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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仁)은 ‘사람을 사랑하는 것.’ 논어(論語)는, 누구나 한번쯤 들어봤을 동양의 대표학문으로 유가의 기초라 할수 있다. 우리 선조들부터 학문수양의 토대이자, 학자들의 연구이기도 했던 논어는 한문을 전혀 공부하지 않았던 나에게도 읽고싶은 책이였다. 혼란의 시대인 춘추전국시대에의 인물인 공자는 자신의 사상을 전파하여 백성들에게 힘을 주고, 난세(亂世)를 극복하고자 했찌만 전쟁시대에 이상은 사치 와도 같았다.후에 관직을 거쳤지만 생애의 대부분 시간을 교육에 종사하였다 옛날의 서적을 정리하여 시경을 간추려 편찬하고, 춘추를 지었다. 공자의 언행은 후학들에 의해 논어로 편찬 되었는데 유방(劉邦)이 세운 한 나라 시대 사람들은 유학(儒學)만을 존중하면서 그 유학의 창시자인 공자를 위대한 성인으로 추송하게 되었는데 시간이 흐르고 왕조가 여러 차례 바뀌어도 오늘날에까지도 배우고 익히게 되었고 논어(論語) 또한 최고의 고전으로 인식되게 되었다. 나는 소인이라 아직 어렵게 느껴지지만 번역본을 보며 사람이 사람답게 행동해야 함을 다시금 느끼며 예절과 인간관계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는 책이다. 무한반복으로 읽어야 할 책이다. 인간의 도리와, 인성교육 그리고 오랜시간에 걸친 지혜와 배워야할 가르침이 있는 논어는 앞으로도 많은 이들에게 귀감이 될 책으로 남을 것 같다.
손자병법과, 논어,도덕경, 한비자등을 읽고 서재에 꽂는 날까지 정진해야 겠다! ㅎ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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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논어
고전을 다룰때 절대 빠져서는 안 될 책이다. 예전에 한번 논어를 잠시 읽은 적이 있다. 그때 내가 받은 논어는 한문이 너무 많았다. 그래서 포기했다.
다행히 이번에 논어는 한문을 몰라도 쉬이 읽을 수 있어서 좋았다. 일단 읽혀야 책이 아니겠는가.
1. p 45 남이 자기를 알아주지 않는 것을 근심하지 말고 남을 알지 못하는 것을 근심하라.
누구나 남이 자신을 알아주기를 바란다. 그래서 사람들은 뽑내고 싶어한다. 이쁜 옷을 입으면 자랑하고 싶어하고 상을 타도 자랑하고 싶어한다.
하지만 그런 일들은 누구나에게 한번쯤은 다 일어나는 일이다. 꼭 굳이 남들에게 자랑할 이유는 없다. 왜냐하면 역지사지로 누군가 자신이 상을 받거나 옷을 이쁘게 입었다고 자랑하면 정말 진심으로 축하를 해준적이 있는가. 되려 시기와 질투를 받는쪽이 많았을 것이다.
자신이 자랑하는 것 보다 남이 알아서 말해 주었을때 차분히 대응하는 것이 더 낫다는 삶의 처세같다.
2. p 90 덕 있는 사람은 외롭지 않고 반드시 이웃이 있다.
지금 자신의 주위를 둘러보기를 바란다. 곰곰히 생각해 보자. 가슴에 손을 얹어 보자.
자신이 외로울때 누군가 바로 지금 달려 올 수 있는 사람이 한명이라도 있는가? 있다면 그런대로 덕을 쌓았다고 볼 수 있지만 한 명도 생각나지 않는다면 자신을 돌아보길 바란다.
3. p 267 옛날에 배우는 자들은 자신의 수양을 위해서 했는데 오늘날 배우는 자들은 남의 인정을 받으려 한다.
캬~ 이래서 고전이 인류의 보석이라는 것인가?
현재 공부를 하는 우리들은 누구를 위해 하는가? 자신을 위해서? 정말로?
따져 보자. 유아원, 유치원,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한 아이가 이런 교육과정을 거쳤을 때 그 아이는 정말로 자신의 수양을 위해서 공부를 했을까? 아니면 남들에게 인정을 받기 위해 했을까?
