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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rs certa, hora incerta (죽음은 확실하지만, 죽음의 시간은 불확실하다!) 죽음! 이번에 읽은 『죽음을 사색하는 시간』은 상당히 인상적이다. 엄청난 연구물을 읽어 소화하기도 버겁지만, 그래도 한 줄만 짚으라면 위 인용 라틴어 경구 '모르스 케르타, 호라 인케르타'이다. 이 말은 과거 『메멘토 모리의 세계』라는 책을 읽을 때 기억했던 터라 더 마음에 와닿았다. 유럽의 성당이나 광장의 시계에도 저 문구가 있다고 했다. 모르스는 로마신화에서 죽음을 의미하는가 보다. 밤의 여신 뉙스가 낳았다는데 함께 태어난 타나토스와 케레스 역시 뉘앙스는 다르지만 모두 '죽음'을 상징한다고 한다. 죽음은 시간을 만들고, 시간은 죽음을 지운다. 동양에서는 아주 간단하게 죽음을 정리한다. 생자필멸(生者必滅)이라 하여 생명이 있는 것은 반드시 죽음, 즉 존재의 무상(無常)을 이른다고 정의한다. 하지만 너무 단순하다. 인간이 동물과 다른 점 중 하나가 자신의 삶과 죽음을 시간 안에서 바라본다는 것이다. 외재적으로 바라보면 죽음은 영원한 생명의 질서에서 탈락이라는, 생명과 죽음을 분리해서 시간을 통한 죽음의 시각화와 연결된다. 내재적으로는 생명은 시작되는 순간부터 죽음을 내포하고 있기에 삶은 죽음의 투쟁과 균형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본다. 인간은 죽는 것이 아니라 사라질 뿐이다. (바우만) '1부 살아 있는 죽음'은 전통적인 (종교적) 죽음의 이미지가 현재 우리의 시대 속에도 여전히 유효한지와 주검을 어떻게 처리하느냐는 장례 의식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지그문트 바우만은 “죽음의 죽음” 또는 “죽음의 살해”라고 표현하면서 근대성이 어떻게 죽음을 해체했는지를 이야기한다. 근대성은 죽음을 수많은 죽음의 원인, 즉 무수한 질병으로 해체해 버림으로써 인간은 이제 죽음과 싸우지 않고 죽음의 원인과 싸우면 된다는 것이다. 타인의 죽음과 나의 죽음이 연결되는 장례 의식은 섬찟하면서도 숙연하다. 시간의 유한성을 구획하는 것이 죽음이고, 죽음을 가져오는 것이 시간이다. 석사학위논문을 다듬었다는 '2부 죽음의 해부'와 '3부 죽음 너머의 시간'은 죽음과 시간의 관계에 대해 철학자들의 죽음론을 바탕으로 변증법적인 종교적 상상력을 유형화한다. 즉,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던 다양한 종교적 상상력을 이해하는데 시간의 문제가 중요한 열쇠라는 거다. '죽음의 시간성'이라는 건데, 시간 너머에서 시간을 지배하는 카이로스의 시간이 흥미롭다. 예수의 죽음은 어떤가? 기독교 신학에서는 ‘에파팍스’라는 용어를 사용하는데, 이는 시간 속으로 들어온 종말이자 종말을 향해 튀어 나가는 시간이다. 삶은 생명의 자기실현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삶은 생명에 심긴 죽음의 씨앗이 서서히 자라나는 과정, 즉 죽음의 자기실현이기도 하다. 353쪽 인간은 시간 개념을 통해 인간만의 죽음을 발견한다. 죽음과 시간의 복잡한 내적 관계는 인간에게만 드러나는 현상이며, 인간은 시간을 통해 죽음을 넘어선 시간의 차원, 즉 우주적 차원으로까지 도약할 수 있다. 356쪽 우리가 죽은 자와 함께 형성하는 공동체를 유지하는 일은 결국 나 자신의 존재를 파괴로부터 보호하는 일이다. 이 공동체는 내 존재의 필수적인 부분이었다. 378쪽 근대적인 세계는 필멸성을 해체하지만, 근대 이후의 세계는 불멸성을 해체한다. 상당히 두터운 책인데도 동어반복이 아닌 연쇄적 논리에 의해 풀어가는 전개가 좋았다. 시간에 대한 사유와 죽음의 구원론 사이의 접점을 드러내고자 하는 의도가 아주 잘 문장에 스려 있었다. 현대 사회의 여전한 죽음의 허무주의, 즉 구원론적 시간성을 망각한 시간관을 넘어서기 위해 신화적 지향성의 회복이라는 문제를 중심으로 삶과 죽음의 실존적 의미가 새삼 깊이 있게 느껴졌다. 이 책은 죽은 이를 위한 레퀴엠이면서 시간 지평에서 무의미하게 살아가는 나에 대한 울림이다. 죽음을 사색하는, 대단한 책이다. 천국도 부활도 저세상도 죽음 너머에 있지 않다. 정말 나이의 무게가 쌓일수록 과거는 무거워지고 미래는 가벼워진다. 어머니를 보내면서 삶과 죽음이 내게 주는 의미를 깊이 체감하고 있다. 삶의 순간순간에 언제라도 죽음의 침입이 틈을 엿본다. 나의 죽음 또한 가족에게 영향을 줄 것이다. 웰다잉이라는 말이 유행하지만 죽음은 언제나 부자연스럽고 폭력적이다. 하지만 인간이기에 '죽음 너머를 지향'할 수 있지 않겠는가. 하지만 일체유심조라 했으니 모든 것은 오직 마음이 지어내는 허상일지도 모른다. 삶 속에 부활이 있고 천국이 있다는 구절이 눈에 들어온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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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죽음에 대해서 생각하는 시간은 언제일까? 아마 가까운 사람이 죽었을 때 일 것이다. 그러나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죽음은 기억 속에서 희미해진다. 아니 죽은 사람의 기억이 희미해지지 죽음 자체는 잊어버린다. 의도적이든 아니든 간에 우리는 죽음에 대한 생각을 자꾸 피하려고만 한다. 간혹 ‘어떻게 죽을 것인가’ 혹은 ‘어떻게 살 것인가’하는 문제에 대해 사색하는 시간을 가진다 할지라도 죽음과 삶을 등가로 놓고 철학적으로 이해하려고 한다. 죽음이란 저 멀리 있는 상상속의 문제이고 삶은 현실의 문제이기에 더욱 그런 것 같다.
그렇다면 죽음을 나의 현실에 가져다 놓으면 어떤 생각을 하게 될까? 내가 죽는다는 것을 생각할 때 무슨 생각이 먼저 들까? 우리는 가급적이면 그런 생각들 자체를 회피한다. 신문과 방송은 매일같이 많은 죽음의 소식을 전하지만 그것은 ‘나’가 아닌 ‘타인’들의 이야기이기에 듣는 우리는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린다. 이처럼 사람들이 죽음의 이야기를 멀리하고 가급적 하지 않으려는 이유는 아마 죽음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 아닐까 싶다. 하면 우리는 왜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일까? 나는 관계의 단절이 주는 절망감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어느 한 순간 사랑하는 사람들, 알고 지내던 사람들을 더 이상 만날 수도, 생각할 수도 없다는 상실의 느낌을 감당할 수 없기에 두려워하고 회피하려는 것 일게다. 물론 사람에 따라서는 자기 존재가 사라진다는 것을 믿을 수 없어하고, 남아있는 것들에 대한 아쉬움 혹은 사후세계에 대한 불안감이 작용할 수도 있겠지만 이유가 어떻든 간에 별로 유쾌한 생각은 아니기에 두려워하고 멀리하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이 책 [죽음을 사색하는 시간]은 시간이라는 관념 속에서 죽음에 대한 개념을 철학적, 종교적으로 살펴보며 다양한 죽음의 모습들을 그리고 있다. 책은 저자가 쓴 학위 논문, 수많은 철학자들의 죽음에 대한 고찰, 종교가 말하는 죽음개념 등을 형이상학적으로 다루고 있기에 나로서는 읽는데 많은 시간이 걸렸다. 아니 그러고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부분이 많았지만 나름대로 죽음이라는 것에 대하여 생각해 볼 수 있는 시간을 갖기도 했다. 총4부로 구성된 이 책에서 저자는 원시적인 죽음관념, 시간관념 속에서 종교들이 구성한 죽음의 신화에 나타난 죽음개념, 그리고 ‘좋은 죽음’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현대적인 죽음을 사색한다.
