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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렌트의 정치 - 한 청년 논객에게 부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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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학은 나를 용서해 주었고, 정치학은 나를 다시 단죄(재수감)했다.’ 4. 석 달하고도 열흘이 지났다. 백남기 선생님이 저렇게 의식을 회복하지 못 한지 백일을 넘기고 있다. 지난 주 토요일 3차 민중대회가 열렸다. 이제 나는 뚜렷한 대오도 없다. 정당에도 단체에도 적이 없다. 오래도록 한 정당에 당적을 두었고 적지 않은 후원금이 여기저기 빠져 나가기는 하지만 최근 몇 년 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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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학은 나를 용서해 주었고, 정치학은 나를 다시 단죄(재수감)했다.’

4. 석 달하고도 열흘이 지났다. 백남기 선생님이 저렇게 의식을 회복하지 못 한지 백일을 넘기고 있다. 지난 주 토요일 3차 민중대회가 열렸다. 이제 나는 뚜렷한 대오도 없다. 정당에도 단체에도 적이 없다. 오래도록 한 정당에 당적을 두었고 적지 않은 후원금이 여기저기 빠져 나가기는 하지만 최근 몇 년 간은 의식적으로 호적 없는 삶을 살았다. 최후에는 이 한국이란 나라의 국적에서 박탈당하고 싶지만 그것 또한 내 자유의지와는 상관없을 터. 스스로 호적을 박탈할 만큼 지력과 능력이 있진 않으니, 끊임없이 기생하는 삶을 살아야겠구나, 숨통이 꽉 막혀온다. 그래서 아마 이 책의 저자 하승우 선생이 오래도록 설파한 ‘아나키즘’에 대한 동경과 질시가 있는지도 모르겠다.

 

5. 시청광장에 서서 각 단체별로 발언을 하고 (이건 연대 발언이 아니다. 연대를 할 여력이 이 땅에 남아 있던가),... 광장에는 구속노동자 영치금이라도 모으려고 가난한 자들이 가난한 자들에게 모금함을 돌린다. 연단에서는 노란 옷을 입은 ‘416합창단’이 노래를 부른다. 아이들을 잃고 어쩌지를 못해 노래를 통해서 마음을 전하고 싶다는 그 말. 가장 처참한 자들이 처참한 자들에게 노래를 들려주는 세상이다.

그 청년 논객은 저 연단을 없애라고 했던가. 저 연단이 참여를 가로막는다고 그랬던가, 하지만 지금 저 연단이야말로 통곡의 벽이 되었고 비참이 비참에게 말을 걸고 있지 않은가.

“주권을 가지지 않은 자유로운 인간이 말과 행위를 통해 타인과 소통하여 권력을 구성하려는 공간”을 아렌트는 공론장이라고 말했다. 민중대회를 꾸리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공론장을 만들려는 것이고 그 장을 권력으로 직조해보려는, 노력(번번이 실패하지만)이 모이는 장소이다. 아렌트에게 권력은 매우 중요한 문제였다. “권력은 서로 소통하는 이들이 동의할 때 생기는 힘, 말과 행위라는 인간들 사이의 교류가 권력을 만들어낸다.” 라고 말이다.

 

그런데 아마 그 청년논객에게 연단을 만들고(연단을 구성하려는 사람들은 늘 먼저, 더 많이 움직여야 하는 사람들)민중대회를 이끄는 사람들이 좀 더 많은 권력을 가져야 한다는 점을 간과했는지 모르겠다. 아렌트가 말하는 권력은 지금 박근혜가 휘두르는 권력과는 다른다. 박근혜가 획책하려는 권력은 ‘전체주의’의 문제, 즉 ‘지배’의 권력이다. 오히려 아렌트는 전체주의는 권력 자체를 없애려 하며, 시민들의 공적인 장을 구성하는 가능성 자체를 봉쇄하려 한다고 말한다. 아예 정치가 실현되려는 공간 자체를 없애려 하기 때문에, 공론장에서의 권력은 언제나 중요하다.

 

6. 이 청년논객은 민주노총이든 농민회든, 416연대든, 기존의 ‘데모꾼’들이 휘두르려 하는 것을 권력으로 느껴졌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나는 울부짖음으로 들렸다. 가장 절실한 사람들에게 더 많은 말의 권력을 이양할 정도의 아량없음에 좀 더 속이 상했달까.


