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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 무언가를 느꼈는데, 그것이 온전히 되말해지지 않는다' '조형될 수 없는 이미지가 불쑥 상기되거나, 발설된 언어에 가만히 침묵이 체류하고 있거나, 도저히 언어로 말해질 수 없는 것이, 묘사나 서사가 아니라 문법이라는 수단만으로 어떤 감각을 일깨우곤 하는 키냐르의 언어를 우리말로 옮길 때 이런 상실감은 더욱 크다' '세상의 모든 아침은 다시 오지 않는다 Tous les matins du monde sont sans retour.키냐르는 현재진행형의 상실을 다양한 상으로 은유하고 환유한다' 『세상의 모든 아침』은 음악을, 예술을, 사랑을 말하나 그 말 뒤에는 시(詩)라는, 생(生)이라는 배후가, 심연이 있다. ----- 『세상의 모든 아침』 옮긴이의 말 중에서 발췌
문학 작품의 서문이 아니라 '옮긴이의 말'을 빌어 작품을 재조명하는 시간을 갖는 경우는 흔치 않다(나의 경우엔 그렇다). 『세상의 모든 아침』은 소설이라 서문이 없을뿐더러 뭔가 잡힐 듯 말 듯 한 이 느낌을 헤아릴 길이 없어 '옮긴이의 말'을 의지하는 수밖에 없다. 책을 읽는 내내 옮긴이가 궁금하기도 했다. 우리말로 유유히 진행되는 문장 곁에 분명 프랑스어가 흘러가고 있었다. 옮긴이는 키냐르가 '문법'에 의거하여 '언어로 말할 수 없는' 이야기를 절묘히 펼쳐간다고 했는데, 프랑스어의 특이한 시제인 단순과거와 부정과거의 차이 또는 뉘앙스를 알고 있다면 이 책의 깊이와 무게를 더 섬세히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래도, 원문이 특별히 궁금하지 않을 정도로 우리말로 변환된 키냐르의 사유는 적잖은 파문을 일으킨다.
이 책을 읽으며 절절한 감정이 차곡 쌓였다. 때로는 풍경으로 때로는 날씨로 때로는 생김새로 때로는 음악으로 때로는 색채로 다양한 이미지가 다가온다. 그러나, 이는 '도저히 언어로' 말하기 힘들다. 동시에, 이 미묘한 울림을 언어로 말하지 않으려는 것도 참을만하지 않다. 소설을 읽었으나 시를 읊조린 것 같고 철학의 한 부분을 고찰한 것 같기도 하고 비극적 아름다움을 껴안은 아리아를 들은 것 같기도 하다. 안타까움과 슬픔, 아련함과 연민... 속수무책으로 (나의 기대와) 엇나가는 전개에 조바심이 나기도 하고, 현실을 매정하게 부정하며 자신의 원칙을 고수하는 주인공 생트 콜롱브가 달라지기를 바라기도 한다. 그냥 혼자서 붙들고 있기에는 너무 탁월한 업적이고, 세상에 비밀로 하기에는 너무 진실된 인생이니까. 내 편에서 옳다고 믿어볼 용기가 나지 않는 것을 이 인물은 '실천'하고 있다. 나는 진정 내가 바라는 인생의 정의를 한참 전에 잃어버렸고, 뛰어나기를 바라지는 않되 모자람도 없기만을 바라며 세속의 영역에 아무렇지 않게 정착해 버렸기에 이와 정반대의 생을 보여주는 콜롱브 앞에서 당황할 수밖에.
누군가가 (표시나게) 역정을 내며 내가 너무 '왜'라는 말을 잘 한다고, 걸핏하면 모든 일에 '왜'부터 갖다 붙인다고 지적한 적이 있다. '왜?!'라는 말은 상대에게 자신을 쏘아붙이는 인상을 주며 상황에 긴장을 더하여 불쾌감을 줄 수 있음을 그때 깨달았다. 나는 정말 그 이유가 알고 싶고, 그 이유를 알아야 상대를 이해하고 상황을 정리할 수 있다고 생각하더라도 말이다.
