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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디언의 사랑학개론, 기이차웨나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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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계가 없다는 거지. 인디언사무국 학교에서 공부한 젊은이들은 백인의 시간에 따라 사랑도 관리하더구나.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인디언의 시간에 따른단다. (99)    오페라의 제목이기도 한 <사랑의 묘약>을 오래 전에 번역서로 읽었다. 시간차를 두고 읽는 책은 전혀 다른 느낌이다. 이십대에는 <사랑의 묘약>에 언급된 기러기 심장의 간절함에 매료됐었다. 이번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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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계가 없다는 거지.

인디언사무국 학교에서 공부한 젊은이들은 백인의 시간에 따라 사랑도 관리하더구나.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인디언의 시간에 따른단다. (99)

 

 오페라의 제목이기도 한 <사랑의 묘약>을 오래 전에 번역서로 읽었다. 시간차를 두고 읽는 책은 전혀 다른 느낌이다. 이십대에는 <사랑의 묘약>에 언급된 기러기 심장의 간절함에 매료됐었다. 이번에 루이스 어드리크라는 작가의 명성(아메리카 원주민) 아래 인디언적인 것을 턱없이 많이 갈망했나보다. 바람결에 전해지는 이국의 향과 소리를 은근히 꿈꿨던 것 같다. 책장을 넘길수록 그런 기대는 사그라졌고, 오랜 기다림 끝에 마주한 <사랑의 묘약>이라는 챕터도 인디언적인 신비로움을 충족시키지 못했다. 그만 까다로운 독서취향이 발동했다.

 

 <사랑의 묘약>은 결코 읽기 수월한 작품이 아니다. 이 소설을 읽기 전에 세워둔 작은 계획이 있었다. 작가가 삼십대에 쓴 처녀작과 최근작을 연달아 읽으며 비교하겠다고 마음먹었다. 부푼 마음은 <부록>을 읽는 동시에 깨져 버렸다. 부록 <토마호크 공장>을 읽기 전에도 결정적인 순간마다 자취를 감추는 인물들의 행방(불명)에 길을 잃곤 했다. 작가는 출판 이후 작품을 두 번 고쳐 썼다. 빼고 넣고 하는 사이에 어떤 시절에만 통할 수 있는 맥락이 끊기고, 조각난 이야기들로 이어 깁기 하지 않았을까 염려가 들었다. 자르고 덧댄 오톨도톨한 솔기가 느껴진다고 하면 과민반응일까. 물론 부록에 들어간 글을 뺀 것이 매끄럽다. 하지만 출판 당시 뜨거운 반응은 빠진 이야기에서 비롯된 것일 수 있다는 불편한 생각을 지울 수 없다. 폭발적인 에너지와 거침없는 목소리가 빠져버린, 여러 시선과 손을 거쳐 진짜는 사라져버린 듯한 의혹이 일었다. 부자연스럽게 인공조미료를 잔뜩 첨가한 식사 같다. 처녀작인 만큼 오리지널한 본연의 맛을 기대했던 것 같다.

 

 누군가는 분명 이런 작법이 신선하는 둥, 삶의 속성과 인디언계 미국인의 정체성을 빼닮았다는 둥 극찬할 것이다. 독자가 이 소설을 인디언 문화의 이해도구나 정석으로 접근해서도 안 되겠지만 삽 십년 전 출판 당시에는 사정이 달랐을 것이다. 작품이 담고 있는 인디언적인 요소가 거듭되는 수정 속에 나프탈렌처럼 희미해져버렸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립샤의 손의 치유능력과 마리와 룰루 할머니들의 예시력과 주술적 힘만으로 인디언 고유의 특별함을 전하기에는 약하다. 일라이와 넥터 할아버지를 숲과 백인 교육을 받은 자로 비교해서 내심 백인과 인디언 문화를 심층적으로 다룰 줄 알았다. 일라이 할아버지는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어부>에 등장한 뒤, 넥터, 마리와 룰루 할머니의 삼각구도가 중심축을 이루면서 돌연 존재감이 사라져 버린다. 엉클 샘으로 몰릴 수 있는 넥터 할아버지(혹은 라이먼)의 모습과 상반된 인물도 있어야 하지 않을까. 룰루가 넥터의 반동인물이 될 수 있을까?

