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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60] 도산 안창호는 어떤 사람이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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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교육자, 인격자, 기독교인 안창호가 강조되었을까?   “초기의 도산 연구들은 독립운동가보다는 교육자, 도덕가, 인격자, 독실한 기독교인 등으로 묘사한 경우가 많았다. 그의 독립운동 또한 점진적 실력양성론으로 평가하는 경우가 일반적이었다. 이는 (도산의 그림자처럼 활동한 동암(東岩) 차리석(車利錫, 1881~1945)의 <한국혁명영수 안창호선생사십년 혁명분투사략>, 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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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교육자, 인격자, 기독교인 안창호가 강조되었을까?

 

초기의 도산 연구들은 독립운동가보다는 교육자, 도덕가, 인격자, 독실한 기독교인 등으로 묘사한 경우가 많았다. 그의 독립운동 또한 점진적 실력양성론으로 평가하는 경우가 일반적이었다. 이는 (도산의 그림자처럼 활동한 동암(東岩) 차리석(車利錫, 1881~1945)의 <한국혁명영수 안창호선생사십년 혁명분투사략>, 즉) 분투사략>이나 당대 독립운동계의 평가와는 너무 달랐다.” [p. 23]

그렇다면 왜 도산(島山) 안창호(安昌浩)는 우리에게 교육자, 인격자, 독실한 기독교인의 측면이 강조되었을까?

 

이는 도산에 대한 초기 대표적 저술인 이광수(李光洙)의 <도산 안창호>와 주요한(朱耀翰)의 <안도산 전서> 등이 도산의 독립운동을 누락하고 왜곡했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두 가지 요소가 작용했다.

첫째, 이들이 도산의 독립운동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도산을 선생으로 모신다면서도, 이광수와 주요한은 일찍 독립운동계를 이탈해 도산을 배산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도산의 독립운동을 알 수 없었고 그 진실을 이해하지도 못했다.” [p. 24]

 

둘째, 친일로 변절한 자신들의 처지를 변명하기 위해서였다.

이광수의 <도산 안창호는 독립운동사에서 큰 획을 긋는 1926년 민족대당운동을 주창한 삼일당 연설을 누락한 채 흥사단운동을 도산이 전개한 독립운동의 본류인 것처럼 장식했다.” [p. 24]

왜냐하면 이광수 등의 자치론과 민족개조론은 도산의 민족유일당 운동 혹은 민족대당운동과 정반대의 가치를 지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바로 도산의 상해(上海) 삼일당(三一堂) 연설이다.

도산은 삼일당 연설에서 이광수 등의 자치론을 철저히 배격한 바 있다. 도산이 주창한 민족대당운동은 국내로 전달되어 1927년 신간회를 만드는 배경이 되었다. 이때 신간회는 이광수 등이 주장한 자치론에 반발하면서 비타협주의의 기치를 내걸었다.” [p. 24]

그러니 이광수와 주요한은 삼일당 연설을 누락시키고 그들이 가입했던 흥사단 운동을 강조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안창호의 진짜 모습은?

 

그렇다면 독립운동가로서 도산의 진정한 모습은 어떤 것일까?

 

먼저 교육자로서의 도산을 살펴보자.

젊은 시절 그는 교육자를 꿈꾸었다고 한다. 그런 의미에서 교육자 도산도 그의 일부임은 틀림없다. 물론 그것은암담한 조선의 현실을 깨쳐 나가기 위해 무엇보다 교육이 필요하다는 신념에서였다. 알아야 깨우치고, 깨우쳐야 나라와 민족이 산다는 철학” [p. 37]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이를 위해 그는 1899년 최초의 남녀공학이었던 점진학교(漸進學校)를 세웠다.

점진학교는 단순히 공부만 가르치지 않았다. 학교 인근의 하천 일대에 제방을 쌓고 침수지를 메워 농토를 개간하는 등 실습도 병행했다. 그것은 힘써 일해야 한다는 무실역행(務實力行)의 정신에서 비롯한 것이었다.” [p. 37]

이를 통해 남녀평등과 흥사단(興士團)의 기본정신이 되는 무실역행(務實力行)의 싹이 이미 이때부터 시작되었음을 엿볼 수 있다.

