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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에 갔다가 예정에도 없던 '벼랑'을 대출했던 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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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는 내내 톡톡 튀는 언어와 가슴을 후벼 파는 아픔을 느꼈다. ‘항구에 정박하지 못하고 바다위의 집을 떠도는 아이’가 내 아이일 수도 있고 내가 가르치는 아이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벼랑>은 이금이 작가가 청소년을 위해 쓴 책이다. 이상한 애 은조, 노는 애 난주, 튀는 애 희수, 잘난 척 하고 싶은 애 이진, 마마보이 선우, 늑대거북을 사랑하는 민재, 그리고 이들 이야기를 통해 만나게 되는 외고에 진학했다 어느 날 자살한 혜림를 만나게 된다. 학교와 학원, 친구와 성적, 이성 관계 때문에 방황하는 아이들 이야기가 톡톡 튀는 언어와 짤 짜여진 구성으로 이 시대 청소년들의 아픔과 어려움을 전해준다. 은조는 학교 야자를 빼 먹어가며 좋아하는 그림을 그리다 결국 학교라는 제도권 교육을 뛰쳐나오고, 난주는 좋아하는 남자아이와 데이트를 즐기기 위해 위험한 원조교제로 아르바이트를 하고, 시장 반찬가게 딸이지만 공주처럼 행세하고 싶은 이진은 피리핀 어학연수를 가서 우연한 일탈에서 얻어지는 삶의 중요한 가치를 깨닫는다. 마마보이 선우는 튀는 애 희수를 온전히 알고부터 엄마의 보호막으로부터 자기를 찾는 연습을 하게 되고, 엄마의 유방암 수술로 충격을 받은 민재는 그렇게 좋아하던 길거리 농구를 포기하고 엄마의 뜻을 좇아 모범생의 길을 가지만 어느 날 걸러 온 한 통의 전화를 받고 ‘누구에게나 인생의 하루쯤 온전히 자신을 위해 써도 좋을 권리’를 내세우며 반가움과 그리움으로 대변되는 늑대거북 울프와 짝사랑했던 선생님을 만나러 간다. ‘난 사람들이 내가 있다는 것을 모르는 게 싫어’ 그래서 머리를 노랗게 물들인다는 학교 밖의 아이 희수는 죽은 엄마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아르바이트로 돈을 모아 프랑스 여행을 떠나고, 민재는 30센티나 넘는 늑대거북을 안고 집으로 돌아온다. 편견에 치우쳐 희수의 진실을 보지 못하던 선우의 깨우침과 ‘서로에 대한 왜곡된 사랑, 상대를 위해서 참는다고 생각하는 사랑 그래서 더 의미 있다고 생각하는 사랑이 옳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 민재의 깨달음은 모두 값진 것이다. 엄마의 눈으로 세상을 보지 않고 자신의 눈으로 세상을 보려는 두 마마보이의 노력이 가상하게 여겨진다. 5편의 단편소설에서 느끼는 아이들의 연결고리가 얼마나 잘 짜여져 있는지...자살한 혜림이의 이야기는 곳곳에서 가슴을 후비려 든다. 젊은 나이에 죽음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그 진한 외로움을 누구랑 나눌 수만 있었다면 혜림이는 죽지 않았을 것이다. 중학교 때 단짝이라 믿었던 이진은 혜림을 경쟁자로, 왕재수로 밖에 여기지 않았다. 이런 배신이... 친구가 친구로 보이지 않고 경쟁자로 인식되는 사회에서 아이들의 진정한 소통을 바라는 것은 무리일지도 모른다. 아이들은 그들 자신의 문제만으로 힘겹고, 그들이 만든 닫힌 공간 안에서 괴로워하는데, 정작 그들을 제일로 아끼는 가족들은 알지 못한다. 그게 바로 비극이다. ‘침묵 속에 묻힌 그들의 아우성’을 어떻게 들을 수 있을까? 소통하는 공간을 만들어 주어야 하는데...현실의 장벽을 너무 높다. 이 책을 통해 아이들은 지금 앓고 있는 문제가 나만의 문제가 아님을 알고 위로 받고, 어른들은 청소년들의 문제에 좀 더 많은 관심을 가지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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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어버려!" 하고 외치며 친구를 옥상에서 밀어 버린 아이가 있다. 무엇이 그 아이로 하여금 옥상에서 친구를 밀어버리게 했을까? 원래부터 문제아나 비행청소년이 있을까? 친구를 밀어버린 그 아이도 세상에 태어났을 때는 무엇보다도 티없고 사랑스러운 존재가 아니였을까?
