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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어릴 때 읽었던 <데미안>을 새로운 모습으로 다시 만났습니다.
![]() 이번 책은 <데미안>초판본이라는 이름으로 처음 나왔던 형식에 가깝게 디자인해서 나왔습니다. 붉은 색 가죽느낌의 표지에 고대어를 보는 듯한 필기체 제목은 신선한 느낌을 줍니다. 여기에 종이의 은박은 오래된 성경책 같은 분위기를 전해주네요. 오래두고 보기에 좋은 형태로 출간되어 책장 한 편에 꽂아두면 제법 폼이 날 듯한 모습입니다. 어릴 때 읽었던 고전 소설을 이렇게 새로운 모습으로 만나게 되어 좋습니다. 그때 읽었던 책은 낡았고, 헌책방이나 도서관에서 맡을 수 있는 오래된 책 냄새가 났으며 보관을 잘 하지 못해 빛에 바래 있었지요. 오래된 책도 좋지만 이처럼 새로운 모습의 책을 소장하는 것이 더 좋습니다. ![]()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새는 신에게 날아간다. 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다" 아브락사스는 닭머리를 하고 뱀의 다리를 한 고대 신이라고 하는데, <데미안>에서는 이 신은 일종의 상징으로 보고 신의 이름보다는 주인공인 싱클레어의 성장기가 더 중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전 헤르만 헤세는 <나르치스와 골드문트>라는 소설로 나르치스라는 소년의 성장기 소설을 써내기도 했습니다. <데미안>을 써 낼 때, 헤서는 심각한 신경쇠약과 우울증을 앓았고 융 심리학의 도움을 받아 정신적 문제를 극복했다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이전 성장소설과는 그 성격이 조금은 다른 모습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치유의 과정을 겪으면서 <데미안>을 비롯한 많은 작품에 반영했다고 하는군요. 가령 초반 프란츠 크로머에게 괴롭힘을 당하는 것을 데미안이 해결해 주었을 때, 싱클레어가 데미안을 피하는 행동은 상담과정에서 볼 수 있는 일종의 "저항"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심리학에서 살펴볼 수 있는 행동들이 <데미안>에 많이 녹아 들어가 있습니다. ![]()
이전에 읽었던 클래식 클라우드 헤세 편에서 정여울 작가는 위의 글처럼 <데미안>을 정의 내렸습니다. 자연적인 출산이 아닌 두 번째 태어남은 어머니가 아닌 내 자신 스스로가 의식의 단단한 껍데기를 깨고 비상하며 태어난다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어린 시절 싱클레어는 프란츠 크로머에게 괴롭힘을 당하다가 데미안으로부터 도움을 받습니다. 이후 김나지움에 들어가 방황하다가 베아트리체를 마주하여 이상형으로 삼고 학교 제적의 위기에서 벗어납니다. 그 뒤의 방황은 오르간 연주자인 피스토리우스를 만나 일종의 멘토로 삼고 지내면서 잠재우기도 합니다. 하지만 자신의 멘토를 파악하고 그를 넘어서면서 다시 자의식을 깨고 또다른 세상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결국은 데미안의 어머니인 에바부인, 항상 자신의 의식 속에 있던 그 인물을 찾아 연인으로 삼고 1차 대전이라는 세상의 거대한 변화 속에 들어가게 되지요. 주변에 조력자, 멘토가 있었지만, 그것을 넘어서고 자신의 의식을 깨고 두 번째 탄생을 맞이하는 것은 결국 자신의 몫이 되는 거겠지요.
고등학교 시절 오래된 책 냄새가 물씬 풍기는 낡은 표지의 데미안을 읽었던 저로서는 아직도 <데미안>에 대해서 이래저래 말하기가 어렵습니다. 다만 알을 깨고 나오는 소년의 성장이야기는 저를 비롯한 독자들에게도 그 당시나 지금이나 여전히 유효하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무엇보다 오래전 책을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 초판본의 새로운 모습으로 다시 마주하게 되어 기쁘게 생각합니다.
