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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하루키는 쉬지 않고 쓴다. 아버지와 같이 바닷가에 고양이를 버리러 간 이야기 그의 글은 소설, 에세이, 어떤 형태이든 집중하게 만든다. 담담한데 마음을 흔든다. 세월을 벼려 단단해진 글이 마음을 뚫는다.
"아마도 우리는 모두, 각자 세대의 공기를 숨쉬며 그 고유한 중력을 짊어지고 살아갈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 틀의 경향안에서 성장해나갈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좋고 나쁘고를 떠나서 그것이 자연의 섭리다"
무언가를 이루지 못한, 되고 싶은 것이 되지 못한, 하고 싶었던 것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게으른 나에게 하루키의 말은 위로다. 못하고 안했던 이유가 오직 게으름뿐이지만 그가 말한 고유한 중력을 짊어지고 보고 들었던 모든 것의 영향 하에서 범위 내에서 범주 안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말이, 자연의 섭리라는 말이 나의 핑계에 맞춤하기 때문이다.
나에게 책은 위로다. 휴식이다. 살아가는 양식이다. 누구든 어떤 방식으로든 조그만 위로와 격려를 받으면서 살아가면 된다.
살아갈수록 사는 것이 아무것도 아닌 일이 되어버리는데 날마다 읽을 책이 있어 날마다 책을 읽어서 내가 나로 살게끔, 나를 뒤돌아보게끔, 나를 지탱하게 해주는 것 같다.
웬만한 신보다 낫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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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에게 자신의 관심사, 자신의 일상에 대해 이야기하는 경우는 많아도 다른 누군가에게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털어놓은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을 것이다. 많은 시간을 함께 하는 가족이기에 많은 부분을 공유하고 서로에 대해 많은 것들을 알 것이라고 착각한다. 그러나 나는 의외로 가족이기 때문에 더 말할 수 없는 부분이 있고 서로에 대해 정확히 모르는 것들이 더 많다고 생각한다.
작가 하루키는 그동안 부모님에 관한 이야기를 별로 언급하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런 하루키가 처음으로 털어 놓은 아버지에 관한 이야기. 그래서 이 책이 더 끌렸던 것 같다. 목에 가시처럼 걸려 있는 아버지의 삶이란 과연 어떤 삶이고 작가는 과연 어떤 심정으로 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털어 놓았을까.
<고양이를 버리다>는 작가 하루키가 아버지와 함께 기르던 고양이를 버리러 해변에 갔던 초등학교 시절의 기억을 시작으로 이야기가 펼쳐진다. 하루키는 아버지와 함께 고로엔 해변에 고양이를 내려놓고 자전거를 타고 집으로 돌아온다. 그런데 좀 전에 버렸던 그 고양이가 먼저 집으로 돌아와 아버지와 하루키를 반갑게 맞이하는 것이 아닌가. 결국 하루키의 가족은 그 고양이를 열심히 키우게 된다.
아버지에 관해 강하게 각인된 또 다른 기억은 아버지가 전쟁에서 죽은 동료와 중국인들을 위해 매일 아침 오래도록 눈을 감고 엄숙하게 경을 외웠다는 것이다. 하루키는 아버지 세대가 대중전쟁과 제2차 세계대전을 겪고 전쟁 후에는 기를 써 살아남아야 했던 불운했던 세대(p.19)이며 아버지는 더없이 불운했던 세대의 아주 미미한 일각을 짊어지게 된다(p.20)고 털어놓는다.
소년 시절 아버지는 다른 집에 양자로 보내졌다가 다시 본가로 돌아오게 되는데 하루키는 이것이 아버지에게 마음의 상처로 남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는 해변에 버렸던 고양이가 자신들보다 앞서 집으로 되돌아와 감탄하며 안도했던 모습을 떠올린다. 하루키는 아마도 고양이에게서 아버지의 모습을 보았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가족과 가까운 사람들에게 버려진 그 무거운 아픔까지도. 사람은 누구나 많든 적든 잊을 수 없는, 그리고 그 실태를 말로는 타인에게 잘 전할 수 없는 무거운 체험이 있고, 그걸 충분히 얘기하지 못한 채 살다가 죽어가는 것이리라. (p.34-35) 아버지는 징병 유예를 하지 않은 실수로 인해 학업 도중 군대에 가게 된다. 그런데 하루키는 아버지가 피비린내 나는 평판이 따라다녔던 난징 공략의 주요 부대였던 보병 제20연대 소속이었다고 착각하여 평생 무거운 마음의 짐을 갖게 된다. 아버지는 하루키에게 딱 한 번 포로로 잡힌 중국군 병사의 처형 이야기를 털어놓는데 그 기억은 아버지에게는 큰 응어리로, 어린 하루키에게는 큰 트라우마로 남게 된다. 사람의 마음은 그렇게 이어지는 것이고, 또 역사라는 것도 그렇다. 본질은 '계승'이라는 행위 또는 의식 속에 있다. 그 내용이 아무리 불쾌하고 외면하고 싶은 것이라 해도, 사람은 그것을 자신의 일부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된다. (p.51) 하루키는 아버지가 자신에게 만성적인 불만을 품었고 자신은 무의식적인 분노를 포함한 만성적인 고통을 느꼈다고 이야기한다. 이 감정은 하루키뿐만 아니라 많은 부모와 자녀들이 공통적으로 느끼는 감정이기도 하다. 특히 전쟁을 체험하고 생존을 삶의 목표로 살아왔던 부모 세대라면 이 편한 시대에 태어나 세상에 뭐가 그리 불만이 많은지 못마땅할 것이다. 그래서 부모는 자식이 자신의 뜻에 따라 더 나은 삶을 살아주기를 바란다. 반면 자식은 부모의 구속과 정형화된 틀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날개를 펴며 오롯이 자신의 삶을 살고 싶어한다. 그래서 그들은 불합리와 암묵적인 강요를 거부한다. 이 간극에서 오는 해묵은 감정의 골 그것이 서로에 대한 튼튼한 벽을 쌓게 만든다.