먼저, ‘1부 살아있는 죽음’에서 저자는 원시사회의 이중장례식을 중심으로 죽음이라는 관념에 대해 살펴본다. 인간사회에서 장례식은 죽음을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관리하고 통제하려는 의도에서 거행되었다고 한다. 장례식이 완료되기 전의 인간은 아직 죽은 것이 아니었다고 한다. 따라서 일차장례식 후 살이 부패하여 없어지는 동안 영혼은 이승과 저승 사이를 방황한다. 그러다 살의 부패가 끝났을 때 치르는 이차장례식을 통해 비로소 죽음은 완성되고, 죽은 자는 이승을 떠나 저승으로 간다. 자연스레 일차장례식과 이차장례식 사이의 기간은 죽은 자에 대한 산 자의 애도기간이 된다. 이중장례식이 거행되지 않은 경우에도 일반적으로 애도기간이 일정한 시간 길이로 고정되었다고 한다. 그 시간이 지나면 영혼이 지상을 떠나고, 생자의 애도가 끝남으로써 죽음이 완성된 것이다. 죽음이 완성되면 생자는 사자에게 제사를 드리고, 사자의 영혼은 추수나 건강처럼 지상적인 일의 성공을 보증한다. 생자와 사자는 적합한 시간에 적합한 방식으로 정기적인 관계를 맺게 되는 것이다. 장례식은 생자가 느끼는 상실의 의미와 위기를 억제하기 위해 거행했기에 주인공은 언제나 살아남은 자였다. 이런 이중장례식은 세계의 모든 곳에서 관찰되는 것은 아니지만 이를 통해 장례식의 일반적인 구조와 함께 죽음이라는 원시적인 관념을 알 수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장례식이 어떤 식으로 해석되고 번역되든, 장례식은 죽은 자에 대한 기억을 사회에서 삭제하려는 시도이다. 장례식이라는 중간단계를 거쳐야만, 죽은 자는 조상이라는 익명의 집합성에 용해되어 새로운 존재로 부활할 수 있는 것이다.’(88쪽)
이렇게 조상이라는 익명의 집합체로 용해된 죽은 자의 영혼은 현대 들어 종교적인 영역으로 회수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죽은 후 바로 최종장례식을 치르고 그때부터 영혼의 구원을 생각하기 시작한다. 즉 종교는 사회가 잃어버린 영혼을 어떤 식으로든 회수하려는 처절한 노력이라는 것이다. 저자는 ‘2부 죽음의 해부도’와 ‘3부 죽음너머의 시간’에서 시간관념을 중심으로 죽음의 신화를 구성하는 영혼의 종교적 의미를 살펴본다. 우리에게 인간의 일생이라는 시간은 탄생과 죽음, 즉 시작과 끝이라는 두 가지 경계선에 의해서만 개념화된다. 그리고 죽음이 시간의 유한성을 구획하기에, 죽음은 일생의 시간과는 전혀 다르게 구성되는 비시간의 절대영역으로 상상된다. 이런 비시간이 불멸과 영원의 상태가 될지, 영원한 죽음과 소멸의 상태가 될지는 사람마다 생각하는 것이 각기 다르다. 종교는 더 이상 죽지 않는 불멸의 영역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신체적인 죽음을 통해서만 가능하고, 죽음이후의 죽음을 극복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종교적이든 비종교적이든 간에, 모든 죽음 문화는 ‘죽음 너머’를 상정한다. 그리고 ‘죽음 너머’에 대한 상상은 필연적으로 영혼의 존재를 가정한다, 왜냐하면 죽음의 경계선을 넘는 월경자가 없다면 ‘죽음 너머’에 대한 상상은 불필요하기 때문이다.’(177쪽) 사후세계는 오로지 영혼관념에 근거해서만 성립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종말론이나 신화와 역사의 시간 개념, 그리고 각 종교들에 나타나는 구원의 개념을 통해 우리에게 죽음과 죽음 너머의 시간에 대해 생각해보게끔 한다. ‘죽음은 삶의 끝이면서도 또 다른 세계가 시작될 수 있는 기점으로 상상된다. 완전한 끝만이 완전한 시작을 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모든 종교는 그 기저에 자기만의 죽음의 신화를 품고 있다.’(414쪽)
마지막으로 ‘4부 사라지는 죽음’에서 저자는 현대사회에서 나타나는 죽음의 관념에 대해 서술한다. 과거에는 사람들이 너무 빨리 죽는 것을 염려했다. 그래서 때 이른 죽음을 위로하기 위해 제사, 추도식, 무덤과 같은 죽음지연의 사회적 장치들을 만들었다. 생물학적으로는 죽었을지라도 사회적 기억을 통해 오랫동안 불멸할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너무 늦게 죽는 것이 문제가 된다고 한다. 의술의 발달로 인한 죽음의 지연현상은 자연적인 죽음이라는 개념을 소멸시켰다. 생물학적 죽음을 맞기도 전에 질병이나 사고로 인한 사회적 죽음을 겪는 경우가 많아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등장한 것이 뇌사, 안락사, 존엄사와 같은 ‘좋은 죽음’이라는 개념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다시 말해 웰 다잉은 자연사가 사라지고 인공적인 죽음이 넘쳐나는 시대가 낳은 위기의식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웰 다잉은 자기가 살았던 자리를 깨끗하게 치우고, 남은 자들에게 최대한의 작은 상처를 주고, 그동안 행복하게 잘 살았다고 고백하면서, 의연하게 죽음을 맞이하는 아름다운 장면을 연출하는 말 같다. (……) 결국 웰 빙이나 웰 다잉은 자신의 삶과 죽음의 질에 대한 개별적 책무를 강조하는 말이다.’(500쪽) 죽음에 좋은 죽음이나 나쁜 죽음이란 것은 없다. 단지 산자들의 생각일 뿐이다. 좋은 죽음이란 과연 누구를 위한 죽음인지를 생각해 볼 일이다.
책을 읽으면서 저자의 생각을 제대로 따라갔는지 자신이 없다. 그만큼 제대로 이해했는지도 아리송하다. 하지만 ‘타인’의 죽음이 아니라 ‘나’의 죽음에 대한 생각은 마음껏 할 수 있었다. ‘모르스 케르타, 호라 인케르타 (Mors certa, hora incerta)’라는 라틴어 경구는 ‘죽음은 확실하지만, 죽음의 시간은 불확실하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우리는 우리가 죽을 것이라는 사실만 알고 있다. 그러나 ‘언제’ 죽을 것인지 알지 못하고, 우리의 죽음이 ‘무엇’일지도 알지 못한다. 그리고 중요한 점은 어떤 순간이라도 이러한 ‘언제’가 될 수 있다는 것, 우리의 지식으로는 근본적으로 이러한 ‘무엇’을 알 수 없다는 것이다.’(356쪽) 그러기에 나의 죽음은 나의 몫이 아니라 타자의 몫이 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죽음은 종교나 철학적인 문제가 아니라 현실적인 문제라고 나는 생각한다. 죽음이란 당사자에게는 존재의 상실 그 자체이지만 당사자는 알지 못한다. 대신 남은 자에게는 쉽지 않은 많은 과정을 남긴다. 남은 자는 정신적인 것은 물론 절차적이고 경제적인 과정을 떠안는다. 이쯤 되면 사는 것 못지않게 죽음도 숙제가 되는 느낌이다. 과연 나는 ‘나’의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대면해야 할 것인지, 이 책은 그런 고민을 해보는 시간을 주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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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에 대한 사색이 참 진하다. 사색은 깊이 생각하고 이치를 따진다, 통찰해 본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여겨지는데, 이 책 속의 죽음은 그 단계를 훨씬 뛰어넘고 있다. 사색이 아니라 연구를 하고 있다고 봐야 하는 것이 아니랴 하는 생각이 든다. 사색이라면 혼자 생각해 보는 단계라는 느낌이 강하니까? 이 글은 죽음에 대한 이론서라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이 글의 언어들은 죽음에 대한 모든 현상들을 가져오고 그것을 분석적으로 제시해 나간다. 죽음이 갈기갈기 찢어지기도 하고 다시 모이기도 하며 가는 자와 남은 자의 밀도 있는 관계도 조명된다. 시간과 인생이 동일 선상에 놓여 깊은 통찰로 제시된다.
죽음은 시간과 일직선상에 있다. 시간은 원이 되면 좋을 것인데, 평평하게 펴져 끝없이 나아간다. 인생의 문제가 시간과 함께 엮여지면서 생성과 성장, 그리고 사멸의 길을 걷는다. 그런 가운데 인생은 원초적인 사멸에 대한 허무주의에 빠질 수 있다. 시간만 흐르면 존재의 위기를 갖게 되고 어느 누구도 그 위기를 물리적으로 해결할 수 없다. 시간과 함께 소멸의 과정을 겪어야 한다. 그것이 지키고자 하는 자, 멈추고자 하는 자에게는 무척 큰 고통이 된다. 아니 생명에게 부과된 원초적인 아픔을 가지게 된다. 이런 문제는 죽음이란 단어로 귀결되고, 그 해결책은 종교와 철학자들의 몫으로 넘겨졌다. 종교에서는 다음 세상에 대한 이론을 제공해 준다. 그것이 오로지 믿음으로 이루어지는 일을 지라도 누구에게는 해결책이 된다. 또 누구에게는 이런 책이 그 구실을 할 수도 있다. 이 책은 시간과 영원의 변증법에 의해 생의 무의미를 초극하게 하는 시간성을 일깨우면서 원초적 존재에 대한 이해를 하게 한다. 그래서 자신의 사고 속에서 죽음의 문제를 일탈해 보게 한다. 즉 이 책은 위기를 일깨우기도 하고 위기의 치료제 역할도 한다. <존재의 전달>이라는 이어짐을 통해서 죽음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가질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책의 구성을 살핀다. 책은 전체가 4부로 짜여 있다. 1부는 <살아 있는 죽음>으로, 2부는 <죽음의 해부도>로, 3부는 <죽음 너머의 시간>, 4부는 <사라지는 죽음>으로 묶어 놓고 있다 방대한 분량이다. 이 분량으로 구체적이기도 하고 추상적이기도 한 죽음의 문제 한 가지를 논하고 있으니, 얼마나 다양한 자료들이 제기될 것인가 짐작해 볼 수 있겠다. 정말 많은 자료들을 가져왔다. 인용한 서적만 해도 작은 책장을 메우지 않을까 생각이 된다. 이 책은 결코 죽음에 대한 간단한 생각 정도가 아니다. 죽음의 문제를 전반적으로 통찰한 내용이다. 내용이 양파 껍질을 벗기는 듯해야 하기 때문에 그 결어를 따라가기는 쉽지 않다. 또 모호한 내용을 다루고 있기에 뚜렷한 결론을 인지하기도 쉽지 않다고 봐도 되겠다.
