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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 -인간'은 군중에 파묻혀 그 행진이 어디를 향하는지는 신경 쓰지 않는다. ... 자아와 자아의 부담에서 풀려나게 해주는 집단적 도취 그 자체다." - 본문 59쪽에서 대중민주주의에 대한 신랄하고 명쾌하며 설득력있는 비판을 하고 있는 이 경고의 책은 도덕질서가 존재하는 인문주의 문명으로서 세계 정신의 회귀를 요청하고 있지만, 마치 지금 한국 사회에 펼쳐지고 있는 지식부족의 편협성, 혐오와 증오를 끊임없이 생산하여 원한에 흠뻑 젖어 공격성과 분노를 자극해 민주주의의 근간을 흔들어대는 '정치적 기회주의'의 실체를 알려주기 위해 써진 책 같은 인상을 갖게된다. 책은 파시즘이 '대중민주주의' 모습을 하고 다시금 오늘의 사회를 배회하고 있음을 주장하는 「서문」과, 이 어리석은 자기 파괴적 현상이 성장하는 원인과 사회적 환경, 그 양상들을 분석, 문제적 제시를 하고 있는「파시즘의 영원회귀」라는 장(Part), 그리고 정신의 부재, 도덕성의 상실로 대변되는 현재의 대세를 거스르고 문화적-도덕적 양심을 함양하는 진리와 정의의 세계가 가능한지를 찾는 「에우로페의 귀환」이라는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사실 파시즘의 개념적 정의를 논하기도 전에 흉악한 이미지로 그 속성을 건너뛰기가 십상이고, 지금이 어떤 시절인데 케케묶은 타령이냐고 공박한다. "우리는 민주주의 사회에 살고 있다고, ...불쾌감을 조장하는 일 좀 그만 두시오! " 아마 저자 '롭 리멘'은 이러한 히스테릭한 반응을 무수히 겪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파시즘은 바로 이 민주주의, 자유의 얼굴을 하고 스며들기에 자기 비판을 모르는 현대인에게는 그 민낯이 인식되지 못한다. "현대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 중 하나가 '피상성(superficiality)'"이라는 진단은 이 모든 의미들을 대변한다고 해도 될 것 같다. 겉핥기적 지식, 지적 게으름을 함유하는 이 단어가 어쩌면 오늘의 진짜 문제를 깨닫지 못하는편협한 정신, 그 무지에 기초하는 대중민주주의라는 나락으로의 추락을 총합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Ⅰ. 파시즘의 영원회귀 "파시스트 균이 대중민주주의의 신체에 언제나 악성으로 남아 있으리라는 것을 잊고자 (...) 망각을 너무도 열망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 본문 25쪽에서 알베르 카뮈의 소설 『페스트』⑴의 서술자인 의사 '리외'가 전염병이 물러나 안정을 찾은 오랑시민들의 망각을 바라보며 하는 깨달음의 말을 패러디 한 이 문장은 "우리 모두의 내면에 파시즘이 은연히 숨어 있음"에 대한 자기 성찰의 요구라 할 수 있다. 그저 자신의 편의와 풍족 이외에는 어떠한 정신적 가치에 대한 책임감도 없을 뿐아니라 지적 편협에 안주하는 무지의 '군중인간(대중-인간; mass-man)'은 언제든 바로 나이거나 내 이웃이 될 수 있다는 의미이다. 그런데 바로 이러한 양상이 지금 한국사회를 점령하고 있다. 표현의 자유, 결사의 자유라는 이름으로 자유를 파괴하는 '대중-인간'들, 이들을 배후 삼아 자신의 질투심을 비롯한 자기 이익 충족을 위해 비방과 증오를 끊임없이 생산하는 반문명적, 반지성적 인간들이 활개를 친다. 자신의 편협성에 기초한, 즉 "자기 본능과 욕구에 충실한 자유란 언제나 난폭하다." 