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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몸에는 의붓아버지의 피가 흐른다.’로 시작하는 소설. 가슴을 먹먹하게 만든다. 제목이 주는 이율배반적인 느낌에, 그저 가볍게 읽기 시작했지만, 결코 가볍지않은 소설이 되어버렸다. 이방인들에다가, 허름한 골목에서 살아가는 누구하나 거들떠 보지않는 인생들이지만 그들의 가슴속 상처는 나의 온몸을 헤집고있다. 온몸에 흉터투성이인 나는 고아원을 전전한다. 고아원을 빼놓고는 기억이 없다. 어느 날 하산 아저씨에게 입양되어 이슬람사원인 모스크 근처 허름한 동네로 온다. 우리가 예전에 보았던 달동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그런 동네이다. 한때는 학교에 다녔지만, 스스로 특이한 병을 만들어 학교와는 결별을 한 상태이다. 그 동네에서 나는 하산아저씨와 야모스아저씨, 안나 아주머니와 대머리아저씨, 그리고 또래인 유정이와 맹랑한 녀석과 부대끼며 살아간다. 잡지나 신문에서 사람얼굴을 오려 스크랩하는 것이 유일한 낙이며, 스크랩북만이 유일한 재산이다. 터키인이면서 한국전쟁에 참전한 하산 아저씨는 총상으로 인한 커다란 흉터를 가지고 있다. 또한 전쟁 중 자신도 모르게 사람의 인육을 먹은 기억과 살생의 공포가 정신적 상처가 되어 전쟁이 끝난 후 조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동네의 허름한 건물을 세내어 무슬림이면서도 돼지고기를 파는 정육점을 운영한다. 꾸란을 전부 외울 정도로 독실한 이슬람교도 이고, 또한 매일매일 기도에 충실하지만 돼지고기를 파는 그의 솜씨는 결코 남에게 떨어지지 않는다. 안나 아주머니는 그 동네에서 충남식당을 운영하며, 동네에 사는 사람들을 포용한다. 한때 안내양이었으며 그래서 이름이 안나가 된 아주머니는 남편의 폭력을 피해 도망쳐 나와 살고 있지만, 시아버지의 방문으로 남편이 죽었음을 알게 된 후, 이들에게 단체저녁을 해 먹이고, 또 돼지를 잡는 소풍을 통하여 사람들의 상처를 치유해준다. 마치 자신의 상처를 치유하듯이.. 돼지콜레라가 유행일 때 사람들은 정육점에 몰려와 정육점에서 파는 돼지고기가 돼지콜레라에 전염되지 않았음을 증명하라고 한다. 가만히 있는 하산아저씨를 대신하여 나는 돼지고기를 날로 씹는다. 그러고 위장이 다 비도록 토악질을 하고 며칠을 앓아 누워있을 때 나의 가슴을 보듬어 준 것은 안나 아주머니이다. 그리스인인 야모스 아저씨는 그리스 내전 당시 작은아버지 일가족을 적으로 오인하여 사살한 후, 죄책감에 한국전에 자원 입대하였고, 전쟁이 끝난 후에도 돌아가지 않고 한국에 살고 있다. 그는 안나 아주머니가 운영하는 식당에 기거하며 밥을 빌어먹고 살고 있다. 전쟁으로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대머리아저씨는 전쟁 중 일어났던 전투의 상황을 깡그리 찾아서 기억하고, 자신이 참전했던 것으로 믿고 있다. 저녁이 되면 군복을 입고 군가를 부르는 그 역시 전쟁의 상처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연탄장수 아들인 유정은 학교에서 꼴찌이지만 소설가를 꿈꾸는 말더듬이 친구이다. 모든 동물들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그는, 동물들과 의사소통을 통하여 알게 된 동네의 온갖 소문을 나에게 들려준다. 나중에 어머니가 집을 나간 후 말을 더듬지 않게 된 그는 모스크계단에 서서 서울 시내를 바라보는 것이 일과가 되었다. 늘 “죽을 건데. 뭐”란 말을 달고 사는 맹랑한 녀석은 동네의 평상에서 생활하는 염세주의자이다. 노란 줄무늬 고양이 하고만 노는 그는, 어느 날 대머리아저씨와 전쟁참전용사들의 집회에 다녀온 후 대머리아저씨의 상처를 생각하게 되고, 그의 상처를 치유해주기 위해 나와 함께 대머리아저씨의 군복을 불사른다. 그 밖에도 소설에는 맹랑한녀석이 좋아하는 쌀집 둘째딸이며, 온갖 비속어를 입에 달고 사는 쌀집아저씨, 무슬림을 개종시키겠다며 전의를 불태우지만 결국은 자신도 상처 입은 한 인간임을 알게 되는 전도사, 내가 유일하게 좋아했던 고아원의 벙어리 신부, 그리고 전쟁고아들로 인해 치부하는 고아원 원장 등 많은 사람들이 등장한다. 하지만 상처입지 않은 이들은 하나도 없다. 전쟁에 참여한 사람은 그 나름대로, 또 전쟁에 참여하지 않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허름한 그 동네에 살고 있다는 것은 지독한 가난과 친구일수밖에 없으며, 그래서 그들은 각자 나름대로 상처를 안고 살아간다. 어느 날, 정육점이 세 들어 있는 건물 주인은 집값을 올려 달라고 한다. 아니 아예 나가라고 한다. 허름한 동네가 재개발이 된다고 하여 보상을 더 받기 위해 건물을 신축하기 위해서이다. 하산아저씨는 정육점을 그만둘 수 밖에 없었으며, 하나, 둘 동네에서 허름한 집들이 사라질 때 하산아저씨는 라마단 금식을 한 후 기력을 잃고 쓰러진다. 나는 스크랩한 인물사진들을 비슷한 인물 별로 나열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바로 옆의 사람들만 비슷해서 형제이고, 같은 민족이었지만 나중에는 전혀 다른 사람들도 같이 연결된다. 인종이고, 종교고 아무것도 그들 사이를 구분할 수 없게 된 것이다. 하산아저씨를 찾아간 나는 아저씨의 가슴에 나와 똑 같이 큰 흉터가 있음을 알게 된다. 하산아저씨를 껴안은 나는 ‘아버지’ 하고 부르며, ‘사랑한다’고 말한다. ‘내 몸에는 여전히 의붓아버지의 피가 흐른다.’로 소설은 끝난다. 소설을 다 읽고 난 다음에도 먹먹한 가슴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다. 그들은 왜 먼 이국 땅에까지 와서 아파했어야 할까? 하산은 왜 이국의 아이를 입양하였을까? 자신의 상처에도 불구하고, 상처 입은 한 소년의 상처를 감싸 안았던 그의 마음이 나를 불편하게 한다. 전쟁이 끝난 지 벌써 60여 년이 다되어 가지만, 아직도 그 상처들은 다 치유되지 못했단 생각이 든다. 치유되지 못한 그 상처들이 덧나고, 그 위에 다른 상처들이 덧칠되어 가면서 합병증을 유발시키고 있지만 ‘내 몸에는 여전히 의붓아버지의 피가 흐른다.’는 이 말이 우리들 내면의 상처들을 아물게 해주기만을 고대해 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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흉터 없는 사람들이 있을까. 누구나 한두개쯤 흉터들을 갖고 있을 것이다. 자기 몸에서든지 자기 마음에서든지. 예전의 나는 내가 익히 알아왔던 작가들의 책만 주로 팠다. 그들의 작품을 읽고 마음에 들면 예전의 책들을 찾아보고 그의 새로운 책이 나오면 곧바로 구입해 보는 패턴을 계속해 왔다. 뭐,,,, 그런 습관은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지금은 새로운 작가들의 이름이 나오면 관심있게 보고 작가도 중요하지만 책을 소개하는 내용을 보고 책을 읽게 된다. 물론 여러 책읽는 분들이 좋다고 하면 나도 관심이 가지는 것은 어쩔수 없다. 흥미를 끄는 새로운 작가의 작품이 나오면 나는 관심을 더 가지고 책을 보게 된다. 다양한 책들을 접하고 싶기 때문이다. 손홍규라는 작가를 잘 모르는 상태에서 좀 의외인 제목과 어린이 만화 캐릭터 같은 표지를 보고 어떤 소설이길래 하는 궁금증이 일었다. 성장소설이라는 것에 더 혹했다. 성장소설을 유난히 좋아하기 때문이다. 또한 청소년의 아이들이 있기 때문에 늘 읽게되고는 한다. 고아원을 전전하는 소년 '나'는 학교에 적응을 하지도 못하고 고아원에서 내쳐질 위기에 처했을때 하산 아저씨의 집으로 오게 된다. 하산 아저씨는 한국전쟁때 왔다가 여기에서 무슬림으로 돼지고기를 파는 <이슬람 정육점>을 운영하고 있다. 