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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가 들수록 과거의 기억들에 천착하게 된다. 왜 그럴까, 라고 생각했던 의문이 지금에서야 이해된다. 지극히 현재진행형인 삶을 산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불쑥불쑥 옛생각이 떠오르는 건 어쩔 수 없다. 아마도 자기가 원하는 어떤 것에 매진한 시기가 지나서일까. 살아온 날들이 더 길어서일까. 특히 유년시절 혹은 청년시절의 기억들이 불쑥 떠올라 흔히 말하는 추억에 잠기곤 했던 것처럼. 오래전의 기억들이 찾아와 마음을 뒤흔들게 되는 시기가 있다. 나이가 칠십이 넘다보면 더욱 그러할 것 같다. 영원히 산다는 생각을 버리게 되는 시기이기도 할 것이므로 우리는 과거의 기억에 매달리는 것 같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신작 소설집 『일인칭 단수』가 특히 그러했다. 단편 소설이나 어쩐지 에세이처럼 읽혀졌다. 화자가 일인칭 이기도 하고 소설 속에 하루키라는 이름이 그대로 드러나 하루키의 기억속으로 다가가는 것 같았다. 그가 손짓하는대로 그의 기억속으로 다가갔다. ![]() 여덟 편의 소설에서 느껴지는 건 역시 하루키의 느낌이 강하다는 거다. 음악을 좋아하고 야구를 좋아하고 판타지적인 내용이 가득했다. 하루키는 재즈를 좋아하여 재즈바를 운영하기도 했다. 그러한 이유로 음악적인 색채가 짙었다. 소설 전반에 음악이 흐르는 느낌이랄까. 인생에 있어 다양한 삶을 경험해보는 게 좋을 것 같다. 다양한 경험은 선택의 기로에 있을 때 현명한 선택을 할 수도 있으며 작가에게는 소설의 자양분이 되므로 그렇다. 「돌베개에」를 보면 그녀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것이 없다고 여길 만한 여자에 대한 이야기다. 같은 일터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던 중 우연히 하룻밤을 함께 하게 된 이야기를 그렸다. 좁고 볼품없는 자췻집으로 찾아왔던 여자는 단카를 지었었고 굵은 실로 엮어 간소한 표지를 입힌 자비출판이라고 할만한 가집을 보내주었다. 죽음에 대한 냄새가 짙은 단가였다. 사람은 눈 깜짝할 사이 늙어 버린다. 우리의 육체는 돌이킬 수 없이 시시각각 소멸을 향해 나아간다. 잠깐 눈을 감았다가 떠보면 많은 것이 이미 사라져버렸음을 깨닫는다. 강한 밤바람에 휩쓸려, 그것들은 - 확실한 이름이 있는 것이나 그렇지 않은 것이나 - 흔적 하나 남기지 않고 어딘가로 날아가버렸다. (24페이지, 「돌베개에」 중에서) 발췌 문장에서 이 소설집이 가진 하루키의 전반적인 느낌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가 가진 기억들이 소멸하기 전에 책 속에 붙잡고 싶은 마음들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여자에 대한 이야기가 주를 이루는데 『여자없는 남자들』의 다른 버전인 것만 같다. 하루키의 소설이 기묘한 판타지적인 느낌이 강한데 「크림」도 그렇다. 대학에 들어가지 않고 재수생 신분일 때 같은 피아노 학원에 다녔던 여자애로부터 연주회 초대장을 받고 그 장소에 찾아갔던 에피소드를 말하고 있다. 초대장에 쓰여진 장소에 갔으나 커다란 철문에 굵은 쇠사슬이 친친 감겨져 굳게 닫혀 있었다. 기다리다가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정자의 벤치에서 쉬고 있었다. 스트레스성 과호흡 증세가 덮쳐왔다. 호흡을 가다듬으려 숫자를 세고 있을 때 그를 바라보는 한 노인을 발견했다. 노인은 그에게 '중심이 여러 개 있는 원'을 떠올려 보라고 했고 어느 순간 그 증세는 가라앉았다. 모르는 걸 알아내려는 인생의 크림을 생각하라는 그의 말을 오랜 시간이 지나서 떠올려보며 누군가에게 전해주는 이야기다. ![]() 「찰리 파커 플레이즈 보사노바」에서는 하루키의 재즈 사랑이 그대로 드러난 글이라고 할 수 있겠다. 대학생 때 쓴 글로 실재하지 않는 <찰리 파커 플레이즈 보사노바>라는 음반이 있고, 직접 연주까지 했더라면 이라는 가정하에 쓴 글이었다. 이 글을 읽은 사람들은 이 음반이 실재하는 줄 알고 이걸 사려고 레코드가게를 찾는 사람들이 있었다. 시간히 흐른후 일 때문에 뉴욕에 머물렀을 때 중고 레코드 가게의 찰리 파커 코너에서 이 타이틀과 곡명이 그대로 인쇄돼 있는 음반을 발견했다. 다음 날에 사도 되겠지하는 마음으로 레코드 가게를 나왔다가 다시 갔더니 그 음반이 처음부터 없었다고 했다. 하루키는 그 밤에 꿈을 꾸게 되는데 꿈 속에서 찰리 파커가 음악을 연주해주었다. 실제로 일어난 일이 아니었을까 싶을 정도였다. 물론 하루키는 소설가이므로 약간의 기억에 의존해 소설의 색깔을 다르게 입힐 수도 있지만 좋아하는 뮤지션이 꿈에 나타나 함께 시간을 보냈다면 그것처럼 좋은 게 또 어디 있을까. 기억의 배열이 흐트러지는 질환을 갖고 있는 한 소녀의 오빠와의 에피소드인 「위드 더 비틀스」에서 비틀스 음반을 가지고 있던 소녀와 첫사랑 소녀의 이야기에서 우리는 타인의 늙음에서 세월을 느끼고 서글픔을 느낀다는 내용이었다. 이 소설에서 하루키에게 동류의식을 느꼈는데 그가 나와 같은 활자중독에 가까운 습관을 보인다는 사실이었다. 책이 없으면 손에 잡히는 모든 인쇄물을 읽는 습관 말이다. 나 또한 읽을거리가 없으면 과자봉지나 상품설명서 등 모든 글자를 읽는다. 활자를 읽지 않고는 시간을 잘 보내지 못하는 부류인 그가 여자친구의 집에서 꺼내든 것은 '현대국어' 였다. 교과서를 받아들었을때 맨 먼저 훑어본 게 국어 교과서였고, 국어책에 수록된 작품들의 짧은 지문들이 안타까웠던 기억들을 떠올리게 했다. 「사육제」는 지금까지 만난 사람 중 가장 못생긴 여자와 함께 각자 좋아하는 클래식 음악에 대한 이야기를 말한 내용이었다. 서로 피아노 곡을 특히 좋아하여 슈베르트의 피아노소나타와 슈만의 피아노 작품 중 그 중에서 한 곡만 남긴다면 뭐가 좋을까라는 질문에 슈만의 「사육제」를 떠올릴 정도로 취향이 비슷했다. 시간이 지난후 뉴스에서 떠들썩한 소식으로 다시 찾아온 그녀를 마주하고 느끼는 감정들을 담은 소설이었다. 「시나가와 원숭이의 고백」은 여행중 허름한 온천의 작은 료칸에서 만난 원숭이를 만난 기이한 이야기이다. 온천욕을 하고 있는데 원숭이가 다가와 등을 밀어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던 에피소드였다. 물론 다음날 주인에게 원숭이와 함께 마셨던 맥줏값을 내겠다고 했지만 그 료칸에는 캔맥주밖에 없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가 목욕탕에 몸을 담궜을때 찾아왔던 원숭이는 기묘한 하룻밤 꿈과도 같은 존재였을까. ![]() 인생은 이기는 때보다 지는 때가 더 많다. 그리고 인생의 진정한 지혜는 '어떻게 상대를 이기는가'가 아니라 오히려 '어떻게 잘 지는가' 하는 데서 나온다. (131페이지,「 『야쿠르트 스왈로스 시집』」 중에서) 「 『야쿠르트 스왈로스 시집』」은 변변찮은 실력이지만 오랫동안 응원해온 야구 팀에 대한 애정을 시집으로 엮은 이야기다. 스포츠에는 문외한이며 야구경기는 겨우 TV에서 국가대항전이나 지켜보는 나와는 많이 비교되는 내용이었다. 이 소설은 박민규 작가의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을 연상시켰다. 야구장에서 경기를 지켜보며 느끼는 여러 감정들을 시로 표현하는 그의 야구에 대한 애정이 깊게 느껴졌던 소설이었다. 표제작인 「일인칭 단수」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일 년에 고작 두세 번 입는 슈트를 차려입고 단골 바를 뒤로하고 한 번도 간 적 없는 바로 들어갔다. 보드카 김렛을 시켜놓고 미스터리 소설을 꺼내 읽다 만 곳을 이어 읽었다. 집에서처럼 독서에 집중할 수 없었음에도 계속 읽고 있었다. 한 여자가 다가와 그렇게 하면 멋있다고 생각하는지 시비를 걸고 있었다. 그의 친구의 친구라고, 기억나지 않은 삼 년전의 물가에서 있었던 일을 말하며 부끄러운 줄 알라고 말했다. 이러한 터무니없는 일을 당했을때 우리는 어떻게 행동하는가. 하루키처럼 조용히 술값을 계산하고 나올까. 아니면 도대체 누구냐며 그 여자에게 따질까. 몹시 불쾌한 상황일때 여러분이라면 어떻게 행동하는가를 물었다. 하루키다운 소설이었다. 어쩌면 에세이로도 읽혀지는 소설. 재즈와 클래식 음악을 사랑하는 그와 음반에 대한 기묘한 이야기. 말하는 원숭이라니 생각해본적이 있는가. 하루키만이 그릴 수 있는 하룻밤 꿈과도 같은 이야기였다. 다만 이 이야기는 그의 기억들에 의존해 생의 무상함을, 기억들이 찾아와 마음을 뒤흔드는 노년의 쓸쓸함을 나타낸 소설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일인칭단수 #무라마키하루키 #홍은주 #문학동네 #책 #책추천 #책리뷰 #소설 #소설추천 #일본소설 #일본문학 #단편소설 #하루키 #하루키소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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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하루키, 수없이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그의 이름을 들을라치면 나는 살짝 비켜갔던 것 같다. 딱히 다른 이유가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사람들이 말하는 그만의 독특함을 느끼지 못해서였는지도 모르겠다. 언젠가 무라카미 하루키에 대해서 알고 싶다고 하니 누군가가 [노르웨이 숲]을 추천해 주었다. 그 작품을 읽으면서 기억에 남은 것은 방황하던 스무 살 즈음의 초원의 풍경을 세세히 묘사한 것이었다. 어쩌면 나의 스무 살 언저리를 생각나게 해주어서 기억에 남았지 싶다. 단지 그것 뿐, 사람들이 왜 하루키에 열광하는지를 느끼지 못한지라 그 후론 잊어버렸다. 그의 신작이 발표될 때마다, 혹은 그가 뉴스의 중심에 설 때마다 조금씩 호기심이 들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다들 취향 탓으로 여기며 지나쳤던 것 같다.
그렇게 한 발짝 떨어져서 바라보던 하루키의 신작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내가 책을 선택하는 기준 중 하나이기도 한 제목 때문이다. [일인칭 단수], 단수란 일반적으로 복수를 전제할 때 쓰이는 말이다. 그러기에 일인칭에서 단수라면 자기 자신만을 가리킨다. 우리가 아닌 나, 즉 내 자신의 이야기라는 뜻이기도 하다. 장르가 소설인데 작가는 어떻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줄까 하는 호기심 반, 사람들이 반한 하루키의 글쓰기를 이 책에선 느낄 수 있을까 하는 궁금증 반으로 읽었다. 헌데 책에 수록된 첫 작품을 읽으면서부터 헷갈리기 시작한다. 소설인지, 수필인지 혹은 자신의 이야기인지 아니면 허구인지 생각이 많아진 것이다. 표제작을 포함하여 총 8편의 단편이 수록된 이 책을 읽으면서 작가는 과연 무엇을 얘기하려 했을까 라는 생각을 단념하고 그냥 활자를 읽어간다. [일인칭 단수]라는 제목처럼 8편의 단편 모두는 나의 시점에서 이야기가 시작되고 진행된다. 각 단편은 소재에 따라 혹은 이야기의 전개에 따라 회고 형식의 글, 취미를 소재로 한 글, 그리고 약간은 비현실적인 내용을 담은 ‘글’들로 분류할 수 있다. 물론 전부다가 회고형식을 띠고 있지만 굳이 분류하자면 그렇다는 것이다. 여기서 작품이 아니라 ‘글’이라고 말한 것은 ‘나’라는 시점 때문인지 소설로 읽히지 않고 그저 신변잡기를 다룬 산문처럼 읽혀졌기 때문이다.