아마도 우리는 모두, 각자 세대의 공기를 숨 쉬며 그 고유한 중력을 짊어지고 살아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 틀의 경향 안에서 성장해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좋고 나쁘고를 떠나 그것이 자연의 섭리다. (p.62) 하루키는 아버지와 오랜 세월 동안 절연했다고 한다. 그는 복잡하고 거추장스러운 혈연의 굴레에서 벗어나 자신이 하고 싶은 일에 힘과 의식을 집중하고 싶었다고 고백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 곳곳에서 아버지에 대한 그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그는 아버지가 겪었을 정신의 거대한 혼란과 동요, 그리고 혼의 치열한 갈등이 있었을 것(p.46)이라고 이야기한다. 또 그는 혼자만 목숨을 건지고 과거의 동료 병사들이 그렇게나 먼 남방의 전쟁터에서 허망하게 목숨을 잃어간 것은 아버지 마음에 큰 상처가 되고 무거운 짐이 되었을 것(p.74)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결국 하루키는 아버지가 젊은 시절 술을 마시고 나면 난폭하게 굴었던 이유도, 매일 아침 경을 그토록 열심히 외웠던 이유도 하이쿠에 온 마음을 쏟았던 이유도 이해하게 된 것이 아닐까. 사고방식과 세계를 보는 시각은 달라도, 우리 사이를 잇는 연緣 같은 것이 내 안에서 하나의 힘으로 작용했던 것은 분명하다. (p.87)
책의 끝 부분에 하루키는 또 다른 고양이와의 추억에 대해 이야기한다. 하루는 자신이 키우던 조그맣고 하얀 새끼 고양이가 소나무 위에 올라가 모습을 감춘다. 소나무 밑에 서서 아무리 올려다보아도 고양이는 보이지 않고 가녀린 울음소리만 들려온다. 결국 하루키는 고양이를 구하지 못한 채 어느새 날이 저물고 만다. 우리는 광활한 대지를 향해 내리는 방대한 빗방울의, 이름 없는 한 방울에 지나지 않는다. 고유하기는 하지만, 교환 가능한 한 방울이다. 그러나 그 한 방울의 빗물에는 한 방울의 빗물 나름의 생각이 있다. 빗물 한 방울의 역사가 있고, 그걸 계승해간다는 한 방울로서의 책무가 있다. 우리는 그걸 잊어서는 안 되리라. 가령 그 한 방울이 어딘가에 흔적도 없이 빨려 들어가, 개체로서의 윤곽을 잃고 집합적인 무언가로 환치되어 사라져간다 해도. 아니, 오히려 이렇게 말해야 할 것이다. 집합적인 무언가로 환치되어가기 때문에 더욱이. (p.93) 하루키는 책에서 자신의 개인적인 이야기를 통해 자신이 한 평범한 인간의 아들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것이 하나의 우연한 사실에 지나지 않는다고도 말한다. 단지 우리는 어쩌다 우연으로 생겨난 하나의 사실을 유일무이한 사실로 간주하며 살아있을 뿐(p.93)이라고. 하루키는 지금도 여전히 높은 소나무에서 사라진 그 새끼 고양이를 생각한다고 한다. 그리고 죽음과 지상을 향해 수직으로 내려가는 것에 대해서도. 소소한 일 하나하나의 무한한 집적이, 나라는 인간을 이런 형태로 만들어 놓은 것이다. (p.87)
그가 이 책을 통해 목에 걸린 가시와도 같은 자신의 개인사를 털어놓은 이유는 역사가 과거의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다음 세대로 옮겨가야 할 온기 있는 피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인 것 같다. 그것이 아무리 작고 외면하고 싶은 것일지라도 우리가 사는 거대한 세상을 구성하는 한 조각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마치 내가 했던 경험 하나하나가 쌓여 나의 의식과 정체성을 형성하여 ‘나’라는 인간을 만들어 놓은 것처럼 말이다. 역사는 과거의 것이 아니다. 역사는 의식의 안쪽에서 또는 무의식의 안쪽에서, 온기를 지니고 살아가야 하는 피가 되어 흐른다. 다음 세대로 옮겨가는 것이다. (p.97) <고양이를 버리다> 이 책을 읽으며 하루키가 작가로서 느끼는 고민과 그의 작품 세계에 대해 좀 더 깊이 이해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전쟁은 어떠한 형태로든 많은 사람들에게 지울 수 없는 상흔을 남기며 절대로 정당화될 수 없다는 생각 또한 했다. 