다닥다닥 붙어 있는 집에서 살고 있는데 하산 아저씨 뿐만 아니라 가이아 여신을 닮은 '충남식당'을 운영하는 안나 아줌마가 있다. 안나 아줌마는 다른 지역의 이름을 걸고 식당을 했지만 '충남식당'이 가장 장사가 잘 되기 때문에 이 이름을 유지하고 있다. 역시 한국전쟁시 그리스에서 온 연합군으로 사촌 가족을 적으로 오인해 사살해 죄책감을 가지고 있는 야모스 아저씨와 전쟁의 상처로 인해 과거의 기억이 없는 대머리 아저씨가 있다. 그리고 커서 소설가라 되리라는 유정과 맹랑한 녀석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살고 있다. 다들 저마다의 상처가 있는 사람들로 힘든 삶을 살아가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우리가 타인을 거울로 삼아야 하는 이유는, 우리 내부의 모순을 모순으로 여길 능력이 없기 때문이란다. 타인의 모순된 행동을 통해서 나를 유추해 볼 수밖에 없기 때문이지. 타인을 거울로 삼지 않는다면 우리는 스스로를 미지의 영역에 내버려둔 채 한평생을 살아야 할 거다. ~~~~~ 170 페이지 중에서 하산 아저씨의 흉터를 보고 싶었다. 내 것과 닮았다는 그 흉터. 흉터가 닮았다는 말이 운명이 닮았다는 말은 아니겠지만 거기에서 내가 알지 못했던 무언가를 발견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 228 페이지 중에서 '나'는 온 몸이 흉터 투성이다. 어디서 생긴 흉터인줄 모르는 '나'는 비슷한 흉터를 가지고 있는 하산 아저씨의 흉터를 제 것과 비교해 보고 닮은 점을 찾았던 '나'의 모습이 참으로 안타깝다. 아저씨가 아프자 하산 아저씨가 자신에게 '마지막 고아원'이기를 바라는 모습까지도. 한국인보다 더 한국인 같았던 하산 아저씨. 훗날 자기 자식에게 의붓아버지의 피를 물려주고자 했던, 자신의 몸에 의붓아버지의 피가 흐른다고 했던 '나'의 성장은 진정 행복했을까. 상처를 치유하고 마음속의 흉터를 없애는 방법은 주위에 있는 마음을 나누는 사람에게서 얻을수 밖에 없나 보다. 그동안 스크랩해 두었던 온갖 얼굴 사진들을 오려 세계지도를 만들었던 '나'는 그 모든 인종, 피부색, 편견들을 초월하고 싶었을 것이다. 담담한 필체로 적어 내려간 이번 소설에서 주인공 '나'에 대한 애잔함이 컸던 소설이다. 이 소년을 다독이고, 보듬어 주고 싶은 그런 마음이 들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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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책 제목을 보고 약간 놀랐다. 이슬람 정육점이라면 양고기나 낙타고기 그리고 소고기를 파는 곳이어야지. 하지만 돼지고기를 파는 정육점이라니. 맙소사, 그것도 무슬림이. 상처와 치유의 이야기이며 전쟁과 종교와 인종 그리고 소외에 대한 역설이다. 터키 참전용사이며 독실한 이슬람 신도 하산과 고아인 나를 둘러싼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고아인 나는 사람이 사람을 배우는 건 타인을 통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통해서라고 생각했다. 그만큼 외로웠다. 모든 불우한 청소년들의 꿈은 하나다, 행복해지고 싶다는 것 나는 행복해지고 싶다. 큰 소원은 아니지만 쉽게 이루어질 수 있을지는? 안네 일기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흉터의 여왕인 식당 안나 아주머니는 “옴마니파트메훔”을 읊조리고, 웃음을 띠고, 활기차 보이지만, 그녀에게는 어떤 잠복했던 고통이 있고, 어떤 흉터를 출구 삼아 나오려 하는지도. 아줌마 옆에 빌붙어 사는 그리스인 야모스와 궁상들, 특수부대원 야모스의 상처는 그리스 내전 시 사촌동생을 폭격으로 죽인 것이고, 자신이 저지른 최악의 과오는 전쟁을 도피처로 삼은 거란다. 커피가 지옥만큼 어둡고, 죽음만큼 강하고, 사랑만큼 달콤하다고 했다. 한국사람보다 더 한국인 같은 터키인. 하지만 사람들은 결코 자신과 닮은 타인을 진심으로는 좋아하지 않았다. 그를 두려워하는 이유는 자신들과 다르다는 사실 하나뿐이었다. 불쾌한 기분을 느끼면 그때의 인상을 가슴에 담는다. 이렇게 저장된 첫인상이 다음 번 만남에서도 끌려 나와 다시 만난 이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하지 친절하게 알려준다. 우리의 과거는 사라지지는 않는다. 하지만 변하고, 바뀐다. 과거의 사람들, 그들은 변하려 하지 않는다 그게 그들 자신이기에. 젊은 시절에 방귀깨나 뀌었다고 큰소리 치지 않는 늙은이를 본적이 없다. 노병들의 모임 마치 전국의 노인정에서 괴팍한 노인들만 골라 누가 더 억울한 지를 경합하는 대회장인 것만 같았다. 6.25라는 참담함을 지고 사는 수많은 사람들, 대머리의 사라진 전쟁 중 3년의 기억은 어디로 가버렸나? 그는 그 기억을 거부해 버렸다. 하지만 내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나는 미래를 향해 갈수 밖에 없는 사람이다. 볼에 남은 상처의 자국은 곧 사라지겠지만, 그의 영혼에 새겨진 손자국은 쉬이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장미꽃(쌀집 둘째 딸)을 사랑하는 사람(한때 레슬러였던 고수머리 청년)은 그 가시도 감내하는 법이다. 그것이 사랑이리라. 사회에서의 평온과 평화는 사람이 하나씩 늘어나면, 그 사람을 균등하게 배분하여 한 조각씩 공유했기 때문이다. 우리들의 소풍은 다름 아닌 돼지 잡으러, 궁상들이 다 모여 시골로 향한다. 돼지를 잡으면서, 우리의 아픔을 치유하러, 우리들 모두 이 아름다운 하늘과 땅과 사랑하는 사람을 두고 이곳을 떠나야 하는 존재들이다. 하지만 우리는 줄곧 죄를 배우고 죄를 짓는데 인생을 허비했다. 빼앗긴 사람은 있는데 빼앗은 사람은 없다는 거, 그게 이세상의 법칙이다. 남루한 동네에서는 비밀마저도 남루했다. 종교이야기는 이슬람교 하산과 이맘, 그리스정교인 야모스, 불교적인 안나 아주머니와 개척교회 전도사(전도와 이슬람에 대한 기독교의 승리를 위해) 그리고 아직 종교가 없는 나는 종교 때문에 다투거나, 미워하지 않는다. 나의 장대한 프로젝트, 인간이 지을 수 있는 모든 표정이 하나의 표정으로 수정된 얼굴을 만나기를 고대했는지도 모른다. 나는 신문의 작은 얼굴로 이루어진 세계 지도를 만들 생각이었다. 사람들의 얼굴 사진만으로 그가 어떤 종족인지 민족인지 판단할 수 있을까? 없다. 하지만 왜 우리는.. 하산아저씨의 정육점은 개발의 미명아래 사라져간다. 하산도 곧 사라지리라. 나의 상처, 나는 기억하지 못하는데 왜 내 몸은 기억하는 걸까. 흉터는 역사가 날염된 것이기에. 끝내 학교로 갈수 없는 나. 학교란 한마디로 확실한 바보를 만들어 내는 곳이었다. 나의 배움은 내가 아닌 그였다. 그가 나의 마지막 고아원이기를 바란다. 내 몸에는 여전히 의붓아버지의 피가 흐른다. 그를 진정으로 사랑하며, 상처를 감싸준 사람은 아버지 하산이었다. 그가 이방인인가 가난은 없어지지도 않고, 상처를 지닌 사람은 단지 사라질 뿐이다. 하지만 그를 기억하는 사람의 마음속에 영원히 함께 할 것이다. 많은 문제를 생각하게는 하지만 어떤 답을 제시하지는 못하는 것 같다. 우리의 삶에서 어떤 답을 알기에는 우리는 너무 이기적인 존재이고, 더욱 닫혀있는 사람들이기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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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몸에는 의붓아버지의 피가 흐른다.' 로 시작되는 [이슬람 정육점]은 우리 사회 전반에 퍼져있는 국가, 종교, 피부색으로 사람을 차별하는 것이 얼마나 부질없고 쓸모없는 일인지를 다시금 깨우치게 만들어 준 이야기다.
