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충성, 어딘지 조금은 고리타분하고, 또 조금은 부정적인 느낌이 든다. 그것은 아마 우리들이 살아오면서 충성이란 군대나 검찰, 경찰과 같은 상명하복의 위계조직에서, 혹은 계파나 정당과 같은 마피아적 조직에서 윗사람의 지시나 명령을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것을 충성이라 부르는 것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전통시대이래 우리들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덕목은 충효였다. 국가에 충성하고 부모에 효도하는 것을 가장 가치 있는 미덕으로 삼고, 그런 사람들을 존경하며, 또한 모두들 그렇게 살기를 희망해 왔다. 그런 충성이 현재에 이르러서는 왜 음험하고 부정적인 느낌을 갖게 되었을까? 그리고 현대에서 충성이란 과연 가치가 없는 것일까? 우리는 충성의 본질에 대해서 한번이라도 제대로 된 사유를 해보았을까? 충성의 사전적 정의는 ‘진정에서 우러나오는 정성, 임금이나 국가에 대한 것을 이른다.’라고 되어 있다. 정의만을 놓고 본다면 흠을 잡을 데가 없는 아주 고귀한 것을 나타낸다. 다만 그것이 임금이나 국가에 대한 것을 이른다는 지점에서, 그리고 그것을 악용한 권력자들 덕에 오늘날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관념, 국가와 같은 조직에서나 필요한 것으로 바뀌지 않았나 싶다. 그런 우리에게 에릭 펠턴은 이 책 [위험한 충성]에서 우리가 피상적으로 알고 있는 충성의 관념을 재정의 하여, 충성에 대해 제대로 이해할 수 있게끔 해 준다. 그는 먼저 충성이란 우리 생명을 지켜주는 본질적인 요소라고 정의한다. 그것은 자신과 다른 사람을 묶어주는 밧줄이며, 그러나 이 밧줄은 스스로 결박하지 않는 한, 자신에게 아무런 도움도 될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한다. 또한 충성은 서로 믿을 수 있는 상태를 의미한다. 그렇기에 충성은 충실함, 믿음, 신뢰, 의리, 정조 등으로 치환되기도 한다. 따라서 그 반대편에 있는 것은 당연히 배신이 될 수밖에 없다. 저자가 이 책의 부제를 ‘충성과 배신의 딜레마’라고 한 것은 아마 그래서 일거라는 생각이 든다. 사실 충성과 배신의 이야기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류에게 전해 내려오는 수많은 신화와 전설 속에서 사랑과 함께 가장 중요하고,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것만 보아도, 저자의 말처럼 우리들의 본질과 뗄래야 뗄 수 없는 연관을 가지고 있는 것임에 틀림이 없어 보인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처럼 본질적인 요소를 단지 조직과 개인의 관계에서만 생각하고 바라보았던 것이 아닌가 싶다. 저자는 이러한 충성을 가족, 부부나 연인과 같이 사랑하는 관계, 그리고 친구 사이의 우정에 이르기까지 모든 영역에서 우리에게 꼭 필요한 미덕이자 성찰해야 할 대상임을 다양한 분석을 통해 알려주고 있다. 지금까지 훼손되어 왔던 충성의 가치를 새롭게 복원하고 있는 셈이다. 요즘 들어 가족간의 문제가 사회쟁점이 되는 경우가 많다. 물론 예전부터 있어왔던 문제이겠지만 그만큼 사회가 복잡해짐에 따라 가족간의 충성도 변하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가족은 무엇으로 엮여 있을까? 그것은 충성의 다른 이름인 믿음과 사랑이다. 그리고 동전의 양면과 같은 사랑과 충성 모두는 당파적이고 편파적일 수밖에 없다고 한다. 충성은 미덕이지만, 어떤 미덕이든 극단까지 끌고 간다면 더 이상 미덕이 될 수는 없다고 저자는 말한다. 가족간의 충성도 이와 다르지 않다. 오늘날 빈번하게 일어나는 가족간의 갈등, 특히나 부모와 자식간의 문제는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서로간의 충성을 극단까지 끌고 가는 데서 일어나는 것이 대부분이라고 한다. 그것은 부부나 연인 사이의 관계에서도 그대로 표출된다. 결혼은 젊은 시절 구축되었던 충성의 서열을 재배치하는 문제이며, 따라서 부모에게 향했던 충성의 우선순위를 바꾼다는 뜻이기도 하다. 사랑과 로맨스는 전혀 다르며, 그 차이는 바로 충성에 있다고 말하는 저자는 충성은 섹시한 것이라고 한다. 상대에 충성심 없는 사랑은 사랑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충성의 다른 이름은 바로 신뢰와 의리와 정조 등으로 치환된다. 친구 사이 역시 마찬가지이다. 우정의 핵심은 충실함이며, 이는 자발적으로 불편을 무릎 쓰는 충성이라고 말한다. 그렇지만 우리에게 친구가 된다는 것은 크든 작든 그 핵심은 호혜라고 한다. 친구를 돕는 사람은 자신도 그런 도움을 받을 것이라고 확신하기 때문에, 적어도 그런 기대가 있기 때문에 돕는 것이며, 자신의 기대가 무너졌을 때 극심한 배신감을 느끼는 것은 그것이 충성의 반대편에 있고, 호혜가 무너졌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처럼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영역에서 충성은 힘을 부여하고 존엄함을 부여하는가 하면, 도덕적 동기를 부여하는 훌륭한 원천이기도 하다고 저자는 말한다. 하지만 이런 충성은 또한 서로 갈등하는 골치 아픈 습성으로 인해 비극적인 경향을 띠기도 한다. 삶이 복잡해지면서 충성해야 할 대상이 늘어나고, 그러한 충성 사이에서 갈등을 빚을 위험도 커지기 때문이다. 자신의 이상에 충성할 것인지, 가족에 충성할 것인지 혹은 욕망에 충성할 것인지, 사람에 충성할 것인지, 더 나아가서 조직에 충성할 것인지, 정의에 충성할 것인지, 서로 다른 가치가 부딪힐 때 우리의 충성은 선택을 강요당하고 그것은 종종 우리들을 비극으로 몰아간다는 것이다. 따라서 저자는 기본적인 인간의 의무에 대한 인식을 키우고, 엇갈린 애착에 의해 유발된 갈등으로부터 인간의 책무, 즉 충성의 본질을 찾고 사유하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이라고 강조한다. 충성은 우리를 위험에서 보호해 주기도 하지만, 또한 무수한 위험을 안겨주는 미덕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또한 우리들의 개인적인 관계가 아닌 사회관계 속에서 충성이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살펴보기도 한다. 