 

그리고 앞으로 큰 일을 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학문을 더욱 받아들일 필요가 있음을 깨닫고 1902년 미국으로 건너갔다. 하지만 그가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해서 본 것은 어렵게 생활하면서도 서로 다투는 동포들이었다. 이에 그는 학업을 뒤로 하고, 한인친목회를 결성해서 동포들의 생활개선을 꾀하고 노동주선소를 개설해서 직업 알선에 뛰어들었다. 그러다가 러일전쟁이 발발하고, 한일의정서가 강제 체결되면서 망국의 위기를 느낀도산이 일제에 대항할 강력한 정치단체로 결성한 것이 공립협회(共立協會)였다.” [p. 47]

이러한 “공립협회의 행동지침은 동족상애(同族相愛), 환난상부(患難相扶), 항일운동(抗日運動)” [p. 48] 이었다. 환난상부(患難相扶)나 근면과 성실을 통해 신용을 얻는 것이 무슨 독립운동이냐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이러한 노력은 후일 미주 한인사회가 100만 달러 이상을 독립운동자금으로 모을 수 있는 토대가 되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무시하고 넘어갈 일이 아니다). 흔히 독립운동의 재정을 간과하는 경우가 있는데, 독립운동에는 사람도 필요하지만 재정을 마련하는 것 또한 중요한 일이었다. 한국 독립운동의 역사에서 독립운동의 재정에 힘을 가장 많이 쏟은 이가 도산이었다. 그리고 미국 농장에서 일하는 한인들은 그 밀알이 되었던 것이다.” [p. 49]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도산은 대한제국의 신민(臣民)이 아닌 공화적 국민인 신민(新民)에 의한 나라를 세우기 위한 준비를 시작했다. 이를 위해 귀국해서 결성한 것이 비밀결사 신민회(新民會)였다. 뿐만 아니라 평양에 대성학교(大成學校)를 설립하고 후에 흥사단의 모태가 된 청년학우회(靑年學友會)를 조직하여 후일 독립운동을 이어받을 민족의 지도자 양성에 힘썼다. 이때 이미 도산은 광복, 즉 독립이 장기전이 될 것이라 예상하고, 이를 성공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그 배경이 될 민중의 실력 향상이 필요하다고 본 것이다. 점진학교 때부터 꾸준히 교육에 힘써 온 것은 바로 이를 위해서였다.

 

다음에 살펴볼 것은 독실한 기독교인으로서의 도산이다.

도산은 기독교의 비정치화, 정교분리정책에 적극 반대하면서 제도권 교회와 일정하게 거리를 두었다. 그는 국가와 민족의 정치현실이 어려워지는데 민족의 양심과 달리 기독교 선교에만 집중하던 선교정책을 비판하고 나선 것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도산은 선교사들의 공로를 인정하면서도 한국 사회에 우민정책을 사용하는 것에 강력히 비판했다. 또 부흥회적인 열정의 영성을 내세우며, 관념적이고 미신적인 ‘신령한’ 신앙체험을 강조하는 한국 기독교의 태도에 크게 반발했다.” [p. 59]

결국 그는 선교사들과의 마찰 끝에 기독교 신앙은 유지했지만, 제도권 교회에는 참가하지 않게 되었다. 그렇기에 그를 기독교인이라고 한 것은 맞지만, ‘독실한’ 기독교인이라고 해야 할 지는 다소 의문이다.

 

다음은 궁극적인 무장투쟁론자로서의 도산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도산을 실력양성론자로 알고 있다. 그리고 그 실력양성론자들의 대부분이 변절해서 친일파가 되었다. 하지만 도산의 주장은 독립전쟁을 위한 실력양성이라는 점에서 기존의 실력양성론과 다소 다르다. 심지어 1926년 삼일당 연설에서 “자치론 및 실력양성론은 시대착오적” [p. 131]이라고 비판하기까지 했다.

도산의 실력양성론은 1921년 임시정부에서 나온 뒤 행한 시국강연회에서 명확하게 드러난다.