실제로 이금이 작가는 친구를 옥상에서 밀어 버린 아이에 대한 뉴스를 본 뒤 『벼랑』을 쓰게 되었다고 한다. 떨어져 다친 아이보다 친구를 민 아이가 자신의 가슴에 가시처럼 박혔다는 작가의 말을 보고 나는 코멘트를 쓰다 말고 이 책을 '제대로 읽어 보고 싶다'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난 어렸을 때부터 드라마의 악역들에게 연민을 느꼈다. '저 연기자도 착한 역할 맡고 싶었을텐데.' , 아니면 '저 사람에게도 무슨 사연이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다. 이 책의 시작이 왠지 이런 나의 조금은 엉뚱한? 생각과 맞닿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친구를 밀어 버린 아이, 원조 교제로 용돈을 버는 여고생, 난주가 바로 『벼랑』의 주인공이다. 자기혐오와 분노 끝에 삶의 벼랑 끝에 서게 된 난주는 이른바 '노는 애'의 전형이지만, 그 내면은 평범한 우리와 결코 다르지 않다. 벼랑 끝에 선 것처럼 위태로운 난주의 삶에 안타까운 마음이 들다가, 들춰진 삶의 파편이 비단 청소년으로 대표되는 등장 인물들의 것만이 아니라 어쩌면 이미 어른이 '되어버린' 우리 모두의 것과도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 나도 모르게 가슴이 먹먹해졌다.
청소년 소설. 청소년을 위한 우리나라 소설이라 하면 낯간지러운 하이틴 소설이 대부분이라고 생각했던 나에게 이금이 작가의 이 청소년 소설집은 신선한 충격이였다. 이 책에 수록된 단편소설들은 부인할 수 없는 이 시대의 현실의 단면을 가감없이 드러내면서도 청소년들과 함께 고민하고 그들의 삶을 '이해'하려고 한다. 우리를 힘들게 하는 삶의 많은 고민들은 타자를 이해하지 못해 비롯되는 '소통'의 부재에서 온다. 이 소설을 통해 조금은 더 깊게 청소년을 '이해'하며 상처입은 그들과 또 우리를 진정으로 '치유'할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조심스레 기대해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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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청소년 소설을 읽기 시작한 건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었다. 아이에게 읽어주며 그림책의 세계를 알았듯이 그냥 우연히 접했던 청소년 소설이 꽤 재미있었기에, 그리고 두어 시간이면 한 권을 읽을 수 있었던 페이지수도 맘에 들었다. 한마디로 가볍게 읽을 수 있어서 좋았다. 그런데 이번에 ‘벼랑’을 읽으며 스스로에게 다시 물었다. ‘왜 자꾸 청소년 소설을 읽는 거지?’ 책 속에서 내가 무언가를 알아내려 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게 무엇일까?’ 하루를 번잡하고 사소한 일상의 일거리로 보내며 나는 자문했다. 나는......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다. 내 아이가 청소년이라는 시기로 접어든다는 것을...... 