(119-120 쪽)
생트 콜롱브는 '왜' '무엇을 위하여' , 이런 질문은 하지 않는다. 이유는 (옮긴이의 말을 빌자면) 이렇다. 생은 명사가 아니라 동사다. 생은 현재진행형일 뿐 '무엇'이 아니며, '무엇'을 지향하지도 않는다. 이런 식의 사고도 모르며 이런 식으로 살지도 않기에 나는 프랑스어의 '왜'가 갖는 의도에 충실히 순종하며 '왜'를 남발해 왔다. (다시 옮긴이의 말을 빌자면) 프랑스어의 '왜 pourquoi?'는 '무엇 quoi'을 위한 pour'것인지를 늘 물음으로서 방향을, 목적을 강박적으로 탐색시킨다. 매사에 '왜'를 들이대는 것은 방향과 목적을 강박적으로 찾아 나서게 하므로 듣는 이에게 불쾌한 중압감을 준다. 물론 '왜'는 나 자신을 향할 때가 더 많은데 '왜'가 쌓여갈수록 나도 스스로 가하는 강박적 탐색 때문에 적잖게 괴로워지는 것이다.
이제는 연습한다. 의식적으로 내 입에서 '왜'라는 단어가 나오지 않도록 제어할 셈이다. 모든 일에 있어서 미리 목적과 방향 그리고 끝을 내다보려고 안달하지 말아야 한다. '왜'를 몰아내고 그 자리에 이 문장을 밀어 넣고자 한다 "세상의 모든 아침은 다시 오지 않는다 Tous les matins du monde sont sans retour".현재진행형으로 움직이고 있는 생(生)을 가급적 자주 간파하며, 지금 벌어지고 있는 생의 이 단면에 빠져들자는 것이다.
사실 현재의 이 순간 나의 생 하나에만 집중하고 있어도 시간은 무참히 빨리 지나간다. 내가 알지도 못하는 앞으로의 '무엇을 위하여 pourquoi' 의미와 목적을 부여할 틈이 없다. 무심히 제 갈 길을 가면서 우리를 쇠락시키는 시간에 맞서는 방법은 현재 이외의 그 어떤 것에도 한눈팔지 않는 것뿐이다. 장밋빛 미래를 꿈꾸며 현재의 부족함과 난관을 꾹 참아내는 것, 그 결과 현재의 진가를 깎아내리는 것은 약삭빠른 시간과 한패가 되어 내 생의 쇠퇴와 소멸을 부추기는 것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어떻게 '현재진행형'을 충실히 적용할 수 있을까? 단순하며 절대적인 그 무엇이 필요하다.
오두막에 틀어박혀 제노바산 낡은 벨벳 천 조각을 씌운 앉은뱅이 의자 위에서 엉덩이가 닳도록 시간을 보냈다. 생트 콜롱브는 이곳을 자신의 '보르드'라고 불렀다. 보르드는 버드나무 아애 물이 흐르는 축축한 가장자리를 가리키는 옛말이다.(---) 선율이 다시 생각날 때면, 온통 정신이 거기에 쏠려 있을 때면, 선율이 그의 고독한 침대 속까지 따라와 그를 몹시 괴롭힐 때면 얼른 붉은 음악 노트를 펼쳐 적기 시작했다. (18~19쪽)
75쪽
현재진행형으로 생을 살아가다 보면 '언어'가 끼어들 자리가 없다. 시끄러우면 '현재진행'중인 상황을 보지도 듣지도 못한다. 미사여구로 들끓으며 소란스러운 언어를 떠나 '침묵'으로 들어가는 편이 낫다. 그 침묵 속에서 '그저 내 할 일을' 하며 '그렇게 내 운명을 완성'해가는 것에 몰두하면 된다. 그러다보면 '살아있는 내 작은 심장 조각'을 문득문득 발견하는 행운과 행복을 차지할 수 있다.
그는 언어에 대한 애착이 거의 없었다 (15쪽)
옮긴이의 말에 따르면, 파스칼 키냐르 역시 언어에 속한 사람이 아니다.
파스칼 키냐르는 글쓰기의 열정을 언어 자체에서 찾지 않는다. 그는 미문을 추구하지 않는다. "언어는 행복의 도구가 아니며, 개인 혹은 개별적인 것의 산물이 아니다."(『은밀한 생』)
이제부터는 소란과 소음의 자리에 유혹되지 않겠다. 소모성 대화(속 시원하게 '잡담'이라고 칭한다)에 끼어 앉아 있으면서 이 불편함을 '소소한 행복'이라는 이름으로 감추려 하지 않겠다. 그리고, 글도 남발하지 않겠다. 리뷰도 간단히 적어야 한다. 언어를 증폭시키지 말고 비대해지는 언어의 거품 속에서 허우 적거는 사이, 본질을 놓치는 아이러니가 없어야 한다.