그를 짓눌러왔던 삶의 무게와 아픈 기억이 단지 한 개인의 역사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삶과 역사의 근원이자 고통의 시작점이 되기 때문이다. 작가 하루키의 작품 세계를 좀 더 깊이 이해하고 인간 하루키를 좀 더 가까이 만나고 싶은 사람들에게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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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하루키의 소설이나 산문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니다. 그렇다고 싫어하는 것도 아니다. 기회가 되면 그냥 읽는 사람이다. 손꼽아 그의 작품을 기다리지 않는다. 『고양이를 버리다』도 아무런 기대 없이 읽었다. 얇고 작은 책이었다. 첫 페이지를 읽고 끝나는 순간까지 복잡한 마음을 거둘 수 없게 만드는 책이었다. 그러니까 거창하게 말하자면 나의 존재와 우리의 역사에 대해 생각하게 만들었다고 할까. 책은 하루키가 어린 시절 아버지와 함께 고양이를 버리는 이야기로 시작한다. 분명 해변에 고양이를 버리러 가는 장면인데, 자전거를 타고 돌아오는 길, 아버지와 아들, 그리고 고양이라는 하나의 풍경처럼 담아낸다. 이상한 건 집에 돌아오니 그 고양이가 먼저 도착한 것이다. 산책을 다녀온 것처럼. 운명처럼 받아들였을까. 고양이는 하루키의 집에서 함께 살게 된다. 책을 읽는 나도 무척 신기한데 당사자인 아버지와 하루키는 어땠을까. 놀라운 기억을 시작으로 하루키는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매일 아침 불단에서 오랫동안 경을 읽었다는 그의 아버지. 하루를 여는 습관이었다고 한다. 누구를 위한 독경이냐고 묻는 하루키의 물음에 아버지는 ‘전쟁에서 죽어간 사람들을 위해서라고.’ 답했다고 한다. 하루키의 아버지는 전쟁을 아는 사람, 전쟁을 경험한 사람이었다. 한 사람의 삶에서 전쟁은 어떤 의미일까.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큰 부분을 차지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남은 삶을 지배하는지는 알 수 없다. 그 이후로 아버지가 들려준 전쟁의 기억은 하루키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졌다. 이를테면 이런 부분은 글을 읽는 나에게도 너무나 무섭고도 두렵게 전해진다. 어쨌거나 아버지의 그 회상은, 군도로 인간을 내리치는 잔인한 광경은, 말할 필요도 없이 내 어린 마음에 강렬하게 각인되었다. 하나의 정경으로, 더 나아가 하나의 의사 체험으로. 달리 말하면, 아버지의 마음을 오래 짓누르고 있던 것을-현대 용어로 하면 트라우마를-아들인 내가 부분적으로 계승한 셈이 되리라. 사람의 마음은 그렇게 이어지는 것이고, 또 역사라는 것도 그렇다. 본질은 ‘계승’이라는 행위 또는 의식儀式속에 있다. 그 내용이 아무리 불쾌하고 외면하고 싶은 것이라 해도, 사람은 그것을 자신의 일부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된다. (51쪽) 얼핏 이런 기억과 추억은 하루키와 그의 아버지의 관계가 친밀했나 싶을 착각을 불러온다. 정작 하루키가 고백하는 아버지와의 관계는 반대였다. 아버지와 그는 거의 이십 년 이상 얼굴을 보지 않고 대화를 하지 않았다. 모든 부모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이상과는 다른 길로 가는 아들과의 갈등은 컸다. 두 사람이 화해를 한 것도 아버지의 죽음을 앞둔 순간이었다. 나와 형제들도 그랬다. 아버지와 우리는 극심하게 나쁜 건 아니었지만 좋은 것도 아니어서 그냥 데면데면 한 사이였다. 중환자실에서 호흡기에 의지해 겨우 눈으로 대화를 이어가던 순간. 미안하고 사랑한다는 말이 전부였다. 그 짧은 대화가 지금 나를 위로한다. 무기력하고 책임감이 없다고 여겼던 아버지. 그가 살아온 생에 대해 한 번도 궁금하지 않았던, 한 번도 질문하지 않았던 내가 원망스럽고 부끄럽다. 하루키의 아버지가 경험한 전쟁과 그것의 기억을 견디며 살아왔을 삶은 나의 아버지의 것과는 다르다. 하지만 아버지의 시간과 그들이 살아온 시대를 이해하려고 노력하지 않은 건 다르지 않다. 