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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에 양재천 산책길에 나가면 땀을 뒤집어 쓴 채로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달리는 분들을 자주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보니 마지막으로 달려본 것이 언제였던가 기억이 가물가물합니다. 달리는 재주가 없어 단거리는 반에서 꼴찌를 면한 적이 없고, 장거리 달리기 역시 달리기 시작하면 이내 숨이 턱에 차서 주저앉는 편이 수월해서인지 걷기는 할지언정 달리기는 기피대상이 되고 말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달리기 열풍으로 주변에서 많은 사람들이 달리기를 시작했다는데도 선뜻 나서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달리는 분들도 이유가 참 다양할 것 같습니다. 건강을 위하여, 혹은 기록에 도전하기 위하여 등등... 그런데 철학자는 왜 달리기를 할까요? <철학자가 달린다>는 제목의 책을 보고 첫 번째 든 궁금증입니다. 영국 웨일스 뉴포트 출신으로 현재 미국 마이애미 대학교 철학과 교수인 마크 롤랜즈교수는 <철학자와 늑대>에서 야성이 남은 늑대와 11년을 같이 지내면서 돌아보게 된 인간의 본질에 대한 성찰을 유머와 감동으로 풀어내 인기몰이를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늑대가 롤랜즈교수의 집에 처음 들어왔을 때 집안의 물건들을 물어뜯어 자칫 집안이 초토화될 위기를 맞으면서 개를 지치게 하기 위한 방안으로서 본격적으로 달리기를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모두 여덟 개로 나눈 글은 저자의 달리기에 관한 시대적 배경을 다루고 있습니다.
2011년 ING 마이애미 마라톤 대회에 처녀 출전하는 과정으로 시작하여, 세월을 거슬러 소년시절을 보냈던 영국의 미니드 마엔에서 개 부츠와 달리기를 하던 1976년의 기억, 앞서 말씀드린 늑대 브레닌과 달리기를 하던 아일랜드의 레스모어반도에서의 1999년의 추억, 이어서 마이애미로 이주한 2007년 새로 만난 개 휴고와 마이애미의 위험한 소택지를 달리던 추억, 그리고 늑대 브레닌과 프랑스 오브강둑에서 늑대 브레닌과 마지막으로 달리던 추억을 거쳐서 2011년 ING 마이애미 마라톤 대회를 마무리하기까지의 이야기입니다.
어렸을 적부터 집에서 기르던 개 부츠와 동네 야산을 뛰어오르던 롤랜즈교수가 늑대 브레닌 때문에 다시 뛰게 되었다고 이야기를 하고는 있습니다만, 사실은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사람들은 보통 말벗도 하고 격려도 주고받거나, 바람도 함께 느끼면서 같이 있으려고 함께 달리는 경향이 있습니다만, 롤랜즈교수는 개 혹은 늑대와 함께 달리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장거리 달리기가 궤도에 오를 때마다 생각이 멈추고 사유가 시작되는 시점이 오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달리기는 사유가 들어오는 열린 공간으로, 저자는 자신의 육체가 달릴 때, 그의 사유도 장비나 선택과는 거의 무관한 방식으로 함께 달린다(80쪽)고 합니다. 저자는 이런 현상이 자신만의 것은 아니라고 합니다. ‘달리기! 이보다 더 행복하고 짜릿하며 상상력을 자극하는 활동이 도대체 있을까? 달리는 동안 정신은 육체와 함께 달아나고, 뇌 속과 다리의 리듬과 팔의 흔들림 속에서 신비로운 언어의 꽃이 만개해 고동치는 것 같다.(81쪽)’라고 한 미국 작가 조이스 캐럴 오츠나 ‘내가 달릴 때, 나의 정신은 텅 빈다. 달리는 동안 드는 모든 생각은 그 과정에 종속되어 있다. 달리는 동안 나를 덮치는 사유는 갑자기 나타났다가 아무 것도 바꾸지 않은 채 홀연히 사라지고 마는 가벼운 돌풍과 같다.(82쪽)’는 무라카미 하루키를 인용하기도 합니다.
