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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을 위시해 그 곁가지 감정을 지나치게 죽음에만 집중 조명한 듯해 다소 마음을 무겁게 만드는 책이다. 전쟁, 자연재해, 테러, 폭력 등으로 누군가 죽어야만 슬픈 것이냐고 묻고 싶다. 그런 고로 나는 죽음과 상실을 떠난, 조금은 다른 것에서 슬픔을 끄집어내고 싶다. 자아실현이나 혹은 자아정체성과 같은. 나는 누구이고 뭘 원하고 원하는 그것이 진정 내가 원하는 것이 맞는지 등등에 관한. 슬픔이란 주기적으로 찾아오며 극히 정상적인 인간의 한 감정으로 우리의 심신이 스스로 안정을 유지하려는 일련의 자가 회복 과정이다. 이 결론을 도출하기 위한 사례를 근거로 심리학자들의 다양한 이론이 주구장창 열거된다. 서평이란 것이 책에 대한 평만을 의미한다면 오늘 나는 서평을 과감하게 포기하련다. 대신 극히 사적인 내 ‘슬픔’을 지저귀고 싶다. 오늘 지금 이 시간만큼은. 분출해내는 슬픔의 크기와 양만큼 회복속도도 빠르다니, 이 정보하나는 미리 밝혀둔다. 아! 그렇지. 슬픔을 밝히고 공유하는 것도 아주 정상적인 회복과정이란다. 그렇단다. 어느 심리학자가. 그러니까 내 슬픔이야 어찌됐든 궁금하지 않더라도 부디 나에게 그대의 시간 중 몇 분만 할애해주시길. 더불어 맑고 청아한 새의 지저귐이 아니어서, 반가운 호기好氣를 전염시키지 못해 죄송한 마음도 전한다.
이 책 서두에서도 언급한 ‘사별’이 내 슬픔의 시작이었는지 모른다. 일곱 살에 아빠가 돌아가셨고, 엄마는 아빠의 마지막 모습을 보라면서 우리 세 자매에게 작별 인사를 요구했다. 하얀 천이 벗겨지면서 드러난 아빠의 얼굴을 보자마자 언니와 동생은 멀리 도망쳤다. 나만이 아빠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병원의 오진으로 남동생이 죽은 지 꼭 1년만이었을 것이다. 슬펐을까? 아니, 난 슬픔을 느낄 만큼 그들(아빠와 남동생)과의 아련한 추억이 없었다. 아빠는 살아생전 술을 즐겨 드셨고 유독 아들에 대한 정이 많은 분이셨던 듯하다. 줄줄이 딸 셋을 두고 아들을 바라던 끝에 보게 된 남동생을 시시 때마다 목마를 태우곤 하셨으니까. 여하튼 그 당시의 난 호랑이같이 무서운 엄마와 가난이 던져줄 어떤 것에 알 수 없는 공포감을 느꼈다. 아빠가 없는 빈자리를 메우기 위해 증가될 엄마의 지악스러움도 내 공포감의 무게를 더했다. 그때 어쩌면 슬픔도 풍족하게 사는 사람들이나 누리는 호사라고 막연하게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여튼 심리학자들은 감정을 잘 드러낼수록 그 감정에서 더 쉽게 빠져나올 수 있다고 말한다. 허나 그 시절 나는 드러낼 감정도 빠져나올 곳도 없는 그저 살기 막막할 정도로 가난한 집 ‘둘째딸’에 불과했다.
그 가난한 집 둘째딸이 이제 살기엔 좀 괜찮은 주부가 되었다. 그런데 사는 게 전혀 괜찮지 않다. 슬프고 아프고 힘들고 고독하다. ‘부끄러운 대처’ 혹은 ‘자기본위적 편향(self-serving bias)’이야기를 좀 해볼까. 어떤 대상에 대한 인식을 왜곡하거나 과장함으로써 우리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작용시키는 경향을 의미한다. 자신이 거의 관여하지 않았던 일을 본인의 공으로 돌리거나, 자신이 한 일에 대해 책임을 부정하고 어떤 상황이나 다른 사람 탓으로 돌리는 것은 자기본위적 편향의 가장 대표적인 예다(p147). 나는 소위 ‘작가지망생’이다. 작가란 것이 참으로 되기 힘든 직업인데 되는 사람은 잘도 된다. 내가 되고자 하면 그 과정이 너무 되고 험난한데 남이 될 땐 왜 그렇게도 쉽고 간단해 보이는지... 이때 나는 위에서 말한 바로 그 자기본위적 편향을 보이며 자위自慰하게 되는 것이다. 내가 작가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당신이 된 거야 혹은 일류대에 문창과 출신에 당신의 미모가 더해져 된 걸 거야.
약간 왜곡된 생각은 행복이나 자신감, 그리고 좀 더 높은 수준의 동기나 성취감을 지속시키는 능력 등 건강에 긍정적인 영향을 준다(p149). 이런 솔깃한 글로 저자는 내 슬픔에 유효적절한 위로를 해주기도 한다. 그러나 이대로 저자가 거저 주는 위로를 앉아 받아먹기엔 왠지 심심하다. 삐딱선 타길 좋아하는 나로서는 약간이 아닌 상당히 왜곡된 생각을 자랑처럼 달고 산다. 작가를 지망하는 주부에게 허락되는 불온한 생각과 탈선의 경계는 어디까지일까. 누구의 생각도 개입되길 허락하지 않는 자만심으로 내린 나 혼자만의 결론은 ‘무조건 특이할 것’이다. 어떻게 특이할 것인가. 가능한 진탕 아프고 슬프고 고독한 진창에 허우적거리기. 그것을 보험 들어놓은 고뇌의 글밭이라 착각하며 수없이 자책고문해온지 어언 3년여. 아! 멀리도 길게도 돌아왔다. 별로 독특할 것도 없는 요런 평범한 탈선으로 무얼 하겠다는 건지. ‘약간’이란 범위를 훨씬 추월했지만, 어쨌든 ‘왜곡된 슬픔 만끽하기’계획엔 성공한 듯하다. 물론 작가입성이란 목표엔 미달이지만, 이런 과정이 건강에 긍정적인 영향을 준다는 저자의 말을 믿어 봐도 크게 손해 볼 건 없을 것 같다. 해서 앞으로도 뇌 누리에 꽉 들어찬 이 슬픔을 미치도록 즐겨보련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