 

 그렇다면 진정 이 소설의 주인공은 누구란 말인가? 백인의 글과 문서와 대조되는 인디언 문화의 구술적인 측면도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옛언어도 생각보다 미약하게 구사한다. 룰루 할머니의 여성적 입장에서 잠시잠깐 몰아서 다루고 넘어간다. 백인과 인디언의 충돌보다는 인디언과 인디언 내 갈등과 문제로 축소해버린 경향이 강하다. 종교적 갈등도 피상적으로(혹은 추상적으로) 건드리고 있다는 생각이다. 그리고 킹과 리넷 부부의 마찰과 관계 추이를 따라가노라면 애초에 미국인의 혼혈적인 (다문화적) 정체성을 염두에 두고 쓴 것이 아닐까 싶다. 기존의 백인 위주의 순혈적인 가치관을 부수고 방어하느라 그런 것일 수도 있겠다.

 

 이야기를 따라가다가 길을 잃어버렸던 부분들을 밝히자면 다음과 같다. (풍부한 상징과 깨알 같은 설정을 즐겨도 될 텐데, 언제부터인가 내게 서사가 이토록 중요해져 버렸다!) 처음 앨버틴이 화자로 나선다. 숙모 준의 죽음을 늦게 알렸다는 이유로 엄마 젤다에게 마음이 틀어진(축적되어온 감정도 있지만) 앨버틴이 가족사의 ‘비밀’을 밝힐 거라고 기대했는데 느닷없이 마이크를 내려놓고 사라진다. 마지막에 그녀는 립샤와 이어질 것으로 예상되지만 허무한 귀결이다(두 가문의 이야기가 핵심이기에 혼혈인인 앨버틴을 뺀 건지 모를 일이다.) <사랑의 묘약>과 결말을 부각시키는 의도라 해도 설마 했던 립샤가 갑자기 중요한 화자가 되는 것이 석연치 않다. 물론 립샤가 준, 룰루, 마리라는 여성인물들 사이에서 어른 남자로 성장하는 것이나 정체성 확립 혹은 사랑과 치유력의 재발견으로 뿌듯하게 바라볼 수 있다. 준의 죽음, 룰루의 개방성, 마리의 인내는 립샤의 사랑(가족) 찾기에 영향을 끼친다.

 

 그 뿐 아니라, 립샤의 친모가 준이고 친부는 게리라는 것도 무슨 엽기 무술영화의 설정도 아니고 억지스러웠다(우화적이다). 공동체와 가족의 근원이 되는 ‘나’란 존재의 근원을 바로 아는 일은 확장적인 관계망을 다부지게 묶는 계기가 된다. 이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작가가 립샤를 메신저로 투입한 인상을 준다. 다음으로, 룰루를 비롯하여 준까지 인디언 여자가 성적으로 지나치게 개방적인 것으로 그려진다. 심지어 앨버틴도 버스정류장에서 만난 남자에게 몸을 내준다.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을 몸으로 구현하는 것이라 해도 지나친 감이 있다. 인디언 여자의 몸을 땅에 대입하여 본래의 자연성과 원활한 순환을 피력하려는 의도는 알겠지만. 반대로 백인이 만든 인디언 보호구역을 취급하는 펜날이 무디다. 인디언들이 자연을 중시하고 땅을 소유개념을 보지 않고, 화폐 대신 물물교환의 방식을 취하는 등의 문화적인 특성과 고유성을 더 어필해도 됐을 것이다.

 

 작가가 인디언의 끈질긴 생명력과 강인한 정신을 성적 에로티즘과 퍼포먼스로 구현해낸 점은 인정한다. 역사를 다루는 데 있어 생명탄생의 현장은 빠뜨릴 수 없기에, 성과 스토리텔링이 서로 맞물러 자유자재로 돌아가는 것으로 이해했다. 자칫 방대하고 지루할 수 있는 서사에 서정성(생명탄생과 성애)을 가미해 작가 특유의 문체를 완성해낸 점도 훌륭하다. 룰루와 넥터가 첫사랑/첫 남자 주변을 맴돌며 교합하려는 장면은 어떤 운명적인 손길과 자기장이 느껴져 숙연해지기도 했다. 인간의 삶이 종국에는 한사람 혹은 (고향)집으로 돌아가기 위한 여정이라는 점에서 또 그 누구도 운명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기에 그랬다.

 

 처음으로 돌아가려는 준, 룰루, 넥터의 사랑의 걸음을 통해 인디언이 미국 문화의 근간이자 토양임을 말하고자 한 것 같다. 번역자의 글이 이 소설에 담긴 인디언의 사랑을 빠짐없이 담아내면서 더 줄일 수 없게 잘 표현했다고 생각한다. 그녀의 말대로 인디언의 사랑과 그것이 피어내는 역사, 그 촘촘한 결을 따라 읽어도 충분할 것이다.