남들에게 인정을 받기 위해 코피 흘려가며 새벽까지 공부하고 학원다니고 과외를 받은 것이 아닌가.
사회에 나와서도 나를 위한 공부가 아닌 남들에게 인정을 받기 위한 공부를 한 것이 아닌가. 공무원이 나를 위해서 인격적인 수양을 쌓아주지는 않는다. 안정된 직장이 있을 뿐이다. 물론 이렇게 말할수도 있다. 안정된 직장하에 자신의 수양을 위해 공부 할 수도 있다고. 물론 맞는 말이기는 하나 그렇게 하는 사람 눈씻고 찾아보기도 어렵다.
공부의 원칙은 자신의 수양. 즉, 자신을 위한 것이다. 이 위한다는 것은 돈이 아닌 인격향상일 것이다.
우리가 현재 하는 공부는 오직 돈을 잘 벌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고로 공자의 입장에서 보면 우리는 공부를 하는 것이 아니라 돈을 벌기 위해 자신의 수양은 뒤로 미루고 사회와 한판의 노름을 하는 것이다.
붙으면 살고 떨어지면 낙오되는. 그런 사회 시스템이지만 결코 좌절할 필요는 없다.
인류의 성인들은 그깐 일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으니.
4. p 322 말을 교묘하게 하고 얼굴빛을 꾸미는 경우에는 인이 들물다.
사람을 대할때 이런 사람 있다. 말을 잘하기는 하나 진심이 없는 경우 왜 이런 사람들은 인이 없을까. 당연히 목적에 의해서 자신의 낯빛을 바꾸는 경우이니 이런 사람들에게 일말의 인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5. p 344 소인은 잘못을 저지르면 반드시 꾸며댄다.
잘못을 했으면 반드시 변명을 한다는 말이다. 그냥 자신이 잘못했다고 하면 될 일을 어쩔 수 없이 발생했다고 하는 것이다.
솔직히 보는 사람 입장에서도 이런 사람들은 짜증이 난다. 그렇다고 그 잘못을 일일이 짚어 주는 것도 난감하다. 받는 사람이 어떻게 받아들일지 모르기 때문이다.
6. 논어라는 책을 어떻게 읽을지는 개인이 알아서 하는 것이 나을듯 하다. 고전이니 읽기에 어려움은 있지만 그 어려움을 넘어서면 마음 한구석이 가득차 있다는 포만감에 이를 것이다.
이 책은 각주가 상당히 많다. 그만큼 섬세하게 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고전에 맛을 다시 느끼고 싶은 분들에게 현대 사회의 가치관에 염증을 느끼는 분들에게 주위에 온통 하이에나만 있는 분들에게 논어가 심심치 않은 위로와 삶의 방향을 제시해 줄 것이다.
[출판사에서 제공 받은 도서를 읽고, 저의 주관적인 생각으로 서평이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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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와 그의 제자들의 마음이 담긴 어록語錄을 마음에 품다
공자와 그의 제자들이 쓴 ‘논어’는 아는 사람은 알만한 고전이다. 하지만 ‘논어’를 끝까지 완독한 사람을 찾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그도 그럴 것이 ‘논어’는 춘추전국시대의 유교 경전이자 중국 사서(四書)의 하나로 공자의 말씀을 모아 일정한 순서로 편집한, 요즘 쓰는 용어로 공자의 어록(語錄)을 모아논 책이 ‘논어’인데 이 오래되고 어려운 책을 번역하기가 그리 녹록하지 않은 게 사실이다. 특히나 고전같은 경우는 번역을 잘못하면 배가 산으로 가는 경향이 있기에 중국의 한자를 우리말로 어떻게 풀어쓰느냐가 번역의 관건인데 이번 『논어』는 <사기열전>을 완벽하게 번역한 김원중 교수의 번역이었기에 읽는 내내 솔솔 읽혔고, 독자들이 읽기 편하게끔 어디를 펴도 마음 편하게 읽을 수 있도록 편집한 부분이 맘에 들었다. 사실 고전에 관심이 많아서 중국 고서에 있어서는 김원중 교수의 번역이 최고라는 말은 읽히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난 사마천의 <사기>를 고서 번역의 양대산맥인 김영수님의 완역본으로 읽었었다. 하지만 이번 논어를 읽고 김원중 교수가 번역한 <사기열전>도 읽고 싶은 마음이 든다. 그래서 두 분의 번역 스타일이 어떻게 다른 지를... 내 능력으로 평가는 못하겠고, 마음으로나마 느껴보고 싶다.