아직 먼 이야기인 줄 알면서도 (지금 초등2 이니까) 그 혼돈의 시기로 나아가 게 될 아이와 내가 ‘벼랑’ 끝에 서게 될까봐 두려운 것이다. ‘벼랑’ 은 다섯 편의 단편 소설이 서로 맞물려있다. 첫 번째 이야기 ‘바다 위의 집’은 학교를 그만두려는 ‘나은조’의 이야기이다. 내일을 위해 오늘을 참고 견디는 것이 은조에게는 무의미하다. 다른 아이들처럼 참고 견디어 보라는 엄마에게 은조는 소리친다. “엄마한텐 정말 미안한데, 그래서 견뎌보려고 했는데, 엄마, 난 이제 겨우 열일곱 살이야. 난 하고 싶은 게 너무 많아. 그림도 그리고 싶고, 글도 쓰고 싶어. 철학자가 되고 싶기도 하고, 역사학자가 되고 싶을 때도 있어. 앞으로 무얼 해야 할지 그 길을 찾아야 할 때잖아. 그런데 학교에선 공부 말고는 아 무것도 하지 말래. 나는 그렇게 교과서나 암기하면서 시간을 보낼 수는 없어. 엄마, 이걸 방황이라 불러도 좋고 치기라 해도 좋아. 나중에 후회하더라도 당 장은 이 나이에 할 수 있는 일들, 아니 해야 할 일들을 해 보고 싶어. 학교가 못 하게 하니까 나 혼자서라도 해 보고 싶다구!“ 이금이 작가의 딸이 자퇴 선언을 하고 그 시기에 이 단편을 썼다고 작가는 말 한다. 위의 말은 어쩌면 작가의 딸이 만류하던 엄마, 작가에게 던진 말일 수도 있을 거다. 은조의 말은 그대로 내 가슴에도 박혔다. 열일곱 살......그 나이를 어떻 게 잠자는 시간까지 저당 잡힌 체 학교와 학원과 공부에만 바칠 수 있단 말인가 그 빛나는 나이를, 그 아름다운 나이를 어떻게, 어떻게, 어떻게....... 그런데 내 아이가 은조처럼 말한다면...... 가슴에 무거운 돌덩이 하나 내려앉았다. 아직은 어떻게 풀어야 할지 모르는 숙제 하나 받아든 셈이다. 스스로 생을 마감한 ‘혜림’이와 그 엄마가 풀지 못한 숙제...... ‘혜림이’는 직접적으로 이야기 속에 등장하지 않는다. 첫 번째 이야기의 ‘나은조’에게는 블로그에서 ‘미네르바’라는 이름으로 불린 ‘엄마가 무서워 블로그도 제 맘대로 못 하는 찌질이’ 같은 아이며, 두 번째 이야기의 ‘문이진’ 에게는 ‘자기가 가진 것에 대해 고마워할 줄도 모르고 복에 겨워 제 목숨을 끊은 애 따위‘ 이다. ‘문이진’은 두 번째 이야기 ‘초록빛 말’의 주인공이자 화자이다. 재래시장의 반찬가게 둘째 딸. 공부를 잘해 좋은 대학에 가고, 높은 연봉을 주는 회사에 취직해 반찬 가게 딸에서 벗어나는 것이 꿈인 아이. ‘혜림’의 자살로 딸이 충격을 받은 걸로 오해한 엄마, 아빠가 필리핀 어학 연수 를 보내주었고, 홈스테이의 메이드로 있는 쟈스민의 가족과 원치 않은 만남을 가짐으로 해서 가족과 자신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보는 기회를 갖게 된다. 그리고 싱그럽고 윤기 도는 초록빛 말이 되어 호수 위를 들판인 듯 달려가는 자신을 가슴에 담는다. 세 번째 ‘벼랑’ 은 작가가 쓰면서 많이 울었다고 고백한 이야기이다. 친구를 옥상에서 밀어 버린 아이에 대한 뉴스를 본 뒤 머릿 속에서 떠나지 않던 이야기를 바탕으로 썼다는 ‘난주’의 이야기가 그만큼 가슴 아팠다는 것이리라. ‘난주’는 어른에 의해 상처받고, 찢어지는 아이이다. 그 상처로 인해 또 다른 누군가를 공격할 수밖에 없었던 아이. ‘야단칠 때는 줄지어 있던 어른들이 도움을 청하려고 둘러보자 어디론가 모습을 감추고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라고 말하는 난주가 느꼈을 먹먹함에 어른인 나는 부끄러웠다. 