죽음의 실상을 궁구해 본다. 존재는 우리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밖에 있다. 나의 존재는 온전한 하나로 내 안에 저장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내 밖에 흩뿌려진 수많은 조각들로 존재한다. 산다는 것은 그러한 존재들을 안으로 모았다가 다시 밖으로 내던지는 일의 반복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순수한 존재는 없다. 우리의 존재는 삶 속에서 끊임없이 타인의 존재와 뒤섞인다. 누구든 세상에 자신의 존재를 흩뿌리며 살아간다. 다만 존재의 강약과 광협이 있을 뿐이다. 이러한 생각은 존재에 대한 새로운 궁구를 하게 한다. 생명체에 대한 인식을 다변화하게 한다. ‘나’라는 존재에 대해 열린 인식을 가지게 한다. 그러므로 자신을 고집하지 않게 한다. 생명이라는 것이 그렇게 고집스럽게 ‘나의 것, 하나의 존재’라는 인식이 필요가 없다. 거대한 우주 속에 하나의 티끌과 같은 것이다. 부분 요소로 인식을 하면 삼라만상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져 가고, 그 속에서 주어진 것들을 지니고 가면 되는 것이다. 죽음도 지극히 자연스러운 하나의 일로 간주할 때 죽음에 대한 벗어남이 있을 것이라 여겨진다. 어느 종교에서 말하는 심오한 깨달음을 지닐 수 있게 만들어 주는, 생명체라는 구속에서 벗어나게 하는 인식의 세계에 머물 수 있게 될 것이라 여겨진다.
죽음의 다양한 유형을 살펴본다. 죽음의 근대성은 수많은 죽음의 원인, 즉 무수한 질병으로 해체한다. 따라서 인간은 죽음과 싸우지 않고 죽음의 원인과 싸워야 한다. 이제 인간은 죽지 않기 위해 달걀을 먹지 않고, 담배를 끊고, 운동을 하고 몸무게를 줄이면 된다. 삶은 무수한 작은 죽음에서 살아남는 과정이 된다. 인간은 죽는 것이 아니라 사라질 뿐이다. 수시로 사라지고 생겨나고 하기에 죽음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도록 한다. 현재의 나는 내일의 나가 아니다. 나는 후세의 살갗 속에서도 녹아서 존재한다. 그러기에 죽음을 논할 필요가 없다. 영혼의 길이 문제가 되는 것이지. 종교는 죽음을 죽이거나 이완시키는 여러 기술, 불멸의 제작 기술을 발전시켰다. 장례식은 인간의 몸에서 영혼을 증류하는 기술이다. 특별한 종족들의 죽음과 관련된 얘기들을 통해서 죽음의 의미를 분석적으로 보여준다. 다약족, 알푸루족 메리나족 등는 그 예가 된다. 다양한 죽음을 우리는 목격할 수 있다. 시신을 어떻게 처리하는가 하는 문제는 죽음의 중요한 문제다. 사후를 어떻게 인지하는가에 따라서 다르게 나타날 것이기 때문이다. 종교를 주관하는 자들은 죽음이 면제된 자들이다. 그들에겐 죽음이 오히려 선택받은 일이다. 그 현장에서 잔치를 벌여야 하는 상황이 된다. 새로운 세계를 향한 출발점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몸의 죽음과 영혼의 죽음을 구분해서 생각한다. 그러기에 상황에서 무척 자유롭다.
종교에서의 죽음을 인지해 본다. 종교는 시간을 지운다기보다는 아예 시간을 떠나고자 한다. 시간을 버리고 시간 없는 영역으로 진입하고자 하는 것이 종교의 목표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종교가 신화적인 요소를 상실하고 세속화될 때, ‘고독한 신’을 사람들이 믿지 않을 때 시간의 배가 무의 바다를 아슬아슬하게 표류하기 시작한다. 오늘의 인간 군상들이 걸어가는 길을 잘 표현하고 있다. 인간에게는 일생이라는 게 있다. 인간만이 죽음을 스스로 인식하기도 한다. 인간이 사고를 하지 않고, 인간에게 죽음이라는 끝이 주어지지 않으면, 일생이라는 개념도 없을 것이다. 일생이란 말은 살다 죽은 자의 삶 전체를 나타내는 말이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수용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 죽음이다. 죽음이 자연스러운 것이고, 절서 속의 부분일 따름이지만 그래도 자존의 의식을 가진 인간의 입장에서는 혼란스럽다. 미래에 대한 확신과 사라짐에 대한 두려움 같은 것들이 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을 궁구하면서 깊은 성찰을 하는 사람들은 깨달음을 얻는다. 그리고 이해를 한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그럴 수는 없다.
저자의 삶과 죽음에 대한 생각의 편린을 본다. 저자는 이 책에서 시간이라는 존재 지평에 입각하여 죽음의 다양한 모습을 그려보려고 하고 있다. 그리고 종교가 제시하는 힘을 일깨우고 있다. 종교는 ‘삶을 끝까지 살게 하는 힘’이 있다. 이것을 표현하려고 애를 썼다. 종교적 사유가 환상에 불과할 지라도, 삶은 종교가 없이는 비티기 힘든 고단한 것이다. 우리는 입버릇처럼 환상과 미몽에서 깨어나야 한다고 한다. 그러나 환상 없는 삶은 없다. 환상 없는 삶을 꿈꾸는 자체가 환상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종교가 어떻게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지, 어떻게 삶을 끝까지 살아내게 하는지에 몰두하면 된다. 죽음은 삶이 있기에 논의의 요소가 되는 것이다.
폭 넓은 지식의 산실 같은 느낌의 책이다. 세계의 인종들이 어떻게 죽음을 맞는지. 죽음 속에서 무엇을 보고 무엇을 찾는 지를 살펴보고 있다. 다양한 죽음이 가져다주는 지식에서 죽음의 의미를 깨우치려고 시도하고 있다. 참 많은 종족들에 대한 예화가 제시되어 있다. 이들의 죽음 의식을 확인하는 것만도 놀라운 작업이 될 듯하다. 죽음을 벗어나기 위해 다양한 각도에서 논리를 제공하고 있지만, 결국은 삶의 문제로 귀결되고 있는 듯하다. 어떻게 살게 하는가? 그것을 종교에서 찾아보고 있다. 다양한 지식과 수많은 자료를 통해 우리의 삶에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간 듯해 감사하다.
*인간사랑에서 지원 받아 읽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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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내용은 '죽음'이라는 주제를 다양한 시각으로 바라보는 철학적 고찰이라고 받아들여진다. 어떤 의미에서 '삶과 죽음'은 순간에 의해서 갈라는 것이기에 그것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즉 우리가 죽음을 인식한다는 것은 살아있기 때문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우리가 이 책의 제목처럼 <죽음을 사색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다는 것 역시 살아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저자 역시 책의 표지에 '어떤 시간을 사느냐에 따라 죽음의 의미가 달라진다'라는 문구를 제시한 것이라고 이해된다.
실상 '죽음'이라는 주제는 결코 가볍다고 말할 수 없기에, 그에 대한 논의 역시 자칫 무거워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저자는 오랫동안 붙들고 고민해온 이 주제를 진지하지만, 또한 독자들에게 깊이 성찰할 수 있는 방식으로 다루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죽음을 지우는 시간'이라는 프롤로그의 제목의 의미는, 아마도 죽은 다음에나 가능하다는 것이 실상에 가까울 것이다. 그동안 이 주제로 고민했던 자신의 사유 과정을 더듬어 보면서, '시간에 대한 사유와 죽음의 구원론 사이의 접점'을 찾으려고 노력했던 저자의 생각들을 읽어낼 수 있었다.
전체 4부로 구성된 목차에서, 가장 첫 번째에 놓인 1부의 제목은 '살아 있는 죽음'이다. 죽음에 대한 정의로부터 다양한 문화에서 발견되는 '죽음'에 대한 인식과 의미를 조망하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대부분의 문화에서 죽음을 끝이 아닌 새로운 시작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 죽은 이후에 시신의 육탈 후에 다시 뼈를 추려 모시는 풍습을 소개하고 있다. 그 과정에서 죽은 자와의 교감을 위해서, 때로는 죽은 후에 그의 육신 일부에 대한 식인 의식이 행해지기도 한다는 것이다. 아울러 죽은 후 육탈시키기 위해 시신을 일정 기간 가매장했다가 뼈를 추려 다시 장례를 치르는 이른바 '이중 장례식'의 풍속도 사후 세계에 대한 그들의 신념을 보여주는 방식이라고 해석될 수 있을 것이다.
죽음의 의미와 풍속을 다룬 이후에 2부에서는 '죽음의 해부도'라는 제목으로 '죽음'을 인식하는 철학적 사유를 중심으로 논의를 진행하고 있다. 때문에 여기에서는 주로 '삶의 순간'에 우리가 느끼는 죽음의 문제를 다양한 각도에서 바라보고, 그 의미를 조망하고 있다. 나에게 이 부분이 가장 흥미롭게 다가왔고, 죽음이란 그것을 인식하는 사람의 현상학적 인식이라는 저자의 설명에 충분히 공감할 수 있었다. 죽음에 대해 그토록 고민한다는 것은 결국 삶에 대한 의지가 그에 비례해서 강하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인간만이 죽음을 사유할 줄 아는 존재라는 볼테르의 언급이나,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면서 스스로 한계를 자각한다는 서술도 인상적으로 다가왔다. 그래서 시간이라는 것도 결국 인간의 자각 속에서 현상되고 있기에 의미를 가진다는 상세한 설명이 덧붙여지고 있다. 특히 2부의 후반부에는 '자실'이라는 주제를 여러 항목에 걸쳐 다루고 있는데, 일부 종교에서 그것을 금기시 혹은 죄악시하는 것은 '자살의 유혹'을 방지하려는 방책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곧 죽음을 사색할 수 있다는 것은 바로 우리가 살아있다는 증거라는 역설이라고 하겠다.