먼저 회고 형식의 글로는 <돌베개에>, <위드 더 비틀스>를 들 수 있다. <돌베개에>서 나는 만 스무 살이 되기 전인 대학교 2학년 때 만난 한 여인을 떠올린다. 같은 일터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던 이십대 중반의 여자와 어쩌다 하룻밤을 같이 지내게 되고 ‘돌베개에’란 단카집을 선물로 받는다. 그 후론 만난 적도 없지만 그녀의 단카 가운데 몇 편이 마음속에 남아있는 것은 그것이 말語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하루키는 긴 세월이 흐른 후 사소한 기억만이 남지만 그것은 그다지 믿을 것이 못된다며, 말과 생각은 먼지가 되어 사라지고 약간의 말語이 남을 뿐이라고 했는지도 모른다. <위드 더 비틀스> 역시 고등학교 시절의 이야기에 대한 회고이다. 비틀스가 한참 인기를 얻던 1964년 초가을, 새학기가 시작되고서 학교 건물의 어둑한 복도에서 나는 한 여자애와 스쳐지나갔다. 가슴에 ‘위드 더 비틀스’라는 음반의 LP판을 안고 있었던 그녀를 보는 순간 내 귓가에서 종이 울렸다. 비틀스의 음악은 글의 양념이 되었을 뿐 문제는 여자를 만날 때 귓가에 종이 울리는지 여부이다. 나를 좋아했다는 그전 여자친구의 자살소식을 들으면서 그땐 귓가에 종이 울리지 않았음을 떠올린다. LP판을 안고 있던 아름다운 소녀를 그 때 이후로 보지 못했지만 도쿄에서 만난 한 여자는 종을 울려주었다. 소설인지 작가의 자전적 얘기인지 아리송하지만 글을 읽고 난 후, 한 때의 사소한 기억들이 훗날 또 다른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것이 우리 삶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게 만든다.
<야쿠르트 스왈로스 시집>, <사육제>는 야구와 음악이라는 작가의 취미생활을 소재로 한 글들이다. ‘야쿠르트 스왈로스 시집’은 어려서부터 야쿠르트 팬이었던 내가 이기는 날보다 지는 날이 많았던 야쿠르트의 경기를 보면서 노트에 끼적였던 시들을 모아 출간한 시집이다. 시집은 오백 부를 제작해 삼백 부쯤 팔리고 나머지는 지인들에게 기념으로 나누어주었는데, 그것이 지금은 희귀한 아이템이 되어 비싼 값에 거래되고 있다. 수중엔 딱 두 부만 남았는데 더 많이 남겨두었으면 좋았을 것이란 생각을 한다. <사육제>는 슈만의 교향곡 ‘사육제’를 소재로 하고 있다. 내가 만난 여자 중 가장 못생긴 여자였던 F*와는 우연히 연주회에서 만나 알게 되었다. 그리고 슈만의 ‘사육제’가 가장 좋아하는 곡이라는 의견의 일치로 친구가 되었고, ‘사육제’를 매개로 한 만남은 반년 가량 이어진다. 한동안 연락이 끊긴 후 그녀를 다시 본건 대형사기 공범으로 남편과 함께 체포되었다는 텔레비전 뉴스에서였다. 그 후로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나는 지금도 슈만의 ‘사육제’ 콘서트가 열리면 그녀를 찾아 두리번거린다. ‘야쿠르트 스왈로스 시집’ 출간이나 ‘사육제’에 얽힌 F*와의 만남은 취미를 매개로 일어난 작은 사건일 뿐이다. 그러나 그 기억들은 멀고 긴 통로를 지나 작가가 있는 곳으로 찾아오고 마음을 뒤흔든다. 우리는 한 때의 기억이 때로는 내 삶의 자양분이 되기도 하는 것을 간혹 경험한다. 그래서인지 나 역시도 한 때의 기억에 목을 매는 경우가 더러 있다.
마지막으로 <크림>, <찰리 파커 플레이즈 보사노바>, <시나가와 원숭이의 고백>은 비현실적인 내용을 담은 글이다. <크림>은 내가 재수하던 시절 겪었던 기묘한 일에 대한 이야기이다. 스트레스성 과호흡으로 공황장애를 겪던 중 홀연히 나타났다 사라진 한 노인에게서 ‘중심이 여러 개 있는 원’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다. 혼자 힘으로 지혜를 짜내어 그런 원을 보게 된다면 인생의 크림, 즉 가장 중요한 에센스가 될 것이라는 말이 당시에는 신경이 쓰였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멀찌감치 물러나 바라보니 아무래도 상관없는 시시한 일처럼 느껴진다. <찰리 파커 플레이즈 보사노바>에서 나는 대학시절 재즈애호가들의 우상이었던 ‘찰리 파커’가 요절하지 않고 음악을 계속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가상의 음악평론을 쓴 적이 있다. 그리곤 잊어버렸는데 15년 후 어느 날 뉴욕의 중고레코드가게에서 그 앨범을 발견한다. 다음 날 그 앨범을 사러 가지만 그런 레코드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인의 말을 들을 뿐이다. 그 후로 꿈속에 찰리 파커가 나타나 ‘보사노바 음악을 연주하게 해주어서 고맙다’는 인사를 하러 들렀다고 한다. <시나가와 원숭이의 고백>은 인간의 말을 할 줄 아는 원숭이에게서 인간 여자를 사랑하는 방법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다. 그리곤 잊어버렸는데 5년 후 만난 한 여성편집자가 때때로 자신의 이름을 잊는 것을 보고서 그 원숭이를 떠올린다. 세 이야기 모두 현실에서는 일어나기 어려운 일, 일어날 수 없는 일에 대해 쓴 글이다. 이런 글을 쓴다는 것은 어쩌면 자신의 내면에 담겨있는 무언가의 원천을 찾아가는 일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것이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코드가 맞는다면 감동을 느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나에게는 잡담처럼 읽히는 까닭은 내가 아직 하루키에 대해 잘 모르기 때문일 것이다.
표제작인 <일인칭 단수>는 말 그대로 나 자신에 대해 생각하게끔 만든다. 때로는 거울 속에 비친 나를 보면서 타인 같은 느낌을 받는 경우가 있다. 그럼에도 나를 찾아야 하는 까닭은 나야말로 일인칭 단수이기 때문일 것이다. 평소에 슈트를 입는 일이 거의 없는 나는 때때로 옷에게 미안한 맘이 들어 슈트를 입는 경우가 있다. 그 날도 집에 혼자 있다 오랜만에 슈트를 입어보자는 생각에 슈트를 입고 거울을 바라보자 이상하게도 꺼림칙한 위화감이 들었다. 산책을 하다 바에 들어가 우연히 벽면의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보면서 미묘하게 뭔가 어긋난 느낌, 인생의 회로 어딘가에서 길을 잘못 들어섰다는 느낌에 휩싸였다. 그러다 한 여자로부터 도발적인 질문을 받게 되고, 그 자리를 피하지 못하고 머뭇거리다 바를 나온다. 계단에서 그 여자가 쏟아낸 말들을 생각해 보지만 기억 속에서 잘 파악이 되질 않는다. 공기가 차가워 슈트의 깃을 세우지만 ‘부끄러운 줄 알라’는 그 여자의 말만 들려온다. 언젠가 했던 나의 선택들이 모여 지금의 나를 이루는 것일 수 있다. 기억엔 없지만 그런 선택과 방향이 지금의 나인 셈이다. 허나 거울이라는 무의식 속엔 또 다른 선택을 했을 나의 모습이 있다. 그러나 어쩌라 난 바로 일인칭 단수이고 그래서 나 자신인 걸.
내가 소설과 친하지 않아서인지 혹은 무라카미 하루키에 대해 잘 알지 못해서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다른 사람들처럼 ‘과연 무라카미 하루키다’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누군가의 심금을 울리는 작품을 쓴 작가는 많고, 그 작품을 읽고 어떻게 평가하는지는 오롯이 그것을 읽는 독자의 몫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의 글이 아름답다고 느껴지는 것은 원작을 읽어보고 그것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 때 느껴지는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제목에 반했다 할지라도 어찌되었던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을 읽었고, 그리고 산문처럼 읽어나갔지만 작가를 알기 위해서는 아직도 시간이 더 필요한 것 같다. 기회가 된다면 작가를 좀 더 알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는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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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기
역시 ‘하루키다’ 하는 생각이 들게 만드는 작품들이다. 이 책은 단편 8개로 이루어진 소설집이다. 그리 극적인 얘기, 그렇게 재미있는 얘기, 극적 구조를 가지는 얘기 등이 아니다. 청소년기의 만남, 그리고 장년기의 만남 등의 이중적인 만남을 통해서 이야기를 풀어내는 내용들이 많다. 스릴이 있다거나, 치밀한 구조로 이루어졌다거나, 특별한 이야기를 담았다거나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도 하루키의 작품은 잘 읽힌다. 그것은 언어를 조각하는 기술이 뛰어나기 때문인 듯하다. 이야기가 하나의 잘 감아놓은 실타래처럼 풀린다. 시작만 하면 그냥 저절로 풀려나가는 듯하다. 그러기에 그렇게 부담을 갖지 않고 읽어도 된다. 내용도 그렇게 감춰진 의미를 찾으려 애를 쓰지 않아도 된다. 마음에 부딪혀 오는 대로 알고 느끼면 된다. 이 단편 작품들에서는 그렇게 만나 나가면 된다.
내용이 조금은 황당한 면도 있다. 꿈인 듯, 환상인 듯한 내용들이 많다. 등장인물들의 관계가 서로 밀도가 깊은 사이가 아니기에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 듯하다. 잘 알 수 없는 내용들이 표현되고, 그것이 작중 화자의 혼란스러운 의식에 반영되는 모양이다. 그러기에 쉬운 언어지만 손에 잡히지 않는 요소가 더러 있어 잘 인지되지 않는 부분도 있다. 그런 것들은 가볍게 대하면 될 듯하다. 설화를 보는 듯한, 민담을 만나고 있는 듯한 느낌의 내용들이 있다. 그렇게 보면 될 듯하다. 이들을 표현해 나가는 솜씨가 대단하다. 허상을 실상으로 보이게 만드는 능력이 탁월하다. 우리는 이야기를 만나면서 그의 화술에 많이 휘둘린다. 따라간다고 생각하면서 읽으면 되리라 생각한다.
내용과 이해
<돌베개에> 젊은 시절, 우연한 기회에 만난 여자에 대해 얘기한다. 지금은 얼굴도, 이름도 생각나지 않는다. 하지만 만난 상황은 떠올릴 수 있다. 대학에 다닐 때다. 같은 곳에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고, 서로 대화를 그리 섞는 사이는 아니었다. 그런데 하루 집으로 가는 길에 같은 차를 타게 되었고, 그녀가 자신이 사는 곳까지 가려니 너무 멀다며, 내가 있는 곳에 좀 갈 수 없겠냐는 얘기를 했다. 나는 집(원룸)이 누추하고 어지럽혀져 있다고 완곡하게 말했다. 하지만 정말 피곤했던지 그녀는 괜찮다고 했다. 그래서 둘은 나의 방에 들어가게 되었다. 여자는 옷을 훌훌 벗고 침대에 들어갔다. 나도 침대에 누웠다. 무척 어색한 분위기가 흘렀다. 여자는 말한다. 절정에 이를 때 다른 사람의 이름을 불러도 되느냐고. 큰소리를 내어도 되느냐고. 이름은 괜찮지만 큰소리는 곤란하다고 했다. 그럼 수건을 물리라고 한다. 여자는 나보다 5-6살은 많은 사람이다. 아침이 되었다. 우리는 해가 충천에 오를 때 일어나서 헤어졌다. 여자는 단가를 짓는다고 했다. 우리는 다시 서로 만나지 않을 것이라는 직감 같은 것이 왔다. 여자는 지금 단가를 외우는 것은 그러니까 작은 책을 냈으니 보내 주겠다며 주소를 부탁한다. 그리고 각자의 길로 갔다. 며칠 후 정말 단가집이 왔다. 그 단가가 나에게는 몇 가지가 마음에 깊이 박혔다. 내용이 죽음으로 향하고 있는 듯한 냄새를 많이 풍긴다. 지금은 시간이 많이 흘렀다. 그 여자가 지금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이름과 얼굴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단가와 하얀 살결은 기억에 남아 있다. 그녀가 아직도 살아있었으면 한다. 화자에게 일어났던 사소한 이야기, 기억도 잘 나지 않는 이야기라고 한다. 하지만 어떤 때는 그런 이야기들이 살아나와 한 편의 이야기를 만든다고 한다. 그 한 쪽을 찾아 이렇게 재생을 하면서 삶의 편린을 줍고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크림> 황당한 얘기로 들린다. 열여덟 살 때의 이야기라고 하면서 들려준다. 어릴 적 피아노를 같이 쳤던 아이가 연주회 초대권을 하나 보냈다. 그 아이와 나는 그리 밀접한 관계에 있었던 것도 아니다. 그 아이의 핀잔 때문에 내가 피아노를 그만 두었는지도 모르는 관계다. 그런데 이제 와서 나에게. 호기심도 있고 시간도 있고, 나는 가겠다고 했다. 날이 되어 언덕배기에 있는 공연장으로 꽃다발을 하나 사서 찾아갔다. 그런데 공연장이라고 여겨지는 곳까지 가니 아무런 공연의 흔적이 없다. 별의별 생각이 다 든다. 돌아내려올 수밖에 없었다. 내려오다 공원을 발견하고, 몸의 이상을 느끼면서 그곳으로 갔다. 그리고 호흡곤란을 느끼며 쭈그려 앉는다. 가끔 이런 경우를 당하는데 호흡이 순조로워 지길 기다릴 수밖에 없다. 간질이 발작했을 때 기다리듯이. 그런데 앞에 노인 한 분이 있고 이상한 소리를 한다. <중심이 여러 개 있으면서 둘레를 갖지 않는 원>을 찾아보라 한다. 한참 생각하고 있는데 앞에 아무도 없다. 그런 것이 있을까? 곰곰이 생각한다. 그러는 사이 호흡은 정상으로 돌아와 있다. 그날의 일, 무엇인가 헛것을 본 듯한 느낌에 쌓인다. 모든 일들이. 그러면서 살아오면서 어려운 일이 있을 때 그 원을 생각한다. 그것은 외형적인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노인이 말한 가장 소중한 것, 크림의 의미로 인식한다. 정확한 것은 누구도 알 수가 없다. 마음의 일이니까.