아마도 우리는 모두, 각자 세대에 공기를 숨 쉬며 그 고유한 중력을 짊어지고 살아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 틀의 경향 안에서 성장해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좋고 나쁘고를 떠나 그것이 자연의 섭리다. 마치 요즘 젊은 세대 사람들이 부모 세대의 신경을 일일이 곤두서게 하는 것처럼. (62쪽) 하루키가 아버지에 대해 문장으로 정리하기로 결심하고 이렇게 책으로 나올 때까지 그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아버지가 살아온 삶을 찾아보고 그를 아는 이들을 만나는 과정에서 무엇을 느꼈을까. 흐릿한 기억으로 아버지를 말하는 어머니, 아버지의 군 이력을 조사하면서 그의 삶을 관통하는 전쟁이라는 역사가 너무도 아프게 다가왔을 것이다. 죽을 수도 있었던 군대, 전쟁에서 그의 아버지는 살아왔다 어쩌면 그는 죽은 이들에게 갚아야 할 빚이 있다고 여겼는지도 모른다. 빚을 갚는 게 매일매일 그들을 위해 경을 읽는 것일지라도. 하루키는 아버지에 대해 아픔과 상처만 기억하는 게 아니었다. 어린 시절 야구 경기를 보러 가고 영화를 자주 보러 간 기억도 선명하다. 나는 아버지와 함께 한 일이 없다. 아버지를 생각하면 낡은 자전거가 떠오른다. 자전거를 타고 일을 하러 간 아버지. 아버지가 술에 취하면 그 자전거는 정말 골치거리였다. 누군가 그 자전거를 가지고 와야 했으니까. 나와는 다른 기억으로 남은 하루키의 자전거가 조금은 다정하고 부드럽게 느껴진다.
우리는 그 여름날, 같이 자전거를 타고 줄무늬 암고양이를 버리러 고로엔 해변에 갔다. 그리고 우리는 함께, 그 고양이에게 추월당했다. 뭐가 어찌 되었든, 우리는 멋지고 그리고 수수께끼 같은 체험을 공유하고 있지 않은가. 그때 해안의 파도 소리를, 소나무 방풍림을 스쳐 가는 바람의 향기를, 나는 지금도 또렷하게 기억해 낼 수 있다. 그런 소소한 일 하나하나의 무한한 집적이, 나라는 인간을 이런 형태로 만들어 놓은 것이다. (87쪽)
아버지를 이야기하는 이전의 많은 소설과 산문 가운데 하루키의 『고양이를 버리다』는 다르게 남을 것 같다. 내가 읽은 하루키의 책 가운데서도 마찬가지다. 아버지와 아들의 따뜻한 화해라 할 수는 없지만 아버지의 생에 가까이 다가가는 시간, 아버지의 생과 자신의 생이 결국엔 하나로 포개어진다는 그런 느낌이라고 할까. 그건 하루키와 그의 아버지에게만 국한된 게 아니다. 나는 한 평범한 인간의, 한 평범한 아들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 그것은 아주 당연한 사실이다. 그러나 차분하게 그 사실을 파헤쳐 가면 갈수록 실은 그것이 하나의 우연한 사실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이 점차 명확해진다. 우리는 결국, 어쩌다 우연으로 생겨난 하나의 사실을 유일무이한 사실로 간주하며 살아 있을 뿐이다. 바꿔 말하면 우리는 광활한 대지를 향해 내리는 방대한 빗방울의 이름 없는 한 방울에 지니지 않는다. 고유하기는 하지만, 교환 가능한 한 방울이다. 그러나 그 한 방울의 빗물에는 한 방울의 빗물 나름의 생각이 있다. 빗물 한 방울의 역사가 있고, 그걸 계승해간다는 한 방울로의 책무가 있다. (93쪽) 하루키의 말대로 우리는 모두 평범한 인간이다. 평범하지만 고유한 존재. 그래서 소중하고 귀하다. 내가 알지 못하는 나의 부모 세대와 그 이전의 세대도 그러한 존재였다. 하루키 개인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모두 그런 존재라는 걸 느낀다. 그들 개개인의 역사가 내게로 이어진다는 사실이 애틋하고 경이롭게 다가온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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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를 부르는 것과 아버지를 부르는 것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왜 차이가 날까. 엄마를 떠올릴 때와 아버지를 떠올릴 때, 왜 다른 마음이 되는 걸까. 나는 아버지의 딸인데, 딸의 마음은 아들과 또다르다고 하던데, 그런 구분과 관계없이 엄마와 다르게 떠오르는 이유가 무엇일까. 우리나라 정서만의 문제는 아닌 것 같고, 부자 간, 부녀 간, 혹은 모자 간, 모녀 간 관계에는 인류 공통으로 흐르는 감정 한 쪽이 있는 것만 같다. 그 한 쪽마저 어느 쪽을 보느냐에 따라 조금씩 달라지겠지만.
