 나의 빛, 말이 아니라 선행으로 인간들 앞에 빛날---P316 나의 신앙은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있다. 중에서
지금의 교회는 어떤가요? 코로나를 통해 일부(지극히 라는 점을 밝힙니다.) 교회의 얼굴을 우리는 보았습니다. 자신들이 믿는 하느님을 앞세워 금지한 대면 예배를 하고 심지어 금지한 집회를 열면서 사회규범을 어기는게 진정한 신앙일까요? 총.칼로 겨누고 싸우는 것만이 전쟁이 아닙니다. 우리는 지금 눈에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와의 21세기 전쟁을 치루고 있습니다. 유사이래 어느 전쟁에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가져갔을까를 생각하면 톨스토이가 믿는 사상과 이 책에서 강조한 전쟁이라는 폭력도 교회와 우리 사회가 다시 생각하고 감당 해야 할 몫이라고 생각합니다. 톨스토이의 사상 오랜시간이 흘러도 변함없는 고전입니다. 리투서평단 도서로 출판사에서 지원해주신 도서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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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신앙은 어디에 있는가 레프 톨스토이 (지음) | 홍창배 (옮김) | 바다출판사 (펴냄) 사람은 틀림없이 죽음에 이르는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죽음이 자신은 피해가기라도 하듯이 잊고 살거나 혹은 애써 무시하며 불멸할 듯이 살아가고 있다. 책을 관통하듯 반복되는 악은 계속해서 거론되며 악을 악으로 갚지 말 것을 강조하고 또 강조하며 거듭한다. 믿음을 목놓아 부르는 이들 중에는 그 믿음을 위해 기도를 해왔고, 하고 있지만 행함이 없는 믿음도 있다. 열가지 앎과 다짐보다 한 번의 행동이 더 중요하다. 나아간다고 백번을 생각한들 한 걸음 내딛는 행함이 없다면 결국 한 발자국도 나아갈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악은 선으로 갚으라고 얘기한다. 그러나 개인의 삶과 공공의 일원으로서의 삶 사이에서 선택을 해야할 때 무저항의 계율을 거부해야 하는 순간이 적지 않다. 신의 법칙과 인간의 법칙 사이에서 고민하는 양심적 병역 기피도 아직까지 해결되지 못한 난제이다. 타인의 죄에 대해 비판하지도 정죄하지도 말라고 하지만 각종 범죄가 난무하는 현대에 사회 지도층에서 이런 마음가짐이라면 악으로부터 보호받아야 할 국민들은 어디에 기대고 호소해야 할까? 톨스토이가 말하는 율법과 신앙에 대해 그와 같은 믿음을 나는 보일 수가 없다. 톨스토이 자신도 신앙을 받아들이기 전까지는 지금 내가 가진 생각의 대부분을 했다고 고백하고 있으니, 아직 나의 덕이 부족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재판을 통한 사형도 살인일 뿐이고 남을 판단하는 재판도 판단 자체가 죄가 된다면 신앙 안에 정의는 없는 걸까? 악을 선으로 갚으라는 이론적인 가르침 앞에 변화하지 않는 악에 끝없이 감정의 쓰레기통이나 노예로 이용되어지는 정신적 피폐함은 어찌할 것인가? 폭력을 악으로 규정하고 있지만 믿고 있는 '신앙'에 대한 교리를 제멋대로 해석하며 신의 이름으로 행하는 거짓들도 또한 악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사소한 단어 하나의 번역 오류와 누락은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해석의 다름을 유도했다. 같은 신앙서를 읽으면서 각기 다른 해석과 받아들이는 이유를 톨스토이는 이것을 이유로 보고 있다. 그래서 사소한 단어 하나, 문구 하나에 집중을 했나 보다.
구약에서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고 한다. 이것은 악을 악으로 갚는 복수가 아닌 악을 참을 것은 주의시키는 것이라고 한다. 이를테면 헙박인건가? 애초에 갚을 악이 존재하지 않게 하겠다는 것이다. 그 어떤 불의도 없고 죄도 없는 사람들을 보호하는 율법이다. 그러나 이것은 그리스도의 무저항의 계명과 반대되는 율법이다. 모세나 그리스도의 율법,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는 대신에, 둘 다 신성한 진리라고 인정하다가 문제가 발생하면 실생활에서는 그리스도의 율법을 거부하고 모세의 율법만을 인정하는 오류를 가진다. 신을 믿으며 신앙안에서 톨스토이가 진정 행복하였다면 그것으로 되었다. 나는 그가 믿는 종교를 그리고 신을 믿지 않지만 나 역시도 행복하니 그것으로 되었다. 믿음안에서의 사랑은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것이 아니라 내려가 낮추어 함께 보는 것이라고 한다. 귀족지주 출신으로 청년 장교까지 거친 톨스토이가 비슷한 신분의 사람들보다 농노폐지를 외치며 농민들과 더 잘 어울렸다는 사실은 그가 그의 말대로 행함을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겠지만 간음과 육체의 유혹에 금욕을 강조했던 것과는 달리 성욕과 도박으로 말년까지 쾌락주의자의 삶을 살며 아내와의 불화를 가졌던 걸 보면 부족함없는 그의 출신이 오히려 한계가 아니었을까 싶다. ※위 도서를 소개하면서 바다출판사로부터 무료로 도서를 받았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