<찰리파커 플레이즈 보사노바> 이 음반은 실재하지 않는다. 찰리는 죽었고 그의 음반이 있다는 가상 하에 만들어진 이야기다. 이를 소재로 학교 잡지에 글을 실었고 찰리를 신성시하는 사람들이 있는지 비난에도 시달려야 했다. 하지만 편집장은 잡지가 논란이 되었다는 자체가 신선한 모양이다. 다음에 글을 쓴 것이 있으면 보여 달라고 했으니까. 그렇게 그 음반은 잊어버리고 살았다. 그리고 15년 후쯤 된다. 뉴욕에 살다가 중고 음반가게에 들린 적이 있다. 그곳에서 자신이 15년 전에 쓴 글 속에 나오는 음반이 있는 게 아닌가? 협연자도 곡도 자신이 쓴 그대로다. 해적판처럼 보인다. 그것을 구입하려다가 돈도 비싸고 얼토당토않다는 생각에 가게를 그냥 나온다. 그리고 조금 시간이 흐른 후 그래도 샀어야 했다는 생각을 한다. 그래서 그 가게로 간다. 가계가 닫혀 있다. 다음날 찾아가 보니 그런 음반은 없었다 한다. 황당해 진다. 꿈에서 보았나? 하나 더 얘기한다. 꿈에 찰리 파커를 만난 이야기다. 나를 위해서 연주를 해준 것이다. 꿈에서도 ‘꿈이다’란 자각을 한다. 내가 꿈에 찰리 파커를 만나고 있구나 생각한다. 그는 내게 고맙다고 얘기한다. 자신이 34살에 죽었는데, 그것이 예술인에게 올바르냐고 되묻는다. 그러면서 내가 만들어준 음반에 대해서 고마워한다. 이치에 닿지도 않는 얘기다. 그러나 저자는 자신에게 일어난 일이라고 믿음을 강권한다. 황당하고 웃기는 얘기다.
<사육제> 생김새에 관한 얘기다. 자신을 지극히 못 생겼다고 생각하는 여자가 있다. 일상적으로 잘 생기지 않았다 하는 것보다 ‘못 생겼다’ 하는 것을 더 즐기는 듯한 여자다. 나도 그 구절을 자연스럽게 사용한다. 그 여자는 그것을 즐기는 듯한 느낌마저 준다. 그것이 주위에 사람들을 모으는 역할을 한다. 나도 그래서 끌리기도 한다. 내 주변에 잘 생긴 여자들도 많다. 그런데 그들은 자신이 잘 생긴 것을 즐기지 못하는 모양이다. 어느 한 부분 못 생겼다고 생각하는 부분이 있으면 그것이 아킬레스건이 되는 모양이다. 나는 못생긴 여자와 콘서트를 같이 보고 음악에 대해 많은 얘기를 나눈다. 그 여자가 말한다. 무인도에 음악 한 곡만 가지고 갈 수 있다면 무엇을 가지고 가겠느냐고. 나는 한참 궁구하다가 슈만의 ‘사육제’를 말한다. 사육제로 되겠느냐는 얘기가 오가고 둘은 사육제를 가지고 함께하는 시간을 많이 가진다. 그러다 오랜 시간 선이 닿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 날 TV에서 그녀를 보게 된다. 대형사기사건의 공범으로 체포되고 있는 게다. 그녀의 연하 남편과 함께 자산운용 사기를 쳤고, 잡혀 들어가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 여자는 어디에 있는지 내게서 완전히 사라진다. 사육제의 흔적만 남긴 채.
<시나가와 원숭이의 고백> 황당한 이야기다. 황당한 이야기를 그럴 듯하게 얘기한다. 말하는 원숭이가 군마현에 살고, 내가 그곳에 가서 료칸에 묵을 때 그를 만난다. 그는 내 등을 밀어주고, 자신의 이야기도 들려준다. 그리고 자신의 삶을 얘기한다. 자신은 대학교수 부부에게서 교육을 받으면서 성장했고, 그 후 인간들에게 쫓겨나 원숭이의 세계로 갔으나 그곳에서 적응하지 못 한다. 그래서 다시 인간들과 삶을 살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된다. 하지만 인간들의 세계에서도 기피의 대상이 된다. 어쩔 수 없이 숨어서 이곳 료칸에서 일을 하고 있다. 다른 것은 그래도 견딜 수 있는데 이성에 대한 사랑은 동료인 원숭이에게서 느낄 수가 없다. 인간의 여성에게서만 연모의 마음을 느낀다. 하지만 여성들이 원숭이에게 그런 마음을 줄 리가 없다. 그래서 이름을 훔쳐 그 여인의 일부가 되면서 연모의 마음을 해소한다는 게다. 그러면 그 여성에게는 이름이 잘 기억나지 않는다든지 하는 일이 일어난다. 허무맹랑한 이야기다. 호랑이 담배 피우는 시절의 이야기 같다. 민담의 성격이 짙은 이야기를 자신이 겪은 듯 이야기하고 있다. 아침에 료칸에서 나올 때는 원숭이는 보지 못 한다. 이 원숭이 이야기가 시간이 흐른 후 만난 한 여성으로 인해 다시 떠오른다. 그 여성이 자신의 이름을 잊어 먹고 나에게 되묻는다. 예쁜 여인이다. 그 여인에게 나는 군마현에 간 적 있느냐? 신분증을 잃어버린 적이 있느냐 묻는다. 그렇다고 한다. 나는 시나가와 원숭이가 다시 활동을 하나 생각한다. 그 일로 인해 원숭이에 대한 기억이 재생되고 이렇게 글로 쓰게 된다.
<일인칭 단수> 매력적인 말이다. 일인칭 단수라니? 내가 또 다른 존재가 있을 수 있는가? 당연한 것을 당연하게 말하지 않고 낯선 언어를 사용하니 무척이나 혼란스럽다. 인간은 누구나 혼자인 것이다. 더구나 자신에게 있어서는 타인이 존재할 수가 없다. 거울을 본다고 해도 자신 이외의 자신을 어찌 생각할 수 있겠는가? 타인이 보기에 일인칭 복수로 보일 지라도 그것은 사실이 아닌 것이다. 옷을 입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옷걸이에 걸려 있는 옷을 보면 괜히 미안해지는 옷이 있다. 정성을 들여 사놓고 거의 입지 않는 옷들이다. 나에겐 슈트가 그런 옷이다. 미안하니까 입어 본다. 입으니 어색하기는 해도 밖에 나가보고 싶다. 슈트를 입고 밖으로 나간다. 기분 좋은 봄날 저녁이었다. 기분도 그렇고 조금 멀리 있는 바에 들어간다. 가까이는 차림새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바는 비교적 조용하다. 나는 그곳에서 책을 읽었다. 책이 잘 읽혀지지 않았다. 그러다 거울을 본다. 거기 낯선 누가 있었다. 나는 이곳에 일인칭 단수로 존재하고 있었는데 이 거울에 비친 자는 누구일까? 생각한다. 일단 책을 덮고 눈을 돌린다. 멋스럽게 차려입은 여인이 눈에 띤다. 시간이 흐르면서 여인이 가까이 머물게 되더니 말을 걸어온다. 열심히 읽고 있던데 책이 재미있느냐고? 꼭 나에게 시비를 걸어오는 듯하다. 나는 슬기롭게 자리를 떠야 했는데, 그러지 못 했다. ‘나를 아느냐’고 내가 물었다. 여인은 ‘당신의 아는 사람의 친구’라고 말했다. 그리고 ‘부끄러운 줄 알아라.’고 했다. 슈트, 꼭 빌린 옷 같네요. 옷에 대해 잘 아네요. 당연하잖아요. 나는 맨붕 상태가 된다. 아무리 생각해도 누군지 모르겠다. 그러면서 기분이 싸해 진다. 돌아서 나오는 자리의 모든 것들이 변해 있다. 기분 좋은 봄날이 우중충한 날로 바뀌어 있다. 일인칭 단수는 그냥 그렇게 존재하면 되는데, 복수를 마음에 두었던 모양이다. 미묘한 심리변화가 잘 드러난다. 가벼운 일상 속에서 찾아드는 기분의 변화, 스스로 잘 다스리고 제어를 해야 하는데, 그것이 잘 안 되는 게 사람이다.
나가기
대개 예술적인 쪽에서 소재를 가져왔다. 보통 잘 볼 수 없는 소재들을 다루고 있으면서 자신의 얘기를 하고 있으니 조금은 생경할 수 있겠다. 하지만 그런 것들이 오히려 독자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긴장감을 느끼면서 다가가게 하고 있다. 무척 흥미로운 이야기 전개가 아닐 수 없다. 낱낱이 구분된 이야기들이지만 전체적으로 묶어 하나의 큰 이야기로 표현할 수 있겠다. 저자가 관련하고 있는 분야가 예술이고, 그러다 보니 그 주변의 이야기들이 많아질 수도 있으리라. 삶 속에서 가져온 낱낱의 개별 이야기가 일반화 되면서 우리와 우리들이 이야기 속에 빨려 들게 한다. 흥미롭게 읽었다.
역시 문장이 명불허전이다. 모든 장면들이 눈에 쏙 들어오고 손에 만질 듯이 느껴진다. 묘사가 탁월하다. 문장을 이어나가는 게 언어의 연금술사 같다. 번역된 작품이 이럴진대 원본이야 말해서 무엇 하랴. 부드럽고, 섬세하고, 힘이 있고, 매혹적이다. 늘 그렇지만 이렇게 단편을 대하고 있으면서도 대단한 문장들을 만난다. 하루키를 좋아하는 이유도 그런 쪽에서도 있을 게다. 물론 이야기꾼의 이야기 솜씨는 바람이 흘러가듯 자연스럽고, 막힘이 없다. 최상의 이야기꾼이라 할 수 있겠다. 내용이 단순한 데도 그것이 충분한 문장이 되고 이야기가 된다. 이야기를 끌고 가는 것이 뭉텅이 실에서 낱낱의 실을 뽑아내던 멋스럽게 뽑아져 나온다. 이야기의 맥락이 마음에 큰 울림이 되도록 다가온다. 그것이 유려한 언어라는 옷을 입으니 더욱 빛이 날밖에. 문장과 내용 그리고 이끌어 나가는 솜씨, 아울러 멋진 한 폭의 경치를 만들어 놓고 있는 것이 이 책이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책을 읽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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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하루키다. 장편에서 보여주었던 웅숭깊은 서사와 치열한 주제의식과는 결이 다른 경쾌한 전개와 함축적인 메시지가 오히려 긴장과 몰입도를 높인다. 짧은 글에 밀도 짙은 얘기를 빼곡 쟁여 놓았다. 일상적인 신변잡기를 툭 던지듯 내뱉는데 그게 하나같이 예사롭지 않다.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를 반추하게도 하고 환상과 현실의 경계를 넘나들다가 삶의 비의에 직면하게도 이끈다. 늘 그렇듯 잔잔한 BGM이 백색소음으로 깔리고 청춘의 고뇌는 끝없이 이어진다. 그래서 하루키는 언제나 청년이다. 아니 어쩌면 아직 소년의 감수성을 간직하고 있는 듯도 보인다. 긁지 않아 잠재력으로 꿈틀대던 아련한 시절을 소환하고 있으니.