민중대회가 열린 서울시청 광장에서 오랜만에 ‘경청’이라는 것을 했다. 쪽수 채운다는 말은 지난 20년 동안 내가 견지한 참여의 자세였고 함께 간 동료들과의 뒤풀이가 중요했던 적이 더 많았다. 그야말로 ‘서른 잔치는 끝났다’의 그 시구는 바로 내 얘기이기도 했다.
그런데 적어도 지난 20년 동안 울부짖어야 하는 말들의 양은 늘어났고 통곡의 대기순서표가 더 길어졌다. 그래서 더 강하게 권력을 욕망하고 싶다.

 

시청광장에 사람이 채워지길 가장 바랐던 사람은 누구일까?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인권위 건물 전광판에서 고공농성을 하고 있는 기아차 노동자였을 것이다. 민중대회 내내 그 전광판에 계속 눈이 갔다. 꽉 채워진 서울시청 광장은 한순간의 선물처럼 느껴지지 않았을까. 그 청년논객의 어깨를 두드리며 “저기를 봅시다.”라고 전하면서 손을 뻗어보고 싶다. 싸움의 끝판을 지키고 있지만 오히려 그 싸움의 핵에 들어가 있어서 이 공론장을 가질 수 없는 사람들 말이다. 우리 시대의 가장 큰 불행은 가장 많은 하소연을 하고 위로를 받아야 할 사람들이 ‘권력’의 주체로 설까봐 견제를 받아야 하는 것이다. 줄 수만 있다면 그들에게 온전한 권력을!

 

7. 이날 민중대회에 한 구석을 차지하고 있을 무렵, 국회에서는 정청래의 필리버스터가 이어지고 있었다. 24시간 국회방송에서 이 생경한 모습을 생중계하고 저마다들 한 마디씩 보태기도 했다. 24시간 방송송출이 가능한 그 공간을 가진 자들의 권력과 ‘평화집회여도 불법’이라고 진단받는 원천봉쇄의 공간의 극한 분열감. 헛소동으로 끝난 필리버스터 정국과 끊임없이 서울 시청으로 광화문으로 혜화동으로 모여 들었던 ‘진짜 소동’으로 시선을 옮겨오는 것. 그것이 정치이지 않을까.

 

“대중 개개인이 지도자와 일체감을 가지며 자신이 지도자의 위대한 뜻을 실현하고 있다고 믿게 만드는 지배형태”가 아렌트가 말 하는 실체없는 지배다. 이 실체없는 지배의 가장 큰 조력자는 생각 자체를 단속하는 ‘비밀경찰’의 존재다.
이는 결국 ‘총체적 지배’, 수없이 다양하고 독특한 사람들을 마치 하나의 인간인 것처럼 조직하려는 지배에 이른다. 인간의 자발성을 완전히 거세시키려는 지배, 이것이 전체주의의 지배다. 그렇다면 이미 박근혜는 99%의 성공을 거두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1%의 낯선 가능성을 필리버스터 정국에 살짝 보았던 사람들이 그 나머지 1%마저도 박근혜 입에 낼름 가져다 넣어버릴지도 모를 지금. 그래서 아렌트를 다시 읽고 새긴다.

 

-이어서

a****6 2016.03.01. 신고 공감 2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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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렌트의 정치 - 한 청년논객에게 부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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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학은 나를 용서해 주었고, 정치학은 나를 다시 단죄(재수감)했다.’ 1. 이 책을 읽은 지 한 달도 더 지났다. 무엇보다 한나 아렌트가 워낙 큰 학자인데다, 대학원 때 떠듬떠듬 읽던 아렌트의 '전체주의의 기원'과 '인간의 조건'이 전혀! 네버! 기억나지 않는다. 보통 공부의 길로 들어서면 많이 듣는 이야기가 '원서'로 읽으라, 다. 글쎄 나는 꼭 그렇게 생각 안 한다. 한국 학계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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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학은 나를 용서해 주었고, 정치학은 나를 다시 단죄(재수감)했다.’

1. 이 책을 읽은 지 한 달도 더 지났다. 무엇보다 한나 아렌트가 워낙 큰 학자인데다, 대학원 때 떠듬떠듬 읽던 아렌트의 '전체주의의 기원'과 '인간의 조건'이 전혀! 네버! 기억나지 않는다. 보통 공부의 길로 들어서면 많이 듣는 이야기가 '원서'로 읽으라, 다. 글쎄 나는 꼭 그렇게 생각 안 한다.