제목만으로 추측했을 때, 그리고 그동안 이 작가의 글로 알게 된 바를 바탕으로, 작가가 아버지와 썩 가깝고 돈독한 사이가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었기 때문에 아버지 이야기를 안 하는 것에 특별한 이유가 있는 줄로만 알았다. 이를테면 작가의 아버지가 일제강점기 우리 역사에 직접적인 가해자였다거나 2차 세계대전에 악명을 떨친 군인의 한 사람이었다든가 하는. 글을 통해 그런 식으로 살았던 사람은 아니었음을 곧 알게 되었지만, 작가가 아버지로부터 갖고 있었다는 거리감은 묘하게 납득이 되고 짐작이 되었다. 아버지와 아들은 친하기가 참 어려운가 보다 싶기도 했고. 자식이 둘도 아닌 외동아들이었다면서.
그리고 글 사이사이로 끼어 드는 나와 내 아버지. 우리는 친했던가. 나는 장녀였고, 동생이 둘 있었고, 아버지는 친구들 아버지에 비해 젊은 쪽이었고, 가난한 편이었으며, 내가 어릴 때부터 내게 기대한다는 표현을 자주 하셨다. 무엇보다 약한 모습의 인상으로 남아 있다는 게 지금까지도 마음에 걸린다. 나는 당시 가난한 집안의 장녀들이 느끼는 일반적인 부담감을 안고 자라기는 했어도 특별히 어려운 일을 겪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어쩌면 강한 아버지상을 마음 한켠으로 늘 그리워하며 살아왔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그런가, 내용은 다르나 아버지에 대해 글을 쓰는 일에 망설여왔다는 작가의 말에는 아주 공감했다. 작가는 비로소 한 권의 책으로 아버지를 세상의 이야기 속으로 내놓았지만 나는 아직도 내 아버지에 대해 누군가에게 말하고 싶지 않으니까. 듣고 싶다는 사람이 없다는 것과 내가 말하고 싶지 않다는 것에는 결이 다른 차이가 있다. 나는 언제까지가 될지 모르겠지만 아버지와 나, 둘만의 대화를 하고 싶을 뿐이다. 이 또한 지금은 계시지 않는 내 기억 속 아버지와의 대화일 뿐이지만.
사람은 대부분 아버지와의 기억을 갖고 있을 것이다(이 기억조차 없는 이도 있겠지만). 아버지를 어떻게 기억하는가, 아버지를 어떤 사람으로 기억하는가, 아버지의 자녀로 어떻게 살고 있는가,...와 같은 문제들을 떠올리면 먹먹해진다. 마냥 행복한 기분이 들지 않아서다. 그럼에도 벗어날 수는 없는 사이, 잊을 수 없는 관계다.
아버지 없이는 내가 이 세상에 생겨날 수 없었다는 것을 모르지 않지만, 때로 너무도 사무치게 짙은 인연으로 이어져 있다는 사실 때문에 울먹이곤 한다. 내 나이가 몇 살이든 이와 상관없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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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를 버렸지만,? 다시 돌아온다. 아버지와는 관계도, 기억도 모두 버리려 했지만 고양이처럼, 쉽게 버려지지 않는다. 아버지의 과거를 알아가는 중에, 하루키는 자신이 존재하게 된 것이 여러가지의 사건과 사건이 얽여서 이뤄진것임을 깨닫는다. 아주 조심스럽게 아버지를 알아가는 중에, 자신이 생각했던 아버지에 대한 기억과 괴리감을 느끼게 된다. 상황속에서 누군가에 대한 오해는 편협한 시야를 갖게 되는 것 같다. 나 또한 어렸을 적 아버지에 대한 기억과 사건속에서, 그때 가졌던 생각들이 잘못된 것이 많다는 걸 느낀다. 사소한 사건일 수도 있었던,? 고양이를 버리는 일이 멀게만 느껴졌던 아버지를 자신의 곁으로 끌어당기게 하는 매개체가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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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고싶은 생각, 기억들... 인간은 잊고 싶다고 잊거나, 기억하고 싶다고 기억되거나... 이런 부류가 이닌것이다. 잊고 싶어도 기억 저편에서 스멀스멀 기어나와 생경한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아무리 기억속을 헤집고 파내어도 저 심연으로 내려가 도저히 소환 못할 기억도 있는 것이다. 누군가에겐, 어느 민족에겐, 인류에겐 기억하고 싶지 않을 전쟁! 그 전쟁통의 기억이 한 아이의 노년까지 따라오는 아픈 기억이라면.... 글쓰는 사람의 책무때문에 70세가 된 지금이라도 씨지 않으면 안 될 가족사가 있다. 얼마나 마음 아픈 일인가. 이야기의 당사자가 살아계셧을 때는 쓰지 못할 이야기 이기에 더욱 마음졸이며 썼을 한 작가의 이야기가 너무 마음 아프다. 