그런데 달리 보면 노년의 얘기로도 읽힌다. 인생의 구비를 돌고 돌아 이제 찬찬히 자신을 들여다보고 세상을 비쳐보며 거침없이 진심을 전하고 있다. 그는 사람의 인연에 대해 골똘히 천착하며 간곡하게 얘기한다. 우연히 겹쳤다가 끊어지고 다시 이어졌다 또 돌아서버리는 인연의 끈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래서 가볍게 읽히지만 묵직한 여운이 남는다. 음악 장르에 비기자면 이지 리스닝 계열이어서 어디 하나 걸리지 않고 쉽게 와 닿는데도 메시지가 강렬하여 가볍고 허탈하게 느껴지지 않는다고 할까. 고뇌와 모색 끝에 도달한 저세상 경지를 보여주고 있다.
먼저 <돌베개>에선 바람처럼 왔다가 안개처럼 스러진 한 겨울 밤의 인연을 떠올리며 단카에 함축된 삶의 의미를 짚어보고 있다. 서늘한 구절과 선문답 같은 결말엔 신비로운 아우라가 어려 있고 작가의 페르소나로 보이는 청년에게선 구도자의 풍모가 비친다. <크림>에서도 공원에서 우연히 만난 노인의 입을 빌어 생의 파도를 지나는 방법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영문도 모르게 꼬여버린 삶, 방향도 알 수 없는 길에서 과호흡에 시달리던 절체절명의 순간에 한 노인이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이처럼 사람의 인연에 대해 말하고 있는 여덟 편의 이야기는 하나 같이 아귀가 딱 맞아떨어진다. 인연은 공연히 이어지는 게 아니다. 베이스가 깔리고 백 그라운드가 펼쳐져야 장면들이 유기적으로 결합되는 것이다. 절묘하게 이어지는 인연의 연쇄 중에서 특히 <찰리 파커 플레이즈 보사노바>와 <위드 더 비틀스>의 여운이 짙게 남는다. 꿈과 현실, 픽션과 다큐가 겹쳐지는데 꿰맨 자국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감쪽같이 매만져서 현실과 환상의 구분이 모호하다.
<찰리 파커 플레이즈 보사노바>는 가상의 재즈 평론이 삽입된 액자소설이다. 현실과 환상이 절묘하게 어우러진 정체불명(?)의 작품이다. 환타지인지, 만화인지, 에세이인지, 아니면 진짜 경험에서 우러난 것인지 도무지 분간이 되지 않는다. 대학 시절 픽션으로 작성했던 평론이 실제 현실이 되고, 평론 대상이었던 찰리 파커가 꿈에 나타나 자신에게 한 번 더 생명을 부여해주어 고맙다며 <코르코바도>를 연주한다는 설정은 음악애호가이자 사람과의 인연에 매달리고 있는 하루키다운 발상이다. 꿈에서 들은 연주는 영혼 깊숙한 곳, 핵심까지 와 닿아 몸의 구조가 달라진 듯 느껴졌다고 고백한다. 인연의 고리는 실제와 가상을 초월하며 면면히 이어져 결국은 사람을 바꿀 수도 있다는 뜻이리라.
<위드 더 비틀스>는 단 한 번 스쳐지나간 인연이 뇌리에 붙박여 평생 그 그림자를 쫓다가 다른 이들에게 상처만 안겨 주었다는 얘기다. 운명처럼 다가온 한 장면이 주인공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놓았다.
그 이후론 모든 게 어둑한 복도에서 마주쳤던 소녀의 환영을 쫓는 삶이었을 뿐이다. 그런데 운명은 그를 다른 곳으로 데려다놓았다. 새로 사귄 여자 친구, 그녀의 오빠와 또 주인공은 끊어질 듯 실낱같은 인연으로 가느다랗게 이어진다. 비록 귓속 종은 울리지 않았지만 나름대로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던 그들, 그러나 더 이상의 진전이 없자 여자 친구는 극단적 선택을 하게 되고 우연히 다시 만난 오빠는 본인의 치유 소식을 전한다. 두 번의 만남과 묘하게 이어지는 인연의 연쇄는 우리의 삶 자체를 근본적으로 돌아보게 한다.
삶과 인연에 대해 되짚어보게끔 이끈 결정적 대목은 <일인칭 단수>에서 옆자리 여성과의 조우 장면이다. 전혀 모르는 여인이 혐오하는 눈빛으로 “부끄러운 줄 알라.”고 일갈하고 있다. 물(水)가에서 얼마나 고약하고 지독한 짓을 했는지 생각해보라며 다그친다. 아무 것도 모른 채 잔뜩 멋을 부리고 양주를 마시며 과묵하게 독서에 빠져있는 주인공의 허위의식에 그녀는 구토를 느낀다. 그런 게 멋있냐고, 지적이라고 생각하느냐고 도발하는 그녀. 당신한테는 안 어울리는 빌린 옷 같은 짓이라고 조롱하는 그녀. 뼈 때리는 그녀의 한마디 한마디가 화살이 되어 내게도 고스란히 와 박혔다. 마치 나를 향한 냉소이자 엄중한 문책 같았다. 나도 언젠가 이런 인연과 조우할지 모르겠다. 나의 물가는 어디였을까? 다른 이를 냉혹하게 몰아붙여 일을 그르치게 만들어놓고도 무심하게 돌아서버린 때가 언제였던가? 한참을 곱씹게 만들었다.
그래서 하루키는 우리 모두는 일인칭 단수라고 못 박는다. 다른 이들과 얽혀 있되 결국엔 자신 하나뿐임을, 타인에게 어떻게 비쳐지는지는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음을,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 비합리적인 개별자임을 일깨워주고 있다. 그런 일인칭 단수인 주체가 다른 주체와 인연의 고리를 어떻게 잇느냐에 따라 삶의 비의를 깨우쳐 한 단계 올라서기도 하고 그 언저리에도 미치지 못해 타인을 안타깝게 만들기도 하는 것일 테다. 정작 자신은 까맣게 모른 채 그냥저냥 넘어가버리고. 하루키는 이렇게 서늘하고 처연한 인간의 운명과 인연의 이어짐에 대해 담담하게 들려주고 있었다. |
![]() 이 책 속 여덟 개의 에피소드를 읽으면서 내내 ‘작가의 경험과 픽션의 만남’이란 생각이 들었다. 기억에 관한 이야기. 에세이 같은 소설. 실제 작가의 자신의 이름이 거론되기도 하기에 더 그런 생각이 들었다. 주된 소재는 기억이고 그 기억이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 생각하기 나름이지만 이 책에서 상기되는 기억들은 강렬한 이미지를 남겼기에 다시 현실에 소환되는 기억들이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다움이라고 여겨지는 다양한 종류의 음악들이 나오고, 비현실적인 경험을 하는 화자들이 나온다.
《돌베게》에서는 평범한 일상 속에 지내던 주인공이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알바생과 하룻밤의 일탈 후 남겨진 기억의 잔재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어떤 의미인지 모르겠지만 그녀가 기억에 남는 것은 아마도 그녀와 그날 이후로 다시는 만나지 못했기에 그녀의 안부도 생사도 알 수 없기 때문인 듯하다.
비현실적인 만남의 이야기는 《크림》, 《찰리 파커 플레이즈 보사노바》, 《시나가와 원숭이의 고백》에서 보여진다. 《찰리 파커 플레이즈 보사노바》에서는 오래전 사망한 찰리 파커의 새 가상 음반을 뉴욕에서 발견하고 꿈속에서 그의 연주를 들으며 고맙다는 말까지 듣는다. 《시나가와 원숭이의 고백》에선 말하는 원숭이를 만나 인간을 사랑하는 원숭이의 사랑의 방법에 대해 듣고, 《크림》에서는 현실에 존재하지 않을 듯한 현인같은 노인이 ‘중심이 여러 개 있으면서 둘레를 갖지 않는 원’을 떠올려 보라는 말에 정답을 생각하느라 급격한 정서불안 증세가 저절로 사그라듦을 경험한다. 노인이 말한 인생의 크림이란 불가능하다 여겨지는 일들을 성취하기 위한 노력과 그 노력 뒤에 남겨지는 인생의 특별함을 얻는 것이라 생각해보았다.
《사육제》 음악이라는 공통 관심사로 알게된 여성 F와의 순수히 음악에 관한 이야기로 자주 만남을 갖게 되지만 6개월의 만남 후 F가 사기꾼이었음을 알게 된다.
이 치열한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 F는 사기꾼이라는 악령의 가면을 쓰고, 자신의 천사의 민낯은 주인공에게만 보여줄 수 있었던 걸까? 아마 음악에 관한 자신의 순수한 천사의 민낯을 주인공에게만 보여줄 수 있었을 거라 생각해 보았다.
《일인칭 단수》에서는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나의 모습이 타인에게는 좋지 않은 기억을 남긴 나라면, 내가 알고 있고 마주하는 현실 속의 나는 도대체 누구인지에 대한 이야기이다. 기억에도 없는 여성이 적대감을 가지고 나를 비난하지만 도저히 그녀가 누구인지 생각이 나지 않는다.
정말 누군가에게 고약한 짓을 한 것인지 아니면 그 여성이 사람을 잘못 본건지에 대해 논리적인 답을 찾을 수는 없었지만 그 불쾌한 감정을 떠나보내려 했으나 계속 나를 향한 그녀의 비난의 말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다. 사실 이 에피소드가 가장 어렵게 다가왔다.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자아정체성을 찾으려 하는 화자라고 단정 짓기에는 좀 충분한 정보가 없었기에 어떤 주제일지의 의문은 아직도 명확히 풀리지 않는다.
《위드 더 비틀즈》에서는 비틀즈 음악과 관련된 고등학교 시절 마주쳤던 여고생, 사귀었던 여자친구에 대한 기억을 이야기 하고 《야쿠르트 스왈로스 시집》에선 무라카미 하루키의 스포츠 취향을 유머러스한 시와 함께 만나볼 수 있었다. 여덟 개의 이야기들 속 화자는 급변하는 감정의 동요 없이 기억속의 이야기를 꺼내본다. 가볍게 이야기를 펼치는 듯하면서도 깊은 사유는 독자의 몫이라는 듯. 무라카미 하루키의 이야기는 이렇게 많은 여운을 준다. 이야기 속 재즈, 클래식, 팝송 등이 언급되면 그 음악을 틀어놓고 책을 읽어보았다. 확실히 작가의 다양한 음악적 취향을 작품 속에 언급하지만 결코 그 배경음악이 튀지 않고 잘 녹아들었다. 슈만의 ‘사육제’를 처음부터 끝까지 들어본 것도 나에겐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다. 기억과 음악을 함께 할 수 있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이야기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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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이 잘 알지도 못하는 다른 사람의 경험을 끌어들이지 않아도 이렇게 다채로운 삶의 풍경을 그려낼 수 있는 건 어쩌면 그가 무라카미 하루키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인지도 모른다. 소설가라면 누구나 일정 부분 본인이나 가족의 이야기가 소설 속에 흘러들게 마련이지만 그렇다고 초기 작품이 아닌 이상 전적으로 자신의 경험에 의지하여 소설을 꾸려나가지는 않을 터, 세계적인 명성과 더불어 노벨 문학상 후보에도 매년 단골처럼 이름을 올리는 무라카미 하루키가 그와 같은 위험성을 모르는 채 자신의 지난 경험을 토대로 쓴 소설들을 한 권의 소설집으로 엮어 출간하지는 않았으리라. '일부러'라고 밖에는 달리 그의 의도를 설명할 수 없는(그래서 더욱 놀랍기도 하지만) <일인칭 단수>는 애독자라면 누구나 알 수 있는 그의 경험담을 소설로 개작한, 익숙한 듯하면서도 새로운 하루키 월드로의 여행 안내서 역할을 한다.