사람들은 누구나 다 똑같은 인권을 가지고 있으며, 어떠한 상황에 처해져 있더라도 그 인권은 존중되어야 한다는 생각은 이제 교과서에서나 볼 수 있고, 학습되어지는 듯해 현실에선 다소 공허한 메아리가 되어 버렸다.
한국 전쟁에 참전한 터키인 하산 아저씨는 종전 뒤에도 자국인 터키로 돌아가지 않고, 한국에 남아 제2의 삶의 터전을 잡아간다. 아이러니하게도 이슬람교를 믿는 하산이 선택하게 된 직업이 정육점이다. 부모에게서 버림받았다고 믿는 주인공 '나'는 여러 고아원을 전전하다 하산에 의해 고아원의 담 너머 있는 세상으로 나오게 되면서 비록 가난한 산동네의 삶이지만, 사람에 대한 사랑을 배워가게 된다. 그 속에선 가난하지만 자신의 그대로를 봐주며 따뜻하게 맞아주는 이웃들을 통해 그동안 '나'가 가질 수 없었고, 가지지 못했던 이웃과의 소통과 유대를 배우는 청소년 성장소설이다.
처음 소설책을 손에 들고 가졌던 성장 소설에 대한 생각에서 빗나간 [이슬람 정육점]은 어느 정도는 예상하고 있었지만, 그동안 내가 의식하지 못한 상태에서 품었던 사회를 바라보는 선입관이 너무나 강해서 놀라웠다. 또한, 소외된 이웃들에게 늘 관심있게 지켜보고 안타까워하고 있다고 생각하던 내게 그것은 어디까지나 허울좋은 포장일 뿐이고, 실상을 그렇지 못한 나를 바라보며 적잖은 당황과 스스로에 대한 실망도 함께 가졌다.
'나'가 하산 아저씨를 따라간 동네에는 남편의 폭력을 피해 아이를 버리고 달아나 혼자 식당을 꾸리는 안나 아줌마, 전쟁 후유증으로 기억에서 3년의 시간이 지워져 언제나 도돌이표를 하며 힘들게 그 때를 찾고자 하는 대머리 아저씨와 가난한 가정환경에서도 소설가가 되고 싶어하는 꿈을 놓치지 않고 있는 유정 그리고 맹랑한 녀석 등이 나온다. 비록 가진 것은 없지만, 늘 그들은 서로를 자신의 방식대로 지켜봐 주고, 자신의 방식대로 격려와 충고도 아끼지 않는 생활을 이어간다. 어느덧 '나'가 생활하는 산동네 공간에도 재개발 붐이 일어 살던 곳을 떠나야 하는 상황이 생기지만, '나'는 하산 아저씨의 따뜻한 사랑과 삶의 등대가 되어준 덕분에 하나하나씩 자신의 몸에 생긴 상처뿐만 아니라 마음의 상처까지 치유하면서 이야기는 마무리 된다. 이야기를 읽으면서 가진 것이 너무 없는 사람들이라 이 사회를 살아가는 데 있어서 너무나도 아슬아슬하게 힘겨운 일들이 많이 펼쳐질 거라는 생각에 맘이 아팠지만, 자신들만의 독특하고 인간적인 사랑의 힘으로 그 또한 견뎌낼 수 있을 것이라 생각된다. 그러한 생각도 내가 가진 소외된 이웃들에게 가진 선입견과 편견일 것이다. 주인공 '나'는 비록 중학교 진학을 하지 못한 상태이지만, 공부가 삶에서 전부는 아니라는 엄연한 사실이지만 지나친 생각을 다시금 일깨워 준다.
'나'는 늘 안나 아줌마가 운영하는 충남식당에서 신문 스크랩을 한다. 그것도 글이 아닌 오로지 사람의 얼굴만 스크랩하는 나는 후에 스크랩해 놓은 인물들을 여러사람들에게 보여주며 국적이 어디인지를 물어본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엉뚱하게 잘못된 대답을 하게 되며, 그것이 주인공의 얘기처럼 우리가 처음부터 사람의 얼굴로 그 사람의 국적이나 직업, 부의 척도를 알아버리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학습에 의해 잘살고 못사는, 그래서 얼굴과 피부색으로 차별을 하게 되는 거라는 얘기를 한다. 사회 전반에 퍼져 있는 피부색에 대한 인권 문제가 작가는 결국은 사회가 만들어 놓은 학습으로 우리의 의식에 심어지게 되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러면서 어른들의 잘못된 학습의 결과가 아이들에 어떤 나쁜 영향을 주는지를 함께 깨달아야 한다는 물음을 준다. 또한, 안나 아줌마를 통해 피부색과는 아무런 상관없이 삶에서 우리가 가지게 되는 문제나 사고에 있어서 발생하게 되는 차이의 문제점은 충분히 서로의 대화나 이해로 해결될 수 있음도 보여주는 훈훈한 성장소설이다.
갈수록 늘어나는 국제 결혼으로 어느덧 우리 나라도 '같은 핏줄' 이라는 의식은 이제 희미해져 가고 있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나를 포함해 많은 이들이 그러한 현실에 의식은 따라가지 못하고 제자리 걸음을 하고 있는 듯하다. 이제는 '같은 핏줄' 이라는 생각보다는 같은 시대를 살아가면서 같은 문화를 공유하고 있다는 데서 그 출발점을 찾아야 할 듯하다. 그래야 국가, 종교, 피부색에서 오는 차별에서 벗어나 다양성이 인정되는 보다 생각이 넓은 사회가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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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들에게 고통을 안겨준다. 많은 이가 죽고 다치고 헤어지고... 적군, 아군을 떠나서 모든이의 몸과 마음에 큰 상처를 남긴다.