충성이라는 덕목이 케케묵은 유물로 취급 받고 있는 가운데서도 그것이 뜨겁게 이슈가 되는 분야의 하나가 마케팅이다. 모든 기업들은 충성고객을 만들어 내기에 혈안이 되어 있지만, 그러나 충성이라는 덕목은 기업세계와 본질적으로 맞지 않는다고 저자는 말한다. 우리들이 기업과 관계하는 방식은 바로 계약이며, 계약이 사랑과 우정을 관리하는데 적절하지 않듯이 충성은 상업적인 자아들을 하나로 이어 주는데 적절한 덕목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런가 하면 저자는 정치적인 리더에 대한 충성이나 국가에 대한 충성에 대해서도 살펴보고 있다. 리더, 특히 정치인은 개인적인 의리와 충성보다는 리더로서의 의무와 책임을 우선시해야 한다고 말한다. 어느 정도 충성심이 뒷받침되지 않고서는 어떤 리더십도 빛을 발하지 못한다고 하지만, 그러나 우리가 흔히 보아오는 정치인들의 경우, 그들은 의무와 책무보다는 집단의 의리와 충성에 더 치중하는 것을 본다. 그것이 오늘날 우리들로 하여금 충성이라는 덕목에서 음험하고 부정적인 인식을 갖게 만든 것이 아닌가 싶다. 우리는 우리가 충성하는 대상, 그것이 가족, 배우자나 연인, 친구, 리더 혹은 국가인지, 또 그 대상에 대한 충성이 무엇인지를 파악하는 것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핵심적인 가치를 체로 거르고 분류하는 작업과 같다고 저자는 말한다. 충성이 지나치게 부족하면 삶은 경박하고, 천박하고, 불만족스러워지며, 그렇다고 충성이 지나치면 끝없는 주장의 충돌과 불협화음만을 겪게 될 것이라고 한다. 우리들 대부분은 충성에 대해 좋고, 싫음의 이분법적 태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며, 그러기에 충성이 가지는 가치를, 본질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충성의 본질과 충성을 드러내는 방식에 대해 깊은 사유와 성찰이 필요하며, 적절한 균형을 유지하면서 충성을 지켜나가야 한다고 그는 강조한다. 어찌 보면 오늘날의 세계와는 전혀 맞지 않는, 유물과도 같은 충성이라는 덕목을 인문학적으로 풀어내는 저자의 글은 과연 충성이란 무엇인지, 그리고 내가 가지고 있는 충성은 옳은 것인지를 끝없이 반문하게 만든다. * 이 리뷰는 예스24 리뷰어클럽을 통해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 |
|
충성이라 하면 상명하복이 분명한 시대에만 존재하는 복종 또는 굴종의 이미지가 강하다. 군주에게 절대복종만이 미덕이었던 시대의 언어로만 여겼던 '충성'은 지금 이 시대에는 어울리지 않는 말처럼 들린다.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믿음'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당신에게 충성을 맹세하겠습니다.'라고 하지 않는 이유이다. 아무래도 충성이라는 단어에는 그 자체로 상대에게 종속된다는 것을 선포하는 의미가 강하기 때문이다. 동서양 역사를 통털어 전쟁과 살육전이라는 난세의 최고봉은 아무래도 춘추전국시대로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영웅은 난세에 탄생한다. 이때 탄생한 영웅들은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에게 충성을 맹세하였으며, 배신을 밥 먹듯이 하는 인간들을 간신배와 불명예라는 이름으로 단죄하였다. 아마도 난세에 영웅을 구별하는 방법은 충성으로 판단 되어진다 하여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유비와 조조가 21세기에도 영웅으로 회자되는 것은 우리는 모두 그들에게서 충성을 보기 때문이다. 이렇듯 충성은 영웅이 갖추어야 할 덕목 중 그 어떤 덕목보다 우선되는 덕목이다. 그러나, 현재에 들어서 충성이란 의미는 복종이란 의미외에 더 광범위하게 쓰인다. 과거 충성이 군신간의 복종과도 같은 종속관계를 의미하였다면 현재에 이르러서는 충성의 의미도 조금은 다르게 변화되었다. 사람과 사람사이 신뢰가 점점 떨어지고 있는 작금의 시대에 충성이란 어쩌면 공허한 메아리가 아닐까. 이 책 《위험한 충성》에서는 그러한 충성에 대한 인문학적 성찰과 재미있는 탐구가 펼쳐진다.
저자는 충성이 우리의 삶을 이루는 근본 덕목임에도 현대에 이르러 진부한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에 대하여 바른 인식을 심어 주기 위해 이 책을 집필하였다고 한다. 충성이란 우리 삶을 이루는 근간의 모든 중심에 있다. 충성이 있기에 진실된 사랑이 존재할 수 있으며, 충성이 있기에 참된 친구를 얻을 수 있다. 불행한 일에 닥쳤을 때 배신하지 않는 친구야 말로 참된 친구이며 , 세상의 모든 충성에는 윤리적 충동과 혼란이 항상 수반된다고 한다. 그렇기에 충성에 수반되는 많은 도덕적 딜레마 또한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전장에서 자신을 위해 목숨을 바쳐줄 전우가 없거나 자신의 목숨을 기꺼이 바칠 만큼 소중한 전우가 없는 사람은, 살아 있다고 할 수 없다. 저주받은 운명이다.
저자는 충성이 삶에 영향을 미치는 가장 쉬운 예로 1953년 피트 스코닝이 k2에서 밧줄 하나로 등반대원들을 살린 일화를 들고 있다. 모두가 죽을 수도 있는 상황에서 등반대원들 간에 형성된 믿음과 신뢰로 이들은 모두 생명生命을 얻었지만 반대로 동료간에 믿음과 신뢰가 형성되지 않았던 히말라야 에베레스트 등반대원들은 모두 최고의 장비를 갖추고도 모두 사망死忘 하였다. 저자는 이들의 생과 사를 가르는 극명한 차이는 바로 충성의 차이라고 말한다. 이렇게 동료들간의 유대감- 집단이나 동료간에 형성되는 충성, 서로간의 신뢰-는 자신과 다른 사람을 묶어주는 '생명의 밧줄'이다.
이렇듯 이 책은 충성이 삶에 미치는 모든 부분들, 가족과 사랑하는 관계, 친구, 기업, 정치세계, 국가까지 전방위적인 사고를 유추하고 있다. 과거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목숨을 초개처럼 버렸던 사람을 우린 영웅이라 한다. 사람과 사람사이에 존재하는 충성이란 그 어떤 것보다 위대하고 아름다운 믿음이다. 일화와 같이 설명되어져 지루할 틈 없이 흥미롭고 재미있게 읽혀지는 책이었다. 충성이라는 덕목이 우리 삶의 근간을 이루는 가장 기본적인 덕목이며, 사람 人자에서 사람과 사람사이를 (人) 지탱해주고 있던 것이 사람이 아니라, 충성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으로 리뷰를 마친다.
