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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32] 독립하려면 총을 들어라
"[15-32] 독립하려면 총을 들어라" 내용보기
항일 운동의 시작과 미국 유학   우성(又醒) 박용만(朴容萬, 1881~1928)은 1904년 보안회(保安會)의 일본의 황무지 개간권 요구 반대투쟁과 관련되어 옥살이를 하게 된다.  이때 감옥에서 그는 이승만(李承晩, 1875~1965)과 정순만(鄭淳萬, 1873~1928)을 만나 의형제가 된다. 어떻게 보면 기나긴 악연(惡緣)이 여기서 시작한 셈인데, 이는 테무진[鐵木眞, 1162~1227]과 쟈무카[札木合,
"[15-32] 독립하려면 총을 들어라" 내용보기

항일 운동의 시작과 미국 유학

 

우성(又醒) 박용만(朴容萬, 1881~1928)1904년 보안회(保安會)의 일본의 황무지 개간권 요구 반대투쟁과 관련되어 옥살이를 하게 된다.

 이때 감옥에서 그는 이승만(李承晩, 1875~1965)과 정순만(鄭淳萬, 1873~1928)을 만나 의형제가 된다. 어떻게 보면 기나긴 악연(惡緣)이 여기서 시작한 셈인데, 이는 테무진[鐵木眞, 1162~1227]과 쟈무카[札木合, 1158~1206]처럼 훗날 이승만과 박용만이 자신이 속한 무리의 지향점을 둘러싸고 갈등을 겪는, 영원한 정적(政敵)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후 그는 애국계몽운동으로는 국권회복에 한계가 있다는 것을 깨닫고 무장독립투쟁을 위해 미국으로 떠난다. 미국에서 그는 콜로라도(Colorado) () 덴버(Denver) ()에 정착하게 된다. 이는 덴버 시가 맨몸으로 이주해 온 한인(韓人)들이 정착하기에 여러 가지로 유리한 조건1)을 가지고 있었을 뿐 아니라, 당시 덴버의 공립고등학교에서는 군사교육을 실시하였고, 주립대학에서는 간부후보생(ROTC) 훈련과정을 의무화하였기 때문에 처음부터 군사학에 관심을 가졌던 박용만에게 덴버는 그가 꿈꾸는 이상을 펼칠 수 있는 기회의 땅2)”이었기 때문이었다.

 

 

무장투쟁의 근거지를 만들다.

 

1908년 장인환(張仁煥, 1876~1930)에 의해 대한제국의 외교고문으로 일제의 식민통치를 옹호하는 더럼 스티븐슨(Durham White Stevens, 1851~1908, 한국식 이름은 須知芬)을 저격된 일을 계기로 박용만은 해외애국동지대표자회의에서 둔전병제(屯田兵制)에 기초한 한인군사학교 설립안을 제출, 통과시켰다. 이는 “해외 한인단체의 통일기관을 조직한 후 이를 바탕으로 무관학교를 설립하고 독립군을 양성한 후, 독립전쟁을 전개하여 국권을 회복하려는 (박용만)의 의지가 첫 발을 내딛는 것을 의미한다.3)

 

그 해 12월에는 네브래스카 주정부(州政府) 등과의 교섭을 통해 인가를 받아냈다. 그 결과 1909네브래스카 주() 커니 시()한인소년병학교(The Young Korean Military School)을 열어 본격적인 군사훈련을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 게다가 1910년 선교정책의 일환으로 장로교 계통의 헤이스팅스 대학(Hastings College)에서 학교건물 한 채와 전장(田莊)을 제공하면서 보다 안정적으로 훗날 독립군의 간부가 될 인재를 양성할 수 있었다. 나아가 헤이스팅스 대학 이사회는 1911년에 한인학생에게 등록금의 50%를 면제[반값 등록금!]하기로 결의할 정도로 호의를 베풀었다.