여기 이 책에도 전쟁으로 상처받은 사람이 많이 등장한다. 한국전쟁에 참전했다가 한국에 눌러살게 된 터키인 '하산 아저씨', 고국에서 사촌일가를 적으로 오인해 몰살하고 도망치듯 한국에 온 '야모스 아저씨', 전쟁때문에 큰 충격으로 기억을 잃고 공갈군인 행세를 하는 '대머리 아저씨', 폭력남편을 피해 도망쳐 나온 '안나 아주머니' 그리고 전쟁으로 고아원과 보육원을 전전하는 화자인 '나' 모두 상처투성이 인간들이다.
하산 아저씨가 주인공인 '나'를 입양하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하산 아저씨가 사는 동네에는 가난하고 허름한 집들 만큼이나 구질구질한 인생들이 즐비하다. 술주정뱅이 연탄가게 아저씨, 욕쟁이 쌀집아저씨, 군가를 부르며 정체성을 잃은 대머리 아저씨, 말더듬이 유정이, 말끝마다 "곧 죽을건데 뭐" 하며 어떤 것에도 의욕이 없는 '맹랑한 녀석'.. 하나같이 결점투성이에 치료가 필요한 사람들이다.
이 찌질한 대열에 합류하게 된 '나'도 크게 다르지 않다. 엄마와 아빠가 누군지도 모르고, 어려서의 기억이 하나도 없다. 좋았던 기억은 물론 아픈 기억조차도 갖고 있지 않는 아이였다.
가난하고 악다구니만 남은 그들이 잘 지낼 수 있을지, 함께 어울릴 수 있을지 의아했었다. 이런 오졸지합 안에서 무슨 이야기가 전개될까 내심 궁금했다.
그러나 곧 그들은 함께 모여있었고, 같이 어울려 있는 그림도 퍽 자연스러웠다. 그들의 면면과 속사정이 하나씩 드러나면서 조금 더 친숙한 캐릭터들로 다가온다. 속마음을 조금씩 내보이면서 서로가 서로를 조금씩 보듬어 주고, 쓰다듬어 주고 있었다.
성장하고 있는 '나'의 시선은 분명 어린아이인 것 같은데, 저자의 생각이 묻어나면서 어린아이의 생각이 아닌 것들이어서 부조화가 조금 느껴졌다. 재밌다는 느낌보다는 '참 안쓰러운 인간군상 들이네' 하는 느낌이 계속 맴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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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은 표지 그림에서 연상되듯유쾌하고 경쾌하고 밝은 이야기는 아니다. '이슬람 정육점'이라는 제목에서 연상할 수 있듯이 다문화에 초점을 맞춘 다소 계몽적인 성격을 띤 작품은 더더욱 아니다. 그보다 훨씬 보편적이고 근원적인, 인간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졸졸졸 흐르는 시냇물이라기보다는 그 모든 시냇물들을 다 덮을 만큼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바다 같은 작품이라고 할까? 읽기 전에 가졌던 예상과 예측이 보기 좋게 모두 빗나가서 기분이 좋았던 작품. 표지 자체는 마음에 들지만, 작품 분위기에 맞게 표지를 입혔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든다. ‘청소년 문학’으로 굳이 영역을 한정하기에는 이 작품이 담고 있는 이야기가 무척 크다. 연령대에 상관 없이 읽을 만한, 어떤 인종과 종교를 가진 사람이 읽더라도 동감할 만한, 인간의 보편적인 정서에 기반한 이야기이다. 이 작품은 기본적으로 상처받는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부모에게서 받은 지울 수 없는 상처가 몸의 흉터로 남은 아이도 있고, 전쟁의 참상이 트라우마로 남은 노인들도 있다. 각자 말하지 못하는, 말로 되어지지 못하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사연과 비밀을 가진 사람들이 각자의 상처를 안은 채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그래서 말더듬이가 될 수밖에 없는 나와 이웃들의 이야기. 상처받은 사람을 놀리는 건 인간만이 가진 능력이다(91). 상처의 치유는 그런 식으로 유예된다. 정작 상처 입은 사람들은 그걸 하루라도 빨리 잊기 위해 태연한 척 애를 쓰지만 타인의 시선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상처가 낫기도 전에 새로운 상처가 생긴다. 그런 식으로 상처가 증식하면 드디어 온몸이 상처투성이가 된다. 그때부터 우리는 누군가에게 상처를 되돌려주기 시작한다(107-108). 나의 언어가 입안에서 자란 송곳니와 어금니처럼 상대방을 물어뜯고 짓이기고 씹어버리기 위한 것이라면 유정의 언어는 사랑니였다. 그의 언어는 잇몸 속에 갇혀 웅얼대는 소리 없는 언어였다. 그것은 모로 눕거나 똑바로 자라거나 살점을 뚫지 못하고 미성숙한 채로 나이 들어 종내는 그곳에서 썩어버릴 터였다. 유정은 언제까지고 아플 것이다(206). 그러나 상처받은 자들만이 나눌 수 있는 역지사지와 인지상정, 동병상련이 있다. “괜찮으세요 ” 고통받는 사람에게 건넬 수 있는 언어의 목록은 너무 간단하다. 우리에게는 남을 위로해줄 능력이 다른 능력에 비해 턱없이 부족하다(155). “괜찮지 않다. 괜찮을 리가 있겠니? 어른도 때로는 아이처럼 울어야 살 수가 있는 거란다. (후략)”(155) “(전략) 하지만…… 나는 네가 더 걱정이구나. 너도 언젠가, 어쩌면 머지않아, 아주 가까운 날에 너의 과거와 대면하게 될 거다. 그때 네가 감당해야 할 고통, 여태 마음 깊숙이 갈무리했던 기억들이 풀려나와 네 몸 구석구석에 독약처럼 퍼져 너를 아프게 할 고통이 나는 벌써부터 눈물겹구나. …… 사랑한다, 얘야.”(155-156) 나는 유정을 보고 알았다. 우리가 말을 더듬지 않는 이유는 상처가 없어서가 아니라는 걸, 혹은 상처가 치유되어서도 아니라는 걸. 사실은 더 큰 상처로 고통받기 때문일 수 있다는 걸. 유정은 어머니가 사라진 뒤 말을 더듬지 않았다. 어머니, 어머니. 그는 이 낱말을 더듬는다는 생각조차 괴로웠던 거다. 그 사실을 우리 모두 알았으나 누구도 입 밖으로 꺼내어 말하지 않았다. 나는 그들의 침묵이 정겨웠다. 유정도 그게 고마웠을 것이다(206). 상처가 있지만 상처에 짓눌리지 않는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인간들을 향한 저자의 시선이 따뜻하다. 쉽게 낙관하지 않지만 섣불리 비관하지도 않는, 결코 니힐리스트가 될 수는 없을 것 같은 인간에 대한 저자의 깊은 믿음이 가슴 속에 불어오는 한 줄기 바람 같다. 유정은 사람의 가슴에도 바람이 드나드는 통로가 있다고 했다. 바람이 몸을 관통하면서 수분을 가져가고 다시 불어올 때 수분을 품어 온다고 했다. 그렇게 사람은 살아 있는 동안 영원히 메마르지 않을 수 있다고 했다(125). “오, 이런! 대체 누가 너한테 이런 짓을 했단 말이냐. ……자, 이리 와서 보렴. 터키 늙은이가 방금까지 앉았던 의자다. 이 의자에서 일어나다 쓰러졌지. 자, 의자를 만져보렴. 이 더러운 인조가죽 안에는 질 나쁜 스펀지가 들어 잇단다. 하지만 그 덕분에 의자는 앉았던 사람을 기억하게 되지. 보렴, 누군가 엉덩이를 깔고 앉았다 일어나면 여기에 자국이 남는단다. 신기하게도 하트 모양이야. 신은 그렇게 우리가 가장 수치스러워하는 곳에, 우리의 일부이지만 자신은 볼 수 없는, 늘 타인이 아니고서야 들킬 수 없는 궁둥이 같은 곳에다가 이처럼 인생의 비밀을 감춰두는 거란다.” 나는 수없이 많은 사람이 엉덩이를 비벼댄 의자를 만졌다. 방금 전까지 하산 아저씨가 앉았던 그 의자에는 안나 아주머니의 말대로 하트 모양의 자국이 남았다(232). 바람의 풍화작용에 의해 사막이 될지라도 쓸쓸한 모래 알갱이가 서로 부비며 내는 소리에 위안을 삼으며 길고 뜨거운 낮과 춥고 막막한 밤을 견뎌내는 것, 그게 바로 인생이 아닐까? 사막의 의미를 재해석할 수 있는 그런 마음과 눈을 가진 이 작가, 따뜻하고 고맙다. 위로가 된다.