* 이 리뷰는 예스24 리뷰어클럽을 통해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
|
충성이라는 말은 구시대의 부정적인 이미지로 다가온다. 충성이라는 이름으로 저질러졌던 갖은 만행들이 먼저 떠오르기 때문인가 보다. 예전보다 한층 가벼워진 관계로 만들어진 온라인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낙엽만큼이나 쓸모를 잃은 낱말인 충성이 갖는 의미가 있을까. 저자는 이 충성이라는 단어가 사랑, 친구, 가족과 국가 같은 공동체를 이루어가는 근본 중의 근본이라고 주장한다. 이 책은 그런 주장의 근거를 따라가는 내용이다. 과연 책을 덮은 후 충성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를 긍정적으로 바꿀 수 있을까. 충성이 내재하는 위험을 감안하고라도 우리에게 이 충성이 없다면 황량하고 비인간적인 생활이 우리를 기다릴 뿐이라고 말하는 저자에 순순히 동의할 것인가. 변하지 않는 관계를 추구하는 불안한 우리에게 보다 안정적이고 편안한 관계를 만들어주는 것이 과연 충성이라고 할 수 있는지 저자를 따라가 본다. 저자는 충성이야말로 우리 생명을 유지하는 힘의 동력이라고 주장한다. 충성은 삶이 불안할 때 의지할 수 있는 그물 역할을 해주며 개인과 타인을 하나로 묶어주는 밧줄 역할을 한다. 이 충성의 의미를 효과적으로 사용하는 곳이 바로 군대다. 군대는 오래전부터 군사들을 훈련하는데 가장 좋은 방법이 충성심을 자극하는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군대에서의 충성이 우리가 알고 있는 국가나 이데올로기, 혹은 집단보다는 생사고락을 나누는 동료들에 대한 충성심이 가장 우선이라는 결론은 의외였다. 고대로부터 빚어진 수많은 전쟁에서부터 최근의 이라크에 투입된 군인들을 살펴본 결과 군대조직은 동료에 대한 충실성으로 단결되고 있으며 전쟁터에서 부상을 입은 병사나 죽은 동료를 그대로 두고 나오지 않는다는 믿음이 미국해병을 강력한 군대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충성은 그 대상에 따라 서로 마찰을 빚을 수 있다. 이상주의자들은 인류, 국가, 도시, 마을, 학교, 가족 순으로 충성의 대상을 따르는 것이 적합하다고 하지만 개인적인 상황에서 이 순서를 따르기는 쉽지 않다. 미국의 경우, 공무원들이 가장 먼저 지녀야 할 충성의 대상으로 “최상의 도덕적 원리와 국가에 대한 충성을 개인, 정당, 정부부처에 해한 충성보다 우선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이것은 그럴 듯하고 고상해보이지만 공직자의 윤리강령으로는 플라톤만큼이나 이상적이라고 비판한다. 이렇게 충성에 따른 대상이 충돌하면서 비극이 시작되고 갈등이 나타난다. 하나의 대상에 충성하려면 또 다른 대상을 배신해야하는 딜레마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의 예로 가족이 힘든 일을 겪을 때 우리는 자신의 희생을 감수하고라도 가족을 위해 헌신한다. 이런 가족에 대한 충성이 사회적으로 충돌할 때 우리의 선택은 딜레마에 빠진다. 어떤 결정을 내려야 옳을 것인가. 공동체를 떠나서 친구나 애인, 가족 사이에서는 충성이라는 말보다는 충실이나 신뢰가 더 타당해 보인다. 이런 개인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힘이 서로에 대한 충실이라면 이것을 깨트리는 것은 배신이다. 우정을 이야기하는 사례는 정말 많다. 가장 기억에 남는 일화는 돈으로 우정을 살 수 있다고 믿는 아들에게 아버지가 보여준 행동이다. 아버지는 살찐 돼지 한 마리를 잡아서 아들 등에 지우고 아들의 친구 집을 돌아다닌다. 살인을 했으니 숨겨달라는 아들의 부탁에 아들의 많은 친구들은 하나 같이 기겁을 하고 문을 닫는다. 그러나 아버지가 찾아간 몇 되지 않은 친구들은 하나 같이 아버지의 행동 여부를 떠나서 우선 아버지를 문 안으로 들어오게 한다. 친구에 대한 충실을 가장 잘 보여주는 사례라고 생각해서 내가 늘 기억하고 있는 일화다. 친구란 내가 힘든 상황에 있을 때에 잘잘못을 가려주는 판관이 아니라 내 편을 들어주는 사람이기에 고귀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저자는 우리가 우정이라고 이야기하는 모든 것에는 호혜 관계가 성립한다고 말한다. 그것이 물질적이든 정신적이든 그 호혜가 수평을 이룰 때라야 친구관계가 성립한다는 말이다. 호혜가 수평으로 이루어졌을 때 친구사이를 유지할 수 있게 하는 것은 의리다. 하지만 친구에게 나쁜 일을 부탁하는 친구가 있다면 그 친구와의 관계는 단호히 끊어버려도 그 친구에게 어떤 의무감도 느낄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친구가 잘못을 저질렀을 때는 그 혐의를 찾기보다는 무엇이 친구를 위해 옳은 것인가를 생각해보는 것이 친구 사이의 올바른 충성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렇게 의리나 우정을 중요시하는 사람은 정치를 하거나 어떤 단체의 리더가 되기에는 적합하지 않다. 특히 정치에서 맹목의 충성이 수많은 악덕을 낳는 것을 우리는 많이 보아왔다. 정치가라면, 혹은 리더라면 무엇보다 제도와 법을 지켜야한다. 그러나 충성이 없다면 어떻게 정치를 하고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인가. 이것이 또 하나의 딜레마다. 우리 앞에 놓인 많은 사례들은 우리의 선택을 요구한다. 만약 내 가족이 사회적인 잘못을 저질렀을 때 내가 해야 할 행동은 무엇일까. 사회적으로 옳지 못 한 선택을 할 수도 있다. 혹은 사회에 적합한 행동을 할지도 모른다. 이런 개인적인 딜레마에서부터 국가나 인류 중에 선택해야할 딜레마의 사례를 통해 우리가 가져야 할 자세를 정리해보게 하는 내용이다. 제목에서 보여주는 충성이라는 단어는 다소 도발적이라는 생각이다. 충성이라기보다는 충실, 혹은 신뢰에 더 가까운 내용이라고 생각한다. 책과 영화, 연극, 철학자들의 사유가 담긴 풍부한 사례가 저자의 주장을 탄탄하게 받쳐주고 있다. 마이클 샌델의 “정의는 무엇인가”에서 보여주는 딜레마들을 다시 한 번 보는 듯 했다.