최대한 ‘원문原文’에 맞도록 번역을 했고, 오늘날까지 논란을 빚고 있는 구절들의 해석에 있어서는 역대 주석서들 가운데 원전에서 가장 벗어나지 않은 해석을 선택했으면서 다른 주석가들의 견해까지 첨부해서 확인할 수 있도록 한 김원중 교수의 노력은 『논어』의 첫 장을 넘기면서부터 빛을 발한다.
제 1편 | 학이(學而)
교언영색_1.3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말을 교묘하게 하고 얼굴빛을 꾸미는 자들에겐 인仁이 드물구나!” 子曰 “巧言令色, 鮮矣仁.” (본문 37쪽)
총 20편으로 구성된 『논어』는 제일 처음 부분은 공자께서 말씀하시고, 그 다음은 그 말에 대한 해석이 이어지고, 그리고 제일 마지막은 그 말씀에 대해 한자어로 표기하고 있다. 거기에 모르는 부분은 체크해서 밑에 자세한 해설을 달아주고 있어서 한자를 모르는 독자들이나 한자에 익숙하지 않은 독자들이 읽기에 거부감이 없다는 게 내 생각이다. 옥편 한 권 옆에 두고서 모르는 한자가 나오면 찾아가면서 『논어』를 읽는다면 옛 성현인 공자의 말씀도 되새기고, 한자어도 배우는 일거양득의 효과가 있으리라 생각된다.
제4편 | 이인(里仁)
효도의 기본_4.20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돌아가신 후] 3년 동안 아버지의 방식(도리)을 고치지 않으면 효도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子曰 “三年無改於父之道. 可謂孝矣.”
지금 시대에서는 맞지 않는 말이 될 수도 있겠지만 돌아가신 부모님의 방식이 좋든 싫든, 호불호를 떠나서 3년 동안 부모님의 방식을 있는 그대로 사용하거나 수용할 수 있다는 것이 정말 효도의 기본이라면 나는 부모님께 어떤 자식인지 곰곰히 생각해 볼 대목이다. 부모님의 잔소리는 듣기 싫어서 인상쓰기 일쑤고, 부모님이 잘못이라도 했을 양이면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는 나 자신을 보면서 이 대목에선 나에게 회초리라도 들고 싶은 심정이다.
한 권의 책을 읽으면서 이렇게 뿌듯함을 안겨준 『논어』, 그리고 쉽게 번역한 김원중 교수께 감사드리고 싶다. “스승이 죽자 그의 제자들이 그것을 모아 논의하여 편찬하였기에 ‘논어論語’라고 한 것이다”라는 『논어』의 뜻처럼 많은 독자들이 논어를 읽고 공자와 그의 제자들의 깊은 뜻을 헤아렸으면 하는 바람이고, 옛 성현의 글들이 난세(亂世)를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총명한 지혜와 넓은 혜안이 되어주길 바라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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子曰, “學而時習之 不亦說乎 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 人不知而不慍 不亦君子乎”
논어(論語), 한문을 전혀 공부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아마 이 책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논어는 동양에서 성경(聖經) 못지않게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고, 세기가 변하는 동안에도 꾸준히 읽혀져 왔으며 또 각 시대별, 나라별 학자들에 의해 이룩한 엄청난 연구와 풀이, 번역들이 쏟아져 나왔다. 주지하다시피 논어(論語)는 유가의 바이블이다. 하지만 논어는 공자의 손으로 편찬한 책이 아니며 본격적인 경(經)도 아닌 어록 성질의 것이다.