"죽음과 시간은 유한성의 가장 명확한 표지이다. 시간의 유한성을 구획하는 것이 죽음이고, 죽음을 가져오는 것이 시간이다."(프롤로그 중) 죽음에 관한 의식과 시간의 문제를 다룬 내용에 이어, 3부에서는 '죽음 너머의 시간'이라는 주제로 죽음에 관한 인식의 문제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아마도 이 부분이 저자가 가장 강조하고 싶은 내용이라고 이해할 수 있는데, '직선과 원이라는 이분법적 은유를 통해 서술'되는 시간론에 대해서 먼저 설파하고 있다. 원으로 상징되는 시간론이 순환하는 삶의 인식을 전제로 하고 있다면, 그러한 관점에서 죽음은 그리 심각하게 다뤄지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나 직선은 회귀하지 않는 속성을 지니고 있기에, 이러한 관점에서 죽음은 정말 심각한 문제로 인식되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순환론적 세계관에서는 죽음보다는 자기의 존재 근원을 찾는 신화와 그 의미를 탐구하는 것이 중시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시간의 흐름은 일직선으로 인식하면서 죽음과 그 이후의 세계 그리고 그 의미를 심각하게 고민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의 삶과 죽음에 관한 고찰을 하는 방법으로서 철학과 종교가 탄생했다는 것이다. 물론 종교 가운데에서는 윤회를 내세우는 불교처럼 순환론적 인식을 보여주는 경우도 존재한다. 그러나 기독교적 세계관에서는 죽음이라는 문제를 중시하고, 특히 예수의 부활 이후에는 더욱 사후 세계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고 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접근하니, 이른바 종말론과 같은 이야기들에 왜 그렇게 사람들이 귀를 기울였는지가 설명될 수 있었다.
모로스 케르타, 호라 인테르타.(죽음은 확실하지만, 죽음의 시간은 불확실하다!)라는 라틴 경구는 그래서 더욱 의미심장하게 다가왔다. 저자는 3부에서 죽음과 관련된 다양한 논리를 소개하면서, '기독교에 의해 점차 역사가 신화를 압도'하게 되었고, '죽음이 개인성의 파괴로 읽히면서 죽음의 문제가 첨예하게 부각된다'고 설명한다. 특히 '투우장의 신비'라는 항목에서 투우장에 투입된 소의 움직임과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통해 인간의 삶과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비유적으로 설명한 부분이 인상적으로 다가왔다. 여기에 덧붙여 철핛적인 죽음과 기독교적인 죽음, 그리고 지식이 인간을 구원한다고 주장하는 영지주의 관점에서의 죽음의 의미도 소개하고 있다.
마지막 4부에서는 ‘사라지는 죽음’이라는 제목으로, ‘시간이라는 존재 지평에 입각해서 죽음의 다양한 모습’과 그 의미에 대해서 고찰한 결과를 정리하고 있다. 인간이 죽음 이후의 세계를 그려내는 것은 그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죽은 이후에도 자신의 존재가 남아있는 이들에게 잊히지 않도록 하는 장치가 이른바 장례문화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죽음 개념에 집착하는 순간 어쩌면 ‘자연적인 죽음’은 불가능하다는 것이 저자의 진단이다. 의학의 발달로 인해 뇌사와 안락사 그리고 존엄사의 문제가 제기되고 있는 것도, ‘사람을 살리기 위해 등장한 의학이 이제는 사람을 어디쯤에서 죽어야 좋은지를 고민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때문에 더 이상 ‘좋은 죽음은 없다’고 저자는 단언한다. ‘죽음’이라는 가볍지 않은 주제를 다룬 이 책을 읽으면서 역설적으로 ‘나는 지금부터 어떻게 살아야 할까?’라는 문제를 고민할 수 있었다. 그래서 ‘죽음’이 아닌 ‘현재의 삶’에 더욱 충실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새삼 자각하게 되었다.(차니)
* 이 리뷰는 출판사에서 제공한 책을 바탕으로 작성되었음. * 개인의 독서 기록 공간인 포털사이트 다음의 "책과 더불어(與衆齋)“(https://cafe.daum.net/Allwithbooks)에도 올린 리뷰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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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사색하는 시간]은 총 4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1부 ‘살아 있는 죽음’은 <월간 미술> 2017년 12월호에 발표한 <죽지 않는 것들의 죽음에 관하여>와 2010년 3월 <역사와 문화>19호에 발표한 <죽음의 연습으로서의 의례: 이중 장례식의 구조와 의미>를 새로 고쳐 쓴 것이다. 2부 ‘죽음의 해부도’와 3부 ‘죽음 너머의 시간’은 1998년 2월에 발표한 <시간과 죽음의 상관성에 대한 연구>라는 제목의 석사학위논문을 물음만 남겨둔 채 모두 새로 다시 쓴 것이다. 따라서 이 책은 이십여 년 전에 내가 처음 제기했던 학문적 물음을 뼈대로 삼고 있다. 4부 ‘사라지는 죽음’은 2013년 9월 <종교문화비평> 통권24호에 발표한 <죽음에 관한 일곱 가지 이야기: 정진홍의 죽음론>을 새로 고쳐 쓴 것이다. [p. 12]
즉, 저자가 이미 발표한 글들을 첨삭과정을 통해 하나의 책으로 엮었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을 다루고 있는 것일까?
1부 ‘살아 있는 죽음’에서는 로버르 에르츠(Robert Hertz, 1881~1915)의 이중 장례식에 대한 연구결과를 중심으로 ‘죽음’이라는 관념을 살펴본다. 죽음 후에 시체가 완전히 부패하여 뼈만 남게 될 때까지 기다리는 1차 장례식[‘살’의 장례식] 동안 죽은 자의 영혼은 이승과 저승 사이에서 방황한다고 여겨진다. 살이 제거되고 뼈만 남게 되면, 이를 가지고 2차 장례식[‘뼈’의 장례식]을 치른다. 이를 통해 비로소 죽음이 완성되고, 죽은 자는 이승에서 저승으로 소속이 바뀐다. 저자에 따르면
이중 장례식은 개별성을 지우고 집합성을 창조하는 의례, 즉 시간을 지우고 영원을 창조하는 의례라고 할 수 있다. [p. 58]
라고 한다. 하지만, 이러한 원시사회의 이중 장례식은 종교가 다른 사회영역으로부터 분화될수록 변형된다. 이로 인해 삶에 대한 인식이 이질적인 단계가 연속된 계단식에서 단일한 직선으로 변화했다.
장례식이 어떤 식으로 해석되고 번역되든, 장례식은 죽은 자에 대한 기억을 사회에서 삭제하려는 시도이다. 장례식이라는 중간단계를 거쳐야만, 죽은 자는 조상이라는 익명의 집합성에 용해되어 새로운 존재로 부활할 수 있는 것이다. [p. 88]
뭔가 모순적이지만, 일단 죽어야만 영원히 죽지 않을 수 있다는 말로 들린다.
대체로 종교에서는 오로지 죽음을 통해서만 더 이상 죽지 않는 불멸의 영역에 도달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p. 128]
아마도 그래서 저자는 죽음을 ‘탄탈로스의 바위’에 비유한 것일지도 모른다.
인간에게 죽음은 ‘탄탈로스의 바위’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탄탈로스의 머리 위에 매달린 채, 언제 허공에서 떨어져 탄탈로스의 머리를 박살낼지 알 수 없는 이 바위로 인해, 탄탈로스는 감히 신의 음식을 먹지 못한다. 아마도 제우스는 탄탈로스의 오만함을 징벌하기 위해 머리 위에 바위를 매달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바위는 인간과 신의 건널 수 없는 경계선을 의미한다. 탄탈로스는 바위의 추락을 감수하지 않는 한, 신의 음식에 손을 댈 수 없다. 신처럼 살려면 탄탈로스는 신들의 음식을 먹어야 한다. 그러나 음식에 손을 대는 순간 바위가 떨어질 것이다. 신처럼 살려고 하는 순간 탄탈로스는 인간으로서 처참한 죽음을 맞이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죽음은 항상 신과 인간의 차가운 경계선을 알려준다. [p. 125]
2부 ‘죽음의 해부’와 3부 ‘죽음 너머의 시간’에서는 ‘시간’관념을 중심으로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던 다양한 종교적 상상력을 유형화한다.
인간은 시간 개념을 통해 인간만의 죽음을 발견한다. 죽음과 시간의 복잡한 내적 관계는 인간에게만 드러나는 현상이며, 인간은 시간을 통해 죽음을 넘어선 시간의 차원, 즉 우주적 차원으로까지 도약할 수 있다. 인간은 시간을 통해 시간 너머를 꿈꾼다. 인간은 시간 너머의 존재, 또는 죽음 너머의 존재를 꿈꿈으로써 죽음을 넘어서려 하고, 자신의 존재를 이미 죽은 자뿐만 아니라 아직 존재하지 않는 자와 연결시킨다. [p. 356]
이처럼 모든 ‘죽음’의 문화는 ‘죽음 너머’를 상정한다고 한다. 그리고 이는 필연적으로 사후세계와 영혼이 존재한다는 것을 가정한다.