네 번째 이야기 ‘생 레미에서, 희수’는 가장 건강하고 행복한 아이라고 느꼈다. 부모님이 사고로 돌아가시고, 고시원 옥탑 방에 살며, 학교도 다니지 않고, 주유소 에서 돈을 벌지만 희수는 앞서 보았던 아이들보다 행복하게 자기 인생을 살고 있 었다. 돈을 모아 고흐가 머물렀던 프랑스 파리, 아를, 생 레미 랑 다 가보겠다는 아이. 엄마가 짜준 하루 계획표대로, 인생계획표대로 살아가는 선우가 보기에는 도무지 대책이 안서는 아이, 희수. 그런데 그런 희수가 선우는 자꾸만 좋아지는 거다. ‘은조’가 학교 밖으로 나서려는 아이였다면, ‘희수’는 이미 학교 밖에 있던 아이였다. ‘희수’가 스스로 계획하고 실천하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그리며 작가는 학교 밖에 있는 아이들에게 희망을, 어떤 꿈을 보여주고자 했던 것 같다. 다섯 번째 이야기 ‘늑대거북의 사랑’ 은 자신이 키우던 늑대거북의 행방을 알게되고 다시 찾기 위해 옛 과외선생님을 찾아가는 민재의 이야기이다. 왜 ‘늑대거북’ 일까? 5센티미터 정도밖에 하지 않던 조그만 거북이 곧 열대어나 미 꾸라지 같은 살아 있는 먹이를 먹어 대고, 등갑이 무려 삼십센티미터도 넘게 자라 나는 거북. 사납기도 해서 물리면 손가락이 끊어질 수도 있는, 그래서 원래 이름은 ‘커먼스내핑터틀’이라는 거북. 민재는 유방암 진단을 받고 종양을 제거하며 왼쪽 가 슴까지 함께 잘라 내야 했던 엄마를, 수술이 끝난 뒤에도 자기 자신보다는 민재를 더 걱정하던 엄마를 위해서 하고 싶었던 것들을 포기했었다. 농구도, 늑대거북도..... 이제 30 센티미터도 넘게 늠름하게 자란 ‘울프’, 자신의 늑대거북을 민재는 다시 데리고 돌아간다, 집으로. 아마도 엄마와 마찰을 피할 수는 없을 것이다. 엄마와 민 재의 사랑은 ‘늑대거북’을 연상시킨다. 사랑하는 이에게 상처입히고, 상처입으면서도 그것이 결코 미움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사랑하기 때문이라는 서로가 알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때가 되면 서로에게서 벗어나 자신의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것 또 한 알고 있는 것이다. 야생의 ‘늑대거북’처럼. 다섯 편의 이야기 속에서 주위를 맴도는 ‘혜림이’는 끝내 포기해버린 숙제..... 나머지 다섯 아이들 ‘은조’, ‘문이진’, ‘난주’, ‘희수’, ‘민재’ 는 꿋꿋하게 열심히 풀 어가리라 믿고 싶다.
내가 할 수 있는 방법으로, 나 자신을 단련시키며, 너무나 오래전 일이라 내 기억 속에서는 스스로의 날개로 아름다운 비상을 할 수 있기를..... 그리고 두려움을 이기고, 믿으며 기다려줄 수 있는 힘이 그때의 나에게 있기를...... 진정으로 빌어 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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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아이들의 이야기를 쓰며 울 수 밖에 없었다는 이금이 작가에게 무척 호감이 갑니다. 그것은 작가의 이야기가 단순한 허구가 아니라, 개연성있는 진실이고, 이야기 속의 인물들이 너무나 사랑스럽고 애처로왔기 때문일 것이라 짐작합니다.
