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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사람들은 공의회 같은 것은 관심 없을 수 있다. 때문에 이 책에 대한 기대독자의 범위는 좁다. 그러나 굳이 기독교인이 아니더라도, 서양 중세시대의 역사는 기독교와 같이 갈 수 밖에 없기 때문에 한 번 읽어보면 전체적인 역사 뿐만 아니라 해당 분야에 대한 지식적 도움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종교개혁사 분야의 책을 읽을 때, 이 책을 옆에 두고 읽으면서 많은 도움을 받았다. 종교개혁사는 공의회의 주요 내용에 대한 언급은 잘 하지 않는다. 중요한 공의회에 대한 세부내용과 그 의미, 그리고 이전 역사와 앞으로의 역사에 대한 통찰을 필요로한다면, 종교와는 무관하게 이 책이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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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니케아 공의회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이 무엇일까? 교회사나 신학에 조금이라도 지식이 있는 이들이라면, 예수의 신성을 부인한 아리우스파를 이단으로 단죄하고 삼위일체 교리를 확립한 것이라고 하겠다. 그러나 사회사 관점에서 볼 때 더 중요한 점은, 교회의 중요한 사안을 다루기 위한 공의회를 황제가 소집하고 사회를 보았다는 사실이다. 이른바 교회 문제에 세속 권력이 개입한 선례를 만들었다. 이러한 개입을 정당화하기 위해 교회사의 아버지로 불리는 가이사랴의 에우세비우스는 황제를 13번째 사도라고 칭했다. 황제의 교회 지배를 정당화하는 제국 교회 신학의 기틀이 마련되었다.
제4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 이후 250년 동안 공의회는 소집되지 않았다. 1123년 교황이 기거하는 라테라노 궁에서 열린 공의회는 최초로 서방교회가 주도한 공의회였다. 교황이 소집한 최초의 공의회라는 점에서 서방의 자부심의 표현이었다. 그 공의회 소집을 정당화하는 전거로서 <콘스탄티누스의 기증장>이 인용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콘스탄티누스의 기증장> 조작은 동로마 황제에 대한 교황의 우위를 의도한 것이다. 또한 ‘필리오케’는 서방교회의 필요의 산물이었다. 언어와 문화의 전환 속에서 독자적인 라틴 교회를 형성해 나가는 과정에서의 불가피한 부산물로 볼 수 있다. -공의회 역사를 걷다 중 발췌
신약교회의 역사 안에서 교회 안팎의 큰 문제에 직면했을 때 교회 공동체의 대표들이 모여 공의회를 동해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을 취했다. 물론 후에 교황의 권력이 강화되고 신격화됨으로 인해 그에 대한 거부감이 큰게 사실이지만 지금처럼 사회의 급속한 변화와 함께 개교회주의가 강화된 현실에서 개신교단들이 함께 모여 공의회를 통해 교회의 방향성을 정한다면 좋지 않을까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