죽음은 삶의 끝이면서도 또 다른 세계가 시작될 수 있는 기점으로 상상된다. 완전한 끝만이 완전한 시작을 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모든 종교는 그 기저에 자기만의 죽음의 신화를 품고 있다. [p. 414]
4부 ‘사라지는 죽음’에서는 현대사회의 죽음의 관념에 대해 서술한다. 과거에는 사람들이 너무 빨리 죽는 것을 염려했다. 그래서 제사, 추도식, 무덤과 같은 죽음을 지연하는 사회적 장치들을 만들었다고 한다. 즉, 생물학적으로는 죽었을지라도 사회적 기억을 통해 오랫동안 불멸할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현대사회에 접어들면서 과거와는 반대로 너무 늦게 죽는 것이 문제가 되었다. 의술의 발달로 인한 죽음의 지연현상으로 생물학적 죽음에 선행하는 사회적 죽음을 초래하는 경우가 많아졌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등장한 것이 자연적인 죽음 대신 인공적인 죽음인 안락사(安樂死), 존엄사(尊嚴死)와 같은 ‘좋은 죽음’의 개념이다. 결국 최근에 많이 논의되는 ‘좋은 죽음’ 혹은 ‘웰다잉(Well-Dying)’은 결국 이와 같은 현실에 대한 시대적 위기의식이 가져온 산물인 셈이다.
웰다잉은 자기가 살았던 자리를 깨끗하게 치우고, 남은 자들에게 최대한의 작은 상처를 주고, 그동안 행복하게 잘 살았다고 고백하면서, 의연하게 죽음을 맞이하는 아름다운 장면을 연출하는 말 같다. 이제 죽음을 앞둔 사람들은 표준화된 ‘엔딩 매뉴얼’에 따라 자신을 죽음을 준비하면서, 행복한 죽음을 맞이하기 위한 ‘죽음의 기술’을 습득해야 할 것 같다. 결국 웰빙이나 웰다잉은 자신의 삶과 죽음의 질에 대한 개별적 책무를 강조하는 말이다. [p. 500]
과거에는 ‘죽음’과 그에 관련된 일은 사회적 책무였다.
우리가 죽은 자와 함께 형성하는 공동체를 유지하는 일은 결국 나 자신의 존재를 파괴로부터 보호하는 일이다. 이 공동체는 내 존재의 필수적인 부분이었다. [p. 378]
하지만 의학이 발달한 현대사회가 되면서 지나치게 늦은 죽음이 문제가 되기 시작했다. ‘좋은 죽음’이나 ‘웰다잉’은 이런 과정에서 과거 사회적 책무였던 것들이 개인적 책무로 변화하는, 즉 ‘개별화’하는 과정을 상징한다. 그렇다면 무엇이 ‘좋은’이고 ‘웰(well)’일까? 그리고 이런 ‘좋은 죽음’이나 ‘웰다잉’은 누구를 위한 것일까?
이 책을 읽으면서 그저 막연히 단어로만 다가왔던 ‘죽음’ 그리고 ‘웰다잉’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보고, 고민하게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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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사색하는 시간 이창익 인간사랑/2020.11.20. sanbaram
“우리는 다른 존재의 몸을 먹어 우리의 몸을 만든다. 더 이상 죽음을 먹을 수 없을 때 우리는 스스로 죽음이 되어 세상의 먹이가 된다.(p.12)”고 말하는 것처럼 인간은 동물이나 식물의 죽음을 먹어야만 생명을 유지한다. 그래서 우리의 시간은 죽음의 선물이라고 할 수 있다. <죽음을 사색하는 시간>에서는 죽음은 시간을 만들고, 시간은 죽음을 지운다고 한다. 저자 이창익은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종교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에서 <조선 후기 역서의 우조론적 복합성에 대한 연구>라는 논문을 쓰고 철학박사학위를 받았다. 여러 대학교에서 연구교수로 있었으며 현재 한신대에서 강의하고 있다. 저서로 <사람들은 왜 종교를 믿을까?>, <조선시대 달력의 변천과 세시의례> 등이 있고, 몇 권의 번역서가 있다.
<죽음을 사색하는 시간>의 1부 ‘살아 있는 죽음’은 <월간 미술>2017년 12월호와 2010년 3월 <역사와 문화>19호에 발표한 것을 새로 고쳐 쓴 것이라고 한다. 2부 ‘죽음의 해부도’와 3부 ‘죽음 너머의 시간’은 1998년 2월에 발표한 석사학위논문을 물음만 남겨둔 채 모두 새로 다시 쓴 것이다. 4부 ‘사라지는 죽음’은 2013년 9월 <종교문화비평>에 발표한 글을 새로 고쳐 쓴 것이라고 한다. 결국 전에 발표한 것을 지금의 시점에서 전면적인 수정을 가하여 주제를 뺀 나머지 것을 새롭게 고쳤다고 한다. 종교학자인 저자의 시각에서 보는 죽음을 세계 여러 민족이나 종족들의 장례문화나 제례의식을 통해 예전부터 죽음을 어떻게 생각했는지 살펴본다. 뿐만 아니라 고대와 플라톤 시대의 종교, 그리고 기독교와 불교를 비롯한 여타 널리 알려진 종교에서 죽음을 어떻게 다루고 생각하는지 하는 것을 자세하게 다루고 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우리는 죽음에 대한 여러 가지 면을 생각해 볼 수 있게 된다.
“바우만에 따르면, 이제 인간은 죽는 것이 아니라 사라질 뿐이다.(p.25)” 어제까지는 살아 있던 누군가가 갑자기 삶의 공간에서 소멸하는 현상, 이것이 지금 우리가 죽음이라 부르는 것이다. 사람들은 더 이상 자연사를 겪지 않으며, 모두가 충분히 늙기 전에 죽는다. 죽음은 더 이상 과거에 우리 조상들이 경험하던 그런 죽음이 아니다. 장례식은 질병이라는 ‘작은 죽음’에 허망하게 쓰러진 자들을 향한 애도일 뿐이다. 이제 누구도 천국에 가기를 원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그저 매 순간 행복하기만을 바란다. 불멸이 사라진 시대는 신이 사라진 시대이기도 하다. 지금 우리는 신조차도 죽는 시대, 신이 죽는다고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시대를 살고 있다고 저자는 강조한다.
“각자의 죽음은 ‘나의 죽음’으로부터 측정되는 실존적 거리에 따라 그 의미의 무게를 달리한다.(p.108)” ‘나의 죽음’을 중심으로 할 때, 수많은 ‘너의 죽음’들이 각 거리를 달리하며 중심 주변에 포진하고, ‘너의 죽음’의 경계 너머에 역시 수많은 ‘그들의 죽음’이 포진한다. 그러므로 ‘나의 죽음’을 중심으로 삼으면서 배치되는 서로 다른 질량의 수많은 죽음들 전체가 형성하는 ‘죽음의 지형도’ 같은 것을 상상해 볼 필요가 있다고 한다.
“책을 읽으면서 우리는 ‘나의 시간’을 지운다. 그러나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우리는 책 속에 문자로 고착되어 있는 ‘타인의 시간’, 그렇게 정지된 생각의 시간 속에 빠져든다.(p.122)” 게다가 죽은 인간조차도 타인의 시간 속에 잠입하여 타인의 기억 안에서 연명할 수 있다. ‘나의 시간’도 타인의 기억에 스며들어 생존한다. 그렇지만 나의 죽음과 무관하게 타인은 계속해서 살아가기 때문에, 타인은 내 죽음의 단독성을 여실히 증명해 주는 내 몸의 차디찬 경계선이다. 또한 나의 생명은 그저 내 몸 안에 갇혀 있고, 내 몸의 경계선 너머로 뿌리를 뻗지 못하고, 타인의 몸속으로 스며들지 못한다는 점에서, 타인은 항상 내 생명의 한계선을 표시한다.
“대체로 종교에서는 오로지 죽음을 통해서만 더 이상 죽지 않는 불멸의 영역에 도달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p.128)” 이것이 바로 죽음이 지닌 기본적인 역설이다. 죽어야만 죽음이 사라지는 것이고, 죽어야만 비로소 죽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고대 이집트인의 상상력에서, 죽음 이후에 인간은 ‘두 번째 죽음’을 통해 완전히 절멸할 수도 있고, ‘두 번째 죽음’을 피해 신처럼 존재할 수도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죽음은 진짜 죽음이 아니다. 최종적인 죽음은 죽음 이후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죽음 이후의 죽음’이 죽음 문제의 골자가 된다. 장례문화의 모든 노력은 ‘죽음 이후의 죽음’이 죽음을 극복하는데 쏟아진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예수가 죽음을 받아들였던 것처럼 죽음에서 도망치지 않는 것을 신앙의 핵심으로 삼았다.(p.225)” 순교와 자살은 다르다. 란츠베르크에 의하면, 아우구스티누스의 주장이 현재까지 대부분 기독교 문헌에서 반복되고 있다. 그 주장은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자신을 살해하는 것은 인간을 살해하는 것이므로 자살은 살인이다. 십계명에서 살인은 용서할 수 없는 것으로서 금지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살은 결국 살인이기 때문에 기독교인은 악을 피하려고 자살해서도 안 된다고 주장한다.