몇 몇의 작품에 녹아있는 중국과 일본간의 전쟁에서 일어났던 역사적 사실이자 한 가족사를 이 책에서 엿보며 한 작가의 작품세계를 조금이나마 이해 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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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키 작품에서 내가 봐온 '아버지' 캐릭터들의 이미지는, 성실하지만 그 시스템밖에 모르는 NHK 수금원이나 병상에 누워 죽어가는 남성들이었다. 하루키의 아버지뿐 아니라 주위를 돌아봐도 전쟁 세대들은 원하는 대로 살기는커녕 생계가 아니라 생사를 고민해야 했고 그 고됨과 상처들을 삭이느라 과묵해지고 가족과도 잘 소통하지 못했던 거 같다. 하루키는 아버지와의 세대차로 연을 끊다시피 하며, 혈연의 관계 개선보다 창작과 자신의 가정에 더 노력했다. 그런 영향 때문인지 하루키 작품에서 부모의 자리는 매우 적다. 그러나 하루키도 아버지와의 관계에 대해 내내 고민했을 것이다. 『1Q84』에서 덴고가 요양원에 있던 아버지를 향해 독백하던 장면도 소설을 통한 일종의 살풀이 아니었을까 싶었다. 친아들이 아닌데도 자신을 키워줬지만 그 양육이 결코 행복하지 않았던 덴고는 아버지를 마냥 미워할 수도 사랑할 수도 없었다. 그는 적어도 아버지를 이해하고 싶었다. 이 실마리가 풀려야 자신의 삶도 이해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아버지의 그 회상은, 군도로 인간을 내려치는 잔인한 광경은, 말할 필요도 없이 내 어린 마음에 강렬하게 각인되었다. 하나의 정경으로, 더 나아가 하나의 의사 체험으로. 달리 말하면, 아버지 마음을 오래 짓누르고 있던 것을?현대 용어로 하면 트라우마를? 아들인 내가 부분적으로 계승한 셈이 되리라. 사람의 마음은 그렇게 이어지는 것이고, 또 역사라는 것도 그렇다. 본질은 ‘계승’이라는 행위 또는 의식儀式 속에 있다. 그 내용이 아무리 불쾌하고 외면하고 싶은 것이라 해도, 사람은 그것을 자신의 일부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된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역사의 의미가 어디에 있겠는가? 아버지는 전쟁터에서의 체험에 관해 거의 얘기하지 않았다. 당신 자신이 직접 손을 댄 일이든 또는 그저 목격한 일이든, 아마 기억도 하고 싶지 않고 말도 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 이야기만큼은, 가령 서로의 마음에 상처로 남는다 해도, 피를 나눈 아들인 내게 말해서 전하고 어떤 형태로 남겨야만 한다고 느꼈던 것이 아닐까. 물론 이는 나의 추측에 지나지 않지만, 그런 생각이 강하게 든다.” 이 이야기는 『태엽 감는 새 연대기』에서 재구성되었다. 하루키는 아버지가 난징대학살에 직접 참여한 군인이 아니었을지 내내 의구심을 가졌다. 진실을 감당하기 두려웠던 걸까, 아버지의 과거에 관여하고 싶지 않았던 걸까. 하루키는 아버지가 2008년 사망하는 순간까지 아무것도 묻지 못했다. 말하고 싶은데도 어떤 것은 말이 되어 나오기까지 긴긴 시간이 걸린다. 나도 당신도. "나는 한 평범한 인간의, 한 평범한 아들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 그것은 아주 당연한 사실이다. 그러나 차분하게 그 사실을 파헤쳐 가면 갈수록 실은 그것이 하나의 우연한 사실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이 점차 명확해진다. 우리는 결국, 어쩌다 우연으로 생겨난 하나의 사실을 유일무이한 사실로 간주하며 살아있을 뿐이 아닐까. 바꿔 말하면 우리는 광활한 대지를 향해 내리는 방대한 빗방울의, 이름 없는 한 방울에 지나지 않는다. 고유하기는 하지만, 교환 가능한 한 방울이다. 그러나 그 한 방울의 빗물에는 한 방울의 빗물 나름의 생각이 있다. 빗물 한 방울의 역사가 있고, 그걸 계승해간다는 한 방울로서의 책무가 있다. 우리는 그걸 잊어서는 안 되리라. 가령 그 한 방울이 어딘가에 흔적도 없이 빨려 들어가, 개체로서의 윤곽을 잃고 집합적인 무언가로 환치되어 사라져간다 해도. 아니, 오히려 이렇게 말해야 할 것이다. 그것이 집합적인 무언가로 환치되어가기 때문에 더욱이.” 하루키 소설을 몇 번 접해본 사람이라면 그의 소설에 ‘실종’이 잦다는 걸 안다. 그게 단순히 재밌는 작품을 위한 작법의 기능이 아니라 작가의 풀 수 없는 갈증에서 나오는 것 같다고 자주 느꼈다. 소나무 한 그루로 인해 영문을 모르게 된 고양이, 전쟁 때문에 삶과 정신이 깊게 바뀌어 버린 평범했던 한 시민, 이 우주의 우연 속에서 그들은 다르지 않다. 교환 가능한 것이라 해도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것이라 해도 한 빗방울의 궤적은 유일무이하다. 우리가 그런 것을 살피지 않으면서 나라는 존재의 자리는 가능할까. 하루키가 아버지를 생각하며 풀어놓은 이 글은 아주 개인적이면서 근본적인 거대한 이야기, 버려지고 상처받았으며 무거운 체험을 충분히 얘기하지도 치유하지도 못한 채 살다가 죽어가는 존재들에 대한 이야기였다. 나도 내 부모의 삶과 이야기를 이해하고 듣고 싶었던 입장이어서 하루키 부자 이야기를 매우 공감하며 읽었다. 나는 어떤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나는 어떻게 한 방울을 기억하고 기록할 수 있을까. 당신은 어떻게 할 수 있을까.
