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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여 년 전에 이 책을 읽었었다. 진중권 작가를 좋아하는 지인의 추천이었을 것이다. 딱히 이 책을 권해준 것은 아니었는데 도서관 책꽂이에 꽂힌 책 중에 이 책에 눈이 자꾸 갔다. 아마 '앙겔루스 노부스? 이게 무슨 뜻이지?'이런 단순한 호기심이었을 것이다. 참 희한한 것이 책에는 그 답이 분명 있는데 십여 년이 흐른 지금 나는 다시 묻는다. '앙겔루스 노부스? 이게 뭐였더라?'라고. 이 책을 처음 읽고 나서 진중권의 책을 찾아 읽기도 했다. [교수대 위의 까치], [서양 미술사] 등.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했다. 분명 [앙겔루스 노부스]를 읽고는 지인이 왜 진중권을 좋아하는지 알 것 같았는데 다른 책에서는 [앙겔루스 노부스]가 흥미있었다는 것조차 아리송해졌다. 그리고 우연히 아트북스의 서평 이벤트로 인해 다시 읽게 되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책은 저자의 필력이 아주 잘 느껴지도록 흥미롭다, 그리고 일반 독자들도 충분히 이해하기 쉽도록 쓰여졌다.
총 10장으로 구성된 본문을 읽기 전에 2판의 서문을 참고했다. 1판의 서문보다 더 친절해졌기에 읽어나가면서 중심을 잃지 않는데에 도움이 되었다. 그는 10편의 에세이에서 존재미학과 생태미학으로서의 '숭고'의 개념을 수시로 노출한다. 그는 이를 두고 '확장된 숭고'의 다양한 측면이라고 말했고, 그를 통해 '숭고'라는 말이 지닌 아름다움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새로운 것을 공감하며 알게 된다는 것은 무척 설레는 일이다. 하지만 이 책의 리뷰를 어떤 식으로 써야하는가에 대해서는 어려움이 있다. 유난히 밑줄도 많고 책 한 쪽에 끄적거린 부분이 많아 그 부분들을 정리해보는 것으로 대신할까한다.
1장에서 플라톤의 미학에서 '미의 이데아'을 쾌락을 추방하는 것이 아닌 길들이는 원리라고 말하며 진중권은 플라톤의 미학이 포스트모던의 정신이라고 말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플라토닉러브는 플라톤과는 상관이 없다고 말한다. 기존의 틀을 엎는 발상인데 설득력이 있다. 쾌락을 무조건 거부시하지 않고 내가 주체가 되어 쾌락을 길들인다니 인간의 존재가 굉장히 있어 보인다. 하지만 저자가 말하는 포스트모던은 쾌락을 길들이는 수준 그 너머인 것 같았다.
존재미학. 철학과 섹스가 하나가 되어 미를 향해 상승하는 영적, 육체적 생식의 시대. 삶이 예술이 되고, 모든 인간이 예술가가 되는 시대. 그리하여 예술가가 되려고 예술가가 될 필요가 없는 시대. 인간이 창조자가 되어 자기 앞의 생을 예술작품으로 아름답게 만들어 가는 시대. 우리의 '포스트모던'은 왜 그런 시대를 열지 못하는 걸까? (42쪽)
또한 2장에서 플라톤이 피그말리온의 꿈이 이루어지던 마법의 시대와 과학의 시대 그 사이에 있다고 한다. 우리가 플라톤의 시대로 돌아가는 길, 그것을 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예술'인데 이것이 바로 미메시스의 힘이라고 말한다. 옛사람들이 사물에까지 영혼을 부여했다면, 우리는 영혼까지도 사물화한다.(65쪽)는 그의 말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 무척 안타깝다. 6장에서 나오는 생명과 신체의 도구화, 화폐화에 대한 씁쓸한 이야기들이 이어지는데 그중 니체의 행동이 무척 인상적이다. 데카르트의 먼 훗날 사람인 니체가 어느 날 지나가던 말을 끌어안고 눈물을 터뜨리며, 그를 기계로 간주한 데카르트를 대신하여 사죄를 했다고 하는데(159쪽) 낡은 시대의 오류를 벗어나고자 하는 그의 행위에 대하여 우리의 낡은 시대에 대한 오류를 벗어나고자 노력할 이의 눈물이 아쉽게 느껴졌다. 8장과 9장에서 나오는 숭고의 생태론적 미학, 자연미에 대한 이야기는 읽는 이를 숙연하게 만든다.