 

하지만 그가 1912 12신한국보(新韓國報)>의 주필로 초빙되어 하와이로 떠난 후 후원자와 지도교사들이 다른 지역으로 이주하기 시작하면서 한인소년병학교가 위기에 몰리기 시작한다. 여기에 1914년 샌프란시스코 일본 총영사관의 항의로 헤이스팅스 대학의 원조가 끊기자 한인소년병학교는 사실상 폐쇄된다.

아마도 이것이 명망가(名望家) 중심의 독립운동이 가지는 한계가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이렇게 미국 중서부에 자리잡았던 무장투쟁의 근거지는 소멸했지만, 하와이로 건너간 박용만은 1913 1월에 지방자치규정을 제정하여 공포하고, 5월에는 하와이 지방정부로부터 대한인 국민회 하와이 지방총회(이하 ‘하와이 지방총회’)를 자치기관으로 인정받아 새로운 무장투쟁의 근거지를 마련하기 시작했다.

먼저 모든 회원에게 사실상 세금인 국민의무금 받아 재정을 충실히 하였고, 여기에 파인애플 농장의 도지권(賭地權)을 제공한 박종수 등의 후원을 바탕으로 대조선국민군단(大朝鮮國民軍團)과 대조선국민군단 사관학교를 창설하였다.

1919년에 수립된 상해 임시정부에 앞서 하와이에서 사실상의 임시정부를 수립한 것이다.

 

그러나 1915년 연합군의 일원이었던 일본의 항의로 특별경찰권이 취소됨으로써 하와이 한인사회의 자치권이 박탈되었고, 설상가상으로 파인애플의 흉작 등으로 재정이 악화된 상태에서 농장주마저 계약을 취소하자 결국 대조선국민군단(大朝鮮國民軍團)은 해체된다.

 

여기에 그가 하와이 정착을 도와준 의형제 이승만과의 대립은 또 하나의 타격이 되었다. 1914년 감리교단과 결별하고 독자적인 여자기숙사 신축을 꾀했으나 자금 조달에 곤란을 겪자 이승만은 하와이 지방총회에 원조를 요청한다. 이때 이승만이 본인 명의로 부지를 제공해줄 것을 요구했으나 이를 거절한 것이 갈등의 시작이었다. 이후 1915년 하와이 지방총회 총선거에서 박용만계의 김종학이 압도적 표차로 당첨되자, 개혁을 명분으로 사실상의 쿠데타를 통해 하와이 지방총회를 장악하여 사조직화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훗날의 비극을 예보하듯이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 중앙총회 부회장 취임식 참석차 샌프란시스코를 방문한 박용만을 “오진국(吳鎭國)이 구타한 후국민보를 하와이 지방총회로 환본할 것과 중앙총회 부회장직을 사임한다는 내용의 글을 쓰도록 강요하여 서명을 받아내는 사건이 발생하였다.4)

 

신변의 위협을 느껴서일까? 그는 하와이를 떠나 블라디보스토크로 건너가 군사조직을 결성하려고 했으나 일제의 탄압과 자금 부족으로 실패한다.

 

이에 굴하지 않고 박용만은 소련으로부터 필요한 자금을 후원 받고자 했다. 이를 위해 중로 연합선전부(中露 聯合宣傳部)의 부부장에 취임한다. 그는 “이동휘(李東輝, 1873~1935)의 한인공산당, 문창범(文昌範, 1870~1934)의 대한국민의회, 만주의 독립운동세력과 연계하여 베이징에 만주독립군총사령부를 설치할 계획을 세웠다. (왜냐하면) 군사통합 후 러시아와 극동공화국5), 그리고 코민테른의 지원을 얻어 독립군을 무장시켜 대일항전을 전개하려는 목적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동휘 그룹이 전한군사위원회와 대한의용군을, 문창범 그룹이 고려혁명군정의회와 고려혁명군을 편성하는 등 독자적으로 군대를 설립하고 러시아 적군과 연계하여 대일항전을 준비함으로써 박용만이 시도한 통일 군사조직은 실패하고 말았다.6)

여기에 1921 6월 발생한 ‘자유시참변’은 박용만에게 소련에 대한 불신과 배신감을 가지게 하여 지금까지 중국과 러시아-소련과 협력하여 국권을 회복하려는 입장을 바꾸게 된다.