 

사랑이 너른 품을 가진 것, 속이 좁지 않은 것이라면 이 소설에서 보여주는 사랑은 고름과 진물과 흉터 같은 온갖 구질구질하고 너저분한 감정을 보듬는 것이자 역사의 비극적인 순간마저 물결의 한 흐름 속에 끌어안는 것이다... 그런 욕망과 좌절이 역사를 만들었고, 그 모든 역사가 사랑의 품에 안긴다. (정연희 467-468)

 

 지금까지 주로 소설을 읽으면서 아쉬웠던 부분에 대해 말했다. 고백하자면 잡힐 듯 잡히지 않는 파편적인 이야기들이 제멋대로 횡단하며 이뤄내는 변주에 속이 탔던 것 같다. 단박에 다 보여주지 않고, 표피적인 옷은 잘 벗으면서 진짜 속살은 드러내지 않는 화법에 짜증이 났던 것 같다. 감상문을 작성하며 밑줄 그은 구절을 재차 살피니 놀랍게도 구절마다, 인물마다 우주의 섭리와 철학이 통으로 들어앉아 있다. 마치 지독한 황사가 걷힌 밤하늘에 뜬 별들처럼 경이롭다. <사랑의 묘약>에서 분연히 일어서는 사람/사랑이 있는데 바로 “바다의 별” 마리 할머니이다. 원로수녀를 넘어서겠다는 결심으로 수녀원을 찾는 마리. 손에 엄청난 상처를 지니고 갈림길에서 넥터와 부부의 연을 맺는 마리. 그것이 비록 연민에서 출발한 짧은 몸의 매혹이었다 할지라도 남편을 술과 도박에서 건져내려고 무던히 애쓰는 마리. 비천한 출신을 넘어 주변의 아이들을 거두며 길러내는 마리. 혼자 사는 시숙과 오고간 감정을 누르는 마리(‘마리’라는 부름에 응답하지 않는다). 시어머니도 자기편으로 만들며 핏줄 이상의 관계를 다지는 마리. 남편의 배신을 능청맞게 넘기고, 남자의 마음을 돌리려 미신적인 행위까지 감행하는 마리.

 

 마리는 룰루의 쿨함과 수용적이며 개방적인 태도를 취하지 않는다. 후자가 저돌적이며 폭발하는 힘을 발휘하는 반면에 전자는 순환적인 원을 그리며 사람들을 품고 돌본다. 마리는 내게 이상적인 어머니상(모성)으로 다가온다. 그런 마리도 <성녀 마리>의 시절이 없었다면 여물고 거대한 사랑의 품을 갖지 못했을 것이다. 수녀가 되지 않으면 아내가 되어야 하는 그 갈림에서 분열하며 갈등하는 모습이 절박하다. 최고의(절대적) 수녀 혹은 아내가 되려는 마리의 야심과 고군분투가 인상적이다. <부활>에서 마리가 아들을 사흘째 되는 날 일어나 걷게 하는 데 실패한 일은 안타깝지만 절대적 신의 존재를 부정하려는 작가의 의도가 반영된 것으로 본다.

 

 앞서 말했듯이 감상문을 작성하면서 책을 향한 아쉬움이 저절로 누그러지면서 마음이 바뀌었다. 깊이를 측정할 수 없는 책이다. 앞에서 던졌던 의문과 질문들은 다른 소설들로 채워나가면 될 것이다. 물오른 자연미를 선사하리라 믿는다. 낭독을 즐기는 작가답게, 작은 동네서점이 인간다운 것에 가깝다는 소신답게, 문장 한 줄 한 줄이 예리하고 풍부하다. 무엇을 더 바랄까 싶게 인물들이 엄청난 발언을 명징하게 쏟아낸다. 가슴을 아련하게 하는 서정성과 허를 찌르는 시사성을 겸비한 스토리텔링이다. 솔직히, 한 데로 모아지지 않는 이야기의 파편성과 결정적인 순간에 사라지는 인물들의 잦은 이탈, 그리고 확연히 부각되는 인물들의 인위적인 명암이 불편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이번에 알았다. 지금의 나는 서투르면 서투른 대로 남겨진 어떤 시절을 만나고 싶었다는 것을. 작가의 한결같은 글쓰기 안에서 성장하거나 아니면 내려놓거나 움켜쥔 것들을 훔쳐보고 싶은 마음이 컸다는 것을 알게 됐다. 작가의 뒷모습과 후미진 뒤안길을 기꺼이 따라 걷고 싶었음을 고백한다.

 

 끝으로 <사랑의 묘약>은 안녕을 묻고 안녕을 비는 인사이며, 지금도 한때의 누군가에게로/어디론가 가고 있을 당신을 비추는 ‘바다의 별’이라고 정의하고 싶다. 삶은 한 곳에 맺힘이 아니라 그것을 풀며 뻗어나가는 거미망짜기이니 뼛속까지 자유로운 몸의 향연과 축제를 펼치라 한다.