나는 고개를 돌려 충남식당을 보았다. 그 안이 훤히 들여다보였다. 사람들로 붐볐다. 웃고 떠드는 사람들로 가득한 충남식당이 쓸쓸해 보였다. 저토록 많은 이들이 즐겁게 술을 들이켜고 대화를 나누는데도 적막하기 이를 데 없었다. 사막이란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사막에 가면 마땅히 모두 모래가 되어야 한다. 잘게 부서지고 흩어져 무리 속으로 스며들어가야 한다. 영원히 쓸쓸한 모래 알갱이로 서로가 부비며 나는 소리를 위안 삼아 길고 뜨거운 낮과 춥고 막막한 밤을 견뎌야 한다. 그리고 점점 더 잘게 부서져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이다. 그런 게 사막이라면 유정의 말이 옳다. 이곳은 사막이 될 늪이다(127). 덧붙임. 개인적으로 가장 마음에 드는 캐릭터는 말을 더듬는 유정이. 유정이가 하는 이 말에서 작가의 위트와 유머를 느낄 수 있다. 특히나 나의 마지막 대사인 “더러운 사람들이군.”에서는 웃지 않고는 못 배긴다. 이 작가, 분명 선량하고 착한 사람일 거다. 참 예쁘다. 유정이가 학교에 다니는 이유가 궁금해서 물은 적이 있다. “넌 왜 교육을 받는 거지 ” “나, 난 소, 소설가가 될 거니까. 소, 소설가는 특권을 지, 지닌 사람이야. 대, 대신 그는 하, 한 가지 일을 해, 해야 돼. 사, 사람들이 증언하길 꺼, 꺼리는 걸 세상의 버, 법정에서 대, 대신 증언해야 하, 하거든. 화, 환자의 종기에 이, 입을 대고 피, 피고름을 빨아주는 의, 의원처럼 소, 소설가는 사람의 여, 영혼에 흐르는 피, 피고름을 닦아줘야 해. 너, 다, 다른 사람의 가래침이나 코, 코딱지를 먹을 수 있어 ” 나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거봐. 소, 소설가는 그걸 머, 먹는 사람들이야.” “더러운 사람들이군.” 나는 그렇게 대꾸했다(186-1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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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이 주는 신선함, 그 속에 깔려있는 인류애, 우정, 사랑, 희망, 역사 속의 아픔 등등을 표지가 보이는 귀여움 ( 잘 보면 엽기스런 얼굴들)으로 버무렸으리라는 기대는 처음 두 장을 읽으면서 사라진다. 화자는 중학생이었어야 하는 열댓살 먹은 남자아이고, 이미 고아원을 여러 군데 거쳤으며 몸에도 마음에도 깊은 상처를 품고 있다. 이 아이가 심드렁하게 그리고 날카롭게 던지는 말과 시선으로 이야기가 펼쳐지나 했더니 어느새 성인 남자의 목소리가 계속 들린다. 작가가 자기 목소리로 떠드는데, 수다 스럽다. 거의 독백의 수준으로 속도를 내는지라 독자인 나는 그저 따라갈 수 밖에.
문장은 평균 한 줄 길이로 짧고, 작가는 위트가 넘친다고 여겼겠지만 "~처럼", "~같이" 등의 직유법이 거푸 거푸 나오다 보니 신선함을 잃는다. 천명관 이나 이기호 작가의 발랄 속의 날카로운 진실이 여기엔 없다. 안타깝다. 더해서, 등장 인물들이 다 제각각이고, 행동들이 연결되지 않는다. 초반부의 안나 아줌마와 후반부의 그녀는 다른 사람같다. 그녀가 갑자기 목소리 톤을 바꿔서 교훈을 주는 장면은 생뚱맞기까지 하다. 각 인물들이 품고 있는 사연들은 툭툭 나와서 어느 하나 해결을 보지 못하고 단편 소설의 조연들처럼 한 가지 모습만 하고 서 있다. 또래로 보이는 세 소년 "유정", "나", "맹랑한 녀석"은 사춘기 소년이 아니라 성인 남자의 목소리로 말하고, 뜬금없는 사막타령이나 분홍 코끼리, 그리고 엉덩이의 하트 자국 이야기는 난감하다. 특히 말더듬으면서 동물의 언어를 이해하는 "유정"이야말로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안나아줌마는 얼핏 <자기 앞의 생>에서 모모를 품어주었던 로자 아줌마도 떠오르게 했지만, 그 둘의 사랑이 하산아저씨와 "나" 사이에서는 느껴지지 않는다.
온동네 사람들이 소풍겸 살생겸 나섰던 여행이 끝인가 싶었는데, 사족 처럼 이어지는 후반부 이야기들은 읽어내기가 힘들다. 어쩌면 처음 부터 이 소설이 언제, 어디에서 벌어지는지 종잡을 수 없어서 더 힘들었는지 모른다. 6.25 참전용사 터어키인 하산이 정육점을 하고 있으니 그의 나이 많아야 70, 그럼 이십대에 전쟁을 겪었어도 1990년대, 이슬람 전당이 있는 서울 이태원이 배경인가? 구체적이지 않은 개념적인 인물들이 개념적인 인류애를 떠벌이다, 스르륵 끝나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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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이슬람 정육점.
말 자체의 모순...
그렇지만, 하산 아저씨의 정육점이다.
하루에 꼭 5번씩(맞았나????) 기도를 하지만 그는 엄연히 정육점을 운영한다.
오호~! 그는 과연 돼지고기의 그러니까 삼겹살의 혹은 목살의 그 오묘한 맛을 알까?
어쨌든 그는 정육점을 운영하고 고아원에서 "나"를 데리고 온다.
하산 아저씨의 기괴한 모습에 "나"는 겁을 먹지만, 나는 곧 적응을 하게 된다.
터키 사람인 하산 아저씨, 그리스 사람인 야모스 아저씨, 안나 아줌마, 유정이, 맹랑한 녀석, 열쇠장이 아저씨, 대머리 아저씨, 이맘 아저씨...
각자 자신의 많은 사연을 가슴에 품은 사람들이 그렇게 하나인듯 하나가 아닌듯 아웅다웅 그렇게 함께 살아낸다.
함께 소풍도 가고, 다른 사람의 아픔을 옆에서 다독여주기도 하고, 가끔은 눈치도 보고... 그렇게 살아낸다.
코 끝 찡하게 하는 이야기들...
이 책은 "내"가 궁금해하는 것을 끝까지 직접 풀어주지 않는다.
그건 순전히 독자들의 판단인 것이다.