공자는 기원전 551년 9월 28일에 태어나서 기원전 479년에 세상을 떠났고, 그 때 나이는 73세였다. 이름은 구(丘), 자는 중니(仲尼), 춘추말기 노나라 추읍사람이다. 우리나라 대구광역시(大邱廣域市) 할 때 ‘구’자가 원래는 ‘구(丘)’자 였는데, 성인(공자)의 이름자를 지명(地名)에 함부로 사용할 수 없다 해서 ‘구(邱)’자로 바꾸었다고 한다. 3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어머니 안씨는 공자를 데리고 당시 노나라의 수도인 곡부로 가서 시서예악(詩書禮樂) 및 여러 가지 기예를 배웠다고 한다. 공자가 살았던 춘추전국시대는 그야말로 약육강식(弱肉强食)의 비정한 전란의 시대, 혼란의 시대였다. 전쟁의 불길이 끊이지 않던 혼란기에 백성들이 겪는 참혹한 재난을 경험하면서 사회의 부패와 백성들의 고통에 슬픔과 분노를 느낀 공자는 자신의 사상을 전파하여 난세(亂世)를 변화시키고 도탄에 빠진 백성들을 구원하려고 생각했다. 그래서 주유천하 즉 여러나라를 돌며 임금들에게 예악(禮樂)을 진흥시킬 것을 권유하였으나 영토 확장을 위한 살벌한 정복전쟁이 끊이지 않던 시대에 이와 같은 이상주의자의 주장은 눈길을 끌 수 없었다. 공자는 50세 때 정치에 참여하기 시작하여 노나라의 사공, 사구의 관직을 거쳤다. 그러나 관직생활은 길게 가지 않았고, 마지막에는 어쩔 수 없이 노나라를 떠나야 했다. 그는 자신의 정치 주장을 실현시키기 위해 제자들을 이끌고 위 송 진 등의 10여개국을 주유하였다. 하지만 소득이 없었다. 68세 노구를 이끌고 다시 노나라로 돌아와서 전적을 정리하고 전수하는 일에 전심전력을 다하다 73세로 세상을 떠났다. 공자는 생애의 대부분 시간을 교육에 종사하였다. 옛날의 서적을 정리하여 시경을 간추려 편찬하고, 춘추를 지었다. 공자의 언행은 후학들에 의해 우리가 읽어 볼 논어(論語)로 편찬되었다. 춘추시대(春秋時代)에는 여러 학파가 존재했지만, 유방(劉邦)이 세운 한 나라 시대 사람들은 오직 유학(儒學)만을 존중하면서 그 유학의 창시자인 공자를 위대한 성인으로 추송하게 되었는데 시간이 흐르고 왕조가 여러 차례 바뀌어도 공자의 인기는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게 되면서 오늘날에까지 이르게 되었고 논어(論語) 또한 최고의 고전으로 인식되게 되었다.
공자 유가(儒家)를 창시하고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을 주장하였다. 공자(孔子) 최고(最高)의 덕(德)은 ‘인(仁)’ 인(仁)은 ‘사람을 사랑하는 것.’
논어(論語)는 송나라 주희(1130~1200)에 이르러 맹자(孟子), 대학(大學), 중용(中庸)과 함께 사서(四書)로 불리게 되었다. 그는 사서집주를 엮었는데 그 후로 사서가 五經(시서역, 춘추, 예기) 못지않은 유가의 경전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논어(論語)는 공자의 책 맹자(孟子)는 맹자의 책 대학(大學)은 공자의 직계 제자인 증자(曾子)의 책 중용(中庸)은 공자의 손자이며 증자의 제자인 자사의 책
이 사서(四書)야말로 공자-증자-자사-맹자로 이루어지는 공맹학(孔孟學)의 도통(道統)과 사상(思想)을 이해하는 지름길이 되는 책이라 생각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이들 사서(四書)는 조선시대에 와서는 과거시험 과목으로 채택되면서 더욱 더 큰 관심과 주목 그리고 가치와 인기, 사랑을 받게 되었고, 선비들의 필독서(必讀書)가 되었다.
김원중 교수는 일찍이 사기를 통해서 잘 알고 있다. 사기를 읽으면서 감동을 많이 받게 되었고 그의 글을 신뢰하게 되었다. 이번에 새로 발간된 논어 또한 대단히 마음에 든다. 손자병법, 한비자, 정관관요 등의 책과 함께 서가에 나란히 꽂아 두면, 서재의 품격이 달라질 것만 같다. 세상의 모든 인생을 위한 고전, 이 시대 최고의 고전, 그대 삶이 소중하다면 방황하지 말고, 주저하지 말고 논어(論語)를 읽어라. 그리고 읽으면서 푹 빠져들어라.