이 리뷰는 예스24 리뷰어클럽을 통해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
|
‘충성’이라는 단어는 대부분의 대한민국 남자에게 군대를 떠올리게 한다. 물론 군대를 다녀오지 않은 미필자에게는 예외이겠지만. 나도 예외는 아니다. 군대에서 근무한 곳의 경례 구호가 ‘충성’이었다. 보통 경례를 할 때는 ‘충성’이라는 발음이 별 문제가 안 되지만, 위병근무를 할 때는 예외다. 위병근무시는 경례 근무를 절도 있게, 크게 질러야 하는데 ‘충성’이라는 구호는 첫 음이 ‘우’ 음이기 때문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그래서 생각하다 ‘우’ 음을 ‘오’음으로 바꾸어 ‘초~~~0 성’ 하고 경례를 했다. 이렇게 하면 훨씬 힘이 들어가고 절도 있는 구호로 바뀐다. 하지만 군대에서 경례구호를 ‘충성’이라고 외친다고 해서 ‘충성’이 마음속에서 절로 우러날까? 어쩌면 ‘충성’이라는 구호는 상대적으로 충성하지 못한 이들을 충성으로 이끌기 위한 대안적인 방법이라고 이 책 『 위험한 충성』은 얘기하고 있다. 저자는 충성은 강요할 때 우러나는 게 아니라 자발적으로 우러나는 것이 진정한 충성이라고 얘기한다. 즐겨보던 전쟁 영화중에 세계 2차 대전 전문 역사학자 스티븐 앰브로스의 소설을 기반으로 한 10부작 “밴드 오브 브라더스”가 있다. 전편을 세 번 이상 본 듯하다. 그 영화중에 전쟁에서 열심히 싸우는 이지중대원에게 그 이유를 묻는 기자의 질문에 “내 옆의 동료를 위해서”라는 대사가 나온다. 즉 전쟁에서 목숨을 내놓고, 총을 들고 싸우는 이유가 국가를 위한 충성이나, 이념에 따른 소신이나, 대단한 논리적인 사명이 아니라, 단순히 나와 같이 전투에 임하는, 내 뒤를 지켜주는 동료를 위해서라는 것이다. 어쩌면 이처럼 ‘충성’이라는 단어의 숨겨진 의미는 상명하복에 따른 일방적인 복종이 아니라 전우에 대한 믿음이 아닐까 한다. 서로를 지켜주고, 서로를 위해주는, 서로를 향한 끈끈한 전우애를 기반으로 한 신뢰와 믿음. 이렇듯 『위험한 충성』은 이처럼 우리가 단순하게 알고 있는 ‘충성’의 개념만을 이야기 하지는 않는다. 어쩌면 이 책에서 말하는 ‘충성’이라는 개념은 신뢰와 믿음의 다른 표현이 아닐까 한다. 즉 누군가의 강요나 일반적인 복종에 의해 생겨나는 게 아니라, 신뢰와 믿음이 바탕이 되었을 때 절로 우러나오는 게 충성이다. 우리가 흔히 충성이라는 단어를 접하게 되면 조직문화 속에 상명하복을 떠올린다. 물론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가고 덩치가 산만한 사람들이 모인 조직이 연상될 수도 있다. 하지만 충성은 그런 협의의 개념이 아니다. 어떠한 조건이나 대가도 없이 누군가를 향한 맹목적인 충성은 멍청함의 또 다른 이름일 것이다. 역사 속에는 그런 예들이 많다. 맹목적인 충성을 바친 최고 권력자에게 어떠한 보상도 받지 못하고 흔히 하는 말로 토사구팽 당하는 경우를 자주 볼 수 있다. 대표적인 경우가 유방에 의해 한나라가 설립된 이후로 유방에 의해 내쳐진 한신과 그의 측근들의 경우를 들 수 있겠다. 모두가 똑같은 생각과 이상을 가지고 한곳을 쳐다볼 때는 서로가 서로에 대한 깊은 신뢰를 기반으로 한 충성이 작용했지만 서로간의 이해관계가 상충될 때는 그 충성의 개념은 바로 배신의 논리로 탈바꿈한다. 하여 충성과 배신은 언제나 같이 다닌다. 이 책의 부제가 ‘충성과 배신의 딜레마’인 것도 같은 이유일 것이다. 이러한 충성이 바로 파멸할 위험을 무릅쓰는 가장 극단적인 충성일 것이다. 인류의 역사 속에서 국가나 조직의 최고의 덕목은 충성이었다. 하지만 이 책에 말하는 충성은 일방적인 개념을 얘기하지는 않는다. 충성이란 친구와의 관계, 연인과의 관계, 가족 간의 관계에서도 성립한다. 물론 국가에 대한 충성과 신에 대한 충성 또한 포함된다. 하지만 이러한 각각의 충성이 상호 충돌할 때는 어떻게 해야 되는가? 이때부터는 단순히 충성의 문제가 아닌 “정의가 무엇인가”라는 개념이 도입된다. 이렇듯 충성한다는 것은 순수한 선이라고 얘기할 수 없다. 누군가에게 충성을 바친다는 것은 그 충성의 대가로 누군가의 희생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국가에 충성하기 위해 가족을 버리고 전장에 나가는 것은 가정에 대한 가장으로서의 충성의 의무를 저버리는 것이다. 하지만 가족을 지키기 위해 전쟁에 나서지 않는 사람은 불충한 것인가. 이렇듯 충성은 간단하게 정리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고 저자는 주장한다. 그럼 충성이 서로 충돌할 때 우린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가. 위의 예처럼 국가에 대한 충성과 가족에 대한 충성이 서로 상충될 때 말이다. 여기에 충성의 딜레마가 작용한다. 이때의 판단기준은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 하는 의문이 우리를 괴롭힌다. 이에 대해 칸트는 “두 가지 의무가 갈등한다고 생각될 때는 언제나 ”사실, 그중 하나는 의무가 아니“라고 칸트는 주장한다. 이로써 갈등은 해결한다(85쪽) 그럼 어느 하나가 의무가 아닌 것은 어떻게 판단해야 하는가? 이에 대해 칸트는 ”도덕적 요구를 사칭하는 헛된 주장을 찾아내 제거하라고 말한다. 한 의무가 다른 의무를 ‘완전히 폐기해야’ 한다. 이것은 도덕성은 승자독식모델이다(86쪽) 역시 그 판단의 기준의 나의 도덕적 선택에 있다. 결국의 정의의 문제이다. 어느 것이 더 정의로운가 하는 것이다. 어느 것이 나의 의무에 있어 상위의 개념이냐는 것이다. 위에서 예로 든 것처럼 충성이 서로 간에 충돌할 때 국가를 택할 것이냐, 가족을 택할 것이냐는 나의 선택의 기준이 무엇을 우선으로 두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이런 개인적인 선택에 대해 그 선택의 잘잘못을 따질 수 있는 권한은 누구에게도 없다. 단순히 개인의 도덕적 판단에 맡길 수밖에 없다. 이렇듯 충성은 도덕적 딜레마를 양산한다. 개인의 선택에 의해 한 의무를 선택했을 때 그 선택에 대해 어느 누구는 배반이라고 할 것이고, 어느 누구는 충성이라는 이름을 붙일 것이다. 충성이란 이렇듯 양면성을 가진 얼굴을 하고 있다. 이 책은 이렇듯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충돌하는 충성의 딜레마를 다양한 예를 들어서 설명해주고 있다. 누군가에게 충성한다는 것은 말처럼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니 삶에 있어 적절한 균형을 맞추기 위해서는 충성을 지켜 나가는 것에 있어서도 고도의 도덕적인 판단과 가치관이 요구된다고 저자는 얘기하고 있다. 하지만 왜 케케묵은 구시대 유물 같은 충성이 이 시대에 다시 거론되는가? 그것은 바로 이시대가 믿음과 신뢰가 상실된 시대이기 때문이다. “충성하는 것은 믿는 것이다. 충성하는 것은 자신이 한 말을 지키는 것이다”(286쪽)는 저자의 마지막 주장이 그래서 결코 낯설지 않은 격언처럼 다가온다. 충성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믿음과 신뢰는 이제 역사의 해묵은 유물처럼 자본주의 물질문명의 울타리 속에 갇혀버렸다. 지금의 시대에 우리에게서 잊혀져버린 충성의 개념을 이제 다시 불러내 고민해 봐야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근본적으로 충성은 서로간의 신뢰와 믿음을 근거로 하기 때문일 것이다.