독립운동의 성패를 가르는 기준은 민족세력의 통일에 달려 있다고 했다. 이를 위해서는 중앙기관으로 뜻을 모아 공론을 세운 다음 그것에 따르는 일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혁명은 결코 한두 명의 개인에 의해 이뤄질 수 없으며, 중앙의 대표기관으로 힘을 모아 각자 맡은 역할을 수행할 때 달성할 수 있다고 했다. 그런데 임시정부가 독립운동의 총지휘부 역할을 상실하고, 각 세력들이 자신들만의 입장만 강조한 나머지 서로 비난을 일삼는 행위는 잘못된 것이라 지적했다. 그리고 독립전쟁을 준비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군사훈련과 전쟁자금을 모아야 함을 강력하게 주장했다. 준비 없이 전쟁에 나가는 것을 독립전쟁을 모르고 하는 생각이며, 준비 없이 전쟁을 치르려 한다면 전쟁에 나가기도 전에 기아로 먼저 죽을 것이라 경고했다.” [pp. 121~122]

즉, 당장의 울분을 풀기 위해 국외 동포를 모아 독립군을 결성해서 즉각 국내 진공을 시도하면, 독립을 꾀하는 이가 있다는 것을 알리는 효과 이상을 거두지 못할 것임을 내다보았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신민회 시절부터 장기적인 독립군 양성을 위해 해외 독립운동기지와 무관학교를 설립해 독립전쟁의 토대 구축에 힘쓸 것을 주장하고 추진했었다.

 

의열투쟁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도산은 의열투쟁과 같은 과격한 방법은 피하거나 반대한 것으로 알려져 왔다. 그래서 온건론자로 불리기도 했다. 그러나 도산이 비판하거나 반대한 의열투쟁은 통일된 조직에 의한 군사적 작전이 아니라, 의기에 찬 소수의 인물들이 산발적으로 거행하는 경우를 지적한 것” [pp. 115~116]이라는 얘기는 의미심장하다. 이를 통해 보면, 도산은 난(亂)개발처럼 무계획적이고 산발적인 의거보다는 군사적 작전의 일환으로 의열투쟁을 진행하기를 원했던 것으로 보인다.

 

 

통합과 융합의 지도자

 

3.1. 운동 이후 도산은 상해[上海]로 가서 ‘독립운동의 방침’이라는 주제의 연설을 통해 임시정부의 방향을 제시했다. 이때 그는 광범위한 지역에 퍼져 있는 독립운동세력을 효율적으로 통합하기 위해 연해주의 이동휘, 미주의 이승만, 상해의 안창호를 영수로 하는 삼두(三頭) 정치를 제안했다. 이를 위해 임시정부의 실체를 가진 상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연해주의 대한국민의회의 통합을 이루었고, 대통령을 고집하며 상해 임시정부의 국무총리가 아닌 한성정부의 집정관 총재를 강조하던 이승만을 위해 한성정부의 조각(組閣)을 계승했다. 이렇게 어렵게 통합된 임시정부를 도산은 국무총리 직무대리의 자격으로 운영하기 시작했다. 이를 본  “한성정부에서 파견된 이규갑(李奎甲)이, “사실상 상해 임시 정부는 도산의 출현을 계기로 출범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도산이 미국에서 들어와 참가하기에 정부조직이 성립됐다”라는 회고” [p. 99]를 남길 정도였다.

 

하지만 임시정부 수립 당시부터 있던 균열은 결국 파열음을 내기 시작해서 사실상 무정부 상태가 되었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 도산은 1923년 상하이에서 국민대표회의(國民代表會議)를 열어 민족세력의 통합을 주도하고, 1926년에 흩어진 독립운동단체의 통합을 위해 민족대당(民族大黨) 운동을 주창했다. 하지만 민족유일당 운동이라고도 알려진 이 운동은 “독립운동계의 통합보다 이념과 주의를 앞세우는 성향이 짙어져” [p. 137] 가면서 쇠퇴하기 시작했다.

 

이후 그는 독립운동의 통합을 지향하는 대공주의(大公主義)를 제시했다. 하지만 도산은 대공주의를 내세우지 않았다. 왜냐하면 ‘주의(主義)’를 통합하자면서 또 다른 주의(主義)를 주장하는 것으로 비춰질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즉, 도산에게 민족의 독립은 절대선이었고, 그는 이를 위해서 종교와 사상도 초월해서 독립운동 세력들을 통합하려는 의지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도산은 통합과 융합의 지도자라고 할 수 있으며, 곳곳에서 갈등과 분열이 판을 치는 한국 사회에 필요한 리더가 아닐까 생각한다.

w******f 2021.11.14. 신고 공감 14 댓글 4