[네이버 북카페를 통해 제공받은 도서를 읽고 작성된 서평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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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에 대한 관심 여부를 떠나서 '공자'와 '논어'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해당 서평은 출판사에서 제공받은 도서를 읽고 작성되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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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어>에서 설명하는 ‘군자’ , ‘인’ , ‘예악’ , ‘중용’ , ‘효’. ‘의로움’ 등은 너무나 추상적인 개념들이라 뭐라고 이야기를 이어나가야 할지 참으로 난감한 따름이다. 좋은 개념임에는 분명하다. 가히 언어의 판타지다. 나로서는 도달하지 못할 이상향이랄까. 돈키호테의 거침없음이 하나의 이상향이었다면, <논어>의 군자 또한 이상향의 그것이었다. 공자. 그는 이상향을 추구하는 이상주의자였다. 어떤 문지기가 그를 보고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하려고 하는 사람”이라고 했다. 스스로 넓고 깊게 설정해놓은 높은 이상. 즉, ‘군자의 길’을 위해, 그가 칭송한 7인의 성인(백이, 숙제, 우중, 이일, 주장, 유하혜, 소련)에 근접하기 위해, 그는 생전에 충분히 현실정치에 참여할 수 있었건만, ‘군자의 길’을 위한 거추장스러운 남의 이목에 신경을 쓰느라 정치가로서 만개할 꿈을 접게 되었다. 현실과 타협하려는 많은 유혹을 전국 각지에서 같은 길을 모색하고자 몰려든 제자들과 함께했기 때문에 형성된 긍정적인 인간관계. 그리고 훗날 유명해진 많은 제자가 자신을 낮추며 스승을 해와 달처럼 떠받들게 한,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큰 노력을 함께했기에 수천년이 지난 현재까지 그를 성인의 자리로 이끌었을지도 모르겠다. “무엇을 안다는 것은 그것을 좋아하는 것만 못하고, 무엇을 좋아한다는 것은 그것을 즐기는 것만 못하다.” 6.20 ‘이 유명한 말이 <논어>에 속한 말이었다니’ 하는 생각을 불러오는 명언들은 여러 장면에서 등장하지만, 그중에서도 특히 이 말을 쓸 때, <논어>에서 유래된 말이라고 허세를 떨어볼 생각에 갑자기 설렌다. “날마다 내가 모르던 것들을 알게 되며, 달마다 내가 잘할 수 있는 것을 잊지 않도록 하면 배움을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19.5 즐기는 사람을 가장 최고로 치는 그였을지라도, “지위가 없는 것을 근심하지 말고, 그 자리에 설 수 있는 능력을 근심하라,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이 없음을 근심하지 말고, 다른 사람이 알아줄 만하도록 되는 것을 추구하라. 4.14”며 오히려 근심하여 독려하기도 했다. 또한, 정당성이 결여된 곳에서는 절대로 일하지 않겠다고도 했다.(“자리가 바르지 않으면 앉지 않으셨다.” 10.10) , (“길이 다르면, 서로 도모하지 않는다.” 15.40) 정당한 곳을 찾기 위한 기다림. 기다림 동안 자기를 향상하기 위한 지속적인 노력을 아무도 알아주지 않을 때, 노력의 미흡함에 밖을 향해 하소연하기보다는 자신의 탓으로 돌리고 반성하는 것이 군자의 정신이며, 또다시 정진해야만 군자라고 했다. 이 <논어>의 말씀을 맹목적으로 따르는 것은 공자들의 제자들에게도 역시 버거웠던 것 같다. 군자와 소인을 비교하는 이야기가 계속될수록 군자가 되기는 어려워 보이나, 소인이 되기는 쉬워 보인다. 따라서 소인을 경계하면서 군자가 되려는 수신(修身)의 정신을 칠 할로 본다면 우리 주위에 있는 사람 중 누가 소인인지 구별할 눈을 삼 할로 잡아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다. 칠 대 삼이면 중용에 어긋난 걸까? 어쨌든 간에 주위에 교언영색(“말을 교묘하게 하고 얼굴빛을 꾸미는 경우”) 하는 자를 제일 주의해서 살펴야 하겠다. 