어떻게 보면 즉흥적으로 결정한 마라톤대회 참가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종아리근육이 파열하는 위기도 맞게 되지만 출전을 강행하게 된 것은 쇠락하는 육체와 정신의 한판 승부를 붙여보려는 의도가 있었다고 합니다. 장거리 달리기의 자유를 스피노자보다는 데카르트의 자유라고 비유하고 있는 저자는 마이애미 마라톤대회에서 하프코스에서 풀코스를 뛰기로 마음을 바꾸는 과정에서 앞서 말씀드렸던 달리기와 사유와의 관계를 철학적으로 재미있게 표현하기도 합니다. “이제 나는 장거리 달리기에서 자아가 독립된 부분이나 단면들이 아니라 스피노자의 체화된 형태에서 데카르트의 탈육체화를 거쳐 흄의 춤추는 사유로 점진적으로 변화하는 과정으로 나타나는 것을 본다.(221쪽)” 이런 단계를 자아의 해체과정이라고 본 저자는 하프코스를 넘어가면서 느낀 사르트르기라고 명명하는 새로운 경험을 이렇게 표현하였습니다. “스피노자기에서 데카르트기를 거쳐 흄기까지 오는 동안 자아는 육체와 정신의 연장선에서 정신으로 그 다음은 다시 사유로 축소된다. 사르트르기에는 정신이 사유에서 무(無)로 더욱 축소된다.(223쪽)”
이처럼 저자는 달리기를 하면서 느끼는 다양한 누낌을 철학적, 의학적 관점에서 사유한 결과를 쉽게 설명하고 있어 색다른 책읽기가 되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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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으려고 마음 먹었을때, 마크 롤랜즈가 짐작한 대로 현대사회를 살아가고 있는 나는 그가 달리기의 효용가치에 대해서 역설할 거라고 생각했다. 심오한 철학을 담았으리라는 기대보다 달리기의 예찬 정도가 아닐까라고. 자신의 멋진 논리를 펴서 결국은 독자를 달리기에 입문하도록 설득할 거라고. 프롤로그를 읽으면서부터 그가 쓰려는 내용이 기대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의 기대는 무참히 깨어지고 말았다. 그는 효용에 근거한 가치인 도구적 가치는 항상 그 자체가 아닌 외부의 다른 것에 있으며, 그 다른 것이야 말로 진정한 가치의 근원이라고 했다.
이게 뭔말이여? 달리기의 효용에 근거한 도구적 가치,즉 건강을 위해서라던가 여가선용을 위해서라던가는 진정한 가치가 아니란 말인가?
여기서부터 나의 도전 정신을 자극하는 작가의 의도에 따라 이 책을 손에서 놓을 수가 없었다. 그가 달리기를 시작한 어린시절의 아일랜드에서 부츠라는 개와 함께 꾀 높고 가파른 언덕을 매일같이 달렸던 이야기며, 마이애미 에서 달리기를 시작했을때, 아무런 굴곡도 없이 평평하기만 한 거리를 달려보고는 너무 시시해서 달릴 의욕조차도 상실했다는 이야기에서는 이 철학자의 성격과 삶을 대하는 태도가 짐작이 되었다. 그는 어린시절에그냥 놀이로 달리기를 했다면, 청년시절엔 자신의 소유물을 개로부터 보호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개들이 넘치는 에너지를 집안 물건에 발산하기 전에 달리기로 소진시키자는 의도로 말이다. 어떤 의도로 달리기를 시작했건 간에 그에게 달리기는 어떤 목적이나 이유를 넘어서 달리는 그 자체가 목적이 되었다. 그리고 그의 가치 철학이 여기에서 끌려나온다. 그는 도구적 가치만 있는 것은 일이라고 했다. 100%공감한다. 그리고 슐리크라는 철학자는 본질적으로 가치 있는 활동은 일종의 놀이라고 했다. 도구적 가치가 있다라고 하는 말은 그 가치가 항상 외부에 있다는 말이라고 한다. 즉 무언가를 위해서 라는 단서가 외부에 있는 가치라는 것이다. 말하자면 달리는 행위자체를 즐기면 달리기는 순수한 가치가 있는 놀이이지만 무엇을 위해 달린다면 그건 일이 된다는 것이다. 그가 42.195km의 마라톤 구간을 달리다가 반환점인 21km에서 그만 둘수도 있었지만 다리의 근육에 통증이 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완주할 수 있었던 것은 달리기 자체를 즐겼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다.
