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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정치의 정치적 대립축의 스펙트럼을 묘사하기 위해 사용되는 보수-진보라고하는 개념은 다양한 상황에서 매우 빈번하게 활용되고 있지만, 그와 같은 활용빈도에 비해서 그 개념이 지칭하고 있는 이념적인 성향의 실체에 대한 심도있는 검토가 턱없이 부족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이 책('한국의 보수주의')은 역사적인 맥락 속에서 전개되어 온 한국 보수주의 사상의 내용과 성격을 이해하기 위해서 먼저 서구 보수주의의 기원과 전개방식에 대해서 검토하고 그와 같은 서구적 개념을 곧바로 적용할 수 없는 한국적 보수주의의 특이성을 지적한 뒤에 한국역사의 전통이라는 관점에서 보수주의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가능성을 모색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시도는 보수주의의 개념을 구성하는 알맹이에 대한 완벽한 정의까지는 이르지 못하고 있다고 할지라도 그 한계와 경계를 명확히 함으로써 시공간적으로 다양한 의미를 가져왔던 '보수주의'의 맥락들이 혼선되는 것을 피하고 한국정치에 적용가능한 개념을 발견해내는 작업에 기여하고 있습니다.
구체적인 내용을 살펴보면, 먼저 1장에서는 인간이성의 한계를 받아들이고 신과 사회적 전통에 대한 존경을 강조하는 버크의 철학으로 대표되는 전통적인 서구의 보수주의가 계몽주의와 자유주의를 전재로 하고 있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와 같은 서구 보수주의의 맥락을 한국의 보수주의에 그대로 적용할 수 없으며 한국의 보수주의는 그 개념을 규정지워줄만한 내용이 부재한 상황에서 '반공산주의'와 '반북한'의 이데올로기가 보수주의자들을 타자와 구별시켜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지적되어 있습니다(2장). 이어지는 3장에서는 대북한 인식과 정책을 중심으로 개념지어져 왔던 한국의 권위주의의 위상이 약해지면서 변화를 겪는 미시적인 정치과정을 김영삼 정권의 대북정책을 중심으로 살펴보고 있습니다.
이상과 같이 1~3장의 논의에 의하면 한국의 보수주의는 서구의 보수주의와 같은 사상적 전개와 내용을 가지지 못한 한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 분명해지지만 4장부터는 소극적으로 한계를 지적하는 것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적극적으로 한국의 고유 전통 속에서 한국 보수주의의 실체를 발견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습니다. 먼저 4장에서는 유교의 전통주의, 도덕주의, 권위주의에서 한국적 보수주의와 연결고리를, 위민사상에서 진보주의와 연결 가능성을 재발견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5장에서는 유교적 전통이 서구의 근대적 정치개념에 대한 이해를 할 때 한국적인 해석을 가능케하는 doxa로서 기능한다고 보고 그 구성요소로서 프래그머티즘과 도덕주의가 존재한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평자 나름대로의 비판적 리뷰를 시도하자면 다음과 같은 아쉬운 점들이 지적될 수 있습니다.
첫째, 가장 근본적인 질문으로서 과연 이 책이 한국의 보수주의의 성격과 실체에 대해서 얼마나 접근하고 설명해내고 있는가라고 하는 점입니다. 전반부의 논의는 서구의 보수주의 개념을 한국적 상황에 적용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하는 소극적인 한계규정에 그치고 있고 후반부에서는 유교라고 하는 한국 고유의 전통을 끌어들여 오고 있기는 하지만 그 자체도 보수-진보를 아우르는 이념적 체계 전체를 이해하는데 기반이 되는 인식적 배경의 수준에 머물고 있을 뿐 실제로 한국의 보수주의가 역사적으로 무엇을 '지켜내고자' 해왔으며 그 대상은 어떻게 변해왔는지에 대한 적극적 개념정립에까지 이르고 있지 못합니다. 이에 대한 대답은 결국 "한국적 보수주의의 실체는 없다"가 될지도 모르겠습니다만 만약에 그렇다면 그 자체가 결론이 되어야 할 것이며 그럴 경우 유교 개념의 도입이 가져오는 효용은 그다지 크지 않을 것입니다.
둘째, 3장('민주정치와 한국 보수주의의 위상')은 한국 보수주의의 위상 변화에 대한 미시적인 사례연구를 시도하고 있으나 전체적으로 분석을 위해 사용되고 있는 이론적 틀과 사례분석 사이에 정합성이 부족한 것처럼 보입니다. 사회선택론적 접근방식을 채택하고 있는 3장은 보수-진보 이외에도 지역균열, 그리고 민주화 혹은 근대화 등의 이슈가 다차원적인 쟁점을 형성하기 때문에 각각의 중위점(median)들 사이에 순환현상이 발생할 수밖에 없는 구조로 되어 있다고 지적하고, 이와 같은 애로우의 불가능성 정리에 의한 결과를 통해 김영삼 통일정책의 반복적인 순환을 설명할 수 있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김영상 정부의 대북정책의 전개양상에 대해 분석하고 있는 내용을 살펴보면 대북정책의 순환은 다차원적인 쟁점들로 인해 동시에 존재하는 median에 의해 유발된 패러독스가 아니라 (저자가 parsimony를 위해 대북정책에 대한 평가와 입장표명에 따라 개념규정한) 보수-진보의 일차원적인 스펙트럼 속에서 벌어지는 median 위치의 이동에 의해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으로 논증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즉,"보수세력과 진보세력이 민주정치과정에서 정책추진과 관련하여 영향력을 행사하고자 경합을 벌이는 과정(p.129)"으로 정책 순환이 나타났다고 보고 있는 것인데 이는 보수-진보의 일차원적인 스펙트럼 위의 보수,중도,진보라고 하는 각기 다른 정책적 위치가 투표의 역설을 보인다고 보는 것(p.118)과 다름 아니라는 점에에서 이론적 틀로 제시된 사회선택론적 접근방식이 제대로 활용되고 있다고는 보기 힘들다고 판단됩니다.
셋째, 단순한 책의 구성방식에 대한 의견으로서 서구 보수주의의 역사적 배경에 대한 논의가 3장을 제외한 모든 장에서 반복되어 등장하고 있는 것은 각 장의 논의전개상 불가피했다는 점을 고려하더라고 되도록 중복은 피하는 방식으로 조정되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 한국정치에서 대북정책을 둘러싼 정치적 대립축 이외에도 사회복지정책, 세금, 정부규모 등의 새로운 이슈를 둘러싼 이념적 스펙트럼 점차 그 의미를 갖기 시작하고 있는 상황에서 한국의 보수주의가 가지는 실체에 대한 보다 적극적인 평가가 기대된다고 할 수 있기 때문에 이 책은 그와 같은 고민을 하고 있는 독자들에게 훌률한 참고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