책을 읽다보면 사제간임에도 불구하고 그 철학이 상당히 다른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만날 수 있다. 플라톤이 마법과 과학의 이행기라면, 아리스토텔레스는 과학(이성)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는데 3장에서는 '시'에 대한 상반된 입장을 드러낸다. 플라톤은 시의 힘을 너무나도 강하게 믿고 있어 시인들이 신을 격하시킬 수 있다고(시인을 능력자로 보고 있다.) 생각하여 시가 위험한 것이라고 믿는 반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시는 그저 기술(테크네)일 뿐이고 영향력이 별로 없으니 이를테면 뻥을 더 쳐도 된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신적 힘과 기술이라는 명확하게 상반된 입장인데도 아이러니하게도 뭐가 더 시인에게 좋은지는 모르겠다. 저자는 물론 플라톤의 시대 및 그 이전에 가진 시의 힘을 더 좋아한다. 나는 고민을 좀더 해봐야겠다. 플라톤의 시대라면 모를까 그 이전까지 받아들이기에 나는 너무 아리스토텔레스적이 되어버렸나 보다. 그래도 에술에는 규칙보다는 +a가 더 중요하다고는 생각하고 있다.
4장 이후에는 '숭고'의 개념이 본격적으로 드러난다. 이 개념은 롱기누스라는 사람이 쓴 [숭고에 관하여]에서 비롯된 것인데 이후의 다른 편에서 보면 프랑스와 영국에서 각각 다르게 받아들였다고 한다. 아마 요즘도 그렇듯이 자기들 생각에 맞는 부분만 끼워넣으면서 쓴 모양이다. 진중권은 포스트모던을 바로 숭고의 미학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숭고는 인간 내면의 파토스(폭풍우)를 일으켜야 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자칫 이것을 아무 데나(이를테면 정치적인 일)에 갖다붙이면 매우 우스꽝스러워진다는 점도 경고한다. 최초의 번역자인 부알로가 고전주의 추종자라는 점에서 프랑스에서의 '숭고'의 개념은 오역에 가깝지 않을까 싶다. 7장에 나오듯 롱기누스의 정신은 반고전주의 즉 바로크 옹호자들의 입장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진중권의 표현대로라면 '접신'의 개념으로.
내가 처음 디오게네스에 대하여 깊게 인상이 새겨진 책이 바로 [앙겔루스 노부스]이다. 한 편의 에세이에 디오게네스를 할애해준 점이 다시 읽어도 무척 고맙다. 지금은 그때와 달리 그에 관해 이것저것 많이 주워들은 입장이라 놀라는 것은 좀 덜하지만 지금이나 십여 년 전이나 그는 존재만으로도 충분히 빛이 난다! 아마 내가 보기엔 디오게네스가 곧 숭고이다. 억지로 무언가를 만들어내지 말지어다. 그 점이 디오게네스를 볼 때마다 내가 파토스를 느끼는 지점이다.
![]() 앙겔루스 노부스, 파울 클레의 천사. 진중권은 이 그림을 보고 눈물을 흘렸다고 하는데 이를 두고 그림을 보기 전에 읽은 관련 글 때문이라고 말해서 그런가 나도 처음 이 그림만 봤을 때에는 묘한 느낌만 있었지 어떤 감정이 없었는데 진중권의 글을 읽다보니 괜히 울컥해진다. 내 마음이 착해진다고 해야할까? 헛된 저항을 하는 날개를 편 천사라니! 답답하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날개조차 펴지 못하는 나 자신에 비하면 그는 얼마나 위대한가를 떠올릴 때 울컥해진다. 지금 나 대신 수많은 날개를 펴고 있는 이 땅의 모든 분들의 숭고함에 대해 울컥해지는 것이다. 진중권이 포스트 모던을 이야기하면서, 숭고를 이야기하면서, 존재미학과 생태미학을 이야기하면서 왜 이 그림의 제목을 책의 제목으로 했는지 공감이 된다. 어쩌면 이 책은 날개를 잃어버린 우리들이 날개를 편 천사에게 바치는 그리움의 편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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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에도 언급한 적이 있지만 나는 늘 물리학과 철학, 미학 책 앞에서는 주눅들고 한없이 작아지는 걸 느낀다. 열심히 읽는다고 읽어도 개념에서부터 이해가 안되는 말이 수두룩한지라 이 분야 책들은 읽기 전부터 마음부터 다잡게 된다. '앙겔루스 노부스(Angelus Novus)'는 탈근대의 관점으로 다시 읽는 미학사라는 부제가 달려있었다. 제목에서부터 벌써 만만찮은 기가 느껴졌다. 철학을 넘나드는 어려운 내용을 감수해야하겠구나 하고 각오단단히 하고 책을 펼쳤는데, 그런 가운데에서도 믿는 구석이 하나 있었다. 바로 필자가 진중권이라는 것. 독자들이 이해하기 쉽게 내용을 전개하는 필자였기에 과감하게 이 책을 선택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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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에서도 알 수 있지만 이 책의 키워드는 '탈근대'라는 개념에 있다. '앙겔루스 노부스'는 화가 파울 클레의 작품이고. 그렇다면 '근대'의 관점이 문제라는 것인데, 미학에서 말하는 근대적 관점, 탈근대의 관점에서는 예술을 바라보는 관점이 어떻게 다른지, 예술과 인간의 삶은 어떻게 연결이 돼야 하는 것인지를 풀어가고 있다. 예술이란 인간의 취향과 우아함을 드러내는 상품이나 장식품이 아니라는 말에 고개가 끄덕여졌고 '앙겔부스 노부스'를 본 진중권의 감상을 읽으면서 탈근대적 관점이란 어떤 것인지 구체적으로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앙겔루스 노부스'는 천사 그림이다. 우리가 보통 머릿 속에 그려지는 아름답고, 우아하게 날개를 펼치고 있는 그런 고정적인 이미지의 천사가 아니다. 노부스란 말이 붙었으니 우리 말로 풀면 신천사(新天使)인데, 그렇다면 왜 진중권은 이 작품을 통해 탈근대의 관점을 언급하고 있는 것일까.