책에는 표제작인 '일인칭 단수'를 포함하여 여덟 편의 단편이 실려 있다. 대학교 2학년 시절 같은 일터에서 같은 시기에 아르바이트를 했던 이십대 중반쯤의 여인과 어느 날 우연히 단발성의 밀애를 즐겼던 기억을 되살려 그녀가 보내준 가집에 실린 몇 편의 단카 역시 마음 깊이 남아 있음을 말하고 싶었던 '돌베개에', 재수생 시절 열여섯 살까지 같은 피아노 학원을 다녔던 한 학년 아래의 여자애로부터 연주회 초대장을 받았던 '나'는 못내 미심쩍어하면서도 초대장에 적힌 콘서트홀을 어렵게 찾아갔지만 그곳은 아무도 없고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발길을 돌려 되돌아오다가 우연히 들른 마을의 작은 공원과 그곳의 정자 벤치에서 한 노인을 만났던 고베의 어느 흐린 일요일 오후를 그린 '크림', 열혈 재즈 팬이었던 '나'는 알토색소폰의 대부인 찰리 파커가 요절하지 않고 음악 활동을 계속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상상만으로 대학 시절 있지도 않은 음반 <찰리 파커 플레이즈 보사노바>에 대한 가상의 비평을 쓴 글이 대학교 문예지에 실린 적이 있었고, 몇십 년 후 그 음반을 실제로 마주했던 경험의 이야기가 실린 '찰리 파커 플레[이즈 보사노바', 전 세계가 비틀스 열풍에 휩싸였던 시절 고등학생이었던 '나'는 <위드 더 비틀스>라는 음반의 LP판을 가슴에 안고 복도를 빠르게 스쳐 지나갔던 아름다운 소녀에 대한 기억과 그 시절의 풍경을 담은 '위드 더 비틀스'.
"그래도 만약 행운이 따라준다면 말이지만, 때로는 약간의 말語이 우리 곁에 남는다. 그것들은 밤이 이슥할 때 언덕 위로 올라가서, 몸에 꼭 들어맞게 판 작은 구덩이에 숨어들어, 기척을 죽이고, 세차게 휘몰아치는 시간의 바람이 무사히 지나가기를 기다린다. 이윽고 동이 트고 거센 바람이 잦아들면, 살아남은 말들은 땅 위로 남몰래 얼굴을 내민다." (p.24 '돌베개에' 중에서)
야구를 좋아하고 야구장을 찾아 경기를 직관하는 것을 좋아하는 '나'는 야쿠르트 스왈로스가 산케이 아톰스이던 시절부터 경기장을 찾았고 외야석에 앉아 경기를 관전하면서 심심풀이로 썼던 시를 모아 자비출판의 형태로 시집을 낸 경험을 토대로 쓴 '야쿠르트 스왈로스 시집', 수많은 피아노 클래식곡 중에서도 슈만의 <사육제>를 특히 좋아한다는 공통의 관심사로 인해 자주 교제를 하고 왕래했던 한 여인에 얽힌 묘한 경험을 소설로 쓴 '사육제', 여행 중 쇠락한 온천 마을 료칸에서 인간의 말을 할 줄 알 뿐만 아니라 나름의 교양도 지녔던 원숭이에 대한 이야기를 쓴 '시나가와 원숭이의 고백', 평소 슈트를 입을 기회가 거의 없는 '나'는 일상에서 벗어난 신선한 감각을 즐기기 위해 이따금 슈트를 입고 '나'만의 비밀스러운 의식을 치르곤 하였는데, 어느 날 슈트를 입고 바에서 혼자 술을 마시던 중 처음 보는 여자로부터 삼 년 전 내가 저질렀다는 '고약한 짓'에 대하여 호된 꾸지람을 듣게 되는데 차마 확인도 할 수 없었던 '나'는 불쾌한 감정만 안고 돌아왔다는 내용의 '일인칭 단수'가 그것이다.
"계단을 다 올라 건물 밖으로 나왔을 때, 계절은 더이상 봄이 아니었다. 하늘의 달도 사라졌다. 그곳은 더이상 내가 알던 원래의 거리가 아니었다. 가로수도 낯설었다. 그리고 가로수 가지마다 미끈미끈하고 굵은 뱀들이 살아 있는 장식처럼 단단히 몸을 휘감은 채 꿈틀대고 있었다. 스륵스륵 비늘 스치는 소리가 들렸다." (p.232 '일인칭 단수' 중에서)
한 인간의 정체성을 그가 겪은 경험과 기억의 총체로 규정한다면 하루키 내부에 있는 다채로움 역시 하루키 본인의 정체성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하루키 자신이 풀어놓은 색색깔의 경험들은 어찌나 선명하고 개성이 독특한지 그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는 독자라면 이것이 모두 한 사람의 경험에서 비롯된 글이라고는 감히 상상하지 못할 듯하다. 생각해 보면 같은 지역에서 비슷한 일상을 보낸 사람들마저 그들이 겪고 느낀 바는 저마다 다를 텐데 시간의 갈피에 새겨진 한 사람의 인생은 얼마나 다채로울 것인가. 다만 우리는 시간의 무게에 짓눌린 저 아래쪽의 풍경을 눈에 그리듯 자세히 떠올리지 못할 뿐이다. 시간이 없다는 이유로, 그리고 마음의 여유가 없다는 이유로... 그 아름다웠던 풍경을 다만 잊고 지낼 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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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과 글쓴이를 동일시하지 말라는 말을 기억한다. 적절한 거리가 필요하다. 그것이 소설이라면 더욱 그렇다. 그래도 종종 나는 그 소설의 주인공이 소설가의 일부라고 생각한다. 직접 경험한 일을 시점을 달리해서 쓰기도 하고 주변의 일을 변주해서 소설을 쓰기도 하니까. 허구의 이야기를 구상하고 쓰는 동안 자신도 모르는 사이 자신의 감정이 들어갈 수 있다고 믿는다. 작가는 절대 그렇게 쓰지 않으려고 하겠지만 말이다. 아무튼 그렇다는 말이다. 하루키의 단편집 『일인칭 단수』를 읽으면서도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최근에 에세이 『고양이를 버리다』를 읽은 영향일지도 모른다. 아버지에 대한 기억, 기억이라는 게 항상 정확한 건 아니니까. 내게 하루키는 뭐랄까. 한때 대단한 존재였다. 현실과 상상의 경계를 모호하게 구분하는 능력, 그러니까 어떤 소설은 이게 진짜 일어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어딘가에서는 일어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버릴 수 없게 만들었다. 하지만 낯선 여자와의 관계, 음악, 재즈, 술, 이러한 이야기는 살짝 식상하다. 일흔의 나이에 끊임없이 소설을 발표하는 그가 대단하다는 걸 인정하는 것과는 별개로. 같은 가게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던 이야기를 들려주는 「돌베개에」도 여지없이 비슷하게 전개된다. 이십 대 중반의 여인과 하룻밤을 보내면서 그녀가 쓴 단카집을 받아보고 그것을 담아두는 마음에 대해. 그래도 만약 행운이 따라준다면 말이지만, 때로는 약간의 말語이 우리 곁에 남는다. 그것들은 밤이 이슥할 때 언덕 위로 올라가서, 몸에 꼭 들어맞게 판 작은 구덩이에 숨어들어, 기척을 죽이고, 세차게 휘몰아치는 시간의 바람이 무사히 지나가기를 기다린다. 이윽고 동이 트고 거센 바람이 잦아들면, 살아남은 말들은 땅 위로 남몰래 얼굴을 내민다.(「돌베개에」, 24쪽) 그저 스쳐 지나가는 한 번의 만남이라는 걸 알면서도 우리는 그 만남을 거부할 수 없다. 아니, 한 번이라서 더욱 소중하게 여기는지도 모른다. 그런 느낌은 같은 피아노 학원에 다녔던 한 여자아이에 대한 기억을 다룬 「크림」으로 이어진다. 피아노를 잘 쳤는지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는 여자아이에게 연주회 초대장을 받은 ‘나’는 그곳을 찾아간다. 많은 이들을 초대했을 거라 여겼지만 도착한 그곳엔 아무도 없었다. 여자아이의 장난에 놀아난 것 같았다. 돌아오는 길에 잠시 쉬려고 들른 공원에서 노인을 만났고 그가 들려주는 말들이 특별하게 남는다. 마치 ‘나’에게 일어난 일들을 아는 것처럼. 우리 인생에는 가끔 그런 일이 일어나. 설명이 안 되고 이치에도 맞지 않는, 그렇지만 마음만은 지독히 흐트러지는 사건이. 그런 때는 아무 생각 말고, 고민도 하지 말고, 그저 눈을 감고 지나가게 두는 수밖에 없지 않을까. 커다란 파도 밑을 빠져나갈 때처럼. (「크림」, 48~49쪽)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나는 게 인생이라는 걸 안다. 왜 나에게 그런 일이 생기는지 알 수 없는. 그래도 받아들이고 살아야만 하는 게 인생이라는 사실이다. 『고양이를 버리다』에서 아버지와의 추억을 떠올리는 장면에서 영화를 본 것과 야구 경기를 본 것에 대해 읽었기에 「야쿠르트 스왈로스 시집」은 친근하게 다가온다. 야구장에서 보낸 시간, 요구르트 스왈로스를 응원했던 날들. 그리고 현재를 살아가는 ‘나’에 대해서. 기발하고 기이한 상상의 서사보다는 이런 문장을 쓸 수 있는 하루키가 대단하다. 아마도 이런 게 작가의 힘일 것이다. 많은 것들을 함축한 ‘어떻게 잘 지내는가’라는 질문. 인생은 이기는 때보다 지는 때가 더 많다. 그리고 인생의 진정한 지혜는 ‘어떻게 상대를 이기는가’가 아니라 오히려 ‘어떻게 잘 지는가’하는 데서 나온다. (「야쿠르트 스왈로스 시집」, 131쪽)
8개의 단편 속 일정 부분은 하루키의 경험과 기억이 아닐까. 지나온 시간을 돌아보며 엇갈렸던 인연을 떠올리며 그들과의 시간을 복기하듯 소설을 썼을지도 모를 일 아닌가. 표제작 「일인칭 단수」는 대단한 성공은 아니더도 괜찮은 삶을 유지하는 나의 일상을 들려준다. 한 번씩 좋은 슈트를 입고 술집에 들어가 술을 주문하고 소설을 읽는 즐거움. 그리고 느닷없이 직면하는 상황에 당황하는 ‘나’. 소설을 읽으며 그런 상황와 만나면 나는 어떻게 행동할까, 잠시 마음이 주춤한다. 잃어버린 기억과 아무런 의미 없이 지나간 일들이 모두 나의 선택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지금까지 내 인생에는 - 아마 대개의 인생이 그러하듯이 - 중요한 분기점이 몇 곳 있었다. 오른쪽이나 왼쪽, 어느 쪽으로든 갈 수 있었다. 그때마다 나는 오른쪽을 선택하거나 왼쪽을 선택했다(한쪽을 택하는 명백한 이유가 존재한 적도 있지만, 그런 게 전혀 보이지 않았던 경우가 오히려 많았는지도 모른다. 또한 항상 스스로 선택해 온 것도 아니다. 저쪽에서 나를 선택한 적도 몇 번 있었다). 그렇게 나는 지금 여기 있다. 여기 이렇게, 일인칭 단수의 나로서 실재한다. 만약 한 번이라도 다른 방향을 선택했더라면 지금의 나는 아마 여기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거울에 비친 사람은 대체 누구일까? (「일인칭 단수」, 223~224쪽) 누구나 자신의 선택을 만족하거나 후회한다. 하지만 그 모든 선택의 결과로 지금의 내가 존재한다는 걸 안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어쩌면 떠올리기조차 싫은 과거를 딛고 살아가는 게 인생은 아닐까. 하루키는 그걸 아는 작가구나, 그런 생각이 든다. 그렇다고 해서 이 소설집이 만족스럽다는 건 아니다. 나의 시점에서는 하루키의 소설에 대한 보편적 기대감을 생각하면 아쉽고 실망스럽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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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한때는 정말 하루키 책의 매력에 푹 빠져서 헤어나지 못하던 시절이 있었다. 나에게 대부분의 무라카미 하루키의 책의 매력은 몽환적인 분위기 속의 '허무'라고 할 수 있다. 어린 시절에는 그 허무와 그 안의 초연함이 그렇게 시크하고 멋져 보였다. 와타나베의 말투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어린 맘에 그냥 좋았었다. 워낙 하루키 책이 '이게 무슨 소린가?' 싶은 이야기가 많기도 하고, 노벨문학상 후보에, 하루키 신드롬이라는 말이 있었을 정도이니 이런저런 평가가 많다. 나는 개인적으로 - 문학을 잘 모르기 때문에 - 굳이 문학을 이해하는 데 있어 '이 표현은 저것에 대한 메타포야. 이렇게 이해를 하고 받아들이는 게 맞아.'라는 식의 강요는 싫다. 물론, 평론을 보고 다시 읽으면서 아 정말 이렇게 읽으니 또 다르군' 할 수는 있겠지만 말이다.