* 이 리뷰는 예스 24의 리뷰어 클럽을 통해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
|
관계는 언제나 상처를 남기곤 한다. 상처없는 관계란 없는게 대부분인데 이 관계가 오래 지속될 수록 상처를 주는 횟수는 늘어나는 경우가 다반사다. 친구, 연인, 가족, 동료 등 다양한 형태로 사람간의 관계를 맺게 되는 데 서로 상처받고 상처입는 이유는 무엇일까? 누군가는 대화를 하려면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이 듣고 싶어하는 말을 중심으로 하라고 했다. 이는 곧 상대방의 기대를 어느 정도 채워줘야 관계가 지속된다는 말로 들린다.
어떻게 하면 사람간 혹은 우리가 살아가는 시간동안 관계에 대한 상처없이 살아갈 수 있을까? 이 책에서는 충성에 대한 이야기를 함으로써 몇 개의 실마리를 주고 있다. 서로가 맞이한 상황에서 충성은 서로에게 가장 많이 요구되는 덕목이다. 부부나 연인 간에서는 정절이란 이름의 충성이 요구된다. 친구간에는 의리란 이름의 충성이 요구되며 국가와 개인간의 관계에서는 애국심이란 이름의 충성이 요구되기도 한다. 이런 충성은 관계를 맺는 데 맺는 암묵적인 약속같이 되는 경우가 많다. 이 책의 내용에서는 노골적인 충성서약 같은 것은 오히려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말을 하기도 한다. 독일의 나치 전범들은 국가에 대한 충성이란 이름으로 일어나서 안될 일들을 아무런 양심의 가책없이 저지르기도 한다. 또 가족이 범죄를 저질렀을 경우 많은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할 지 망설이다. 많은 상황들은 충성의 딜레마를 일으키기도 한다. 고민되는 상황에서도 충성은 지켜져야 할까? 이 책에서는 많은 상황에도 불구하고 충성은 중요한 것이라 이야기한다. 충성은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느끼는 것이라 이야기 한다. 법정스님이 남긴 말 중에는 인연을 함부로 맺는 게 아니라고 하는 말이 있다. 지나칠 인연은 지나치고 오래갈 인연에 집중하라고 말한다. 모든 인연에 진심을 퍼붓다가는 상처만 남는다고 이야기한다. 사유들이 담긴 많은 책들 처럼 이 책 또한 결국은 자신이 선택해야 할 문제들로 답을 돌린다. 하지만 이 충성이라는 것은 꽤 오랫동안 곱씹어 볼만하다. 요즘 같이 자신부터 잘 살아야하고 돈이 최고라는 생각을 가진 사람이 판을 치는 세상에서 서로에 대한 충성은 마음에 새겨놓을 만하다. 충성은 퇴색한 유물이 아니다. 현실이란 이름으로 비겁해지는 사람이 많아지는 요즘에 우리가 덜 비겁해 질 수 있는 몇 안되는 자존심이다. |
|
원제 - Loyalty: The Vexing Virtue 부제 - 충성과 배신의 딜레마 저자 - 에릭 펠턴
왜 역자가 Loyalty를 충성이라고 번역을 했는지, 책을 다 읽은 지금도 이해하지 못하겠다. 어쩌면 난 충성을 부정적으로 보고 있어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필요한 것이긴 하지만, 우리 과거를 살펴보면 과한 충성은 차라리 없느니만 못한 적이 더러 있었다.
책을 읽다보면 충성이라고 하기 보다는 신뢰라고 표기하는 것이 더 어울리지 않을까하는 부분도 많았다. 국가나 회사에는 충성을 바치지만, 가족이나 친구는 신뢰하는 것이 더 어울리니까. 처음에는 충성이란 단어가 익숙하지 않았지만, 상황에 따라서 신뢰라는 말로 바꿔서 생각하니 책장이 잘 넘어갔다.
저자는 여러 가지 문제들을 제기하면서, 이런 상황이면 어떻게 행동하겠냐고 묻고 있다. 이런 걸 ‘가치 충돌’이라고 해도 될까?
군대에서의 예를 보면, 상관에게 무조건적인 충성과 동료들 사이의 신뢰를 중요시하고 그것이 부대의 화합에 좋은 영향을 미친다고 한다. 그런데 상관이 이치에 맞지 않는 명령을 내린다면? 동료가 부정을 저지르고 있다는 걸 알게 된다면? 이 때 문제가 심각해진다고 저자는 말한다. 부당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고발하거나 따르지 않겠다고 한다면, 의리와 충성을 최고로 여기는 군대의 기반이 흔들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믿음이 가지 않는 동료나 상관과 목숨이 달린 전투 현장에 나갈 수 있을까? 그런 사람에게 뒤를 부탁하고 폭탄이 터지는 앞으로 전진을 할 수 있을까?
하지만 반대로 생각할 수도 있다. 부당한 명령을 따르고, 부정을 저지르는 동료를 눈감아준다면 그것은 무엇을 위한 충성일까? 그게 과연 군인이 지켜야할 국가를 제대로 지키는 것일까? 우린 그런 일이 어떤 사태를 초래하는지 현대사를 조금만 공부하면 알 수 있다. 군인들이 자신들의 사적인 이익을 위해 휘하 부대를 어떻게 움직였는지, 그래서 사회를 어떻게 만들었는지 경험해왔다.
비슷한 예로 회사 생활에서 상사와 회사에 신뢰가 없으면, 과연 충성을 다해서 일을 할 수 있을까? 부하직원과 상사가 믿음이 없으면, 비밀을 지켜야하는 업무를 제대로 할 수 있을까? 또한 지나친 기밀엄수의무는 혹시 회사의 비리를 숨기기 위한 게 아닐까?
저자는 이런 난감한 문제를 자꾸 들이민다. 그리고 한쪽 편만 드는 게 아니라, 다양한 의견을 보여준다. 그렇다. 결론은 독자가 내리라는 말이다. 읽고 생각하고 예측하고 자신의 기준에 맞춰서 행동하라는 뜻이다.
결국 이 복잡한 세상을 살기 위해서는 자신만의 가치관을 확고히 구축해야한다. 팔랑팔랑 너무도 얇아서 여기저기 흔들리는 사시나무 같은 주관이 아니라, 누가 뭐라고 해도 내가 옳다고 믿으면 끝까지 할 수 있는 뚝심. 하지만 그러면서도 동시에 다른 사람의 의견을 편견 없이 듣고 받아들일 수 있는 포용력까지. 모든 사람이 순수이성과 실천이성을 판단할 수 있는 칸트가 아니기에, 노력해야한다. 아마 그게 현대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인 것 같다.