“영지주의자는 세계 종말이 오면 인간이 구원받을 거라고 주장한다.(p.440)” 그러나 그는 살아 있는 동안 미리 세계 종말을 내면화 한다. 예컨대 세계를 통해 인간은 세계 종말을 미리 맛본다. 신화적인 세계 종말이라는 거대한 사건이 의례 안에서 압축적으로 구현되는 것이다. 이후 영지주의자는 역사가 아니라 신화 안에서 살아간다. 그노시스는 세상을 보는 다른 눈이다. 이 눈을 획득하면 모든 고통이 환영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러므로 환영의 속임수에 놀아나지 않아야 한다. 또한 영지주의에서는 시간과 영원, 그리고 삶과 죽음의 경계선이 무너진다. 그래서 언제라도 시간은 영원이 되고, 삶은 죽음 너머의 부활이 된다. 반대로 영원은 타락하여 시간이 되고, 빛은 어둠에 갇히고, 신은 인간이 되어 지상으로 추락한다.
“마즈다교에서 인간은 본래 천사였고, 다시 천사가 될 것이다.(p.452)”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인간은 ‘지연된 천사’일 뿐이다. 마찬가지로 악과의 투쟁이 끝나면 지상의 시간은 언젠가 영원으로 복귀할 것이다. 그러므로 지상의 시간도 ‘지연된 영원성’일 뿐이다. 마즈다교(조르아스타교)는 천사 개념을 통해 영혼의 개별성 보존이라는 문제를 독특한 방식으로 해결하고 있다. 결국 불멸성의 획득은 천상의 수호천사를 다시 만날 수 있느냐에 의해 결정된다. “이스마일파의 우주론에서도 잠재적인 천하인 인간들은 최종적인 부활을 위해 이블리스, 아리만의 후예인 악마들과 싸워야 한다.(p.458)” 부활은 일거에 이루어지지 않고 단계별로 실현된다. 그러므로 연속적인 부활에 의해 각각의 인간은 점차적으로 자신의 영원한 인격, 즉 천사성을 완성할 수 있다. 결국 지상의 삶은 타락한 천사들이 천사의 지위를 회복하기 위해 벌이는 전투로서 이해된다. 존재 자체가 전투이다. 인간의 모든 종교적인 목표도 ‘천사 되기’로 수렴한다.
“우리는 항상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가 더불어 형성하는 공동체 안에서 살고 있으며, 죽음의 간섭을 받지 않는 삶은 존재하지 않는다.(p.476)” 우리는 내 주변의 가까운 죽음에서 시작하여 나와 무관한 듯 보이는 먼 죽음에 이르기까지 차츰 인간의 죽음을 공유하면서 살아간다. 어차피 언젠가 죽을 것이라면, 사는 동안 행복하게 잘 사는 것, 아프지 않고 건강하게 살다가 죽는 것이 사람들의 관심사가 된다. 죽음은 모든 것의 무화이기 때문에 현재의 순간을 잘 즐기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주장이 삶과 죽음의 의미에 대한 답변을 대신하기도 한다. 웰다잉은 자연적인 죽음이 사라지고 인공적인 죽음이 넘쳐나는 시대가 낳은 위기의식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유언장이나 ‘사전 연명의료 의향서’는 환자의 죽음의 시기를 결정해야 한다는 부담감으로부터 의사들을 해방시켜 준다고 저자는 말한다. 이 책을 통해 죽음의 의미를 여러 가지 각도에서 볼 수 있으며 현재 우리가 처한 문제를 돌아보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예스24를 통해 인간사랑에서 책을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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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로스 케르타, 호라 인테르타" (죽음은 확실하지만, 죽음의 시간은 불확실하다)
이 책은 서울대에서 종교학을 전공한 이창익 교수가 죽음에 관한 철학과 종교 그리고 자신의 사색을 두루 정리하고, 혹은 여러 글을 새로 다듬어 묶은 것이다. 이 교수는 서울대 대학원에서 조선후기 역서(曆書)에 관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한신대 학술원 연구교수와 원광대 마음인문학연구소 연구교수를 거쳐, 현재 한국종교문화연구소 연구원과 한림대 생사학연구단 연구교수로 있다.
"죽음의 공포를 없애는 가장 일반적인 방법은 삶과 죽음을 넘어서는 더 큰 차원을 상정하는 것이다. 즉 삶과 죽음을 넘어서면 그 둘을 감싸 안는 더 큰 원이 그려진다. 삶과 죽음은 이 원 안에서 일어나는 일시적인 현상일 뿐이다. 죽음을 일시적인 현상으로 만다는 점이 가장 중요하다. 죽음보다 더 큰 어떤 원리를 상정함으로써 죽음의 의미를 상대화시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 137~138쪽
4부 ‘사라지는 죽음’은 2013년 9월 『종교문화비평』 통권 24호에 발표한 「죽음에 관한 일곱 가지 이야기: 정진홍의 죽음론」을 새로 고쳐 쓴 것이다.
구체적으로 들어가자면 프롤로그를 먼저 읽어야 한다. 네 부에서 다루는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1부는 ‘이중 장례식’을 중심으로 하여 원시적인 밑그림을 그린다. 2부와 3부에서 ‘시간 관념’을 중심으로 하여 죽음의 신화를 구성하는 주요 개념을 분석한다. 마지막으로 4부에서는 ‘좋은 죽음’이라는 주제를 중심으로 하여 현대적인 죽음 관념을 비판적으로 서술한다.
1부는 프랑스 사회학자 로베르 에르츠의 글을 정리하고 요약한 것이다. 에르츠의 글은 원래 그가 1907년 잡지 『사회학 연보(Annee Sociologique)』 10호에 발표한 것이다. 좋은 내용이긴 하나, 사실 읽기도 어렵거니와 내용도 조금 무미건조하다.
우리가 레비 스트로스나 재레드 다이아몬드의 글을 읽으며 감탄하는 것은 뜻밖의 사실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현지를 보고쓴 생생한 경험담이기 때문이다.
2부와 3부는 인간의 탄생과 죽음 그리고 삶을 성찰한 철학과 신화 그리고 종교에 관해 설명한다. 판 데르 레이우를 중심으로 고찰하면서 에피쿠로스, 세네카, 폴 리쾨르, 알베르 바예, 프란츠 란츠베르크, 아우구스티누스, 미르챠 엘리아데, 플레스너 그리고 마르틴 루터까지 다양한 관점과 이론을 아우른다. 고대부터 현대까지 죽음에 관한 인식론의 흐름을 일관하기에 좋다.
"에피쿠로스가 물질성을 개별화의 근원으로 파악했다면, 세네카는 영원성을 개별화의 근원으로 파악한다. 세네카가 볼 때, 인간은 자아의 죽음에 대한 각성과 죽음에 대한 공포의 극복을 통해서만 영혼의 영역으로 진입할 수 있다. 왜냐하면 몸의 퇴락과 죽음의 현실성으로 인해 인간은 윤리학에 의한 영혼의 점진적 상승 가능성을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 204쪽
4부는 종교학자 정진홍 교수가 쓴 『만남, 죽음과의 만남』을 중심으로 쇼펜하우어와 지그문트 바우만 등의 관점을 살펴본다.
내가 일독하고 보니 2부→3부→4부→1부의 순서대로 읽기를 권해 드린다. 무엇보다 제대로 읽어내기 위해서는 저자가 주요하게 인용한 학자들과 저작에 관한 배경 지식이 있어야 한다. 다만 쭉 통독하면서 다양한 관점을 일관한 다음, 관심이 가는 이론이나 관점을 자세히 탐구해 들어가는 것도 좋겠다. 이 책은 이런 맥락에서 의미를 지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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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사색하는 시간 이창익 인간사랑/2020.11.20.
“우리는 다른 존재의 몸을 먹어 우리의 몸을 만든다. 더 이상 죽음을 먹을 수 없을 때 우리는 스스로 죽음이 되어 세상의 먹이가 된다.(p.12)”고 말하는 것처럼 인간은 동물이나 식물의 죽음을 먹어야만 생명을 유지한다. 그래서 우리의 시간은 죽음의 선물이라고 할 수 있다. <죽음을 사색하는 시간>에서는 죽음은 시간을 만들고, 시간은 죽음을 지운다고 한다. 저자 이창익은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종교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에서 <조선 후기 역서의 우조론적 복합성에 대한 연구>라는 논문을 쓰고 철학박사학위를 받았다. 여러 대학교에서 연구교수로 있었으며 현재 한신대에서 강의하고 있다. 저서로 <사람들은 왜 종교를 믿을까?>, <조선시대 달력의 변천과 세시의례> 등이 있고, 몇 권의 번역서가 있다.
<죽음을 사색하는 시간>의 1부 ‘살아 있는 죽음’은 <월간 미술>2017년 12월호와 2010년 3월 <역사와 문화>19호에 발표한 것을 새로 고쳐 쓴 것이라고 한다. 2부 ‘죽음의 해부도’와 3부 ‘죽음 너머의 시간’은 1998년 2월에 발표한 석사학위논문을 물음만 남겨둔 채 모두 새로 다시 쓴 것이다. 4부 ‘사라지는 죽음’은 2013년 9월 <종교문화비평>에 발표한 글을 새로 고쳐 쓴 것이라고 한다. 결국 전에 발표한 것을 지금의 시점에서 전면적인 수정을 가하여 주제를 뺀 나머지 것을 새롭게 고쳤다고 한다. 종교학자인 저자의 시각에서 보는 죽음을 세계 여러 민족이나 종족들의 장례문화나 제례의식을 통해 예전부터 죽음을 어떻게 생각했는지 살펴본다. 뿐만 아니라 고대와 플라톤 시대의 종교, 그리고 기독교와 불교를 비롯한 여타 널리 알려진 종교에서 죽음을 어떻게 다루고 생각하는지 하는 것을 자세하게 다루고 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우리는 죽음에 대한 여러 가지 면을 생각해 볼 수 있게 된다.