<일인칭 단수> 목차 오랜만에 읽은 하루키의 책 <일인칭 단수>는 8개의 단편 소설집이다. 반갑다. 각 단편의 주인공인 '나'는 하루키 본인인 것 같다. 실제로 <야쿠르트 스왈로스 시집>의 '나'는 하루키 본인의 이름으로 나오며, 다른 단편들도 에세이인지 소설인지 구분이 안될 정도의 이야기들이다. 그냥 그의 기억의 왜곡이나 꿈꾼 내용을 일기처럼 적어놓은 글 같기도 하다. 그런데 중요한 건 - 남는 게 있는지 없는지는 몰라도- 그런 글들이 무척이나 읽는 재미가 있다는 것이다. 이 책을 통해 그의 작품을 좋아하는 몇 가지 이유를 찾았다. 그래도 말이야, 시간을 쏟고 공을 들여 그 간단치 않은 일을 이루어내고 나면 , 그것이 고스란히 인생의 크림이 되거든. 프랑스어로 '크렘 드 라 크렘'이라는 말이 있는데, 아나? 크림 중의 크림, 최고로 좋은 것이라는 뜻이야.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에센스. 알겠나? 나머지는 죄다 하찮고 시시할 뿐이지. 일인칭 단수, 크림 中 - 무라카미 하루키 우선은 '그 특유의 의미를 종잡을 수 없는 선문답'이 매력이다. 이는 이 책에도 어김없이 잘 나타난다. 알 수가 없는 건지, 알 필요가 없는 건지, 알고 싶지 않은 건지는 잘 모르겠다. 그저 알듯 말듯 한, 아니면 '입에서 나오는 대로 뱉어둔 것이니 그냥 패스해도 돼'라고 생각할 수 있는 그 느낌이 나는 좋다. 한 문장만 떼어내면 참으로 진리와 같이 와닿곤 하지만, 다소 황당한 설정에 그런 문장을 가져다가 대면 '이 건 또 무슨 소리란 말인가?' 하며 해석을 하는데 머리가 아프다. 그러니 '그냥 그런가 보다.' 하는 수밖에. 사실 본문에서 '나'도 설명이 안 되고 이치에도 맞지 않는, 그렇지만 마음만은 지독히 흐트러지는 사건에는 '아무 생각 말고, 고민도 하지 말고, 그저 눈을 감고 지나가게 두라'고 '나-하루키'는 말한다.
이 책의 하루키 단편과 동명의 앨범 <With the Beatles> 클래식, 재즈, 팝에서 월트 디즈니 애니메이션의 OST까지 다양한 음악을 소재나 매개로 한 것도 내가 그를 좋아하는 요소이다. 재미있게도 유튜브에는 이 책의 단편 중 한 편인 <찰리 파커 플레이즈 보사노바>와 동일 제목으로 플레이 리스트가 올라와 있다. 그의 말마따나 찰리 파커와 안토니우 카를루스 조빙이라니! 재미있는 상상이다. 참고로 하루키의 글 속에 나오는 곡 중에 모르는 게 있다면 들어보는게 좋다. 생각했던 음악과 너무 달라서 글의 분위기를 완전히 바꾸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물론 내가 너무 멋대로 곡의 분위기를 상상해서 그런 걸 수도 있지만... 실제로 내 마음을 단숨에 사로잡은 것도 그 재킷을 소중하게 품에 안은 한 소녀의 모습이었다. 만약 비틀스의 재킷 사진이 없었더라면 내가 느낀 매혹도 그토록 강렬하진 않았을 것이다. 일인칭 단수, 위드 더 비틀스 中 - 무라카미 하루키 사실 나에게 있어 하루키의 가장 큰 매력은 정말 공감할 수 밖에 없는 문장 하나하나가 아닌가 싶다. 누군가 한 번쯤 겪어봤을 법한, 비슷한 그것을 하나의 문장으로 표현하는 것. 나에게도 위의 문장과 비슷한 경험이 있다. 충무로 카메라 거리를 일포드ILFORD 인화지 박스를 소중하게 품에 안은 한 소녀의 모습, 만약 고급스러운 일포드의 인화지 박스가 없었더라면 내가 느낀 매혹도 그토록 강렬하진 않았을 것이다. 그녀의 얼굴은 전혀 생각나지 않지만, 품 안의 그 인화지 상자는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에 남아있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부분부분 여러 번 과거의 경험을 떠올렸다. 혹은 정말 오감을 자극하는 왠지 공감해야만 할 것 같은 그의 표현력. 수많은 작가들이 흉내를 내지만 언제 읽어도 그 맛이 정말 다르다. 차원을 달리한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주위 사람들이 모두 이쪽을 돌아볼 정도로 큰 소리가 났다. 사흘 지난 바게트를 무릎에 대고 부러뜨리는 것처럼 메마른 소리였다. 남녀 불문하고 그렇게 큰 소리로 관절을 꺾을 수 있는 사람은 그리 흔치 않다. 일인칭 단수, 사육제 中 - 무라카미 하루키 이 책을 읽으면서 생각해 보니, 개인적으로 글의 단위가 작아질수록 하루키의 매력이 배가 되는 것 같다. 장편, 단편, 하나의 장, 개별 문장 순으로 점점 격하게 공감이 되는 듯하다. 그래서인가? 사실 하루키는 원래 데뷔 초부터 단편 소설이나 에세이로 유명했고, 나도 편하게 읽을 수 있는 그의 단편을 더 즐겼으니까. 내가 하루키를 좋아한 건, 어린 마음에 멋져 보이는 허무라는 모호한 느낌이 아니라 아련함 속에 한 번씩 깊이 찔러오는 그의 한 문장 한 문장이었던 것 같다. 아주 긍정의 의미로, 이런 생각이 든다. '하루키 이 양반은 수 십 년이 지났는데도 변한 게 없군'. 수 십 년이라니, 처음 그의 책을 읽은 게 25년은 넘었으니 정말 그렇다. 실제로 변한 게 없는지, 세월에 흐름에 맞추어 비슷하게 변했는지는 모르겠다. 예전의 양 사나이 대신, 시나가와 원숭이가 등장하는 것처럼 말이다. 오랜 추억이 담긴 일기를 꺼내 읽은 느낌이랄까? 잊고 있던 나의 추억을 찾아, 틈틈이 오래전 그의 책들을 꺼내어 읽어봐야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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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인칭 단수는 ‘나’가 아닌가? 그냥 나라고 하면 될 것을 굳이 왜 이렇게 표현했을까? 제목인 단편은 제일 마지막에 있었다. 하루키가 말하고 싶은 것은 무엇일까? 아마, 나에 대한 자서전이 아닐까. 개인을 위한 전기가 아닌 인생이란 큰 의문속의 중심인 나에 관한 자선전인 것 같다는 느낌이다.
나에게 있어서 하루키의 소설은 흡입력이었다. 그의 책을 보면 정말 푹 빠져들어간다. 하지만, 이 책은 단편으로 조각조각난 나이기에 애초부터 그런 흡입력을 기대할 수 없었다. 흩어진 조각들을 이어 붙여 하나의 나를 만들어야 하기에 처음부터 쉬운 읽기는 아니었다. 누더기를 기워서 만든 하나의 천 조각, 한 눈에 들어오는 것이 없었다. 이것 같기도 저것 같기도.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는 틈에 책장은 넘어갔다. 다 넘어갈 때에 각각의 단편이 말하는 ‘나’를 한데 묶어 놓으니 조금은 이상한 느낌까지 왔다. 인간으로서 경험, 누구나 경험할 수 있는 것들과 누구나가 경험할 수 없는 것들이 쭉 이어져 있었다. 그 속에서 하나씩 주워 나가야 반짝이는 무언가를 얻을 수 있을 것 같다. 무엇보다 나, 그 자신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할까? 몇몇 편에서 작가 자신을 보여주는 것 아닐까 싶을 정도로 그와 흡사한 것 같다. 어쩌면 소설을 가장한 자신의 이야기가 아닐까? 약간의 상상을 제거한다면 바로 그이지 않겠는가 문학과 나 그리고 사랑이란 무엇일까? 라는 인생의 답을 구하기 위해서 과거로 달려간다. 하지만, 그 과거도 자신이었지만, 지금은 자신할 수 없다. 나의 경험이라고 말하고 싶은데 이미 나만의 경험이 되었다. 타인들은 왜 무엇때문에 아무런 사이도 아니지만, 뇌리에 떠나지 않는 것일까? 나를 제외한 모든 이는 타인이다. 그들이 없는 나는 있을 수 있을까. 모든 것이 관계의 구속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 같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에센스는 무엇일까? 사랑일까. 사랑도 자신이 있어야 가능한 노름이기에. 나의 중심에서 나온 경험들, 음악 그리고 가족, 아버지 그가 경험했지만, 이해하지 못하는 것들 쭉 늘어 놓는다. 어떻게 보면 가장 가까운 그의 동반자이지만, 잘 알지 못한다. 사랑, 사람, 무엇을 사랑하는가? 단지 이쁘게 치장한 것 만을 좋아할까?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을 다 알 수는 없는 노릇이기에 나만의 방식으로 판단한다. 그리고 그것들이 현재를 지나 과거로 달려갔다. 그래서 남는 것은 단지, 나만의 기억, 사랑과 기억, 과연 그것이 사랑이었을까? 원숭이입을 통한 고백, 이름을 훔친다는 것, 내게 남겨진 껍데기 같다. 기억은 말한다. 내가 아는 것과 나, 내가 모르는 것들
모든 것들이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것 같지만, 많은 사람들이 다 나름의 나이기에 빙빙빙 돌면서 중첩된 영역을 만들어 낸다. 그러기에, 내가 아는 것이 다가 아니다. 내가 기억하고 있는 것이 나 자신이지만, 그것은 완전하지 않다. 아니 온전하지 않다. 단지 내가 기억하고 있을 뿐이다. 내가 흘려버린 수많은 사건들, 그 속의 사람들. 그들을 난 알지 못한다. 그들을 그리고 진정한 나를 알기 위해 오늘도 난 답을 구하려 한다. 나는 무엇일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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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lcome to 하루키 월드! '하루키 월드'로 초대합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을 읽는 독자들은 그들 자신도 모르게 그가 만든 '하루키 월드'로 초대를 받는다. 많은 사람들이 '하루키 월드'에 매혹된다. 부드러운 문체, 생동한 묘사, 개인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가치관, 꿈을 걷는 듯한 섹스, 야구, 재즈와 클래식, 마치 꿈을 꾸고 있는 듯한 몽환적 분위기, 현실과 비현실을 넘나드는 글의 구성 등, 하루키의 소설에서 빼놓지 않고 등장하는 요소이다.
