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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민주주의의 선택지는 자유민주주의와 사회민주주의 단 두 가지 뿐일까? 직접적 민주주의였던 고대 아테네와, 인민 민주주의를 표방하지만 세습 왕조의 독재 국가인 북한의 그것을 제외하면 그런 듯 보인다. 자유민주주의는 개인의 자유와 합리성을 표현하고 계발할 수 있는 체제이기에 가장 우월한 정치제도이지만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특별히 자유민주주의가 고전적 전체주의의 일반적 특성들을 위장한 채 교묘하게 내면화하고 자신의 정체성을 숨길 경우 문제는 심각할 것이다. 물론 자유민주주의의 적(敵)인 전체주의는 이데올로기적이며 이상화된 하나의 이념 아래 가정, 학교, 교회, 정치, 경제, 국가 기구, 문화 영역 등 각 부문이 일사불란한 모습으로 정권의 목적에 봉사하도록 강제되는 체제이기에 미국을 전도된 전체주의 국가로 규정하는 것은 큰 논란 거리일 수 있다.‘이것을 민주주의라고 말할 수 있을까?’는 오바마 행정부 이전의 부시 부자(父子) 체제하에서 미국이 견지했던 예의 그 전도된 전체주의적 실상을 정교하게 분석한 책이다. 이 책을 통해 저자가 미국에 대해 안겨준 용어는 전도된 전체주의 국가, 관리(경영)되는 민주주의 국가, 기업이 정치권력화한 국가 등이다. 우리에게 가장 대표적인(고전적인) 전체주의의 형태로 알려진 것은 나치즘과 이탈리아 파시즘, 그리고 스탈린의 전제(專制) 정치 등인데 월린에 의하면 고전적 전체주의와 전도된 전체주의는 몇 가지 중요한 차이점들을 보인다. 전자는 권력을 투사(投射)하고 후자는 권력을 내사(內射)한다. 전도된 전체주의 체제하에서 권력이 내사되는 현상은 미국이 단일한 슈퍼파워 국가인 점을 감안하면 설득력 있게 들린다. 미국은 세계의 경찰을 자임(自任)한 채 자국 국민들을 내사(內射)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것이다. 한편 고전적 전체주의(가령 히틀러의 경우)는 자신들의 본토에 외국인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하는 동시에 권력과 부를 자신의 신민들에게만 줌으로써 시민권을 고결한 것으로, 본토민들을 영예로운 이들로 만들었던데 비해 전도된 전체주의는 본토와 외국의 경계를 명확하게 가르지 않는다. 전자의 지도자는 체제의 건설자인데 비해 후자의 지도자는 체제의 산물이라는 차이도 중요하다. 전도된 전체주의는 외형적으로는 민주주의를 시행하고 그 가치를 소중히 여긴다고 선전한다. 고전적 전체주의에서 경제는 정치에 종속되었다면 전도된 전체주의에서는 정치가 경제에 지배된다. 고전적 전체주의가 시민이 아니라 추종자를 주조하려 했다면 전도된 전체주의는 소비자 주권 및 주주 민주주의 등과 같은 대체물을 공급함으로써 고전적 전체주의와 같은 목표를 달성하려 한다. 고전적 전체주의 체제에서 지식인들은 침묵을 강요당한 채 숙청되거나 폐기 처분되었다면 전도된 전체주의 체제에서 지식인들은 자체의 충성스러운 지식인 집단들로 양성되고 있다.(예컨대 산학협동 프로젝트!) 전도된 전체주의 체제에는 분서갱유도 없고 망명자 아인슈타인도 없다. 일당 국가체제와 달리 분열을 부추기는 전도된 전체주의의 핵심은 기업자본, 최상층의 부자들, 중소기업 연합체, 거대 언론사들, 복음주의적 프로테스탄트 지도자들, 위계적 가톨릭 세력 등이다.(292 페이지) 저자가 말했듯 오늘날 미국이 전도된 전체주의라는 정치적 전환점에 서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인식할 수 있을까? 저자는 미국의 체제가 민주주의적이라는 점은 의문시되지 않고 사실인 양 막연히 받아들인 가정에 불과하다고 말한다.(333 페이지) 같은 차원에서 저자는 무제한적인 전지구적 헤게모니와 헌법적으로 제한된 국내 권력, 해외로 뻗어나가는 임의적 권력과 고국 시민에게 책임이 있는 민주적 권력 간의 내재적 긴장과 부조화에도 불구하고 슈퍼파워, 제국권력, 세계화하는 자본이 민주주의와 입헌 정치제도에 지니는 함의는 어떤 문제적 사안으로서 공공연히 의문시 된 적이 없다고 말한다.(366 페이지) 저자는 슈퍼파워를 자신을 거대하게 부풀리는 권력의 한 시스템일 뿐만 아니라 국가의 정체성 자체를 다시 만들어 내려는 시도이기도 하다고 정의한다. 저자는 경제 정책에 관해서는 가벼운 규제만을 하는 권력의 속성과 테러리즘에는 강하게 맞서 싸우는 강력한 권력의 속성이 모종의 독특한 권력 조합을 구성한다고 말한다. 이런 현상은 권력이 특정 정책을 집행하지 않는 것이 축소된 권력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로 인해 타격을 입는 이들에 대해 권력이 여전히 효력을 발휘하는 실상과, 미국이 다른 나라들에 강제하는 자유무역 및 자유시장이 미국에게는 전지구적 권력 팽창을 의미하는 사실을 상기하게 한다. 