그래서 이들의 말이란 것에는 조롱과 폄훼와 모욕의 단어들로 가득 차있다. 이러한 선정적 언어에 열광하는 대중-인간의 취향은 황색 언론들, 각종 온라인 미디어 매체들의 포털을 장식하며 문화적 저열성을 심화시킨다. 이것이 지금 우리네 사회의 실상이다. 민주주의 정신이 실종된 대중민주주의, 파시즘의 이름을 대신한 포퓰리즘이 득세하는 사회로 젖어들어가고 있다. 대중-인간을 선동하는 혐오의 욕설과 비방에는 "아무런 정책 대안도 없으며, 고유한 사상도 없고, 사회 문제의 해결 의지도 부재하며, 다만 부정의를 영속적으로 생산하는" 악랄함, 자기 편익만 있다. 이러한 대중과 대중사회에 내재한 지적 빈곤과 도덕적 미숙이 파시즘이 뿌리내리는 비옥한 토양이 된다. "민주주의가 대중민주주의로 타락함에 따라, 선동, 어리석음, 프로파간다, 실없는 헛소리, 천박함이 뒤따른다. 그리고 인간 본능의 가장 저급한 부분이 점점 지배력을 얻어 결국 민주주의의 사생아인 파시즘을 낳게 된다." - 본문 133쪽에서 이를테면 정부의 정책이나 정치적 행위가 발표될 때 한국사회의 반응은 정확히 위 문장을 따른다. 즉각적으로 자기 영역의 아주 작은 한쪽만을 잘 알고 있는 전문가라 자처하는 인물이 당해 정책행위를 조롱과 혐오의 언어로 폄훼, 비하하는 단문 메시지를 SNS에 올리고, 황색언론이 이를 퍼나르며 사회 갈등을 조성, 확대해 나가고, 사회라는 무대의 구석에 틀어박힌 범용한 정신의 대중이 뇌동(雷同)한다. 이것이 여론이라는 대세가 되어 사회를 지배하는 형국이다. 고작 자신의 전문 영역 밖에 모르는 자들 - 기생충학, 미학, 성형의학 등등 - 이 자신이 모르는 분야의 무식한 자로 처신하지 않고 경제, 행정, 건설, 교통 등 망라한 분야에 유식한 행세를 하며 거드름을 피운다. 『대중의 반란』을 쓴 '오르테가 이 가세트'는 일찌기 이를 "역사상 유례없는 기묘한 인간 유형"⑵이라 비판하며, "자신의 전문 이외의 분야까지 지배하고 싶어하는 내적 감정"에 터잡은 "터무니없는 욕망"이 문화적 위기, 대중 사회의 위기를 초래한다고 지적하였다. 결국 대중-인간의 공격성과 분노를 자극하는 선동으로 기회와 이익 확장의 동기에 몰입하고 있는 인간들, 이러한 반동적 형태의 정치 세력이 성장하는 비옥한 환경으로 퇴행한다. 이것이 지금 한국 사회의 모습이다. 파시즘은 원한에 대한 추종과 이러한 우매한 평범성의 군집인 대중-인간에 뿌리내린다. 오늘의 나는 어떤 인간인가?를 자문해 보아야 한다. 혹여 "금융 및 경제 정보지, 유명인과 아이돌 사진, 라이프 스타일, 뷰티,그리고 섹스의 장황하고 너절한 수다"와 같은 존재 전체를 쾌락의 표상아래 두고 살아가는 정신적 가치를 도외시한 키치사회에 매몰되어 있는 것은 아닌가? 내 "에고만이 만물의 척도이며, 나의 느낌과 생각만이 중요하고, 내 취향, 내 의견, 내가 존중받는 방식만이 중요하다"고 고집하는 지적 게으름, 편협함에 빠져 있는 것은 아닌가? 내 비판에는 민감하게 파르르 떨며 타인을 향한 증오와 비방에는 관대한 인간은 아닌가? 지금 한국사회는 파시즘의 문턱으로 성큼 들어서려 하고 있다. 수구주의자들, 포퓰리스트들이 활개치는 세상으로의 회귀를 대중-인간의 이 하찮음, 범용함이 카펫을 깔아주고 있는 형국 아닌가? 를. Ⅱ. 에우로페의 귀환 오늘의 유럽이라는 지명의 어원인 '넓은 시각을 지닌 여인' 의 뜻을 지닌 에우로페의 등장은 대중-인간, 다시 말해 정신 부재의 인간 군중이 야기하는 전체주의적 자기 파멸적 양상 속에서 어떻게 진리를 향한 열정, 정의의 이상, 스스로 자기 존재를 통제할 수 있는 힘인 '정신의 고귀함'으로 복귀할 수 있는 가에 대한 사유의 상징으로서이다. 