이번에 출간된 [일인칭 단수] 작품 또한 하루키 월드의 요소들이 곳곳에 등장한다. 현실과 비현실을 넘나들며 전개되는 '시나가와 원숭이의 고백', 하루키의 재즈와 클래식에 대한 기호를 반영한 '찰리 파커 플레이즈 보사노바' 와 '위드 더 비틀즈' 와 클래식 콘서트에서 만난 여인과의 색다른 만남과 우정을 다룬 '사육제' 가 있다. 이 작품들의 특징은 재즈, 클래식, 대중음악 등 대중 문화 요소를 소재로 사용했다는 점이다. 또한 알다시피 하루키는 열혈적인 야구팬이다. 야구에 대한 열정과 야구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 '야쿠르트 스왈로스 시집'이 있다. 마치 꿈을 꾼 듯한 몽환적 분위기의 '크림' 대학교 때 만난 여성과의 꿈을 걷는 듯한 섹스와 만남 이야기를 다룬 '돌베개에', 바에서 만난 여성에 의해 지금까지 알던 세계로부터 유리된 체험을 하게 되는 이야기를 다룬 '일인칭 단수' 이렇게 여덟 편의 단편으로 구성된다. 하지만 모두 개성이 넘치고 독립적인 이야기 같지만, 이 여덟 편의 이야기의 공통점은 일인칭 단수로써 '나'가 존재하고 '나의 이야기' 를 하고 있다. 처음에는 각기 다른 이야기, 독립적인 이야기, 라고 생각이 되지만, 이 모든 이야기의 중심에는 '무라카미 하루키'가 있다. 즉 이 작품은 하루키 자신의 이야기이고 그가 쓴 에세이이자, 자전적 소설이기도 하다. 지금까지 읽어온 하루키 소설과는 그 성격이 다르다. 비현실적이고 몽환적인 말도 안 되는 이야기인 경우도 있었고 그래서 하루키 소설은 어렵다는 편견도 있었다. 왠지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세계를 다루는 것 같고, 하루키만의 심오한 정신 세계를 다루는 것 같았는데, 오히려 이번 작품은 나도 이해할 수 있었고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 많았다. 그것은 아마도 자신의 이야기였고, 그래서 어느 정도 진실이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자기 주변에서 일어나는 이야기였기 때문에 가볍고 부담 없이 받아들일 수 있었다. 지금까지 하루키 작품을 읽으면서, 항상 두 번 생각해야 했다. 이 문장 속에, 이 글 속에 담긴 숨은 의미는 무엇일까? 작가는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가? 등 여러 번 곱씹어서 생각해야 했다. 그래도 이해가 가지 않아, 다른 참고 문헌을 찾아보며 이해하려고 노력했었다. 하지만 이번 작품은 그럴 필요가 없어서 좋았고, 그래서 하루키를 가슴 깊이 느낄 수 있었던 작품인 것 같다. 보통 작가는 소설 속에서 드러나지 않는다. 소설 속에 숨어서 등장인물을 통해 자신의 의견을 표현하거나, 자신의 이야기를 간접적으로 한다. 하지만 이 작품 속에서는 그렇지 않다. 하루키 자신이 등장인물이고 자신의 이야기를 거침없이 한다. 자신의 어린 시절, 자신의 대학 시절, 자신의 가족 이야기 등 여덟 편의 이야기 곳곳에 하루키의 목소리, 생각, 이야기가 담겨져 있다. “우리는 누구나 많건 적건 가면을 쓰고 살아가. 가면을 전혀 쓰지 않고 이 치열한 세상을 살아가기란 도저히 불가능하니까. 악령의 가면 밑에는 천사의 민낯이 있고, 천사의 가면 밑에는 악령의 민낯이 있어. 어느 한쪽만 있을 수는 없어." (p. 169) 어찌 보면 하루키 월드에서 하루키 자신은 가면을 쓰고 있다. 그 가면은 때로는 악령의 가면이기도 하고 천사의 가면이기도 하다. 그렇게 그는 하루키 월드에서 가면을 쓴 채, 자신의 생각과 의견을 피력해왔다. 하지만 이 작품 속에서 하루키는 그동안 쓰고 있던 가면을 벗어던졌다. 하루키의 민낯을 보여주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내가 느낀 그의 민낯은 어렵고 난해하고 작가로서의 모습이 아닌, 인간적이고 평범한 그의 소시민적인 모습이다. '돌베개에' 작품 속에서 '나'는 대학교 2학년의 때 같이 아르바이트를 하던 여자와 우연히 하룻밤을 보내게 된다. 따로 좋아하는 사람이 있던 그녀는 직접 지은 가집을 나중에 보내주었고, ‘나’는 그중 몇 편을 세월이 지나서까지 가슴속에 품고 있다. 지금은 이름도 얼굴도 생각나지 않지만, 그녀의 흔적과 기억은 그 가집과 함께 그의 마음 속에 남아 있다. 열아홉 살 무렵의 나는 내 마음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거의 알지 못했고, 당연히 타인의 마음이 어떻게 움직이는지도 제대로 알지 못했다. 그래도 기쁨이나 슬픔이 뭔지는 대충 알고 있다고 내 딴은 생각했었다. 다만 기쁨과 슬픔 사이에 있는 수많은 현상을, 그것들의 위치관계를 아직 잘 분간하지 못했을 뿐이다. 그리고 그 사실은 종종 나를 몹시 불안하고 무력하게 만들었다. (p.9~p.10) 열아홉 살의 순진하고 어리숙한 대학생의 모습이었던 그의 모습이 떠오르는 것 같다. 그 당시 여자에 대해, 여성의 심리에 대해 잘 몰랐던 그가 어쩌다가 여자와 잠자리를 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와 그녀 사이에는 사랑이란 감정도 없다. 그것은 정말이지 어쩌다 갖게 된 관계였다. “사람을 좋아한다는 건 보험 적용이 안 되는 정신질환이랑 비슷해. (p.15) "재워줘서 고마워. 고가네이까지 혼자 전철 타고 가기 싫었거든. 정말로."(p.18) 단순히 이런 이유로 그와 그녀는 관계를 맺은 것인가? 정말 아무 이유가 없는 그래서 다시 볼 일도 없는 관계였다. 그런데도 그녀가 주고 간 가집 만큼은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도 간직하고 있다. 왜 그는 그것을 간직하고 있을까? 그녀를 기억하고 싶은 것일까? 하루키는 오랜 세월이 지난 뒤, 이 일을 회상해본다. 그래서 그저 한 때의 추억, 기억으로만 서술하고 있다. 만약 그 가집이 없었다면, 그녀와의 만남도, 관계도 전부 먼지가 되어서 사라져 버렸을지도 모른다. 두 번 다시는/ 만날 일 없네/ 생각하면서도 못 만날 리/ 없다고 생각하는
만나려나/ 그저 이대로/끝나려나 빛에 끌리고/ 그림자에 밟혀 (p.22) 벤다/ 베인다/돌베개 목덜미 갖다대니/보아라, 먼지가 되었다. (p.25) '크림' 작품 속에서는 재수생 시절, 피아노 학원을 같이 다녔던 여자아이에게서 받은 연주회 초대장과 기이한 노인과의 뜻밖의 만남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리고 그 노인은 '나'에게 인생에 관련된 뜻밖의 질문을 한다. “중심이 여러 개, 아니 때로는 무수히 있으면서 둘레를 갖지 않는 원, 그런 원을 자네는 떠올릴 수 있겠나?" (p.43) 맨 처음에는 이게 무슨 말일까? 수학적인 질문인가? 수학적인 방법으로 접근해야 하나? 그래서 이해가 안 가기도 했다. 수학적으로 이런 원은 있을 수 없는 것은 아닌가? 하지만, 곧 이 말의 뜻은 단순한 수학적인 질문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이 세상에, 어떤 가치가 있는 것치고 간단히 얻을 수 있는 게 하나라도 있는가.” “그래도 말이야, 시간을 쏟고 공을 들여 그 간단치 않은 일을 이루어내고 나면, 그것이 고스란히 인생의 크림이 되거든.” (p.44) 어쩌면 그 원도 시간을 쏟고 공을 들이면 떠올릴 수 있을까? 그리고 노인이 말했던 '인생의 크림'이 내 마음 속에 크게 와 닿았다. 크림, 프랑스어로 '크렘 드 라 크렘'이라고 하는 데 그 의미는 '크림 중의 크림, 최고로 좋은 것이라는 뜻이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에센스 라는 뜻이다. 노인은 뜻밖의 질문과 의미심장한 메시지를 남기고 홀연히 사라진다. 마치 꿈을 꾼 듯이. 마치 꿈 속에서 노인을 만나서 이야기를 나눈 것처럼 몽환적 분위기가 연출 된다. 정말 그 노인은 존재하는 것일까? 노인과의 만남은 현실에서 이루어진 것일까? 그 이야기를 읽는 내내 이게 정말 사실인지, 꿈인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여기서 하루키 월드의 몽환적 요소가 잘 드러난다. 작품 속의 열여덟 살이었던 나도 이 노인과의 만남으로 인해 깊은 당혹과 혼란에 빠졌다. 이 작품 속의 나는 하루키 자신일까? 하루키가 열여덟살 때, 그 노인을 만난 것일까? 내 생각에는 그런 것 같다. 그의 이야기에서 진실과 진심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그 나름대로 결론을 내린다. “우리 인생에는 가끔 그런 일이 일어나. 설명이 안 되고 이치에 맞지 않는, 그렇지만 마음만은 지독히 흐트러지는 사건이, 그런 때는 아무 생각 말고, 고민도 하지 말고, 그저 눈을 감고 지나가게 두는 수밖에 없지 않을까. 커다란 파도 밑을 빠져나갈 때처럼.” (p.49) 그렇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 중에서는 정말 도저히 납득할 수도 없고, 이해할 수도 없는 일이 일어나기도 한다. 나 같은 경우에는 그런 일이 일어나면, 계속 계속 그 일을 이해하고 내 스스로 납득하기 위해서 곱씹어 생각하곤 한다. 하지만 그렇게 해봤자 결국 아무 것도 해결되는 것은 없다. 하루키의 말처럼 그저 눈을 감고 지나가게 놔 두는 지혜도 필요할 지도 모른다. '찰리 파커 플레이즈 보사노바' 작품 속에서도 몽환적인 요소가 잘 드러난다. 하루키가 재즈를 좋아한다는 것은 하루키 팬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을 것이다. 하루키 월드의 특징이기도 한 재즈, 이 이야기 또한 재즈 이야기이다. 만약에 알토색소폰의 대부 찰리 파커가 요절하지 않고 음악 활동을 계속했더라면 어땠을까? 재즈 팬이었던 ‘나’는 이런 발상으로 가상의 음악평을 대학 잡지에 기고한다. 실제로 찰리 파커는 1955년 3월 12일에 사망했다고 한다. 그래서 잡지에 쓴 앨범인 <찰리 파커 플레이즈 보사노바>라는 음반은 실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신기하고 기묘한 일이 일어나게 된다. 몇십 년 후 그와 관련해 실제로 찰리 파커와 기묘한 조우를 하게 된다. 버드가 나 하나를 위해 꿈속에서 연주해준 음악은, 나중에 생각해보면 소리의 흐름이라기보다 오히려 순간적이고 전체적인 조사에 가까웠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그것이 영혼 깊숙한 곳의 핵심까지 가닿는 음악이었다는 것이다.듣기 전과 들은 후에 몸의 구조가 조금은 달라진 듯 느껴지는 음악- 그런 음악이 세상에는 분명히 존재하는 법이다. (p.67) 그렇다. 버드는 내게 고맙다는 말을 하려고 내 꿈에 찾아온 것이다. 한참 옛날에 내가 그에게 보사노바 음악을 연주할 기회를 제공한 것에 감사하기 위해서. 그리고 마침 갖고 있던 악기로 <코르코바도>를 연주해주었다. (p.71) 당신은 이 이야기가 믿게 지는가? 믿을 수 없는 이야기인데, 그는 말한다. 믿는 게 좋다고, 어쨌거나 실제로 일어난 일이라고 말이다. 이번에는 음악에 얽힌 여인들과 그들의 운명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위드 더 비틀즈' 작품 속에서 그는 고등학교 시절에 잠깐 스치듯 지나간 한 소녀를 회상한다. 고등학교 건물의 어둑한 복도에서 만난 소녀, 그녀는 <위드 더 비틀스> 음반 재킷을 들고 치맛자락을 흔들리며 사라졌다. 이름도 얼굴도 알 수 없지만, 그녀는 그의 마음에 들어왔고 그녀는 그의 첫사랑이 되었다. 그러나 그것이 처음이자 마지막 만남이었다. 그 후로 두 번 다시 그녀를 볼 수가 없었다. 그 당시 1965년은 비틀스의 해였다. 비틀스의 음악은 우리 주위를 구석구석 둘러싸고 있었다. 마치 꼼꼼하게 바른 벽지처럼. 하지만 비틀스 음악은 그에게 팝송이었고 그저 라디오에서나 흔하게 들을 수 있는 배경 음악이었다. 재즈나 클래식에 조예가 깊을 정도로 재즈와 클래식을 좋아했지만 팝송은 별로 좋아하지 않았나 보다. 팝송은 그래봐야 그저 팝송일 뿐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우리의 인생은 결국, 그저 요란하게 꾸민 소모품일 뿐일지도 모른다. (p.87) 그리고 만난 첫 여자친구와 그녀의 오빠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진다. 그 여자친구와 연애를 하지만 결국은 그녀와 헤어지게 된다. 그녀는 고등학교 시절 비틀즈 앨범 재킷을 들고 있던 소녀를 보았을 때 느꼈던 종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그렇게 그는 고등학교 시절 복도에서 만난 그 소녀의 환상을 쫓아만 다니느라, 그 여자친구와의 인연을 놓쳐버렸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 와서 이런 말하기는 괴롭지만, 결국 그녀는 내 귓 속에 있는 특별한 종을 울려주지는 못했다. 