좌) 가오 옌의 책 속 일러스트 / (우) 이 책의 내용이 처음 실린 <문예춘추> 2019. 6월 호에서의 하루키 부자의 사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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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하루키의 신작 <고양이를 버리다>는 100쪽을 넘지 않는 얇은 책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 읽고 나서 아쉽지 않다고 느낀 건, 저자가 무라카미 하루키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이야기는 저자가 어린 시절 아버지와 함께 집에서 키우던 고양이 한 마리를 집 근처 해변에 버리러 간 일화로 시작한다. 이때의 기억을 시작으로 아버지와의 추억을 하나씩 하나씩 떠올린 저자는 오랫동안 하기 싫은 숙제처럼 미뤄왔던 아버지의 이력 하나를 조사하러 나선다. 그것은 중일전쟁 당시 중국으로 파병되었던 아버지가 난징 함락(난징대학살) 때 제일 먼저 공격한 것으로 알려지며 피비린내 나는 평판을 얻은 보병 제20연대 소속이었던 것이 맞는지다. 본격적으로 조사하기 전까지 저자는 아버지가 대체로 무탈하고 온화한 삶을 살았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버지의 생애에는 아들인 저자가 겪지 않은 전쟁이란 사건이 있었다. 승려의 아들인 아버지는 벌레 한 마리조차 함부로 죽이면 안 된다고 배우며 자랐다. 그런 사람이 느닷없이 전쟁터로 끌려가 눈앞에서 사람들이 떼죽음 당하는 걸 봤다. 전쟁이 아무리 참혹해도 참혹하다고 글을 쓰면 불온하다고 처벌을 받을 수 있는 시대였다. 저자처럼 글쓰기를 자신의 소명처럼 여겼던 아버지에게는 참으로 답답하고 우울한 시절이었을 것이다. 아버지의 전쟁 경험에 관해 알게 된 저자는 아버지와 함께 살 때 이따금 아버지가 보였던 표정이나 행동의 이유를 짐작할 수 있게 된다. 저자가 공부를 더 열심히 해서 더 좋은 학교에 들어가길 바랐던 것도, 남들이 인정하는 직장에 들어가 안정된 삶을 살길 바란 것도, 당시에는 저자의 선택을 존중하지 않는 부당한 처사로 느껴졌지만, 이제는 아버지 자신이 그런 삶을 원해도 살기 힘든 시대를 살았기 때문임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하지만 이를 깨달았을 때는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후였다.) 여기까지만 보면 '부모님 살아계실 때 잘해드려라'라는 교훈과 함께 이 책이 끝날 것 같지만, 저자는 그렇게 이 책을 마무리하지 않는다. 만약 아버지가 전쟁에서 목숨을 잃었다면 나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아버지가 전쟁에 나가지 않았거나, 전쟁에서 다른 진로를 찾았거나, 전쟁 후 어머니가 아닌 다른 여자를 만나 결혼했거나 해도 나는 역시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나라는 존재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비롯한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무수히 많은 선택을 하거나 혹은 하지 않은 결과로 생긴, 전적으로 우연에 의해 만들어진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필연이 아니라 우연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해서 나라는 존재가 덜 가치 있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나라는 존재는 전적으로 우연에 의해 만들어졌고, 그러한 우연은 필연적으로 행위자들이 속한 공동체와 국가, 국제 사회의 환경과 연관되어 있으므로, 우리는 우리들 자신이 역사 속 인물이나 사건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지 않더라도 결코 역사와 무관하지는 않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다 안다고 생각하기 쉬운 부모님의 생애를, 시험 볼 것도 아닌데 굳이 더 공부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기 쉬운 자신의 나라와 세계의 역사를 계속해서 궁금해 하고 따져 물어야 하는 이유다. "역사는 과거의 것이 아니다. 