달리는 철학자 마크 롤랜즈가 독자들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는 너에게 놀이가 되는 것, 그 자체 때문에 하는 것을 찾아라. 그리고 그것을 할때 너에게 임금을 지불하는 사람을 찾아라. 돈이 얼마가 되더라도 그 자체 때문에 하는 것을 좇아야기 돈을 좇아서는 안 된다. 항상 일이 아니라 놀이인 것을 찾아라-p244 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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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음의 자유는 흘러넘치는 삶의 자유이자 몸이라는 제한된 공간 속에 담아 두기 어려운 힘의 자유이다. 나이가 들면서 이 느낌은 점점 줄어든다. 살아가면서 멈추어야 할 수많은 이유를 너무나 잘 알게 된다...(중략)... 그러나 운이 좋다면, 정말로 운이 좋다면, 그 이유들이 아무리 거칠게 으르렁대도 나를 강제할 수 없음을 언젠가 알게 될 것이다. 바로 그것이 노년의 자유이다.(75~76쪽)
달리기의 심장박동을 경험하는 것은 플라톤의 선을 가장 강력하게 경험하는 것이리라.(88쪽)
젊음의 자유와 노년의 자유. 모든 달리기는 고유의 심장박동이 있다는 것. 원초적 놀이의 본질을 지니고 있는 달리기. 노화의 의미. 쾌락과 환희와 행복... 중년의 한 철학자가 달리면서 성찰하는 다채로운 주제들이 가슴에 와 닿는다. 그는 지금 마이애미 마라톤 대회의 출발선에 서 있다. 하지만 만반의 준비를 갖추기는 커녕, 종아리 근육 파열 때문에 재활 채료를 거치고 마라톤 대회의 직전 2개월간은 달려보지조차 못한 상태이다. 왜 그는 (누가 봐도 무리로 보이는) 마라톤에 도전장을 내밀었을까? 중년의 나이에 무언가 벅찬 목표를 이루었다는 뿌듯한 성취감을 얻기 위해? 아니다. 그는 '능력 이상의 성취' 가설은 자신에게 설득력이 없다고 한다. 오히려 '내가 달리기에서 가장 먼저 배운 것은 성취의 허무함'(46쪽)이라고 잘라 말한다.
그렇다면 달리기가 주는 즐거움, 쾌락 때문일까? 그것도 아닌 것 같다. '내가 막 끝낸 42.195km의 달리기는 쾌락과 아무 상관없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263쪽)고 하는 걸 보니. 사실 그가 첫 마라톤을 끝낸 방법은 달리기와 스트레칭을 끝없이 반복하다가 다른 방법이 없을 때는 걷기도 하는 등, 날렵한 마라토너의 이미지와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오히려 너무나 깊게, 심지어 혐오스러울 만큼 극도로 행복했다.'(263쪽)고 이어 말한다.
그에게 달리기의 목적과 가치는 본질적으로 내재되어 있는 것이다. 물론 그도 처음에는 자신의 달리기에 목적을 갖다붙였다. 자신의 집과 재산을 '세 마리까지 불어난 개과 동물들의 무자비한 턱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서'(115쪽)였다. 늑대 브레닌과 개 니나, 그리고 브레닌의 딸 테스의 파괴본능(?)을 소진시키기 위해서 함께 시작한 달리기였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개들과 달리면서, 달리기의 심장박동을 경험하고, 온종일 달리던 어린시절을 기억해내고, 여러 사상가들의 생각들과 조우하고, 다채로운 사유를 펼쳐 나간다. 아이들을 언제까지 지켜줄지 확신할 수 없는 아버지의 애틋함, 사랑하는 개와 늑대들을 떠나보낼 때의 가슴아픔이 중간중간에 오버랩된다. 뭐라고 표현해야 하나. 철학자의 냉철한 이성적인 사유, 자신의 삶의 여러 풍경을 기억하고 관조하는 감성, 그리고 종종 등장하는 독특한 비유적 표현과 깨알같은 유머(특히 자신의 노화를 이야기하며 이 모든 것이 공룡 탓이다. 똑똑한 파충류인 공룡의 후손들이 우리와 공생했더라면 나의 부러움을 꽤 샀을 것이라며 투덜대는 대목은 압권이었다^^)까지... 이 모든 스펙트럼을 한 사람이 품고 있는 것이라니 놀랍다. 달리기는 분명 한없이 단순한 움직임인데, 그의 두뇌는 쉼없이 팽팽 돌아가고 있었을 듯.