근대를 지배한 것은 이성과 합리성이었다. 그리고 주체와 객체, 인간과 자연 등 이분법적으로 세상을 바라봤는데, 이런 근대적 사고는 예술을 대하는 태도에도 투영됐다. 예술을 '가상'으로 규정하면서 예술과 현실 사이에 넘을 수 없는 높다란 벽이 쌓여진 것이다. 그리이스 시대에 예술의 본질은 없었던 것을 있게 하고 그럼으로써 새로운 삶의 방식을 만들어내는 것이었다.또 그럼으로써 세계를 새로운 눈으로 볼 수 있게 해주었고, 한걸음 더 나아가 새로운 사회적 현실을 창조하는 힘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한 마디로 예술은 현실을 변하하게 만드는 진보의 원동력이 됐던 것이다. 이랬던 예술이 근대 들어서는 현실과 대립된 가상의 세계로 취급됨으로써 현실을 창조하는 영감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술과 현실은 분리돼 버렸다. 현실과는 상관없는 향유의 대상이나 감상하는 이의 취향과 기호를 드러내는 고급한 문화상품쯤으로 치부돼갔다는 것이다. 일리가 있다고 생각됐다. 예술을 통해 영감을 얻고 삶을 아름답게 변화하려는 예술을 닮으려는 생각은 점점 사라져갔던 것이다.
이런 점을 극복하기 위해서 근대의 관점을 훌훌 벗어던질 필요성이 등장하는 것이다. 인간은 예술의 닮아야 한다고, 예술은 단순한 가상이 아니라, 새로운 현실을 창조함으로써 인간이 그 새로움을 닮고자하는 의지를 일으키게 하는 원천이 돼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의 삶은 예술을 닮아야 한다는 것인데, '엥겔루스 노부스'는 그런 면에서 탈근대적 관점에서 읽을 때, 인간에게 끊임없는 날개짓을 추구하라고 권유하는 것처럼 보인다. 설사 꿈꾸는 천상에 도달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현실에서 벗어나는 저항의 날개짓을 멈출 수 없다는 것을, 나아가서는 현실에 굴복하지 않고, 자신의 삶을 아름답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인간이 예술을 닮아가야 한다는 것이고, 그렇게 인간이 닮아가는 예술이 바로 탈근대적 관점에서 바라보는 예술의 존재라는 것이다. ![]()
이런 결론이 나오기까지 '앙겔루스 노부스'는 수많은 시대를 거쳐왔고, 그러는 동안 수많은 미학적 논의들을 접할 수 있어서 흥미로웠다. 수천년전 그리스의 철학과 미학이론에서부터 르네상스, 근대를 건너오는 과정에서 인간들이 어떻게 예술을 대해왔고, 바라봤는지 섭렵했는데, 진중권 특유의 표현력과 적절한 예시는 어려운 논의를 이해하기 쉽게 해주었다. 책을 덮으면 어떨지 모르겠지만 읽는 동안에는 그렇게 어렵게 느껴졌던 개념이나 이론이 머리 속에 쏙 들어왔다.