어색한 부분 발견 ‘굳이 유다에게 묻지 않아도 들은 누가 예수인지 알 수 있었다. -p.175’ 여기서 ‘들은’ 앞에 뭔가 생략된 거 같다. 대충 문맥상 파악하면 군인들이 맞겠지만.
* 이 리뷰는 예스24 리뷰어클럽을 통해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 |
|
마크 트웨인의 “애국심은 종교에 불과하다”는 말은 양쪽을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저지를 수 있는 잘못을 가리킴에 틀림없을 것이다. 인간관계와 조직사회에서의 충성 역시 그러한 관계에 작용하는 본질이라 한다고 해도 그것이 언제나 ‘선’일 수는 없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맺는 인간관계 또한 안정적일 수 없는 것이 되며 근본적으로 불안할 수밖에 없는 관계와 불변하고 싶은 욕구에서의 갈등은 우리를 좌절시킨다. 그러므로 충성이란 것은 단순히 함께 있다거나 함께 움직이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여러 사람이 공동의 힘으로 수고를 들이면 더 크고 바람직한 것을 달성할 수 있다는 자그마한 지식에 국한되지도 않을 것이다. 에릭 펠턴에 의하면 충성이란 서로 믿을 수 있는 상태를 의미한다. 그런 믿음은 집단의 노력에 기여할 뿐만 아니라 개개인에게도 더 많은 힘을 부여할 것이다. 물론 우리는 함께 있을 때 더 많은 것을 이루어낼 수 있으나, 혼자 일할 때에도 아니면 뒤에서 누군가 나를 응원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만으로도 더 많은 성취에 다가갈 수도 있다. 그가 충성을 ‘그물’에 비유한 것은 그런 이유에서이다. 여기, 높이 걸린 외줄이 있다. 밑에 안전그물이 쳐 있지 않다면 시도하지 않는 것이 현명하겠지만 그물이 쳐 있다면 용기를 내 도전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무사히 반대편으로 건너갔다면, 과연 그것을 그물 때문이라고 할 수 있을까. 적어도 그물은 줄타기를 하는 데 직접적으로는 아무 도움도 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물을 직접 사용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만약의 경우 그물은 목숨을 살려주었을 것이다. 또한 처음에 도전을 가능하게 한 것 역시 그물이라는 것이다. 카이사르의 등에 칼을 꽂은 브루투스가 뭐라고 했던가. “내가 그를 죽인 것은 카이사르를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그보다 로마를 더 사랑하기 때문이다.” 내가 보기에 충성은 마이클 샌델이 이야기한 정의와도 비슷한 것 같다. 그것은 언제나 딜레마를 꼬리에 달고 오기 때문이며, 다양한 충성이 충돌할 때 끔찍한 혼란이 벌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충성은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상황을 서로 인식하고 이에 협력해나가겠다는 개방적인 유대를 약속하는 거라 했다. 반면 계약이란 것은 앞으로 벌어질 수 있는 상황을 세밀하게 계획하고 이에 대해 어떤 행동을 강제하는 조건을 구체적으로 명시함으로써 충성이 개입할 수 있는 조건을 없앤다. 어쩌면 충성은 도전과 좌절을 초래할지도 모른다. 희한하게도 충성이란 무엇보다도 인간의 나약함에 의해 쉽게 타락할 수 있는 미덕인 것이다.
|
|
오래도록 충성은, 특히나 유교의 영향력이 강했던 우리들은 더더욱, 가장 중요한 덕목 중 하나였다. 얼마나 오래도록 우리는 '나라에 충성'이라는 말을 가장 첫 머리에 두어왔던가. 그건 늘 따라 붙어 다니던 '부모님께 효도'보다 더 먼저 나왔던 말이었다. 굳이 나라에 대한 충성이 아니더라도 충성은 늘 고귀하게 평가되던 덕목이었다. 남의 신뢰를 저버리고 배신하는 사람 보다는 그 신뢰에 아낌없이 충성하는 사람을 우리는 훨씬 더 좋은 존재로 생각했다. 그만큼 또한 충성은 우리에게 늘 요구되는 덕목이기도 했다. 나라에 충성, 부모님께 효도말고도 남편은 가정에 충성하듯 충실해야했고 친구는 우정에 충성하듯 헌신해야했다. 신뢰는 저버리면 안되는 고귀한 약속 중 하나였다. 그만큼 우리 뇌리에 깊숙이 새겨진 덕목이지만 아무도 충성 그 자체에 대해서는 아이러니하게도 생각해보지 않았다. 마치 어디서나 흔하게 얻을 수 있는 공기이기에 그 중요성을 헤아려보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어쩌면 지극히 당연한 상식이어서 그런지도 모른다. 그런 우리들에게 충성의 위험과 딜레마를 말하는 에릭 펠턴의 이 책, '위험한 충성'은 어쩌면 당혹감부터 먼저 가지게 하는 낯선 UFO인지도 모르겠다.
월스트리트 저널의 유명한 칼럼니스트인 에릭 펠턴은 단적으로 근본 없는 우리 시대에 충성은 이미 진부한 덕목이 되어버렸다고 말한다. 이전에 그는 월스트리트 저널에 '포스트모던 타임스'란 칼럼을 연재했는데 '포스트 모던'이야말로 어느 한 곳에 충성하기 보다는 변화를 받아들이고 늘 탈영토화된 정체성을 지향하는 것만큼 이런 그의 주장은 그동안 그의 행보에 비추어보면 당연한지도 모르겠다. 사실 이 주장이 그리 어색하게 느껴지지 않는 것은 우리 역시도 어느 정도는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세상은 말그대로 급변하고 있고 오늘의 확실했던 가치도 내일엔 휴지 조각으로 변하는 일도 다반사다. 마르크스가 예언했듯이 모든 견고한 것들이 대기 중으로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이 시대에 견고성을 근거로 투여되는 '충성'은 어쩌면 밀물 앞에 모래성을 쌓는 것과 같은 일인지 모른다. 그런 생각 위에서 에릭 펠턴은 충성에 대해 혼란을 느낀다. 이런 상황에서 그토록 진부해져버린 덕목임에도 불구하고 충성은 여전히 고귀한 덕목으로 칭송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왜 그런지, 도대체 우리들이 충성에 대해 거는 기대가 무엇이기에 아직도 이러한 대접을 받고 있는 것인지 궁금해했다. 그 이유의 추적 끝에 나온 것이 바로 이 책, '위험한 충성'이다.
이 책에서 에릭 펠턴은 충성이 가지고 있는 다양한 의미, 다양한 기능을 모두 9장에 걸쳐 세분하여 들려준다. 사람이 왜 이다지도 근본 없이 변하는 세상 속에서도 여전히 충성을 믿고 의지하는지, 도대체 충성의 진정한 모습을 우리는 어떻게 생각해야하는지, 그 충성엔 과연 아무런 딜레마나 한계가 없는 것인지 등등, 우리가 충성에 대해 사유의 기회를 가지게 되었을 경우 떠올릴 수 있을만한 모든 의문에 대해 에릭 펠턴은 철학이나 과학적 이론뿐 아니라 마케팅 기법까지 망라하여, 거기다 구체적 사례까지 더해가며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좋은 인문학 책은 '크레바스'와도 같다. 다시 말해, 우리가 너무도 잘 알고 익숙해서 그저 평평한 평면처럼 생각하는 개념에 뜻밗에도 긴 역사와 많은 의미와 생각지도 못했던 깊은 성찰의 지점들을 알려주는 것이다. 감히 단언하건대, 에릭 펠턴의 '위험한 충성'도 그러하다. 아마도 분명, 이 책을 읽게되면 그저 단순한 의미밖에는 없다고 생각했던 '충성'에 얼마나 다양한 생각할 거리들이 존재하는지 알게되고는 조금은 센 지적인 자극을 받을 것이다.