끝으로 비루하게는 살고 싶지 않다. “비루한 자는 관직을 얻기 전에는 얻지 못할까 근심하고, 이미 얻고 나서는 그것을 잃을까 근심한다. 만약 그것을 잃을까 근심하게 되면 무슨 일이든 못 하는 것이 없다. 17.15” [네이버 북카페 서평이벤트를 통해 읽고 주관적인 견해로서 써내려 간 글임을 알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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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 철학 [논어] 공자, 김원중 역, 글항아리, 2012 ` 미국의 철학자 애들러는 [독서의 기술]이라는 책에서, 읽는다는 것은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적극적인 행위이며, 적극성이 높은 독서일수록 좋은 독서라고 이야기한다. 좋은 독서를 하기 위해서는 즐기는 독서와 배우기 위한 독서를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좋고 나쁨의 문제가 아니라, 내가 지금 책을 읽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명확하게 판단을 하고 책을 선택해야 한다. ` 지극히 개인적이고 편협한 생각일 수도 있지만, 요즘 많이 출판되는 고전 다이제스트 부류의 책은 읽는 순간만을 만족하게 하는 즐기기 위한 책이다. 이런 책을 통해서 뭔가를 배울 수 있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이런 책은 편집자가 고전들을 요약하고 그것을 현실에 바로 적용할 수 있을 것처럼 써놓았을 뿐이다. 고전을 요약한다는 것도 말이 안 되지만, 독자가 적극적인 노력 없이 책을 이해했다고 느낀다면, 최소한 애들러가 말하는 좋은 독서를 했다고는 할 수 없다. 독자는 순간적인 만족을 확대 해석하고 있는 것이 아닌지 의심해 볼 필요가 있다. ` 책을 통해서 뭔가를 배우고 깨닫기를 원한다면, 고전을 직접 대면해야 한다. 고전은 독자의 적극적인 행위가 없으면 읽을 수 없는 책이기에 좋은 독서란 결국 고전을 읽는 것이다. 이 책의 저자도 이와 비슷한 말을 하고 있다. “대표적인 주석서들의 내용도 함께 읽으면 독서의 재미는 배가 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어느 정도 내공이 쌓이기 전까지는 주석서가 독이 될 수 있다.”“한문 실력이 어느 정도 뒷받침된다면 원문을 같이 읽어야 [논어]의 깊은 맛을 알 수 있다는 것은 두말하면 잔소리다.” ` 이 책의 저자도 고전과 직접 맞서라고 한다. 그렇지만 한글세대가 한문 실력을 키워서 논어를 혼자 읽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논어와 비교할 수 있는 플라톤의 대화편을 보자. 고대 희랍어로 쓰인 책을 읽어야지 고전을 읽는 것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수많은 학자가 지금도 새로운 번역서를 내놓고 있으며, 많은 사람이 번역서를 통해서 고전의 진수를 맛보고 있다. 이 책은 고전과 직접 대면할 수 있는 괜찮은 번역서다. [논어]의 평가를 떠나서, 이 책의 가장 좋은 점은 한글 번역문의 가독성이 좋다는 것이다. 처음 읽을 때는 해제를 꼼꼼히 읽어보고 본문의 한글만 일독一讀 하는 것도 도 좋을 것 같다. 두 번째 읽을 때는, 저자의 충고처럼 중간 중간 읽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차례로 주석과 원문 한자를 감안해서 천천히 읽으면 좋을 것 같다. (일부 번역서들은 원문을 표기하지 않거나, 작은 글씨로 인쇄를 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런 때면 무시당하는 느낌이 들었다.) 이 책은 한글 번역문 아래 원문이 인쇄되어 있다. 한글만 읽을 때에도 방해되지 않으면서, 우리가 학창시절에 익혔던, 몇몇 유명한 문구들을 원문으로 다시 읽어볼 수 있는 것도 좋다. 개인적으로는 짧은 원문에 주석표기를 하지 않고, 한글 번역문에 주석표기를 함으로서 원문의 가시성을 높인 편집방식도 좋았다. ` [논어]에는 많은 의미가 담겨 있지만, 저자는 이런 점을 유의해서 읽어보라고 한다. ` 우리는 [논어]에서 철저히 비주류로 살다 간 실패한 정치인이 어떻게 위대한 사상가의 자세를 함께 견지하는지를 생생하게 살펴볼 수 있다. (해제 中에서) ` 소크라테스나 플라톤이 그랬던 것처럼 공자도 한평생 인정받지 못했다. 