"나"는 누구이고, "나"는 왜 버려졌으며, "나"의 상처는 왜 생겼을까?
일요일 오후....
전기장판을 틀어놓고 뒹굴거리며 읽다가 나는 몰려오는 졸음을 참지 못하고 잠들었다.
2시간 정도 잤을까?
그렇게 보고 싶었던 엄마가 꿈에 나타났다.
엄마가 돌아가시기 전 병원에서의 모습으로...
나는 엄마에게 죽음을 맞이할 준비를 하도록 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엄마의 표정은 아주아주 평온했다.
그리고 꿈은 또 다른 내용으로 이어졌지만, 엄마의 표정이 잊혀지지 않는다.
나 역시 많이 평온해졌다.
안나 아줌마의 영향일까? 아니면 나도 이렇게 한 뼘 자라는 것일까?(응?)
자란다는게 꼭 겉으로의 성장은 아니다.
나의 유치하고 6살에서 멈춰있는 정신연령에 조금은 변화가 생길 것이다.
어른이 되겠진...
예전에 [위저드 베이커리]를 읽었을 때의 느낌과는 조금은 다른 그런 성장이 생겼다.
[위저드 베이커리]가 환상을 기반으로 해서 커가는 것을 그렸다면, [이슬람 정육점]을 거의 밑바닥에서의 경험들을 바탕으로 조금씩 자라는 것을 그렸다.
무엇보다 지은이의 언어 감각이 뛰어났다.
160쪽 식은 햇살이 고양이처럼 은밀하게 들어와 식당을 채웠다.
같은 표현말이다.
곳곳에 이렇게 서정적인 표현이 들어있다.
정말 놀랍다~!
그런데, 열쇠장이 아저씨의 분홍색 코끼리는 과연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
96쪽 "아이야, 너무 미워하지 말거라. 지금 우리와 함께 살아 있는 자들 가운데 백 년 뒤에도 이곳에서 숨 쉴 자는 단 한 명도 없단다. 우리 모두 이 아름다운 하늘과 땅과 사랑하는 사람을 두고 이곳을 떠나야 하는 존재들이다."
169쪽 쌀집 둘째 딸의 볼엔 여전히 손자국이 남았다. 볼에 남은 자국은 곧 사라지겠지만, 그의 영혼에 새겨진 손자국은 쉬이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208쪽 수명과 영혼은 상관이 없다. 우리에게 중요한 건 이 세상에 머무는 기간이 아니라 머무는 동안 무얼 어떻게 사랑하느냐이다. 그러나 나는 사랑도 모른다.
214쪽 너도 잘 알아야 한다. 우리가 사는 곳은 대한민국이 아니다. 그냥 여기는 자본주의라는 곳이야. 자본주의라는 녀석은 한마디로 버릇이 없단다. 너도 자본주의한테 예의를 기대해서는 안 된다. 상처받는 건 너일테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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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여름에 YES24 리뷰어 클럽에서 도서 당첨된 후 써야 했던 리뷰를 미루다가 이제야 작성한다. 낙엽이 지고 눈이 오는 계절의 변화 중에 오래 묵혀 둔 갑갑함을 비로소 해소하고, 시간의 틈 속에 쑤셔 넣어진 미안함을 풀어 헤쳐, 연체된 책임을 비로소 이행한다. 리뷰를 쓰지 못했던 까닭은 본 도서에 있기보다는 스스로에게 있는 바, 읽고 바로 소화해서 생각을 글로 옮겨 적는 일 자체를, 지극히 개인적인 연유로 인해, 그간 제대로 하지 못했음을, 출판사와 클럽 운영자에게 삼가 아뢴다. 첫 회독에 호흡이 엉켰다. 서사를 위주로 주제를 전개해나가는 구조가 아니었다. 상투적인 표현이 난무하는 ‘일곱 개의 기둥’만큼 지루하고 더딘 속도는 아니었지만, 단숨에 빨려 들어가는 매력적인 서사라 여기긴 힘들었다. 온몸에 흉터투성이인 고아 소년과 터키 출신 정육점 아저씨 하산, 충남식당 주인 안나,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그리스 출신 군인 야모스, 전쟁 3년 동안의 기억을 잃은 대머리아저씨, 무슬림 사원의 이맘, 쉬지 않고 떠들어대는 맹랑한 녀석, 3마디 밖에 못하는 열쇠장이, 소설가가 꿈인 말더듬이 유정, 쌀집 둘째 딸과 전직 레슬링선수 고수머리 청년, 주기도문을 잊어버린 전도사. 이러한 인물들을 중심으로 해서 전개하는 이야기의 얼개는 대략 이러하다. 고아 소년이 고아원을 전전하다 하산에게 입양되고, 안나 아주머니의 식당에서 밥 먹고 살면서 동네를 관찰하다가 식당이 휴업을 한 번 하고, 정육점이 돼지 콜레라로 의심을 받아 문을 닫는데, 돼지 도축하러 교외에 나갔다가 돌아와서는 건물주가 방 빼달라고 해서 충격을 받은 하산은 금식 기간 라마단에 숨을 거두고, 소년은 그 와중에 사랑을 배우고 자신을 알아간다. 작가가 이 문장을 읽는다면 매우 분노할 정도로 거칠게 요약을 했다. 절정 부분이 교외로 돼지 잡으러 모두 다 같이 소풍 가는 부분이고, 결말은 소년이 하산에게 사랑한다고 말을 하는 부분, 풍경에 겹쳐져서 적확히 서술되지는 않았지만 ‘내 몸에 의붓아버지의 피가 흐른다’라는 문장’과 전후 맥락을 보아하니 아마 하산은 사랑한다는 말을 들은 후 죽은 것으로 추정된다. 도입부터 전개까지가 조금 더뎌서, 빠른 호흡과 자극적 소재 중심의 현대 엔터테인먼트 소설에 익숙한 독자들로서는 매우 힘든 독서가 되지 않을 수 없겠다. 마치 고장이 난 자동차가 예상치 못할 적에 중간중간 급정지를 하듯 따라가기 힘든 불규칙적인 리듬을 갖고 있다. 하여, 이 소설은 조금 다른 방식으로 읽혀야 하는 것으로 보인다. 독특한 것은 인물군이 대조적으로, 노년층 혹은 소년층이다. (노년 : 하산, 야모스, 대머리, 열쇠장이, 이맘 그리고 안나) 소년(나, 유정, 맹랑한 녀석) 고수머리 청년과 쌀집 둘째 딸은 이야기 속에서 중요한 인물라기보다는 되려 소품 같은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에 청년층은 전무하다. 안나는 5,60대의 전형적인 한국 아줌마지만, 모든 인물을 아우르고 리드하는 가장으로서의 역할과 이야기를 길항하는 대표적인 인물이며, 굳이 분류하자면 소년층보다는 노년층에 가깝다. 소년과 노년. 이 두 가지의 그룹으로 나뉠 수 있는 인물들이 상징하는 것은 세대와 세대의 단절이다. 버림받고 소외 받은 자들이 모이는 한남동 뒷골목, 무슬림 모스크가 있는 이방인들의 거리에서는, 설사 그 거리에서 자란 소년도 번화가로 떠나, 청년이 없다는 것이다. 열정과 자신감이 넘치는 청년들은 그림자에 자발적으로 머물지 않아, 남겨진 자들은 소통의 부재 속에 외롭다. 소설의 몇 가지 두드러지는 특징으로는, 감각적인 문장과 풍부한 어휘력에 있다. 갓난아이가 뜬다는 ‘어섯눈’이 대표적이다. 전에 아트앤스터디에서 손홍규님의 문장론 강좌가 있는 것을 스크롤 긁다가 언뜻 본적이 있다. 그것을 떠올리고 나니 2회독에서는 감각적인 문장을 참 많이 발견했다. 누군가 토해낸 목젖처럼 분홍빛을 띤 돼지고기 살점. 