마이클 센델에 따르면 충성은 정의와 강하게 결부되는 개념이다. 아시다시피 그는 존 롤즈의 정의관의 계승자이나 그것이 한계가 있다고 생각하고 찰스 테일러와 함께 공동체적 정의론을 새롭게 주장한 사람이다. 여기서 공동체 정의론은 테일러에 따르면 서사적 정의라고 하는데 그것은 쉽게 말하면 어디에서나 고루 통용되는 보편적 정의의 개념을 포기하고 한 지역, 한 공동체에만 적용되는 특수한 정의의 개념들에 더욱 치중하는 입장이다. 서사적 정의라는 이름도 그 지역, 혹은 공동체에만 존재하는 고유의 내러티브적 정의관을 따른다는 것에서 나왔다. 이들이 이런 정의관이 롤즈의 것보다 더욱 현실적이라 하는 이유가 바로 충성 때문이다. 일례로, 센델이 드는 예이긴 하지만, 시험을 칠 때 친구가 커닝하는 걸 목격했다고 했을 때 그것을 일부러 고발하는 사람은 잘 없다. 분명 고발이 정의에 합당하긴 하지만 정말로 그리할 경우 오히려 돌아오는건 가만히 있을 때보다 더 큰 비난이다. 이는 고자질로 우정에 대한 배신이라는 개념이 사람들에게 강하게 자리잡혀져 있기 때문이다. 즉, 우리가 어떤 사안에 정의라는 잣대를 들이댈 때도 이렇게 '충성'에 대한 개념들이 작용하는 것이다. 그런만큼 충성은 우리에게 꽤나 강력하게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그래서 더욱 익숙하다고 해서 덮어놓을 것이 아니라 우리는 왜 이토록 충성이라는 것을 귀중하게 생각하는 것인지, 과연 진정한 충성은 어떤 것인지 등에 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바로 그런 면에서 이 책, '위험한 충성'은 길을 잘 알고 있는 현명한 말처럼 좋은 길잡이가 되어 줄 것이다.
![]()
|
|
처음 이 책을 접했을 때 개인의 자유과 권리가 돌이킬 수 없는 시대정신으로 자리 잡고 있는 이때에 웬 뜬금없는 충성인가라는 의문부터 들었다. 그러나 저자 에릭 펠턴의 논리를 따라가다 보니 내가 갖고 있는 충성에 대한 고정관념과는 다른 차원에서 충성의 의미를 살피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꼭 국가권력에 대한 맹목적인 지지만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가족, 친구나 기타 소그룹 내에서 지녀야 할 미덕으로 재정의하고 있었던 것이다. 펠턴은 충성을 구성원 상호 간에 믿을 수 있는 상태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고 그 효능을 다양한 사례를 통해 입증해보이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었던 1942년 일본군은 필리핀의 바탄반도에서 전쟁포로들을 강제로 이주하는 작전을 펼쳤는데 이 과정에서 미군과 필리핀군 포로 7만 명 중 1만 명 정도가 죽었다고 한다. ‘바탄 죽음의 행진’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이 행군에서 살아남았던 사람들은 “바로 의지할 친구가 있는 사람들이었다. 우울한 기분을 풀어줄 수 있는 친구, 등 뒤에서 자신을 지켜줄 수 있는 친구가 없는 사람들은 이 상황을 버텨내지 못했다.”(23~24쪽) 친구 간 충성심이 그의 삶의 끈을 놓지 않고 끝까지 버틸 수 있는 힘의 원천이 된 것이다. 이와는 반대의 경우라 할 수 있는 사례도 있는데, 흔히 죄수의 딜레마로 일컬어지고 있는 게임이론도 친구 간 충성심을 역이용한 것임을 펠턴은 지적하고 있다. 친구 간에 충성이라는 미덕이 얼마나 일관성 있게 유지하기 어려운 것인지 간파한 범죄 수사관들이 이 기법을 사용하여 상호 충성심에 균열이 가게 몰고 가 자백을 받아내곤 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이 책은 재미있고 실감나는 사례를 통해 충성이 여전히 유효한 가치임을 증명해 보이고 있다. 그리고 현대에 들어와 이런 가치가 많이 퇴색되고 있음을 안타까워하고 있다. 그러면서 아무리 시대가 변했다 하더라도 충성의 가치가 폄훼되어서는 안되고 우리가 지니려 애써야 하는 것임을 역설한다. 충성은 도전과 좌절을 초래한다. 하지만 모든 좌절이 그렇듯, 모순되는 충성의 까다로운 갈등에 걸려 넘어지더라도 우리는 그런 난관을 헤쳐 나가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우리는 또한 어떤 충성이 바람직한 것인지, 누가 진정으로 충성하는지, 누가 충성을 악용하는지 알아내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충성은 오류를 피할 수 없으며, 또 피해갈 수도 없다. 충성은 무엇보다도 인간의 나약함에 의해 쉽게 타락할 수 있는 미덕이다. 하지만 우리가 그것을 도덕적으로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라고 폐기해버린다면, 사랑과 믿음과 헌신도 함께 무의미해지고 말 것이다.(283쪽) 하여 에릭 펠턴의 [위험한 충성]은 충성이라는 가치를 통해 인간의 본성을 파악하고 현대에도 여전히 지녀야 할 미덕임을 보여준 의미 있는 책이었다 하겠다. * 이 리뷰는 예스24 리뷰어 클럽을 통해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
|
충성(忠誠)이라는 한자어를 하나 하나 풀이해 보면 충은 마음의 중심이고 성은 스스로 내뱉은 말에 대해 지킨다라는 말이다.아울러 사전적인 의미에서는 진정으로 우러나오는 정성으로 되어 있다.그런데 우리 사회에서는 충성이라는 말이 일반인들 사이에서 쓰이는 빈도보다는 군대와 사회조직 속에서 더 회자되고 있다.즉 상사,상관의 말과 지시,명령에 무조건 복종한다는 집체적이고 강요당하는 느낌이 강한 억제된 단어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내 군대시절의 군의 거수경례가 '충성'이었는데 내가 과연 고참,상관들에게 자발적인 충성을 했는가 되돌아 본다.겉으로는 충성을 하지만 괴롭히고 보기 싫은 고참 및 상관들을 만나면 '충성'으로 예의를 표하지만 뭐 하나 꼬투리 잡힐 것이 없나 하고 잔뜩 긴장을 하게 되는데,무사히 지나치게 되면 '충성'이라는 말이 진실이 아니었다는 것을 스스로 느끼곤 했다.