'달리기의 목적과 가치는 그저 달리는 것이다. 달리기는 의미나 목적이 멈추는 삶의 장소 중 하나이다. 따라서 달리기는 삶을 살 만한 가치가 있게 만드는 것들 중 하나이다.'(247쪽)
이 책을 읽으며 나도 내 어린시절, 숨이 차오르도록 뜀박질하며 마냥 즐거웠던 날들을 떠올려보았다. 그의 말대로, 그때 나의 달리기의 목적은 '그저 달리는 것'이었다. 그의 표현대로 가장 오래되고, 가장 단순한 놀이인 달리기. 그 순수한 기쁨을 언제부터 잊고 살았는지. '삶의 초기에 내가 알았지만 성장하여 어른이 되면서 잊기를 강요받았던 것'(19쪽)을 기억해내는 달리기, 그 기억의 문을 열어준 이 책에 감사한다. 끝이 없을 것만 같았던 더위도 이제 물러갈 시간, 가을의 공기가 상쾌하다. 구석에 박아뒀던 운동화 끈을 질끈 동여매고, 오랜만에 마음껏 달려봐야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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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사색의 깊이는 경험과 실천에서 나온다. 도구적 관점에서 본 달리기는 그것 자체로는 어떤 의미도 없다. 단지 수단일 뿐. 대개 돈이 도구적 표상임은 어느 누구도 부인하지 않는다. 돈은 그저 종이일 뿐이고, 계좌에 있는 숫자도 돈의 많고 적음을 뜻할 다름이다. 하지만, 그 돈으로 원하는 집과 차를 사거나 기부를 하면 실질적인 가치를 갖게 된다. 그런 점에서 저자는 달리기가 원래는 도구라고 인정했다. 선사시대부터 인간은 강한 신체조건이 없었고, 단백질을 얻기 위해서는 목표물이 지쳐서 쓰러질 때까지 주구장창 쫓아가는 달리기를 연마했다. 지평선 너머 단백질을 많이 갖춘 동물이 쓰러지면 그제서야 포식을 한다. 그런 까닭에 달리기는 살기 위한 생존 수단이었고, 그런 식으로 얻은 단백질 덕분에 뇌가 발달할 수 있는 최소한의 조건을 갖추게 되었다. 저자는 달리기를 그 자체로 의미있는 행위로 보고 싶어한다. 달기면서 주변 풍경을 보면, 조금씩 달라짐을 확인할 수 있다. 계절별로, 혹은 인간의 손과 자연의 영향으로 변한다. 출발한 곳도 오랜 시간이 지나면 변해있을 수 있다. 원점으로 돌아오는 것이 인생이고, 달리기라고 저자는 말한다. 그런 까닭에 이 책을 다 읽고나면 결국 처음으로 돌아가 있겠지만, 얼마나 사색하고 자신을 돌봄에 따라 그 자리가 변해서 조금 다른 점을 보게 될런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을 준다. 달기면서 극한을 체험하고 한계를 넘고, 그걸로 자아를 바라본다는 관점이 매우 마음에 든다. 달리기는 도구가 아니라 그 자체로 의미다란 저자의 의견에 십분 동의한다. 롤랜즈에게 달리기는 장소다. 삶의 변곡점을 촘촘히 이어붙여 변화를 감지하고 받아들이고 감사하는 장소로써 달리기가 인생의 각 장면을 포괄한다고 생각한다. 그의 여정은 쉰살을 앞두고 시작되었다. 마라톤을 하면 인생을 알게 된다는 솔깃한 말에 넘어간 것이 화근이었을지도 모르지만, 체력적 한계는 고사하고 신체의 노화가 보내는 신호를 무시하고 뛰다가 근육 파열을 경험한다. 초반에 나오는 그의 위트는 굉장히 즐겁다. 통풍에 걸렸다고 진단하는 의사와 익살맞은 대화는 저자의 성격을 유추하는데 더 없이 효과적이고 직접적인 기능을 한다. 달린 장소도 매우 다채롭다. 그러면서 그의 엉뚱하지만 흥미로운 주제들로 생각을 전달한다. 특히, 진화론적 사색에 한 면으로, 엉덩이가 큰 영장류는 달리게끔 설계된 것이라는 주장은 상당히 매력적이었다. 휴고라는 저자의 강아지는 어디서나 등장한다. 무척 부러웠다. 영토가 넓은 미국에서, 그리고 주거형태가 정원형이 대부분인 그들 문화에서 강아지 키우기는 전혀 부담이 없어보인다. 게다가 강아지도 넓은 땅을 제 땅인냥 뛰어다닐 수 있어서 더욱 키우는 사람이나 강아지에게 좋다고 할 수 있다. 롤랜즈의 이야기는 심각하게 흥미롭고, 휴고라는 강아지는 부러웠다. 쇼펜하우어가 말한 인생과 사회의 관계가 이런 식이 아니었다면, 삶은 더욱 나아졌을 것이란 대목의 사랑과 논리론으로 이어졌다. 논리와 사랑의 대척 관계를 깨어야 한다. 데카르트도 등장하고 달리면서 참으로 생각도 많이하는 저자다. 마라톤에 흥미가 있지만, 휴고와 같은 강아지와 같이 뛸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기 전에는 저자의 글이나 열심히 읽을 생각이다. 