핍박을 받으며 살았다. [논어]의 한 문장 한 문장에 담긴 뜻도 중요하지만, 그들의 책을 마주하고 있는 나는, 어떻게 살아왔는지, 어떻게 살아갈지, 다시 한 번 생각해본다.2012.03.27 ` [네이버 북카페를 통해 받은 도서를 읽고 작성된 서평입니다. 본 서평은 작성자 본인의 주관적인 견해에 의하여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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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양대 김원중 교수가 논어 완역본을 출간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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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논어>란 서적에 대해 물었을 때 자신있게 대답할 수 없을 것 같았는데, 막상 읽어보니 익숙한 구절들이 굉장히 많았다. 오랜 시간동안 한국인들이 읽어왔고 한국 문화 속에 곳곳이 스며들어있어서 그러할 것이다. 또한 그때는 내용을 숙고하지 않았지만, 예과 1학년 때 수업시간에도 배웠던 까닭도 있을 것이다.
읽어보니, 배우는 사람들이 간직할 만한 빛나는 구절이 많았다. "나처럼 배우기를 좋아하는(好學) 사람은 없을 것'이라고 자신하는 공자였다. 아마도 자기 자신을 위해 또 제자들을 가르치기 위해 그런 문구를 남겨놓았을 터다. 한자 원문을 이해하려면 한글 해석이 필요하긴 한데, 한글로 풀어 놓으면 어딘가 평범하고 그저 그런 문장이 되어버린다. 한글 해석을 읽고, 한문 문구를 읽으면 그 간명함에 매료된다. 한자 문구는 간결하여 외우거나 적어두고 나중에 꺼내어 생각하기 적합하다.
지식인으로 살았던 공자의 고민도 느낄 수 있었다. 지식인의 본분에 맞게 군주나 정치인들의 행적과 도덕성을 날카롭게 비판하지만 그럴수록 등용되기 어려워지는 딜레마인 것이다. 내 자존심과 학문적 양심을 지킬 것인가, 타협할 것인가, 어느 선까지 타협할 것인가? 예나 지금이나 크게 다르지 않은 모습이다.
공자는 사람의 선하고 도덕적인 면을 신뢰하고 있다. 하지만 선악이 공존하는 지킬과 하이드 같은 다면적인 인간의 모습을 생각했을 때, 이는 순진한 바람으로 보이기도 한다. 후반부 읽다보면 공자 스스로도 자신이 말한 대로 지키기 어려워 언행불일치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그 역시 도덕적 지침대로 사는 것이 쉽지 않았지만, 본인의 선하고 어진 모습을 위해 부단히 노력한 것이다. 인간의 선한 본성을 잘 기르도록 교육하는 것은 개인적, 인격적 측면에서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사회적으로 선한 행동을 잘 보상할 수 있는 제도 역시 잘 갖추어져야 할 것이다. 본능적 욕망을 가지고 있고 선악을 끊임없이 오가는 인간의 현실적인 모습을 인정했을 때, 이들이 조화롭게 살도록 많은 고민이 필요하다.
논어를 읽고 나니 성악설적 측면에서 쓰여진 책, 욕망에 흔들리는 인간에 초점을 맞춰진 책들을 읽고 싶다. <한비자>나 마키아밸리의 <군주론>같은 책을 읽어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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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繪事後素]를 번역한 글.
"'고운 미소에 팬 보조개, 아름다운 눈동자에 또렷한 눈, 흰 바탕에 여러 가지 색깔을 그렸구나'라는 말은 무슨 뚯입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그림 그리는 일은 흰 바탕 이후의 일이다." 자하가 여쭈었다. "예는 [인의] 다음에 온다는 것입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나를 일깨우는 자는 상 商이로구나. 비로소 [너와] 더불어 "시"를 이야기할 수 있게 되었구나."