'앙겔루스 노부스' 는 예술의 본질을 대하는 관점에 대해서 진지하게 논의하고 있었고, 충분히 공감이가고, 생각할 거리를 많이 포함하고 있었다. 인간을 더욱 아름답게, 인간의 삶을 변화하고, 풍성하게 만드는데 일조하는 예술이라면, 그렇게 예술이 그저 감상의 대상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인간의 삶 속에 내려앉아 스며들 수 있다고 설명하고 있고, 예술 속에서 시대와 현실을 감지할 수 있었다. 나는 진중권의 논리에 설득됐고, 펜이 칼보다 강할 수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구나 싶었다. '앙겔루스 노부스' 속 천사가 멈추지 않고 날개짓한다고 생각하니, 주먹이 불끈 쥐어졌다. 가슴 한구석이 단단해지는 것 같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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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권은 플라톤의 에로스로부터 발터 베냐민의 앙겔루스 노부스에 이르기까지 미학사의 큰 흐름을 몇 개의 토픽에 실어 개관하고 있다. 그런데 맥락이 하나의 결로 쭉 이어진다. 진중권의 확고한 기획이 글에 일관되게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미학의 관점과 유용성을 탈근대의 시각에서 바라보고 해석하고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것이다. 근대의 인식론적 미학이 지식 중심에 그쳤다면 탈근대의 미학은 존재미학, 즉 우리의 삶에 적용할 수 있는 생생하게 살아 있는 미학이어야 한다고 진중권은 힘주어 발언한다. 탈근대의 미학은 예술과 삶의 혼연일체, 불가분적 원융이어야 한다고 말이다. 파울 클레의 신천사, 앙겔루스 노부스를 애틋하게 바라보던 발터 베냐민도 아마 그런 심정이었을 것이다.
존재미학, 철학과 섹스가 하나가 되어 미를 향해 상승하는 영적, 육체적 생식의 시대. 삶이 예술이 되고, 모든 인간이 예술가가 되는 시대. 그리하여 예술가가 되려고 예술가가 될 필요가 없는 시대. 인간이 창조자가 되어 자기 앞의 생을 예술작품으로 아름답게 만들어 나가는 시대. 우리의 ‘포스트모던’은 왜 그런 시대를 열지 못하는 걸까?(42쪽)
독립된 토픽별로 이어가는 얘기들이 결국은 하나의 논점으로 수렴하는 논리전개가 돋보이는 이 책은 여러 면에서 읽는,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진중권이 선별하여 중간 중간 배치한 그림들을 감상하는 재미도 여간 즐겁지 않다. 가장 압권인 것은 각 장별 마무리 멘트라 하겠다. 이를테면 회화를 모방(이미타티오)이 아닌 무에서 유를 창조해내는 미메시스로 보자는 제안을 담고 있는 대목은 우리의 상상을 한 차원 상승시키는 자극제라 하겠다.
지금은 꿈으로만 존재하는 인간과 자연의 새로운 관계, 양자의 형등한 소통. 아직 존재하지 않는 이 가상이 언젠가는 현실로 존재하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예술, 미메시스, 피그말리온의 꿈, 우리 시대의 마지막 구원(67쪽)
마지막 장 앙겔루스 노부스를 마치며 진중권은 우리의 암담한 현실을 나치 치하에서 불가항력적 상황에 버둥대던 베냐민의 그것으로 오버랩시킨다. 그리고 어쩔 수 없는 상황 가운데서도 끊임없이 날갯짓을 해야 하는 천사의 처지를 설명하며 우리의 분발을 환기하고 있다.
앙겔루스 노부스, 저 한 장의 그림은 내게 단지 미적으로 지각해야 할 인식론적 ‘대상’이 아니다. 나와 존재론적 닮기의 놀이를 하기 원하며 그 슬픈 눈으로 나를 물끄러미 응시하고 있는 또 하나의 주체, 무력하게 머리만 자란 또 하나의 멜랑콜리커다. (261쪽)
다소 감정과잉이랄 정도로 미학과 삶을 불가분의 관계로 인식하고 있는데 어쩜 그래서 더 절절하게 다가오는지도 모르겠다. 냉랭하게 박제된 지식이 아닌 살아있는 실천 지침으로서 미학을 보여주고 있으니 덩달아 뜨거워지며 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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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참 잘 지은 책이다. 10년 전의 작품을 재발매 하면서도 대중적 인기를 끌고 있는 지은이 본인이 ‘거기에 고칠 만한 내용도 없다’라고 쓴 것을 보면 말이다. 학자적 자존심이 있다면 대중에게 선보일 책 속의 불편함을 그냥 둘리는 없다. 이 책이 개인적으로 소장할 일기장 정도가 아니라면 말이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저자의 태도로 볼 때 ‘앙겔로스 노부스’는 잘 된 작품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