철학자가 달리는 이유, 충분히 알 것같다. 나도 달린다. 마음으로라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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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기는 아니지만 지금 몇달째 매일저녁 걷기를 한다. 나를 알기 위한 걷기는 아니지만 나를 찾기 위한 걷기는 맞는 것 같다. 이 책을 보면서 내가 달려 본 적이 언제인지? 생각해보았다. 적어도 5년은 된 것 같다. 그때 내가 달리기가 좋았던 것은 왠지 내 자신의 한계에 도전하고 있다는 느낌, 후회를 만들지 않고 뭔가 성과를 만들고 내 안의 끓어오르는 무언가를 느끼게 해주는 것 같았다. 이 책을 보며 매일저녁 걸을때면 좀 더 속도를 내서 뛰어볼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전하는 달리기면서 깨달은 인생의 지혜와 성찰들은 내게도 좋은 영향을 가져다 주었다.
자신의 한계를 시험하거나 다른사람과 비교해보려는 사람도 있다. 달리는 이유는 달리기의 의미와 같기 때문에 사람마다 달리는 이유가 다른 것 같다.(p9) 매주 1.5km는 죽음이었다.나는 할 수 있는 한 달렸고 꼭 걸어야 할때는 걸었다.핵심은 쓰러지지 않고 계속 앞으로 나아가기만 하면 되는 것인까.(p28) -본문 중- 그가 달리기를 시작한 이유도 흥미로웠지만 그가 마라톤을 하면서 느꼈던 것들은 마치 인생을 담은 영화를 본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목적과 수단에 대한 이야기들도 그리고 가치와 몰입에 대해서도 느끼는 바가 컸다. 달리는게 뭐가 좋아? 라는 것은 달려보고 난 다음에 자연스럽게 느낄수 있는 것인데 달리기도 전에 내 스스로에게 뭐가 좋은지를 찾으려고 했던 것은 아닐까? 라는 생각도 했다. 그저 예전에 다이어트 용으로 신나게 달리던 때에 느꼈던 그 성취감과 희열감이 내 마음 어디에서 기억하고 있는 정도이니 이제 다시 달리기를 통해 잠자고 있던 나의 정신과 육체를 깨우고 단련시키고 싶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의 달리는 이유는 달리기의 의미와 같다는 글이 나의 달리기에 대한 열정을 키웠다.
많은 사람들이 잘못 알고 있으면서도 집착하는 오해는 엉덩이가 앉아 있으라고 진화된 것이라는 생각이다. 오히려 엉덩이는 달리라고 있는 것 같다. 우리는 정해진 역사대로 살 때 가장 행복하고 건강하며 진정한 우리가 된다(p106) 이것은 인내의 놀이이자 내가 견딜 수 있는 한계가 어느 정도인가를 알아내는 놀이였다. 나는 항상 어제 했던 것처럼 오늘도 할 수 있을까를 알아보려고 언덕을 달렸다. 어떤 방식으로든 언덕과 한번 맞장을 떠 보는 것이 놀이 속 놀이의 핵심이었다.(p141) -본문 중- 나이가 한살 한살 먹으면서 나의 인생관도 달라졌다. 그러니 같은 경험을 하고서도 다른 도달점에 다다르는 경우가 생긴다. 마크 롤랜즈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지금 내게 다이어트용 달리기가 아닌 삶의 달리기가 필요한 시점이라는 것을, 정신적인 달리기가 필요한 시점이라는 것을 느낄수 있었다. 그는 쫒아기지 말고 그저 달리라고 말하고, 가치 있는 것이 있는 곳은 삶의 의미와 목적이 멈추는 곳이라 말한다. 돌아보니 내가 내가 그토록 의미있고 가치있다 여겼던 것들을 멈출수 있는 지점에 도달해본적이 있었나? 나는 쫓지 않고 달렸나? 어느 순간 어떤 것이 수단이고 어떤 것이 목적인지 분별력을 잃고 살때도 있었다. 그의 글들을 보면서 내 자신 스스로 자기반성을 많이 했고 좀 더 진정성있고 본질적인 것들에 대해서 그리고 그 의미들과 시작과 끝점에 대해 돌이켜보는 시간을 가졌다. 나는 항상 어제 했던 것처러머 오늘도 할 수 있을까? 라는 질문을 던질수 있을만큼 충실한 오늘을 기대해보게 되었다. 이 책을 통해 많은 것들을 깨닫고 배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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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기 속에 숨겨진 철학적 의미들을 찾아서...
