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도전대학 문학과 강의>라는 표제가 붙어있는, 그가 당시로서는 ‘유일무이의 독학자수기관’임을 자부하고 있던 와세대대학의 통신강의록을 옥중에서 받아보았다. 이 통신강의는 정치경제과, 법률과, 문학과, 중학과, 상업과, 고등여학과의 5개 학과에 걸쳐 매회 1년 6개월 과정으로 제공된 것이었다. 윤세주는 그 중 문학과를 택하여 1923년 4월부터 1914년 9월까지 진행된 제34회분 강의록을 꾸준히 구독했던 것으로 보인다. 강의 과목 중에는 순전한 문학 분야만 아니라 사회학, 철학. 심리학, 윤리학, 문화사, 부인 문제 등 폭넓은 일반교양 수준의 인문학 및 사회과학 과목도 들어있었다. 그로부터 10년쯤 뒤에 그가 남경의 조선혁명간부학교 교관이 되어서 강의한 교과목 명과 이들 통신강의 교과목 명의 상관도가 높은 점에서도 그런 추리가 가능해진다. 51~52쪽 밀양청년회는 1927년 10월 23일의 제14회 정기총회에서 당시의 전국적인 추세처럼 회원 연령 문제가 제기되었다. 20세 이상, 30세 이내로 제한되는 기존 규정이 재확인 결의되었다. 이에 따라 김병환, 황상규, 윤치형을 포함한 30세 이상 임원진이 전원 사직했고, 윤세주는 남아아서 집행위원장이 되었다. 그러다 1928년 7월 20일에 개최된 제15회 정기총회에서 청년회 해체와 청년동맹 조직이 결의됨과 동시에, 회원 연령 상한이 27세로 더 낮아졌다. 이에 윤세주는 나이가 29세임을 들어 위원장직을 사임하고 신간회 지회 활동에 전념할 의사를 밝혔다. 그러자 7월 29일의 밀양청년동맹 창립대회에서는 회원의 연령 상항을 다시 30세로 높이고 윤세주를 위원장으로 재선출하였다. 이듬해 7월의 임시대회에서 회원의 연령 상한을 25세로 낮추기로 재결정되었다. 55~57쪽 1930년 11월에 서무부장 직에서 면임될 때까지 황상규는 신간회 해체론을 계속 공박하고 시종일관 반대 입장을 피력했다. 그래서 사회주의진영과 급진청년층 중심의 해소론자들로부터 맹렬한 공격을 받기도 했다. 결국은 그의 노력과 고심도 헛되이 중앙 신간회는 1931년 5월에 지체 결의로 해체소멸되었다. 그리고 그해 9월 2일, 1910대의 일합사에서 시작하여 광복단, 광복회와 길림군정서를 거쳐 의열단으로 이어진 항일투쟁의 용장, 그리고 신간회 운동 대오에서는 민족주의 자퐈의 맹장으로서 굳건히 자기 목소기를 내며 한몫 했던 황상규는 고디어 병등 육신을 더 지탱하지 못하고 마흔 둘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황상규의 별세는 신간회 밀양지회의 사실상의 소멸과 3.1운동에서 의열투쟁 세대까지의 운동일선 후퇴를 예고하였다. 만주사변 발발 직후인 1931년 10월부터 이듬해 7월까지 밀양에서는 검거 선풍이 휘몰아쳐서 합법적인 사회운동이 불가능해졌고, 운동은 전반적으로 침체해 갔다. 그런 소용될이를 뒤로 하고 윤세주는 1923년에 중국으로 망명길을 떠났다. 62~63쪽 스무 살을 갓 넘긴 나이에 학생운동과 여성운동의 맹장으로 부상하던 부산 동래의 박차정이 수차 피검되어 고문받던 1930년 2월 암행 탈출 78쪽 1932년 10월 25일 상해 동방여사에서 한국독립당, 조선혁명당, 한국광복동지회, 의열단, 한국혁명당 등 5개 단체 대표자가 모여서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을 결성하였다. 하지만 통일 동맹은 어디까지나 통일을 위한 조직이었지 통일을 이룬 조직은 아니었다. 통일전선 촉성을 위한매개조직에 지나지 않고 연합체 조직을 표방한 일종의 연락기관이었다. 실제로 통일됨은 여전히 미완의 과제였다 한국독립당의 김구 계열 인사들과 조소앙, 신항독립당의 재만 한국독ㄹ비당 출신들인 좌익단체요 반임시정부 집단인 의열단이 이 운동을 주도하고 있는 것이 영 못마땅하고 걱정스럽다는 입장이었다. 96~98쪽 석정은 당내 유수의 이론가요, 무적의 달변가이며, 설득의 귀재이고, 문필 편집에도 능수능란한 그야말로 숭배하지 않을 수 없는 거인이더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석정은 자칭 무명소졸 김학철의 우상이 되어갔고, 그으 일생 운명은 석정을 만나고 알게 됨에 의해 결정되었다 한다. 120쪽 무한은 무창과 한구 두 도시가 양가장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는 형상으로, 동방의 마드리드라고 별칭되는 아름다운 호반지구였다. 122쪽 중국의 쌍십절 축일인 10월 10일, 한중 양측 관계자와 예비대원 1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한구시 증산대도의 중화기독교청년회 한구회소 강당에서 의용대 창설 발대식이 거행되었다. 내빈 중 군사위원회 정치부 부부장 주은래가 동방 피압박미족의 해방투쟁에 관한 연설을 했고, 정치부 제3청장 곽말약은 축사를 낭송해주었다. 네덜란드 영화 감독 요리스 이벤스는 전 대원을 한 장에 담은 기념사진을 찍어주셨다. 현전하는 그 사진에서 석정은 입을 꾹 다물고 결의에 찬 표정으로 맨 앞줄 중앙에 의연히 서 있다. 129쪽 아무리 열심히 하고 잘 싸워본들, 중국군을 돕는다는 것밖에는 남는 게 없지 않느냐, 국민당 군대의 항일태세가 너무 느슨하고 싸워서 필승하겠다는 전의도많이 부족해 보인다. 150쪽 의용대의 화북행은 처음부터 태항산의 팔로군 근거지로 들어감을 목표로 한 것이었다. 153쪽 호가장 전투는 조선의용대가 북상 후 치른 최초의 대적전투였고, 가장 치열한 혈전의 하나였다. 김학철은 다리에 적탄을 맞고 쓰러져 피포되고 말았다. 169쪽 석정은 5월 25일 좌권이 전사한 후 최소 ㅏ루 이상 지난 뒤에 피격당하여 사망했다. 183쪽 묘 앞에 별 모양을 조각한 비석을 세웠는데, 미술에 조예가 있는 이용대원 장진광이 설계한 것이었다. 이 탑은 일본군이 섭현을 일시 점령했을 파괴해버렸으나, 1950년에 복원하여 다시 세웠다. 18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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