다섯 개 단편 속의 인물들은 모두 연결되어있지요. 문이진은 혜림이와 혜림이는 은조와 은조는 난주와 난주는 규완이를 통해 먼발치에서 희수를 봅니다. 희수는 선우와 사귀고 선우는 아는 동생 민재와 연결됩니다. 민재는 과외 선생님의 조카 혜림이가 죽었단 소식을 듣고 아연해 합니다. 이들은 같은 세상에서 살되, 서로의 삶에 적극적으로 끼어들지 못하고 서성이거나, 오해하거나, 시기하거나, 무심하게 스쳐지나갈 뿐인 이방인들입니다. 서로의 다름을 이해하고, 인정하고, 아껴줄줄 알았더라면, 각자의 성장통을 다독이는 데 큰 위로가 되었을텐데 참 아쉽습니다. 현대인 모두의 모습이 또 그러하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우선 가장 가슴 아픈 혜림이의 이야기부터 해야겠습니다. 훌륭한 집과 교육에 극성인 엄마, 그리고 혜림이에게 허락된 모든 재능이 사실은 혜림이의 의지와는 아무 상관없이 주어진 것이란 점을 말하고 싶습니다. 혜림이는 헤세의 글에 탐닉하며 자유의지를 꿈꾸는 사랑스런 문학 소녀였습니다. 그 아이가 삶을 포기하도록 만든 현실의 고통은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말하지 않아도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다 알고 있습니다. 섬세한 감수성을 지니고 높은 이상을 지녔던 문학소녀는 우리사회의 경쟁적이고 이기적인 분위기에 질식한 것이 아닐까요?
그다음으로 가슴을 아프게 했던 난주는 벼랑에 선 위태한 아이입니다. 가정도 학교도 사회도 모두 난주를 튕겨내기만 합니다. 마음 붙일 곳없이 불평만 늘어가는 난주에게 규완이는 유일한 안식처이자, 자신을 진심으로 사랑해주는 소중한 사람입니다. 그를 붙잡고 싶은 순수한 욕망이 난주를 눈 멀게 하였습니다. 하지만 난주는, 겨우 열여덟 인생을 살았을 뿐인걸요. 난주는 아차하는 순간에 모든 것을 잃을 것 같은 두려움에 위험한 늪으로 거침없이 내달립니다. 누가 그 애를 손가락질 할 수 있을까요? 비난받을 대상은 우리 사회, 우리 모두가 아닌가 하여 숙연해 집니다.
혜림이나 난주와는 전혀 다른 아이지만, 저는 이진이도 불쌍하단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애의 뿌리 깊은 열등감, 가족에 대한 멸시감, 자살한 혜림이를 위해 한 방울의 눈물도 흘릴 수 없는 그 메마른 가슴 때문입니다. 성적이나 외모, 인기 그 모든 것에서 도무지 따라갈 수 없는 혜림를 이진이는 얼마나 시기하는지 모릅니다. 물론 친하게 지내면서도 질투하고, 마음에선 원망할 수도 있지요. 경쟁의식이 강하면 그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진이는 혜림이의 자살조차 배부른 짓이라 빈정대며, 친구의 자살을 환영합니다. 얼마나 이기적인 생각인지 소름이 끼칠 정도입니다. 우리의 입시 위주 교육이 실력은 있으되 이진이처럼 차갑고, 이기적인 인재를 마냥 환영하고 양산한다면 정말 큰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가슴이 서늘해 졌습니다.
이제 꿈을 찾기 위해 몸부림치는 아이들을 살펴 볼까요? 은조와 희수. 이름도 예쁘지만 그들의 드높은 용기에 우선 박수를 보내고 싶습니다. 세상에는 선우같은 마마보이와 민재같은 모범생이 훨씬 많을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은조와 희수는 좀처럼 보기 드문 숲 속의 샘물같은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들 곁에는 진실을 꿰뚫어 보는 엄마, 꿈을 주는 엄마가 있었다는 사실도 눈여겨 보게 됩니다. 이금이 작가의 두 아이가 학교라는 답답한 지식공장을 스스로 뛰쳐 나온 것도 어찌보면 엄마의 영향이 아닐까요? 아마 저의 아이도 그럴지 모릅니다. 하지만 열심히 토론하고, 열심히 싸우고 사랑하며 헤쳐가리라 마음을 가다듬어 봅니다.