김원중 번역 논어의 총20편중 제3편 팔일에 나오는 사람은 좋은 바탕이 있은 뒤에 문식(文飾)을 더해야 함을 비유하여 이르는 말인 [繪事後素] 대중에게 막대한 영향을 끼치는 현대 문화, 예술, 방송등에서 종종 "표현의 자유"에 대해 논란이 불거질때 염두에 두면 좋을만한 공자의 말씀인 것 같다.
모름지기 반듯하고 단단한 바탕위에서 생성되어진 [표현]이 아니고서는 그 가치를 인정함에 있어서 엄정한 잣대가 필요한 세상이 아닌가 생각된다. 검증되어지지 않은 쭉정이 같은 언어들이 무성한 인터넷상의 세상에서 객관적이거나 전문적인 바탕이 없이 사람들은 이리저리 휩쓸려다니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다.
인한 사람을 이웃으로- 논어 제4편 이인里仁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마을이 인仁한 것은 아름다운 일이다. [스스로]가려서 인한 사람들이 사는 곳에 살지 못하면, 어찌 지혜로움을 얻었다고 하겠는가?"
[맹모삼천지교]가 떠오르는 교육을 위한 맹모들의 이사철 분주함이 생각난다. 하지만 정작 머물만한 장소에 자리를 잡을 줄 아는 지혜야말로 삶의 근본적 소양이라는 논리는 참으로 중요한 이야기이다. 사람도 가려서 사귀어야 하듯 제 몸이 살아나가는 터를 선택함에 있어 기준이 仁이라는 것은 현대인들의 삶으로 끌어온다해도 "정말 행복하게 잘 살고 싶은가?" 하는 물음에 "그렇다면 仁한 사람들이 사는 곳에 살아라!"하는 해답이 완벽하지 않은가.
신설되는 지하철 노선도를 따라... 혹은 신도시의 유망한 아파트 집 가격의 투자성을 따져서 철새처럼 이동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도 [仁한 사람들이 사는 곳]이 존재하는가?
논어의 내용이 아니어도 김원중 번역본의 가치를 떠나서도 공자가 지향하는 바가 공통적으로 어느것인가를 분별하는 일은 그리 어렵지가 않았다. 논어의 번역을 위한 학문적 소양이 얼마나 위대한 역자인지 책의 전문적 편집의도가 얼마나 우수한 수준인지 나는 잘 알지 못한다. 다만 논어의 내용이 고전부터 현대를 막론하고 그 위대함을 높이 평가하는 근거는 바로 [참된진리]를 말하고 있어서가 아닐까하고 생각해보게 된다.
공자의 네 가지 가르침을 제자는 학문, 덕행, 충심, 신의라 전하고 있다.
"선한 사람은 내가 만나보지 못하는구나. 한결같은 사람을 만나 볼 수 있다면, 그것으로 좋겠다. 없으면서 있는 척하고, 비었으면서도 가득 차 있는 척하며, 곤궁하면서도 부자인 척하니, 어렵구나, 한결같음을 지닌다는 것이!"
공자의 이 말을 귀담아 듣고서 한결같음을 지닌 우리가 되기위해 애를 쓴다면 우리가 머무는 이곳은 저절로 仁한 세상이 될 것이다. 교육자이건 정치인이건 종교인, 학부모... 仁한 세상을 이루는 바탕이 되어야할 바로 자신. 공자의 [논어]를 읽는 풍토가 환영받는 다는 것은 좋은 조짐이 아닐 수 없다.
김원중님의 [논어]번역이 어느정도의 훌륭한 전문성을 보여주는지 가늠하기조차 불가한 범상하기그지없는 독자로서 감상을 말하자면 [논어]를 읽었다면 비었으면서도 가득 차 있는 척할 것이 아니라 仁한 세상의 바탕이 되는 일에 힘써야한다는 것이다. 지혜를 얻는 자격엔 제약이 없으니......
[네이버 북카페를 통해 제공받은 도서를 읽고 작성된 서평입니다. 본 서평은 작성자 본인의 주관적인 견해에 의하여 작성되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