저자 롭 리멘은 오늘날 그 자체로 이데올로기가 되고 사상이자 망상이 된 과학기술, 모든 것을 물질적 환원으로 이해하는 인식이 형이상학적 실재를 사라지게 하여 삶의 질적, 정신적 가치를 상실케 했다는 이해로 시작된다. "세계는 기술적 발전, 데이터 - 이런 것들은 급격하게 증가할 것이고 세계를 바꿔 놓을 것입니다. ... 그러나 급격하게 증가할 또 다른 것 ...어리석음입니다! 자기인식은 조금도 제공하지 않는..." - 본문 122쪽에서 삶의 가치가 과연 경제적, 과학적으로 증명될 수 있는가? 라는 물음에 우리는 선뜻 답변하는데 주저하게 된다. 오늘의 과학은 숫자의 신탁이 인간 존재를 설명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삶이 이처럼 숫자와 물질에 종속되었다고 이해하게되면 도덕성이 합리성에 무너지게 된다. 어쩌면 우리는 알지도 모르는 채 이 숫자의 세계에 너무 깊숙이 진입해 있는지도 모른다. 결국 도덕의 언어, 삶의 가치를 제공하는 언어를 잃는 것이 수순이 되어버리면 우린 진정한 대화를 할 줄 모르게 된다. 그러니 "남는 건 수다뿐"이라는 자조어린 말이 진실일지도 모르겠다. 정치전문가로 둔갑한 기생충 전문가, 서구 미학이론을 읊어대던 정치낭인 등등의 기묘한 인간 유형들의 수다가 공허하고 거짓된 불통의 언어 향연인 이유이다. 그래서 선언한다. "도덕적 질서가 존재하는 인문주의 문명에서 살겠다"고. 과학기술의 찬란한 인간-기계에 열광하는 대중-인간의 무식한 환영이 유감스러운 이유이기도 하다. 미디어비평가 '닐 포스트먼'이 『Amusing ourselves To Death』에서 '헉슬리의 경고'를 인용한 문장은 여기에 맞춤일 것 같다. 알아차리기도 저항하기도 쉽지 않은 기술문명(유튜브,인스타그램,인터넷 포털,로봇,인공지능 등등)에 정신적 황폐화로 인한 문화의 사멸, 자유와 민주주의가 실종된 암울한 전체주의의 디스토피아 세계로 이행하고 있는 대중-인간의 몽매함에 대해서. "대중이 하찮은 일에 정신이 팔릴 때, 끊임없는 오락활동을 삶으로 착각할 때, 진지한 공적 대화가 허튼 소리로 전락할 때 ... 국가는 위기를 맞는다." - 『죽도록 즐기기: Amusing ourselves To Death』, 굿인포메이션 2009, 233쪽에서 진지한 공공담론이 킬킬대는 농담과 고작 분노를 자극하는 선동질에 함몰되는 이 즐거움의 세계에 저항하라는 것은 공허한 소리로 밖에 들리지 않을 것이다. 민주주의란 "인간 존재를 고양시키려하는, 인간이 사유하고 자유로울 수 있게 하려고 노력하는 정부의 형태"이다. 이 고양과 자유가 실종된 지금의 사회는 이미 민주주의가 훼손되고 있다는 의미일 수 있다. 무엇이 되었든 대중-인간을 매혹하는 것이 대중을 휘두르게되면 그것이 곧 대중민주주의이고 파시즘이 기지개를 켜는 문턱이다. 인간은 의미를 찾는 존재이고, 도덕적 존재이다. 합리성과 효용성이 제공하는 쾌락은 인간에게 아무런 의미도 제공하지 못한다. 자신을 넘어서고, 더 나은 자신이 되고, 자신을 바꾸고, 진리와 정의가 머물 곳을 이 세상에 내어 줄 수 있는 능력, 영혼을 돌볼 줄 알아야 한다. 우리들은 언젠가부터 진짜배기 문화로부터 멀어지고 있는지 모른다. 자기 만족에 의해 외부의 권위로부터 자기를 폐쇄하고, 귀를 닫으며 자신의 의견에는 의심을 품지 않으며 타인은 고려하지 않는 인간들이 되었는지 모른다. "어리석은 자는 사악한 자 보다 더 나쁘다" - 아나톨 프랑스(Anatole France) 인간은 두 종류로 나뉜다고 한다. 하나는 자신에게 많은 것을 요구하고 자신 위에 곤란과 의무를 지우는 사람이고 다른 하나는 자신에게 어떠한 특별한 요구도 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한다. 