리뷰어클럽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서평입니다. (위 도서를 소개하면서 더스토리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무료로 제공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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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번째 다시읽는 <데미안>인지 기억나진 않는다. 청소년기의 10대와 성인이 된 20대 이후의 데미안은 각 나이대 마다, 바라보는 시선이 조금씩은 차이가 있었다. 솔직히 30대 땐 생계에 매달리느라 고전을 볼 시간이 많지 않았다. 일과 관련된 도서와 짬짬이 읽을 수 있는 시집을 많이 읽었었다. 개인적으로 헤르만 헤세는 내가 청소년 시절 가장 좋아했던 외국 작기이기도 했었다. 그의 작품을 많이 읽었었다. 가장 처음 읽었던 작품이 <나르치스와 골드문트>였었고, 이후 그의 책을 찾아다녔다. 눈이 좀 트이고 선동가로 치부하는 관념이 생기고 난 이후부터는 헤세의 책은 유일하게 <데미안>만은 계속 다시보기를 했던 것 같다. 집 서재에 꽃혀 있던 <데미안>을 발견하고, 누렇게 변색된 60년대 판본인, 가족 중 누군가 들이 읽었었던, 행마다 줄이 그어져 있었고, 색연필로 밑줄 내지 표식을 남겨 놓았었던, 책을 발견하곤, 그 책을 밤새 읽었던 기억이 있다. 그 책은 아직도 책꽃이 꼳혀 있다. 그 당시보다 종이가 더 누렇게 변색된 채로. 청소년기의 내겐, <데미안>은 항상 '알'과 '껍질'이 전부였었다. 알과 껍질을 깨고 나온 새, 알과 껍질을 깨고 나온 그 무엇들,,, 그리고 나 자신도 껍질을 깨고 싶어했다. 막연히 꼬맹이에서 청소년이 되기를, 청소년에서 어른이 되기를,,, 어찌 깨고 나와야 하는 줄도 모르면서. 사실 지금도 누군가가 어찌 깨야 하냐? 묻는다면 딱히 해줄 말은 없다. 스스로 잘 깨고 나오라고! 밖에는 더 보탤 말이 생각나지 않는다. 나이를 헛 먹었는지도 모르겠다. 수많은 시행 착오 끝에 지금의 모습을 갖게 된 내가 누군가에게 아는 척을 하기엔 역부족인듯 싶고, 그 누구도 나 대신 내 껍질을 깨어 줄 사람은 없기 때문일 것이다. 낳아준 부모라 할지라도,,, . 조언은 가능하겠지만 부질 없는 짓이라 생각든다. 씨알도 안 멕힌다. 병아린 부화가 늦으면 혹은 너무 연약하여 병아리 스스로 알을 깨고 나오지 못하면 대신 깨어주는 경우도 있다지만 인간의 경우, 그래보일순 있어도, 정작 모든 껍질은 결국 본인이 스스로 깨지 않으면 삶의 변화와 성장을 얻기란 쉽지 않다 판단된다. 지금 <데미안>을 생각해보면, '데미안'보단 우리는 '싱클레어'에 더 가깝기에, 싱클레어의 변화가 차라리 더 실체적이다. 아무리 변해도 난 '데미안'이 될 수 없기에,,, 싱클레어의 고민이 나의 고민이고, 싱클레어의 망설임 나의 망설임이며, 싱클레어의 콤플렉스가 나의 콤플렉스이며, 싱크레어의 선택이 나의 선택일 것이다. 싱클에어의 내면의 탐구와 자아 성찰을 통한 발견을 쫓아 우리도 그 발견을 위해 삶을 살 것이다. 또한 나의 삶에 '데미안'은 무엇인지 확인하려 들것이다. 소설<데미안>의 싱클레어는 소정의 결과가 있었다. 우리의, 나의 삶의 싱클레어에게도 같은 결과가 있기를 바라며 우리는, 나는 살아 간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고 하는 자는 한 세계를 깨뜨리지 않으면 안 된다." 따라서, "우리는 다만 각자 완전히 자기 자신이 되고, 완전히 자기의 내부에서 작용하는 자연의 의지에 뒤따르며,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스스로 준비를 갖추도록 순수하게 살아가는 것 만을 유일한 의무로, 운명으로 느꼈다." 각자의 삶에 '알'은 무엇인지 깨닫고,,,'알'의 변화와 성장의 방향을 위한, 안주에서 욕망을 위한 일탈로, 그리고 충족으로, 그리고 청소년기의 한 소년의 성적 만족과 자위행위에서 자아 성장을 넘어 이상의 성취를,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와 제약의 선을 넘어설수 없는 연상의 여인에 대한 콤플렉스에서 도전을 위한 카인처럼,,,표식을 갖은 선택받은 인간으로의 성장을 위해, 현대의 붕괴와 새로운 탄생을 위해, 나를 깨고 새로운 나로 성장하기를 위해,,, "운명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능력을 발휘하고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운명의 인물로 성장"하는 것이다. 그것이 '알'을 깨고 '새'로 성장하는 것이다. 나의 '알'이 무엇인지 부터 발견하고 나서-삶의 근원적인 힘을 깨닫고, 내면에서 울려퍼지는 운명의 목소리를 따라, '나 완전히 '새' 됐어!'를 외칠 수 있기를! 그래고 진정한 '나'를 찾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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