인간은 가족이라는 사회의 가장 작은 단위로부터 국가에 이르기까지 떼어 놓을 수 없는 관계에 있다.서로 믿고 배려하고 존중해 나가는 관계에서 삶의 질은 한층 더 고양되고 스스로 느끼는 행복감을 통해 자부심을 넘어 모든 것을 너그럽게 받아들이면서 이성적인 생활태도,진심으로 우러나오는 이타적인 행위 그리고 한층 더 높은 환희와 평화라는 단계에 이르는 의식을 갖게 되리라 생각한다.바로 인간의 의식작용에 따라 내가 타인과 주위를 어떻게 바라보고 대하는가가 달라지는데 우선 가정,학교,사회라는 환경 속에서 어떠한 학습을 거쳤는냐에 따라 개인의 의식작용은 달라질 것이며 이것이 감정이라는 것으로 승화되어 개인의 성격과 인간관계가 지속되어 가리라 생각한다.좋은 환경과 학습을 통해 개인이 타자와 사회에 좋은 영향을 끼친다면 그 사회는 보다 건실하고 사회구성원간의 융화와 신뢰도는 제고되어 삶의 질도 높아져 갈 것이라고 생각한다.
기존의 지식과 관념과는 다르게 충성의 의미를 '믿을 수 있는 상태의 미덕'으로 바라보고 있는 에릭 펠턴의 이 글은 궁극적인 문제는 나와 관계를 맺는 사람들과 어떠한 믿음의 기제를 갖고 나아갈 것인가를 되돌아 보게 하는 인문학적 사유의 글이다.매일 마추치고 대화하며 살을 부딪히며 살아가는 부부부터 가족,일과 관계되는 사람들,그리고 믿음 속에 내포되어 있는 기제인 정의와 이상,욕망이 제대로 신뢰할 만한 수준인가를 때론 수용과 때론 이성의 기제로 판단하고 대처해 나가야 할 문제라고 본다.돈과 물질이 인간사회를 지배하고 있기 때문에 공동체적인 삶보다는 자신을 기준으로 이해관계를 더 저울질하는 세상이기에 믿음이라는 문제는 어찌보면 세속적인 관점에서 생각하고 고려하는 경향이 다분할 수밖에 없는 것이 실상이라고 생각한다.혈연,지연,학연 나아가 동일민족이라는 말들은 겉으로는 포용하고 배려하며 챙겨주는 힘이 저절로 나올 법하지만 깊게 들어가 보면 진정한 믿음 위에 관계가 성립되는 경우가 있겠지만 실제로는 '동상이몽'의 경향이 더 많다는 것이 솔직한 나의 생각이고 판단이다.
근자 항간(巷間)에서는 정의를 부르짖고 사회부조리,국가의 정체성 등에 대해 설왕설래를 하고는 있지만 국가의 지도자들이 깨우치고 실천하지 않는 한 정의구현의 사회는 지체될 수밖에 없다.한국사회가 아직까지는 돈 많고 권력있는 소수층들에 의해 사회제도와 시스템이 좌지우지되고 있는 실정이기 때문에 어찌보면 믿음이라는 의식은 보편적으로 볼 때에는 좋은 현상이고 실현해 나가야 할 과제로서 우선 자신의 의식부터 바꿔 나가는 용기와 실천의 자세가 중요하리라 생각한다.국가 지도자가 누구냐에 따라 그 사회구성원의 의식구조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지도자의 의식수준과 역사관,국가발전을 위한 비전제시 등이 어떠하느냐에 따라 사회전반의 믿음이 제대로 작용되어 가리라 생각한다.정치민주화가 이루어지고 개인의 교육수준,의식은 발달되었다고는 하지만 한국사회가 돈과 물질에 의해 개인을 평가하고 속그룹 단위의 집합체가 강한 사회이다 보니 내가 갖고 있는 믿음은 이성과 합리성에 맞춰 고수하되 남에게 속임과 배신을 당하지 않는 냉정하고 통찰력 있는 마음가짐도 매우 중요하다.정의로운 사회,신뢰를 바탕으로 하는 사회가 이상적이고 살기 좋은 사회인 것만은 부정할 수 없겠지만 사회의 상류층에 있는 힘과 권력의 소유자들이 개인의 이해관계에 얽매여 부도덕하고 부정직한 모습을 보여서는 진정한 믿음은 안개 속으로 묻혀 버릴 것이다.
나아가 인간의 의식 속에는 사랑과 환희,평화라는 감정의 기제가 있고 이를 갈망하기도 하고 실현하기 위해 열정에 가득차 있기도 한다.이것은 결국 자신의 삶과 미래를 위해 타인들에게도 영향을 주고 의지할 수 있다는 믿음이 마음 가운데 깔려 있기 때문은 아닐까 한다.믿음은 평화스러운 시절보다는 역경과 위기의 시기에 진정한 우정과 믿음을 찾을 수가 있다고 하는데 인간의 삶의 길이가 매우 유한적이고 운명에 의해 의식작용이 어느 정도 지속되기에 돈과 물질이라는 현실에서 좀 더 나은 삶의 질과 행복지수를 높이기 위해서는 스스로 믿음을 쌓아 나가는 연습으로 달라진 자신의 자화상과 위상을 알게 모르게 심어 줄 필요가 있다고 본다.한 번 배신당하고 버려지는 자신은 상처와 절망의 비극적인 불행의 경험을 안아야 하면서 인간관계에서 가장 소중하다고 보는 '믿음'은 공허할 말로 들리고 모래알 속에서 진주를 찾는 격이 되고 말 것이다.
"풍요로운 시절은 저울이 될 수 없다.역경만이 누가 진정한 친구인지 가늠할 수 있는 유일한 저울이다." - 플루타르코스,본문 -
"불안한 시절에 진정한 친구가 나타난다." - 엔니우스,본문 -
내가 알고 있는 또 하나는 빈천지교불가망(貧賤之交 不可忘)이다.살림이 가난하고 천한 신분일 때 사귀었던 친구는 잊어서는 안된다(후한서)로 풀이하는데 진정한 믿음은 삶이 어려운 시절에 자신을 돌보고 챙겨주는 친구가 아쉽기만 하다.며칠 전에 읽은 <통도유사>에는 구하(九河)스님의 예화가 나온다.일제강점기 시절 그는 외친내독(外親內獨)을 보였다.겉으로는 친일행각을 했지만 속으로는 대한독립을 갈구했다.독립지원금이 부족한 지사들을 보호하고 지원을 아끼지 않은 애국행동이 아닐 수가 없다.믿음은 개인적인 관계에서 국가의 안위에 이르기까지 그 범위와 영향력은 실로 대단하다.현대사회에서 진정한 믿음을 마음과 가슴으로 느끼기에는 아직은 아닌 것 같다.믿음이라는 문제는 누가 시켜서 될 일이 아니고 자신의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정성과 열정,희생의 각오까지를 포함하는 높은 단계의 감정의 척도라고 생각한다.또한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히는' 상황이 발생하지 않도록 자신의 낮은 감정과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판단도 평소에 갖춰 나가는 자세가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