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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보다는 행동으로 성재(誠齋) 이동휘(李東輝, 1873~1935)처럼 대한제국의 군인이었던 예관(睨觀) 신규식(申圭植, 1880~1922)은 1907년 군대가 해산되자 국권회복의 길에 뛰어들었다. 대한협회(大韓協會)에 가입하여 애국계몽운동에도 참가했지만, 그는 정치적 활동보다 묵묵히 실력을 양성하기를 원했다. 그래서 공업발전에 기여할 목적으로 설립된 금융업종의 회사 황성광업주식회사(皇城廣業株式會社)의 설립에 관여하고 <공업계(工業界)>를 발간하여 공업의 필요성을 적극적으로 계몽하였다. 상하이[上海]에 조국 광복의 터를 닦다. 1910년 경술국치(庚戌國恥)를 전후로 국내 구국활동이 어려워지자 많은 이들이 만주와 연해주로 떠나갔다. 하지만, “그는 당시 중국이 처한 입장이 한국과 비슷한 상황이라는 판단하에서 중국의 공화주의적 혁명이 성공할 것이며, 그 결과 한국 독립해방도 영향을 받게 될 것이라는 확고한 믿음을 가슴에 새기고 중국혁명의 중심지 상하이로 망명하였다.1)” 그러나 신규식은 “당시 상해 거주 동포가 소수에 불과해 한인만의 힘으로 독립운동의 기반을 구축하는 것은 어렵다고 판단하였다. 따라서 그는 당시 혁명운동을 전개하던 중국지사들과 적극적 유대 및 협력체제를 마련하는 한편 한국 독립지사들을 상하이로 망명하도록 독려하는 방안을 강구하였다.2)” 먼저 중국측과의 적극적인 유대 및 협력체제를 구축하기 위해 쑨원[孫文, 1866~1925]이 이끄는 중국동맹회(中國同盟會)에 가입하여 쑹자오런[宋敎仁, 1882~1913], 천치메이[陳其美, 1878~1916] 등과 교분을 맺고 신해혁명(辛亥革命)에도 참여하였다. 동시에 1912년에 독립운동을 주도할 비밀결사인 동제사(同濟社)를 조직했는데, “실제로 어떻게 활동했는가는 자료부족으로 파악이 불가능한 실정3)”이라고 한다. 다만, 이 책의 저자는 “핵심인물인 백암(白巖) 박은식(朴殷植, 1859~1925),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 1880~1936), 조소앙(趙素昻, 1887~1958)등은 시민적 민족주의 사상, 대동(大同) 사상을 정치사상으로 하며, 국혼(國魂)을 중시하는 민족주의적 역사관과 대종교(大倧敎)의 국가적 신앙을 공통으로 가졌던 점으로 보아 동제사의 기본 이념과 독립운동 방략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4)”이라고 짐작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미래를 대비하여 1913년 상하이[上海]에 박달학원을 설립, 체계적인 교육을 통해 훗날 독립운동의 중추가 될 인재들을 양성하였다. 여기서 조선의 젊은 피들은 박은식, 신채호, 벽초(碧初) 홍명희(洪命憙, 1888~1968), 호암(湖巖) 문일평(文一平, 1888~1939), 조소앙 등 독립지사와 중국인 혁명가 농죽(農竹), 미국계 화교 마오따웨이[毛大衛]로부터 중국 및 구미 유학을 위한 예비교육을 받고, 신규식의 알선으로 중국 각 대학과 구미로 떠났다. 이러는 가운데 1917년 7월 “신규식은 조소앙을 비롯한 독립운동가들과 협의하여 세계 각처의 피압박민족의 독립이라는 해방의 움직임을 이용코자 ‘대동단결의 선언’을 작성, 주창5)”하여 통합적 독립운동을 지도할, 임시정부가 수립될 수 있는 이론적 기반을 제시하였다. 이처럼 상하이[上海]에 독립운동의 기반을 닦는데 주도적 역할을 하였지만, 정작 1919년 상해 임시정부가 출범할 때에는 그의 이름은 보이지 않았다. 그의 건강이 악화된 탓일까 아니면 다른 숨겨진 이유가 있는 것일까? 어쨌든 1919년 9월 우후죽순(雨後竹筍)처럼 난립(亂立)했던 임시정부들이 상해 임시정부로 통합된 후에는 법무총장 등을 역임하면서 상해 임시정부의 수호를 위해 노력했다. 동시에 “임시정부가 수립된 뒤에는 신규식이 앞장서 국교(國敎) 차원에서 (어천절(御天節, 음력 3월 15일)과 개천절(開天節, 음력 10월 3일) 등) 대종교 행사를 주도6)”하는 등 종교인으로서의 면모도 보였다는 점이 인상적이다. 임시정부가 수립된 것으로 독립운동의 문제점들이 다 해소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재정난, 운동노선의 이견, 외교활동의 침체 등 문제가 악화되고 있는 상황에 임시대통령 우남(雩南) 이승만(李承晩, 1875~1965)의 장기부재는 “1920년 5월 김립(金立, 1880~1922)을 비롯한 차장들이 의정원에 이승만 불신임안을 제출하는 사태7)까지 야기하였다. 결국 이승만은 정면돌파를 위해 상하이로 향했으나 사태를 수습하지 못하자, 신규식을 국무총리대리로 임명하고 외무총장도 겸임케 하여 뒷수습을 맡기고 떠났다. 이승만도, 도산(島山) 안창호(安昌浩, 1878~1938)도, 이동휘도 다 떠난 상해 임시정부를 존속시키기 위해 신규식은 필사적으로 노력하였다. 그 결과 1921년 쑨원[孫文]이 이끄는 호법 정부로부터 임정의 승인을 얻어낼 수 있었다. 그러나 상해 임시정부 개혁을 둘러싼 계파간의 극한대립이 지속되고 있고, “미국에서 오기로 약속된 독립운동자금도 오지 않고 또 지원해주기로 한 쑨원[孫文]의 광둥 호법정부도 중국 내의 혼란스러운 상황 - 첸정밍(陳炯明, 1878~1933)의 반란 - 이 생겨 어려워지자 신규식은 정신적으로 타격을 많이 입어 치료하여 살기보다는 스스로 목숨을 끊기로 작정8)”하여 불식(不食), 불어(不語), 불약(不藥)한 지 25일째인 1922년 9월 25일, 대동단결을 촉구하는 말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죽음이라는 극단적인 수단을 동원한 자기희생적 호소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정부에 의한 통합된 독립운동이라는 그의 꿈은 끝내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일생을 독립운동을 위해 헌신한 독립지사의 목숨만 앗아간, 독립운동사의 부끄러운 순간은 잊혀져 갔다. 그들의 피와 땀으로 오늘을 살고 있으면서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