후자가 바로 대중-인간이다. 이러한 대중-인간들만이 날뛰는 사회, 방종을 자유라 부르며 공적논의에 당연히 필요한 일련의 규제를 무용화시키려 한다. 기댈 수 있는 규제가 없는 곳에 문화는 존재할 수 없을 뿐아니라, 상대의 입장을 존중하지 않는 곳에 문화는 존재하지 않는다. 책임없는 수다에 분노를 실어 황색언론의 앞잡이로 나선 응석받이들을 비롯하여 나와 우리 대중-인간들 모두 정신적 가치에 대해 책임을 느껴야 한다. 포퓰리스트들이 설치는 세계, 기술의 쾌락에 젖어 오그라든 뇌로 편협을 자랑하는 세계에 대한 이 통렬한 비판과 각성을 촉구하는 경고의 메시지는 지금 한국 사회의 모든 이들에게 날카로운 자극이 되어 줄 것 같다. 1930년, 오르테가 이 가세트가 '대중의 반란'이라며 어리석음이 이끄는 파멸의 사회, 그 세계를 예견한지 지금으로부터 대략 3세대(1세대를 30년으로 추정할 경우)가 지나 다시금 파시즘의 회귀를 근심스럽게 바라볼 수 있도록 하는 롭 리멘의 이 저작은 우리가 무엇을 해야하는 지, 또한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할지를 선명하고 명쾌하게 그 길을 가리키며 안내한다. 아마 이 책에서 양심의 발달이라는 작은 깨우침이라도 받게된다면 우리네는 이 대중-인간이 밀어붙이는 그 군중이 되지 않을 것이라는 소박한 기대를 가져본다. 적은 분량의 책이지만 어느 단어 하나 건너 뛸 수 없이 촘촘히 박힌 지성의 언어로 모든 문장에 밑줄을 그어야 할 정도의 고농도 사회비평 걸작이다. 注 ⑴ 알베르 카뮈의 소설 『페스트』마지막 페이지의 문장: "페스트 균은 결코 죽거나 사라지지 않고 ... 참을성 있게 기다리다가 사람들에게 불행과 교훈을 주기위해..."를 변용한 문장이다. 이를 파시즘과 연결한 해석이 새롭다. 注 ⑵ 오르테가 이 가세트의 문화비평서 『대중의 반란』 1부 12장 '전문화의 야만성' 비판 문장중 일부 변형 발췌한 것임. YES24 리뷰어클럽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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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시즘'? 2차 대전에 대한 책에서나 보았던, 어쩌면 낡아 빠진 단어이지 않나 하는 생각이었다. 이 시대에 무슨 파시즘인가. 그러나 이런 나의 의구심을 저자는 예상이라도 한 듯 서문에서부터 깨고 있다.
파시즘, 파시스트라는 이 낡은 단어는 유령처럼 우리 주변을 맴돌고 있지만, 쉬이 드러나지 않는다. 그들은 또 교묘히 이 단어를 숨기거나 부인한다. 왜 그럴까.
● 포퓰리즘, 포퓰리스트라는 그럴듯한 용어와 함께 과학과 기술, 본능과 욕구, 수량의 가치만 중요하게 된 현대 대중민주주의라는 것이 그 첫째 이유다. ● 두 번째 이유는 원한, 증오, 권력욕, 공포라는 인간 최악의 비합리적 정서를 정치적으로 양성한다는 것이다. 위기감, 경제적 불안정은 그리고 테러나 전쟁의 위협 등이 공포 분위기를 조성한다. ● 우리는 당연히 시대에 파시즘의 회귀를 저지하고, 맞서 싸우고, 제거 해야 함을 잘 안다. 하지만 우리는 그들이 조성하는 공포의 진짜 이유를 알지 못한다. 바로 우리의 무지 때문이다. 우리의 무지는 그들의 '파시즘'을 더 가까이 부르고 또 그들의 자기변명을 듣게 만든다. 이것이 세 번째 이유다. 무서운 것은 기술적 진보와 정보의 접근성 그리고 모든이에게 제공되는 고등교육이 그들의 조직된 무지와 어리석음이며, 이를 또한 우리가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다는 데 있다.