미국은 언론 통제(177 페이지), 경제 불안 상태에 처한 다수의 공포심을 이용한 불평등의 정치(178 페이지), 상층 자본가 계급을 위한 대규모 세금 감면, 환경보호 장치의 약화, 정권과 기업 권력의 노골적 결탁, 복지 프로그램의 말살 등 많은 일들이 일어나는 나라이다. 문제의 근원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지나치게 종교적(기독교적)이라는 것이 답으로 보인다. 종교적 가치관이 정치를 통해 실현되고 정치 권력은 신의 뜻을 내세워 자신들을 합리화하고 정당화하는 나라가 바로 미국이다. 미국의 권력이 자주 들먹이는 신약 성경 요한계시록의 선과 악의 대결 구도와 뿌리가 같은 천년왕국적 상상력(천년왕국에 대한 희망)이 전체주의적 동학(動學)의 다른 요소들과 결합해 무제약성을 향한 충동을 키우는데(191 페이지) 이는 종교를 국가의 정치적 정체성을 구성하는 것은 물론 잠재적으로 사회 전체를 규제하는 원리로 만들려고 하는 전체주의적 비전(196 페이지)과 공명한다. 안정은 물론 그와 대척적인 불안정까지도 의도하는 금융 시장, 고용의 임시적 성격(불확실성) 등이 보여주는 것은 위계질서에 복종하게 하는 관리(경영)되는 민주주의의 실상이다. 하지만 관리(경영)되는 민주주의의 실상은 기업문화와의 관계를 통해 잘 드러난다. 저자에 의하면 오늘날의 기업 문화는 기업 내에서만 목격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221 페이지) 그 기업 문화의 하나인 관리(경영) 기술이 선거에 적용된 민주주의가 관리(경영)되는 민주주의이다.(225 페이지) 연중 내내 펼쳐지는 선거 운동, 넘쳐나는 정당선전물, 어용전문가들에게서 나오는 무가치한 견해들, 활력을 주기보다 재미없고 지루하기 짝이 없는 결과 등이 빚어내는 시민적 권태는 무엇을 말해줄까? 유권자들이 진정한 선택의 권리로부터 배제된다는 사실이다. 그 뿐 아니라 국민을 경영대상 또는 창조적 파괴의 대상으로 보는 관리(경영)되는 민주주의가 낳은 폐해는 헤아리기 어렵다. 관리되는 민주주의 체제, 전도된 전체주의 체제는 대중들을 무력하게 하는 체제이다. 유권자로서 매우 균등하게 분할되며 직업, 계급, 금전적 이득 등에 따라 분열되고, 선거를 관리하며 지적 성실성을 체제전복적인 것으로 보고 모든 지적 활동과 지식종사자들에게 이데올로기적이거나 정치적인 교의를 강요하는 정권에 둘러싸여 있기 때문이다. 전도된 전체주의는 좌파와 우파 모두에게서 자라나온다는 점에서 심각한데 저자는 세계화의 시대, 즉각적인 의사소통의 시대, 유동하는 경계의 시대에“데모스에게 미래는 있는가?”란 질문을 던진다.(424 페이지) 이 질문은 믿을 수 없는 것이 지극히 평범한 것이 되며 대중의 합리성이 비합리성에 의해 압도당하는 시대에 던져진 의미심장한 질문이다. 저자는 민주주의자가 된다는 것은 자신의 자아를 변화시키는 것 즉 데모스로서 집합 행동의 방법을 배우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것이 공통성을 일상적으로 체험할 수 있고 시민 정신을 당당하게 발휘할 수 있는 풀뿌리 지역주의에 근거한 합리성이다.(439 페이지) 저자는 민주적 성향의 공무원이라는 새로운 엘리트층 육성이라는 민주주의 재활 프로젝트를 거론한다.(441 페이지) 희망적인 것은 - 이렇게 말하는 것은 저자가 책에서 언급한 미국 민주주의의 왜곡되고 전도된 실상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 크며 어느 면 상당 부분 우리나라의 현실과 겹치기 때문이다. - 환경보호, 기아 구제, 인권, 에이즈 방지와 그와 유사한 여러 일들에 헌신하는 수많은 NGO들이 있기 때문이다.(442 페이지) 공중파의 공적 소유와 비상업적 방송 증진이라는 과제가 수반되어야 하지만 고무적인 것은 분명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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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대 초반에 역사의 종언을 부르짖은 보수 정치학자가 있었다. 그리고 십년 뒤, 이젠 민주주의의 종언을 주장하는 진보 정치학자들이 나타난다. 역사의 종언론이 자본주의의 대대적인 승리를 알리는 기념비적 구호였다면, 민주주의의 종언론은 나치즘이나 파시즘과 같은 야만적인 전체주의 시대로의 퇴행을 알리는 시대진단적 구호인 셈인가? 사실 단순한 퇴행보다는 더욱 복잡미묘한 문제가 놓여있다. '민주주의의 종언'을 직접적으로 얘기한 것은 아니지만 미국의 진보정치학자 셸던 월린은 『이것을 민주주의라고 말할 수 있을까』(후마니타스, 2013)에서 미국의 민주주의는 진정한 민주주의가 아니라 일종의 '전도된 전체주의'라고 주장한다. 전도된 전체주의의 가장 큰 특징은 기업권력시대의 정치적 등장과 시민들의 정치적 탈동원화이다.