 

이러한 방향전환의 일환으로 1925년에 하와이 주둔군사령부에 미국이 직예(直隸) 군벌 우페이푸[吳佩孚, 1874~1939]를 원조하여 일본의 지지하는, 봉천(奉天) 군벌 장쭤린[張作霖, 1875~1928]을 몰아내고 만주에 또 하나의 새로운 조선국을 세울 것을 제안했으나 거부되었다.

이에 박용만은 1926년 베이징[北京] 인근에 대본농간공사(大本農墾公司)를 설립하여 재정적 기반을 다지고, 1928년 중국 국민군과 협상하여 군사학교 부지를 확보하였으나 산시[山西] 군벌 옌시산[閻錫山, 1883~1960]에게 인허 받기 전에 그가 피살됨으로써 무산되었다.

 

 

변절 의혹을 받아 살해되다.

 

박용만은 1924년 국내에 밀입국하여 조선총독 사이토 마코토[齋藤 實] 혹은 그 측근과 만난 것으로 전해진다. 그의 측근들은 신천지(新天地) 구상의 일환으로 “러시아와 일본의 관계를 이용, 일본이 제공한 무기를 확보하여 무장투쟁을 일으키려 한 것7)”이라고 하지만, 이로 인해 변절 의혹을 받아 의열단원 이해명(李海鳴, 1896~1950)8)에게 제거되었다.

 

현재까지 그가 일본의 밀정이 되었다는 자료가 발견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오해로 동지에게 피살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가 자유시 참변 이후 소련에 대한 불신으로 중국과 일본의 지원을 받아 현재의 조선반도는 지역이 협애(狹隘)하여 도저히 완전한 독립국으로 만들기 부족하다. 구조선(舊朝鮮)의 영토였던 시베리아 및 만주, 몽고의 땅을 근거로 조선인을 여기에 이주시켜 발전을 촉구하여 이 지역을 사실상 동포의 영유로 귀속9)”하게 하여 독립운동기지를 조성하겠다는 무모한 구상을 한 것만은 분명하다. 따라서 누가 봐도 방공(防共)을 명목으로 제2의 만주국(滿洲國)을 세우자는 주장으로 볼 수 밖에 없기에 그러한 오해를 할 수 밖에 없던 것도 이해는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생 무장투쟁을 통한 독립에 헌신했던 사람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가 제대로 해명할 기회조차 주지 않고 총구를 들이밀었던 것은 너무나 성급한 일이었다.

만약, 그가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 1880~1936)와 함께 대표적인 반() 이승만, () 임정 노선의 인사가 아니었다면 그렇게 허무하게 세상을 떠나야 했을까? 그리고 그의 행적(行跡)이 그렇게 오랜 시간 먼지 속에 처박혀있었을까?

 

어쨌든 그의 죽음은 점점 거세지는 일제의 압력에 변절자들이 속출하고, 폭력을 이용해 정적(政敵)을 제거했던 시대적 상황이 빚은 비극이었다.



1) 탄광, 철도회사, 사탕무 농장에서 많은 노동력이 필요했고, /고교 등록금이 없고 주립대학의 등록금도 저렴했다고 한다.(김도훈, <미 대륙의 항일무장투쟁론자 박용만>, p. 30 참조)

2) 김도훈, <미 대륙의 항일무장투쟁론자 박용만>, (역사공간, 2010), p. 30

3) 김도훈, 앞의 책, p. 46

4) 김도훈, 앞의 책, p. 101

5) 극동 공화국(1920~1922)은 소련과 일본군의 시베리아 출병으로 발생한 일본의 점령지구 사이의 완충을 위해 존재했던 괴뢰정부다.

6) 김도훈, 앞의 책, pp. 124~126

7) 김도훈, 앞의 책, p. 160

8) 본명은 이구연(李龜淵)

9) 최영호, “문무를 겸비한 비운의 민족주의자”, <한국사 시민강좌> 47, (일조각, 2010), p. 132

w******f 2015.09.12. 신고 공감 1 댓글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