작고 얇은 책이다. 하지만 그 어느 책보다 진중하고 무게가 있다. 책의 무게는, 아니 책의 힘은 제목에서 보듯 '이 시대에 맞서 싸우기 위해' 그 무기를 제시함일 것이다. 바로 '인문'이다. 생명, 문화, 자유, 도덕, 존엄. 나, 너, 우리, 사랑. 사소한 덕이 아닌 위대한 덕, 약삭빠름보다 솔직함과 진실한 사랑. 이웃 사랑과 절제. 성공보다는 무언가 되려고 하고, 알고 싶어 하는 욕망이다. 나아가 인문의 인식에 머무르는 절뚝발이 앎이 되기보다 현실을 비판할 줄 아는 비판의식을 지녀야 하겠다. 이것이 나와 더불어 같이 사는 인간 사회를 바람일 것이다. 더불어 같이 사는 이상사회. 꿈이 아니다. 이상은 마땅히 그래야 한다. 마땅히 그래야 하는, 어디에도 없는 유토피아는 현실 비판의 적극성에 그 처음이 있을 것이다. 현실 세계에 대한 맹목적 타협이 아닌 상상력에 의한 고귀한 정신세계와 현실비판이야 말로 우리가 살아 있음의 그 증거일 것이다. 오랜만에 제대로 된, 날카로운 채찍 같은 책 한 권 읽었다.
YES24 리뷰어클럽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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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리뷰가 그래도 한 주에 한 번은 올라가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참 좋은 책들이 많아져서 기분이 참 좋더군요. 솔직히 요새 영화를 거의 안 보다 보니, 아무래도 첵을 더 많이 읽게 되는 것도 사실이기는 합니다. 그래서 책 리뷰가 더 많아지는 것도 있구요. 그럼 리뷰 시작합니다.
전 세계가 코로나로 난장판이 되어가고 있는 가운데, 이제는 다른 이야기들은 오히려 들어가 버리는 경향을 보이고 있습니다. 코로나 시대이다 보니 아무래도 모두가 한 발 들어가야 한다는 이야기를 말로 하고 있어서 더 그런 것들이 있다는 생각이 들긴 합니다. 하지만, 이 와중에도 돌아갈 것들은 돌아가고, 진행 되는 것들은 진행 되기에 어느 정도는 시선을 두고 있어야 하는 상황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 문제로 인해서 직접적으로 다른 사람을 탄압하는 이야기가 여럿 들리기도 합니다. 이 문제로 미국에서는 블랙 라이브즈 매터 운동이 벌어졌었고, 심지어는 이 운동이 조금 잦아든다 싶을 때쯤 조지 플로이드 사망 사건이 벌어지면서 일이 더 커지기까지 했습니다. 이 문제가 반복 되면서 결국에는 아무리 지성인이 늘어난다고 하더라도, 자본에 의한 지식인들은 자신의 이익만 추구하며, 그 반대에 있는 사람들은 더 이상 신경 쓰지 않는다는 것을 여실히 드러내 버렸습니다. 이런 상황은 전 세계를 흔들어 버렸죠. 그렇다고 교육이 안 된 사람들은 무학의 통찰을 가지는가 하면, 그것도 아닙니다. 사실 이 문제에 관해서는 이미 IS가 창궐하면서 벌어진 수많은 난민 문제를 통해 이야기를 할 수 있습니다. 유럽을 뒤흔들어놨고, 이 문제로 인해서 유럽은 인종 충돌이 빈번한 상황이 되어버렸습니다. 게다가 이런 문제로 인해서 결국 유럽인들 마저도 여전히 자신들이 최고 라는 생각을 여전히 하고 있다는 것을 어느 정도 드러내고 말았습니다. 아이러니 하게도 코로나-19는 그 민낮을 드러내는 계기가 되기도 했습니다. 창궐 당시에 단순히 아시아인을 차단 하면 해결 될 거라는 짧은 생각만을 가졌고, 이를 통해서 아시아인을 차별하는 모습을 보여줬습니다. 하지만 그런 단순 차별이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지금이 유럽이 스스로 증명하는 꼴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결국 위대한 유럽인은 없고, 결국에는 모든 것은 그냥 과거의 빛 바랜 영광을 여전히 보여주고 있다는 착각을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세상이 어려우니, 차별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는 사람들이 계속해서 나오고 있습니다. 이건 국내도 마찬가지 이며, 이런 차별에 관한 이야기는 계속 내려오지만, 결국 아무것도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계속 보여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잘 팔리는 면모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책에서 다루는 이야기는 그런 차별을 이겨내야 한다는 일정한 강변입니다. 