 

하늘이 우리 모두에게 하나의 방대한 기억인 것처럼. 세상을 떠도는 모든 영혼이 춤추는 무도장인 것처럼. 나는 준을 생각했다. 우주에 무도장이 있다면 그녀는 춤추고 있을 것이다. 떠도는 영혼들을 위한 투스텝춤을. 늘씬한 다리를 올렸다 내리며. 황홀하게 웃으며. 세상 모든 여인처럼 달콤한 향수 냄새를 풍기며. 나쁜 것과 좋은 것 모두에 즐거워하며. 그녀의 패배에도. 그녀의 무모한 승리에도. 그녀의 아들들에도. (57)

이달의 사락 s********d 2015.02.27. 신고 공감 1 댓글 0
리뷰 총점 종이책
너를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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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마 악의가 덜한 시선으로 인디언(미대륙 선주민)을 만난 때가 <늑대와 춤을> 영화를 본 고등학생 시절이었다. 엔딩이 너무 슬프고 처연했다. 낯설지 않은 얼굴과 눈빛이 잊히지 않았다. 그리고 인디언식 이름 짓기가 유행했다.   그리고 이 책에서 한층 더 복잡하게 얽힌 그들의 가족사를 만났다. 왠지 반가웠다. 생생하게 살아있는 풍경일수록 그들의 고단한 현실이 잊혀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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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마 악의가 덜한 시선으로 인디언(미대륙 선주민)을 만난 때가 늑대와 춤을영화를 본 고등학생 시절이었다. 엔딩이 너무 슬프고 처연했다. 낯설지 않은 얼굴과 눈빛이 잊히지 않았다. 그리고 인디언식 이름 짓기가 유행했다.

 

그리고 이 책에서 한층 더 복잡하게 얽힌 그들의 가족사를 만났다. 왠지 반가웠다. 생생하게 살아있는 풍경일수록 그들의 고단한 현실이 잊혀졌다. 가능한 선입견, 편견, 판단을 유보해보려 하지만 혼자 읽을 때조차 쉽지가 않다.

 

부족한 지식을 조금 보충하기 위해서, 인디언 보호구역과 부족(수우족)에 대해 검색해 보았다. 객관이나 보편과 같은 단어를 사용하고 그렇게 사고하는 나에 대해 잊지 말고, 윤리나 도덕을 앞서지 않도록 차분하게.

 

옳고 그름은 동전의 양면이 아니라 의미의 명암이었다.”

 

기억해야 사건이 되고 존재할 수가 있다. 그러니 누군가가 잊고 만 부분, 누군가는 잊을 수 없는 부분들이 단일 사건에 대한 양면적 진실이다. 안타깝지만 다른 설명은 거짓이 되고 만다.

 

어쩌면 기억상실은 그에게 과거로부터의 보호이자 과거의 일로부터 그를 용서하는 것이었다. (...) 그의 증손자 킹 주니어는 아직 기억이란 것이 생기지 않아 행복했지만, 할아버지는 기억을 잃어서 행복했다.”

 

문장이 아름답고 번역도 아름답다. 덕분에 등장인물들에 다소 깊이 감정적 개입을 하기도 하고, 이젠 기억조차 나지 않는 사랑을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들에 기분이 시큰거리기도 했다.

 

나는 정말 사랑 때문에 아팠던가. 기도로 사랑이 돌아오기도 했던가. 몸은 닳아가고, 더위 때문인지 다른 이유인지 어지럽고 멀미가 난다. 내 시간은 뒷모습도 보이지 않도록 달아나는데, 변해야 할 것들은 밀어도 꿈쩍하지 않는다.

 

나는 약해졌다. 내 생각들은 가엾게도 같은 자리를 맴돌았다. 고통은 나를 강하게 했지만, 그것이 나를 떠나자 나는 곧 잊기 시작했다. 더는 버틸 수 없었다. (...) 내 마음이 경첩에서 떨어져 바람에 흩날리며 나 지신의 고통에 간신히 매달려 있는 것 같았다.”

 

낯설지만 부러운 열렬한 감정에 대해 생각한다.

 

나는 사랑이란 시간이 지나면 더 편안해져서, 아파도 많이 아프지 않고 좋아도 그렇게 좋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시간이 지나면 사랑은 반들반들 닳아 늙으면 잘 알아채지도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아무래도 나는 사랑이 쪼그라들다 죽는 거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이제 나는 채찍처럼 분연히 일어서는 사랑을 보았다.”

 

 

 

 

k****k 2023.07.31. 신고 공감 0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