자신을 알고, 믿고, 사랑하는 그래서 누구보다 용기있는 두 소녀를 생각하면 가슴이 시원하게 뻥 뚫립니다. 적어도 은조와 희수는 이진이처럼 이기적인 경쟁기계로 살진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늘 현실과 타협하며 소극적인 선우보단 더 행복하게 살 것이라 믿기 때문입니다. 두 사람은 난주처럼 환경을 비관하거나 자신을 포기하는 일은 절대로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이 갑니다. 기다려 주고 싶습니다. 설령 제자리로 돌아와 후회의 눈물을 흘리더라도 은조와 희수는 다시 높이 날 수 있을테니까요. 아이들은 믿는 만큼 자란다고 내 자신에게 다짐하게 되는 그런 책이었습니다. <벼랑>은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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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다섯 편의 단편이 하나의 뿌리에서 뻗어나간 가지처럼 연관되어져있다. 외고를 다니며 집안 좋고 얼굴과 몸까지 잘 갖춘 혜림이가 자의로 물속으로 들어가 이 세상에서 더 이상 볼 수 없게 된 이야기를 둘러싸고 각 단편들은 서로가 혜림이를 통해 연결되어 있다. 요즘 세상의 통로인 블로그를 통해 알게 된 혜림이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은조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찾아 학교를 떠난다. 은조엄마의 말처럼 살아 있는 자가 누릴 수 있는 특권이기에 오늘을 행복하게 살아야할 의무가 있는 게 정당한 게 아닌가 싶다. 하지만 막상 자신의 아이가 학교를 쉬겠다고 했을 때 여느 부모의 생각과 다름없었던 그녀를 보며 나 또한 우리나라의 입시 위주의 교육이 얼마나 아이를 옥죄이는 지 생각하지만 아이가 막상 학교를 그만 두겠다고 하면 어떤 대답이 나올지 예상이 된다. 그렇지만 은조 엄마는 아이를 가장 잘 바라보았고 자신의 아이를 믿는 일년간의 휴식을 인정하는 존경스러울 만치 훌륭한 엄마의 역할을 한다. 혜림이가 있기에 자신은 만년 2등의 자리에 머물러야 했던 나는 혜림이가 유복한 환경을 고마워 할 줄 모르는 철딱서니 없는 아이로 생각했다. 그러기에 자신의 열등감에 혜림이를 좋아하지 못했을 것이다. 아무 표정 없이 물속에서 서 있는 혜림이의 꿈이 나를 멀리 필리핀의 메이드를 쫓아가게 하였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알렉산더라는 이름에 걸맞지 않게 초라한 말에 올라 함께 마음껏 달려보고 싶은 충동이 일었듯 나도 꿈을 잃지 않길 바란다. 형편 어려운 집에 태어나 어쩌다 보니 원조교제 비슷한 걸 하게 된 난주는 좋아하는 남친이 생겨 그만두려 하지만 그런 사실을 알게 된 창호에게 협박을 받는다. 자신의 입장과 꼭 같이 놓인 경화에게 자신도 창호의 입장이 된다. 경화가 자신에게 싫다고 말하길 바라는 마음과는 달리 그 아이를 밀어버리게 되고 자신 아래 세상이 아득한 벼랑이 되고 만다. 각각의 청소년들의 아픔들이 어느덧 내 마음까지 눅눅하게 만든다. 난 절대 그런 부모가 아니라고 내 아이를 이해하고 있다고 하지만 언젠가부터 나도 내 아이를 벼랑 끝으로 밀고 있지나 않았는지 모르겠다. 난주가 기대고 의지하고 싶은 어른을 찾고 싶었을 때 모습을 감추고 하나도 보이지 않았을 때처럼 내 아이가 두렵고 떨려 나를 찾으려 할 때 내 아이에게 모습을 나타낼 수 있으련 지 자신할 수 없다. 야단칠 때는 줄지어 있던 어른들이 도움을 청하려고 할 때는 하나도 보이지 않았던 난주에게처럼 내 아이에게도 내가 보이지 않으면 어쩔지 두려워진다. 자신의 존재를 남들이 알아주길 바라며 색다른 노란 머리에 주유 알바를 하고 학교에 다니지 않는 평범한 길을 벗어나 사는 희수를 바라보는 우리의 눈은 선우 엄마의 시선과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민재와 엄마의 왜곡된 서로에 대한 사랑처럼 상대를 위해 참는 사랑만 한 것은 아니었을 까? 