한가지의 소재만을 가지고 만든 영화들을 본 적이 있다. 그 영화를 볼 때 든 생각이 “혹시 지루하거나 식상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해보지만 보고 난 후 든 생각은 예상외로 잘 만들었다는 것과 하나의 소잿거리로도 충분히 영화를 이끌어가는 매개체가 될 수 있다는 걸 깨닫곤 했다. 조엘 슈마허 감독의 <폰 부스>가 그랬고, 미셸 공드리 감독의 <수면의 과학>이 그랬다. 단순한 소재를 썼으면서도 막상 영화관에 가서 영화를 보면 단순함 속에서 감독이 말하고자 했던 철학적 의미들이 내 마음을 움직이곤 했으니깐.
이 책도 달리기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책 겉표지만 보면 단순히 달리기에 대해 이야기한 것처럼 보이지만 안을 들여다 보면 42.195Km라는 마라톤을 인생에 비유하면서 자신이 달리면서 경험했던 철학적 사유들을 별다방의 카페 모카 위에 얹은 생크림처럼 듬뿍 담아놨다고 보면 될 듯 하다. 그와 함께 달리는 게 숨이 찰 수도 있겠으나 그와 함께 달리다 보면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이자 객관적 관념론의 창시자인 플라톤의 달리기에 대한 표현들을 들을 수 있고, 실존주의 철학의 양대산맥인 사르트르와 하이데거가 말하는 달리기의 의미와 그 사색에 대해 엿볼 수 있다.
개들과 달리기를 시작했던 마크 롤랜즈, 그 개들 중 브레닌은 우리가 늘상 보아오던 개하고는 전혀 다른 늑대개였다. 늑대와 개의 잡종으로 태어난 브레닌과의 달리기는 그에게는 짧지만 강렬했고, 생동감이 넘치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같이 달리던 개들의 잇따른 죽음으로 인해 노화와 죽음이 주는 철학적 의미들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었고, 그 철학적 의미들 속에서 에피쿠로스, 쇼펜하우어, 니체 등의 철학자들이 던지는 삶에 대한 직선적인 메시지들이 내 마음을 우울하게 한 것도 사실이다. 그 중에서도 ‘오늘은 나쁘고, 매일매일 더 나빠질 것이고, 마지막으로 가장 나쁜 그날이 올때까지...그러므로 나는 최선을 다해 가장 나빠질 것’이라는 쇼펜하우어의 삶에 대한 경구를 읽으면서 난 지금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지? 내 자신에게 물어보고 싶다.
숨이 차오르고 젖산이 연소되는 고통 속에 죽을 것만 같던 그 가파른 언덕 위 바로 그 시점에 나는 세상의 다른 어떤 일도 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그 언덕을 달려 올라간 이유는 오직 하나, 달리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바로 그것이 달리기의 목적인에 대한 단서이다. 달리는 이유는 십인샙색일 수 있지만, 달리기의 목적인만은 모두 같다. 가장 순수하고 최고인 달리기의 목적인은 그저 달리는 것이다. 달리기는 그 자체에 목적을 수반하는 인간 활동의 범주 중 하나이다. 달리기의 목적은 달리기에 내재하고 있다. 그러므로 언젠가 나는 그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본문 118쪽 中)
세월이 지날수록 우리의 육체는 쇠약해지고 약해질 것이다. 하지만 약해지는 우리의 육체를 눈뜨고 볼 수만은 없다.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이 있는 게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 아니던가? 지금이라도 신발끈을 조이고 밖에 나가서 걷고 달려라! 걷고 뛰면서 지금까지 내가 살아온 인생들을 되돌아 보고, 그 추억들을 되새기면서 앞으로 나에게 올 인생을 맞이한다면 ‘행복’이라는 단어가 멀게만 느껴지지는 않을 거라고 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