그리고 이 속에서 가장 문제가 된다고 본 것은 유용성 이라는 지점 이죠. 책에서 이야기 하는 바는 간단합니다. 인간이 유용성 이라는 단어를 이용해서 하는 여러 일들이 매우 잘못되어 있다는 것이죠. 차별을 함으로 해서 해결할 수 있다는 믿음 말입니다. 무엇을 혐오 하고, 그것을 그냥 몰아내는 것이 가장 간단하다는 것을 계속해서 강변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에 관하여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그리고 유럽인 작가 답게, 이를 파시즘으로 규정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혐오의 테마가 굉장히 오래 되고, 지금도 잘 먹히는 지점인 만큼, 이 책에서 혐오의 테마를 파시즘으로 규정하는 것은 매우 좋은 방법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혐오를 만들어내기 쉽다는 것을 초반에 이야기 한 다음, 그 속에서 그 혐오를 어떻게 이용하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하게 됩니다. 다만 이 모든 것에 대한 것은 매우 간단하게 다룬 다음, 그 모든 것들이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에 관하여 더 많은 이야기를 하고 있기도 합니다. 그 결과에 관해서는 이미 파시즘과 혐오에 관한 연구를 많이 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동시에 다루며, 이미 이야기가 되었으나,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는 것을 계속해서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덕분에 지금 당장 하는 이야기들에 관하여 우리가 지금 귀를 기울여야 하고, 지금 당장 해결을 해야 하는 문제임을 계속해서 설명 해주고 있습니다. 사실 매우 짧은 글이기 때문에 뭔가를 분석하기 보다는, 주장을 좀 더 강화하기 위한 글이라고 하는 것이 더 맞을 것 같습니다. 2부에 등장하는 가상의 이야기는 위의 이야기가 왜 필요한가에 대한 일종의 설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좀 더 인간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고 할 수 있죠. 기본적으로 다루는 이야기는 말 그대로 미이 망국이 되어버린 곳의 공주의 이야기를 다루며, 이 공주의 삶을 가상으로 만들어내고, 동시에 이 속에서 여러 이야기를 하면서 정말 우리가 더 내세워야 하는 것이 무엇인가에 관하여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내세우는 것은 결국에는 인간성이라는 것입니다. 기본적으로 책에서 강하게 이야기 하는 쪽은, 그리고 좀 더 쉬운 이야기를 하는 쪽은 물질주의와 과학적 엄밀성으로 포장해서 사람을 재단 해버리는 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일견 쉬운 주장을 보여주고 있기도 하죠. 하지만 딱 거기까지라는 것 역시 같이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같은 이야기를 반복하며, 생산성이라는 유혹에만 도취된 나머지, 그 생산성을 누려야 하는 인간을 잊어버리고 있다는 것을 이야기에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세상이 변하고 있지만, 그 속에 변하지 않아야 하는 것이 단 하나 있다고 한다면, 결국에는 인간에 관한, 그리고 온 세상에 대한 상호 존중일 겁니다. 인간이 잊어서는 안되는 것이 있다는 것이죠. 이 책은 바로 그 지점을 짚고 가는 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약간 어렵게 다가오기는 하지만, 천천히 하고 있는 이야기를 바라보고 있으면 인간의 지혜라는 것이 그래도 지금 벌어지는 것을 해결할 수 있다는 믿음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생각해 볼만한 면을 많이 가진 책이라고 할 수도 있겠네요. YES24 리뷰어클럽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