격발하기도 전에 과녁에 꽂힌 탄환 같은 몰염치한 언어. 단순히 가볍게 생각할만한 글은 아니다. 그러나 문장력과 표현력은 상당한 반면 세부적인 묘사는 떨어진다. 맨 마지막 장 에필로그에 ‘연희문학창작촌’이라고 나와있다. 연세대 근처 서대문구 연희동에 있고 서울시가 운영하는 문학가들을 위한 집필 공간이다. 그곳에 박혀 집필한 글이라, 다른 리뷰어들이 많이 지적했듯 디테일은 떨어지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책을 덮고 나서도 하산과 야모스가 외국인인지 한국인이 구분이 되지 않고, 안나는 한국인 아줌마가 과연 맞는지, 주인공의 상처는 어떤 생김새인지, 충남식당 앞 거리의 모습은 어떠한지(열쇠장이와 대머리아저씨집과 쌀집의 위치와 더불어) 머리 속에 도저히 그려지지 않는다. 제목에 이슬람이 있지만 그닥 종교적인 냄새는 없고, 외국인이 등장하지만 이국적인 단어는 거의 없다. 말해주기보다는 보여주기 방식이며, 친절한 서사는 아니다. 그러나 이야기의 전개를 완전히 이해하길 포기하고, 책 자체를 흐름으로 받아들여 순간 순간 장면을 포착하여 감성을 받아들이는 식으로 읽는다면 작가가 의외로 인간에 대해 매우 깊은 통찰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현대인들이 상처 받은 소년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듯 주인공과 ‘안나와 하산’은 가시적인 상처를 갖고 있고, 부모가 가출한 유정과 부모로부터 가출한 쌀집 둘째 딸은 가정에서의 상처, 야모스는 과거의 실수로부터의 도피, 대머리는 전쟁으로 인한 부분적인 기억의 상실 등 모두 하나 둘씩 상처를 갖고 있다. 그 상처를 다루는 방식에서 저자의 묵직한 역량이 나타난다. 읽어보라. 시상식 때 눈물을 흘리는 사람을 이해할 수 없었는데 막상 자기가 올라가니 눈물을 흘리게 되더라는, 연말 방송3사에 나오는 연예인들의 말처럼, 상처를 인식하고 그것에 분노하고 이유를 찾고 해결하려고 노력하다가 포기해버리고 결국 끌어안고 살아가는 일을 해보지 않았다면 모를 일이다. 청소년 문학이란 무엇인가? 라는 것을 생각해 본다. 그간 한국문학계에는 작가가 청소년기를 반추하면서 쓰는 회고록적인 작품과 청소년들의 실상을 관찰하면서 ‘요즘 애들이란 쯧쯧’ 혹은 ‘요즘 애들은 이렇게 살아간다’의 관점으로 철저히 외부적인 시선에서 서술한 작품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생물학적 성장과 사회적인 성장이 동떨어지고, 부모로부터의 독립과 사회진출이 엇갈리게 된 현대사회에, 의식적인 자립이 온전히 이루어지지 않은 젊은 어른 Young Adult들을 타겟으로 삼은 작품은 없었다. 다시 말해 생물학적 성장기의 나이에 있는 이들이 등장하는 계몽적인 성장소설이 다수였던 것이다. 해리포터의 성공비결에는, 10년 동안 독자와 함께 커나가는 성장 소설로서의 의미가 크다고 생각할 때, 주인공인 청소년들의 입에서 어른인 작가의 목소리가 묻어나는 소설은 청소년이 등장하는 성장소설 정도였으리라. 해리포터에서도 계몽적인 언도는 전적으로 교장인 덤블도어의 몫이다. ‘이슬람 정육점’ 주인공은 10대 초반의 소년으로 추정되건만, 보편적인 의미로서의 청소년문학, 즉, 성장소설이라 해석하기 어려운데 그 까닭은 첫째로는 소년과 소년의 친구들이 전혀 그 나이다운 혹은 그 나이 언저리에 있는 아이들이 하는 행동과 말을 보여주지 않는다는 데 있고, 둘째는 청소년을 계도하는 인물로 해석할 수 있는 안나와 하산이 ‘어쨌든 학교엔 가야해’ 외에는 계몽적인 가르침을 주지 않고, 셋째로는 결말에서 주인공이 ‘이제 모든 것을 깨달았어. 새로운 삶을 살거야’ 라고 읆조리는 보편적인 해피엔딩이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게다가 호흡이 자꾸 엉키고, 순우리말이 많이 나와 중고등학생들이 읽기엔 무리가 있다. 그러나 청소년이 등장해서 그들의 입 혹은 계몽적인 인물의 입을 빌려 어른의 입장을 전하는 소설에 비해서 이슬람 정육점이 가지고 있는 매력이라면, 이미 몸은 커버린 2,30대 정신적인 소년들이 인간의 모호함과 자신의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법을 배우는 것에 있다. 소년이 등장한다고 다 청소년소설은 아닌 것이다. 또 다른 매력이라면, 정신적 깨달음과 성장이 부귀영화로 귀결되는 종전의 진부한 플롯에서 벗어나, 신기할 정도로 무덤덤한 결말을 보여주는데 있다. P237. 처음으로 주인공은 사원에 가서 하산아저씨처럼 기도를 한다. 순간, 주인공은 훗날 이 순간을 반추할 것을 깨닫는다. 역사가가 역사를 재구성하듯 자신의 기억도, 재현될 때마다 탈각과 정의를 되풀이할 것을 안다고 말한다. 겉으로 보기에 아무런 변화는 없다. 오직 선승의 돈오와 같이 내적인 깨달음뿐인 것이다. 내면적인 상처를 돈, 명예, 지위 등의 욕망을 채움으로써 해소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 보내며, 자신을 낮추고 비우면서 해소하는 것이다. 이 신선한 결말이 가져다 주는 인상은 시쳇말로 ‘대박이다!’ 인맥은 이렇게 넓히고, 공부는 이렇게 하고, 어쩌구 하며 남들에게 이래라 저래라 하는 거짓선생들은 삶에 영향력이 적다. 아플 때 같이 있어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안나는 주인공을 품어줄 수 있고, 하산은 아주 적은 량의 말로도 영혼을 공명시킬 줄 안다. 침묵과 인내를 안다는 점에서 이들이 진짜 선생이고, 상처의 치유를 위해 아무 말 없이 같이 있어준다는 점에서 진정한 가족이다. (청소년 혹은 성장) 소설의 외연을 넓혔다는 데 큰 의미가 있을 성 싶다. 도서의 표지나 출판사 리뷰에는 성장소설이라기보다는 ‘성장기’라는 표현을 썼는데, 독자가 소년과 함께 동시에 커간다기보다는, 이미 몸은 다 자란 현대의 영 어덜트들이 책을 읽고 정신적으로 성장하는 견인차의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2회독 이후에서는 더딘 서사전개 속에서 조금 더 많은 것을 발견한다. 굉장히 빽빽하게 상징적인 소재와 대화 등을 집어 넣었다. 예컨대, 1. 식당이 금일휴업이라는 간판을 내건 뒤 더 붐빈다는 것. 2. 열쇠장이의 등장 타이밍. 그는 이 세가지 말만 한다. 누구냐? 코끼리. 어떤 코끼리? 분홍색 코끼리. 뭐 하고 있나? 지나가고 있다. 어디로? (응답 무). 3. 잠든 얼굴이 아이와 같다는 것. 특히 대머리 아저씨. 