역사는 의식의 안쪽에서 또는 무의식의 안쪽에서, 온기를 지니고 살아있는 피가 되어 흐르다 다음 세대로 옮겨가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여기에 쓰인 것은 개인적인 이야기인 동시에 우리가 사는 세계 전체를 구성하는 거대한 이야기의 일부이기도 하다." (97쪽) 아버지를 따라 고양이를 버리러 간 작은 일화에서 출발해 우리가 역사를 알아야 하는 이유로 사유를 확장한 솜씨가 놀랍다. 역시 무라카미 하루키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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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의 은밀한 고백. 무라카미 하루키는 돌아가신 아버지를 기억하며 이 책을 썼다고 해요. 일단 책이 너무 작고 얇아서 놀랐어요. 삽화까지 포함하여 딱 100페이지. 사람이나 책이나 겉만 보고는 알 수 없는 것 같아요. 비록 책의 부피는 작으나 내용까지 가벼운 건 아니었어요. 이 책이 끌렸던 이유는 "처음으로 털어놓는 무라키미 하루키의 시간들"이라는 문구 때문이었어요. 이제껏 무라카미 하루키라는 이름은 소설가로서, 그가 쓴 소설을 통해 널리 알려진 것이라, 인간 무라카미 하루키는 아는 바가 거의 없었어요. 이렇게 말하면 마치 그의 작품은 다 읽은 것 같지만 실제 읽은 작품은 몇 권 되지 않아요. 그러니 그의 작품을 안다고 말할 수도 없겠네요. 제가 아는 건 그가 꽤나 유명한 소설가라는 것. 그런데 이 책은 소설이 아닌 에세이, 무엇보다도 그가 털어놓는 이야기의 주제가 '아버지'라서 읽고 싶었어요. '어머니', '엄마'라는 단어는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뭉클한데, '아버지', '아빠'는 굉장히 차분해져요. 두 분 모두 사랑하지만, 이 감정의 온도 차이를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그래서 궁금했어요. 무라카미 하루키에게 아버지란 어떤 존재이며, 어떤 의미였을까. 사실 자신의 가족 이야기, 특히 부모님에 관한 은밀한 속내를 공개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남들도 다 알만 한 표면적인 설명 말고 진짜 자신이 품고 있는 마음을 털어놓는다는 건 매우 사적이고 민감한 부분이라 꺼려질 수밖에 없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자신의 아버지에 대해 이야기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아요. "내가 이 개인적인 글에서 가장 말하고 싶었던 것은 딱 한 가지뿐이다. 딱 한 가지 당연한 사실이다. 나는 한 평범한 인간의, 한 평범한 아들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 그것은 아주 당연한 사실이다. 그러나 차분하게 그 사실을 파헤쳐가면 갈수록 실은 그것이 하나의 우연한 사실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이 점차 명확해진다. 우리는 결국, 어쩌다 우연으로 생겨난 하나의 사실을 유일무이한 사실로 간주하며 살아있을 뿐이 아닐까. ... 한 방울의 빗물에는 한 방울의 빗물 나름의 생각이 있다. 빗물 한 방울의 역사가 있고, 그걸 계승해간다는 한 방울로서의 책무가 있다. 우리는 그걸 잊어서는 안 되리라." (93p) 외동아들이었던 그는 아버지와 살가운 사이는 아니었다고 해요. 오히려 갈등이 심해져서 직업작가가 된 후에는 거의 절연 상태였대요. 이십 년 이상 전혀 얼굴을 마주치지 않고 지내다가, 아흔 살 아버지가 죽기 얼마 전에 겨우 얼굴을 마주하고 얘기를 나눴다고 해요. 예순이 다 된 아들은 아버지의 인생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화해 비슷한 것을 했다는 고백이 의미심장하네요. 어떤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그건 중요하지 않은 것 같아요. 아버지와 아들은 서로 끊을래야 끊을 수 없는 관계라는 걸 죽음 앞에서 깨달은 게 아닐까요. <고양이를 버리다>는 저자의 말처럼 역사의 작은 한 조각일 뿐이에요. 지극히 평범한 아버지와 아들의 인생이 겹쳐지는 작은 한 조각이에요. 그 우연이 묘하게도 두 사람의 삶을 연결하는 고리가 되었네요. 아버지, 당신은 아버지에 대해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나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