민재가 예전에 키우던 늑대 거북을 집에 가져오는 게 엄마를 사랑하지 않는 게 아니듯 엄마도 자신의 없는 한쪽 가슴에 들일 수술비를 아들 민재를 위해 쓰기보단 자신을 위해 쓰는 게 민재를 덜 사랑하는 게 아니다. 처음엔 꼭 맞아 가뿐했던 신발이 오래 신고 있으면 발이 아프듯, 이젠 신을 꺾어 신을 때가 된 것 같다 눈부신 열일곱 살의 아이들에게 아무에게도 이해받지 못하고 하루하루를 보내야하는 것처럼 가혹한 형벌이 있을까? 죽어간 딸이 심장이 오그라들 정도 그리워 뒤늦게 딸아이의 블로그를 통해 글을 남긴 혜림이의 엄마에게 은조가 보내는 너무 늦었어... 라는 말이 내 가슴을 후려친다.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은 거라는 그 말이 떠오른다. 아이에게 너무 늦었어라 는 말을 듣기 전에 벼랑 끝에 서 있을지도 모르는 아이의 손을 꼭 잡아 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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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금이 작가의 책은 늘 무언가 생각할 거리를 안겨주는 것 같다 아이가 5학년이 되면서 무언가 아이인것 같으면서도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는 생각을 하면서 이제 슬슬 사춘기가 오고 있는 건가 하는 생각에 심각하게 생각을 하게 될때가 많이 있다 작년에 주변 12살 아이들을 보면 심각하게 삐딱해진 아이들도 있고 거칠게 반항하는 녀석들에 까칠해져서는 당연한 말한마디에도 엄마에게 이상한 말들을 하는 아이들도 꽤 있었다 그런 걸 보면서 아이의 마음을 어떻게든 이해하고 잘 이끌어주어야지 하는 마음을 가지고 이런 책들을 읽게 되었다
벼랑은 십대 중학생들의 이야기이다 다들 아는 것처럼 이시기 아이들은 학교 수업이 끝나고 돌아오면 저녁을 먹고 다시 학원에 가야하는 운명들을 가지고 있다 평범한 아이들의 일상이 바로 이것이다 대학에 갈때까지는 대학을 가기 위해서 공부를 하고 대학에 입학하고 나면 취업을 위해서 또 열심히 공부해야하는 아이들, 내가 그랬던 것처럼 책속의 아이들도 그런 생활에 염증을 느끼고 무언가 엄마의 말을 거역하고 다른길로 가보고 싶어한다. 그래서는 안된다고 하지만 하지 말라고 하는 일을 하는건 예전이나 지금이나 여전히 달콤한 유혹이다 원조교제와 청소년의 키스, 자살 이런 일들로 인해 아이들은 금단의 유혹속에 빠져들지만 곧 헤어나온다 하지만 자살로 인해 가족과 주변 친구들에게 미치는 파장은 그리 단순한 것이 아니다 내가 아이였다고 청소년기를 거쳐서 지금은 어른이 되었지만 난 예전 내가 일탈을 조금씩 했던 것처럼 내 아이에게 그래도 된다고 말해줄수가 없다
난 어른이고 지금은 부모의 자리에 있으니 그때처럼 내 하고 싶다고 엄마몰래 했던 그런 유혹을 아이에게도 실행해보라고 할수 없는 것이다 극단적인 일들이 책속에서 이루어지고 있지만 심각하게 빠져드는 아이들은 보이지 않는다 작가 본인이 아이들을 키우면서 느꼈던 그런 문제들을 가지고 이책을 써야겠다고 마음먹었다는 후기글에서 나또한 이런 책들을 통해서 커가는 아이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이해할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마음이 자꾸 든다
이책은 아이학교 도서실에서 고학년들을 위한 자리에 꽂혀있었는데 학교 선생님과 내 결론은 초등 아이들이 읽기엔 좀 부적절한 책이 아닌가 싶다는 것이다 아이들의 방황을 읽어내고 좋은 방향으로 이끌어주기 위해서 청소년 성장소설을 읽어보도록 권하고 싶은데 이책은 방황을 좀더 깊이있게 다루고 있기 때문에 비관적인 성향을 가지게 될수 있으므로 아이들에게 권해주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부모인 입장에서는 내가 읽어보고 아이들을 이해하기 위해서 읽어보는 건 좋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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