그는 충격적인 전쟁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느라(이 부분은 작가가 의외로 친절하게 설명했다) 뇌가 3년의 기억을 지웠고 그 트라우마에 새벽마다 목이 터져라 노래를 부르고, 각종 전투의 디테일을 외워서 전우회 모임에 가서 자랑한다. 4. 주인공은 사람의 얼굴을 스크랩을 한다는 것(자신과 인간의 얼굴을 찾고 있다) 5. 사람들이 돼지 콜레라 루머에 정육점으로 모여들고 하산은 침묵하고, 주인공이 생고기를 먹는 다. 정당한 항변을 하지 못한다는 것, 스스로 고통을 감내하는 데 익숙하다는 증거. 역시 상처 받는 데 익숙하지 누군가에게 상처 주는 데에는 서투른 사람들이다. 우리에게 남을 위로해줄 능력이 다른 능력에 비해 턱없이 부족하다. 6. 상처의 원형과 표피적인 의미와의 괴리. (어디서 누구에게 받은 상처인지 모르는 의문의 상처가 몸에 있는 소년은, 정신적인 상처가 가득한 한국사람을 상징한다) P208 사람 내부에도 사막이 있다. 내가 미처 돌보지 못한 내 몸의 어떤 곳들은 이미 사막이었고, 대체로 그곳은 마음이라는, 눈에 보이지 않고 손으로 만질 수 없는 부분이었다. 몸의 흉터는 세월이 만든 지형이었다. P54. 어차피 나는 고향이 없었다. 그리워해야 할 원형의 풍경도 회귀를 꿈꾸게 하는 낯익은 사물에 대한 기억도 없었다. 그러므로 어딜가나 내겐 고향이고 모국이다. 누굴 만나든 그가 바로 내 오랜 벗이고 가족이다. 그건 곧 어떤 곳도 나의 고향이 아니며 그 누구도 나의 벗이나 가족이 아니라는 뜻이기도 하지만. 상처의 치유는 유예된다. 태연한 척 하지만, 타인의 시선에서 자유로울 수 없고, 그래서 낫기도 전에 새 상처가 생긴다. 그런 식으로 상처가 증식해서 상처투성이가 되면, 누군가에게 상처를 되돌려주기 시작한다. 7. 맹랑한 녀석이 하는 뜻도 모를 말들. 그는 쉴 세 없이 떠벌리지만 유정은 더듬거린다. 정말로 이 세상에서 소리 없이 사라지고 싶다면 이 세상을 살 만한 가치가 있는 곳으로 여겨야 하고, 살고 싶다는 강렬한 욕망을 지녀야 돼. 그런데 나는 아무런 욕망이 없어. 그래서 죽지 못해. 억울해. 내가 태어나고 싶어한 것도 아닌데. 대체 누가 왜 내 엉덩이를 걷어차 이 세상으로 처넣은 걸까? 8. 고아원 원장. 또 다시 전쟁이 일어난다면 이 사업도 번창할 거다. 단순히 아이들을 사업도구로 생각하는 천박한 태도. 그래서 아이들은 스스로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자해한다. 작가의 문학관에 대해서도 엿볼 수 있다. P187 소설가는 특권을 지닌 사람이야. 대신 그는 한 가지 일을 해야 돼. 사람들이 증언하길 꺼리는 걸 세상의 법정에서 대신 증언해야 하거든. 환자의 종기에 입을 대고 피고름을 빨아주는 의원처럼, 소설가는 사람의 영혼에 흐르는 피고름을 닦아줘야 해. 너 다른 사람의 가래침이나 코딱지를 먹을 수 있어? 거봐, 소설가는 그걸 먹는 사람들이야. , 라며 유정의 입을 통해 빌려 말한다. 날개에 나와있듯 2008년에 제비꽃서민소설상을 수상한 것으로 보아 그는 진정 ‘없는 자를 위로하는 문학’을 하려는 다짐을 한 것이다. 더러운 사람들이군, 이라고 주인공은 말했다. 아마 그것은 세상의 반응으로, 작가는 이미 자기가 쓰려는 문학이 평론가들의 찬사를 받거나 대중의 열광을 받는 길과는 멀다는 것을 의미하리라. 그의 글이 단 한 명의 상처받은 어린 양에게 읽혀 눈물을 흘리고 감동을 받는다면 그것으로 일생이 족하다고 믿고 있을 것이다. 많은 독자들에게 커다랗게 느껴지는 몇 가지 미흡한 부분만 제한다면, 서재 어느 한 구석에 소장해두어, 인생의 고독이 물밀 듯 밀려오는 시기에 고요한 물 위에 번지는 둥근 파장과 같이 다가오는 아름다운 깨달음을 줄 수 있는 소설 중 하나임을 믿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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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 정육점이라니! 참으로 어울리지 않는 두 단어의 조합이다. 이 책의 표지그림과 제목만 보고 유쾌하고 밝은 내용일 것이라는 선입견을 가지고 이 책을 읽기 시작했다.
이 책은 '상처'받은 사람들이 주인공이다. 부모에게 받은 육체적 상처가 있는 주인공 나 한국전쟁 참전후 계속 한국에 살게 되면서 정육점을 운영하는 터키출신 하산 아저씨 그리스 사촌일가를 적으로 오인해 몰살하고 한국으로 도망쳐 온 야오스 아저씨 남편의 폭력을 피해 도망쳐 나온 충남 식당 안나 아주머니 소설가가 꿈인 말더듬이 유정이까지.. 모두 사람들에게 상처 있는 사람이라는 편견을 받고 있다.
나는 유정을 보고 알았다. 우리가 말을 더듬지 않는 이유는 상처가 없어서가 아니라는 걸, 혹은 상처가 치유되어서도 아니라는걸. 사실은 더 큰 상처로 고통받기 때문일 수 있다는 걸. 유정이는 어머니가 사라진 뒤 말을 더듬지 않았다. 어머니, 어머니. 그는 이 낱말을 더듬는다는 생각조차 괴로웠던 거다. 그 사실을 우리 모두 알았으나 누구도 입밖으로 꺼내어 말하지 않았다. 나는 그들의 침묵이 정겨웠다. 유정도 그게 고마웠을 것이다.
이 책은 상징적이고도 은유적인 표현을 통해서 읽는이가 스스로 말하고자 하는 바를 판단하도록 해석을 독자의 몫으로 넘겨준다. 그래서 읽고나면 소설의 줄거리보다는 작가가 그려낸 인물들과 비유적인 표현이 더 기억에 남는다.
주인공인 '나'는 늘 안나 아주머니가 운영하는 충남식당에서 사람들의 얼굴을 신문 스크랩 한다. 그리곤 후에 스크랩해놓은 인물들을 여러사람에게 보여주고 스크랩된 인물들의 국적이 어디인지를 물어본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엉뚱한 국적을 대답하곤 한다.
소설 밖인 현실세계에서도 이와 비슷한 이야기들을 종종 들을 수 있다. 그 남자는 정말 성실하고 착한 사람이었는데 알고보니 사기꾼이었다든지 우락부락 무섭게 생긴 사람이어서 아이들이 무서워하는데 사실은 아이들을 엄청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식의 편견을 깬 사람들의 이야기 말이다.
나도 처음부터 사람을 대할 때 선입견을 가지고 판단하는 경우가 많다. 심지어는 이 책을 고를 때에도 제목과 표지의 유쾌함에 이끌려 가벼울 것이라는 편견으로 이 책을 마주하게 되었다. 이 책이 이렇게 조금 무거운 주제인줄 알았더라면 아마도 고르지 않았을 것이다. 편견을 가지고 세상을 바라보면 세상은 내 시야에 있는 것 밖에 바라볼 수 밖에 없다. 우물 안 개구리로는 살지 않기 위해서 어린아이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연습을 해야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