“바우만에 따르면, 이제 인간은 죽는 것이 아니라 사라질 뿐이다.(p.25)” 어제까지는 살아 있던 누군가가 갑자기 삶의 공간에서 소멸하는 현상, 이것이 지금 우리가 죽음이라 부르는 것이다. 사람들은 더 이상 자연사를 겪지 않으며, 모두가 충분히 늙기 전에 죽는다. 죽음은 더 이상 과거에 우리 조상들이 경험하던 그런 죽음이 아니다. 장례식은 질병이라는 ‘작은 죽음’에 허망하게 쓰러진 자들을 향한 애도일 뿐이다. 이제 누구도 천국에 가기를 원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그저 매 순간 행복하기만을 바란다. 불멸이 사라진 시대는 신이 사라진 시대이기도 하다. 지금 우리는 신조차도 죽는 시대, 신이 죽는다고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시대를 살고 있다고 저자는 강조한다.
“각자의 죽음은 ‘나의 죽음’으로부터 측정되는 실존적 거리에 따라 그 의미의 무게를 달리한다.(p.108)” ‘나의 죽음’을 중심으로 할 때, 수많은 ‘너의 죽음’들이 각 거리를 달리하며 중심 주변에 포진하고, ‘너의 죽음’의 경계 너머에 역시 수많은 ‘그들의 죽음’이 포진한다. 그러므로 ‘나의 죽음’을 중심으로 삼으면서 배치되는 서로 다른 질량의 수많은 죽음들 전체가 형성하는 ‘죽음의 지형도’ 같은 것을 상상해 볼 필요가 있다고 한다.
“책을 읽으면서 우리는 ‘나의 시간’을 지운다. 그러나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우리는 책 속에 문자로 고착되어 있는 ‘타인의 시간’, 그렇게 정지된 생각의 시간 속에 빠져든다.(p.122)” 게다가 죽은 인간조차도 타인의 시간 속에 잠입하여 타인의 기억 안에서 연명할 수 있다. ‘나의 시간’도 타인의 기억에 스며들어 생존한다. 그렇지만 나의 죽음과 무관하게 타인은 계속해서 살아가기 때문에, 타인은 내 죽음의 단독성을 여실히 증명해 주는 내 몸의 차디찬 경계선이다. 또한 나의 생명은 그저 내 몸 안에 갇혀 있고, 내 몸의 경계선 너머로 뿌리를 뻗지 못하고, 타인의 몸속으로 스며들지 못한다는 점에서, 타인은 항상 내 생명의 한계선을 표시한다.
“대체로 종교에서는 오로지 죽음을 통해서만 더 이상 죽지 않는 불멸의 영역에 도달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p.128)” 이것이 바로 죽음이 지닌 기본적인 역설이다. 죽어야만 죽음이 사라지는 것이고, 죽어야만 비로소 죽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고대 이집트인의 상상력에서, 죽음 이후에 인간은 ‘두 번째 죽음’을 통해 완전히 절멸할 수도 있고, ‘두 번째 죽음’을 피해 신처럼 존재할 수도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죽음은 진짜 죽음이 아니다. 최종적인 죽음은 죽음 이후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죽음 이후의 죽음’이 죽음 문제의 골자가 된다. 장례문화의 모든 노력은 ‘죽음 이후의 죽음’이 죽음을 극복하는데 쏟아진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예수가 죽음을 받아들였던 것처럼 죽음에서 도망치지 않는 것을 신앙의 핵심으로 삼았다.(p.225)” 순교와 자살은 다르다. 란츠베르크에 의하면, 아우구스티누스의 주장이 현재까지 대부분 기독교 문헌에서 반복되고 있다. 그 주장은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자신을 살해하는 것은 인간을 살해하는 것이므로 자살은 살인이다. 십계명에서 살인은 용서할 수 없는 것으로서 금지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살은 결국 살인이기 때문에 기독교인은 악을 피하려고 자살해서도 안 된다고 주장한다.
“영지주의자는 세계 종말이 오면 인간이 구원받을 거라고 주장한다.(p.440)” 그러나 그는 살아 있는 동안 미리 세계 종말을 내면화 한다. 예컨대 세계를 통해 인간은 세계 종말을 미리 맛본다. 신화적인 세계 종말이라는 거대한 사건이 의례 안에서 압축적으로 구현되는 것이다. 이후 영지주의자는 역사가 아니라 신화 안에서 살아간다. 그노시스는 세상을 보는 다른 눈이다. 이 눈을 획득하면 모든 고통이 환영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러므로 환영의 속임수에 놀아나지 않아야 한다. 또한 영지주의에서는 시간과 영원, 그리고 삶과 죽음의 경계선이 무너진다. 그래서 언제라도 시간은 영원이 되고, 삶은 죽음 너머의 부활이 된다. 반대로 영원은 타락하여 시간이 되고, 빛은 어둠에 갇히고, 신은 인간이 되어 지상으로 추락한다.
“마즈다교에서 인간은 본래 천사였고, 다시 천사가 될 것이다.(p.452)”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인간은 ‘지연된 천사’일 뿐이다. 마찬가지로 악과의 투쟁이 끝나면 지상의 시간은 언젠가 영원으로 복귀할 것이다. 그러므로 지상의 시간도 ‘지연된 영원성’일 뿐이다. 마즈다교(조르아스타교)는 천사 개념을 통해 영혼의 개별성 보존이라는 문제를 독특한 방식으로 해결하고 있다. 결국 불멸성의 획득은 천상의 수호천사를 다시 만날 수 있느냐에 의해 결정된다. “이스마일파의 우주론에서도 잠재적인 천하인 인간들은 최종적인 부활을 위해 이블리스, 아리만의 후예인 악마들과 싸워야 한다.(p.458)” 부활은 일거에 이루어지지 않고 단계별로 실현된다. 그러므로 연속적인 부활에 의해 각각의 인간은 점차적으로 자신의 영원한 인격, 즉 천사성을 완성할 수 있다. 결국 지상의 삶은 타락한 천사들이 천사의 지위를 회복하기 위해 벌이는 전투로서 이해된다. 존재 자체가 전투이다. 인간의 모든 종교적인 목표도 ‘천사 되기’로 수렴한다.
“우리는 항상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가 더불어 형성하는 공동체 안에서 살고 있으며, 죽음의 간섭을 받지 않는 삶은 존재하지 않는다.(p.476)” 우리는 내 주변의 가까운 죽음에서 시작하여 나와 무관한 듯 보이는 먼 죽음에 이르기까지 차츰 인간의 죽음을 공유하면서 살아간다. 어차피 언젠가 죽을 것이라면, 사는 동안 행복하게 잘 사는 것, 아프지 않고 건강하게 살다가 죽는 것이 사람들의 관심사가 된다. 죽음은 모든 것의 무화이기 때문에 현재의 순간을 잘 즐기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주장이 삶과 죽음의 의미에 대한 답변을 대신하기도 한다. 웰다잉은 자연적인 죽음이 사라지고 인공적인 죽음이 넘쳐나는 시대가 낳은 위기의식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유언장이나 ‘사전 연명의료 의향서’는 환자의 죽음의 시기를 결정해야 한다는 부담감으로부터 의사들을 해방시켜 준다고 저자는 말한다. 이 책을 통해 죽음의 의미를 여러 가지 각도에서 볼 수 있으며 현재 우리가 처한 문제를 돌아보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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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사색하는 시간 생존은 나의 사적인 (매일매일) 문제이자 사적인 (매일매일) 책무이다. 이 책의 주된 정서는 “죽음을 사색하는 시간”이란 책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죽음과 관련한 다각적인 철학 함의를 통해 철학, 인문학, 고전과 신화적 구전, 다양한 국가들의 죽음과 종교적, 의학적 시각, 그리고 학자와 저자의 자전적 인풋과 아웃풋으로 죽음이란 무엇이며 어떻게 바라보는지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는 흥미로운 글이었다. 또한 제목의 의미가 함축된 부제인 ‘어떤 시간을 사느냐에따라 죽음의 의미가 달라진다’는 것으로 삶을 형성하는 시간적 질과 구조에따라 죽음을 사색하며 더불어 종교적 상상력과 일반적 시각의 의미가 달라진다고 봤다. 직접적으로 시선을 끄는 부분은 서두에 던진 저자의 질의였다. 죽음을 바라보는 종교의 진정성이란 단지 인간으로 하여금 고통뿐인 삶에 충실케하기위한 기능뿐일까, 종교란 단지 삶을 끝내지 못하도록, 자살하지 못하도록 하기위해 지어낸 환상, 허구에 불과한 것일까, 과연 끝까지 세상을 살아가도록 하기위한 적의의 혹은 선의의 거짖말에 불과한 것일까, 분문의 마지막 장을 마감하면서 사관과 종교들이 삶과 죽음의 행간에 숨겨진 지혜를 통해서는 저자는 그렇치 않다고 자신있게 답했을지 궁금했다. 개인적으로는 그렇치 않다고 믿고 싶다는 의미로 읽혔다. 