셸던 월린은 미국 민주주의가 단 한 번도 제대로 공고화된 적이 없다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서 미국의 정치는 민주주의가 아니라 슈퍼파워와 통제국가라는 새로운 정치제를 기초로 작동하는 새로운 전체주의라고 의심한다. 이 새로운 전체주의는 피지배민을 동원하고 정체성을 드러내고 기성 헌정질서를 파괴하는 고전적 전체주의와는 그 실천양태가 완전히 거꾸로된 일종의 '전도된 전체주의'라고 주장한다. 즉 피지배민을 탈동원화하고 자신의 정체성을 은폐하며, 기존 헌정질서의 보호를 주창하는 전체주의다. 저자는 전도된 전체주의의 본질을 가리는 가면, 즉 전도된 전체주의의 웃는 얼굴을 '관리되는 민주주의'라고 명명한다. 참고로 이 책의 원제는 '민주주의 주식회사', 부제는 '관리되는 민주주의와 전도된 전체주의의 유령'이다.
전도된 전체주의는 미국 버전의 새로운 전체주의다. 일반적으로 '전체주의'는 '민주주의'의 반댓말이다. 따라서 전도된 전체주의 운운은 '민주주의의 종언론'과 그리 다를 바 없다. 그러나 전도된 전체주의는 '관리되는 민주주의'라는 가면으로 위장하고 있다. 원래 전체주의라는 말은 1920년대 무솔리니가 만든 신조어다. 전체주의를 탐구한 유명한 정치학자 한나 아렌트는 전체주의를 군주제, 귀족제, 과두제, 민주주의 등 전통적 통치형태들과는 비교가 불가능한 새로운 통치체제로 해석한 바 있다. 그런데 전체주의는 여러가지 다양한 형태로 나타날 수 있다. 셸던 월린은 아렌트가 정초한 고전적 전체주의를 거꾸로 뒤집은 형태를 '관리되는 민주주의'라고 설명하고 있는 셈이다.
아렌트가 규명해 낸 고전적 전체주의의 특징은 다음 네 가지다. 첫째, 그 정권과 정권의 정책들을 정당화한다고 설명하는 이데올로기의 존재다. 둘째, 전면적 테러에 의한 통치방식이다. 가령 나치 포로수용소와 소비에트 노동수용소가 대표적이다. 셋째, 법에 의해 성립된 가족관계를 파괴하는 것이다. 끝으로 관료제를 통한 통치와 비밀경찰을 통한 지배다. 정리하면, 고전적 전체주의의 특징은 이데올로기, 테러, 사적 영역의 파괴, 관료조직을 통한 통치이다.
이처럼 무솔리니, 히틀러, 스탈린 정권으로 대변되는 고전적 전체주의가 일당독재, 계획경제, 국가의 강제 등을 특징으로 한다면, 그 반댓말에 해당하는 민주주의는 의회주의 체제, 자유시장, 개인의 자유 등을 강조한다. 고전적 전체주의는 국가권력을 장악, 재구성, 독점하려는 목표를 지녔던 혁명운동들에 기반하고, 국가는 사회의 동원과 재구성에 필요한 수단을 제공하는 권력의 중심부로 이해되었다. 그런데 전도된 전체주의는 슈퍼파워, 관리되는 민주주의, 기업의 정치권력화 등을 주요 특징으로 한다.
"자신이 선택하는 시간과 장소에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키는 역량을 개발하기 위해 분투한다는 점에서, 슈퍼파워는 규정적이지 않고, 제약을 싫어하며, 경계에 무관심하다. 슈퍼파워는 입헌 권력의 반정립이다. '전도된 전체주의'의 경우 권력을 내부로 투사한다. 그것은 나치 독일, 파시즘 이탈리아, 스탈린주의 러시아로 대표되는 '고전적 전체주의'의 한 파생물이 아니다. "(14-5쪽)
전도된 전체주의 사회에서는 정치의 과정과 민주주의 자체가 사영화되고 만다. 기업권력과 정치권력의 지나친 유착으로 인해 기업은 더욱더 정치적 기업이 되고 국가는 더욱더 시장본위적 국가가 되는 것이다. 복지서비스를 축소하고, 공공서비스의 항목들을 사영화하려는 움직임이 그 증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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