세상의 떠들썩한 자리를 외면하고 왕의 부름도 거절하고 자신의 작품을 출판하지도 않고 오로지 자신의 오두막에서 음악의 심연에 빠져드는 것을 선택한 생트 콜롱브. 그에게 행복만 찾아온 것은 아니다. 일찍 세상을 뜬 아내, 고립된 삶에 강제로 편입된 두 딸, 그리고 큰 딸 마들렌의 가련하게 타들어간 인생, 제자를 자처하며 찾아온 마랭 마레, 그가 이 신비하고 음습한 가정에 일으킨 비극의 서사 등으로 한 개인으로서의 삶은 우울과 어두움이 압도적이다. '무엇'을 추구하지 않고 침묵과 고립 속에서 자신의 열정에 파묻히기로 일찍이 결단했기에, 생트 콜롱브는 이런 생의 크고 작은 파국에도 결코 동요하지 않는다. 고집 센 외길은 오히려 세속을 향해 마음껏 뛰어들어가 세상적 성공을 거둔 제자 마랭 마레를 흔들어 놓았다. '무엇'을 끝까지 밀어내는 이와 '무엇'을 거세게 쫓는 이의 대립과 갈등을 조마조마하게 지켜보며 은근 후자의 편에 서려고 했던 나도 결국 항복한다. '생에 대한 열정'이라고 밖에는 쉬이 표현할 길이 없지만, 생트 콜롱브의 생의 방식은 분명 이런 상투적인 칭송을 거부하고 뛰어넘는다.
비올라 다 감바 viola da gamba 16~18세기에 유럽에서 널리 사용된 현악기로 '다리 사이에 놓고 연주하는 비올라'라는 뜻이다. 훨씬 더 무게감을 실어주고, 훨씬 더 우울한 톤을 만들기 위해 그는 저음의 현을 하나 덧붙였다. 손의 무게감을 덜어주고, 검지와 중지만 사용해 말총 활 위에 살짝만 힘을 실어주는 활 기법을 고안했다. 그것은 아주 탁월한 기교를 만들어냈다. 그의 제자 가운데 하나인 콤르 블랑은 그가 인간 목소리의 모든 굴곡을 모방하기에 이르렀다고 말했다. 가령 젊은 여인의 탄식에서부터 중년 남성의 오열까지. 앙리 드 나바르의 전장에서의 외침부터 그림 그리는 데 열중하는 아이들의 부드러운 숨소리까지. 성욕을 불러일으키는 거친 헐떡임부터, 기도에 몰입한 한 남자의 장식음 거의 없는, 무음에 가까운 저음까지. (11쪽)
담담하게 무겁게 예리하게 집요하게 파고드는 이 책의 모든 문장들과 단어 하나하나는 읽는 이에게 '세상의 모든 아침'마다 내면에서 들리는 소리를 듣게 한다. 뚜렷한 목적을 쫓지도 않고 분명한 언어로 새겨놓지 않아도 생에는 별일 없는 시간이란 있을 수 없다. 고음에서 저음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소리에서 자연의 소리에 이르기까지. 들리기도 하고 들리지 않기도 하는 저마다의 소리에 귀 기울이며 각자의 생에 각자의 열정을 실어내기에 너무 바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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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스칼 키냐르는 ‘생트 콜롱브’라는 알려지지 않은 음악가를 소설로 탄생시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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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찍부터 영화화되었을 정도로 유명한 작품이라 구입을 했는데... 딸 둘을 남기고 아내가 먼저 죽자 주인공은 세상과 담을 쌓고 오직 비올라 연주에 몰두하며 살아가는데, 어쩌다가 겨우 남자제자 한 명을 받아들여 자신의 기술을 다 전수해 주지만 내심 출세지향의 제자에 마뜩치 않은 상태에서 제자와 큰 딸을 서로 사랑하다가 제자의 배신? 으로 큰 딸은 자살하고... 이렇게 저렇게 해서 결국 주인공에 남는 건 음악 뿐이라는 어찌보면 예상할 수 있는 결말인 작품이다. "세상과 담 쌓은 은둔한 실력자", "주인공과 대립하는 반대성향의 인물", "사랑과 배신" 등등 구성하고 있는 요소들은 지극히 통속적인 것들이다. 굳이 감동의 포인트를 찾는다면 세상과 타협하지 않은 음악에 대한 열정? 감정이 메말라서 그런건가, 잘 모르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