물론 저자의 표현처럼 일반적인 인생이라는것이 사소하고 하찮은 일들의 영원회귀를 일상으로 반복하는 삶의 사유적 본질과 의식의 마지막 관문인 죽음이라는 풀릇을 통해 저자가 바라보고자하는 부분은 허무주의와 전통적 회복으로 삶의 실존적 의미를 환기시키고자 하는듯 했다. 종교학을 전공한 저자의 한계를 선입견으로 바라볼 수 도 있지만 저자는 단호히 폭넓은 시각과 깊이있는 통찰력을 가지고 저항하는듯 죽음 넘어를 바라보는 관념들에대해 객관을 유지하려고 노력한 흔적들이 전 부분을통해 느낄 수 있었다. 이에 기독교적으로는 저자의 언급처럼 신앙 특성상 삶속에 이미 죽음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죽음을 가장 잘 이용한 종교성을 가지고 있다는(p. 413) 저자의 주장은 사믓 의미있게 다가왔다. 덧붙인다면 정작 자신의 죽음은 볼 수 없고 타인의 죽음을 경험하는 삶을 통해 죽음이아닌 삶의 영원성을 이용하는듯하다. 또한 신의 시간인 카이로스를통한 구원계획은 플레스너의 말처럼 기독교적 시간 의식의 탈 신화화와 종말론적 탈 신화화로인해 시간속에서 신화와 신의 흔적이 제거된 의미하는것이라고 말하고 있다.(p. 334) 다만 21세기 현대사에 기독교적으로 바라본 계시, 종말, 은총, 구원, 부활 등의 시간의 속성은 기독교의 쇠퇴로 말미암아 세기 적 피로감을 가지고 있다고 개인적인 생각을 해본다. 또한 종교 밖의 진실을 안으로 들일땐 종교가가진 변증을 통해 흡입하고 각색하여 주입하는 것으로 제목에서 발견할 수 있는 죽음이라는 사유의 학문적, 인문학적인 의미까지 고찰하고 있기에 의미있는 시간이었다. 또한 사회학자인 바우만이 바라본 삶의 고찰에대해서도 ‘우리는 죽지 않는다. 우리는 무언가에의해 살해된다’는 의미는 생명과 관련한 큰 죽음과 삶의 사유적인 작은 죽음들로 복선화하여 그의 시선이 상당히 흥미롭고 공감도 간다. 개인적으로 나를 해체하는 큰 삶의 마지막 해체와 작은 삶의 크고작은 단절들로 이루어진 그 무엇도 우리를 정지케할수 없다고 생각케한다. 이번에 읽게 된 책 제목과 관련하여 삶과 죽음이라는 관점에서 얼마전 온라인 기사를 읽던중 시청하게 된 인상깊은 동영상 장면이 기억난다. 한 남성이 오멸하며 상의를 플어혜친 또다른 남성 가슴에 갖다댄 청진기 소리를 듣고 눈물 흘리는 장면이었다. 이유인즉슨, 먼저 보낸 자녀의 심장을 이식받은 사람의 가슴속에 뛰고있는 심장소리를 듣고있다는 설명과 함께 불과 1~2분의 시간이었지만 지켜보면서도 감정이입이 됐다. 이미 자녀는 죽고 없지만 그의 심장소리가 귓가에 들려오는, 죽음을 바라보는 방식에 있어서 서양적 사고방식은 동양과는 다르기 때문에 단언할 수 는 없겠지만 그의 행동을 봐서는 심경의 복잡함 이면엔 삶의 경검함을 읽어볼수 있었다. [본문중에서] # 출생과 죽음은 login과 logout에 불과하다.(매일매일) # 인간은 단 하나의 거대한 시간 안에서 함께 살지 않는다. # (매일매일) 우리는 죽지 않는다. 우리는 (매일매일) 무언가에의해 살해된다 # 생존은 나의 사적인 (매일매일) 문제이자 사적인 (매일매일) 책무이다. # (매일매일) 삶 안에 수많은 작은 죽음들이 배치될 뿐만 아니라 심지어 잠을 자고 일어나는 일조차도 죽음과 부활의 도시속에서 이해된다. # (매일매일) 신에 세계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만이 항상 신에게 (매일매일) 의존한다. [덧붙이는 글] 인간에게 신이 필요한 지점은 여기다. ... 신의 승인이 없다면 당신의 머리카락 한 올도 떨어지지 않는다. ... 모든것은 의미가 있고 어떤 것도 헛되이 일어나지 않는다. ... 우리에게 산다는 것은 억울하고 원통한 일의 연속일 수 있다. 그래서 신이라면 이 모든 일을 알것이라고 생각하고 싶어 한다. 신이 이러한 일의 원인을 알고 있으며 내세에서라도 이러한 불의를 바로 잡을 것이라고 상상하는 것이다. ... 나의 내세는 얼마나 지옥인가 아니 얼마나 천국인가.(본문중에) 리퀴르는 나의 죽음을 목격하는 타인이 내세라고 했다 당신의 생각은? 당신의 내세는 얼마나 지옥인가 아니 얼마나 천국인가. 나는 시간에대한 사유와 죽음의 구원론 사이의 접점을 드러내고자 이글을 쓴다. 신은 죽어있는자들의 신이 아니라 살아있는 자들의 신이다. [폴 리퀴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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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이분법을 너무 좋아한다. 좋음과 나쁨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다보니 삶에도 좋은 삶과 나쁜 삶이라는 이분법으로 구분하려고 한다. 죽음도 마찬가지다. 죽음에도 좋은 죽음과 나쁜 죽음을 말하기도 한다. 과연 삶과 죽음 앞에서 좋음과 나쁨의 잣대가 정녕 타당한 것인지 모르겠다. 죽음은 그저 죽음일 뿐이고, 삶 역시도 그저 삶일 뿐, 좋음과 나쁨은 그 누구도 판단할 수 없는 것이다. 근래에 회자되는 웰다잉이라는 말도 그렇다. 문자그대로 좋은 죽음, 편안한 죽음을 맞이하기 위한 준비과정이라 하지만, 우리가 일상에서 맞부딪히게 되는 죽음의 모습은 웰다잉과 거리가 멀다. 많은 사람들이 준비의 과정 없이 죽음을 맞이하고 있으며, 예상하지 못했던 일로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 현실이다. 코로나 펜데믹으로 바이러스 공포를 경험한 바로는 웰다잉이라는 말자체가 얼마나 공허한 메아리인지를 떠올려보게 된다. 이제 죽음은 도처에 널려있으며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죽음의 공포는 그 어떤 말로도 대처되지 않는 지경에 이르렀다.
미드 가운데 「워킹 데드」란 영화가 있다. 죽었지만 살아있는 시체들이 세계를 가득 메우고 살아있는 사람들은 좀비와 싸우다가 장렬히 죽음을 맞이한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자기가 사랑하는 이들의 처참한 모습을 보고 죽여야만 하는 고통에 괴로워한다. 살아있어도 죽은 자이며 죽었어도 살아있는 자이다. 그러나, 영화에서 명백하게 보여주는 것은 ‘어떻게든 살아남아야만 한다.’는 인간의 책무이다. 죽음이 도처에 있지만, 포기하지 않을 때 삶이 지속된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듯 살아남은 사람들은 오로지 살기 위해서만 투쟁한다. 지속되어야만 하는 우리네 삶에서 정작 필요한 것은 잘 죽는 웰다잉보다 웰리빙 즉 잘 사는 법을 배워야한다.
바우만에 따르면, 근대 이후의 세계에서 잘게 분해하여 행복이라는 무수한 ‘작은 불멸성’으로 해체하는 것이다. 이제 사람들은 삶의 끝에 자리하는 천국의 환희를 기대하기보다 일상생활에서 누릴 수 있는 작은 쾌락과 환희, 즉 웰빙에 몰두한다. 삶의 끝에 놓인 불확실한 천국을 갈구하기보다 삶의 매 순간에서 ‘작은 천국’을 건설하고자 한다. 바우만은 이러한 현상을 ‘불멸의 죽음’으로 개념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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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에게 죽음은 ‘탄탈로스의 바위’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탄탈로스의 머리 위에 매달린 채, 언제 허공에서 떨어져 탄탈로스의 머리를 박살낼지 알 수 없는 이 바위로 인해, 탄탈로스는 감히 신의 음식을 먹지 못한다. 아마도 제우스는 탄탈로스의 오만함을 징벌하기 위해 머리 위에 바위를 매달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바위는 인간과 신의 건널 수 없는 경계선을 의미한다. 탄탈로스는 바위의 추락을 감수하지 않는 한, 신의 음식에 손을 댈 수 없다. 신처럼 살려면 탄탈로스는 신들의 음식을 먹어야 한다. 그러나 음식에 손을 대는 순간 바위가 떨어질 것이다. 신처럼 살려고 하는 순간 탄탈로스는 인간으로서 처참한 죽을 맞이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죽음은 항상 신과 인간의 차가운 경계선을 알려준다.-p125
『죽음을 사색하는 시간』은 죽음에 대한 학문적 서사이다. 현대를 압도하게 지배하고 있는 죽음의 시간들에 대하여 사유의 문을 열어주는 책이라 할 수 있다. 무한한 시간 속에서 죽음이라는 유한성으로 인해 삶이 더 가치 있다는 누군가의 말처럼, 어쩌면 똑같이 시한부 인생을 걸어가는 우리에게는 꼭 필요한 화두가 아닐까한다. 신이 될 수 없었던 탄탈로스의 숙명처럼 무한한 시간 앞에 던져진 인간의 유한한 삶의 운명은 바위에 깔리지 않으려 애쓰는 탄탈로스 같은 것이 아닐까. 이런 고통에서 그저 살아내는 것, 이제 우린 웰다잉이 아닌 웰리빙을 외쳐야 할때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