한국 학계의 원전주의와 원서주의에 불만이 많은 것은 내 지력의 문제가 99퍼센트다. 하지만 좋은 사람들이 셀파로 나서주는 독서안내를 먼저 접하는 것. 게다가 그 셀파가 그야말로 닥치고 믿는 선생님과 편집자라면 이렇게 시작하는 것도 좋다. 독서의 우회도로를 택할 때 우연한 풍경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도 기억나는 건 아렌트의 원전의 핵을 뚫지 못하고 그저 ‘읽어냈구나’ 라는 하릴없는 만족감 뿐이었으니. 하지만 이 책을 읽고 아렌트의 이야기와 마음이 비로소 진짜로다가 궁금해졌다.

당신은 책을 얼마나 읽습니까? 보다는 당신에게는 좋은 독서 안내자가 있습니까?

2. 권정우, 하승우 선생이 안내하는(혹은 침잠하는), <아렌트의 정치>야말로 일종의 호재를 만났다. 지금 아렌트의 이론과 이야기가 가장 잘 들어맞는 곳이 한국 말고 또 어디 있겠는가 말이다. 처음에 이 독후감(감히 서평이라고도 못 하겠고)을 쓸 때는, 젊은 논객(?)이 자신이 운영하는 사이트에 올린 ‘데모단상’과 연결 지어 쓰고 싶었다. 그 젊은 논객은 민중대회의 곳곳, 면면을 ‘평가’ 하면서 더 많은 사람들의 참여를 위해서는 이 촌빨 난리는 집회의 ‘형식’을 바꿔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공감을 표시했다. 미리 약도 치긴 했다. 자기는 집회 참여도 종종했고 참여도 안 하는데 입 닥치라고 하는 ‘꼰대짓’은 거절이라고 말이다.

나는 그 청년의 글보다는 거기에 대한 많은 이들의 ‘공감표시’에 많은 관심이 갔다. 분명 민중대회에 참여했다는 점에서는, 아렌트가 말하는 ‘공통감각’은 있었을 것이다. 취지에는 동감하는데 그 형식과 내용에는 동감하지 못 하겠단 그 글은 나를 비롯한 몇몇 동료들에게 묘한 불쾌감을 일으켰는데, 그런 점에서 나는 그 똘똘한 청년과 전혀 ‘감각’을 나누지 못하고 있구나 싶었다.

왜냐면 여전히 집회에서 ‘철의 노동자’나 ‘동지가’를 들으면 감각이 살아나니까, 그 청년에 빗대어 보자면 꼰대감각, 혹은 386의 감각(에이씨..내가 386욕을 얼마나 하는데)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3. 아렌트는 이렇게 말 했다고 한다(이건 하쌤, 권쌤이 턱별히 뽑은 아렌트의 정수들이니까..내가 발견한 것처럼 쓰진 않으련다). ‘만남의 공간이 없어지는 것은 사실 전체주의의 목표이기도 하다.’ 왜냐면 만남은 낯선 타자와 만나는 일인데다가, 그 장소는 안전지대가 아니기 때문이다. 아렌트는 ‘만남은 늘 오만불손함에서 탄생한다’고 말한다.

안전하지 않은 곳, 즉 위험천만한 장소가 곧 만남의 장소이니 말이다. 보고 있지 않은가. 안전하지 않은 곳에 타자를 만나러 왔다가 그야말로 위험천만해진 ‘백남기 농민’ 말이다. 오만불손하게, 감히! 박근혜를 위시한 전체주의에 스크래치를 내기 위한 이 위험한 만남은 ‘백남기 농민’을 만나게 해 주었고, 우리는 또 그 위험에 민주노총 한상균 위원장을 내어 놓았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그 청년에게 묻고 싶어졌다. 당신은 그 만남의 장소에 누굴 만나러 왔고. 누굴 만나고 갔는지 말이다. 어쩌면 지금 현 체제에 대한 강한 불만과 전복의 의지가 그 장소로 그를 이끌어냈을 것이다. 그런데 그가 그 혹독한 현장에서조차 아무도 만나지 못하고 돌아섰음을 알 것 같았다. 끊임없이 집회의 자유를 설파하고 지금 체제에 대한 비판은 내세웠지만 외로운 글(그)을 만났다.

-이어서

a****6 2016.03.01. 신고 공감 0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