아무리 귀 기울여도, 종소리는 끝까지 들리지 않았다. 유감스럽게도,그렇지만 내가 도쿄에서 만났던 한 여자는 그 종을 확실히 울려주었다, 그것은 논리나 이론을 따라 자유롭게 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의식 혹은 영혼의 깊은 곳에서 멋대로 일어나거나 일어나지 않을 뿐, 개인의 힘으로는 바꿀 수 없는 종류의 일이다. (p.117) 그와의 인연이 끊어져서 그녀가 극단적인 선택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녀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되고 그녀의 오빠는 그 덕분에 병이 치유가 되어 다시 그와 만나게 된다. 끊어진 줄 알았던 인연과 만남이 뜻밖에 이어지게 되는 것이다. '사육제' 작품 속에서 그는 수많은 클래식 피아노곡 중에서도 슈만의 [사육제]를 좋아한다는 공통점으로 한 여자와 색다른 우정을 나누게 된다. 그녀는 ‘못생겼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고, 그 사실을 나름의 방식으로 역이용하며 즐기기조차 했다. 그녀는 말솜씨가 좋았고, 호감이 갔으며, 화제도 다채로웠다. 머리 회전이 빠르고, 음악 취향도 상당히 괜찮았다. 그렇게 그녀와 부담 없는 친구 사이가 되었다. 하지만 반 년이 지난 어느 날, 그녀와 관련해 갑작스러운 소식을 접하고 그녀와의 기억을 더듬는다. 그것들은 사사로운 내 인생에서 일어난 한 쌍의 작은 사건에 지나지 않는다. 지금 와서 보면 약간 길을 돌아간 정도의 에피소드다. 만약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해도 내 인생은 지금과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 기억들은 어느 날, 아마도 멀고 긴 통로를 지나, 내가 있는 곳을 찾아온다. 그리고 내 마음을 신기할 정도로 강하게 뒤흔든다. 숲의 나뭇잎을 휘감아올리고, 억새밭을 한꺼번에 눕혀버리고, 집집의 문을 거세게 두드리고 지나가는 가을 끄트머리의 밤바람처럼. (p.181) 그는 이렇듯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한낱 에피소드로 돌린다. 그 일이 있었든, 없었든 간에 그의 인생은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비록 그 일들이 그의 인생에 있어서 큰 영향을 끼치지는 못했다고 하더라도 그 일들은 그에게 분명 영향을 끼쳤다. 나뭇잎을 강하게 흔들고, 억새밭을 눕혀 버리고, 문을 거세게 두드리고 가는 바람처럼 그의 인생을 잠시 흔들었던 것이다. 아마 누구나 이런 기억 하나 쯤 있을 것이다. 인생 전체를 보면 그렇게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지만, 바람 한 번 쌩 하고 불다 갈 정도의 그런 기억들 말이다. 그리고 이 작품 속에는 믿을 수 없는 이야기도 있다. 정말 현실에서 존재하지 않는, 현실과 비현실을 왔다 갔다 하는 이야기 말이다. 이 이야기를 읽고 있으면 정말 소설 같은, 영화 같은, 꿈 같은 이야기이다. '시나가와 원숭이의 고백' 작품 속에서는 온천 마을 료칸에서 사람 말을 하고 나름의 교양을 가진 원숭이가 살고 있다. 어떻게 이런 원숭이가 존재할 수 있지? 작가가 꿈을 꾸고 있는 것일까? 작가의 공상인 것인가? 말도 안 되는 이야기지만 제일 흥미롭고 재미있기도 했다. 현실에서 이런 원숭이가 실제로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도 했다. 이 원숭이는 인간처럼 말도 하지만, 특별한 재능도 있다. “그렇지요. 그것이 적힌 이름을 오랫동안 응시하면서, 정신을 오로지 한 점에 집중하고, 사랑하는 이의 이름을 의식 속으로 고스란히 거둬들입니다. 시간이 오래 걸리고, 정신적 육체적 소모도 크지만, 일심불란하게 어떻게든 해냅니다. 그렇게 그녀의 일부는 저의 일부가 됩니다. 그리하여 저의 갈 곳 없는 연정은 나름대로 무사히 충족되는 셈이지요.” (p.201) 연정을 품은 여자의 이름을 훔치면 그 여자를 가질 수 있다는 발상, 참으로 하루키다운 생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름을 훔침으로써, 그 이름의 여자는 자신의 일부를 잃어버리게 된다. 가끔 건망증처럼 자신의 이름을 잠시 잊어버리는 정도의 상실이긴 하다. 그리고 원숭이는 진정한 사랑과 사랑의 힘에 대해 우리에게 말해 준다. 하지만 설령 사랑이 사라져도, 사랑을 이루지 못한다 해도, 내가 누군 가를 사랑했다, 연모 했다는 기억은 변함없이 간직할 수 있습니다. 그것 또한 우리에게 귀중한 열원이 됩니다. 만약 그런 열원이 없다면 사람의 마음은-그리고 원숭이의 마음도-풀 한 포기 없는 혹한의 황야가 되고 말겠지요. 그 대지에는 온종일 해가 비치지 않고 안녕이라는 풀꽃도, 희망이라는 수목도 자라지 않겠지요. (p.203) 정말 믿기 힘든 이야기이다. 이에 대해 하루키는 자신의 경험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어쩌면 그 원숭이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고, 모든 것은 뜨거운 탕에 너무 오래 있었던 탓에 생긴 망상이었다, 고 정리될 일인지도 모른다. 아니면 나는 그저 리얼하고 기묘한 긴 꿈을 꾸었을 뿐인지도 모른다. (p.205)
하루키 월드에 있어서 야구 이야기를 빠뜨릴 수 없다. 그는 '야쿠르트 스왈로스의 시집' 작품 속에서실제로 야쿠르트 스왈로스 야구팀의 오랜 팬이다. 열광적, 헌신적인 팬까지는 못 되어도 그럭저럭 충실한 팬이라고 할 만하다. 그가 사는 곳이 야구 구장과 가까우냐가 그가 도쿄에서 거처를 구할 때의 중요 포인트가 될 정도이다. 그만큼 그는 야구 구장에 가서 야구를 보는 것을 정말로 좋아한다. 그래서 하루키를 말할 때 그와 야구는 절대 빼놓을 수 없다. 그는 잘하지도 못하는 거의 만년 꼴찌에 가까운 팀을 왜 그렇게 응원하는 것일까? 나 또한 야구 경기를 보는 것을 좋아한다. 그런데 지는 경기를 보면 맥이 빠지고 더 이상 보고 싶지 않다. 항상 야구 경기가 이길 수 만은 없겠지만 그래도 내가 응원하는 팀이 이기면 기분이 좋고 힘도 난다. 하지만 그는 거의 매일 지는 경기만 본다. 그는 그 야구 보는 것 자체를 즐긴다. 그리고 그는 그 팀의 야구 경기를 통해 '지는 것의 미학'을 배우고 있는지도 모른다. 다시 말해 ‘오늘도 또 졌네’ 라는 것이 세상의 이치로 여겨지도록 내 몸을 서서히 길들여갔다는 소리다. 잠수부가 오랫동안 주의깊게, 수압에 몸을 길들이듯이. 그렇다. 인생은 이기는 때보다 지는 때가 더 많다. 그리고 인생의 진정한 지혜는 ‘어떻게 이기는가’가 아니라 오히려 ‘어떻게 잘 지는가’ 하는 데서 나온다. ( p.131) 그리고 그는 아버지와의 관계도 털어놓는다. 어느 작품 속에서도 털어놓지 못한 그의 가족 이야기를 그는 아버지와 야구에 얽힌 추억을 이야기 하면서 자연스럽게 말을 시작한다. 나의 아버지는 불굴의 한신 타이거스 팬이었다. 나와 아버지의 관계는 그다지 우호적이라고 할 수 없었다. 이유는 뭐 여러 가지지만 몸 곳곳으로 전이하는 암과 심각한 당뇨병으로 구십 년에 걸친 인생의 막을 내리기 직전까지, 아버지는 나와 이십 년 넘게 거의 한 마디도 나누지 않았다. 마지막에 가서 소소한 화해 같은 것을 했지만, 그것 역시 화해라 하기에는 너무 늦은 감이 있었다. (p.136) 그의 아버지도 그와 마찬가지로 열혈 야구팬이었다. 그래서 그도 야구를 좋아하는 걸까? 서로 다른 팀을 응원해서 부자 사이가 좋아질 기회가 없었을까. 담담하게 아버지와 부자 관계에 대해 말하고 있지만, 이십 년 간 느꼈을 그의 아픔과 슬픔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것 같다. 그는 야구장 좌석에 앉으면 제일 먼저 흑맥주를 마시는 것을 좋아한다고 한다. 하지만 흑맥주 판매원은 많지가 않다. 그래서 흑맥주 판매원을 발견하는 데 시간이 걸린다. 겨우 판매원을 찾아서 손을 흔들면, 판매원은 다가와서 제일 먼저 사과부터 한다고 한다. “죄송합니다. 저기, 이거 흑맥주인데요.” 그러면 그는 이렇게 말한다. “죄송할 필요 없어요. 전혀.” 그는 그렇게 말하며 그 판매원을 안심시킨다. “아까부터 흑맥주가 오기를 기다렸거든요.” 왜냐하면 대부분의 관객들은 흑맥주가 아닌 보통 라거 맥주를 찾기 때문이다. 나도 소설을 쓰면서 그 소년과 똑같은 기분을 맛볼 때가 종종 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 하나하나에게 사과하고 싶어진다. “죄송합니다. 저기, 이거 흑맥주인데요.” 라고(p.148) 우리 인생에서 라거 맥주만 있다면 재미없을 것이다. 톡 쏘는 맛의 쓰디쓴 흑맥주도 있어야 인생도 살만하지 않을까. 그런 점에서 하루키 소설은 우리에게 흑맥주 같은 즐거움을 준다. '일인칭 단수' 작품 속에서는 일인칭 단수로 존재하지만, 거울 속에 비친 나처럼 내가 아닌 나의 존재 가능성과 삶의 인연에 대해 말하고 있다. 마치 평상시 입던 옷이 아닌 슈트를 입은 나의 모습이 나 자신 조차 낯설고 위화감을 조성한다. 하지만 그날, 거울 앞에서 내가 느낀 감정은 이상하게도 일말의 께름칙함을 머금은 위화감 같은 것이었다. 께름칙함? 뭐라고 표현하면 좋을까...그것은 자기 경력을 그럴싸하게 포장하고 살아가는 사람이 느낄 법한 죄책감과 비슷한지도 모른다. (p.220) 나 조차도 그런 내 모습이 낯설고 불편하다. 그런 나에게 처음 보는 얼굴의 여자가 다가와 말한다. "멋부리고 혼자 바에 앉아서, 김렛을 마시면서, 과묵하게 독서에 빠져 있으면 재밌나요?" 그리고 그녀는 나의 옷차림에 대해 지적한다. 당신한테는 안 어울리고 분위기에도 맞지 않는다고 말이다. 이렇게 그녀는 나에게 시비를 걸고 공격을 한다. 그러면서 당신이 한 일에 대해 부끄러워하라고 말한다. "삼 년 전, 어느 물가에서 있었던 일을, 거기서 자신이 얼마나 지독한 짓을, 고약한 짓을 했는지, 부끄러운 줄 알아요." 나는 그녀가 누구인지, 정말 내가 삼 년 전에 그런 짓을 했는지도 기억하지 못한다. 내가 모르는 누군가, 실제의 내가 아닌 내가 그런 짓을 한 것이 밝혀지는 것 또한 두려웠다. 어쨌든 지극히 불쾌한 어떤 감촉이 입안에 남았다. 삼키려 해도 삼킬 수 없고, 뱉으려 해도 뱉을 수 없는 무언가가. 할 수 있다면 그냥 화를 내고 싶었다. 그도 그럴 게 이렇게 터무니없는, 불쾌한 일을 당할 이유가 없으니까. 그리고 나를 향한 그녀의 처사는, 아무리 생각해도 공정하다고 하기 힘들었으니까. 어쨌거나 그녀가 말을 걸어올 때까지는 제법 기분좋고 평화로운 봄날의 저녁이 아니었던가. 하지만 신기할 정도로 화는 나지 않았다. 혼란스러움과 난처함의 파도가 그 외의 감정 혹은 논리를, 적어도 일시적으로는 어딘가로 떠내려보냈다. (p. 232) 이렇듯 우리 인생에서도, 우리가 기억하지 못했던 인연과 만남이 있었을 것이다. 우리는 일인칭 단수인 한 명의 모습으로 존재하지만, 이렇듯, 실제의 내가 아닌, 내가 모르는 누군 가로 존재할 수도 있다. 일인칭 단수이지만, 동시에 복수이기도 하다. 이처럼 우리의 삶과 우리의 존재는 기억하지도 못하는, 스쳐 지나가는 인연과 만남, 그들과의 관계에 의해 결정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게 나는 지금 여기 있다. 여기 이렇게. 일인칭 단수의 나로서 존재한다. 만약 한 번이라도 다른 방향을 선택했더라면 지금의 나는 여기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 거울에 비친 사람은 대체 누구일까? (p.224) 실제하는 '나'와 거울 속에 비춰진 나의 모습처럼, 그 모습은 나 자신이 아닌 처음 보는 다른 누군 가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그 모습 또한 나인 것을 우리는 안다. 이렇듯 하루키는 이 [일인칭 단수] 라는 작품을 통해 우리 모두는 일인칭 단수로 존재하지만, 우리가 알지 못하고, 기억하지 못하고,스쳐 지나가는 인연과 만남으로 우리는 또 다른 나로 존재할 수도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우리가 지금의 모습으로 존재할 수 있는 것은 다른 사람들과의 인연의 고리로 인해 가능하다. 타인과 인연을 어떻게 맺느냐에 따라 한 단계 발전하기도 하기도 하지만, 잘못된 인연으로 인해 서로에게 상처를 주기도 한다. 어찌되었든, 우리는 일인칭 단수인 개별적 존재이지만, 타인과의 인연과 만남에 의해 엮어진 상호의존적인 존재이기도 하다. 나라는 존재는 무수히 많은, 나 조차도 기억하지 못하는 인연에 의해 엮여지지만, 정작 나란 존재는 그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넘어가기도 한다. 일인칭 단수로 존재하는 인간의 인연과 운명, 삶에 대한 이야기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